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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如來의 轉大法輪
나. 如來의 轉法輪時十事
佛子야 如來應正等覺이 轉法輪時에 以十事故로於衆生心中에種白淨法하야 無空過者니何等이 爲十고所謂過去願力故며大悲所持故며 不捨衆生故며智慧自在하야 隨其所樂하야 爲說法故며必應其時하야 未曾失故며隨其所宜하야 無妄說故며 知三世智로 善了知故며 其身最勝하야 無與等故며 言辭自在하야 無能測故며 智慧自在하야 隨所發言하야 悉開悟故니 是爲十이니라
“불자여, 여래 응공 정등각께서 법륜을 굴릴 적에 열 가지 일로 중생의 마음에 희고 깨끗한 법을 심고 헛되게 지내는 일이 없나니, 무엇이 열인가. 이른바 과거에 서원한 힘이며, 크게 가엾이 여김으로 유지하는 바이니라.
중생을 버리지 않음이며, 지혜가 자재하여 그들의 좋아함을 따라서 법을 설함이며, 때를 따라서 놓치지 않음이며, 마땅함을 따르고 망령되게 설하지 않음이니라.
세 세상을 아는 지혜로 잘 알며, 그 몸이 가장 수승하여 더불어 같은 이가 없으며, 말하는 것이 자유자재하여 측량할 이가 없으며, 지혜가 자재하여 말하는 대로 모두 깨닫는 연고이니, 이것이 열이니라.”
*
여래(如來)의 전법륜시십사(轉法輪時十事)
*
불자(佛子)야: 불자야
여래응정등각(如來應正等覺)이: 여래응정등각이
전법륜시(轉法輪時)에: 법륜을 굴릴 때에
이십사고(以十事故)로: 열 가지의 이유 때문에.
이고(以故)는 잘 아시다시피 관용구로서 ‘뭐뭐 때문이다, 까닭이다’ 이렇게 해석된다. 나중에 위고(爲故) 할 위(爲)자가 나와도 똑같은 뜻이다. 열 가지 일 때문에
어중생심중(於衆生心中)에 : 중생의 마음 가운데에
종백정법(種白淨法)하야: 백정법을 심어서, 불법을 심고, 부처님 법을 심는다는 말이다. 우리 마음의 종자를 심는다.
무공과자(無空過者)니: 무공과자니. 보통 도종(道種)이라고 한다. ‘일력이근(一歷耳根)하면 영위도종(永爲道種)’ 귀에만 스쳐도 도의 종자가 된다. 무공과자 한 사람도 헛되이 지나가는 일이 없게 하나니
하등(何等)이 : 어떤 것이
위십(爲十)고 : 열 가지가 되느냐?
여기서 백정법이 심는 것이 법륜을 돌리는 인연이 된다. 법륜의 체를 백정법이라고 한다. 본체. 부처님의 무루(無漏) 찔찔 새는 게 없는 무루, 깨끗한 법계가 중생의 마음속으로 들어간다.
화엄경에서 요 대목이 제일 잘 나온 품은 2회차 설법의 광명각품이다.
광명각품에서 유명한 구절이 ‘봉행불교(奉行佛敎)는 상섭심(常攝心)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봉행하는 것은 항상 섭심 사섭법(四攝法)으로써 부처님의 가르침을 실천한다는 것이다. 봉행불교는 상섭심이다.
달마스님의 관심일법(觀心一法)하고도 일맥상통하는 것이다.
부처님의 무루(無漏) 깨끗한 법이 중생의 마음으로 들어가져서, 자꾸 법문을 듣고 훈습하는 것을 통해서 씨앗을 맺게 한다. 그렇기 때문에 여기서 뭐라고 했는가? 조금 전에 열 가지의 이유로 중생심중에 종(種)이라고 했다. 씨앗, 종자라고 한다.
제가 나눠드린 과판에 자세하게 해석을 다 해 놨다. 지금 시간 관계상 이 부분의 과판은 보지 않겠다.
과판이 없는 분들은 복사해 달라고 하면 그 파일을 다 드리겠다. 파일을 드리든지 다음 시간에 또 하나 프린트를 하든지 그렇게 해 놓겠다.
그 과판 7페이지 보면 자세하게 나온다.
씨앗을 심는 사람에게는 또 열 가지 일이 있게 되는데 그것을 이제 좀 자세하게 설명을 하겠다.
소위과거원력고(所謂過去願力故)며: 소위 과거에 세운 원력 때문이고
대비소지고(大悲所持故)며: 자비에 의해 유지된다. 지지되기 때문이고
불사중생고(不捨衆生故)며:불사중생이라.
우리는 조금 못난 사람이 있으면 전화번호를 차단하고 눈을 흘겨 보고 이상한 짓을 하고 욕도 하지만, 여래는 중생을 버리지 않기 때문이다.
육조스님이 그랬다. 지혜로운 사람, 다시 말하면 깨달음이 어느 정도 있는 사람은 중생을 자기보다 모자라는 사람, 어리석은 사람을 절대 나무라지 않는다고 하였다.
우리는 잘 안 되는 일이다.
깨달은 사람은 그렇게 나무라지 않는다.
지혜자재(智慧自在)하야: 지혜가 자유자재하여
수기소락(隨其所樂)하야: 내가 좋아하는 게 아니고 중생이 좋아하는 바를 따라서
위설법고(爲說法故)며: 위설법고라. 그것에 맞추어서 중생에 맞추어서 설법하기 때문에, 내 좋다고 설법을 하는 게 아니라 중생에 맞추어서 설법하기 때문이다.
밑엣사람들한테도 더욱 이래야 되지만, 위에 어른들을 모시는 건 더욱더 이래야 된다.
어른 기미를 살펴서 ‘내가 나아가야 될 지 물러나야 될 지’ 알아야 된다. 그런데 우리는 대부분 나한테 남이 맞춰 주기를 원하잖는가. 그런 것은 아만 이상 이하도 아니다. 그러면 법문이 안 들린다고 한다.
법문이 안 들리는 두 가지 조건이 있다. 하나는 아만 때문이고 또 하나는 의심 때문이다. 아만과 의심 때문에, 법문이 안 들린다고 한다.
필응기시(必應其時)하야 : 반드시 응당히 딱 그때에 맞춰서
미증실고(未曾失故)며: 미증실고라. 일찍이 한 번도 실수해서 어긋남이 없기 때문이다.
한 번도 잃어버리지 않기 때문이다.
한 번도 어긋남이 없기 때문에.
‘필응기시하야 미증실고라’ 모자란 사람들 앞에 자꾸 이 글을 써 놓으면 좋겠다 미증실고라.
수기소의(隨其所宜)하야: 그 소의, 응당한 마땅함을 따라서 반드시 해야 될 걸 따라서
무망설고(無妄說故)며 : 헛되거나 잘못된 말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여래자(如來者)는 불광어자(不誑語者) 불이어자(不異語者) 진어자(眞語者) 실어자(實語者) 여어자(如語者)’ 금강경에 이렇게 나오지 않는가. 화엄경을 보다가 금강경이 툭 터져 버린다.
*
지삼세지(知三世智)로: 지삼세지로.
각성스님께서 그러셨다.
“그거, 화엄경만 제대로 보면은 금강경 능엄경 따로 볼 것 없어요. 그냥 쫙 다 따라와요. 화엄경 하나만 보면은 모든 경전이 거기 다 있어요. 그거 잘 선택했구만. 화엄경 열심히 하세요잉.”
삼세의 지(智)를 아는 지혜로써, 그 삼세의 지혜를 안다는 것은 뒤에 깔린 것이 십회향품 제 여섯 번째 나오는 게송이다.
육회향에 나오는 게송 심불망취과거법(心不妄取過去法) 서장에도 고대로 나온다. 대혜 종고스님이. 마음의 과거에 사로잡히지 말라, 수행이 안된다. 역불탐착미래사(亦不貪着未來事) 미래에 대해서 꿈도 꾸지 말아라. 차라리 졸아라 졸아라. 나뭇가지에서 노래하지 말고 졸아라. 무심하라는 말이다. 역불탐착미래사 불어현재유소주(不於現在有所住) 현재 있는 바에도 잘났든지 못났든지 쪼그라 들든지 우쭐대지 말아라. 본래 없다. 요달삼세실공적(了達三世悉空寂) 이렇게 해 놓았다.
장수 자선선사는 그 게송을 능엄경으로 다시 승화시켜서 이렇게 해놓았다.
삼제구심(三際求心)에 과거 현재 미래 구심 마음을 찾아봐도 심불유(心不有)라 진짜 마음은 있지 않더라.
본래무일물이더라.
심불유고로 진짜 마음이 없는데 무명이나 망상 번뇌가 어디 있겠는가. 진짜 할아버지도 없는데 밑으로 손자가 있겠는가. 자손이 없다는 말이다.
심불유고(心不有故)로 마음이 있지 않기 때문에 불유하기 때문에 망원무(妄元無)라 망상도 없다.
진심이 없는데 망심이 어디에 있겠느냐.
그래서 망심무처(妄心無處)에 번뇌 다 사라진 그 자리가 즉(卽) 보리(菩提)더라.
아뇩다라삼먁삼보리.
염도염궁무념처에 육문이 상방자금광이라.
아미타불이 어디에 계시더냐
아미타불재하방(阿彌陀佛在何方) 착득심두절막망(着得心頭切莫忘)
염도염궁무념처(念到念窮無念處) 육문상방자금광(六門常放紫金光)
나옹스님의 게송이다.
그런 분들은 아주 높이 가신 분들이다.
그래서 망심무처에 즉보리요 생사열반이 본평등이라. 생사가 어디 있고, 열반이 어디 있느냐.
색즉시공 공즉시색이로다.
이렇게 장수 자선선사가 쓰섰다.
화엄종인 장수 자선 선사는 기신론 필삭기를 스무 권이나 쓰셨던 분이다. 그런 분들이 기신론 필삭기를 스무 권이나 쓰실 동안에 마음에 대해서 얼마나 해부를 많이 하고 당신이 선사로서 깨달음의 요체를 많이 파악했겠는가.
요런 구절을 보면 십회향품하고 바로바로 연결된다.
그리고 금강경에는 딱 간단하게 해놨다.
지삼세지를 뭐라고 해놨는가?
과거심불가득, 현재심불가득, 미래심불가득 그것이 요달삼세실공적이라.
제법부동본래적이라.
선요지고(善了知故)며: 요지 잘 아는 까닭으로 자성무소유를 잘 안다. 요지일체법 자성무소유, 시방삼세가 다른 말로는 일체법이다.
기신최승(其身最勝)하야: 그 몸이 가장 수승하여
무여등고(無與等故)며: 비길 이가 없기 때문이다.
언사자재(言辭自在)하야: 언사가 자재하야, 말이 자유자재해서
무능측고(無能測故)며: 무능측고며, 언사, 말이 자유자재해서 아무도 그 깊이를 헤아릴 수 없기 때문이고.
부처님은 촉착변소(觸着便燒)라. 갖다 대는 것마다 전부 다 비유와 인연과 정법을 설명할 수가 있다.
지혜자재(智慧自在)하야 : 지금도 가만 생각하면 한의사가 침 하나 들고 쬐맨한 것, 얄궂은 것 하나 들고 사람을 치료한다는 게 아무데나 찔러서 되는 것이 아니고 어디를 찔러야 되는가? 혈맥에, 정확하게 그 자리에 찔러야 된다. 아무데나 푹푹 찔러서는 안 된다.
뜸 뜨는 것도 정확한 그 자리가 있고 경전을 보는 거든지 마음에 그 본체 뜻이 짓는 거 있잖은가.
아무거나 책 보고 북대기처럼 번역한다고 되는 게 아니잖은가. 북대기를 아실 것이다.
경전에는 담마기금(擔摩棄金) 이야기가 나온다. 여기 마(摩)자가 삼서근 할 때의 깨 마자도 되고 삼배 마자도 된다.
제가 볼 때는 깨 마자 같다.
어떤 사람이 깨[摩]를 지고 가다가 담마기금, 금을 포기했다. 이거는 경전에 많이 나오잖는가.
다 아시는 말씀이고 다 아는 이야기인데 여러분들께서 뒤엣것은 잘 모를 것이다.
깨를 잔뜩 지고 가다가, 은이 나오니까 한 사람은 재빨리 깨를 갖다가 다 쏟아버리고 은을 한 지게 딱 지고 갔다.
“니도 은 지고 가라. 이거 비싼 거다.”
그러자 한 사람은 말했다.
“아이고 이제까지 내가 힘들게 지고 왔는데. 그냥 지고 간다.”
그런데 좀 이따가 또 뭐가 나왔는가? 금괴가 나왔다.
깨를 버리고 은을 지고 가던 사람은 금을 만나니까 또 은을 내려놓고 금괴를 지게에 잔뜩 지고 갔다.
금괴 하나만 해도 깨 한 트럭도 넘게 살 것이다. 그렇지 않은가? 금을 잔뜩 지고 집에 돌아와서 온 마실 사람 일가친척이 다 넉넉하게 평생토록 배터지게 나눴다.
그 금이 화엄경이다.
처음에 아함부를 보다가 반야부 보다가 화엄경 이게 대승(大乘) 일승(一乘)이잖은가. 그런 뜻이다.
그런데 깨에 미쳐서, 그동안 지고 온 게 아까워서 아무 것과도 안 바꾼 사람은 깨만 잔뜩 지고 집으로 왔다.
집에 와서 그 깨로 참기름도 짜고 맛있게 먹을 거라고 풀어놓았다. 그 뒤에부터 집사람부터 부모형제로부터 쥐어 뜯겼다.
“니는 돌대가리가? 모자라나? 남 금 지고 올 때 이거 깨 지고 오고.”
그때부터 참깨가 깨졌다고 깨라고 한다.
제가 만든 이야기다.
깨는 왜 깨냐? 깨지고 왔다고 깨졌다고 깨다.
금 졌으면 금 지고 왔을텐데. 깨졌다.
우리도 그렇다. 다른 거하고 바꿀 것 없다.
화엄경 하나만 하면 깨 버려도 된다.
참기름이 아무리 좋다 하더라도 그렇다.
지혜가 자재하여
수소발언(隨所發言)하야 : 수소발언하여, 내는 말을 따라서
실개오고(悉開悟故)니 : 모든 중생을 다 깨닫게 하기 때문이다. 지혜가 자재하야. 말하는 데마다 다 중생들을 깨닫게 하기 때문에 깬가 보다.
시위십(是爲十)이니라 : 이것이 열 가지니라.
(10) 如衆의 涅槃
*如衆의 觀十種義
佛子야 如來應正等覺이 作佛事已에 觀十種義故로 示般涅槃하나니 何等이 爲十고所謂示一切行이 實無常故며 示一切有爲가 非安隱故며 示大涅槃이 是安隱處라 無怖畏故며 以諸人天이 樂着色身에 爲現色身이是無常法하야 令其願住淨法身故며 示無常力의 不可轉故며 示一切有爲가 不隨心住하야 不自在故며 示一切三有가皆如幻化하야 不堅牢故며 示涅槃性이究竟堅牢하야 不可壞故며 示一切法이無生無起호대 而有聚集散壞相故라 佛子야 諸佛世尊이 作佛事已하며 所願滿已하며 轉法輪已하며 應化度者를 皆化度已하며 有諸菩薩이 應受尊號어든 成記莂已에 法應如是入於不變大般涅槃이니 佛子야 是爲如來應正等覺의 觀十義故로 示般涅槃이니라
“불자여, 여래 응공 정등각께서 불사를 짓고는 열 가지 이치를 관찰하기 위하여 열반에 듦을 보이나니 무엇이 열인가. 이른바 모든 행이 진실로 무상함을 보임이니라.
모든 함이 있는 법은 편안함이 아님을 보임이니라.
대열반은 편안한 곳이어서 두려움이 없음을 보임이니라.
모든 사람과 천신들이 육신에 집착하므로 육신은 무상한 법임을 나타내어서 깨끗한 법신에 머물기를 소원하게 함이니라. 무상의 힘은 바꿀 수 없음을 보임이니라.
모든 함이 있는 것은 마음을 따라 머물지도 않고 자유자재하지도 않음을 보임이니라.
모든 세 가지 존재[三有]가 환술과 같아서 견고하지 못함을 보임이니라. 열반의 성품은 끝까지 견고하여 깨뜨릴 수 없음을 보임이니라. 모든 법이 나고 일어남이 없지마는 모이고 흩어지는 모양이 있음을 보임이니라.
불자여, 모든 부처님 세존께서 불사를 지으시고, 소원을 만족하시고, 법륜을 굴리시고, 제도할 이를 다 제도하시니라.
모든 보살로서 높은 칭호를 받을 이에게는 수기를 주시고는 법이 응당 이와 같이 변하지 않는 크게 반열반하는 데 들어가시느니라. 불자여, 이것이 여래 응공 정등각께서 열 가지 이치를 관찰하시고 반열반하심을 보이는 것이니라.”
*
여중(如衆)의 열반(涅槃)
*
여중(如衆)의 관십종의(觀十種義)
*
불자(佛子)야: 불자야
여래응정등각(如來應正等覺)이: 여래 응정등각께서
작불사이(作佛事已)에:불사를 마치신 뒤에는. 화엄경은 불사를 마친 뒤에는 항상 부처님의 광명이, 불사를 마친 뒤에는 어디로 들어가는가? 발바닥으로 들어가고.
항상 반박귀진(返璞歸眞)하는 것이다. 순박하고 참된 데로 돌아가게 되어 있다.
우리가 경전공부를 다 했으면 순박한 쪽으로 돌아가야 된다.
순박한 데로 돌아가는 것을 서장 같은 데는 ‘점점 업장이 가벼워진다’ 그렇게 해 놨다.
관십종의고(觀十種義故)로: 열 가지 뜻을 관하기 때문이다.
시반열반(示般涅槃)하나니:열 번째 왔으니까 열반이다.
열반해 버리면 끝나는 것이다.
‘열반’하면 더 이상 갈 데가 없다. 끝.
하등(何等)이: 어떤 것이
위십(爲十)고: 열 가지냐? 열반이라고 하면 마침내 근원으로 돌아간다.
열반이 견고하고 청정하고 열반의 사덕(四德)이 무엇인가?
상(常), 락(樂), 아(我), 정(淨)이다.
이것은 세 과정을 거친다고 한다.
항상한 데 집착하니까 무상(無常)을 얘기하고 락, 즐거운 데 집착하니까 고(苦)를 이야기하고, 아(我)에 집착하니까 무아(無我)를 이야기한다. 혼탁하고 이런 데니까 청정한 걸 또 집착하니까 나중에 일체가 전부 다 부정(不淨)하다, 무정(無淨) 이런 식으로 이야기하게 된다.
상락아정을 가지고 무아다, 무정이다, 부정이다, 일체개고다, 무상하다 이렇게 해서 무(無)를 붙이고, 이것을 또 뛰어 넘으면 다시 상락아정이 나온다.
이때 나온 상락아정은 진상(眞常) 진아(眞我)다.
무슨 말인지 아실 것이다.
진아 진락(眞樂) 진짜의 낙이 뭐냐, 진짜의 아가 뭐냐, 이렇게 해야 된다고 옛날 강주스님께서 쭉 말씀해 오셨다.
3단계다.
처음에는 상락아정인데 한꺼플 벗기 위해서 무(無)자를 붙이고 또 한 거플 넘어가면 진(眞)자를 붙인다, 이렇게 해놨다.
그것도 아까 “그. 스.님이 말씀한 거에요.(각성스님)”
경전이라고 하는 것을 이렇게 보면 요즘은 그런 주장을 많이 하는데, 대장경 전체를 다 보고 난 뒤에 번역하는 사람이 조금 소견이 있을 것이다, 라는 생각이 든다.
대장경을 전체적으로 다 보신 분은 대만의 성엄스님이 있다.<108자재어>를 쓰신 성엄스님이 6년 동안 폐관하시고 대장경 전체를 다 보셨다고 한다.
우리나라에는 동국대에서 교수 하신 김동화 박사께서 신수대장경을 다 보셨다고 한다.
그리고 제가 대만에서 성엄스님 제자를 만났는데 그 제자는 스승보다 더하다. 6년간 폐관을 두 번 했다고 한다.
빼짝 마르셨는데, 대장경을 두 번 다 보셨다.
몇 년 전에 직접 만나고 선물 전달하고 온 적이 있다. 폐관하고 대장경을 6년간 매일 같이 하루도 안 쉬고 보셨을 것 아닌가.
우리도 집에 가셔서 매일 보실 것이다. 한 달에 한 번씩만 하시는 게 아니잖은가. 매일 보시고 한 달 한 번씩은 기도 발원하러 여기 오시는 것이잖은가.
화엄경은 저쪽에 사물함에 넣어놓고.
그다음에 넘어가자.
오늘 어쨌든지 게송까지 소기의 목적은 달성할 것 같다.
다음 달에는 게송까지 쫙 해서 끝난다.
소위시일체행(所謂示一切行)이:소위 모든 행이
관무상고(實無常故)며:실로 무상함을 보이려는 까닭이고
시일체유위(示一切有爲)가: 일체유위법이
비안은고(非安隱故)며: 편안하지 않음을 보이는 까닭이다.
이렇게 상락아정을 미리 한 번 짚고 딱 넘어가 버리니까 무슨 뜻인지 확 와 버렸다.
시대열반(示大涅槃)이: 열반이라고 하면 열반이 가지고 있는 뜻을 가지고 이렇게 치고 들어가야 된다.
이 열반이
시안은처(是安隱處)라: 참으로 안은한 곳이라. 은안처인데
무포외고(無怖畏故)며: 무포외, 두려움이 없음을 보이기 때문이다.
이제인천(以諸人天)이: 모든 하늘과 인간 제인천이
낙착색신(樂着色身)에: 색신 물질에 집착하는 까닭에
위현색신(爲現色身)이: 그 색신도
시무상법(是無常法)하야: 역시 무상한 법임을 보여주며, 기신론에는 이렇게 해 놨다. 초단보살이라도 짐작은 가지만은 거의 잘 알 수는 없고 여실지견이다.
그러니까 텔레비전에서 유명한 조용필 가수를 본 거 말고 실물을 딱 현장에서 관중석에서 보는 것 있잖은가.
그걸 오온개공 정심지 견도분이라 한다.
오온 정심지 견도분 그때부터 견도가 된다.
지금 여기서 얘기하는 건 견도를 지나서 이 길을 밟아 올라가서 어디까지 가느냐? 뿌리까지, 견성까지 가는 것이다.
견성은 공부의 종착역이고 견도는 공부의 시작이다.
그래서 십지보살의 초지부터는 여실수행자라. 진여와 같은 수행자라. 진실한 수행자라. 그 전까지는 그냥 프리배팅 하는 것이다. 미리 배팅 연습을 하는 것이다.
시합에 딱 들어가서 뛰는 사람, 야전에서 실제 전투하는 상황은 십지보살부터다.
십지보살은 뭐냐? 조금 전에도 계속 나왔던 이야기들이다. 오온이 개공하고 12처가 개공하고 이런 거 나왔잖은가.
거기서부터 근본을 깔고 있는 것이다.
반야심경에서 ‘행이 깊은 반야바라밀’이라 했을 때, 그냥 행이 깊은 것이 아니고 십지보살 중에서도 8지 이상 부동지를 말한다. 부동이라고 하는 것은 진여인데 진여부동 진여는 이름이 허공이다.
무위법이 여섯 가지가 있다.
허공무위(虛空無爲) 진여무위(眞如無爲) 부동무위(不動無爲) 택멸무위(擇滅無爲) 비택멸무위(非擇滅無爲) 이렇게 쭉 나오듯이 진여무위, 부동무위, 허공무위가 같은 말이다.
그 냄새가 살살 나는 게 십지보살, 그때부터 부처님하고 교섭이 있다고 나온다.
일반적으로 우리가 무명이 되는 것은 심불상응이라.
우리의 이 허망한 마음이 본심하고 상응하지 못하다가, 본심하고 처음에 초지보살인 정심지 즉 환희지에서 조금 상응하는 모습을 보인다고 하였더. 초지보살은 아주 조금 1mm 정도 약간 이렇게 실눈을 뜨고 보는 건가 보다. 그때가 견도분(見道分)인데 수도분에 들어가면 착착착착 올라갈 것이다.
그렇지만 법운지, 십지보살이 되었다 하더라도 이것은 다 할 수가 없다고 기신론에 두 번 나온다.
유불궁진이라 오직 부처님이 궁진 끝까지 알 수가 있고, 유불능진이라 오직 부처님께서 능히 알 수 있다.
그러니까 법성게에서 증지(證智)라야 소지비여경(所知非餘境)이란 말씀을 기신론에서는 유불궁진, 유불능진 이렇게 해놨다.
승가에서는 참선하는 스님들은 ‘완전히 끝나야 끝난 것이지 중간에 끝난 것은 아직 제대로 한 판 뜬 게 아니다’ 그러잖는가.
완전히 확철대오 끝났을 때 그걸 우린 ‘끝이다’ 이렇게 이야기한다. 색신도 역시 무상한 법을 보여주고
영기원주정법신고(令其願住淨法身故)며: 그들로 하여금 청정한 법신에 머물게 하기 위함이며
시무상력(示無常力)의: 무상한 힘의
불가전고(不可轉故)며: 가히 돌이킬 수, 전할 수 없는 까닭이다.
시일체유위(示一切有爲)가:일체 유위법이
불수심주(不隨心住)하야: 마음대로 머물지 않고
부자재고(不自在故)며: 자재하지 못함을 보이기 위함이며,
유위법은 시원찮다는 말이다.
시일체삼유(示一切三有)가: 시일체삼유가 3계 25유다.
삼계의 모든 존재가
개여환화(皆如幻化)하야: 환화와 같다.
삼계의 모든 존재가 환화와 같다. 헛 것이다.
불견뇌고(不堅牢故)며: 그래서 견고하지 않음을
시열반성(示涅槃性)이: 보여주는 것이다.
입법계품에 들어가면 마야부인이 나온다. 불교에서 마야를 번역하면 환생이라고 한다. 환으로 부처님을 탄생시킨다.
그러면 환으로 탄생시켜서는 생주이멸로 넘어가야 되는데, 마야부인부터 덕생동자 유덕동녀까지가 등각의 가르침이다.
그 유덕동녀까지, 덕생동자 유덕동녀가 환주법문이다.
환주(幻住) 환으로 머물다. 생주이멸하듯이 환주로 머무른다.
원각경 보현보살장에 보면은 지환즉리라. 환인 줄 알았으면 바로 떠나라. 속지말라고 나온다.
일체오온개공인 줄 알았으면 벗어나라.
지환즉리(知幻即離)요 이환즉각(離幻即覺)이라.
환을 완전히 떠나고 나면 그 자리가 무명무상절일체(無名無相絶一切)다.
무명(無名)이라고 하는 것은 정신적인 흔적, 희로애락이 없다는 것이다. 이름을 붙일 수가 없다.
무상(無相)이라고 하는 것은 형형색색이 바깥의 모습이 육신이 없다는 것이다.
무명무상(無名無相) 그러니까 마음도 없고 몸도 없고 절일체(絶一切) 일체가 다 끊어진 것을 우리는 약인욕식불경계(若人欲識佛境界) 부처님의 경계를 알고 싶으냐 당정기의여허공(當淨其意如虛空) 원리망상급제취(遠離妄想及諸取) 영심소향개무애(令心所向皆無碍)라 이렇게 하는 것이다.
여기 전부 그런 얘기들이 쭉 있는데 주제는 오늘 문수선원 벽에 붙여 놓은 중도(中道)다.
원행지에 여러분들이 십지 원행지 37번에 보면 이런 것이 잘 나온다.
“그러면 공부 끝나면 어찌해야 됩니까?”
“중생이 있는 한에는 공부가 끝날 날이 없다.”
“그럼 어떻게 해야 돼요?”
“장엄하지 않는 줄 알면서 장엄은 하고, 도둑질하지 않는 줄 알면서 도둑질하고, 화가 없는 줄 알면서 화를 낸다.”
기신론에는 이렇게 해 놨다.
‘법성이 공한 까닭으로 보시를 하고, 또 법성이 공한 까닭으로 계율을 지키고, 법성이 공한 까닭으로 인욕을 한다’
요지일체법 자성무소유 그걸 철저하게 해 놓았다.
바라밀행 육바라밀을 그렇게 정리하고, 그런 것을 더 전폭적으로 중도견해에서 설명을 잘해 놓으신 게 여러분들 책을 다 받으셨던 만선동귀집의 중도송, 거기에 육바라밀 있잖은가.
십바라밀 육바라밀이 철저하게 수월도량이라 해서 잘 나와 있다. 세종대왕의 월인천강지곡에도 그것이 고대로 들어가 있고 정조대왕이 그걸 다시 인용해 놓은 것에도 그대로 나와 있다.
옛날 어른들은 그걸 다 알았던가 보다.
구경견뇌(究竟堅牢)하야:
불가괴고(不可壞故)며:
시일체법(示一切法)이: 모든 법이
무생무기(無生無起)호대 :무생무기라 불생 불멸이다. 생겨남도 일어남도 없으면서
이유취집산괴상고(而有聚集散壞相故)라: 생주이멸 성주괴공이라. 모였다 흩어지고 무너지는 모습이 있음을 보이기 위한 것이다.
본래 없지만 그 무생이 바로 부동이다. 무생이 구래부동명위불, 구래무생본래불이다.
무생을 부처님이라 한다.
무명을 부처님이라 한다.
불생불멸 불구부정 부증불감 본래 불구부정이다.
본래 부증불감이고.
불자(佛子)야:불자야
제불세존(諸佛世尊)이:모든 제불세존께서
작불사이(作佛事已)하며: 이러한 불사를 마치시고
소원만이(所願滿已)하며: 서원을 원만히 이루시며
전법륜이(轉法輪已)하며: 법문을 굴리시고
응화도자(應化度者)를: 교화해야 될 응당히 교화해야 할 중생들을
개화도이(皆化度已)하며: 모두 교화하여 건지시며
유제보살(有諸菩薩)이:또한 여러 보살들 가운데에
응수존호(應受尊號)어든: 마땅히 존귀한 명을 받아야 할 이들에게
성기별이(成記莂已)에: 수기를 이미 주신 뒤에는
법응여시입어불변대반열반(法應如是入於不變大般涅槃)이니:
법에 마땅히 그러함으로 입어불변이라.
변함이 없는 이 불변을 다른 말로는 불변동이라 한다.
불변이 부동이기 때문에 이런 것을 항상하다고 상락아정이라 할 때의 상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이다.
부동이 상(常)이다.
얼마나 중요하면 법성게 앞에 한번 법성원융무이상(法性圓融無二相) 확 찍어서 제껴놓고 제법본래본래적(諸法不動本來寂) 해놓고 마지막에 가서 구래부동명위불(舊來不動名爲佛) 구래나 본래나 똑같은 말이다.
똑같은 얘기가 계속 돌고 있다.
법성게는 두 구절만 딱 잡고 늘어지면 된다.
요지일체법 자성무소유 법성원융무이상 그렇게 되는 것이다.
법도 성도 본래 없다.
법이라고 하는 것은 일체법이요. 성이라고 하는 것은 심성 자성의 근본이다.
변함이 없는 큰 열반에 들어가신다. 이때 반은 대반은 구경열반이다. 대반(大般) 크게.
반(般)은 지난 번에 뭐라고 했는가?
앞에 반을 우리말로 해석하면 구경이다.
반열반 또 대반은 큰, 구경이라든지 입(入)이라고 한다.
반자를 들어갈 입(入)자라 한다.
열반을 멸이라고 한다.
입멸이라 하고, 구경하고 원만하기 때문에 반을 원(圓)이라고 한다. 반은 대반 크게 원만하다.
대원만이고 열반은 고요 적(寂)자를 쓴다. 그래서 원적이라고 하잖는가. 원적이라는 말이 반열반 이렇게 표현한다.
반열반이라면 저쪽 말이나 이쪽 말로 하면은 원적(圓寂) 입멸(入滅) 이와 같이 말하는 것이다.
이런 것을 잘 모르면 ‘아유, 그 스님 좌탈입망했다’고 한다.
앉아서도 죽고 서서도 죽는가?
앉아서 돌아가시면 좌탈하셨다. 서서 돌아가시면 입망하셨다 이래야 되는데 앉아서 돌아가셨는데 좌탈입망하셨다고 하면 무식하다.
설 립(立)자 아닌가.
좌탈이면 좌탈이고 입망이면 입망이지 좌탈입망이라니.
부처님께서 와선하셨다. 누워서 가셨다.
부처님 따라가는 게 제일 편하게 가는 것이다.
관계지한(灌溪志閑)선사는 서서 가 버리시고, 그 별난 등은봉(鄧隱峯)스님은 물구나무를 서서 가셨다. 아유 별나다. 평소에 살 때도 별나고 돌아가실 때도 앉아서 갔다, 서서 갔다, 누워서 갔다, ‘에이 나는 물구나무 서서 간다’고 그렇게 가셨다.
반열반 하셨다.
불자(佛子)야: 불자야
시위여래응정등각(是爲如來應正等覺)의: 이것이 여래 응공 정등각의
관십의고(觀十義故)로:열 가지 뜻을 관하기 때문에
시반열반(示般涅槃)이니라 : 반열반을 나타내는 것이다.
五. 法門의 名稱과 勸學
佛子야 此法門이 名菩薩廣大淸淨行이니 無量諸佛의 所共宣說이라 能令智者로 了無量義하야 皆生歡喜하며 令一切菩薩로 大願大行이 皆得相續이니라 佛子야 若有衆生이 得聞此法하고 聞已信解하며 解已修行하면 必得疾成阿耨多羅三藐三菩提하리니 何以故오 以如說修行故니라 佛子야 若諸菩薩이 不如說行이면 當知是人은 於佛菩提에 則爲永離니 是故菩薩이 應如說行이니라 佛子야 此一切菩薩의 功德行處며 決定義華며 普入一切法이며 普生一切智며 超諸世間이며 離二乘道며 不與一切諸衆生共이며 悉能照了一切法門이며 增長衆生出世善根이며 離世間法門品이라 應尊重하며 應聽受하며 應誦持하며 應思惟하며 應願樂하며 應修行이니 若能如是면 當知是人은 疾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니라
“불자여, 이 법문은 이름이 ‘보살의 광대하고 청정한 행’이니, 한량없는 모든 부처님께서 함께 말씀하시는 것이니라. 지혜 있는 이로 하여금 한량없는 이치를 알고 환희케 함이며, 모든 보살의 큰 서원과 큰 행이 서로 계속하게 함이니라.
불자여, 만일 중생들이 이 법문을 듣고는 믿고 이해하고, 이해하고는 수행하면 반드시 빨리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나니, 왜냐하면 말한 대로 수행하기 때문이니라.
불자여, 만일 모든 보살이 말한 대로 행하지 않으면 마땅히 알라. 이 사람은 부처님의 보리를 영원히 떠날 것이니라. 그러므로 보살은 마땅히 말한 대로 행할지니라.
불자여, 이것은 모든 보살의 공덕행의 장소며, 결정한 뜻의 꽃이며, 일체 법에 두루 들어가며, 일체 지혜를 널리 내며, 모든 세간을 초월하며, 이승(二乘)의 도를 여의며, 일체 모든 중생과 함께하지 않으며, 일체 법문을 모두 비추어 알며, 중생의 세간을 벗어나는 선근을 증장하게 하며, 세간을 여의는 법문품이니라.
마땅히 존중하며, 마땅히 들으며, 마땅히 외우며, 마땅히 생각하며, 마땅히 좋아하며, 마땅히 수행할지니, 만일 능히 이와 같이 하면 마땅히 알라. 이 사람은 빨리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느니라.”
*
법문(法門)의 명칭(名稱)과 권학(勸學)
*
불자(佛子)야 :불자야
차법문(此法門)이: 이 법문이
명보살광대청정행(名菩薩廣大淸淨行)이니 : 이름이 광대청정행이다. 보살의 광대라는 말이 나오기까지는 앞에 깊다는 말, 심심이 나와야 된다. 무상심심미묘법.
그 깊다는 말 이전에 정직함 직심이 나와야 되고, 정직하고 곧고 깊고 넓다 곧다고 하는 것은 진여법을 바로 생각한다고 원효스님께서 해석을 해놨다.
깊다고 하는 것은 선법, 중선봉행(衆善奉行)을 깊다고 이야기하고, 그다음에 제악막작(諸惡莫作)이고 모든 발고여락(拔苦與樂)이라. 중생들에게 낙을 주는 것은 깊은 마음이고 고통을 뽑아 주는 것은 넓은 마음이다, 이렇게 이야기한다.
관세음보살도 자비를 상징하지만 천수라고 할 때는 자비이고, 천안은 지혜를 상징하는 것이다.
그래서 지혜와 자비, 복과 지혜가 같이 붙어 있는 것이다.
보살이 광대하고 그러나 그 어디에도 집착하고 눌러붙지 않기 때문에 청정한 행이다.
조금도 티끌만큼도 없는 이 청정한 행을 반야심경은 이무소득고(以無所得故) 금강경은 응무소주이생기심(應無所住而生其心) 무주(無住)라. 청정한 행이라 이름하며
무량제불(無量諸佛)의: 한량 없는 모든 부처님께서
소공선설(所共宣說)이라: 설하신 것이다.
능영지자(能令智者)로 : 이 법문은 지혜 있는 하여금
요무량의(了無量義)하야: 한량없는 뜻을 깨닫게 하여
개생환희(皆生歡喜)하며: 모두 환희심을 내게 한다.
영일체보살(令一切菩薩)로: 또한 모든 보살들로 하여금
대원대행(大願大行)이: 큰 서원과 큰 수행이
개득상속(皆得相續)이니라: 모두 상속하여 끊어지지 않게 하고
불자(佛子)야: 불자야
약유중생(若有衆生)이:만약에 어떤 중생이
득문차법(得聞此法)하고: 이 법을 듣고는
문이신해(聞已信解)하며: 듣고 나서는 믿고 이해하고
해이수행(解已修行)하면: 이해하고 나아가서는 수행한다. 신해행증 이렇게 나가는 것이다.
왜 수행이 안 되고 실천이 안 되느냐? 알지 못하면, 이해가 안 되기 때문에 실천이 안 된다.
아는 사람은 반드시 실천한다고 되어 있다.
저 사람이 실천하면 ‘아, 이거 아는 사람인가 보다’ 말없이 밥 한 그릇을 딱 주면 아는 사람이다.
이렇게 안 주면, 이해를 시켜야 된다.
“밥 도 배고프다. 밥 도 배고프다.”
그렇게 되면 마지막에 신해행증이 되잖는가?
필득질성아뇩다라삼멱삼보리(必得疾成阿耨多羅三藐三菩提)하리니 :증은 뭔가? 득(得)자로 해놓았다. 필득아뇩다라삼먁삼보리다. 저 앞에 범행품 제일 말미에 뭐라고 나왔는가?
초발심시 즉득아뇩다라삼먁삼보리 질득이라 하기도 하고 즉득이라 하기도 한다.
베풀어 줄 때는 어떻게 베풀어 주라고 나왔는가?
보현행원품에 나왔다.
질질이시(疾疾而施) 빨리빨리 베풀어주라.
질득할 때의 빠를 질(疾)자 질질이시, 폼 잡고 베풀어 주지 말고, 사진 찍고 베풀어 주지 말고, 무조건 베풀어 주라. 질질 그러니까 질질 흘리라고 그러는가 보다. 질질이시.
앞엣 것을 야무지게 읽어 놓으면 여기 것하고 저기 것 하고 서로가 서로가 비쳐서 화엄경도 중중제망이다.
앞엣것을 읽다가 뒤의 것이 해석되고, 뒤의 것을 읽다가 앞의 것이 해석이 된다.
근데 앞엣것을 다 까먹고 하나도 없다. 신기한 건 내 머릿속의 지우개다.
하이고(何以故)오:어떠한 까닭이냐.
이여설수행고(以如說修行故)니라: 여설수행 나왔다.
여설수행이 바로 여실수행이다.
말한다는 것은 이해한다는 것이다.
부처님이 말한 대로 수행하기 때문이다. 말하고 수행하고.
보통 우리가 겉 다르고 속 다르지 않은가.
여실수행은 완전히 그쪽에 냄새 맡은 사람의 입장이다. 요때부터는 마음이 본심하고 상응한다고 한다. 부동하고 상응한다. 제법부동본래적 그 부동하고 상응한다.
부동이란 말도 남이 나를 아무도 안 밀어서 가만 있는 게 부동이 아니다.
물리적으로 심리적으로 어떤 힘이 와서 나를 밀더라도 허공처럼 밀리지 않으면 그때가 부동이라.
없는 것이 어떻게 밀리겠는가.
부동에 있어서 건드려 가지고 흔들리거나, 안 건들어 가지고 가만 있는 것은 부동이 아니다.
허공은 바람이 불든지 망치가 치든지 칼에 스쳐가든지 부동이다. 완전 부동이다.
부처님이 그래서 무아상 무인상 무중생고로 내가 화나지 않았다. ‘아, 그게 부동이네’ 이렇게 된다.
부동은 오온개공이 돼야 된다.
불자(佛子)야: 불자야
약제보살(若諸菩薩)이: 만약에 보살들이
불여설행(不如說行)이면: 말한 대로 행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당지시인(當知是人)은: 이 사람은 마땅히 알지니
어불보리(於佛菩提)에: 부처님 보리법에서
즉위영리(則爲永離)니: 영원히 멀어지게 되는 것이다. 입만 살아 가지고.
시고보살(是故菩薩)이:이러한 까닭으로 보살이, 보살은 어떻게 해야 되는가?
응여설행(應如說行)이니라 : 마땅히 여설행이라. 응여설행이라. 줄을 백 번 그어야 한다. 빵꾸 날 때까지 그어야 한다.
*
불자(佛子)야: 불자야
차일체보살(此一切菩薩)의: 이 일체보살의
공덕행처(功德行處)며: 공덕행처며
결정의화(決定義華)며: 이것이 결정된 진리의 꽃이다.
꽃이라고 하는 건 바라밀행이다. 집착없는 행 청정행
보입일체법(普入一切法)이며: 모든 법에 두루 들어가게 하는 것이며
보생일체지(普生一切智)며 :모든 일체지를 널리 생겨나게 하는 것이며
초제세간(超諸世間)이며: 모든 세간을 뛰어넘는 것이며
이이승도(離二乘道)며: 성문 연각의 길을 벗어나는 것이다.
불여일체제중생공(不與一切諸衆生共)이며 : 모든 중생과 더불어서 함께 하지 않는 것이며
실능조요일체법문(悉能照了一切法門)이며: 모든 법문을 환히 비추어 아는 것이며
증장중생출세선근(增長衆生出世善根)이며: 중생의 출세간의 선근을 증장시키는 것이며
이세간법문품(離世間法門品)이라 : 이세간법문품이라 세간의 법문품을 떠나게 하는 것이다. 세간을 떠난 법문품이다.
응존중(應尊重)하며: 마땅히 존중해야 되고
응청수(應聽受)하며 : 마땅히 청수해야 되고, 듣고 받아 지녀야 되고
응송지(應誦持)하며:마땅히 송지해야 되고, 외워서 지녀야 되고
응사유(應思惟)하며 :마땅히 사유해야 되고, 제 경우를 보면 외운 것만 마음속에서 자란다. 많이 외운 사람이 아무래도 많이 변하게 되어 있다.
응원락(應願樂)하며 : 마땅히 즐겨 발원하게 되고
응수행(應修行)이니: 마땅히 수행해야 한다.
약능여시(若能如是)면: 만약에 능히 이와 같으면
당지시인(當知是人)은: 이 사람은 마땅히 알지니
질득아뇩다라삼먁삼보리(疾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니라 :이 사람은 질득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
六. 祥瑞
說此品時에 佛神力故며 及此法門의 法如是故로 十方無量無邊阿僧祗世界가 皆大震動하며 大光普照하니라
이 품은 설할 때에 부처님의 신통한 힘과 이 법문의 법이 이와 같은 까닭에 시방의 한량없고 그지없는 아승지 세계가 모두 크게 진동하고, 큰 광명이 널리 비치었습니다.
*
상서(祥瑞)
*
그다음, 상서가 나타난다. 상서가 나타나는 것은 증명을 하는 것이다. 1회차에도 상서가 나타나면 증명, 2회차 법문도 상서가 나타나면 증명, 3회차 4회차 신해행증마다 그렇게 증명이 나타난다. 십주품, 십행품, 십회향품도 마지막에 보면 전부 다 그 증명이 있다.
*
설차품시(說此品時)에:이 품을 설할 때
불신력고(佛神力故)며:부처님의 신력 때문에
급차법문(及此法門)의 : 또 이 법문의 법이
법여시고(法如是故)로: 본래 그러하기 때문에
시방무량무변아승지세계(十方無量無邊阿僧祗世界)가:시방에 한량없고 끝없는 아승지 세계들이
개대진동(皆大震動)하며:다 진동하고
대광보조( 大光普照)하니라 : 큰 광명이 널리 비추었다.
七. 十方諸佛의 證明
爾時에 十方諸佛이 皆現普賢菩薩前하사 讚言하사대 善哉善哉라 佛子야 乃能說此諸菩薩摩訶薩의 功德行處와 決定義華와 普入一切佛法과 出世間法門品이로다 佛子야 汝已善學此法하며 善說此法하며 汝以威力으로 護持此法일새 我等諸佛이 悉皆隨喜하노니 如我等諸佛이 隨喜於汝하야 一切諸佛도 悉亦如是니라 佛子야 我等諸佛이 悉共同心으로 護持此經하야 令現在未來諸菩薩衆의 未曾聞者로 皆當得聞이니라
그때에 시방의 모든 부처님이 보현보살의 앞에 다 나타나서 칭찬하시었습니다.
“훌륭하고 훌륭하여라. 불자여, 그대가 능히 이 모든 보살마하살의 공덕행의 장소며, 분명한 진리의 꽃이며, 일체 불법에 두루 들어가는 출세간법문품을 설하였도다.
불자여, 그대가 이미 이 법을 잘 배웠고, 이 법을 잘 설하고, 그대의 위덕과 힘으로 이 법을 능히 보호하여 지니니, 우리 모든 부처님이 모두 따라 기뻐하느니라. 우리 모든 부처님이 그대를 따라 기뻐하듯이 일체 모든 부처님도 또한 그러하느니라.
불자여, 우리 부처님이 모두 같은 마음으로 이 경을 보호하여 지녀서 현재와 미래의 모든 보살들이 아직 듣지 못한 이로 하여금 모두 다 듣게 하리라.”
*
시방제불(十方諸佛)의 증명(證明)
*
이시(爾時)에:그때에
시방제불(十方諸佛)이: 시방의
개현보현보살전(皆現普賢菩薩前)하사:모든 부처님께서 보현보살 앞에 나타나시어
찬언(讚言)하사대:칭찬하시고 말씀하시되
선재선재(善哉善哉)라:선재선재라
불자(佛子)야:불자야
내능설차제보살마하살(乃能說此諸菩薩摩訶薩)의:내능설차제보살마하살의
공덕행처(功德行處)와: 공덕행처와
결정의화(決定義華)와: 결정의화와
보입일체불법(普入一切佛法)과: 모든 부처님의 법에 두루 들어가는 것이며
출세간법문품(出世間法門品)이로다: 출세간법문품이라. 아까는 이세간이라 했잖은가.
불자(佛子)야: 불자야
여이선학차법(汝已善學此法)하며: 그대가 이 법을 잘 배워서
선설차법(善說此法)하며: 이 법을 잘 설하고
여이위력(汝以威力)으로: 그대의 위신력으로
호지차법(護持此法)일새: 이 법을 잘 보호하고 지녔으므로
아등제불(我等諸佛)이: 우리 모든 부처님이
개실수희(悉皆隨喜)하노니:개실수희하니라.
이세간품은 모든 부처님께서 증명을 해 주신다.
그러면 십회향품은 누가 증명을 하는가?모든 공덕림보살들이 와서 증명을 한다.
십지품에는 금강장 보살들이 와서 증명을 한다.
그러면 십주품에 누구인가? 모든 법혜보살들이 와서 증명을 한다.
수기는 누가 주는가? 부처님이 주시고 증명은 보살들이 한다.
여기는 부처님이 증명을 하니까 보현보살이 곧 부처님하고 동급이다. 이렇게 볼 수가 있다.
여아등제불(如我等諸佛)이: 여아등제불이 우리 모든 부처님께서
수희어여(隨喜於汝)하야: 그대와 함께 수희하여
일체제불(一切諸佛)도: 모든 부처님 또한
실역여시(悉亦如是)니라: 그대에게 기뻐한다.
불자(佛子)야: 불자여
아등제불(我等諸佛)이: 우리 모든 부처는 아등제불은
실공동심(悉共同心)으로: 실공동심으로 요런 게 평등이라고 한다.
긍만세이장금(亘萬歲而長今)이요 역천겁이불고(歷千劫而不古)라. 천 년 만 년 지나도 이 일심에서는 너와 내가 둘이 아니다,이 말이다.
비유하면 이렇다.
바다는 여기 하나다. 고기는 다양하다. 그게 천 백억 화신이다. 허공은 하나다. 천 년이 됐든 만 년이 됐든 허공은 일법이고 무상법이다. 일상무상이다.
이 허공에 다양한 별이 있는 것은 천백억 화신이다.
김해 벌판이 땅덩어리 하나 쭉 되어 있는 것은 하나의 일상의 일법이다. 그 일법이 무위법이다.
그런데 파밭도 있고 감자밭도 있고 토마토 밭도 있고 나락밭도 있고 곡식 소출이 다르잖는가. 이것은 천백 억 화신이다.
이 몸에 피가 있으면 그 피는 일법이다. 그런데 정맥이 있고 동맥이 있고 서로 오고 가는 게 차이가 있으면 다양한 것이다.
왕복이 무제나 동정은 일원이라.
움직이든 안 움직이든 그 근원은 하나다.
하나는 무원이다. 없는 것이다. 우리 모든 부처님이
호지차경(護持此經)하야 : 이 경을 보호하여 지니며
영현재미래제보살중(令現在未來諸菩薩衆)의 : 현재와 미래와 모든 보살 대중 가운데
미증문자(未曾聞者)로: 아직 듣지 못한 사람들로 하여금
개당득문(皆當得聞)이니라 : 모두 마땅히 듣게 하려는 것이다. 이래서 게송 앞에까지 오늘 마쳤다.
다음 시간에 게송을 쭉 달려서 이세간품을 다음 달에 끝내겠다. 감사하다.
근념하셨다.
(죽비소리)
하강례
로봇5계는 "과충전하지말지어다"
서울에서 사셔서 자칭 ‘수도승’인 큰스님의 법제자 원철스님은 여러 매체에 투고하시는 원고를 <다음카페 염화실>에도 정기적으로 올려주신다.
지금 찾아보니 원철스님의 글 옮기기 심부름을 시작한 것은 2019년 4월29일부터였다.
“염화실에 잘 옮겼습니다.” 문자로 보고를 하면 고맙다는 답장을 주시는데 이번 달 답장은 특이하게도 사진이었다.
가비스님과 함께 종로를 돌고 충전을 하는 중이라고 하셨다. 로봇5계도 적어 주셨다.
연등회에 로봇스님이 등장한 것은 파격이라서 온라인 뉴스로 미리 읽었었다.
누군가 댓글로 ‘왜 스님인가 보살이 아니라’하고 안티 같은 글을 올렸는데 ‘보살이 더 높으신 데?’ 즉각적으로 물음표가 떠올라서 스스로가 좀 유식한 느낌이 들었다.
*
이번 달 법회가 끝나고 방과후 수업으로 경제어산 전승교육사이신 회장스님께 열 분 정도의 스님들이 상강례와 하강례 곡조를 새로 교정하며 배우셨다. 동영상으로 찍었는데 하필이면 제일 마지막 하이라이트 합송 부분에서 손가락이 잘못 눌러졌다. 곧바로 새로 녹화를 했는데 덕분에 동영상 자르기 기술이 없는데도 저절로 유튜브에 쇼츠 영상을 얻게 되었다.
연습에 연습을 한 끝에 모두가 합송하시는 “시방삼세일체불 제존보살마하살 마하반야바라밀” 소리가 고스란히 큰스님께 전해질 것 같았는데, 지금 살펴보니 그저 이름을 부르는 소리라는 것이 신기하다.
*
병실에서 큰스님께서 법문들을 잘 모아두라고 하셨다.
유튜브 법성게 법문 녹취, 지난 번 3강에 이어서 4강을 올린다.
화엄경 3방 법성게 4강
2026년 4월 23일 목요일
반갑습니다.
증지소지비여경(證智所知非餘境)
그동안 법성게를 가지고 공부하고 있는데 아, 이 법성게는 아무리 아무리 천착해도 마음에 썩 들게 그렇게 해석이 안돼요.
최대한 하여튼 여러 가지를 참고해서 제가 그동안 경험한 거, 깨달은 거, 불교에 대해서 알고 있는 거, 다 동원해서 이해하려고 이해하려고 하는데 그야말로 증지(證智) 깨달은 지혜라야 아는 제대로 아는 거지. 그 나머지 알량한 지식이나 알량한 그런 조금 공부한 것, 그거 가지고는 도저히 제대로 알 수 있는 경계가 아닌가 봐요. 그래서 증지소지비여경이라고 했지. 안그러면 뭐 하려고 증지소지비여경이라고 했겠어요? 또 나가면은 이런 말이 있어요. 십불보현대인경이라고 하는 말도 있습니다.
십불보현대인경(十佛寶賢大人境)
시방 부처님이나 보현보살이나 대인의 경계이지 아무나 그냥 무비 같은 사람이 알 수 있는 그런 경계는 아니다. 그렇지만은 우리는 우리 그릇만치 조금씩 조금씩 이해해 들어가다 보면 또 설명하고 그러다 보면 조금씩 이해가 더 깊어지지 않겠나? 그런 기대감을 가지고 해야지.
그냥 뭐 ‘이거는 성인의 경계다. 깨달은 사람의 경계다. 지혜를 터득한 사람이나 할 수 있다. 십불경계다. 보현의 경계다. 대인의 경계다. 이렇게만 미룰 일은 아니다’ 그런 면도 있죠. 그런 입장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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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이 법성게라고 하는 이름은 이 세상을 이야기하고 싶고 이 세상의 본질을 이야기하고 싶다. 그래 법은 눈에 보이는 현상들, 모든 세상의 현상을 다 거론하는 입장이고 성은 본질이다. 현상은 현상대로 그리고 본질은 본질대로 그래요. 그래서 현상과 본질 그렇게 이야기를 했습니다.
지금도 계속 그 얘기예요.
그러면 우리가 어느 나라에 관광을 가 가지고 경치를 본다 하더라도 일단 눈에 보이는 걸 이야기할 거 아닙니까?
그다음에 눈에 안 보이는 것도 이야기할 수가 있고 알 수도 있죠.
그렇습니다. 그래서 의상스님께서도 눈에 보이는 것부터 이야기하고 그다음에 눈에 보이지 않는 것 이야기하고 이런 식으로 들어가고 있네요. 그래서 법성원융무이상 제법부동본래적,무명무상절일체 증지소지비여경이라 이렇게까지 했습니다.
진성심심극미묘(眞性甚深極微妙)
그런데 성에 대해서 법에 대해서 이야기했는데 그다음 구절 진성심심극미묘 이거는 성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그래 법은 법성(法性) 해 놓고 그다음에 제법 이야기가 있었고 그다음에 오늘은 진성, 모든 존재의 근본자리, 본성자리 그것을 진성이라고 하자.
그것은 매우매우 깊고 깊어서 지극히 미묘하다. 진성심심극미묘 안 보이는 거니까요. 안 보이는 거 참 알기 어렵습니다. 보이는 것은 우리가 그런대로 정확하게는 알지 못하죠.
보인다고 해서 어디 제대로 아나요?
사람을 보는 일도 그렇고 사물을 보는 것도 그렇고 보인다고 해서 다 아는 거 아닙니다. 그냥 보이는 거, 자기 그 사람 상식만치 아는 거죠.
그런데 보이지 아니한 세계, 보이지 않은 세계도 얼마나 깊고 넓고 많습니까?
그래서 진성심심극미묘라 진성은 참성품은 심심 매우 깊어서 지극히 미묘하다.
불수자성수연성(不守自性隨緣成)
그래서 그 진성의 자성을 지키지 아니하고 인연 따라서 이루어진다. 인연 따라서 그래서 현상을 이렇게도 표현하고 저렇게도 표현하고 사람마다 얼굴이 다르고 마음은 하난데 결국 얼굴이 다르고 생활이 다 다르고 별의별 현상을 자아내고 현상을 연출하고 하지 않습니까? 그게 불수자성수연성이라.
자성을 지키지 아니하고 인연 따라서, 그 사람의 인연 따라서 이룬다.
내가 가끔 이야기하죠. 모든 사람들은 24시간 하루가 24시간이라고 하는 밑천은 똑같다.
24시간이라고 하는 밑천은 똑같은데 그걸 가지고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서 그 사람의 삶이 천양지차로 달라진다.
수연성이죠.
인연 따라서 그 사람의 능력 따라서 그렇게 달라집니다.
그런데 공간적인 입장에서 이야기해 보고 시간적인 입장에서도 살펴보는 게 있습니다. 그래서 밖으로 드러난 법 모든 것 이야기했고 대충.
그다음에 또 그 본성을 또 대충 이야기했습니다.
오늘 진성심심극미묘 불수자성수연성 내용면도 대충 이야기했습니다.
근데 또 이제 이렇게 돌아보니까 법과 성만 있는 게 아니라 공간도 있더라. 시간도 있더라. 세상에 그렇죠. 그렇습니다.
일중일체다중일(一中一切多中一)
그래서 공간을 말씀하시는데 이것도 우리는 불교 이야기를 하도 들어서 그런대로나마 이해한다고 하고 있죠.
일중일체다중일. 아, 그거 뭐 뻔한 거 아니냐?
일즉일체다즉일(一卽一切多卽一)
또 일즉일체다즉일 하나가 곧 일체고 일체가 곧 하나다.
하나 가운데 일체가 있고 일체 가운데 하나다.
공간을 그렇게 봅니다. 그것도 깨달은 사람의 입장에서는 얼른 이해합니다. 불교공부 많이 한 사람도 그런대로 이해해요.
일미진중함시방(一微塵中含十方)
일체진중역여시(一切塵中亦如是)
그다음에 또 일미진중함시방 일체진중역여시까지 이 공간 문제를 그렇게 뭉뚱그려서 네 구절로 딱 이렇게 간단하게 설명했는데 참 이야깃거리가 많죠.
예화를 들어서 이야기한다든지 현대 과학을 들어서 이야기한다든지 아니면 저 우주 공간 은하계를 들어서 이야기한다든지 하기로 하면은 뭐 끝없이 이야기가 펼쳐질 수가 있습니다마는 그쯤 하면은 우리 불자들은 다 짐작하리라고 생각을 하고. 그다음에 시간 문제가 또 있더라고요.
눈에 보이는 법, 보이지 아니하는 성 그리고 공간의 문제, 그다음에 시간의 문제 시간은 뭐라고?
무량원겁즉일념(無量遠劫卽一念)
일념즉시무량겁(一念卽是無量劫)
무량원겁즉일념 일념즉시무량겁 유명한 말이죠.
한량없는 길고 긴 세월이 한 순간에 있다.
그렇죠. 80년, 90년, 100년이라 하더라도 그 가운데 1초만 잘라내 버려도 그 100년이라고 하는 시간이 존재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요. 그게 다 하나로 뭉뚱그려서 설명이 가능합니다.
일념즉시무량겁이라는 것도 그렇죠.
한 순간이 곧 한량없는 세월이다.
한 순간과 한량없는 세월.
저도 80 인생을 살았지만은 어릴 때 돌이켜 생각해 보면 참 꿈만 같은 세월이 지나갔죠.
일념즉시무량겁입니다.
구세십세호상즉(九世十世互相卽)
그런데 불교에서는 시간을 또 아주 잘게 쪼개면은 9세 10세 그래요.
9세는 과거 중에 과거 현재 미래, 현재중의 과거 현재 미래 미래 중에 과거 현재 미래 그렇게 나눕니다.
그다음에 10세는 현전일념(現前一念) 어디도 속하지 아니하는 현전일념을 더하면은 10세 그래. 호상즉이라.
그 다양하게 나눌 수 있는 시간성이 서로서로 즉해 있다. 맞물려 있다. 연결되어 있다.
어떻게 보면 손과 손가락과 같은 관계다. 손하고 손가락 아 이거 뗄 수 없잖아요. 그렇지만 또 어떻게 보면 손가락하고 손하고 달라.
다른 것 같으면서도 또 하나야. 하나면서 같고 같으면서 하나호상즉이 그렇습니다. 서로서로 즉해 했다.
손과 손가락처럼 그렇게 즉해있다.
우리 어릴 때의 인생, 지금 인생 전부 즉해 있습니다. 연결돼 있습니다.
잉불잡난격별성(仍不雜亂隔別成)
그래서 뭐라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잡난하지 아니하고 격별하게 서로서로 나눠서 이루어졌다.
잉(仍)자가 인할 잉자인데 9세 10세 호상즉 돼 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잡난하지 아니해.
서로서로 얽혀 있고 하나로 즉해 있다면은 잡난해야 할 텐데 안 그래. 다 따로따로야. 전부 따로따로야.
어제는 어제고 오늘은 오늘이고, 10년은 10년 전이고, 20년 전은 20년 전이고, 30년 전은 30년 전이고, 30년 후는 30년 후고 따로따로 이루어져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잡난하지 아니하고 따로따로 격별이 이루어져 있다. 시간의 문제가 그렇습니다.
야, 참 의상스님은 물론 깨달으신 분이고 화엄경도 깊이 공부하셨고, 그 외에 불교 경전을 다 통달하신 그런 분의 안목으로 이렇게 했으니 이게 쉽게 납득이 가겠습니까?
또 쉽게 납득이 가는 것이 아니라고 해서 밀쳐 두기만 할 일은 또 아니에요.
그래서 우리가 평생을 읊조리는 것입니다. 평생을 읊조려요.
야, 오늘은 그 진성의 문제, 법성 어제까지가 법과 성의 이야기를 했다면은 오늘은 성, 진성, 자성 같은 뜻입니다.
성품의 참다운 성품은 매우 깊고 깊어서 지극히 미묘하다. 그 자성은 가만히 있지 않고 인연 따라서 이루어진다.
거기까지가 현상과 본질 눈에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아니한 세계.
아 이거 눈에 안 보인다고 어떻게 무시합니까? 특히 의상스님 같은 눈의 안목으로 무시할 수가 없죠. 그렇습니다. 사람과 사람의 만남에도 역시 그렇습니다. 눈에 안 보이는 면을 우리가 무시하면 안 되죠.
무시하고 만날 수는 없습니다.
그러고 보니까 한숨 돌리고 나니까 공간이 있고 시간이 있더라.
그 공간은 일중일체다중일 일즉일체다즉일 일미진중함시방 일체진중역여시 아, 이게 공간을 요렇게 함축해 가지고 의미 심장하게 이렇게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러고 나니까 또 시간을 또 거론하지 않을 수가 없어.
무량원겁즉일념 일념즉시무량겁
이거 뭐 자꾸 천번 만 번 읽어 가지고 읽으면서 느끼고 깨닫고 하나하나 거기에 눈 뜨고 그렇게 할 일이지요.
어쭙잖은 사람의 설명 하나를 가지고 이해한다? 아, 어림도 없습니다. 제가 아무리 설명을 잘한다 하더라도 그거는 내 나름대로의 설명이고 그 외에 또 어떤 사람이 설명한다 하더라도 그것도 또 그 사람 나름대로 설명이지 완벽한 설명이 있을 수가 없죠.
그렇습니다. 아, 그러니까 시간이 있고 공간이 있고 시간이 있고. 시간 문제도 참 우리가 구세십호상즉이라고 하면서 그러나 잡난하지 아니하고 격별이 따로따로 독립해서 이루어져 있다. 지나간 시간 뭐 어떻게 되돌릴 수 없죠. 도저히 되돌릴 수가 없는 게 지나간 시간입니다.
앞으로 올 시간도 마찬가지고요.
법성원융무이상(法性圓融無二相) 제법부동본래적(諸法不動本來寂) 무명무상절일체(無名無相絶一切) 증지소지비여경(證智所知非餘境) 진성심심극미묘(眞性甚深極微妙) 불수자성수연성(不守自性隨緣成) 일중일체다중일(一中一切多中一) 일즉일체다즉일(一卽一切多卽一) 일미진중함시방(一微塵中含十方) 일체진중역여시(一切塵中亦如是) 무량원겁즉일념(無量遠劫卽一念) 일념즉시무량겁(一念卽是無量劫) 구세십세호상즉(九世十世互相卽) 잉불잡난격별성(仍不雜亂隔別成)
죄송합니다. 음성이 시원찮아 가지고.
오늘 공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그나마 어딥니까. 이것만 하더라도 장한 일이죠.
우리가 그렇게 생각하고 오늘은 70명이 지금 동시에 시청하고 계십니다. 70명이나 되는 분이 시청하고 계십니다.
오늘 공부는 여기까지 하고 오신 분들 얼굴 한번 볼까요?
-유튜브 염화실TV-
법성의 빛으로
화엄을 비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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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맙습니다 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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