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첫째 주 토요일입니다. 10시부터 학부모 철학동아리 활동 시작인데 9시 반이 넘자 몇분이 일찍 오셨습니다. 빨간 고무장갑이랑 걸레랑 챙겨들고 오신 품이 벌써 오래 전부터 청소를 벼르신 모양입니다. 그 동안 제 게으름과 함께 동거동락하던 먼지를 쓸고 닦고 나니 수석실이 말끔해졌네요. 갑작스레 더워진 6월 초의 날씨에 청소하시느라 땀을 뻘뻘 흘리시는데 선풍기도 에어컨도 청소를 해놓지 못해 무용지물입니다. 제 게으름이 송구스러울 뿐이었습니다.
오늘 출석하신 분은 열 일곱 분이시네요.
이번 철학적 개념은 '하나와 여럿'입니다. 철학동화 토론 주제는 '너는 유일해'였구요.
몇 일 남지 않은 남아공 월드컵이 아니더래도 우리는 흔히 말합니다.
'우리는 하나'
라구요. 어떻게 우리가 하나가 될 수 있을까요? 국어학적 측면에서 보면 '열 개는 하나'처럼 완벽한 오류입니다. '우리'라는 어휘 자체가 복수를 뜻하고 '하나'라는 의미는 단수를 뜻하니까요. 그러나 우리 '우리가 하나'라는 의미를 국어학적으로 해석하기보다는 일상생활에서 문화적 측면으로 받아들이지요. 암묵적으로 만들어진 관용구처럼 말입니다. 사회적 맥락으로 언어의 상호작용을 이해하고 적용해야 하는 것이 바로 이 때문입니다.
이때 '우리가 하나'가 되기 위해서는 어떤 것이 필요할까요? 아마 다수가 공유하는 동질감이라는 것이겠지요. '우리'라는 '다수성'이 어떤 동질성을 가져야 '하나'라는 '단일성'이 되는 것일까요? 남아공 월드컵을 앞두고 있는 사회적 맥락을 보면 우리 나라가 다른 나라와의 축구 경기에서 승리하기를 바라는 염원이 바로 동질성(동질감)을 만든 것이겠지요? 이런 동질성을 느끼는 부분이 많을수록 '우리는 하나'라는 다수가 모인 하나를 이루는 것이지요. 가장 좋은 '우리는 하나'의 본보기는 아마 가족일겝니다. 혈연이라는 동질성 이외에서 한 집에서, 같은 가치를 추구하며(가족 간의 가치는 모두 다르지만 가훈이라든가 가풍이라던가 하는 집합체로서의 가치) 살아가는 다수이니까요.
어린이들은 이 추상적 개념을 이해하기 힘들지요. 이때는 상황에 따라 나와 다른 사람을 하나로 볼 수 있을 때가 언제인지 예를 들어보는 거지요. 아이가 예를 들어 말하면서 스스로 '우리는 하나'라는 밑에 깔린 언어적 의미를 이해하고 사용하며 스스로 다수 속에 하나라는 자신의 존재가 해야할 책무과 지켜야 할 규범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사회가 생겨나고 그 사회(다수)에 속한 개인(단일)은 사회 속 규범(다수의 법)의 제약 속에서 자율(개인의 자유)을 추구해 나가게 되는 것이지요.
둘째 주제는 '너는 유일해'였지요.
우리는 편견 속에서 삽니다. 편견은 '나와 다름은 나쁜 것(부정적)'이다라고 생각하는 태도지요. 나와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나에게 피해가 되는 것도 아닌데, 한 쪽으로 치우친 시각을 갖게 되지요. 비만은 게으름과, 미모는 우월하다는 것과, 공부를 못하는 것을 인간적 무능함과, 편부 편모 슬하의 자녀는 문제아일 것이라는 것과 연관짓는 것은 이제 편견이라고도 말하지 않을 정도입니다. 이 편견을 가지는 쪽과 편견의 수모와 외로움을 당하는 쪽 어느 것이 잘못되었는지 아는 것부터 철학은 시작합니다. 아니, 이것이 편견이라는 것을 아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고 해야하는 것이 더 근원적인 철학하는 자세입니다.
우월한 능력을 가진 말 막시가 친구들로 부터 배척을 당합니다. 그러나 흔히 우리는 말합니다.
"막시가 우월한 능력을 남에게 주면 된다"라고요.
그러나 막시가 우월한 능력을 남에게 주어야 하는 당위성은 없습니다. 문제가 왜 발생했는지 이유를 찾아보면 답은 나오지요. 막시가 친구들로 부터 따돌림은 당하는 것은 막시의 우월함이 아니라 주변 친구들의 편견때문이지요. 흔히 다수의 '잘못된 힘(거짓)'은 소수의 '옮음(진선미)'을 이깁니다. 우리는 민주주의라는 미명하에 다수결의 원칙을 모든 곳에 적용하는 성급함을 보입니다. 민주주의 원칙에서의 다수결의 원칙은 여럿이 원하는 것이 정치적으로 적절하다는 의사결정방식의 하나일 뿐입니다. 가치의 선택은 다수결의 원칙에 입각한 의사결정으로 이루어지면 매우 위험합니다. 다수의 폭력을 원하는 힘이 소수가 원하는 평화를 해치는 일이 바로 전쟁이지요. 전쟁은 어떤 이유로도 가치화 될 수 없고 받아들여질 수 없는 것이니까요.
뛰어난 말 막시가 자신의 능력을 남에게 주는 것에서 시작하는 '이타심'에 대한 강요보다 막시를 좋아하게 된 폴디처럼 자신의 부족한 점(노래를 못함)을 막시가 가지고 있다는 것을 그저 인정하는 것, 타인에 대한 '이해'부터 시작하는 것이 이 사회를 건전하게 만들어가는 태도입니다. 타인에 대한 이해는 단순히 머리 속에서 받아들여지는 지식이 아니라 행동으로 드러나는 것이라는 점에서 매우 숭고하며 아름다운 인간의 태도입니다.
어린이들이 다른 친구들의 우월함을 시기하는 것보다 그들을 진심으로 칭찬하고 그를 통해 더 배우려는 태도를 갖는다면 그 두 아이 모두 함께 발전하게 되는 것이지요. 위대한 철학자 소크라테스는 젊은이들에게 끊임없는 대화로서 가르침을 주던 스승이었지만 정치적 희생양이 되었지요. 이렇듯 우리 시각은 어느 곳에 촛점을 맞추고 보느냐에 따라 편견과 이해를 넘나들지요. 우리 사회에는 그런 예가 얼마든지 많습니다. 아이들과 그런 예를 많이 찾아보고 함께 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를 찾아보는 것도 자녀들과 멋진 철학공부를 할 수 있는 방법입니다.
독특함과 보편성은 서로 상호보완적이므로 어느 것이 더 낫다고 할 수 없지요. 그저 우월함은 보편성을 뛰어넘는 독특함이고 이 독특함을 인정하고 이해하는 사회에서 이 뛰어난 독특함, 또는 남과 다른 독특함이 새로운 문화를 창조하고 새로운 기술과 발전을 가져오게 되는 것이 아닐까요?
이 독특함, 낯섦이 바로 예술이고 문화이며 첨단 과학이니까요.
낯섦.
인간의 문화는 여기서 시작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