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C 17세기 아리안족의 이동은 서구 문명 발생의 기원
아리안족이
문명을 이뤘던 지역이 정확히 중앙아시아 어느 지역이며 언제쯤 어떤 지리적 조건을 바탕으로 문명을 이룰 수 있었는지 명확하지 않다. 기원전
30세기 무렵에는 나일강 유역, 메소포타미아 지방, 황화 유역에 관개 농업을 바탕으로 선진 문명권이 형성되었다고 보는 게 정설이다. 청동기 제작
기술과 관개 농업 기술을 바탕으로 이루어진 이들 문명권과 철기 문명과 기마술을 바탕으로 형성된 아리안족 문명이 각각 어떤 지리적 환경적 조건에
의해 필연적으로 형성될 수밖에 없었는지 그 인과관계는 아직 명확해 보이지 않는다. 아무튼 수백 년의 시차를 두고 청동기 문명과 철기 문명이 각기
다른 종족에 의해 형성되었으며 두 문명은 상당히 이질적이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현재까지
밝혀진 아리안족의 유적은 투르크메니스탄의 카라쿰 사막의 유적이 최고(最古)의 것인데 이 유적으로 아리안족의 철기 문명이 다른 농경 문명에 비해
손색이 없을 만큼 규모가 컸으며 세련된 기마술을 바탕으로 수레와 전차를 만들고 다루는 기술이 상당히 발달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아직 명확한
유적이나 사료가 발견되지 않아 역사학의 한 줄기로 자리잡지는 못 했지만 역사적 기록이 많이 남아있는 관개 농경지역의 정착 문명권의 기록을
바탕으로 유추해 보면 스텝 지역에서는 관개농업 지역의 문명과 다른 문명이 형성되어 두 문명권대가 교류 충돌하면서 고대 이전 역사가 형성되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본다. 스텝지역은 동서로 길게 형성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목축이라는 생산양식에서 기인한 강력한 이동성을 특징으로 하는
문명이 발생한 지역이다. 이 지역은 북위 50° 지역을 유럽과 아시아를 걸쳐 동서로 길게 뻗은 지역으로 북위 30° 지역의 농경 문화와는 상당히
이질적인 문화를 갖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두 이질적인 문명대는 고대사회 뿐만 아니라 중세 시대에도 역사의 큰 줄기를 이루는 문명 충돌의
역사를 만들어 내었다.
아리안족이
BC 20세기 경에 큰 도시 문명을 이룬 투르크메니스탄 카라쿰 사막 지역은 현재의 카자흐스탄 남쪽 지방으로 스텝 지방과 몬순 지방의 사이에
위치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런 지리적 특성으로 인해 아리안족 문명은 북쪽 유목 문명과 남쪽의 정착농경 문명이 교접한 결과로 형성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아리안족은 유목 문명의 이동성과 정착농경 문명의 체계성을 융합시킬 수 있는 지리적 이점을 갖고 있어 문명 전파의
촉매 역할을 할 수 있었으며 시대 변화의 파장을 일으킨 진원지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성서에도
기록된 바빌론 왕국은 아리안족의 일파인 아모리족이 남하하여 세운 통일 왕국으로 대략 BC 17세기 무렵의 아리안족 대이동과 밀접한 관련이 있어
보인다. 이 시기의 아리안족 남하로 요르단강 서안 지방의 통합이 촉발된 것으로 보이며 이 사건으로 구약성서의 설화가 형성되기 시작했다고 보는
것이 좋을 듯하다. 구약성서는 이집트 왕국을 이룬 햄족과 동족이라고 할 수 있는 셈족이 이집트를 벗어나 메소포타미아 지방으로 이주해 들어갔다가
아리안족의 남하로 핍박을 받으며 다시 정착지에서 쫓겨났던 다이스포라의 역사를 기록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아리안족의 이동으로 인한 근동지방의
혼란과 격변은 이 지역에서 전해 내려오는 여러 설화에서 확인할 수 있는데 유대인의 수난사를 기록한 성서뿐만 아니라 기독교 성서와 인도의 불교,
이슬람의 코란은 아리안족의 종교와 설화가 토착화한 것으로 많은 설화가 이들 성서에 중복되어 수록되어 있거나 사유체계가 유사한 것을 통해 이를
확인할 수 있다.
카라쿰
사막의 아리안족 유적지에서 페르시아 지역의 조로아스트교 유물과 동일한 유물들이 대량으로 발견되어 페르시아가 아리안족이 페르시아만 인근 지역으로
남하하여 세운 고대 국가라는 것을 증명하고 있고 인도의 성서 [리그베다]가 산스크리트어로 구전되고 있는 것 또한 인도인이 아리안족이 이동하여
토착민과 융합되어 이루어졌다는 것을 증거하고 있다. 이로서 서구 정신 문화의 근간은 이미 이 시기에 기초를 형성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페르시아 지역의 사유체계와 유대교, 이슬람교, 더 나아가 인도 불교의 사유체계와 희랍의 사유체계가 알고 보면 아리안족의 사유체계가 이동 경로에
따라 각각 다른 양태로 형성된 것에 지나지 않으며 본질적으로는 한 뿌리에서 발생한 것을 알 수 있다. 너무 단순화한다고 볼 수 있으나 헬레니즘과
헤브라이즘은 각각 정착농경 문화와 유목 문화를 대표하고 있으며 서구 문화는 중근동 지방의 아리안족 이동에 의한 문화 접변에 의해 그 기초가
놓아졌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라고 본다.
유물
유적과 구전 설화를 근거로 고대 시대의 문명사를 간략하게 정리할 수 있다. 나일강 유역, 메소포타미아 지방, 인더스강 갠지즈강 유역에서
농경문화가 정착한 것은 대략 BC 25세기쯤이며 농경문화는 청동기 제작 기술과 치수(治水) 관개(灌漑) 기술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정착 농경문화는 필연적으로 사회적 시스템을 필요로 하는데 이러한 사회 시스템이 발전한 것이 국가 시스템이라고 할 수 있다. 정착
농경문화는 사회 발전에 기여한 점이 크지만 자족적이고 폐쇄적인 문화를 낳았다는 점에서 부정적인 측면도 있었다. BC 20세기경 스텝 지역에서
발생한 유목 문화는 철기 제작 기술과 기마 기술을 바탕으로 이동성과 개방성을 특징으로 하는 강력한 문명을 일으키게 된다. 아리안족은 철기 문명에
의해 성장한 대표적인 족속으로 이들의 이동에 의해 중동지방은 엄청난 격변을 맞이하게 된다.
아리안족의
이동은 대략 BC 17세기 경에 시작되었는데 이 시기 몬순 기후의 변화로 인해 중앙 아시아는 인간이 상주하기 어려운 환경으로 변모(사막화)하기
시작하는데 이런 기후의 변화가 아리안족의 대이동 원인이라고 보는 것이 지금의 정설이다. 아리안족은 유목문화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는 이동성과
개방성으로 인해 정착 농경문화를 쉽게 정복해 들어갔다. 이후의 역사에서도 기후의 변화에 의한 종족의 이동이 세계적 규모의 문화 파동을 일으킨
사례를 발견할 수 있다. 이런 문화 파동을 살펴보면 한 문명권의 정체성과 역동성이 어떤 원리로 사회 문화 전반을 전화(轉化)시키는지 알 수
있다. 어떤 문명권이 탄생하고 성장한 뒤 쇠퇴해 가는 과정을 살펴 보면 초창기 역동성은 환경을 극복하기 위한 집단적 노력에 의해 형성되고 이
역동성이 문명 진보의 원동력이 되었다가 차츰 역동성을 상실하고 체계성과 자기 완결성이 강화되면서 문명이 점진적으로 사멸해 가는 경향성을 보인다.
이집트 문명의 발생과 쇠퇴, 페르시아의 성장과 분열, 로마의 성장과 사멸은 이런 경향성을 반복한 것으로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