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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시인의 방 [蒜艾齋 산애재] 원문보기 글쓴이: 松葉
시집 [☆달춤☆]의 앞표지(좌)와 뒤표지(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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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달춤 ]
이해웅 시집 / 지혜사랑 108 / 도서출판 지혜/계간시전문지 애지(2014.04.25) / 값 9,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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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춤
— 중국 운남영상 가무쇼
이해웅
둥근 여자 안에 한 여자가 있다
손가락이 길다 은빛이다
비손 같은 두 손의 모음
찰나에 벌어지는 곡선들의 무한한 충돌
너머 무늬 짓는 파문들
너무나 원숙한 태동胎動
날카로운 손끝이 후벼 파는
영혼의 골수
둥근 여자는 이따금 신음할 뿐
말이 없다
누 억만 년 그녀 품은 마음이
춤으로 되살아난다
갈망일까 염원일까
꽃과 잎은 제 갈 길 갈 뿐
밤과 낮은 영원하다
저 웅숭깊은 심해에
조각배 한 척 가고 있다
무희의 손가락 점점 길어진다
아득한 태아적 꿈속을 유영하던 나
여인의 춤사위에 겹쳐진다
입춘무렵
이해웅
자꾸 입덧이 난다
골목시장에는 물ㄹ오른 언어들 출시 중
폭설∙폭력∙폭동∙폭발∙폭약∙폭탄∙폭파
자꾸괄약근에 힘이 간다
32년만에 무죄로 석방된 그가 오고 있다
‘吉大春立’이라 거꾸로 써 이마팍에 붙인다
욕망의 무덤들
이해웅
달빛이 무르익을 때 후미진 삶의 뒤안길에선
낙과소리 끊이질 않네
파도의 갈기 끝에선 튀는 물방울이 허공에 부딪혀
연신 피아노 소릴 날려 보낸다
꿈은 끓는 물속에서 갓 건져 올린 시금치 빛이다가
금세 풀어져 흐물흐물 형체를 잃고 만다
역사 속 노론 소론은 시간 속에서 노른자 흰자로 바뀌었다가
지금은 보수 ․ 진보로 쌈박질이다
문득 어깨 위의 달을 올려다본다
달무리는 없는데 옛날 그 달 아니다
무주공산이던 저 달에 너도 나도 구획을 짓고
투자 열풍 일어날 날 머지않았다
인간의 욕망 밤새 콩나물보다 빨리 자라
모두 근시 된 지 오래다
바람이 이따금 불어 각성을 촉구하지만
내성이 생긴 지 이미 오래
욕망이여 욕망이여
천지엔 너의 무덤으로 넘쳐난다
잠깐 귀 기울이는 사이 멀리서 낙과 소리 들린다
마음을 가슴 밑바닥까지 내려놓는다
물소리 바람소리 한결 정겹다
잠자는 철학
이해웅
철학은 왜 이따금 시간의 어깨 위에 올라앉는가
비탈진 삶이 끌고 가는 너의 몰골이
구름이 되었다가 일순 는개로 뒤덮인다
눈길 가는 공사장 밑은 천 길 낭떠러지
크레인의 낙락한 밧줄 끝 철제 빔을 타고 가는
너의 의식은 생사의 갈림길에서
오소소 떨고 있다
밤의 아가리가 낮의 뒷덜미를 물고 늘어진다
절대는 생의 사다리를 타고 오르는
순간마다 불타오르는데
나무그늘에 누운 오후 한때의 느림보 삶이여
휴식은 달콤하나 빠진 앞니 사이로
파도처럼 밀려오는 발 빠른 시간들
장롱 속 개켜놓은 철학조차 펴볼 시간 없는
나날의 연속
볕들 그늘조차 깡그리 마르고 만 일상 위에
한숨의 그림자만 질펀하게 널려 있다
지붕 밑에는
이해웅
초록을 배경삼은 빨강색 갈색 지붕들
이 떠나간 곳엔 몇 개의 크고 작은
사각의 방들이 가족처럼 모여 살고 있다
집이 힘이 센 것은 이 가족들 덕분이다
이동 없는 이 사각의 방들은 절대
속내를 드러내지 않으면서
엄격히 경계를 사수한다
쿵쿵거리거나 소란을 피워도
벽처럼 돌아앉아 관여 않는 게
체질화되어 있다
현관에서 들어오는 바람은
마치 야밤에 경비원이 순찰을 돌듯
사각의 큰방부터 한 바퀴 휙 돌아보고는
현관을 통해 빠져나가 버린다
그러나 아무리 가족이 모여 살아도
지붕 없는 집은 이미 집이 아니다
경주 남산에서 만나는 얼굴 없는 부처가
부처가 아니듯이
밤 시아 마실 갔던 지붕이 돌아와
원위치에 앉으면
사각의 방들은 저마다 들을 켜고
다시 활기를 찾기 시작한다
죄를 팝니다
이해웅
자, 이거 떠러미요 떠러미
가게 앉은 중년 늙은이 하나
죄를 내다 팔고 있다
형형색색의 죄가 행인들의 시선을 끈다
상품에 따라 가격이 천차만별이다
고가의 상품은 주로 대기업 총수들이 단골손님
그들은 주로 환치기나 비자금을 몰래 빼돌려
스위스로 보낸다
고가 상품의 특종은 권력형 비리로
권좌에서 끌어 모은 돈을 해외 비밀계좌에 숨긴다
눈먼 자에게 유독 눈독이 가는 상품은
유령회사를 차려 대리점 모집한 돈을 챙겨
해외로 줄행랑을 놓는 것
기업가에 군침 도는 상품엔 담합이란 게 있지
끼리끼리 입을 맞춘 가격 담합은
단숨에 몇 백억을 꿀꺽 삼키는 재미로 인기 상품
견물생심이라 회삿돈 슬그머니 횡령하고 들통나
쇠고랑 차는 일은 식은 죽 먹기다
예까지는 고가 상품의 매출 실적이지만
손에 피 묻히는 일은 없다
보험금 노린 존속살해용 상품은
한 해 몇 개씩은 꼭 팔려 나가는데
개당 십억 대를 호가한다
서울 여 경찰서장 주장으로 공창 폐지된 이후
우후죽순으로 늘어난 성범죄는
요즘 불티나게 팔리며 재미 또한 솔솔하다
성폭력범은 증거인멸을 위해 범행 후
살해가 단골메뉴다
학교 폭력 따윈 시도 때도 없이 팔려나가지만
별로 돈이 되지 않는다
손에 피 묻히는 상품은 팔려나간 뒤에도
자꾸 죄스러운 생각이 들어 불면으로 밤을
지새울 때가 많다
죄를 마구 사 쓰고도 죄의식 없는 소비자들
자본주의는 지금 황천항해 중이다
백지의 증언
이해웅
아무도 발자국을 남기지 않았다
하
의식이 증발해버린 순간 절대 앞에 선 적이 있다
얀
배냇짓이 가을 호수 위에서 걸음마를 시작한다
종
달력에 붙은 숫자들 하나씩 지구 밖으로 걸어나간다
이
매일 시詩물로 빨래를 하지만 얼룩들 쉽게 지워지지 않는다
배
가 의식을 가로지른다*
*고딕체는 마지막 행을 읽기 전에 읽는다.
내 안에 든 짐승 1
이해웅
내 안에 몇 마리 짐승이 살고 있다
꽤 오래 되었다
마지못한 동행이면서 웬수처럼 함께 늙어간다
저 허허벌판에 누가 씨앗을 떨어뜨렸나
비가 오면 싹이 트고 자라
잎은 바람에 흔들리겠지만
생성 자체가 안고 있는 비애의 그늘이
때로 불면의 밤을 몰고 오는 것이다
아무데서나 가래침 뱉고 고성 지르다가도
식탐의 충혈된 눈동자를 뒤룩거리는
저놈과의 동행
애시 당초 삶 속 우울의 먹구름을 드리웠다
오후의 나무그늘에 앉아 내 안의 짐승들
다독거린다
금세 코를 골며 깊은 잠에 빠져드는 놈들
멀리 건너다보는 거리엔 인파의 물결
사람마다 제 안의 짐승들 감춘 채
오가고 있다
지금
짐승도 사람도 아닌 허깨비 하나가
허허로운 들판 한가운데서
홀로 섬이 되어 가고 있다
코가 여는 세상
이해웅
벚꽃 벚꽃 하고 연거푸 두어 번 주문을 외니
굳게 닫혔던 나를 끌어들이는 문
권총 앞에 손들듯 내가 가진
모든 언어를 땅바닥에 내려놓았다
순간
뭉크가 달려와 나의 두 귀를 베어 갔다
뒤늦게 날아온 독수리 한 마리
내 혀를 물고 갔다
코가 여는 세상 속으로
더듬더듬 걸어 들어갔다
그윽하고 향기로운 세상과의
첫 대면은 이렇게 이루어졌다
그늘
이해웅
고희가 제 발로 징검다리를 건너는 동안
여태 그늘 한 장 제대로 만져보지 못했다
밤마다 집 앞의 느티나무가 몸피를 늘리는데
덩달아 따라하는 그늘을 보면서
삶의 진실을 확장이라 정의한다
시간이 돌아 앉아 발톱을 깎을 때마다
성장한 그늘이 날마다 마을 고로古老들 불러놓고
세월의 실타래를 풀어낸다
매미의 독창을 무대에 먼저 세우고
직박구리나 까치의 뚜엣을 들려준다
서서히 모두의 가슴으로 스며드는 그늘
어느새 땅거미 짙어지고 어둠이 온통
마을을 휩쓸 즈음 그늘은 나무뿌리를 타고
땅 속 아늑한 곳에 자리를 편다
나무의 본성
이해웅
나무가 뿌리 손으로 흙덩이를 꽉 움켜쥐고
엉덩이로 줄기를 밀어 올리는 건
본질을 향한 안간힘을 다하는 그의 노력이다
우리가 무얼 새운다는 건
본질을 향한 발돋움이다
나무가 태양을 향해 스스로를 위로
밀어 올린다는 건
나무의 강고한 의지요 비타협의 눈물겨운
순결성의 자기표현이다
아무나 나무를 타고 오를 순 있어도
그의 내심을 읽을 수 없는 것은
나무가 가지는 결백증 때문이다
바람은 자주 가지 끝에 와 놀다 가지만
그의 속 마음관 거리가 멀다
아무도 없는 밤중에 그가 홀로 전율하지만
그건 자신을 추스르는 방식이다
영랑 생가에서
이해웅
무너져 내리던 꽃의 임계에서
다시금 꽃은 차오르고 있었다
꽃의 상승과 하강
지난한 그 몸짓에서
한 마리 나비가 날아오른다
투명한 나비의 율동 따라
봄이 피고 봄이 기운다
오월이 밀어올린 꽃대가
사월을 힘겹게 떠받쳐 뜰 안
한가득 그대 눈빛을 열고 있다
한 사내의 끝없는 연정이
멀리서부터 자주빛 스란치마를
불러오고 있다
모닥불
이해웅
그것은 사랑의 동심원 안에 있다
이따금 불티가 튀긴 하지만
그건 익어가는 사랑의 껍질에 불과하가
우리가 촛불을 향해 두 손을 모으듯
모닥불은 우리들 마음이 하나일 때
활활 타 오른다
심술궂은 바람이여
넌 무얼 노리는가
불의 심장 가로지르며 발길질하는
버릇 예나 지금이나 매한가지
저기
어둠 속 사랑으로 발갛게 익은 얼굴들만
환히 비추며 타오르는 불길
부르는 노래는 시간의 불꽃 속
순간순간 타서 재가 되어도
서로 손 맞잡고 모닥불 둘레를 돌며
다진 사랑은 밤하늘 별빛 같이
오래 빛나리
바람은 지금도 생시다
이해웅
누가 죽은 바람의 후생을 보았는가
병풍을 둘러친 관 속에서도
발가락 꼼지락거리며 노닥거리는 바람
일손 놓고 있다가도 후다닥 사립을 나서는
아무도 타 넘지 못한 벽을 혼자
넘어가는 자
한 쪽 날개의 길이가 천리도 넘는
최첨단 레이저에도 포착되지 않는
바람은 천개의 눈을 가지고 용케도
빈 곳을 빠져 나간다
간혹 사막을 찾아 모래언덕에
등을 비벼대는 바람
탄생 후 발라낸 그의 뼈가 고스란히 묻힌 곳
뼈가 없으므로 형체가 없는 바람
시도 때도 없이 장난을 걸어온다
나사죄기
이해웅
육탈할 날 멀지 않았다
관절이란 관절 모두 삐그덕거린다
열리 식어가는 하오의 햇빛
쓰르라미 소리가 물고 있는 여름의 꽁지가
짧다
긴장이 이완 쪽으로 한 템포 낮춘다
낙조가 붉게 드리운 허공을
새 떼가 까맣게 날아오른다
대화의 성긴 자리에 바람이 들어와 푸석거린다
손맛이 떠난 자리마다 폐업이 속출한다
초침을 따라가던 발걸음이
지구 밖에 한 발을 내디딘다
밀물썰물이 드나들 때마다
구멍이 자꾸 커져 간다
구닥다리 시인
이해웅
오전 한때 우주가 서서히 가라앉는다
침몰하고 있다
국회에선 입법을 서두른다
침몰을 그냥 둘 거냐 말 거냐를 위해
침몰하는 우주 위로 벚꽃이 떨어지고 있다
한 때 붉었던 그 사나이 얼굴도 함께 떨어진다
지금 있는 모든 것은 구식이다
너도 나도 구식이다
지하철 맞은편에 앉은 저 여인의 스마트폰도 구식이다
마트엔 초를 다퉈 신상품이 쏟아진다
사서 돌아서는 순간 구식이 된다
시인이 쓴 시의 수많은 언어들 하나같이 구식이다
서가에 꽂힌 시집들 모두 구닥다리 진열장이다
지금 입 안에 사탕같이 달콤하게 녹이고 있는 말들
혀끝에 내뱉는 순간 이미 구식이 되고 만다
시인들이 초를 다투어 내놓는 신상품들
읽는 순간 구닥다리 신세 면치 못한다
뜬눈으로 밤을 지새운 녹초가 된 시인들이
충혈된 눈으로 바깥세상을 바라본다
벚꽃 잎이 바람에 흩날린다
시인도 꽃잎처럼 떨어져 어디론가 가고 있다
서서히 침몰하는 우주와 함께
새해 첫날에
- 갑오년
이해웅
구름 속 달리던 발이 땅 위에 내려선다
시야엔 오직 진실 하나만이 빛을 발한다
언어 이전의 이 절대 속에
합장하며 눈을 감는다
만상이 살아 기기로 소통하며
하나가 된다
큰 물음 하나 시공 가득 메우며
눈앞으로 다가선다
과거 현재 미래가 한 대오 속에서
새 이름표를 단다
계사 갑오 을미
나는 현재에다 첫발을 디디며
무량한 저 빛을 받아들인다
소금의 시
이해웅
저 마른 호수의 밑바닥을 보아라
내 몸의 파린 피는 죄다 졸아져
희디 흰 입자의 소금이 된다
허공을 떠도는 말들 모두 끌어내려
발아래 무릎 꿇릴 때
견고한 침묵의 언어가 된다
소금의 언어는 짜다
소금의 시에 혀끝을 대어 보아라
짜디 짠 시가
세상을 간졸임한다
부처를 만나고 와서
이해웅
경기도 교촌읍 수기마을 현대힐스테이트 213동 202호
부처 두 분이 사는 아들의 집
규호와 지효
법명은 아니나 지금은 분명 부처의 이름이다
성철 스님 생전에 주로 놀던 친구가 철부지 아이들
아이가 어른의 아버지라고 간파한 시인은
일찍이 아이에게서 부처를 본 것
집에 돌아와서도 두 부처님은 내 맘 속에서
울다가 웃다가 하며 쉴새없이 꼼지락거리고 있다
부처가 귀한 세상에서 부처를 보도고 온 이후
마음을 연일 태평성대다
살아있다는 것은
이해웅
살아있다는 것은
늦가을 저 가로수애ㅔ 메달린
단풍 한 닢이다
밤마다 우레는 지심 먼 곳에서
들려오고
반짝거리는 먼 바다의 은빛 물비늘
유년 속 잠깐 얼굴 내밀고 사라진다
여윈 팔목에서 뛰고 있는 맥박이
시간의 사다리를 건너는데
부는 바람은 가다가 자주 쉬며
깡마른 종아리를 매만져 본다
구름 속 잠자던 별이 깨어나
제 발등을 유심히 바라보는 시간
수수깡처럼 부서진 과거들이
하나 둘 되살아난다
존재는 낮 동안 늘 그림자의 길이를 재고
허기진 삶의 구멍 속에 현재를 밀어넣는다
이따금 욱신거리는 관절
바람처럼 왔다가는 통풍
기댄 양지 같은 삶의 한때 있으나
가로수에 매달린 단풍잎 하나
이제 곧 낙엽 되어 떠날 것이다
물속에서 일어서는 시
이해웅
남루한 자리에서 걸어 나오는 말들
낙엽의 잎자루는 생의 벼랑을 알고 있다
깡마른 바람이 계절을 양지로 몰고 간다
풍성하던 호주머니는 바람소리로 채워지고
넌 갈대숲 우거진 외나무다리를 건너고 있다
귀소하는 몇 마리의 새가 아픈 울음을 떨구고 간다
우울한 시간 위에 맥박이 몇 박자씩 놓친다
심각하던 삶들은 책갈피 속에 나뭇잎처럼 꽂혀 있다
봄비는 골목마다 익은 계절의 얼굴이 환하다
바쁜 걸음들이 여윈 시간을 밟고 간다
나를 바라보는 시간이 무시로 줄어든다
태양을 떠받치는 허기진 말들의 범람
잎 진 가지 사이로 파란 물이 스미는 걸 보면
달뜬 마음이 맑고 투명한 가을호수를 닮아간다
드디어 뼈대 갖춘 시 한 편 무 속에서 일어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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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의 말
이번 시집은 스무 번째이니 1973년에 첫 시집『벽』을 낸 후 평균 2년에 한 번꼴로 낸 셈이다. 늙은 것 당장 눈에는 보이지 않으나 일정 기간이 지나면 신체에 변화가 오듯 시 역시도 마ㅓ찬가지라 본다. 물론 거기엔 치열한 시정신이 담보되어야 가능할 일이다. 오늘 쓴 시를 내일 버린다는 심정으로 시를 써 오지만 한번 작은 집을 버리는 일이 쉽지 않다는 걸 매번 느낀다. 그저 계주하는 심정으로 나에게 주어진 시간에 최선을 다할 뿐이다.
2014년 3월
黎園齋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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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웅 詩集 [※달춤※]
[ 해설 ] -
먼 불빛, 적막 위에 눈은 내려 쌓이고
이해웅 시인
오늘날 한국의 평단이 문학의 발전을 위해 제대로 작동하고 있는가 하고 물으면 식견 있는 사람치고 그렇다고 대답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만큼 문학비평계는 상업주의와 결탁하여 제 기능을 상실한 지 오래다. 주례비평․ 골목비평이 넘쳐나고 있으며, 문학평론이 권력화되어 제 사람 챙기기 바쁘고, 얼빠진 시인들은 거기에 빌붙어 자기 얼굴 내기에 여념이 없다.
원래 작품 해설서는 제대로 된 평론집과는 거리가 먼 것인데 작품 해설 모음을 묶어 평론집인 양 오도하는 잘못된 풍토는 하루 빨리 사라져야 할 것이다. 평론가도 평론가려니놔 시인 역시도 마찬가지다. 무엇 때문에 평론가에게 목을 매다는가? 시인으로서의 자존은 다 어디 갔는가? 이와 같은 얼빠진 정신 상태에서 제대로 된 시가 나오기는 어려운 일이다. 시인의 자존을 망각하고 타 장르에 기대어 자신의 위상을 지키겠다는 저질 풍토는 그저 개탄스러울 뿐이다. 시의 정신이야말로 인간정신의 정화이다. 이러한 고양된 정신만이 시가 시로서 존재해야 할 이유이며, 여타 장르와는 생래적으로 다른 시만이 지닌 참모습이 아니겠는가.
내가 첫 시집을 낸 해가 1973년인데, 나는 이미 1960년대 초부터 시를 본격적으로 쓰기 시작했고, 첫 시집 『壁』에는 이때부터 쓴 시가 다수 실려 있다. 개인적으로 남들이 하는 신춘문예나 문학잡지를 통한 등단 과정을 거치지 않았기 때문에 나름대로 그동안 많은 노력을 기울여 왔다고 생각한다. 그렇다고 현재의 내 시가 기대 이상의 수준에 도달했다는 말은 더구나 아니다. 그동안 지나온 날을 돌이켜보면 나는 고인 물에 발을 담그고 오래 앉아 있질 못하는 체질이다. 앞의 자서에서 이미 밝혔듯이 오늘 최선을 다해 쓴 작품을 내일은 버린다는 각오로 시를 써오고 있다.
그동안 시집을 내면서 더러 작품 해설을 평론가들에게 부탁하여 시집 말미에 실은 바 있다. 물론 전문 평론가로서 작품 세계를 알뜰히 살펴 해설을 가한 성실한 경우가 있었는가 하면, 내가 읽어 보아도 쉽게 이해가 가지 않을 정도의 현학적 취향으로 일관해 해설을 다시 해설해야 할 지경에 이른 해설이 없었던 것도 아니다. 더구나 시인의 정신세계에서 가장 소중하게 다루고 있는 부분을 누락시켜 버린 성의 없는 해설도 있었다.
종전의 현장비평에서 위세를 떨치던 신비평의 경우 무엇보다 작품 자체보다 무게 중심을 두고 비평을 해 온 것으로 아는데, 엄연히 작품상에 나타난 시인 정신은 읽으려 하지 않고 소재주의로 시를 몰고 가며 시를 평가하는 것은 평론가의 책무를 올바르게 다했다고 볼 수 없다. 물론 현재 우리나라에서 활동하는 평론가들 중에는 작품의 올바른 평가와 해석을 통하여 시인․ 작가에게 바른 길을 제시하는 경우가 전무하다고는 할 수 없지만 근자에 와서 이런 현상은 점점 희소해져 가고 있는 것만은 부인할 수 없는 것이 사실이다.
근20년 넘게 대학에서 시론과 비평론을 강의해 본 일은 있지만 시인이 자기의 시를 남에게 이야기한다는 것만큼 멋쩍은 일도 없다. 그러나 요즘의 시가 나를 포함해서 독자에게 쉽게 전달된다고 보기 어렵기 때문에 독자를 위한 약간의 자가 해설을 필요하리라 여겨진다. 적어도 이러한 노력은 평론가에게 무책임하게 자기 시집의 해설을 맡겨 버리는 일보다는 오히려 독자들의 작품 이해에 도움을 줄 수 있으리라는 확신 때문이다. 오늘날 ‘작품 해설’이라는 이름을 달고 나오는 해설치고 주례비평적 해설에서 벗어난 경우는 극히 드문 것이 사실이다. 그럴 바엔 시인 자신이 쓴 시작 노트를 제시해줌으로써 독자의 이해를 돕자는 취지의 시도는 전혀 무가치한 일은 아니라고 본다.
나는 이번 시집의 해설을 저자가 직접 씀으로써 이러한 시도가 오히려 시인 자신의 자존을 지키고 독자에게 성큼 다가설 수 있는 좋은 계기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이러한 노력은 발표지가 희소한 지역의 시인들에게 자비 출판을 위한 비용 절감을 위해서도 꼭 필요한 일이라 여겨지기 때문이다.
과거 나의 제2시집 『반란하는 바다』의 표제작인「반란하는 바다」를 두고 작고한 평론가 김준오는 대뜸 “이해웅의 이 시는 모더니즘 시다”로 규정지은 바 있다. 이 시를 당시엔 나 자신 모더니즘에 대한 확고한 지식이나 신념이 없던 때였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런 것을 훨씬 뒷날에 한 평론가가 이렇게 규정지어줌으로써 나는 기존의 서정적 시 쓰기보다는 모더니즘 쪽으로 탐색의 방향타를 옮기게 된 것이라 여겨진다. 그렇다고 지금의 내 시가 모두 모더니즘 계열에 속한다고는 보지 않는다. 간혹 써놓고 보면 서정성이 물씬 풍기는 시가 없는 것도 아니다.
일찍이 김춘수는 자기 시론에 시인을 세부류로 나눠 1)전통과2)중도파 3)혁신파로 분류한 바 있다. 즉 전통 고수의 전통파가 있는가 하면, 끝없이 실험시 쪽으로 나아가는 전위파가 있고, 그 두 가지의 중간자적 위치에 중도파가 있다고 했다. 그중 성공할 활률은 중도파가 많다고 했으며, 전통의 답습은 실패하기 쉽고 지나친 실험은 성공보다는 실패할 확률이 높다고 했다. 나의 경우 이 세 부류 중 중간자적 위치에서 서성거리지 않나 싶다. 요즘 한국 시단을 둘러보면 젊은 시인들을 대개가 실험시 쪽으로 많이 기울어져 있고, 그 다음이 중도파이고, 나머지가 전통 답습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지 않나 싶다.
시인들의 경우는 몰라도 그동안 내가 쓴 시가 어렵다는 주변의 이야기를 들어온 것이 사실이다. 물론 이런 말을 하는 사람들은 아직 시를 이해하는 데 있어 아마추어들이다. 이들 때문에 이번 시집의 해설을 꼭 써야겠다는 충동을 받았는지도 모른다.
그럼 이번 시집에 실린 68편의 시 중 꼭 얘기해보고 싶은 작품들을 골라 내 나름대로의 해설을 해보고자 한다. 다만 한 가지 우려되는 것은 비평론에서 말하는 의도적 오류를 범하지 않을까 하는 점이다. 무슨 말이냐 하면, 시를 쓸 당시 시인이 의도했던 바가 시 속에 제대로 반영이 안 된 것을 마치 반영이 되어 있는 것인 양 해석을 해 나가는 경우이다. 이런 점은 각별히 유의해 해설에 임할 생각이다.
차마 내 피는 영혼을
건너지 못하리
타고 타는 아픔이여
무릉원에 낮달을 비껴 있고
저녁 새소리 적막의 가지 끝에 와 앉는데
갈 길은 대륙처럼 열려있다
안개처럼 귓속으로 스며드는
아리랑의 유음流音
달뜬 마음이 기둥처럼 일어선다
파랑 같은 세상 삿대질하며
들썩이던 날들
이제는 황혼 속 새 떼같이
멀어져 간다
열려 있는 길 위에
눈이 내린다
시간 위에 시간을 덮는 눈
적막이 적막 위에 올라앉는다
-「대륙처럼 열려 있는 길」전문
첫 연에 나오는 “차마 피는 내 영혼을/건너지 못하기/타고 타는 아픔이여”라는 시구에서 피는 내 영혼을 건너기 위해서는 현재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상황 개선이 절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갈 길은 대륙처럼 열려있는”데 결코 갈 수 없는 상황이 벌어지고 있으니 좌절할 수밖에 없다. 그럼 화자(시인)가 갈 곳은 어디인가? 그곳은 시 1연에 보이는 ‘무릉원’이라 보면 된다. 무릉원은 곧 무릉도원이요 이상향이다. 그렇지만 이것을 오늘날 우리의 현실에다 이식시키면 무릉원은 통일조국과 결코 무관할 수 없다. 이것을 만약 무릉도원으로만 해석한다면 나는 이상주의자일 수밖에 없다.
다음 연에서 “안개처럼 귓속으로 스며드는/아리랑의 유음流音”에서의 ‘아리랑’은 절절히 우리 겨레의 뼈 속에 녹아 있는 한과 정체성을 형성하는 요소로 작용하는 부분이다. “파랑 같은 세상 삿대질하며/들썩이는 날들”에서는 우리가 갈 길은 먼데 현실에서 벌어지는 순탄치 만은 않은 난관들, 즉 분단의 역사가 가져오는 남북 대결과 남한 내부에서 일어나는 극심한 분열상으로 인한 갈등 양상이다.
마지막 연은 이런 와중에 눈이 내려 “적막이 적막 위에 올라 앉는다”고 표현함으로써 오늘의 암울한 현실을 나름대로 극대화하려고 한 것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작자의 의도가 제대로 반영되지 않았다면 이 시는 실패작이 된다.
자꾸 입덧이 난다
골목시장에는 물오른 언어들 출시 중
폭설․ 폭력․ 폭동․ 폭발․ 폭약․ 폭탄․ 폭파
자꾸 괄약극에 힘이 간다
32년 만에 무죄로 석방된 그가 오고 있다
‘吉大春立’이라 거꾸로 써 이마팍에 붙인다
-「입춘 무렵」전문
산모가 입덧이 나면 우선 음식을 제대로 먹을 수 없게 된다. 그러니 그 시기가 끝남과 동시에 식탐에 대한 강한 충동이 일어난다. 물오른 언어들은 화자 곧 시인이 먹고 싶은 음식들의 나열이다. ‘ㅍ’소리로 시작되는 이와 같은 파열음들은 그 자체로서 폭발력을 가지며, 정상치에서 크게 벗어난 돌발 상황을 연출한다. 비정상이 정상으로 회귀하는 데는 단계적인 숨고르기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일종의 충격 요법이 요청됨을 암시한다. 따라서 “괄약근에 힘이” 가므로 해서 행동 직전의 준비 과정을 거친다. “32년 만에 무죄로 석방된 그가 오고 있다”는 것은 그동안의 비정상이 얼마나 큰 폐단을 가져왔던가를 단적으로 증명해 보이고 있다. 그러므로 봄이 되어도 ‘立春大吉’이란 희망을 가져보지도 못하고 그걸 거꾸로 써 붙임으로써 오늘의 절망 상황을 암시하고자 한 것이다.
우레 같은 박수소리와 환호성을 먹고 자란
그녀가 때 이른 겨울바람 한 자락을 몰고 왔다
낙엽들이 거리를 뒹굴고
난폭한 언어들이 병상들을 가득 채운다
눈먼 과거들이 대오의 앞장을 서며
고래고래 고함을 질러대고
죽음의 언어들이 남북의 시공을 넘나들며 설전을 벌인다
피 흘리는 언어에 혀를 갖다 대는 철면피들
삼계화택으로 온 천지가 부글부글 끓어오르는데
쓰나미가 밀려오듯 바람의 혀끝은 인후를 넘어
아리쓰리 내장 구석구석을 파고든다
햇빛에 몸체를 드러낸 먼지들의 광란
바람 따라 일어나고 바람 따라 밀려간다
십 대째 온전하던 집 앞의 느티나무가 고도를 낮추던
구름 속의 벼락을 맞아 하루아침에 풍비박산이 되고
물 빠진 저수지마다 허연 배떼기를 드러낸 물고기들
까마귀 떼가 이 마을 저 마을 몰려다니며
무덤 속 잠든 영혼들을 들쑤시어 깨워댄다
대나무 세운 천상궁녀의 집을 드나드는 사람들마다
가슴 졸이며 시간이 몰고 올 바람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나라 밖엔 맹수들 울부짖는 소리 드높은데
반도는 지금 불면증으로 밤을 지새운다
- 「겨울바람」전문
여기서 그녀란 겨울바람을 몰고 온 장본인이며, 또한 그녀는 선거유세에서 천상의 여왕과 같이 가는 곳마다 지지자들로부터 박수와 환호를 받은 사람이다. 그런데 그녀가 강김하자 지상의 평화는 깨지고 가는 곳마다 음울한 분위기가 연출되는데, “십 대째 온전하던 집 앞의 느티나무가 고도를 낮추던/구름 속의 벼락에 맞아 하루아침에 풍비박산되고/물 빠진 저수지마다 허연 배떼기 드러낸 물고기들/까마귀 떼가 이 마을 저 마을 몰려다니며/무덤 속 잠든 영혼들을 깨워댄다”고 표현함으로써 비정상적 상황이 어느 수위에까지 와 있는가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천상궁녀의 집을 드나드는 사람들”이란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암담한 현실에서 마치 물에 빠진 사람이 지푸라기라도 잡듯이 점쟁이의 집을 들락거리는 일을 가리킨다. 그래서 “반도는 지금 불면증으로 밤을 지새운다”고 이 시를 끝맺고 있는 것이다. 그럼 다음 시를 살펴보자.
겹겹이 에워싼 어둠의 속을 열어 보았다
집성촌이다
불통이다
역류다
섬광은 묵은 달력에만 걸려 있다
폐가엔 모기 떼 같은 유령들의 울음소리
아우슈비츠 아우슈비츠
소녀의 까만 눈동자만 살아 뒷골목을 쏘다니다
밀려오는 어둠에 점령당하고 만다
섬뜩한 일본도가 순백의 배(腹)를 가른다
치성어린 모母의 정화수 위에 종철의 혼령이 내려와 앉는다
폭풍이 된 계엄군이 건물들의 유리창을 박살낸다
막장은 흑요석처럼 황홀하다
저 어둠의 광기를 깨뜨리고야 말겠다.
-「어둠의 해부」에서「」
어둠의 망‘령이 우리의 머리 위를 배회하고 있는 것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역사의 후퇴’라거나 ‘민주화의 역행’이란 말이 나라 곳곳에서 터져 나온다. ‘집성촌’. ‘불통’, ‘역류’ 등은 하나같이 소통이 폐쇄된 상황이며, 수평적 소통이 사라진 권위가 판치는 세상이다. 독선과 오만은 권위를 낳고 집성촌을 만든 패거리만이 난무하는 저질 세상으로 추락해 버린 참담한 상황을 가져오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화자는 눈을 부릅뜨고“ 어둠의 광기를 깨뜨리고야 말겠다”는 강한 의지를 내보이고 있다.
다음의 시 「짝사랑」은 부제가 ‘원칙과 신뢰’인데 이 원칙과 신뢰는 지난 대선 당시 여당 후보를 위한 새누리당에서 내건 홍보용 트레이드마크였다. 이 시는 현재 집권에 성공한 사람이 언행불일치로 어떻게 집권했으며, 현재 어떤 모습을 보이고 있는가 하는 점을 시화한 것이다.
원칙은 곡선보다 직선에 가깝다
때론 수사를 싫어하는 결벽증을 가진다
속도를 지향하나 궤도의 끝자락에
벼랑이 있는 줄 모른다
그는 항상 과거란 시간 속에
추를 내리고 살면서 자신이 만든
임계 속에서 요지부동이다
신뢰는 원칙의 주변을 맴돌지만
동상이몽만을 꿈꾼다
간혹 타인과의 눈맞춤에도
동공에 얼비치는 불안의 그림자를 읽곤
재빨리 눈길을 돌린다
과대 포장된 정치철학은
양파껍질 벗기는 일과
무엇 다르랴
세일즈 사물의 고갱일 뿐
애초부터 외양과는 무관한 것
웬 소란들이냐
원칙은 삶의 푯대처럼 저리도 의연하거늘
아전인수 격으로 뼈대 있는 가문에
함부로 흠집을 내는 작태를
하루 빨리 거둬 치워라
-「짝사랑」부분
원칙과 신뢰는 지도자로서는 반드시 갖춰야 할 덕목이다. 그런데 오늘날 한국사회에는 허명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너무도 많다. 종교인이 종교인답지 못하고, 법조인이 법조인답지 못하며, 학자가 학자답지 못하고, 의사가 의사답지 못하는가 하면 정치가가 정치가답지 못한 사람이 비일비재하다. 그러니까 지금 우리나라는 비정상이 넘쳐나는 나라인데, 현 대통령이 ‘비정상을 정상화“하겠다고 했으니 아마도 자신은 원칙과 신뢰’에서 한 발짝도 물러나 있지 않는 사람쯤으로 착각하고 있지나 않는가 하는 의구심이 든다.
국정을 원칙대로 끌고 가려면 대통령부터 솔선수범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법이 법대로 집행되지 않는 나라에서 원칙과 신뢰를 아무리 떠들어대 봐야 아무도 그걸 귀담아 들어줄 사람이 없다. 그런데도 자신을 원칙과 신뢰의 화신인 양 과대 포장해 다니면서 외국 방문 때 한복이나 자주 갈아입으면서 그것으로 모자라는 부분을 호도하려는 모습은 보기에 딱한 나머지 측은지심이 들기도 한다.
원칙은 타협을 싫어하므로 결벽성을 가진다. 신뢰는 원칙이 제대로 작동될 때 따라붙는 공감의 표현이다. 언행일치가 되지 않는 상황에서 ‘원칙과 신뢰’를 아무리 되뇌어 봐야 그건 공염불에 불과하며, 자기기만에 다름 아니다. “원칙은 사물의 고갱이”이고, “원칙은 삶의 푯대처럼 저리도 의연하거늘/아전인수 격으로 뼈대 있는 가문에/함부로 흠집 내는 작태를/하루 빨리 거둬 치워라”는 말은 ‘원칙’이란 말이 가진 순도를 지키기 위해서라도 자기 포장을 위해 함부로 가치 있는 말을 오염시키지 말라는 질타이다.
다음의 시는 2013년 7월호『현대시학』에 발표되었던 작품이다.
철학은 왜 이따금 시간의 어깨 위에 올라앉는가?
비탈진 삶을 끌고 가는 너의 몰골이
구름이 되었다가 일순 는개로 뒤덮인다
눈길 가는 공사장 밑은 천 길 낭떠러지
크레인읭 나락한 밧줄을 타고 가는
너의 의식은 생사의 갈림길에서
오소소 떨고 있다
밤의 아가리가 낮의 뒷덜미를 물고 늘어진다
절대는 생의 사다리를 타고 오르는
순간마다 불타오르는데
나무그늘에 누운 오후 한때의 느림보 삶이여
휴식은 달콤하나 빠진 앞니 사이로
파도처럼 밀려오는 발 빠른 시간들
장롱 속 개켜놓은 철학조차 펴볼 시간 없는
나날의 연속
별들 그늘조차 깡그리 마르고 만 일상 위에
한숨의 그림자만 질펀하게 널려 있다
-「잠자는 철학」전문
이 시는 앞의 시들과는 궤를 달리한다. 앞에 인용한 시들이 오늘의 시국과 관련된 시편들이라면, 위의 시는 동시대를 살아가는 서민들의 고달픈 삶을 노래한 것이다.
공사현장에서 삶과 죽음의 경계를 하루에도 수십 번 넘나들면서 절체절명의 삶을 이어가는 현장 노동자의 삶을 이 시는 그리고 있다. “장롱 속에 개켜놓은 철학조차 펴볼 시간 없는/나날의 연속”이란 표현 속에서 “왜 사느냐?” “어떻게 살아야 하느냐?” 하는 인간 실존에 대한 물음조차 허여되지 않는 현실속에서 마치 기계의 부품같이 움직이고 있는 도시인들의 팍팍한 삶을 시를 통해 보여주고자 한 것이다.
이번 시집에는 앞의 시들과 같이 오늘날의 현실을 직시한 결과 빚어진 작품들이 다수 있는가 하면 ‘나란 무엇인가?’라는 존재론적 물음에 대한 시들이 여러 편 있다. 그 가운데 한 편을 예로 들면 다음과 같다.
내 안에 몇 마리 짐승이 살고 있다
꽤 오래 되었다
마지못한 동행이면서 웬수처럼 함께 늙어간다
저 허허벌판에 누가 씨앗을 떨어뜨렸나
비가 오면 싹이 트고 자라
잎은 바람에 흔들리겠지만
생성 자체가 안고 있는 비애의 그늘이
때로 불면의 밤을 몰고 오는 것이다
아무데서나 가래침 뱉고 고성 지르다가도
식탐의 충혈된 눈동자를 뒤룩거리는
저놈과의 동행
애시 당초 삶 속 우울의 먹구름을 드리웠다
오후의 나무그늘에 앉아 내 안의 짐승들
다독거린다
금세 코를 골며 깊은 잠에 빠져드는 놈들
멀리 건너다보는 거리엔 인파의 물결
사람들마다 제 안의 짐승들 감춘 채
오가고 있다
지금
짐승도 사람도 아닌 허깨비 하나가
허허로운 들판 한가운데서
홀로 섬이 되어 가고 있다
-「내 안에 든 짐승」전문
인간을 가리켜 만물의 영장이라고 하나 인간 역시 동물임엔 틀림없다. 동물이면서 인간이고 인간이면서 동물인 존재가 가지는 이율배반적인 이 말 속에 인간의 고뇌가 원초적으로 도사리고 있는 것이다. 사리판단을 할 줄 아는 인간이 일반 동물이 갖지 못하는 정신세계인 이성을 가졌으니 분명 동물과는 차별화되는데, 이따금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동물과 유사 형태의 행동이 불거질 때 스스로 깜짝 놀라게 된다.
이 시는 인간의 허울을 쓰고 그 내면에 동물의 본성을 키우고 있는 인간의 자기모순에다 초점을 맞춰 시로 형상화한 작품이다. “멀리 건너다보는 거리엔 인파의 물결/사람마다 제 안의 짐승들 감춘 채/오가고 있다”에서는 거리에 넘쳐나는 인파는 모두 사람의 형상인데 그 속에 자기 짐승을 감추고 있다는 것이고, 다음 연의 “지금/짐승도 사람도 아닌 허깨비 하나가/허허로운 들판 한가운데서/홀로 섬이 되어 가고 있다”에서 보면 화자가 자신을 돌아보면서 사람이면서 짐승이고 짐승이면서 사람인 모순적 존재인 자신에 대한 회의로 깊은 고뇌 속에 빠지고 있는 일종의 자화상을 그리고 있는 것이다.
끝으로 이번 시집의 표제작인 「달춤」을 살펴보고자 한다.
둥근 여자 안에 한 여자가 있다
손가락이 길다 은빛이다
비손 같은 두 손의 모음
찰나에 벌어지는 곡선들의 무한한 충돌
너머 무늬 짓는 파문들
너무나 원숙한 태동胎動
날카로운 손끝이 후벼 파는
영혼의 골수
둥근 여자는 이따금 신음할 뿐
말이 없다
누 억만 년 그녀 품은 마음이
춤으로 되살아난다
갈망일까 염원일까
꽃과 잎은 제 갈 길 갈 뿐
밤과 낮은 영원하다
저 웅승깊은 심해에
조각배 한 척 가고 있다
무희의 손가락 점점 길어진다
아득한 태아적 꿈속을 유영하던 나
여인의 춤사위에 겹쳐진다
-「달춤」전문
중국 운남성 곤명은 중국의 오래된 관광 명소이다. 석림과 토림, 구향동굴은 자연경관으로서의 관광 포인트가 되고 있다. 그런데 요즘은 야심찬 중국의 관광 상품 개발로 곤명시의 한 극장에서 매일같이 공연되고 있는 중국 14개 소수민족과 한 사람의 안무가로 엮어지는 ‘운남영상 가무쇼’는 관광객의 문화적 욕구를 충족시키기에 부족함이 없는 수준 높은 작품으로 평가할 만하다.
무대에 많게는 백여 명의 가수가 함께 등장하는 대형 쇼인데, 천체의 해와 달과 대칭되는 남자와 여자를 주인공으로 내세워 토속신앙에서 출발하여 인간세계의 생명과 번영을 주제로 엮은 가무쇼이다. 무대의 배경으로 되어 있는 커다란 달 그림 속에 검은 그림자로써 안무가의 춤의 다양한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이 쇼의 특징이다. 특히 소수민족 가수들의 변화 있는 춤과 노래는 박진감을 더해줌과 동시에 끝없이 향토적 서정을 불러일으키기에 부족함이 없다. 위의 시는 이 가무쇼에서 힌트를 얻어 지어진 작품이다.
이 시의 첫머리에 나오는 ‘둥근 여자’는 달을 가리키고, ‘한 여자’는 안무가를 가리킨다. 그 다음으로 이어지는 시상 전개는 이 안무가의 춤사위를 시적으로 형상화시킨 것이다. 물론 거기에는 지은이의 상상력이 함께 녹아들었다고 보면 된다. 시의 마지막에 “아득한 태아적 꿈속을 유영하던 나/여인의 춤사위에 겹쳐진다”고 한 것은 화자가 태어나기 전 자궁의 양수 속에서 자유롭게 유영하던 무의식 세계가 안무가의 춤사위에 오버랩 되고 있음을 표현한 것이다.
타인의 작품 해설이 작품 자체만 보고 진행되는 것이라면, 자작시 해설은 소재의 취재는 물론 시적 발상이 무엇으로부터 연유한 것인가 하는 전기적인 측면도 아울러 밝혀줌으로써 독자들의 시의 이해에 한 걸음 더 다가설 수 있다고 보는 것이 나의 지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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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표사의 글 ◆
오늘날 한국의 평단이 문학의 발전을 위해 제대로 작동하고 있는가 하고 물으면 식견 있는 사람치고 그렇다고 대답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만큼 문학비평계는 상업주의와 결탁하여 제 기능을 상실한 지 오래다. 주례비평․ 골목비평이 넘쳐나고 있으며, 문학평론이 권력화되어 제 사람 챙기기 바쁘고, 얼빠진 시인들은 거기에 빌붙어 자기 얼굴 내기에 여념이 없다.
원래 작품 해설서는 제대로 된 평론집과는 거리가 먼 것인데 작품 해설 모음을 묶어 평론집인 양 오도하는 잘못된 풍토는 하루 빨리 사라져야 할 것이다. 평론가도 평론가려니놔 시인 역시도 마찬가지다. 무엇 때문에 평론가에게 목을 매다는가? 시인으로서의 자존은 다 어디 갔는가? 이와 같은 얼빠진 정신 상태에서 제대로 된 시가 나오기는 어려운 일이다. 시인의 자존을 망각하고 타 장르에 기대어 자신의 위상을 지키겠다는 저질 풍토는 그저 개탄스러울 뿐이다. 시의 정신이야말로 인간정신의 정화이다. 이러한 고양된 정신만이 시가 시로서 존재해야 할 이유이며, 여타 장르와는 생래적으로 다른 시만이 지닌 참모습이 아니겠는가.
- 이해웅,「먼 불빛, 적막 윙에 눈은 내려 쌓이고」부분
이해웅 시인의『달춤』은 그의 스무 번째 시집이며, [내 안에 든 짐승]의 연작시에서처럼 자기 자신의 실존적 고뇌와 자기비판을 감행함으로써 그 윤리적 토대를 마련하고, 이 윤리적 토대를 마련함으로써 현대문명사회와 우리 인간들의 세태를 풍자(비판)하게 된다. 시인은 악마의 탈을 쓴 천사이기도 하고, 천사의 탈을 쓴 악마이기도 하다. 이처럼 인면수심人面獸心의 탈을 쓴 자기 자신을 비판함으로써, ‘집성촌, 불통, 역류’ 등의 ‘저 어둠의 광기’(「어둠의 해부)」와 애시당초 ‘원칙과 신뢰’와는 정반대방향에서 자기 기만과 사법 질서를 짓밟아버리는 이 땅의 ‘선거의 여왕(「짝사랑」)’을 가장 날카롭고 예리하게 비판을 하게 된다. 이해웅 시인의 풍자의 정신은 ‘비판을 위한 비판’이나 ‘부정을 위한 부정’이 아니라, 그의 표제시인 [달춤]에서처럼 아름답고 행복한 공동체 사회를 건설하기 위한 방법론적 풍자의 정신이라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명예퇴직을 하거나 밥벌이가 끝나면 신속하게 늙어가지만, 그러나 진정한 시인은 시를 쓰면서 자기 자신의 마비된 의식과 이 사회를 일깨우고, 더욱더 젊고 푸르른 삶을 살아가게 된다. 비판의 힘은 젊음의 특효약이며, 이해웅 시인은 영원한 청년인 것이다.
- 반경환『애지』주간, 철학예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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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웅 시인∥
∙ 이해웅 시인은 부산 기장군에서 태어났고, 1973년 시집『壁』으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시집으로는『壁』『반란하는 바다』『구름같이 바람같이』『씨족마을』『먹고 사는 일』『겨레의 恨』『눈짓으로 오는 소리』『잠들 수 없는 언어』『습관성 연구』『생각들의 행진』『老子 일기』『길의 식성』『곡선의 저녁』『숲의 그림자엔 쇳소리가 난다』『맛, 열반涅槃』『반성 없는 시』『허공 속의 포즈들』『파도 속에 묻힌 고향』『사하라는 피지 않는다』『달춤』등이 있고, 시선집으로『산천어가 여는 아침』 시전집으로『시간의 발자국들(Ⅰ, Ⅱ권)』이 있다. 이 밖에도 다수의 에세이집과 여행기 및 연구서 등이 있으며, 한국시기획위원이며 한국작가회의 회원, 부산작가회의 고문, 부산시울림시낭송회장이며, 부산시인협회장을 역임했다. 부산시문화상을 수상했으며, 현재 부산교육대학교 명예교수로 있다.
∙ 이해웅 시인의『달춤』은 그의 스무 번째 시집이며, [내 안에 든 짐승]의 연작시에서처럼 자기 자신의 실존적 고뇌와 자기비판을 감행함으로써 그 윤리적 토대를 마련하고, 이 윤리적 토대를 마련함으로써 현대문명사회와 우리 인간들의 세태를 풍자(비판)하게 된다. 이해웅 시인의 풍자의 정신은 ‘비판을 위한 비판’이나 ‘부정을 위한 부정’이 아니라, 그의 표제시인 [달춤]에서처럼 아름답고 행복한 공동체 사회를 건설하기 위한 방법적인 풍자의 정신이라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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