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로(李承老)는 합주(陜州) 사람이다. 충목왕(忠穆王) 때 밀직(密直)으로 전주(銓注)를 관장하였으며 뇌물죄에 연루되어 영해(寧海)의 수령으로 쫓겨났다. 공민왕 때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가 되었다가 정당문학(政堂文學)으로 관직을 옮겼다. 어떤 일로 태안(泰安)으로 쫓겨났는데, 왕이 중사(中使)를 보내어 전별(餞別)하였으며 얼마 뒤 불러들여 강양백(江陽伯)에 책봉하였다.
동생인 이운목(李云牧)은 신돈(辛旽)과 이웃에 살았는데 그의 딸이 매우 어여뻤다. 이미 고한우(高漢雨)에게 시집을 갔으나 이운목이 집에 신돈을 맞아들여 딸에게 술시중을 들게 하였다. 신돈이 기뻐하며 간음하고 드디어 이운목을 응양군상호군(鷹揚軍上護軍)으로, 고한우는 대호군(大護軍)으로 삼았으며, 이승로는 다시 정당문학이 되었다. 이승로가 일찍이 처제와 사통(私通)하여 아들을 낳았는데 버려진 아이를 길렀다고 속였다. 이승로의 처가 일이 발각되어 집안의 명성을 더럽힐까 두려워 말과 얼굴빛으로 나타내지 않은 것이 20여 년이었는데, 비록 친척이나 가까운 사람도 알 수 없었다. 감찰대부 김한귀(金漢貴)가 이승로의 처와 처제를 잡아들여 신문하니 모두가 자백하였다. 이승로를 중모(中牟)에 유배 보내고 가산을 적몰하였으나 처제는 이승로가 강간한 것이라 하여 〈죄를〉 면해주었다.
왜적이 교동(喬桐)을 노략질하자 이운목과 장군 이몽고대(李蒙古大, 이뭉구다이)가 추격하였으나 겁을 내어 싸우지 않았다는 데 연루되어 순군에 하옥되었다. 이운목이 속여서 말하기를, “만약 적을 섬멸하지 못한다면 죄를 받고 죽기를 청하옵니다.”라고 하니, 이에 다시 그를 보내며 군량[齎糧] 4,000여석을 가지고 가게 하였다. 〈그의 죄를〉 논하는 자들은 〈이운목이〉 아무것도 이루지 못할 것으로 보았는데 과연 적의 머리 1급도 베어오지 못했다. 어떤 요망한 무당이 제주(提州)에서 와 스스로 천제석(天帝釋)이라고 칭하며 사람의 화복을 망령되게 말하고 다녔는데 원근(遠近)에서 떠받들면서 〈사람들이〉 오히려 미치지 못할까 두려워하여 가는 곳마다 재화가 산더미처럼 쌓였다. 〈무당이〉 천수사(天壽寺)에 이르러 말하기를, “내가 서울에 들어가면 해마다 풍년일 것이며 전쟁은 그치고 나라가 태평할 것이다. 만약 임금이 나와서 맞이하지 않으면 내가 필히 하늘로 올라갈 것이다.”라고 하였다. 서울 사람들이 모두 미혹되어 따르니 마치 시장과 같았다. 이운목이 기병과 대성(臺省)의 관리를 데리고 무당을 붙잡아 머리카락을 자르고 가구소(街衢所)의 옥에 가두었으며, 장을 치고 쫓아버렸다. 〈이운목의〉 관직이 전리판서(典吏判書)에 이르렀으나 신돈의 당여라고 하여 복주(伏誅)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