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회] ‘광주항쟁’, 석방 뒤에 알아
리영희 평전/[12장] ‘김대중내란음모사건’ 옥고, 석방 뒤 집필활동 2010/07/03 08:00 김삼웅놀라운 사실은 다른 데에 있어요. 두 달여 만에 석방되어 나오니까, 집사람이 나에게 신문 한 장을 보여줘. 두 달여 전 연행된 바로 이튿날 5월 18일 아침 호외예요. 내가 ‘광주폭동 배후조종 주모자’의 한 사람으로 되어 있더군! 입이 딱 벌어져서 다물어지지 않더구만. 고은·김동길·예춘호, 영등포에서 도시산업 선교하던 인명진 목사하고 내가 폭동을 주동했대! 하하! 기가 막힐 노릇이지. 그 옆에는 김종필·이후락 등 한 20명이 부정축재자로 주먹같은 크기의 대서특필로 열거되어 있고, 또 한 쪽에 김대중·한완상·이문영 등 10여 명의 ‘김대중내란음모자’가 되어 있더군. 사실 나는 광주에 간 적도 없어요. (주석 6)
리영희가 중앙정보부 지하실에서 온갖 시달림과 수모를 당하고 있을 때 광주에서는 어느 외신의 보도처럼 ‘20세기의 마지막 비극’이 자행되고 있었다.
신군부는 5월 초순부터 이른바 ‘충정작전’의 구실로 충정부대의 서울 투입을 5월 17일 이전에 이미 완료했다. 서울에 이어 광주에는 공수부대의 정예부대를 파견했다. 신군부는 치밀하게 짜여진 작전계획에 따라 5월 18일 0시를 기해 지역계엄을 전국계엄으로 확대하고 계엄포고령 제10호를 발령 △ 정치활동 중지 및 옥내 외 집회, 시위의 금지 △언론, 출판, 보도 및 방송의 사전 검열 △ 각 대학의 휴교령 △ 직장이탈 및 태업, 파업 금지 등의 조처를 취함으로써 언론, 정치인의 손발을 묶고 국민의 저항에 쐐기를 박았다.
이어서 18일에는 김대중, 김상현, 김종필, 이후락 등 26명의 정치인을 학원, 노사분규 선동과 권력형 부정축재혐의 등으로 중앙정보부와 합동수사본부에 연행하고, 며칠 뒤 김영삼을 가택연금시키는 등 정치적 일대 숙청을 감행하기 시작했다.
쿠데타는 5월 18일부터 이에 저항하고 나선 광주 시민들을 무참하게 학살하면서 진행되었다.
18일 오전 전남대생들은 교내로 들어가려다 총을 든 군인들에게 제지를 당하자 투석으로 맞섰다. 신군부는 공수부대의 정예인 7공수여단의 33대대와 35대대를 광주에 파견하고, 그중 33대대의 주력을 전남대에 배치했다.
학교 정문 앞에서 계엄군에 쫓겨난 학생들은 거리로 뛰쳐나와 연좌시위를 벌였고, 경찰이 최루탄과 경찰봉으로 해산시키려 하자 다시 투석전으로 맞섰다. 신군부는 오후 3시경 공수부대를 투입했다. 착검한 M16에 방망이로 무장한 공수부대원들은 남녀 학생들을 붙잡아 마구 구타했다. 격분한 학생들이 보도블록을 깨서 집어 던졌다. 시민들이 지켜보는데도 공수대원들은 붙잡혀온 학생들을 군홧발로 짓밟거나, 반항하는 경우 M16에 꽂은 대검으로 등과 허벅지를 사정없이 찔렀다. 피흘리는 학생들은 굴비처럼 엮어져 군트럭에 실려 갔으며, 통금이 밤9시로 단축되자 공수부대원들은 귀가하는 학생, 청년들을 닥치는 대로 두들겨 패며 연행하고 만류하는 시민들까지 개머리판으로 마구 때렸다.
다음날 19일 시민들은 술렁대기 시작했다. 금남로 일대에 많은 시민들이 모여들었다. 공수부대원들이 난폭하게 시민들을 해산시키려 들었다. 공수부대원들의 잔인성을 목격한 시민들은 분노를 참지 못하고 마침내 총궐기에 나섰다. 5.18 광주 시민항쟁이 시작된 것이다.
리영희는 남산 지하실에 갇혀 신문을 받는 동안 ‘광주사태’를 전혀 몰랐다. 신문, 방송은 물론 가족 면회도 없는 밀폐된 상태에서 잔인무도하게 자행된 광주항쟁을 알 도리가 없었다.
나는 1980년 5월 18일 소위 ‘광주폭동’의 배후 주동자이다. 혼자서 그런 게 아니라 주동자는 7명이었다. 그러니까 ‘광주폭동’을 일으킨 7명의 주동자 가운데 한 사람인 셈이다.
나는 내가 ‘광주폭동’ 주동자의 한 사람이라는 사실이 광주시민항쟁이 처참하게 끝난 뒤에도 한동안 모르고 있었다. ‘5.18’로부터 정확하게 두 달이 지난 7월 17일에야 60일 전의 신문과 호외를 보고 ‘광주폭동’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았다. 이상한 이야기가 아닌가? 폭동 주동자가 두 달 동안이나 자기가 일으킨 폭동이 일어난 사실조차 모르고 있었다니?
같은 질문에 같은 대답이 수백 번 되풀이 되고 같은 내용의 자술서와 신문조서가 수십 편 씌어졌다.
온갖 모욕과 비난이 나의 사상, 책, 학생들과의 관계에 퍼부어 지더니 정치가 김대중 씨와의 관계로 좁혀들었다. 그러더니 모든 신문이 바로 그 문제때문이었다는 듯이 오로지 김대중 씨와의 관계에 집중됐다. 그제서야 나는 그 야당지도자에 대한 굉장한 위해공작이 짜여지고 있다는 눈치를 챘다. 꽤나 둔했다.
나는 박정희가 살해당한 뒤인 그해 1월에야 2년 만에 형무소에서 나왔다. 병원치료를 받고 4년 만에 대학에 복직하고 며칠 만에 잡혀왔으니 김대중 씨와의 ‘거래’가 있을 까닭이 없다. 형무소 안에 있는 동안 김대중 씨가 모든 정치범에게 넣어준 영치금 5천원을 받은 일이 전부였다. 한 40일쯤 주리를 틀더니 조사관은 내가 보잘 것 없는 존재로 인정됐던지 야전용 침대에 눕혀둔 채 소설책도 읽게 하고 밤에는 가끔 진로 소주도 한 병씩 마실 수 있는 ‘혜택’을 베풀었다.
중앙정보부 지하 감옥의 1층에는 비교적 ‘선량한 사람’들이 있었고 지하 2층에 김대중 씨를 비롯한 주요 야당 정치관계 인사들이 수감됐다. 그러나 그 사실도 60일 뒤에야 안 일이지 당시는 아무것도 몰랐다.
두 달 가까운 시간이 흐르면서 나는 겨우 지하 3층에 누가 있는지를 어렴풋이 알게 되었다.
한승헌 변호사, 시인 고은 씨, 소설가 이호철, 이문영 교수, 그리고 용케 도피했다가 한참 후에 ‘자수’해 들어온 송건호 씨와 장을병 교수 … 등등. 그밖에 여러 사람이 수감되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피수용자들 사이는 철벽처럼 격리돼서 마주 볼 수 있는 기회가 한번도 없었다. 바깥세상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전혀 낌새를 챌 수 없었다. 5월 어느날 대학 중간고사 출제를 해야겠다면서 대학과의 연락을 요구했다. 그들은 이상한 웃음을 머금은 표정을 지으면서 대답하는 것이었다.
“대학 걱정은 앞으로 할 필요가 없을꺼요. 그런 걱정은 안 해도 돼요.”
5명의 야차같은 조사관들은 내 앞에서 말을 하지 않고 필담을 했다. 가끔은 “그 새끼들 싸그리 쓸어버릴 것…” 따위의, 내게는 무슨 뜻인지 종잡을 수 없는 저주의 소리를 지르기도 했다.
내가 별 보잘 것 없는 위인이라는 것이 입증된 탓인지, 어느날 “나와!” 하더니 차에 태워 집 앞에 풀어놓았다. 끌려갈 때와 마찬가지로 영문을 알 수 없었다.
아내의 첫 마디가 “광주에서 군대가 수천 명을 학살했어요.!” 였다.
“수천 명을 학살? …군대가? ……”
나는 그저 더듬을 뿐이었다. 도대체 무슨 소린가? 그러자 아내가 60일 전, 5월 18일자 신문과 호외를 내게 꺼내 보였다. 거기에는 주먹만한 크기의 활자로 이렇게 인쇄돼 있었다.
“전국소요 및 광주폭동 배후 조종자 김대중, 문익환, 인명진, 고은, 리영희…….” (주석 7)
야만의 시대이였다.
“폭동 주동자가 두 달 동안이나 자기가 일으킨 폭동이 일어난 사실조차 새까맣게 모르고”있었던 억지시대였다. 새로 등장한 우상들은 민주인사들을 ‘예비검속’해 놓고, 그 다음날 일어난 광주항쟁을 이들이 사주했다고, 이성적으로나 상식적으로 통하지 않은 억지를 씌웠다. 이들 중 김대중에게는 ‘수괴’로 몰아 사형을 선고하고, ‘배후 주동자’들에게 중형을 때렸다. 다행히 리영희는 두 달여 만에 석방되었다. 광주형무소에서 갓 출감한 까닭에 무엇으로도 엮을 건덕지가 없었던 것이다.
‘배후 주동자’의 한 사람인 이호철은 당시를 회고한다.
출옥하자마자 몇 달 지나지 않아 다시 1980년 5월의 소용돌이 속에서(보낸) 2개월 남산 지하실의 감금생활은 그에게 있어서나 필자에게 있어서나, 평생에 가장 괴로웠던 추억으로 아로새겨져 있지만, 또한 동시에, 그 속에서의 피차의 은밀한 눈마주침, 어쩌다 얻은 오징어 다리나마 결코 혼자 먹지 않고 필자 방으로 보내오곤 하던 그 형님같은 따뜻하고 인정스러운 마음씨는 평생 지울 수 없는 귀한 추억으로 남아 있다.
그렇게 5월 17일 자정에 연행되어 7월 13일까지 두 달 동안 햇볕을 보지 못하고 지하실 속에 갇혀 있었고, 바로 그 기간에 제5공화국의 틀과 구도가 완성되고 있었으니, 그것은 원천적으로 범죄의 산물이었으며 5공 비리라고 일컬어지는 모든 악폐들, 전두환 씨 친인척의 갖가지 범죄와, 그 밖에도 5공 핵심인물의 비리 ․ 범죄는 우연의 소산이 아니었다. 그것은 시대의 요청인 민주화를 바라는 양심들을 묶어두고 가둬 둔 상태에서만 이룩해 낼 수 있었다. (주석 8)
주석
6) 앞의 책. 543~544쪽.
7) 리영희, '광주 민주항쟁 영광기', 1993년 5월 31일, <새는 ‘좌우’의 날개로 난다>, 264~267쪽.
8) 이호철, <산 울리는 소리: 이호철 문학비망록>, 236~237쪽, 정우사, 1994.
리영희가 중앙정보부 지하실에서 온갖 시달림과 수모를 당하고 있을 때 광주에서는 어느 외신의 보도처럼 ‘20세기의 마지막 비극’이 자행되고 있었다.
신군부는 5월 초순부터 이른바 ‘충정작전’의 구실로 충정부대의 서울 투입을 5월 17일 이전에 이미 완료했다. 서울에 이어 광주에는 공수부대의 정예부대를 파견했다. 신군부는 치밀하게 짜여진 작전계획에 따라 5월 18일 0시를 기해 지역계엄을 전국계엄으로 확대하고 계엄포고령 제10호를 발령 △ 정치활동 중지 및 옥내 외 집회, 시위의 금지 △언론, 출판, 보도 및 방송의 사전 검열 △ 각 대학의 휴교령 △ 직장이탈 및 태업, 파업 금지 등의 조처를 취함으로써 언론, 정치인의 손발을 묶고 국민의 저항에 쐐기를 박았다.
이어서 18일에는 김대중, 김상현, 김종필, 이후락 등 26명의 정치인을 학원, 노사분규 선동과 권력형 부정축재혐의 등으로 중앙정보부와 합동수사본부에 연행하고, 며칠 뒤 김영삼을 가택연금시키는 등 정치적 일대 숙청을 감행하기 시작했다.
쿠데타는 5월 18일부터 이에 저항하고 나선 광주 시민들을 무참하게 학살하면서 진행되었다.
18일 오전 전남대생들은 교내로 들어가려다 총을 든 군인들에게 제지를 당하자 투석으로 맞섰다. 신군부는 공수부대의 정예인 7공수여단의 33대대와 35대대를 광주에 파견하고, 그중 33대대의 주력을 전남대에 배치했다.
학교 정문 앞에서 계엄군에 쫓겨난 학생들은 거리로 뛰쳐나와 연좌시위를 벌였고, 경찰이 최루탄과 경찰봉으로 해산시키려 하자 다시 투석전으로 맞섰다. 신군부는 오후 3시경 공수부대를 투입했다. 착검한 M16에 방망이로 무장한 공수부대원들은 남녀 학생들을 붙잡아 마구 구타했다. 격분한 학생들이 보도블록을 깨서 집어 던졌다. 시민들이 지켜보는데도 공수대원들은 붙잡혀온 학생들을 군홧발로 짓밟거나, 반항하는 경우 M16에 꽂은 대검으로 등과 허벅지를 사정없이 찔렀다. 피흘리는 학생들은 굴비처럼 엮어져 군트럭에 실려 갔으며, 통금이 밤9시로 단축되자 공수부대원들은 귀가하는 학생, 청년들을 닥치는 대로 두들겨 패며 연행하고 만류하는 시민들까지 개머리판으로 마구 때렸다.
다음날 19일 시민들은 술렁대기 시작했다. 금남로 일대에 많은 시민들이 모여들었다. 공수부대원들이 난폭하게 시민들을 해산시키려 들었다. 공수부대원들의 잔인성을 목격한 시민들은 분노를 참지 못하고 마침내 총궐기에 나섰다. 5.18 광주 시민항쟁이 시작된 것이다.
리영희는 남산 지하실에 갇혀 신문을 받는 동안 ‘광주사태’를 전혀 몰랐다. 신문, 방송은 물론 가족 면회도 없는 밀폐된 상태에서 잔인무도하게 자행된 광주항쟁을 알 도리가 없었다.
나는 1980년 5월 18일 소위 ‘광주폭동’의 배후 주동자이다. 혼자서 그런 게 아니라 주동자는 7명이었다. 그러니까 ‘광주폭동’을 일으킨 7명의 주동자 가운데 한 사람인 셈이다.
나는 내가 ‘광주폭동’ 주동자의 한 사람이라는 사실이 광주시민항쟁이 처참하게 끝난 뒤에도 한동안 모르고 있었다. ‘5.18’로부터 정확하게 두 달이 지난 7월 17일에야 60일 전의 신문과 호외를 보고 ‘광주폭동’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았다. 이상한 이야기가 아닌가? 폭동 주동자가 두 달 동안이나 자기가 일으킨 폭동이 일어난 사실조차 모르고 있었다니?
같은 질문에 같은 대답이 수백 번 되풀이 되고 같은 내용의 자술서와 신문조서가 수십 편 씌어졌다.
온갖 모욕과 비난이 나의 사상, 책, 학생들과의 관계에 퍼부어 지더니 정치가 김대중 씨와의 관계로 좁혀들었다. 그러더니 모든 신문이 바로 그 문제때문이었다는 듯이 오로지 김대중 씨와의 관계에 집중됐다. 그제서야 나는 그 야당지도자에 대한 굉장한 위해공작이 짜여지고 있다는 눈치를 챘다. 꽤나 둔했다.
나는 박정희가 살해당한 뒤인 그해 1월에야 2년 만에 형무소에서 나왔다. 병원치료를 받고 4년 만에 대학에 복직하고 며칠 만에 잡혀왔으니 김대중 씨와의 ‘거래’가 있을 까닭이 없다. 형무소 안에 있는 동안 김대중 씨가 모든 정치범에게 넣어준 영치금 5천원을 받은 일이 전부였다. 한 40일쯤 주리를 틀더니 조사관은 내가 보잘 것 없는 존재로 인정됐던지 야전용 침대에 눕혀둔 채 소설책도 읽게 하고 밤에는 가끔 진로 소주도 한 병씩 마실 수 있는 ‘혜택’을 베풀었다.
중앙정보부 지하 감옥의 1층에는 비교적 ‘선량한 사람’들이 있었고 지하 2층에 김대중 씨를 비롯한 주요 야당 정치관계 인사들이 수감됐다. 그러나 그 사실도 60일 뒤에야 안 일이지 당시는 아무것도 몰랐다.
두 달 가까운 시간이 흐르면서 나는 겨우 지하 3층에 누가 있는지를 어렴풋이 알게 되었다.
한승헌 변호사, 시인 고은 씨, 소설가 이호철, 이문영 교수, 그리고 용케 도피했다가 한참 후에 ‘자수’해 들어온 송건호 씨와 장을병 교수 … 등등. 그밖에 여러 사람이 수감되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피수용자들 사이는 철벽처럼 격리돼서 마주 볼 수 있는 기회가 한번도 없었다. 바깥세상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전혀 낌새를 챌 수 없었다. 5월 어느날 대학 중간고사 출제를 해야겠다면서 대학과의 연락을 요구했다. 그들은 이상한 웃음을 머금은 표정을 지으면서 대답하는 것이었다.
“대학 걱정은 앞으로 할 필요가 없을꺼요. 그런 걱정은 안 해도 돼요.”
5명의 야차같은 조사관들은 내 앞에서 말을 하지 않고 필담을 했다. 가끔은 “그 새끼들 싸그리 쓸어버릴 것…” 따위의, 내게는 무슨 뜻인지 종잡을 수 없는 저주의 소리를 지르기도 했다.
내가 별 보잘 것 없는 위인이라는 것이 입증된 탓인지, 어느날 “나와!” 하더니 차에 태워 집 앞에 풀어놓았다. 끌려갈 때와 마찬가지로 영문을 알 수 없었다.
아내의 첫 마디가 “광주에서 군대가 수천 명을 학살했어요.!” 였다.
“수천 명을 학살? …군대가? ……”
나는 그저 더듬을 뿐이었다. 도대체 무슨 소린가? 그러자 아내가 60일 전, 5월 18일자 신문과 호외를 내게 꺼내 보였다. 거기에는 주먹만한 크기의 활자로 이렇게 인쇄돼 있었다.
“전국소요 및 광주폭동 배후 조종자 김대중, 문익환, 인명진, 고은, 리영희…….” (주석 7)
야만의 시대이였다.
“폭동 주동자가 두 달 동안이나 자기가 일으킨 폭동이 일어난 사실조차 새까맣게 모르고”있었던 억지시대였다. 새로 등장한 우상들은 민주인사들을 ‘예비검속’해 놓고, 그 다음날 일어난 광주항쟁을 이들이 사주했다고, 이성적으로나 상식적으로 통하지 않은 억지를 씌웠다. 이들 중 김대중에게는 ‘수괴’로 몰아 사형을 선고하고, ‘배후 주동자’들에게 중형을 때렸다. 다행히 리영희는 두 달여 만에 석방되었다. 광주형무소에서 갓 출감한 까닭에 무엇으로도 엮을 건덕지가 없었던 것이다.
‘배후 주동자’의 한 사람인 이호철은 당시를 회고한다.
출옥하자마자 몇 달 지나지 않아 다시 1980년 5월의 소용돌이 속에서(보낸) 2개월 남산 지하실의 감금생활은 그에게 있어서나 필자에게 있어서나, 평생에 가장 괴로웠던 추억으로 아로새겨져 있지만, 또한 동시에, 그 속에서의 피차의 은밀한 눈마주침, 어쩌다 얻은 오징어 다리나마 결코 혼자 먹지 않고 필자 방으로 보내오곤 하던 그 형님같은 따뜻하고 인정스러운 마음씨는 평생 지울 수 없는 귀한 추억으로 남아 있다.
그렇게 5월 17일 자정에 연행되어 7월 13일까지 두 달 동안 햇볕을 보지 못하고 지하실 속에 갇혀 있었고, 바로 그 기간에 제5공화국의 틀과 구도가 완성되고 있었으니, 그것은 원천적으로 범죄의 산물이었으며 5공 비리라고 일컬어지는 모든 악폐들, 전두환 씨 친인척의 갖가지 범죄와, 그 밖에도 5공 핵심인물의 비리 ․ 범죄는 우연의 소산이 아니었다. 그것은 시대의 요청인 민주화를 바라는 양심들을 묶어두고 가둬 둔 상태에서만 이룩해 낼 수 있었다. (주석 8)
주석
6) 앞의 책. 543~544쪽.
7) 리영희, '광주 민주항쟁 영광기', 1993년 5월 31일, <새는 ‘좌우’의 날개로 난다>, 264~267쪽.
8) 이호철, <산 울리는 소리: 이호철 문학비망록>, 236~237쪽, 정우사, 199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