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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산 해송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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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 게시판 스크랩 감동의 글 내고향 연암(蓮岩) 전설
성준 추천 0 조회 63 11.07.24 19:29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흰 연꽃바위(白蓮岩) 전설 연꽃(蓮花)은 불교를 상징하는 성스러운 꽃인데, 내가 태어나 자란 고향 마을에는 바위에 신기하게도 흰 연꽃(白蓮)의 형상이 생생하게 아로 새겨 지고, 바위아래 흰 연꽃(白蓮) 피어났다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동해바닷가 亭子로 가는 길목에 현대자동차 울산공장과 인접한 蓮岩洞 동네 이름에 유래한 이야기 입니다. 태백산맥의 동남쪽 끝에 蔚山의 명산 무룡산(舞龍山) 서쪽으로 뻗은 산줄 기인 오봉산 중턱에는 옥천암 이라는 절이 있고, 동천(東川)을 바라보는 산자락 끝에 옛날 시여골(詩余谷)이라는 곳에 白蓮岩이란 바위가 있던 연 암(蓮岩)이란 동네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이 곳에 사람처럼 우뚝 선 큰 바위가 있었는데, 그 바위 아래에 항상 맑은 물이 고이는 웅덩이(연못)를 사람들은 옥처럼 푸른 물이 고인 곳이라는 뜻에서 옥정(玉井)이라 불렀습니다. 자료에 의하면 고려 忠烈王 14년(1288) 어느 날 그 바위에 이상한 큰 변 화가 일어났습니다. 군자처럼 상서로운 白蓮(흰 연꽃)의 무늬가, 마치 아 름다운 아가씨들이 섬섬옥수로 수놓은 듯 피어난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이 마을 사람들 에서부터 급기야는 서울인 松都(개성)땅까지 소문이 퍼지게 되어 시인 묵객들이 줄을 이어 찾아들었고 고을에서는 그 바위를 백련암이라 부르게 되고 마을 이름도 연암(蓮岩)이라 하였답니다. 관람객들 중에는 저 유명한 가정이곡(稼亭李穀 도첨의찬성사 1298~1351 고려 말기의 문신)선생과, 설곡 정포(說谷 鄭? 1309∼1345 고려 말기의 문신. 1342 左司議大夫, 유배돼 울주군수)선생 같은 이들도 있어 이 곳에 주옥 같은 시(詩)를 남겼습니다.
      이곡 선생 시 보배스런 웃음 명주 덩어리요 구슬옷은 안개 무늬 일세 백련암의 아름다움이 어찌 헛된 말이랴 때때로 이상스런 향기 풍겨오네 손의 배개는 차디 차기 물과 같고 중의 등잔은 밝고 밝아 어두움 잊네 누가 유도와 불도를 함께 말하지 말라 하였던가 여기 이르러서는 아침 햇빛에 모두 맡겼네 정포 선생 시 소나무 고개는 단청한 빛이요 이끼낀 바위는 수놓은 무늬일세 백의로 남아있는 화상은 아무말이 없으니 그 영감 부질없는 전에 들었네 뜬 구름엔 바람소리 장하고 잇닿은 하늘엔 바닷기운 어두어라 유유한 심사를 누구와 함께 의논하리 머리 긁고 서 있으니 해는 서쪽으로 기우네
    정포는 34세인 1342년 좌사의대부 (左司議大夫)로 재직시 충혜왕에게 '정치를 잘 못한다'는 상소를 올린게 미움을 받아 유배로 보내진 울주군 수 시절 울산의 곳곳을 구경하며, 정포가 뽑은 울주팔경은 태화강 용금 소 벼랑 위에 신라선덕여왕 때 세워진 태화사의 서문누각인 '태화루(太 和樓)'와 근처의 남문누각 '평원각(平遠閣)'과 태화루 건너편의 달빛이 숨는다는 봉우리 '은월봉(隱月峰)과, 역시 태화강 건너편의 갖가지 기이 한 꽃과 풀이 자라는 봄이 숨은 언덕 '장춘오(藏春塢)'와 청량면 율리 망 해사 곁의 돈대(墩臺)와 '망해대(望海臺)' 삼산에 있던 정자 '벽파정(碧 波亭)'과 무룡산 서쪽에 있던 흰연꽃이 수놓은 듯 새겨진 큰 바위 '백련암 (白蓮巖)'과 신라 때 처용이 나타난 '개운포(開雲浦)' 등 여덟 곳입니다. 연산군 4년(1498) 무오사화 때 아버지 준손과 함께 지방에 유배되었던 김대유가 중종 원년(1506)에 풀려나서 옥정 옆에 구자정을 세워'삼족당’ 이란 현판을 붙여 스스로 당호로 삼고 '군자정기'를 써서 걸었다. 이 기가 명문이라 군자정은 더욱 유명해져 문학인들의 발길이 그치지 않 았다. 조선 中宗 27년(1532)년 가을, 백련암 밑에서는 한 가지에 두 송이의 연꽃 이 우뚝 피어나, 동서로 벌어진 잎은 엄청나게 크고 꽃송이는 큰 주발같이 생겨 '백련암' 바위를 덮는 듯 했습니다. 이 연꽃은 겨울이 지나 이듬해에 접어들어도 시들지 않았습니다. 또다시 소문이 퍼져 이것을 구경하려는 손님들이 날마다 줄을 이었답니다. 그러나 날마다 줄을 이어 몰려오는 길손으로 매일같이 붐벼서 이곳에 있는 절과 한 채의 村家에서는 이것저것 手苦를 거듭하게 되었습니다. 촌부는 몇 달을 계속해서 거듭되는 시달림이 귀찮기 그지없었습니다. 촌가의 주인은 괴로움의 모든 원인이'백련암'이라 생각하고 그것만 없애 버리면 고통을 덜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고, 아무도 모르게 백련암 바위의 연꽃무늬가 있는 부분을 쇠망치로 깨어 부숴 버렸더니 신기하게도 연꽃도 시들어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어느 한 우매한 촌부에 의해 이백 사십여 년 간 흰 연꽃의 아름다움을 자 랑하든 백련암이 깨어지고, 연꽃이 사라지자 볼 것이 없어졌다는 소문이 퍼지고 찾아오던 길손들의 발길은 자취를 감추고 말았습니다. 그 후 이상하게도 촌가 주인의 家産은 물론 절도 모두 망하고 말았답니다. 參照 : 蔚山鄕土 文化資料 集 및 其他
    이 마을에 살았던 李 義一씨 말에 의하면 해방 직후 까지도 엄청 큰 바위 (백련암?)와 작은 연못이 있었는데, 마을 사람들이 온돌방 구들장으로 쓰 려고 너도나도 바위를 쪼개어 가져가,크기는 작아졌지만, 바위는 전설의 근거로 남아있었습니다. 어물동 마애불을 발견한 이씨의 할머니가 빨찌산 출몰로 마애불에서 이 곳으로 옮겨와 바위 근처에 白蓮庵이란 절을지어, 맑은 옥정의물을 식수 로 사용했으며, 주변은 온통 밭으로 변했으나 큰 소나무들이 서 있는 곳 의 白蓮바위와 그 앞의 작은 연못(玉井)은 인근 사람들의 휴식공간으로 삼십 여 년을 더 지내왔습니다. 蔚山이 공업도시로 변해 그 곳에까지 공장들이 들어서게 되자, 700년 넘 게 전해오던 백련암도 사라질 위기에 놓였습니다. 白蓮岩 흔적을 보존하기 위한 주민들의 요청으로 어느 공장 입구에 작은 바위로 옮겨 두었으나, 연못(玉井)과 원형의 白蓮岩은 모두 전설속으로 사라졌지만. 여러 정황을 보아 白蓮岩은 사실인것 같습니다. 2003.3월 靑 波 作成
     
    1977년 덕양산업 설립시 회사 내에 있던 암자 앞에 바위를 보관해오다
    1986년 9월 백련암 이전 후  그대로 방치되어 오다, 1978년 10월 덕양
    산업 본관 건물 준공과 동시에 현 위치(덕양산업 정문)로 옮겼답니다.
    
                  백련암(바위) 제막식 2005.6.3일 오후 2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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