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네 화실의 그 소녀는, 어떻게 '안데르센 상'을 받았을까
3월 22일 이수지 작가가 한스 크리스티안 안데르센 상 일러스트레이션 부문 상을 수상했다. 이 작가의 작품은 이미 세계의 주목을 받은 바 있다. 2008년과 2010년엔 <파도야 놀자>와 <그림자 놀이>가 뉴욕타임즈 올해의 그림책에 선정됐다. 또한 이번에 안데르센 상을 수상한 <여름이 온다>로 2022년 볼로냐 라가치 상 픽션 부분 특별 언급 대상이 되기도 했다.
그림책을 공부하는 사람들에게는 '볼로냐 라가치 상'이 올림픽 금메달 같은 느낌이지만, 일반 대중들에게는 '안데르센 상'이 노벨상 수상처럼 느껴지는 듯하다. 그런 면에서 올해 이수지 작가는 그림책의 거봉 두 개를 등정해 냈다. 나날이 풍성해지고 방대해지는 우리 그림책 시장에서 반갑디반가운 소식이다.
작년 여름 알부스 갤러리에서 이수지 작가의 원화 전시회가 있었다. 그곳에서 <여름이 온다>를 만났다. 햇볕이 쨍쨍 내리쬐는 여름, 그 더운 열기 속 뿜어내는 물줄기와 사람들의 어우러짐을 그보다 더 '자유롭게 '표현해낼 수 있을까? 원화로 본 <여름이 온다>를 통해 느낀 감정은 한 마디로 '만끽'이다.
물아일체의 판타지
<여름이 온다(2021)>에서도 엿볼 수 있지만, 이수지 작가의 그림책에는 일관된 특징이 있다. '나', 혹은 '우리'가 '나' 혹은 '우리'가 아닌 것들과 만나며 새로운 세계가 탄생되는 것이다. 나, 혹은 우리가 아닌 것들은 무엇이든 가능하다. <여름이 온다>에서 그랬듯 한여름 고무 호수에서 뿜어내는 물줄기일 수도 있고, <파도야 놀자(2009)>에서의 파도, <그림자 놀이(2010)>의 그림자, <거울 속으로(2009)>의 거울 등 그 무엇일 수도 있다.
이수지 작가는 스스로 자신의 그림책에 대한 해설을 쓴 <이수지의 그림책(현실과 환상의 경계 삼부작)>을 통해 '경계론'을 펼친다. 바닷가에 놀러간 아이는 마치 파도가 친구라도 되는 양 실랑이를 벌인다. 아마도 바다에 가본 이들이라면 그 누구라도 공감할 것이다. 저만치 물러난 듯해서 한 발자국 다가서면 어느새 와서 와락 덮쳐 버리는 순간을.
작가는 그런 '파도'와의 희롱을 하나의 '놀이'처럼 풀어낸다. <거울 속으로>에서 거울 속 나와 거울 밖 나의 놀이, 어두운 방안에 들어가 방 안에 있는 사물들의 그림자들과의 노는 것 등이 그렇다.
그런데 그렇게 서로 '희롱'하던 두 대상이 '합일'되는 순간이 온다. <파도야 놀자>에서 아이는 자신을 덮친 파도에 흠씬 젖는다. 하지만 파도는 그저 아이를 적신 것만이 아니다. 다시 파도가 저만치 물러난 그곳에 파도가 가져온 '선물'들이 있다. 그리고 이제 더는 아이에게 '파도'는 저쪽 세계가 아니다. 자연스레 바다에 발을 담그고 앉은 아이, 그렇게 경계는 '놀이'를 통해 자연스레 허물어진다.
아이는 거울과 '데칼코마니' 같은 몸짓의 유희를 통해 서로를 비추는 거울 속 세계로 한 발을 내딛는다. '딸깍' 하고 어두운 방 안에 불을 켠 아이는 그림자들과의 놀이에 빠져든다. 어린 시절 누구나 했던 손그림자 놀이로부터 시작된 유희는 청소기, 상자, 자전거 등 방안의 사물들의 그림자와 호응하기 시작한다.
필자의 경우, 어릴 적 벽지 속 무늬가 제멋대로 움직여 용이 되기도 하고, 구름이 되기도 하는 것처럼 보였다. '아이'이기에 가능한 '판타지'이리라. 이수지 작가의 그림책도 그렇다. 아이이기에 '파도'와 놀고, 거울 속 내 자신과 놀고, 그림자가 동물들의 왕국으로 재탄생된다.
이러한 '판타지'를 뒷받침하는 건 파도가 밀려드는 공간을 실감 나게 하는 가로로 긴, 거울에 비춰보듯 길쭉한, 그리고 정말 그림자가 생기듯 위 아래로 펼침 면이 펼쳐지는 저마다 다른 '물성'을 가진 그림책이다.
그렇게 그림책은 나와 내가 아닌 것, 사실과 판타지의 경계를 오가며 새로운 판타지의 세계를 창조해 낸다. '물아일체(物我一體)'의 경지가 별 건가, 가장 순수한 아이의 상상력이 바로 현실을 '별유천지 비인간([別有天地非人間)'이 되도록 한다.
글이 하나도 없어도 너무나 많은 이야기가 읽히는 책, 이런 '이수지 세계'의 시원은 어딜까? 궁금해 도서관을 뒤지다 2008년 발간된 <나의 명원 화실>를 만나게 되었다. '어떤 그림이 뽑히는 그림인지 잘 알고', 그래서 미술 시간이 끝날 무렵이면 언제나 자신의 그림이 벽 뒤에 걸리던 아이 이수지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담은 책이 <나의 명원 화실>이다.
'훌륭한 화가'가 되기 위해 작가는 어머니를 졸라 오래된 상가 삼층에 있는 화실에 다닌다. 그 화실의 화가는 '긴 머리에 까만 색 빵모자를 눌러 쓴' 사람, 어린 작가가 생각했던 '화가다운' 모습이었다. 그런데 이상하다. 화가는 그 잘 그리는 어린 작가의 그림에 일언반구 말이 없다.
크레파스 대신 연필을 주고 '세상을 뚫어지도록 열심히 살펴보는 것이 중요하다'며, '그렇게 열심히 살펴본 것이 내 마음 속에 옮겨지면 그걸 조금씩 조금씩 그려나가면 된다'고 '바가지 안에 이 세상의 모든 것이 다 담겨있다'며 주구장창 바가지만 그리라고 한다.
그러더니 야외 스케치를 간 어느 날, 그 화가다운 화가 선생님은 물을 그려보라며 말한다. '물은 색깔이 없는데 어떻게 그리지?' 고민하던 작가, 마치 그 생각을 읽기라도 한 것처럼, 진짜 화가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그렇게 물 속에 잠긴 것, 물 위에 뜬 것과 물 위에 비친 그 모든 것들이 물을 물처럼 보이게 만드는 거야, 그것이 물을 그리지 않고서 물을 그리는 거야'라고.
세상을 자신의 마음에 담은 작가는 그림책을 통해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에 드리운 경계를 드러낸다. 그리고 그 경계를 허물어뜨려 '경계' 안에 갇힌 우리의 의식을 트여준다. 화가 선생님의 그 나지막한 가르침 덕분일까, 유독 이수지 작가의 그림책에는 '물'이 자주 등장한다. 수상작 <여름이 온다> 역시 '물'이 매개가 되지만, 무엇보다 경계의 절정은 <물이 되는 꿈(2020)>이라 보여진다.
길게, 넓게, 아래 위로 확장된 그림책은 이제 '병풍'이 되어 나타난다. 또한 루시드 폴의 노래 <물이 되는 꿈>이 QR 코드를 통해 울린다. '물 속에서 가장 자유롭고 편안한 이들이 누굴까?'라는 질문으로 부터 시작된 이야기, 그래서 그림책은 수중재활센터로 시선을 돌린다.
파도와 그림자, 거울을 열려진 경계는 이제 휠체어를 떠나 물 속에 들어가 자신이 갇혔던 '몸'의 경계를 넘어선 아이의 이야기로 풀려간다. 자유로움을 향한 아이의 갈망이 수채화 물색으로 퍼져 강으로, 바다로, 그리고 용솟음치는 물기둥으로 넘실거린다. 그리고 꽃이 되고, 새가 되고, 풀이 되고, '무엇이든 될 수 있고 어디든 갈 수 있는 내가 되는' 꿈의 시간이 된다. 물을 그려 물이 아닌 세상의 이야기를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