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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렉스 바이셀 (Rex B. Beisel) 콜세어의 아버지 -
렉스 바이셀은 미국에서 광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 집안 형편이 좋지 않아 글을 배우기도 전에 돈을 버는 방법부터 배워야 했다. 학교를 다니면서도 14세의 소년은 페인공으로, 잡화 쎄일즈맨으로 가계를 도와야 했다.
또 16세 때는 탄광에서 석탄 운반부 역할을 하며, 또래의 소년 두명과 함께 하루에 100 여톤의 석탄을 퍼담아야 했다. 그러던 중 극적으로 대학에 진학하게 되었는데, 이후에도 방학 때면 카페에서 써빙을 보는 등, 돈이 되는 각종 아르바이트를 닥치는대로 해나갔다.
그러나 이런 바쁜 와중에도, 엔진니어가 되겠다는 뜻은 변함이 없었고, 학업도 게을리 하지 않아, 엔진니어 시험을 우수한 성적으로 통과하기에 이른다.
당시 바이셀은 짧은 기간이었지만, 우연히 해군성의 석탄 운반부로 아르바이트를 하게 되었는데, 이때부터 해군 항공기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하루 4달러짜리 잡일이 그의 일생을 변화시켜버린 촉매제가 되었다고나 할까?.... 곧 자신의 길을 항공기 분야로 결정한 바이셀은 설계도면을 그리는 엔지니어로 해군 항공성에 취직했고, 얼마후 그곳을 나와, 커티스 항공사 등지에서 설계자로서 수련 과정을 거치고, 나머지 일생의 인연이 되어 버리는 보트사의 설계자로 활약하기에 이른다.
그리고 바이셀 일생의 역작이며, 당대 최고의 항공기 콜세어기 설계를 완성하게 된다. 이 가난한 광부의 아들은 보트사의 수석 설계 디자이너 자리를 거쳐, 후에는 보트사의 사장직에 까지 올랐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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XF4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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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0년 미해군은 그루만사의 F-3F 와일드캣이 일본해군기에 부족한 성능을 보여주자 바로 차기 기체를 개발을 의뢰하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F-4U 코르세어 였다. 사진은 F-4U의 시제품인 XF4U-1의 모습이다 XF4U-1은 1940년 5월 29일 첫 비행에 성공하고 양산을 앞두고 있었으나 착륙이 시야가 확보되지 않는 이유로 배치가 늦어졌다. 그래서 대타로 먼저 등장한것이 바로 F-6F 헬켓이였다 ]
1938년 4월, 보트 항공사는 미해군에 두 개의 원형기를 만들어 선보였다. 각기 프래트 앤 휘트니 R-1830 엔진(V-166A 기, 또는 보트 A기)과 R-2800 엔진(V-166 B기, 보트 B기)을 탑재한 것이었는데, 성능 비교를 마친 후, 미해군은 V-166B 기의 손을 들어 주었다. 이 기체의 엔진인 R-2800 엔진은 후에 F6F 헬켓과 P-47 썬더볼트에도 탑재되는 유명한 엔진이기도 했다. 그러나 썬더볼트를 보면 알 수 있듯, 엔진 자체 크기가 매우 커, 항공기 전반적인 크기도 커질 수 밖에 없었고, 기수 부분은 특징적으로 투박한 생김새를 가질 수 밖에 없었다. 여하튼 어여곡절 끝에 이 보트 B기의 생산이 결정되었고, 이것이 그 유명한 F4U 콜세어기의 원형이 되었다. 이때가 1938년 5월의 일이다.
[XF4U의 일러스트.... 아직 화력이 약했고, 칵크핏의 위치가 평범한 다른 전투기처럼, 주익 가까이에 위치해 있다.... 통통한 모습이 콜세어 여러 별명 중 하나인 수퇘지(Hog)와 잘 어울리는 모습이다.]
P-47 썬더볼트를 리뷰하면서, 잠시 언급했지만, R-2800 엔진의 강력한 파워를 제대로 발휘하기 위해서는 그에 걸맞는 커다란 프로펠러가 필요했다. P-47은 지름 3.71 m의 4날 프로펠러를, F4U의 경우 4.04 m의 3날 프로펠러를 채택하게 된다. 그런데 프러펠러 크기가 증가하게 되면 자연이 이착륙시 동체의 높이가 그만큼 높아야 한다는 문제가 새로이 발생할 수 밖에 없다.
[1940년 미해군은 그루만사의 F-3F 와일드캣이 일본해군기에 부족한 성능을 보여주자 바로 차기 기체를 개발을 의뢰하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F-4U 코르세어 였다. 사진은 F-4U의 시제품인 XF4U의 모습이다 XF4U는 1940년 5월 29일 첫 비행에 성공하고 양산을 앞두고 있었으나 착륙이 시야가 확보되지 않는 이유로 배치가 늦어졌다. 그래서 대타로 먼저 등장한것이 바로 F-6F 헬켓이였다 ]
[ XF4U의 실제 사진...... 아직도 우리 눈에 익은 콜세어의 모습은 아니다.... ]
이를 해결하기 위해 썬더볼트의 경우, 랜딩기어 자체 길이를 늘였고, 콜세어의 경우 날개 각도에 변화를 주게 된다. 즉 콜세어의 외관상 특징이라고 할 수 있는 갈매기 모양으로 꺾인 주익 구조가 나올 수 밖에 없었던 주 원인이 바로 프로펠러의 크기 때문이었다고 보면 된다. 보트사의 설계진은 주익 중 가장 아랫부분, 즉 꺾겨진 부분에 랜딩기어를 장착함으로써, 랜딩기어 부착부위 자체의 높이를 낮추어, 랜딩기어 길이를 늘이지 않아도 되었다. 그런데 이렇게 만들어 놓고 보니, 주익의 동체 부착 부위가 아주 자연스러운 각도를 가지게 되면서, 이상적인 유선형 구조가 되어 버리는 부수적인 효과까지 얻게 되었다.
[사진] XF4U의 시험비행... 404 mph라는 놀라운 속도를 보여 주었다. 드디어 400 mph 벽이 허물어진 것이다.]
또 주익의 전면에 연료탱크를 장착하였는데, 이것은 나중에 칵크핏의 위치를 재조정하는 결정적인 원인이 되었다. 이것에 대해서는 나중에 언급하기로 하겠다. 무장으로는 각 주익에 12.7 mm (0.50 인치) 기관총 한정씩과, 카울링에 12.7 mm 와 7.62 mm(0.30 인치) 기관총 한정씩을 장착해 원형기시절까지만 해도, 콜세어도 빈약한 무장을 가진 기체였음을 알 수 있다.
드디어 1938년 6월, 미해군은 XF4U-1의 대량 생산을 결정하였고, 1940년 5월, XF4U-1기의 첫 시험비행이 이루어졌다. 이때 콜세어는 400 mph 속도의 벽을 허물고 404 mph라는 엄청나게 빠른 속력과 뛰어난 상승력을 보여주었다.
[1938년 6월, 미해군은 XF4U-1의 대량 생산을 결정하였고, 1940년 5월, XF4U-1기의 첫 시험비행이 이루어졌다. 이때 콜세어는 400 mph 속도의 벽을 허물고 404 mph라는 엄청나게 빠른 속력과 뛰어난 상승력을 보여주었다. 이후 580대의 F-4U-1 형이 생산되기에 이른다]
[최종 조립라인에 있는 F-4U-1의 모습 당시 전선에서의 신형전투기의 요청이 쇄도하는지라 미육군은 한시라도 급했으며 보우트사외에 굿이어사와 브루스터사에서 생산된 기체들도 있었다 이들 수출용 기체들은 각각 FG-1, F3A-1이라고 부른다.]
고양이들에게 항공모함을 뺏긴 수퇘지들 (최초의 실전형 F4U-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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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1년 6월, 미해군은 보트사에 F4U-1기 580 여 대를 주문하면서, 조건으로 빈약한 화력을 강화할 것을 요구했다. 보트사는 주익의 화력을 12.7 mm 기관총 총 6정으로 보강하기로 결정했다.
이에 따라 주익 전면에 장착했던 연료 탱크의 위치를 옮겨야만 했다. 기체 전반의 무게 중심을 고려해 동체 중앙에 새로이 연료 탱크를 만들었고, 이렇게 되면서, 칵크핏 위치가 약 0.9 m 가량 후방으로 밀려 버렸다. XF4U에서도 이착륙시 시야가 불량하기로 유명했는데, 칵크핏이 뒤로 옮겨지면서, 이착함시 시야는 더더욱 나빠졌다. (단 칵크핏이 주익의 뒷쪽에 위치해, 일반적인 전투기들이 주익에 가려져 아랫쪽 시야가 안좋았던 반면, 콜세어는 탁월한 하방 시야를 갖게 되었다.) 엔진은 2000 마력의 프래트 앤 휘트니 R-2800-8 엔진을 장착해 파워는 증대되었지만, 늘어난 무장과 장갑때문에 기체 무게 역시 상당히 증가해 버렸다. (XF4U-1의 경우 4244 kg이던 것이 F4U-1에 와서는 5758 kg에 육박했다)
[이제 좀 콜세어 티가 나는 F4U-1기의 일러스트..... 주익 화력을 보강하면서 주익에 있던 연료탱크를 동체로 옮기는 바람에 칵크핏의 위치가 약 1m 가량 뒤로 밀렸다. 이것이 이착함시 시야 장애를 유발하는 결정적인 요소가 된다. ]
미해군이 와일드 캣의 대체 기종으로 콜세어를 주목하고 있었고, 빠른 실전 투입을 위해, 계속 보트사를 독려하기는 했지만, 몇몇 문제점이 계속 발견되면서, 1942년 6월에 가서야, F4U-1기의 처녀비행이 이루어졌다. 콜세어는 같은 R-2800 엔진을 장착했던 P-47과 F6F 헬캣과 비교해 볼때, P-47보다는 속도가 느렸지만, 헬캣보다는 우위에 있었고, 9000 m 이상에서는 P-47보다 오히려 빠른 속도를 보여 주었다.
[초기 F-4U 등은 큰 엔진때문에 기수를 늘여버리는 바람에 이착륙시 시야가 제한되는 문제가 있었다. 이는 좁은 갑판에서 이륙해야하는 해군기로서는 최고의 단점이였는데 그리하여 초기 생산형들은 모두 미해병대로 돌려져 지상에서 운용되게 되었다. 사진은 본격적인 양산형 기체인 F-4U-1 의 모습으로 우리가 아는 그 형태를 하고 있음을 잘 알수 있다]
기동성은 고속 비행에서 빛을 발했는데, 이것은 일본의 A6M 지로센이 고속비행시, 에일러론, 승강타등의 움직임이 둔해져 기동이 현격히 떨어지는 것과 비교할 때, 한단계 우위에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즉 콜세어는 빠른 속도 하에서도, 러더를 제외한 에일러론, 승강타의 움직임이 원활해, 빠른 롤과 급강하후 상승기동이 가능했다.
[사진] 에고 누구 나 좀 내려줘요... 함모에서 이착륙시 조금만 실수하면 이렇게 되어 버리는 콜세어... 자세히 보면, 기수부분에 작은 해골마크가 있다... 졸리로저스의 콜세어로 보인다.
1942년 7월말... 드디어 F4U-1기들이 일선 배치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실전에 투입되면서, 전부터 걱정거리였던 함모 탑재기로서 치명적인 단점들이 속출했다.
[F4U 코르세어는 강력한 2000마력급의 공냉식엔진에 거대한 주익과 동체를 가진 멋진 전투기였다. 하지만 그만큼 문제점도 없지 않았는데.. 일단, 무거운 동체를 좁은 갑판에서 이착륙 시키기위해 튼튼한 랜딩기어를 장착하였고 이를 수납하기 위해 주익을 W자형으로 설계할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고성능의 엔진과 짝을 맞추기 위해 거대한 프로펠러를 장착하였는데 이 프로펠터가 지면에 닿지 않게 하기 위해서 기수부분을 더 들수밖에 없었고 이는 이착륙시 조종사의 시야가 확보되지 않는 치명적문제점이 있었다.]
그것은 저속에서 자주 스톨에 빠진다는 것(스톨에 걸리면 우측 날개가 급격히 아래로 먼저 쳐지면서 스핀에 빠지곤 했다고 한다. 이것은 항모 착함시 매우 위험한 상황이 벌어질 가능성을 내포한 것이었다)과 엔진의 엄청난 크기 때문에 이착함시 시야가 좋지 않다는 점, 또 착함시 기체가 갑판 상판에서 튕겨 올라가는 현상 등이었다.
[W자형의 주익과 쳐들리는 기수형태때문에 초기 F4U-1 들은 좁은 항모의 갑판에서 운용하기 어려웠다. 그로인해 크고작은 사고가 잦았으며 불만들도 쇄도하게 되었다]
[코르세어는 너무나 강력한 엔진출력에다 불안정한 항모 착함 성능 때문에 초기에는 멋모르고 소위를 태웠다 염라대왕님 앞에 갈뻔한 사람이 몇몇 있었다. 뭐 다행이도 비행기가 너무 튼튼해서 다들 목숨은 건졌다고 한다. 그것 때문에 미 해병대에서는 대위 이상이 되어야 콜세어를 태웠다는 믿지못한 사연이..]
물론 이런 것은 활주로가 넓은 지상이라면 별 문제가 되지 않겠지만, 애당초 콜세어가 해군용 함모 탑재기로 계획되었으니, 커다란 문제거리가 아닐 수 없었다. 급기야 콜세어들은 항모에 배치된 지 얼마 되지도 않아, 함상기의 역할을 F6F 헬켓에게 내주고 하선하는 수모를 당하게 된다. 그런데 덕분에 이득을 본 것은 미해병이었다. 당시 미해병은 F4F 와일드 캣을 보유하고, 이곳 저곳 태평양 섬기지에 배치되어 있었는데, 그렇게 기다리던 신형기가 생각보다도 빨리 배치되었으니... 그것도 착함 때문에 항모에서 밀려나기는 했지만, 객관적으로 F6F 헬캣보다 뛰어난 성능의 콜세어가....
[초기 F-4U-1들은 이착륙이 불안하다는 이유로 미해군에서 인도를 거부했는데 실제로도 미드웨이 해전 직후 완성되었음에도 F4U-1이 항모착함테스트를 좀처럼 통과하지 못하자 해군은 초도 인도분 584대 전량을 해병대에 이관해 버렸고 결국 해병대 육상기지에서 주로 운용되었다[4]. 그럼에도 우수한 성능으로 뛰어난 활약을 펼쳐 해병대 최고의 에이스 그레고리 "페피" 보잉턴(28대 격추)을 비롯한 다수의 에이스를 배출했다. 사진은 섬기지에서 출격준비중인 미해병대 소속 코르세어의 모습 유명한 아카데미 제품의 박스아트의 실제 사진이기도 하다]
F4U-1의 세부버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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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4U-1은 나중에 여러 세부 버전으로 업그레이드 되었다. 먼저 조종석을 약 18 cm 높여, 전후방 시야를 개선하고, 캐노피도 종전의 새장형 캐노피에서, 프레임이 작으면서도 강화유리가 위로 봉긋 솟아, 시야가 깨끗해진 벌브(Bulb)형 캐노피를 장착한 F4U-1A형이 생산되었다. 또 F4U-1A형의 일부를 영국에 공급하면서 F4U-1B라고 불르기도 했으며, (영국은 자체적으로 콜세어 Mk I이라는 명칭으로 실전에 투입했다.) 무장을 4정의 20 mm 캐논으로 대폭 교체해 화력을 증대시킨 F4U-1C형이 만들어지기도 했다.
졸리로저스 비행대의 F4U-1A기.....캐노피의 모양이 F4U-1의 새장형 캐노피에서 벌브형 캐노피로 바뀐 것을 볼 수 있다.
[코르세어의 주요 성능개량점중 하나인 캐노피의 형태변화 좌로부터 버드케이지로 불리는 초기형 중간이 가운데가 봉긋하게 솟은 싱글타입 그리고 맨 우측이 후기형 캐노피로 뒤로 갈수록 시야가 좋아지게 된다]
Original F4U-1 with the birdcage canopy. (F4U-1 초기형에 있었던 버드케이지 형태의 캐노피 모습 ]
[초기형태의 F4U-1 의 캐노피는 수많은 창살형 프레임으로 이루어진 일면ㅇ 버드케이지형 캐노피로 당연 시야가 상당히 안좋았다]
[버드케이지형은 초기 F4U-1 형에 주로 보인다. 당연 시야가 안좋아 불만이 많았고 곧 수정된 형태가 도입된다]
XF4U-3; few of these were manufactured and primarily used as engine testbeds. (초기 싱글타입 캐노피 테스트 버젼으로 XF4U-3 몇몇기에만 시범적으로 도입되었다]
[나중에 소개하는 싱글타입 캐노피와는 다르게 천장을 가로지르는 두개의 프레임이 있다]
The F4U-4, the last Corsair to enter service in WWII. (후기형으로 가면 보이는 싱글형 캐노피로 버드게이지형과는 달리 후방 캐노피가 하나의 사출물로 되어 있으며 가운데가 솟아울라 후방의 시야를 어느정도 확보할 수 있었다]
F4U-5, an improved F4U-4. Incorporates 4x20mm cannons.[최후기형인 1947~50년대 보이는 더 개량된 버젼]
출처 http://wesworld.jk-clan.de/thread.php?postid=105797
콜세어 캐노피의 변천사.... F4U-1, 새장형 캐노피.... F4U-1A, 작은 수평 프레임을 가진 벌브형 캐노피, F4U-1C, 수평프레임까지 없어진 벌브형 캐노피.... 역시 이차대전 중반부터는 전방향 시야을 위한 캐노피의 연구가 한창이었나 보다....
1944년 초, 미해군 222 비행대와, 17 비행대에서 자체적으로 F4U-1기를 개조해 투하용 폭탄을 탑재할 수 있게 변형했는데, 이것이 곧 다른 비행대에도 확산되었다. 보트사는 이런 실전 경험에서 착안해 전폭기 스타일의 F4U-1D형을 생산해 내게 된다. D형은 3개의 파일론(pylon)을 동체와 각 주익에 달았고, 이곳에 로케탄까지 장착할 수 있었다.
[사진] 정찰용 콜세어 F4U-1P형의 후방 동체 아래에 카메라를 설치하고 있는 모습...
그외 정찰용 콜세어로 F4U-1P기가 생산되기도 했는데, 이것은 항공촬영용 카메라를 동체후방에 장착해, 적진의 사전 답사와 폭격 결과 분석용 정찰기로 사용되기도 했다. (또 F4U-1 후기형에서는 엔진도 업그레이드된 물-알콜 분사 장치가 탑재된 R-2800-8W형으로 교체했다.)
[대전후반으로 가면 거의 일본해군의 전투기들이 사라진 상태라 대부분의 F-4U 는 지상공격과 함선공격임무에 투입되었으며 그로인해 실질적으로 코르세어들은 다목적 멀티롤파이터로 변신을 꾀하게 된다. 무장은 기존의 6문의 12.7밀리 기관총대신 20밀리 M3 기관포 2문과 12.7밀리 2문형태로 변경되고 주익과 동체에 폭탄과 5인치 로켓무장을 하고 임무에 나가는 경우가 많아졌다]
F4U-1D형의 모습..... 대전말에야 일선에 보급된 기종.... 역시 칵크핏의 변화를 볼 수 있다. 이미 당시 태평양전선에선 제공권이 미국에게 완전히 넘어간 후라, D형은 순수한 요격기가 아니라 지상공격을 겸한 전폭기의 개념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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