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바랜 고추 내놓은 사진
노병철
아들 선호사상은 농경사회에서 기인 된 것이다. 일꾼 하나가 더 있는 것이 얼마나 큰 재산이란 걸 알기에 남자아이 탄생은 곧 재산 증식을 의미했다. 그래서 여자들은 아들 낳기 위해 무슨 짓이든 해야 했다. 여자의 삶의 의미를 종족 보존과 가문의 번성에 두었던 전형적인 농경사회의 산물이 ‘아들 생산’이었다. 그래서 여자들에게 ‘오징어 게임’에서 보듯 불공정 경쟁을 지극히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세뇌 교육이 시작되었다. 여자들 스스로 인정하게끔 만들어버린 것이다. 삼종지도라고 해서 여자는 어려서는 아버지를 따르고, 시집을 가면 남편을 따르며, 남편이 죽으면 자식을 따르라고 가르쳤다.
여기에 혹여 반기를 드는 여자가 있을까 싶어 칠거지악이란 것을 만든다. 아들의 부모 즉, 시부모에게 순종하지 않거나 자식을 낳지 못하면 쫓겨났다. 딸만 낳아 남편이 씨받이 여자를 들여도 아무 소리 못 하게 질투하는 것도 나쁜 짓이라고 못 박았고, 친정으로 재산 빼돌릴까 봐서 도둑질하다가도 걸리면 쫓겨 나가야만 했다. 참으로 지독한 남자들만의 ‘오징어 게임’이 아닐 수 없다. 대충 아들이 막내인 집은 위로 누나가 네다섯 정도 있는 집이 많았다. 아들을 낳기 위해 필사적인 노력한 덕분이리라. 그래서 아들을 낳으면 고추를 내놓고 백일사진을 찍었다. 고추를 자랑하고 싶은 마음이 사진에 그대로 나타난 것이다.
엄마는 당시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딸을 낳지 않았다. 아들만 셋이 줄줄이 낳았다. 딸만 일곱인 공주집 아줌마는 엄마를 부러워했다. 걸음걸이도 달랐다. 엄마는 하늘을 쳐다보고 걷고 아줌마는 땅만 보고 걸었다. 동네뿐 아니라 이웃 마을에서조차 혼사가 있으면, 엄마는 비싼 값에 초대받았다. 당시 신혼 첫날 덮고 자는 이불 홑청은 아들 낳은 여자만이 만들 수 있었다. 공주집 아줌마는 셋째딸부터 끝순이라고 지어 아들을 기원했으나 그 뒤로 말순이 말자, 끝님 등 이름만 이상하게 지어졌다. 그 집 딸들은 백일사진이 없다.
여자의 적은 여자라고 아들이 없는 집안에선 조상 볼 면목이 없다면서 시어머니는 아들에게 씨받이 여자를 붙여 준다. 그래서 아들을 낳으면 집안 재산 모조리 아들에게 다 간다. 명목은 제사를 지내는 사람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딸은 실컷 키워봤자 남의 집 제사음식이나 하는 존재이니깐 재산 분배 같은 것은 생각지도 않았다. 공부도 시키지 않았다. 남자는 공부하러 도회지로 나갔고 여자는 오빠나 남동생 학비 대주러 도회지 공장에 나갔다. 내 친구 하나는 부산에서 버스 차장을 하며 동생 학비를 보탰다. 여자가 술 따르는 술집에 가서 왜 여기 나와 이러느냐고 물어보면 거의 다 시골 부모님 부양이나 오빠나 남동생 학비 벌기 위해 자기 한 몸 가족을 위해 희생한다는 말을 서슴지 않고 한다.
집안에 대를 잇는 것은 남자들이었고 제사를 주관하는 것도 남자들이고 현모양처라는 이상한 교육 받은 여자들은 시집가서 남편 부양하고 아들 낳아 집안 대를 잇게 만들어 주는 것이 가장 큰 일이었다. 이러다 보니 남편에게 전적으로 의존하는 삶을 살게 되다 보니 남편에게 새 여자가 생겨 쫓겨나면 당장 먹고 살길이 막막해 울고 불며 바짓가랑이를 잡고 늘어질 수밖에 없었다. 농사지어 먹을 것을 제공했던 남자의 위세는 경제적 우위에 놓인 우리 세대까지도 이어져 남아선호사상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세계적으로 남아 선호 사상이 이처럼 빠르게 사라진 국가는 없다.
한국에서만 보이는 독특한 현상”
그런데 오늘 언론 보도를 보니 이런 문구가 눈에 띈다. 일단 제사가 굉장히 빨리 없어지고 있다는 점이 유난히 눈에 들어온다. 기독교의 빠른 선교와 코로나로 인한 가족 모임의 해체, 그리고 제사음식에 대한 여자들의 극한 불만이 이런 결과를 만들어 내었으리라. 여자의 빠른 사회진출이 경제적으로 자유롭게 만들었고 더는 남자의 월급에 기대어 사는 시대가 지나간 것도 한 원인이라 할 수 있겠다. 아들보다 딸의 역할이 더 크다는 것은 여기저기서 보여 딸 가진 집안을 부러워는 했지만, 이 정도로 확 바뀔 줄은 미처 몰랐던 것이다. 아들은 며느리 남편일 뿐이고 며느리 집 머슴 역할에 충실하다는 푸념은 실제 주위에서 많이 보인다. 세상이 변해도 너무 변했다.
장손인 내가 딸만 둘이고 내 동생들도 줄줄이 딸만 낳아 엄마는 기가 막힌 듯했다. 대가 끊어졌다면서 한탄을 했지만 요즘 대학물 먹은 며느리한텐 씨도 안 먹혔다. 내심 씨받이라도 들일 기세를 원했건만 그뿐이었다. 매우 아쉬웠다. 드라마에 자기 엄마 핑계 대면서 씨받이 여자와 합방하는 놈들을 보면서 얼마나 부러웠는데. 세월은 빠르게 변했다. 이제 엄마는 공주집 아줌마를 늘 부러워한다. 씀씀이가 우리 엄마와는 너무 달랐다. 까만 봉지 들고 다니는 울 엄마와 백화점 명품백 들고 다니는 아줌마는 격이 다른 것이다. 딸들과 해외여행은 거의 동네 마실 나가듯 했다. 아들만 셋 둔 울 엄마는 제주도도 못 가는 신세가 되어버렸다. 딸 하나 낳지 않은 것을 엄청나게 후회하신다. 우리 집 사위가 되겠다고 인사 온 놈이 나에게 충성을 맹세한다. 딸만 둘인 난 표정 관리를 어떻게 해야 할지 당황스럽다. 힐껏 옆에 엄마를 쳐다보았다. 백일 때 고추 내놓고 찍은 사진은 이미 빛이 바랬다.
첫댓글 아하. 그런세월도
있었지요.
빠르게 변한것도
맞고요.
나이들면 아내에게
충성을 다해야 집안이
편안한것도 맞고요.
그러다 1처다부제가
되면 남자가 좀 편할라나? 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