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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다시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실로 엄청난 비였다 시간당 삼십밀리미터의 폭우가 쏟아져서 산길은 그대로 개울이 되었으며 산이 온통 물을 뒤집어 쓴 형국이었다
산이 물에 잠기고 있었다
산을 그대로 쥐어짜면 엄청난 물이 쏟아져나올 것만 같았다
몇 번인가의 우중산행으로 이제 왠만한 비에는 단련되었는데도 이런 장대비속의 산행은 또 처음이었다
행여나 미끄러질세라 조심조심 바윗길과 흙탕길이 혼재된 급경사면을 올라간다
하늘에 걸린 듯한 철계단은 경사도가 거의 오십도에 가까워보였다 너무나 안개가 짙게 끼어서 기암과
낙락장송과 안개가 만들어내는 동양화같은 절경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월출산은 충분히 그런 그림을 담고 있는 산인데....
안타까운 시간들이 그렇게 흐르고 있었다
오른지 거의 한 시간쯤 지나서 악명높은 공포의 구름다리에 다다랐다
이제 고소공포증이 있는 사람들이 문제였다
몇 일전부터 마음이 한없이 설레이고 있었다
이십오년만의 산행.....그해 여름휴가를 친구와 남도에서 보내기로 하고 삼박사일의 가슴부푼 여정에 돌입했다
첫날은 내가 몸 담고 있던 금호그룹 사원휴양소가 있는 영광의 가마미 해수욕장에서 일박하고 둘쨋날은 광주의 진산(鎭山)인 무등산에서 텐트를 쳤으며 마지막날에 우리의 최종목적지인 월출산에 이르렀다
천황사를 지나서 천황봉까지의 고달픈 산행이 한 여름의 염천하에 이루어졌다
각자 삼십킬로그램에 가까운 배낭을 메고 천신만고끝에 정상에 올랐는데 몇일 동안의 강행군으로 몸은 많이 지쳐 있었고 또 해가 저물었으므로 도갑사행은 포기하고 중간쯤 내려온 곳의 경포대 암반위에 텐트를 치고 잠에 빠져 들었다
그때 짙은 어둠속에 거센 바람을 동반한 비가 제법 많이 내리고 있었다
....자리에 누운지 얼마후 무언가 텐트밖에서 내 발가락을 건드리는 것이 있었다 깜짝 몰라서 일어났는데 그 바람에 친구도 놀랬고 그가 하는 말이 가뜩이나 잠도 안오는데 너까지 왜 그러느냐는 거였다
그리고 얼마후 나는 잠속으로 빠져들었다
다음날 여명이 시작될 때 친구는 벌써 일어나서 개울가에 앉아 있었다
얼굴이 초췌해져 있었다
밤새 여자울음소리가 환청처럼 귓전에 맴돌아서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고 한다
그 밤을 하얗게 밝힌 것이었다
그로부터 이십오년의 시간이 지나갔고 그 긴 시간을 내 의식의 한 켠에서 잠들어 있던 산,
이제 그 설레이는 산행이 시작되고 있었다
설레임속에서도 잠은 잘 잤고 새벽 다섯시반에 일어나서 간단한 준비물을 챙겨넣고 집을 나섰다
일곱시 반쯤에 사당에서 동반산행을 하기로 한 다른산악회버스에 올랐는데 우리 산악회 일행은 중간보다 좀 뒷쪽에 자리를 잡았다
모두 아홉명이었다
옹기종기 모여서 우리끼리 얘기를 나누며 그렇게 군중속의 단출함으로 시작된 여정이었다
그때같아서는 비는 올 것 같지 않아서 천만다행이라고 했는데 글쎄 그게 뜻대로 될 것인지 남쪽으로 가봐야 알 수 있는 일이었다
창밖으로 가을빛에 물든 산하가 지나가고 있었다
벼이삭이 제법 노르스름 해 보이고 스쳐가는 마을과 나무와 풀과 바람결에서 가을의 냄새를 감지해 냈다
세월은 얼마나 덧 없는 것인가
여름의 위세는 어디로 자취를 감추었는지.......
가는 도중 내내 누군가는 세발낙지며 다른 음식만드는 얘기를 정력도 좋게 늘어놓고 있었다
줄기찬 입담이었다 잠도 충분히 못잤을텐데...다른 몇 사람도 그 몇 시간을 동조하고 있었고.
사당을 떠난지 두어 시간후에 버스는 일망무제...김제들판을 지나가고 있었다
아스라히 지평선너머에 산이 보이고 어느 곳보다 더
정겨워 보이는 남도길이 그림처럼 펼처져서 마음이 푸근해졌는데 얼마후 고창 선운사입구를 지나갈 무렵 앞쪽 산너머에서부터 엄청난 빗줄기가 다가오고 있었다
이제 시련이 시작되고 있었다
열두시가 다 되어서 월출산 입구에 도착했으니 다섯시간 가까이 달려온 셈이었다
폭우를 뚫고 매표소에 버스를 세웠는데 불행하게도 입산을 통제하고 있었다
순간 아찔해졌다
이 긴 여정이, 천리길 산행이 물거품이 될 위기에 봉착한 것이다
폭우로 위험하다는 것이었는데 다행히 협상이 잘 이루어져서 입구에서 일킬로미터 남짓한 구름다리까지만 갔다가 돌아오기로 하고 마침내 산길로 접어들었다
산행인원은 우리팀 아홉명에 다른산악회소속 네명...단출하게 출발했다
나머지 다른 산악회사람들은 하산예정지에서 술과 음식으로 그동안의 시간을 보낼 요량이었고.......
산에 들어서자 시누대(화살 만드는 가는 대나무)가 터널을 이루고 있었는데 다른 산에서는 볼 수 없는 정경이었다
옛날에 비해서 훨씬 숲이 무성해져 있었는데 어느 등성이에선가 바람을 타고 더덕냄새가 진동했지만 아무리 뒤져도 종적이 묘연했다
그게 아무에게나 눈에 띄지는 않는 모양이라고 중얼대며 팍팍해오는 다리를 끌고 오르고 또 오른다
비는 오락가락하고 물이 사방에서 넘쳐나고 악전고투의 연속이었고 안개까지 온 산을 뒤덮어서 전체적인 산의 윤곽은 어디에서도 보이지 않았다
그 유명한 칠레의 파타고니아 산군(山群)처럼 하늘향해 무수히 돌출된 월출산의 수려한 침봉들이 무심한 안개에 가려져 보이지 않았다
옛시에" 월출산 높더니만 미운 것이 안개로다...."하던 구절이 새삼 떠올랐다
비록 치악산의 사다리병창길만은 못해도 만만치 않은 경사진 길의 연속이었다
빗속을 뚫고 줄기차게 오른지 한 시간 남짓되어서 한개의 봉우리와 다른 산등성이의 중간을 연결한 구름다리에 이르렀다
얘기듣기로는 대둔산의 그것보다 훨씬 높다는 것이었는데 같이 온 한 여자회원이 문제였다 그녀는 평소에 산을 곧잘 타서 워킹위주의 산행에서 선수급으로 통했는데
무섭다고 그대로 주저앉아 버리는 것이었다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트릴 듯 했다
난감했다
여기서 다시 돌아갈 수도 없고.....
할 수 없었다 나는 어거지로 손목을 꽉 붙잡아서 일으켰다
" 발 아래를 보지말고 내 등뒤만 보고 따라와, 이 다리는 엄청 튼튼하니 무너진다는 생각은 하지말고..."
무작정 힘으로 끌고 발걸음을 옮기는데 하얗게 질린 얼굴이 좀처럼 밝아지지가 않는다
비에 젖은 차거운 그녀의 손에서 떨림이 전해져 왔는데 발 아래를 내려다보니 제법 고도감이 있었지만 다행히 안개때문에 무서움은 덜 할 것이었다
아래쪽이 희미하게 보였으니......
무사히 다리를 건넜는데 어떤 남자회원이 하는 얘기가 자기도 무서워서 혼났다는 것이다
남자체면에 못가겠다고 할 수도 었었고........
다리를 건너서 잠시 주변을 둘러보는데 그때 쏟아지는 비에 안개가 밀려가고 언뜻 건너편의 암벽이 모습을 나타내고 있었다
장관이었다
수려한 월출산의 암벽이 일부나마 그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적색과 암갈색과 회색빛의 매끈하고 거대한 화강암벽이 우리의 시야를 압도하듯 파노라마처럼 전개되고 있었다
눈을 돌려 여기저기를 살펴보는데 때마침 폭우에 물이 엄청나게 불어난 폭포가 왼쪽과 오른쪽 암벽에서 쏟아지고 있었고 그중의 한 개는 길이와 폭이 설악산의 토왕폭과 비견될만한 규모였다
그 장엄한 광경에 넋을 잃고 바라보았다
아까 하얗게 질렸던 그녀의 얼굴도 어느새 활짝 펴져있었고 밝게 웃는 얼굴로 기념사진을 찍어달라는 것이었다
너무나 황홀한 산의 모습에 우리는 한동안 도취되어 있었다
....어쩌면 우리가 산행의 시기를 잘 맞춘 것인지도 몰랐다 절묘한 타이밍이었다
여기까지가 우리가 신고한 코스였지만 그게 어디 원칙대로 되겠는가?
이렇게 멀리 찾아온 산에서 마치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처럼 허무하게 돌아갈 수는 없는 일이었다
약속을 어겨서 미안했지만
다시 마음을 가다듬고 산행을 계속하기로 한다
이 길이 우리의 몸이 말을 안들을 때까지 계속될 고행의 길이 아니던가?
산행을 시작한지 약 세 시간만인 3시 15분에 마침내 비바람 거센 천황봉 정상에 우리 산악회의 붉은 수건을 휘날릴 수 있었다
배고픔도 잊었었고 그냥 목만 말랐는데 이제 사위를 조망할 시간이었지만 여전히 시야를 가린 안개때문에 목포앞바다도 영암, 강진쪽너른 들판도 그야말로 오리무중이어서 안타까움이 컸다
서둘러 돗자리를 깔고 허기진 배에 술과 음식과 과일을 급하게 털어넣는데 누군가가 빠진 게 있다고해서 다시 술잔을 높이들고 목청껏 외쳤다
" ㅇㅇㅇ산악회를 위하여...... "
멀리멀리 다도해너머로 번져가는 우리들의 정겨운 외침이었다
다시 아래쪽 산악회캠프에서 다급한 전화가 왔다
목적지인 경포대는 계곡물이 불어서 건너기에 위험할 뿐더러 산행조건위반으로 일인당 오십만원의 벌금을 물게될 처지에 있으니 바람폭포쪽으로 하산하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아쉽게도 그쪽은 포기하고 폭포방향으로 내려갔는데 몇 백미터밖에서도 폭포의 우렁찬 굉음이 들려왔다
필설로 표현하기 힘든 광경이었다
엄청난 물줄기를 자랑하는 바람폭포가 지축을 뒤흔들어 놓을 것처럼 아래로 쏟아지며 거센 물거품을 일으키며 소용돌이치며 포효하고 있었다
물안개는 사방 십여미터를 뒤덮었고 우리는 감탄사를 연발하며 기념사진을 찍었다
내려가도 끝없이 이어지는 밀림의 연속이었다
급류는 곳곳에 소(沼)와 담(潭)을 만들었고 바위에 부딫쳐서 몸부림치며 흘러내려갔다
산이 물로 인해 몸살을 앓고 있었다
마치 브라질 밀림의 오지탐험팀같은 생각이 들었다
고생끝에 낙원을 찾은 것이다
비록 폭우속이긴 했지만 산행의 만족도가 이처럼 컸던 적도 드물었다
진한 녹색의 윤기가 도는 동백숲이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히는 듯 했고 여러종류의 늘 푸른 넓은 잎 나무들이 여기가 남쪽지방임을 말해주고 있었다
만나기로 한 장소에 미처 당도하기도 전에 국립공원관리공단 트럭이 우리일행을 모시러 왔다
뜻밖이었다
이처럼 대접이 융숭할 수가........아니 언제부터 이렇게 변했을까 했는데 그게 아니었고 그들은 심각했었다
위험천만하게도 폭우를 뚫고 십여명이 산행을 했다고 비상이 걸리고 난리가 났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 눈에 띄기 전에 우리를 급하게 실어나른 것이었다
뒷풀이.....
주차장 근처식당에서 다른 산악회사람들과 어울려서오랫만에 여흥을 즐겼는데 하루 산행의 피로가 말끔히 씻겨나가는 순간이었다
몸풀이 한 번 확실하게 한 것이었다
그렇게 산행은 끝났고
후기를 쓰는 지금도 월출산의 웅장한 모습이 눈앞에 어른거린다
언제 다시 재회의 기쁨을 나눌 것인가?
산을 멀리 두고온 지금 생각한다
내가 산을 떠나왔는지 아니면 산이 나를 떠나보냈는지.......
(우리 산악회에 올린 후기를 약간 고쳐서 올리다 보니 글자가 커졌는데 크기를 수정해보니 간격이 안 맞아서 그대로 올립니다 양해하시기를...)
첫댓글 대단하십니다, 폭우 속에서 38선이남에선 설악산 다름으로 아름다운 소금강을 다녀오셨군요!, 폭우와 안개 때문에 산행을 하면서 산 전경을 볼 수 있는 것이 월출산에서만 느낄 수 있는 묘미인데 그렇지 못함이 아쉽네요!, 잘 읽고 갑니다.
[" 월출산 높더니만 미운 것이 안개로다...."] 저는 사실 등산을 좋아하지 않지만 언젠가 안개속을 달리다 새벽에 본 월출산 그 웅장한 모습은 영원히 잊혀지지 않을겁니다. 산을 보고 멋있다라는 생각은 그때 처음 해보았지요. 다시 한번 그 산자락에서 동동주 한잔 마시고 싶습니다.^^
긴박감이 넘치는 글입니다.잘 읽어내렸습니다. 폭우속의 산행을 한번 해보고 싶었었는데 이 글을 읽자니 더 애착이 생깁니다. 글을 실감나게 참 잘 쓰신다는 생각이 드는데요? 밤에 여자울음소리가 들리면 잠 잘 안오죠 ㅎㅎㅎㅎ 재회의 시간속에서도 알찬 산행이 되시길 바랍니다.
이런 말씀 드리면 어떠실지 모르겠지만..님의 글에서 진정한 남성의 향을 느낍니다. 스테미너를 소유한 파워넘치는 시간속의 남성군단..현실감 넘치는 님의 글에서 진취적 삶을 뚝뚝 베어갑니다..^^..
문득...'대지의 시간은 인간의 시간을 거역한다'던 글귀가 떠오릅니다. 고생 많이 하셨겠네요. 생동감이 넘치는 글입니다. 왜인지 주유천하님께는 다수의 좋은 글들이 산재했을거란 막연함이 입니다. 프로도 아니면서..프로를 알아본다고 나무라시진 않으시겠죠? ㅎㅎ
근데...와아아아...주유천하님 글도 글이지만...뮤지컬님의 꼬릿글도 예술이시네여 와아..멋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