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거룩하고 복된 주의 날에 살아계신 하나님 앞에 나와 예배드리는 사랑하는 성도님께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함께 하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말씀의 제목은 “하나님이 근심하시니라”입니다.
며칠 전 가수 이효리 씨가 국민대학교 졸업식에서 연설을 했습니다. 연설 내용을 요약하면 ‘후배들아, 마음대로 살아라. 인생은 결국 독고다이다.’였습니다. “부모와 스승의 말도 안 듣고, 친구의 말도, 성인의 말도 안 듣는 우리가 좀 유명 인사라고 찾아와서 떠드는 말을 들을 이유가 뭐 있느냐. 그냥 마음 가는 대로 살아라. 나보다 뭔가 나아 보이는 누군가가 멋진 말로 나를 이끌어 주길, 그래서 나에게 깨달음을 주길, 그래서 내 삶이 조금은 더 수월해지길 바라는 마음 자체를 버리라. 인생은 독고다이다.”라고 했습니다. ‘독고다이’가 무슨 말입니까. 이 말을 잘 설명해주는 성경구절이 있습니다. 삿17:6입니다. “그 때에는 이스라엘에 왕이 없었으므로 사람마다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삿21:25도) 자기 마음대로 산 것입니다. 분명한 것은 성경은 그렇게 살라고 하지 않습니다. 옛사람에게서 배우고 가르침을 받고 순종하라고 말씀합니다.
우리 속담에 은혜는 돌에 새기고 원수는 물에 새기라고 했는데 반대로 은혜는 물에 새기고 원수는 돌에 새기는 민족이 있습니다. 위급할 때면 하나님께 도움을 청하고도 돌아서면 언제 그랬냐는 듯 잊어버리는 것이 이스라엘민족입니다. 홍해를 건너고 찬양을 드린 지 불과 삼일 뒤에 물이 없다고 불평하고 원망합니다. 몇 년 후가 아니라 며칠 후에 다릅니다. 불기둥과 구름기둥을 보고도, 만나와 메추라기를 먹으면서도, 반석을 쳐서 물을 먹고도, 그리고 기도로 아말렉과의 전쟁에서 승리를 하고도 돌아서면 감사를 잊어버리고 원망과 불평을 하는 민족입니다. 모세가 돌판을 받으러 시내산에 올라간 후 40일을 못 참고 금송아지 우상을 만들어서 그 앞에서 제사하고 춤을 추었습니다. 까마귀 고기를 먹었는지 얼마나 쉽게 하나님의 은혜를 망각하고 흘러 떠내려 보내는지 모릅니다.
어렵게 광야생활을 마친 이스라엘백성들이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가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평온하면 은혜를 잊어버리고 세상과 연합하여 죄를 범하고 그러면 징계를 받고 그러니까 또 부르짖고 그러면 하나님이 구원해주십니다. 이런 생활을 몇 백 년을 반복해서 계속합니다. 우리가 아이들에게 새 옷 입혀 놓으면 나가서 더럽혀 오고 그러면 벌도 좀 받고 벌서면 다시 안 그러겠다고 하고 그러면 용서해주고 하듯이 하나님 앞에서 이스라엘의 역사가 이와 같습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본문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들은 앞서 기드온이 300명으로 13만 5천 명을 이기는 것을 지켜보았습습니다. 기드온이 죽자 아들 아비멜렉이 3년을 다스리고 그 다음은 돌라가 23년, 그 다음은 야일이 20년을 다스렸다고 하니 46년이 지난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그들이 어떻게 살고 있습니까? 하나님을 섬기지 않고 온갖 이방 신들을 섬기고 있습니다.
앞의 6절에 보면 이스라엘을 가운데 두고, 중심에서는 바알들과 아스다롯을 섬기고 북쪽 시돈의 신들, 동쪽 모압과 암몬의 신들, 서남쪽 블레셋의 신들을 섬겼다고 합니다. 이방인과 연합하여 타락하고 세속화된 것입니다. 축복을 받았을 때는 더 하나님을 가까이 하여 거룩함에 이르고 주님의 형상을 닮아가려고 해야 하는데 반대로 세상의 모든 방식이 내 생활에 들어오게 된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런데 그 우상들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지켜주지 못했습니다. 7절에 하나님께서 진노하셔서 그들을 보호해 주시지 않았다고 말씀하십니다. 도리어 블레셋 사람의 손과 암몬 자손의 손에 그들을 파셨다고 말씀합니다. 징계하신 것입니다. 그렇게 백성들은 하나님을 떠나 다른 신들을 섬기다가 십팔 년 동안 처절하게 고통을 당합니다.
그들이 고통을 당하다가 결국 하나님을 다시 찾습니다. 10절에 보시면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께 돌아와 부르짖습니다. “우리가 우리 하나님을 버리고 바알들을 섬김으로 주께 범죄하였나이다.”라고 합니다. 그때 하나님도 딱 잘라서 말씀하십니다. 11절에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르시되 내가 애굽 사람과 아모리 사람과 암몬 자손과 블레셋 사람에게서 너희를 구원하지 아니하였느냐 또 시돈 사람과 아멜렉 사람과 마온 사람이 너희를 압제할 때에 너희가 내게 부르짖음으로 내가 너희를 그들의 손에서 구원하였거늘 너희가 나를 버리고 다른 신들을 섬기니 그러므로 내가 다시는 너희를 구원하지 아니하리라 가서 너희가 택한 신들에게 부르짖어 너희의 환난 때에 그들이 너희를 구원하게 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많이 서운해 하셨습니다.
일곱 번을 구원해주셨습니다. 애굽에서부터 마온까지 일곱 번입니다. 하나님은 이처럼 구원하고 또 구원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이스라엘이 또 배반한 것입니다. 안타까운 일입니다. 우리도 혹 이렇게 될까 두려워해야 합니다. 이 말을 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다시 회개합니다. ‘우리가 범죄하였으니 벌을 당하는 것이 마땅하고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으실 대로 하셔도 우리는 할 말이 없습니다. 하오나 오직 주께 구하옵나니 오늘 우리를 건져내옵소서.’라고 합니다. ‘우리가 죄를 지었으니 벌 받는 것 당연합니다. 하나님이 매를 드셔서 할 말이 없습니다.’ 라고 하면서도 그래도 ‘이번 한 번만 좀 봐주십시오. 딱 이번 한 번만 더 용서해주십시오.’ 하는 말입니다.
그래도 하나님이 반응이 없자 이들은 자진해서 행동으로 옮깁니다. 그들 가운데 있는 이방신들을 제하여 버리고 진심으로 뉘우치며 하나님을 섬기기 시작합니다. 렘35장 15절에 보면 “너희가 내게로 돌아오려거든 악한 길에서 돌이켜 너희 행위를 고치고 돌아오라”라고 했는데 이처럼 말로만 아니라 행위도 고치는 회개를 합니다. 참 염치는 없는 민족인데 눈치는 빨라 보입니다.
그러자 16절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곤고로 인하여 마음에 근심하셨”다고 말씀합니다. 다른 번역에 보면 “하나님께서 보고만 계실 수 없었더라”라고 했습니다. 뉘우치고 회개하는 것을 보고 참고 계실 수 없었더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비록 우리가 죄를 범하고 그로 인해 여러 가지 고난과 환란이 있고 슬픔을 당할 때, 그럼에도 뉘우치며 회개하면 하나님께서 보고만 계실 수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오늘 우리가 믿는 하나님, 이스라엘을 향해 다가오시는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를 본문이 잘 알려줍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진정으로 뉘우치고 회개할 때 보고만 계실 수 없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이십니다. 좋은 아버지이십니다. 자녀의 문제를 방관하고 구경만 하고 계시는 분이 아니라 하나님은 우리의 문제에 개입하셔서 우리의 슬픔을 해결해주시길 원하시는 분입니다. 우리의 곤란, 고통으로 인하여 근심하는 분이십니다. 부모가 어린 자녀를 학교에 보내놓고도 근심하듯이, 다 커서 직장을 다니고 결혼을 시켰어도 늘 마음 졸이듯이 하나님은 우리로 인하여 근심하시는 분입니다. 우리보다 우리를 더 염려하시는 분입니다.
그리고 비록 죄를 범하였어도 회개하면 기꺼이 용서해주는 분이십니다. 죄가 크고 작음을 떠나 진심으로 뉘우치고 돌아오면 용서해주는 하나님이십니다. 사55:6에 “너희는 여호와를 만날 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 악인은 그의 길을, 불의한 자는 그의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그가 긍휼히 여기시리라 우리 하나님께로 돌아오라 그가 너그럽게 용서하시리라” 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 앞에 어떤 죄인이라도 사실 용서받지 못할 죄인은 없습니다. 회개하지 않기에 문제입니다.
니느웨이성을 보십시오. 요나 선지자가 가서 하나님이 저들의 죄악을 심판하시고 멸망시킬 것을 전했더니 왕과 온 백성이 삼 일을 금식하며 회개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뜻을 돌이키시고 그들을 심판하지 않았습니다. 진정한 회개로 말미암아 심판을 면한 것입니다. 아버지 재산을 다 탕진한 아들이 뉘우치고 회개하고 돌아왔을 때 아버지는 그에게 아무른 죄도 묻지 않았습니다. 그의 모든 허물과 죄를 용서하시고 그를 반가이 맞아주었습니다. 그는 스스로 종이 되겠다고 했지만 아버지는 인장을 끼워주면서 소를 잡고 잔치를 열었습니다. 죽었다가 다시 살아 돌아온 아들이라고 기뻐했습니다. 이것이 회개의 능력입니다. 우리가 회개할 때 하나님은 이처럼 용서하시기를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죄를 지었느냐가 문제가 아니라 진정 회개하였는가가 문제입니다. 죄의 크기가 문제가 아니라 진정성 있는 회개가 있었는가,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회개하고 자기 죄를 자백하는 자에게 용서하시고 새롭게 하시는 분입니다. 진정한 회개는 진정한 회복을 가져다줍니다. 사57:15입니다. “내가 높고 거룩한 곳에 있으며 또한 통회하고 마음이 겸손한 자와 함께 있나니 이는 겸손한 자의 영을 소생시키며 통회하는 자의 마음을 소생시키려 함이라” 하나님은 이처럼 통회하는 자의 마음을 소생시키는 분입니다.
히스기야왕은 눈물로 회개하여 죽을병에서 고침 받고 그 삶을 십오 년 연장 받았습니다. 비록 동생을 죽인 가인도 회개하니까 하나님이 용서하시고 만나는 누구든지 그를 죽이지 못하도록 표를 주셨습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유대인들도 회개할 때 성령을 보내시고 그들을 통해 초대교회를 시작하셨습니다. 이처럼 회개할 때 문제들을 해결 받습니다. 하나님이 일하시기 시작하고 영혼이 소생합니다. 회개가 곧 능력입니다. 회복의 능력입니다.
회개는 단순히 후회하는 것이 아닙니다. 후회는 과거의 잘못을 돌아보고 부끄러워하는 것이라면 회개는 과거의 잘못을 청산하는 것입니다. 후회는 단지 지난 일을 반성하고 속상해 하는 것이라면 회개는 다시는 그런 일을 하지 않으리라 결단하고 돌이키는 것입니다. 우리는 후회는 많이 하지만 회개는 인색합니다. 단순히 후회했다가 같은 일을 반복하고, 또 반복하기를 계속 하다가 멸망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성경은 이를 두고 잠26:11에 “개가 그 토한 것을 도로 먹는 것같이 미련한 자는 그 미련한 것을 거듭 행하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진정 회개한 베드로 사도는 주님의 증인으로 살지만 회개하지 않고 뉘우치기만 한 가롯유다는 스스로 목을 매고 맙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진정 필요한 것은 회개입니다. 때때로 죄의 유혹에 넘어질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때마다 돌이켜 다시 일어서기 위해서는 회개해야 합니다. 도무지 넘어지지 않는 것도 중요하지만 넘어져도 회개를 통해 다시 일어서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잘못한 것에 대하여 후회하는 자가 아니요, 회개함으로 새롭게 거듭난 자입니다. 우리가 회개하면 하나님은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용서하시고 다시는 기억치 아니하신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회개함으로 용서받은 자입니다. 우리 뿐 아니라 누구든지 회개하고 돌아오면 하나님께서는 용서하시고 자녀로서 새 삶을 살게 하십니다.
그래서 베드로사도는 “너희가 각각 회개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라”(행2:38)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우리는 회개할 수 있는 이 은혜의 기회를 통해 하나님과 조금이라도 막힌 담을 허물어버리고 하나님께 더 가까이 나가시길 바랍니다. 회개를 통해 하나님과의 관계가 온전히 회복되고 하나님과 더 깊은 사랑의 교제, 친밀한 교제를 할 수 있게 되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