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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새 언약의 일꾼 』(김현정)
나균용 목사님
선지자란 누구인가 17째 시간입니다.
오늘 본문은 성경 고린도 후서 3장 6절 말씀
“ 그가 또한 우리를 새 언약의 일꾼 되기에 만족하게 하셨으니 율법 조문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영으로 함이니 율법 조문은 죽이는 것이요 영은 살리는 것이니라”
우리를 새 언약의 일꾼으로 만드셨다는데, 새 언약의 일꾼이란 무슨 말씀인가?
새 언약의 일꾼이라고 하는 말은 구약의 일꾼이 아니고 신약의 일꾼이라는 말이다. 세례 요한이 등장함으로부터 새로운 시대가 시작되었다. 곧 메시아가 나타나신 이 시대가 신약 시대입니다. 메시아가 오셔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므로 우리의 죄를 대속하시는 이 거룩한 역사를 이루시고 오늘날 예수님을 섬기는 사람들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 대속 구원을 믿어 가지고, 하나님께서 구원받게 만드시는 이런 일을 한다는 것이죠. 구약은 모세를 통해 율법을 내려주셨고 요한복음 1장 14절과 17절에 있는 말씀 그대로예요.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통해서 율법을 내려주셨는데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는 은혜와 진리를 내려 주셨다. 그래서 우리는 율법의 시대에 사는 게 아니고 은혜와 진리의 시대에 사는 것이다. 예수님이 친히 말씀하시기를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려고 온 것이 아니고 완전케 하려고 왔다 말씀하셨는데 완전케 한다는 게 뭐냐? 이것이 복음으로 완전케 되는 거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으로 말미암아서 완전케 만드시는 거고, 이 놀라우신 새 역사를 우리에게 이루어 주신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신약의 일꾼은 구체적으로 어떤 사람들이냐 이거를 고린도전후서 4:1 “그러므로, 우리가 이 직분을 받아 긍휼하심을 입은 대로 낙심하지 아니하고” 이 직분을 받았다. 첫째는 긍휼하심을 입은 자다. 사도바울은 우겨 싸움을 당하여도 우리가 넘어지지 않는다. 우리가 어떤 고난을 당할지라도 낙심하지 않는다. 이 세상에 많은 사람들이 인생 살다가 어려움을 당하면 자살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어요. 그러나 긍휼함을 입은 사람들은 일어선다는 것이다.
둘째는 2절에 “이에 숨은 부끄러움의 일을 버리고” 이렇게 설명을 했어요.
사람마다 숨은 부끄러운 일들이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쉽게 얘기하면은 드러난 죄가 있고 드러나지 않은 죄가 있어요. 또 남들이 아는 죄가 있고 남들이 모르는 죄 곧 나만 혼자 알고 있는 죄가 있단 말이죠. 그런데 여기에서 말씀하고 있는 거는 남들이 아는 죄를 얘기하는 게 아닙니다. 숨은 부끄러운 일이다. 이건 내가 스스로가 알아요. 그래서 이건 내 양심의 관계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 양심의 찔림을 받고 양심의 가책을 받으면 하나님 앞에 이것을 내놓고 철저히 회개함으로 이 숨어있는 부끄러움의 일들을 다 처리를 해야 된다. 말이죠. 그렇게 하고 살면 세상을 밝게 살아갈 수 있잖아요. 당당하게 살아가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 내가 너희를 용서하였다고 선포해 주시면, 내 속에서 이 숨은 부끄러움의 일 이걸로 인해서 괴로워하고 양심의 찔림을 받던 것들이 다 해결을 받고 마음이 밝아진다는 것이다. 누가 나를 정죄하겠느냐 우리는 이런 믿음을 가지고서 당당하게 삽니다. 이미 용서를 받고 나면 그것으로 인해서 내가 양심에 찔러서 무슨 일을 하지 못하고 이렇게 주춤거리고 회피하고 도망가고 이렇게 되지는 않는다고 하는 거죠.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은 숨은 부끄러움의 일을 벌인 사람이다. 여러분들 양심에 눈꼽만큼이라도 찔리는 것이 있으면 하나님 앞에 회개를 하고 다 용서받고 그래서 새 출발을 하는 사람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셋째로는 또 뭐냐 게으름 가운데 행하지 아니하고, 속임으로 행하지 아니하며 이렇게 말하잖아요. 그러니깐 남 속이는 짓 하지 말자 경쟁을 한다는 게 사실은 참 좋기도 하면서 또 안 좋을 때도 있어요. 상품도 경쟁을 해야지 소비자들이 우선 좋아요. 그럼 가격 경쟁을 해서 가격도 낮출 수 있고 품질 경쟁을 해서 품질도 더 좋은 것을 만들어낼 수가 있고 그런데 이런 자유로운 경쟁이 없는 공산주의 사회 이런 복제 체대 사회에서는 경쟁이 없기 때문에 좋은 품질의 것이 나오지 못하고요. 값이 가족 경쟁에 있어서 좋은 가격을 우리가 기대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 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게으름 가운데 행하지 아니한다. 남을 속이지 않고 이렇게 살아가야 되겠다는 것이죠.
넷째로는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아니한다.
혼잡하게 하는 게 뭡니까? 말씀이 혼잡하다고 하는 것은 무슨 얘기냐 _ 순수한 하나님의 말씀만 있어야 하는데, 여기다가 다른 것들을 막 섞어 넣어 가지고 뒤죽박죽을 만들어 낸다는 얘기예요. 그렇게 되면 이게 혼잡한 겁니다. 그래서 특별히 누구에게 이 말씀을 하는 거예요. 설교한다고 하면서 하나님 말씀 전한다고 하면서 인간의 생각을 놓고 목사가 자기 개인의 생각을 집어넣고 이렇게 해서 막 하면 듣는 사람은 그게 편할지 몰라요. 그게 그럴 듯하고 귀에 달콤하게 들릴지 몰라요. 그래서 말세에는 디모데후서 4장 3절 4절에 그렇게 말씀하잖아요. 말세에 때가 이르리니 어떤 때가 되느냐 사람들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고 귀가 가려워서 자기 사욕을, 말을 그런 스승들을 많이 두고 자기 귀를 진리로부터 돌이켜 가지고 허탄한 이야기를 따라가게 될 것이다. 이게 말세의 현상입니다.
다섯째로는 오직 진리를 나타내므로 하나님 앞에서 각 사람의 양심에 대하여 스스로 천부하노라 이렇게 말씀을 합니다. 자 진리를 나타내는 사람이 되어야 하겠다. 우리가 정말 사모해야 할 것이 진리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요한복음 8장에서 말씀하셨어요. 내가 너희에게 진리를 전함으로 너희가 나를 죽이려고 하는구나!! 얼마나 이게 끔찍한 말씀입니까?
44절 하 반절에는 마귀에 대해서 설명하는데 마귀는 처음부터 욕심쟁이요. 그다음에 살인자요 셋째로는 거짓말쟁이요. 이렇게 해서 속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이 탄식하세요. 내가 너희에게 진리를 말하는데 왜 믿지 아니하느냐... 예나 이제나 진리를 말하면 사람들은 안 듣고 안 믿습니다. 진리를 말하면 진리를 말하는 사람을 죽이려고 합니다. 이것이 악한 세상의 모습인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도 똑같아요.
이제 새 언약이란 무엇인가 하는 것을 잠깐 생각해 봐야 하겠습니다.
성경에 새 언약이라고 하는 말이 몇 차례 나옵니다. 예레미야 31장 31절에도 나오고요. 이렇게 에스겔 38장에도 나오고 이렇게 새 언약을 주신다고 하는 말씀이 나오는데 이것을 잘 설명하고 있는 게 신약성경에서는 히브리서입니다. 히브리서 8장에서 10절 보면
이 새 언약이라고 하는 것은 두 개의 기둥으로 되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죽으시므로 우리의 죄를 용서해 내시고 우리를 구원해 내시는 이런 역사 이것이 첫째, 기둥이고요. 둘째, 기둥은 예수님이 부활하시고 승천하셔서 하나님께 올라가셨다가 거기로부터 성령을 우리에게 부어 주셔가지고, 성령에 능력으로 강하게 만드시고 그래서 마귀와 싸워서 이기게 만드시고 참과 거짓을 분별해 낼 수 있게 하시고 하나님의 말씀을 능력 있게 지혜롭게 전파할 수 있게 하시고 이 놀라우신 구원의 세 역사를 일으켜 주시는데 이 세언약이 이렇게 두 개의 기둥으로 되어 있다. 이것을 잘 기억하셔야지 하겠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에는 야긴과 보아스 두 기둥이 있었어요. 이 두 기둥이 있어 가지고 성전을 떠받치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도 이렇게 두 개의 기둥으로 되어 있다.
복음이란 무엇이냐 이게 새 언약인데 두 기둥으로 되어 있다. 두 기둥을 세워 나가야 합니다. 한 기둥만 가지고는 안 돼요. 그래서 우리가 설교를 할 때에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있어야 되고 성령의 나타남이 있어야 되고 이 두 가지가 확고하게 서 있으면 그것은 좋은 설교 그리고 이 두 기둥이 서 있는 사람이 좋은 믿음의 사람입니다. 그런데 두 기둥이 서 있지 않으면 잘못된 설교입니다. 두 기둥이 서 있지 않은 신자라면 그것은 거짓된 신자입니다.
자 두 기둥이 세워져 있는 것을 제가 몇 군데에서 여러분들에게 소개를 해드리려고 합니다. 첫째는 사도의 자격입니다. 가룟유다가 예수님을 배반하고 물러났기 때문에 열한 제자만 남았습니다. 그래서 베드로가 사도행전 1장이죠. 오순절 성령이 강림하시기 전에 먼저 이 결원이 된 한 사람, 이 자리에 다른 사도를 채우자! 그래서 열두 제자가 채워져야 되겠다. 그래서 마띠아라고 하는 사람을 채우지 않습니까? 그런데 여기에 새롭게 채워져야 될 사도의 기본적인 자격이 무엇이냐? _ 예수님께서 복음을 전하시기를 시작하실 때로부터 시작해서 지금까지 우리와 항상 같이 있었던 사람들과 가운데서 한 사람을 뽑아서 채우자 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 자격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하를 전파할 사람이라야 하겠다.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행전 1장 8절 내 증인이 되라고 하셨는데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 조금 더 자세히 얘기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증인이 되어야 한다고 하는 거죠.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여인을 만나셨을 때에 말씀하셨어요. 하나님께서는 어떤 예배를 찾으신다고 우리 개역 성경은 신령과 진정으로라고 그랬는데 우리 개정판 성경에서는 영과 진리로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근데 사실은 영과 진리라는 말도 잘못된 번역이에요. 성령과 진리로 이렇게 이해를 해야죠 그래서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는 예배는 어떤 예배냐 우리가 첫째, 성령으로 드리는 예배를 드려야 된다. 둘째, 진리로 하는 예배를 해야 한다. 성령으로 이게 두 번째 기둥이죠. 진리는 무엇입니까? 십자가의 도가 진리예요. 마지막 때 싸구려 구원론 가르치는 자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우리 사람의 귀를 즐겁게 해주기 위해서 후원을 막 싸구려로 팔아먹는 인간들이 있고요. 성령 안 받아도 된다. 심지어 나는 그렇게 주장하는 목사 설교 쓴 거를 보기도 했어요. 지금은 성령 안 받아도 된다. 그러면서 하는 이야기가 만약에 예수님이 계실 때에 열두 사도들 중에 누구 하나가 죽었다면 그 사람은 구원을 받았겠느냐 못 받았겠느냐 이런 소리를 해가면서, 예수님 믿었으니까 구원받는다. 해가면서 아주 열변을 토하면서 얘기를 하는데 이게 다 마귀들이 우리 마지막 때에 우리를 속여서 지옥으로 끌고 가려고 하는 술수인 것입니다. 이런 마귀의 유혹에 넘어가지 말고 우리가 정신을 바짝 차리고 믿음에 에 서서 하나님 앞에 충성하는 일꾼들이 되어야지 하겠습니다. 여러분들에게 이 놀라운 은혜가 더욱 충만하게 임하시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정리하면서 받은 소감 문 : 예루살렘을 받치고 있는 두 기둥처럼, 우리 신앙에도 두 기둥이 필요하다는 말씀이 와 닿았습니다. 기도만 충만해도 안 되고, 말씀만 잘 알아서도 안 되는, 말씀과 성령으로 거듭난 자가 되어야 한다는 말씀을 마음에 받습니다.
이 시대의 새 언약의 일꾼으로 우리를 부르셨는데 주님 안에서 게으르지 않고 부지런함으로 순종과 충성으로 세우신 자리에서 맡은 사역 감당하는 것이 참 중요하다는 생각도 다시 해보게 되었습니다. 모든 것이 결국 하나님의 은혜요, 감사임을 고백할 수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목사님을 만나게 하신 하나님께 또한 감사드리며 짤막하게 나누었습니다.
22. 『 산 위와 산 아래 』
나균용 목사님
오늘 말씀은 마가복음 9장 20절에서 29절이 본문인데요.
마태복음은 17장, 마가복음은 9장, 누가복음도 9장에 나오는 그 유명한 변화산에서의 예수님의 모습과 또 변화산에서 내려와 보셨더니, 아래에 남아 있던 아홉 제자들에게 아버지가 자기 아들 간질 병자를 데리고 와서 고쳐달라고 했는데 이 9명의 제자들이 고치려고 그를 위해서 기도를 해주고 열심히 했지만, 도무지 고치지를 못하고 귀신을 쫓아내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이 내려오셔서 그 귀신을 쫓아내고 이 아이를 깨끗하게 아주 말짱하게 이렇게 고쳐내셨다 하는 이런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말씀의 제목은 산 위와 산 아래입니다.
산 위에는 무엇이 있고 산 아래에는 무엇이 없느냐? 또 산 위에는 무엇이 없고 산 아래에는 무엇이 있느냐? 이런 말씀이 주제가 되겠습니다. 산 위와 산 아래에 대한 이야기는 우리 신약성경에는 이렇게 변화산 이야기가 나와요. 그리고 또 하나는 갈보리 예수님의 십자가가 있는 그 갈보리에 일반적으로는 산이라기보다도 그냥 동산이다. 이렇게 하지만 여기에 산 위와 산 아래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런가 하면 구약성경에는 노화의 방주가 산 위에 가 머물렀더라. 그래서 노아의 방주는 산 위에 머물러 구원받았고 산 아래에 있던 사람들은 전부 홍수로 말미암아 물에 다 빠져서 죽어버리고 멸망했다. 이것이 노아의 시대의 산 위와 산 아래의 이야기입니다.
모세 때에는 산 위와 산 아래의 이야기가 여러 차례 나오지만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산 위로 불러 올리셔 가지고 하나님의 계명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산 아래에서는 무슨 일이 있었느냐? 아론을 중심으로 40일이 오래도록 내려오지 않는 모세가 혹시 죽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니까 우리가 우리를 인도한 신을 만들어 가지고 신을 섬기자 이래 가지고 금송아지를 만들고 금송아지 앞에 분향하고 제사를 드리는 끔찍한 짓을 했습니다. 이런 일이 있었어요. 뿐만 아니라 엘리아의 경우도 마찬가지예요. 엘리아는 갈멜산 꼭대기에서 바알의 선지자들하고 대립을 하죠. 여호와만이 참 하나님이시다 하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주신다.
자 이런 일들이 구약에 많이 나타나요?
그래서 오늘 우리는 이 산 위에서 일어나는 일과 산 아래에서 일어나는 일 이 두 가지를 비교해 보면서 우리가 어디에서 사는 사람들이 되어야 할 것인가?를 새롭게 깨닫고, 마지막 남은 때 대환난이 시작되고 온 세상 사람들이 다 죽겠다고 아비규환 속에 살아가는 이때에 정말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새로운 일꾼들이 되고 그래서 산 위에 있는 아름다운 성도들 되는 이런 복을 받으시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그러면 산 위에는 무엇이 있었느냐 예수님의 변화선 사건을 통해서 우리가 보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이 산 아래에 계실 때에는 평범한 우리들처럼 보이셨어요. 그리고 예수님은 원래 목수 출신이었다. 목수의 집안에서 태어나셔서 목수로 사시는 것 같이 별 볼일 없는 사람처럼 보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변화산 위에 올라가시자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예수님이 변형되셨습니다. 예수님이 입고 있던 옷까지도 변했습니다. 이렇게 놀라운 변화가 일어나는 가운데 또 무슨 일이 생겼습니까? 모세와 엘리아가 나타났어요. 하나님의 음성이 하늘에서 들리고 모세와 엘리아가 예수님과 서로 이야기하는 것을 제자들이 들었는데 무슨 얘기를 했습니까? 장차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셔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실 것이고.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시게 된다고 하는 이 엄청난 비밀 이야기를 이렇게 나누고 있었어요. 이것이 아주 중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이 산 위에는 무엇이 있는가? 한마디로 얘기하면 산 위에는 신비가 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되 가장 중요한 거는 이 신비를 체험하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처음에 사역을 시작하실 때에 많은 병자를 고치시지 않았어요. 귀신을 쫓아내고 소경의 눈을 뜨게 하고 앉은뱅이를 일으키고 그리고 이렇게 죽은 자를 살려내시고 이런 역사를 일으키시면서 복음이 가난한 자들에게 전파되는 이런 놀라운 일을 이루셨어요. 그런데 이런 것들이 전부 신비죠? 하늘의 신비입니다. 그래서 우리 신앙이 바르게 되려면 가장 기본적인 게 이 신비를 체험하는 거다 기적을 체험하는 거다 이것입니다.
하나님이 모세에게 역사하실 때도 마찬가지, 애굽 땅에 열 가지 재앙을 막 쏟아붓는 거였어요. 그리고 마지막 열째 재앙이 피를 가지고 그래서 문설주와 인방에 발라놓은 이스라엘 집에는 재앙이 들어오지 못하고 이 피가 없는 애굽 사람들의 집에는 재앙이 들어가서 장자들이 다 죽임을 당하고 말았다. 드디어 이스라엘이 애굽에서부터 해방되어 나올 때에 그들은 홍해를 건너는 것도 하나님께서 또 엄청난 기적을 보여주셨습니다. 홍해가 갈라졌어요. 얼마나 엄청난 일입니까? 그래서 우리 신앙생활의 출발은 바로 이 신비에서부터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동성애자들도 OK하고 동성애자들도 다 구원받는다. 이따위 헛소리나 가르치고
그래서 동성애자들의 인권을 보호해야 한다. 그래가지고 오히려 바르게 살아가는 사람들을 박해하고 바른 말 가르치는 사람들을 핍박하는... 이런 못된 짓들이 이 땅에 지금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어두움, 이런 멸망의 길로 가는 세상 속에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참 믿음을 가져야 되는데 가장 중요한 것이 신비체험을 가지면서 하나님의 기적을 체험하면서 신앙생활을 해야 되겠다 하는 것입니다.
변화산 위에 어떤 신비가 나타났느냐 중요하게 세 가지입니다.
첫째는 하나님의 이름이 무엇인가 우리가 알던 예수님이 누구신가 하는 것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계시하시는 거죠. 이걸 가르쳐 주시는 거예요. 예수님이 사실은 누구였어요? 예수님이 하나님이시다 하는 것이에요. 구약에서 보면 하나님의 이름이 무엇입니까? 하고 물었던 세 사람들이 나타나는데 처음에는 야곱 다음에는 사사 삼손의 아버지 마누아 그리고 셋째로는 모세 이렇게 나타나는데 하나님께서 야곱에게는 대답을 안 해주셨어요. 하나님께서 당신의 이름을 기묘하다고 그랬어요. 신비하다고 하신 겁니다. 가르쳐줘도 너는 알지 못하고 깨닫지 못한다. 그랬었는데 신약에 와서 변화산 위에서 이제 보잖아요.
이분이 바로 예수님이신데, 예수님이 하나님이시더라 그러니까 하나님의 이름은 예수라고 하는 거예요. 이 놀라운 신비를 첫째로, 해석해 주신 거죠.
사도 바울은 예수님을 가리켜서 하나님의 비밀이라고 그랬어요. 그러니까 이 세상 사람들은 하나님의 비밀이 뭔지를 모릅니다. 하나님의 신비, 이것이 언제 깨달아지게 하느냐 언제 나타나 주셨느냐? 이것이 변화산 위에서 나타났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렇게 변화산 위에 올라가는 이런 신앙을 가질 때에 드디어 예수님이 누구신지 확실하게 알 수 있게 된다고 하는 거예요.
둘째로는 어떤 신비냐? 거기에 모세와 엘리아가 나타났어요. 모세와 엘리아가 대관절 누구냐!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서 율법을 주셨어요. 예수님이 말씀하셨죠.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완전케 하려고 왔다. 그래서 모세는 율법이고 엘리야는 선지자의 대표고 그래서 선지자예요. 그래서 이 두 분을 완성시킨 것이 바로 예수님이시다.
오늘날도 많은 사람들이 교회 다니고 성경을 읽는다고 하지만 성경을 읽긴 읽어도 이 오묘함과 신비함을 깨닫지 못해요. 아담과 하와가 에덴동산에 있었다. 이거를 오늘날 목사들까지도 안 믿는 자들이 얼마나 많은지 몰라요. 아담의 타락이고 인류의 타락이고 그래서 세상의 죄가 오고 사망이 오고 그래서 우리도 죽을 수밖에 없고 나중에 우리가 하나님 앞에 심판받을 수밖에 없다 하는 이것도 오늘날 목사라고 하는 자들부터 안 믿는 자들이 너무나 많다고 하는 거예요. 그런 속에서 예수님께서 변화산에 올라가셨을 때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났다. 그것은 율법과 선지자 율법과 선지서 다시 말해서 이 두 책은 곧 성경입니다. 성경의 성취 이것이 변화산 위에서 이루어졌다 그래서 우리의 신앙도 이렇게 변화산 위에 올라가는 신앙을 가지게 되면 드디어 하나님의 말씀이 깨달아지는 거죠. 율법이 깨달아지고 선지서가 깨달아지고 율법과 선지자를 존경할 수 있는 사람들이 되어 지고 그래서 높은 곳에서 하는 이런 신앙생활을 할 수가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게 안 되면 우리 신앙생활은 이 낮은 차원의 신앙생활 이 산 아래에 있는 신앙생활이 될 수밖에 없는 거예요.
셋째로는 또 무엇이 있었느냐? 산 위에서는 세 분이 모여 가지고 이야기하는데 무슨 얘기입니까? 예수님이 장차 예루살렘에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실 것을 얘기했어요. 뿐만 아니라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실 것을 또 얘기했어요. 이것은 십자가와 부활 이것이 바로 복음이잖아요. 십자가와 부활 이것이 하나님 말씀의 핵심입니다. 이것은 또 다른 말로 말해서 이것이 바로 진리라 하는 거죠. 이 진리를 깨닫게 되는 것은 산 위에 올라가야지 우리 믿음이 산 위에 올라가는 신앙이 될 때 드디어 이 하나님의 진리가 깨달아지고 진리의 세계가 열려진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반대로 산 아래에는 무엇이 없느냐 이 세 가지가 없는 거예요.
예수님이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알지 못해요. 이 지식이 없어요.
둘째는 또 뭐가 없어요. 성경이 없죠. 성경이 없습니다. 율법과 선지서가 없어요.
셋째로는 또 뭐가 없어요. 이 땅에는 진리가 없습니다. 무슨 진리예요. 십자가와 부활이 진리
예수님이 그리스도라고 하는 표적을 보여 달라고 했을 때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어요.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는구나! 그러니까 이 세상은 악하고 음란한 세대라는 거예요.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이라고 하는 이 표적을 갖지 못하면 인간에게는 진리가 없는 거예요. 표적이 없는 거예요. 하나님 살아 계시다는 걸 모르는 거예요. 하나님이 우리를 통치하신다는 걸 모르는 거예요. 하나님이 생사화복을 주관하시고 계신다는 거를 모르는 겁니다. 천국이 있고 지옥이 있다. 하나님의 심판이 있다. 전부 모르고 사는 거예요.
오늘 그리스도인들도 정말 부활을 바라보는 사람이라면 생명의 부활을 받기를 원한다면,
기쁜 마음으로 십자가를 달게 지고 주인과 함께 고난을 받는 이런 사람들이 되어야지만 하는 것입니다. 산 아래에는 이 세 가지가 없다는 것을 한마디로 줄이면 하나님의 신비가 없다.
그래서 인간들은 육신의 눈에 보이는 것만 찾아요. 인생의 네 가지 고통 생로병사 이 네 가지를 말했잖아요. 태어나는 것도 고생이고 늙는 것도 고통이고 병드는 것도 고통이고 죽는 것도 고통이고 왜 우리 인간에게는 이런 고통이 있는가 하나님께 감사하고 찬양하고 믿음으로 나아가는 그런 생활이 세상에는 없어요.
왜 우리는 귀신을 쫓아내지 못했습니까? 예수님의 대답은 두 가지예요.
너희 믿음이 작은 연고다. 둘째는 너희가 기도하지 아니하면 이런 유가 나갈 수가 없느니라 마태복음은 17장에 있는데, 21절에 거기 없음 그랬지만 이 킹제임스 성경에는 21절이 있어요. 금식과 기도가 아니면 이런류가 나갈 수가 없느니라 그래서 우리 성도들이 어떻게 살아야 되느냐? 금식하며 기도하자. 금식하며 기도해서 능력 받자. 능력 받아서 산 위의 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되어야겠다. 하나님의 신비를 체험하면서 살아가자 세상에 속해서 세상 사람들 따라가지 말고 하늘에 속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 영광스러운 모습을 늘 체험하면서 우리가 주님과 동행하는 아름다운 삶을 살아가야 되겠다 하는 것입니다. 이런 은혜가 여러분들에게 충만하길 축원합니다.
개인 소감 문 : 산위와 산 아래!! 오늘 말씀을 요약하면서 구약과 신약을 관통하면서 바라보는 안목을 키워가게 되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땅에 하나도 떨어지지 않고 다 이루어지게 하시려고 예수님께서 오셔서 십자가 지시고 우리를 대속해 주시고 또한 부활승천하셔서 오늘도 우리를 중보하고 계시는 건데... 그동안 성경을 보는 안목이 너무 좁았다는 생각도 듭니다. 말세의 지말을 살아가는 이때, 깨어있지 않으면 믿음이 작은 자가 되어 예수님을 배반한 가룟유다와 같이 될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며 깨어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감사합니다.
23 『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는 자여! 』
오늘 말씀은 이사야서 40장 9절 말씀입니다.
이사야 40장 9절 아름다운 소식을 시온에 전하는 자여 너는 높은 산에 오르라 아름다운 소식을 예루살렘에 전하는 자여 너는 힘써 소리를 높이라 두려워하지 말고 소리를 높여 유다의 성읍들에게 이르기를 너희의 하나님을 보라 하라
아멘! 이 말씀입니다.
오늘은 선지자란 누구인가의 19번째 시간입니다. 선지자란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는 사람입니다. 세상에 수없이 많은 소식이 이렇게 들려오고 있지만, 그 소식들을 보면 대개 아름다운 소식은 찾아보기가 어렵고 나쁜 소식들이 너무도 많습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아름다운 소식이라고 하는 거는 그냥 도덕적으로 착한 일, 좋은 일했다 하는 것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고 이 아름다운 소식은 천국소식을 알려주는 것이고, 우리의 구원을 가르쳐주는 소식이고 죄악 많은 세상에서 어떻게 하면 이겨나갈 수 있느냐 하는 그런 소식을 말하는 것이다. 이것을 신약에 오면은 복된 소식이다. 그래서 우리는 복음이다~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아름다운 소식, 이 말씀을 보면서 첫째,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는 사람은 누구인가 하는 거를 살펴보고요. 둘째, 이 아름다운 소식을 누구에게 전할까 하는 것이고, 셋째로는 어떻게 하면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는 사람이 될 수가 있겠는가? 이 세 가지 중요한 것을 우리가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그러면서 큰 은혜를 받아야 하겠습니다.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는 사람은 누구인가? 어떤 사람입니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는 사람이란 _ 하나님의 선지자들을 말합니다. 아름다우신 분이 보내주신 선지자들, 아름다우신 그분을 전파하는 그러한 선지자들, 이런 사람들을 가리켜서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는 자다~ 이렇게 말씀을 하는 거죠. 아름다우신 분은 오직 한 분 하나님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는 사람이란 아름다우신 하나님을 전하는 사람이다. 이렇게 첫째로 해석할 수 있고요.
또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는 사람은 누구냐
아름다우신 하나님을 마음에 모시고 살아가는 사람, 하나님을 마음에 모시고 살기 때문에 항상 기쁨이 넘치고 감사가 넘치고, 인생을 행복하게 살아가면서 하나님께 감사드리면서 살아가고, 세상에서 부정적으로 살지 아니하고 긍정적으로 살고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는 이런 사람을 가리켜서 우리가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신약에 와서는 이 아름다운 소식이라는 말을 복음이다, 복된 소식이다, 이렇게 말씀하죠. 영어로 굳 뉴스, 아름다운 소식, 좋은 소식, 예수님이 탄생하셨을 때 천사가 와서 그렇게 외쳤어요.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천하노라” 예수님이 탄생하신 그 소식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에 좋은 소식이었습니다. 그래서 이것을 복음이라고 우리가 말씀하는 것입니다.
복음은 요약하면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 임마누엘이라는 말이에요. 전능하신 하나님, 아름다우신 하나님, 영원하신 하나님, 영광스러우신 그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 이것이 아름다운 일인 것입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것은 오늘 본문에 있는 말씀 보면 누구에게 이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느냐 하는 그 전도의 대상을 세 가지로 설명을 했어요.
아름다운 소식을 첫째는 시온에 전하는 자요. 둘째는 아름다운 소식을 예루살렘에 전하는 자요. 셋째로 유다의 성읍들에게 전하는 자다~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첫째 시온에 전한다. 예루살렘에 전한다. 유다의 성읍들에 전한다. 같은 말인데도 세 가지로 표현을 다르게 설명을 했습니다. 그러면 시온이라는 말과 예루살렘이라는 말이 어떻게 다른가? 시온이라고 하는 것은 처녀, 딸 그러니까 아직 결혼하지 않은 처녀를 얘기하는 거고, 시온이라고 하고, 결혼한 여자를 가리켜서 예루살렘이라고도 하고 그랬어요.
갈라디아서 4장 보면 아브라함의 부인 사라와 그의 첩 하갈을 비교하는 설명을 하고 있는데, 땅에 있는 예루살렘은 하갈이다 그렇게 설명하고요. 하늘에 있는 예루살렘은 사라다 이렇게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루살렘은 이미 결혼한 여자에 대해서 이렇게 표현하는 그런 설명이고 이 시온이라고 하는 것은 정말 결혼하지 않은 순수한 처녀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는 말씀이다 하는 것을 우리가 느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 복음을 누구에게 전할 것이냐 시온이다, 예루살렘이다 유다의 성읍들이다
이 세 가지로 나오는데 이것의 공통점이라고 한다고 하면은 다 하나님의 백성들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 아름다운 소식을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전해라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 세상에서는 누가 하나님의 백성이고 누가 하나님의 백성이 아닌지 이거를 분별하기가 참 어려워요. 사실은 설명 해석을 하기 보다 먼저 주님과 나와의 관계가 바르게 되었느냐!! 하는 것을 진지하게 생각해 볼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지만 하는 것입니다.
목자와 양과의 관계에 있어서 가장 뚜렷한 특징은 두 가지예요.
첫째, 목자가 양을 알고 양이 목자를 알고 이렇게 안다고 하는 거예요. 둘째는 음성을 분별할 수 있어야 된다고 말을 했어요. 우리가 정말 예수님만 잘 따르는 이런 사람들이 되어야지만 하겠습니다. 그러면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는 사람이 되어야 하겠는데 오늘 본문 말씀에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는 사람들이 어떠해야 할 것인가 하는 것을 세 가지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십니다. 그래서 너는 이런 사람이 되어라 라고 말씀합니다. “아름다운 소식을 시온에 전하는 자여” 너는 첫째가 이겁니다. “너는 높은 산에 올라가라” 말씀하시죠.
그다음에 둘째는 “아름다운 소식을 예루살렘에 전하는 자여 너는 힘써 소리를 높여라”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러니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는 사람은 첫째 높은 산에 올라가야 되고 둘째 힘써서 소리를 높여야 된다고 그랬고요. 셋째로는 또 뭐냐 아름다운 소식을 이번에는 “유다의 성읍들에 전하는 자여” 되는 거죠. 이 사람들에게 뭐라고 했습니까? 너희는 가서 전하는데 무얼 전하느냐 “너희 하나님을 보아라” 이렇게 전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세 가지가 중요하게 나타납니다.
다시금 첫째로 돌아가서 너는 높은 산에 올라가라. 높은 산이 뭡니까?
이건 영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는 거죠. 열심히 공부해야 합니다. 전문가가 된다고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지식의 높은 산에 올라가라 그 말이죠.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는 사람은 자기 자신이 아름다운 사람이 되어야 돼요. 그래서 인격의 높은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특별히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는 사람은 인격이 비루하면 안 됩니다. 인격이 잘못되면 안 되는 것입니다. 남들에게 지탄받는 사람이 되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정말 더 중요한 거는 우리가 영적으로 높은 산에 올라가야 되는 거죠. 그래서 신령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기도를 많이 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 말씀을 깊이 있게 잘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과 늘 아름다운 교통을 이루어 나가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세 사람이 모여서 함께 기도하고 아름다운 믿음의 사람, 기도의 사람, 진리의 사람들이 모여서 이렇게 하나님의 은혜를 찬양하고 감사하면서 동행하면 놀라운 새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둘째는 또 뭐냐 아름다운 소식을 시온에 전하는 자는 높은 산에 올라가라.
둘째로 “아름다운 소식을 예루살렘에 전하는 자는 소리를 높여서 외쳐라” 이렇게 말씀을 하시죠. 소리를 높여서 외친다. 소리를 꽉꽉 지르라고 하는 겁니까? 이게 그런 소리가 아니겠죠. 무조건 목적만 크게 말한다고 그래서 뭐가 되는 거는 아닙니다. 소리를 높이라고 하는 말은 첫째 언제 우리가 소리를 높여서 말할 수 있느냐 첫째는 확신이 있을 때 소리를 높여 말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확신을 가진 사람 이 사람이라야 확실하게 말할 수 있어요. 그래서 예수님의 부활의 증인이 된다 할 때에도 누가 증인이냐 사실 증인이래야 돼요.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본 사람, 예수님이 부활하신 것을 목격한 사람, 부활하신 예수님과 동행하는 사람, 부활하신 예수님으로부터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있는 사람 이런 사람들이 돼야 자신 있게 외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셋째로 목소리를 높여서 말할 수 있는 사람은 누구냐?
이 사람은 성령의 계시를 받는 사람이에요. 하나님께서 나에게 이거 전해라 하고 주신 말씀을 받은 사람인 것입니다. 그렇지 않은 사람은 이 말씀을 정말 하나님이 주셨는지 내 생각으로 하는 건지 모르니까 우리가 자신이 없는 거예요. 사도행전 1장 8절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능력을 받는 거예요. 그래서 말씀의 능력이 있습니다. 그 말씀이 우리 마음에 찔림을 주고요. 감동을 주고요. 깨달음을 주고 우리를 새롭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런 은혜를 사모하면서 하나님을 보여줄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지만 하겠습니다. 이런 기적을 통해서 하나님을 보여줄 수가 있고요. 이것이 어떻게 이루어집니까?
물론 답은 간단하죠. 성령 충만함을 받아야 합니다. 성령의 능력으로 살아가고 성령의 지혜로 살아가고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서 살아가는 아름다운 사람들이 다 되어야지만 하겠습니다.
우리가 입술로만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는 사람 되지 말고 정말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이 세 가지 높은 산에 올라가는 사람이 돼야 하겠고 힘써서 소리를 높여 담대하게 자신 있게 외칠 수 있는 사람이 돼야 되겠고, 셋째로는 하나님을 구체적으로 보여줄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하나님 앞에서 이 마지막 때에 정말 신실한 일꾼, 충성된 일꾼들이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요약하며 생각하는 소감 문 :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는 자~ 하나님은 오늘도 하나님의 사람들을 통해 많은 영혼들을 구원하신다는 은혜의 메시지를 생각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또한 오늘도 ‘누구를 보낼꼬?’ 하실 때, ‘주님 내가 여기있사오니 나를 보내 주시옵소서’ 하는 한 사람을 부르고 계신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입술로만 복을 웨치는 자가 아닌, 그 복음 안에서 누리는 삶을 간구하게 됩니다. 주님 도와주소서~ 감사합니다.
< 나귀의 비밀 >
[마 21:1-7]
1 그들이 예루살렘에 가까이 가서 감람 산 벳바게에 이르렀을 때에 예수께서 두 제자를 보내시며
2 이르시되 너희는 맞은편 마을로 가라 그리하면 곧 매인 나귀와 나귀 새끼가 함께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내게로 끌고 오라 3 만일 누가 무슨 말을 하거든 주가 쓰시겠다 하라 그리하면 즉시 보내리라 하시니 4 이는 선지자를 통하여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일렀으되 5 시온 딸에게 이르기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겸손하여 나귀, 곧 멍에 메는 짐승의 새끼를 탔도다 하라 하였느니라 6. 제자들이 가서 예수께서 명하신 대로 하여 7 나귀와 나귀 새끼를 끌고 와서 자기들의 겉옷을 그 위에 얹으매 예수께서 그 위에 타시니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은 그 하나하나가 전부 깊은 의미를 가지고 있다. 사도신경에 예수님께서 왜 빌라도 너에게 고난을 받아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다고 했느냐? 유태인들이 죽였는데 왜 빌라도가 예수님을 죽였다고 이렇게 고백을 하느냐? 이런 문제가 아주 중요한 것이다. 둘째로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받기 전에 예수님의 겉옷들을 벗겨 가지고 군병들 4명이 나누어 가졌다 하는데 이것을 우리 성경학자들이 해석을 못하고 있어요. 또 예수님의 십자가를 아리마대 요셉에게 지우시고 갔는데 이 아리마대 요셉은 누구냐? 전에 빌라도가 재판을 하면서 예수님을 처형할 것이냐? 발라바를 이제 처형할 것이냐? 이 둘 중에 누구를 놓아줄 것이냐? 하는 문제를 가지고 백성들에게 물어봤더니 유태인들이 제사장과 장로들의 선동을 받아 예수님을 도와달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바나바를 놓아달라고 악을 썼어요. 그럼 바라바는 누구냐? 이런 문제들을 일찍이 설명을 했다. 그래서 앞으로도 다른 사람들이 별로 설명해내지 못하고 또 우리에게 관심도 좀 적은 이런 문제들을 설명 좀 드리려고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예수님이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이야기가 나와요.
그런데 우리가 보통 애굽에 살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 40년의 생활을 걸쳐 젖과 꿀이 흐르는 땅 하나님이 약속하신 땅, 가나안 땅에 들어가게 됐다. 그래서 우리 찬송가에는 “요단강 건너가 만나리” 요단강을 건너면 가나한 땅인데 이것이 우리가 죽은 다음에 천국에 가서 만난다 하는 것을 상징적으로 설명하는 말이다. 이 가나안 땅이 천국이라 이것이 새로운 에덴동산이다.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다. 우리 모두가 소망하는 가고 싶은 땅, 천국을 상징하는 것이다. 이렇게 설명을 하는데 그중에서도 예수님은 수도인 예루살렘에 들어가실 때에 나귀를 타고 들어가셨다. 그러면 거기에는 무슨 의미가 없느냐? 왜 나귀를 타고 들어가셨을까? 이런 의문이 들지 않습니까? 이런 문제에 대한 해석을 우리가 해야 된다는 것이다.
우선 성경에 나타나는 나귀 이야기들이 많이 나오지만 그 중에 가장 대표적인 3가지를 골라본다면 제일 처음 나타나는 것이 민수기 22장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모압왕 발락의 초청을 받아 발람이라는 선지자가 왕을 만나러 가는데 “나귀를 타고 가더라”
하는 것이다. 왜 나귀를 타고 갑니까? 나귀에 대한 이야기의 첫째이다.
둘째는 사울이 아직 왕이 되기 전에 하나님께서 사울을 불러서 사무엘 선지자를 만나게 하고 그에게 기름을 부어 왕으로 세우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구원해 내시고 또 이스라엘이라고 하는 나라를 새롭게 세우시는데 모든 계획을 수행하시는 데 있어서 하나님께서는 나귀를 쓰셨어요. 셋째로 나오는 중요한 이야기가 오늘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에 “나귀를 타고 들어가셨더라” 왜 나귀를 타셨다고 하느냐?
스가랴 9장 9절에서는 메시아는 나귀를 타고 오시는데 “그가 겸손하여서 어린 나귀를 타고 오셨다”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겸손하심만을 나타낸 것이지, 왜 나귀를 타고 오셨느냐? 하는 구체적이고 자세한 설명은 사실은 안 나오고 있습니다.
나귀의 특징이 무엇이고, 또 어떤 상징을 하고 있는지를 우리가 깨달아야한다.
여기서 참고로 우리나라 사람들은 나귀라는 말보다 당나귀라는 말을 많이 써요, 우리나라에서도 본래 있었던 짐승이 아니고 당 나라에서 온 짐승이기에 당나귀라고 더 붙였다. 사실 나귀이다. 그럼 당나귀의 특징이 무엇이냐? 귀가 크다 다른 짐승들에 비해서 이놈은 특별히 큰 귀를 가지고 있다. 그러면 이건 무얼 상징할까? 하나님 말씀 잘 들으라는 거죠.
짐승은 다 사람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신약성경에 에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모든 짐승들의 이야기가 아니고 우리 사람의 이야기입니다. “거룩한 것은 개에게 주지 말며 내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 여기서 나오는 개는 무엇이고, 돼지는 무엇입니까? 또 내가 너희를 보내 마치 양을 이리 가운데 보냄과 같도다 거기서 양은 뭐입니까? 양이라고 하는 것은 예수님의 제자들... 전도하려 내보내는 열두 제자 또는 70명의 제자들을 말하고 있고 이리는 이 바깥 세상에 사는 사람들을 말하는데 이 세상 사람들은 하나님을 안다고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고 있는 이런 사람들을 이리들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헤롯왕에 대해서는 저 여우에게 가서 일러라 말씀을 하셨어요.
나귀라고 하는 놈은 대관절 무엇을 상징하느냐?
이게 다 우리 사람인데 사람 가운데서도 어떤 사람이냐? 첫째는 귀가 큰 사람 하나님의 원래 목적은 하나님 말씀 잘 들어라 하시는 건데 인간들은 이 큰 귀를 가지고 사람들 소리 듣기에만 신경을 쓰고, 거기에만 집중하고, 심지어는 마귀 소리를 듣는 일에 또 열중을 하는 시간에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는 시간이 없고, 그럴 마음의 여유조차도 없는 이런 가련한 자리에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정말 예수님 잘 믿는 사람이 되려면 우리의 귀를 하나님의 음성에 기울여서 하나님 말씀을 잘 듣는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참 선지자들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했던 사람들이고, 거짓 선지자들은 하나님의 음성을 못 듣고 마귀의 속닥거리는 소리만 듣고 또는 사람들의 소리를 듣고 내가 어느 편에서야 유익하겠나하고 눈치를 봐가지고 인간들 편에 서고 하나님을 배반하고 결국 거짓 선지자가 되고 멸망의 길로 빠지고야 말았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귀가 크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음성을 잘 들으라고 주신 것인데 이것을 잘 못하고 있습니다.
둘째로 이 나귀란 놈은 아주 고집이 쎈 놈으로 나타나요?
성경 출애굽기 13:13 유월절 규례를 쭉 설명하는데 나귀의 첫 새끼는 어린 양으로 대속하라 말씀을 하십니다. 그 많은 짐승들 중에서 우리 집에서 키우는 소, 양도 아니고 나귀의 첫 새끼를 대속하라로 하는 것입니다. 이 말씀의 의미가 깊은 것입니다. 우리 제사법에도 보면 번제나 속죄제나 전부 숫 컷인데 화목제에는 암컷이나 숫 컷이나 이것을 구별하지 않고 하나님게 바치라고 하시는데 이 첫 새끼를 어린 양으로 대속하라 하는 말씀도 보면 구별이 없습니다. 그러니 암놈이 되었거나 수놈이 되었거나 처음 낳은 새끼는 다 어린 양으로 대속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너희도 첫 아들을 대속할지니라고 말씀을 해요. 이 나귀를 그렇게 하지 아니하려거든 나귀의 목을 꺾어버리래요. 그러면 죽여 버리라는 소리죠. 그러니까는 나귀도 첫 새끼는 죽여 버릴래 아니면 살리고 어린 양 한 마리를 죽여서 대속을 할래, 그러면 누구든지 나귀를 죽이겠다고 하는 사람이 누가 있겠어요. 나귀 한 마리 값보다는 양 한 마리가 더 싼 거니까, 양을 죽여서래도 나귀를 살려야지요. 이렇게 명령했는데 이것이 출애굽기 13장에 모세에게 주신 명령인데 십계명이 오기도 전부터 벌써 유월절 유래를 이야기하시는 겁니다. 이렇게 하는 이 말씀이 언제까지 잘 지켜 내려왔는지는 난 잘 모르겠어요. 예수님 때까지도 이렇게 잘 지켜왔는지? 많은 세월을 거치면서 이 양 한 마리 죽여서 나귀를 대속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근데 왜 그렇게 하지 않으려면 목을 꺾어라 하는 것은 고집이죠.
고집을 꺾어 놔라 그래서 우리가 고집을 버리고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으로 광야의 백성들이 다 이 고집 때문에 망했습니다. 이것을 강팍하다, 완악하다고 말했습니다. 그것 때문에 다 멸망당했어요. 그러니까 백성들의 고집을 다 꺾어 놓을 수 없는 거니까 상징적으로 나귀 맛 새끼 숫 컷이든 암컷이든 고집을 꺾는 것인데 실제로 꺾어지겠습니까?
셋째 특징은 이놈은 고집이 쎌 뿐만 아니라 정욕도 아주 굉장히 쎈 놈입니다.
이것은 스가랴서에 대한 설명이 나옵니다. 에스겔 23장 20~21 이스라엘 백성들이 얼마나 정욕이 강하냐? 하는 것을 설명하면서 “그의 하체는 나귀와 같다.” 라고 말을 한다. 그리고 정수는 말고 같은 음란한 간부를 사랑하였도다 그렇게 설명을 합니다. 네가 젊었을 때에 행음하여 애굽인에게 내 가슴과 유방이 어루만져졌던 것을 아직도 생각하나니 그러니까 이스라엘 백성들 또 이 유태인들이 음란한 마음을 가지고 살고 있다고 하는 거예요. 그것을 나귀가 이렇게 음란하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나귀는 귀가 큰 놈이고 고집이 센 놈이고 셋째로는 음란한 놈이다. 그래서 대속하라고 하시는 거죠. 이것을 꺾어버려야 하고 죽이고 이겨야 한다는 것이다.
넷째 특징은 체력이 아주 강해서 여러 가지 기후에도 이놈은 잘 견딘다고 하는 거예요.
적응을 빨리하고 잘 견딘다, 그러니까 당나라에서 있던 나귀를 우리 한반도로 데리고 와서도 잘 적응해서 컸다. 옛날 유대 땅에서 있던 코끼리 같은 짐승은 우리나라에 와서 귀하게 스임받고 그러지 않았지만 나귀는 적응을 하고 생존해 나갈 수가 있었다.
이것이 나귀에 나타나는 중요한 특징들입니다.
중요한 것은 “예수님이 겸손하시기 때문에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셨다.”고 대표적으로 이야기하고 있지만 이 나귀란 놈이 사람들이 다 자기를 보고 환호하는 줄 알고 고개를 뻣뻣하게 쳐들고 우쭐거려가면서 큰 착각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놈은 채찍에 맞아가지고, 헛되게 아주 혼이 나야 될 놈이다. 결국은 이게 무슨 얘기예요. “우리는 한 마리의 나귀다”라는 것입니다. 지금 예수님이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들어가시는 모습을 이렇게 보면 예수님이 중요하느냐? 나귀가 더 중요하느냐? 이렇게 볼 때
예수님 없으면 너는 아무것도 아니고 시체야, 동시에 예수님이 왜 수 많은 짐승들을 다 버려두고 나귀를 타고 들어가셨을까? 처음에는 사람들에게 환호를 받고 나를 보고 좋아하고 우쭐해질 수도 있는 거지만 동시에 깊이 깨달아야 될 것은 내 등에 태우신 예수님이 바로 나를 위한 제물로 나의 죄를 대속하시고 나를 구원해 내시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시라는 것을 깨닫고 깊은 감사를 드리면서 나아가야 되겠습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도 친자식보다 더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자녀들을 놓고 슬픈 마음으로부터 얼마나 비통하게 우시면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다. 우리가 이 귀한 사실을 기억하고 하나님께 감사해야 하겠습니다. 오늘 마태복음 21장에서는 나귀에 대한 설명을 하는데 여기는 어린 새끼 나귀만 간 것이 아니고 어미 나귀도 같이 간걸로 설명을 하고 있어요. 둘 다 같이 가요 그리고 동시에 예수님이 새끼 나귀를 타고 들어가신 게 아니라 이 두 나귀를 다 타고 들어가셨다 그래요. 복수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제 다른 복음서는 그렇게 안 돼 있는데, 마태복음만 특징이에요. 이렇게 두 나귀를 그러니까 어미와 새끼를 같이 이렇게 데리고 들어가셨다 예수님께서 어미와 새끼를 함께 대속하시느라고 이 놀라운 구원의 역사를 이루셨다. 이것을 우리가 마음에 새기면서 정말 주님 앞에 더욱 충성하고 주님 잘 잘 섬기는 일꾼들이 돼야 하겠습니다.
개인적인 소감 문 : 난제해설을 통해 많이 배웁니다.
나귀를 타고 입성하신 예수님을 묵상할 때 마다 풀리지 않던 부분이었는데, 출애굽기 13장 13절에도 나귀를 바치라는 말씀이 있다는 것을 오늘에야 알았습니다. 감사합니다. 많이 배웁니다. 나귀처럼 잘 들리는 귀로 세상에 혼잡한 소문을 듣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듣겠습니다. 또 자기 것을 주장하며 교만하게 사는 것이 아닌,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늘 사모하겠습니다. 정욕이라고 하면 많은 정욕이 있는데, 눈에 정욕, 마음에 탐심(정욕) 등 부질없는 것에 마음 빼앗기지 않도록 각성하며 살겠습니다. 무엇보다 세상에 적응하여 진멸당할 세상홍수에 떠내려가는 것이 아닌, 하나님 나라를 사모하고 하나님나라에 맞는 하나님의 백성, 자녀가 되어 살 수 있기를 간절히 소망해봅니다. 성령하나님의 도우심을 오늘도 간구해 봅니다. 감사합니다. 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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