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콩영화가 한국에서 인기를 끌 당시에는 인터넷이 제대로 보급되지 않았었습니다. 아예 인터넷이란 존재를 모르던 시절도 있었구요. 영화라면 으레 극장 아니면 비디오테이프를 통해서 보는 것이었던 시절이었으며 단성사, 국도극장 등의 극장 이름이 새겨져 있던 개봉 영화 포스터와 몇 안되는 영화잡지, 비디오대여점에 비치된 소책자 등을 통해서 영화에 대한 정보를 얻던 시절이기도 했습니다. TV 속 영화 안내 프로그램이라든지 두꺼운 뿔테 안경을 쓰고는 오늘밤 이 영화 놓치지 말라고 설명해주던 영화 평론가, 그리고 이어서 진행되는 토요명화, 주말의 명화는 영화팬들에게 상당한 위치를 차지했었죠. 지금 같으면 영화에 대한 정보를 실시간 인터넷으로 얻을 수 있지만 당시는 소수의 인물들에 의해서 영화에 대한 정보가 알음알음 알려지던 시절이었습니다.
그러다보니 어딘가에서 살짝 어긋나게 되면 잘못된 지식이 진짜인양 대중에게 전해지기도 했어요. 지금이야 상상을 하기 어렵지만, 적룡(狄龍)을 추룡으로 알고 있던 시절이 잠시 있었답니다. 오쳔련을 오청련으로 알았던 시절도 있었구요. 여기 또 하나의 잘못된 지식 때문에 영화팬들을 헷갈리게 하는 홍콩영화 속 이름이 있습니다. 영화 백발마녀전에서 임청하가 맡은 역할 이름을 연하상으로 많이들 알고 있는데 사실 엄밀하게 따지고 보면 이 이름은 연하상이 아니랍니다. 무지개 예(霓), 치마 상(裳), 이렇게 해서 연예상(練霓裳)이죠. 임청하의 하(霞)랑 연예상의 예(霓) 한자가 비슷하게 생겼다보니 처음 한국에 들어올 때 영화를 번역하고 소개한 사람에 의해 연하상으로 잘못 알려진 것이 비디오테이프 시대를 지나면서 오랫동안 우리에게 익숙해진 탓에 오류가 고쳐지지 않았고 그런 연유로 지금까지도 연하상, 연예상 이렇게 두 이름이 혼재되어 쓰고 있는 셈입니다.
연하상이나 연예상이나 그게 그거 아닌가 뭘 그리 따지고 드냐 싶기도 하지만 연예상이란 이름에는 문학적으로 제법 큰 의미가 있습니다. 예상(霓裳)이란 무지갯빛 치마라는 뜻으로 '선녀의 아름다운 옷'을 비유적으로 일컫는 말입니다. 당나라 현종이 꿈에서 무지개처럼 아름다운 옷을 입고 춤을 추고 있는 선녀를 보았다고 해요. 그 꿈에서 깨어난 현종 앞에 현종의 꿈 얘기를 들은 양귀비가 꿈 속의 선녀처럼 꾸며입고 현종 앞에서 아름답게 춤을 췄다고 합니다. 이 춤이 예상우의무(霓裳羽衣舞)이며 이후 유명한 시인 백거이가 자신의 시 속에서 그 장면과 안록산의 반란을 대비시켜 시적(詩的)으로 표현합니다.
어양비고동지래(漁陽鼙鼓動地來)
어양(당나라를 뒤흔든 절도사 안록산의 근거지), 북을 울리고 땅을 흔들며 다가오니
경파예상우의곡(驚破霓裳羽衣曲)
산산히 깨어졌구나. 무지갯빛 치마와 깃털 옷의 노래여!
신필(神筆)로 불리는 김용과 더불어 여러 걸작 무협소설을 만들어낸 양우생의 원작을 영화로 만들어 스크린에 옮겨낸 이 작품은, 명나라에서 청나라로 교체되는 시기를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백거이의 시(詩)가 당나라 안록산의 난을 배경으로 다루면서 당나라 현종과 양귀비의 아름다운 시절을 대비시키고 있다면 이 영화는 명나라 말의 혼란기를 배경으로 탁일항(장국영)과 연예상(임청하)의 사랑을 극적으로 대비시키고 있습니다. 영화를 자세히 보신 분들이라면 기억하실 수도 있을 거에요. 어린 탁일항과 이야기를 나누는 듬직한 장군이 영화 속에 나왔습니다. 탁일항이 성장하고 이야기가 진행되어 나가면서 그때 그 충직했던 장군이 변절했음을 언급합니다. 그 장군이 바로 명청 교체기에 파란만장한 배신의 삶을 살았던 오삼계에요. 안록산의 배신과 오삼계의 변절이 대구를 이루는 가운데 탁일항, 연예상의 지고지순한 사랑이 대비를 이루는 것이지요.
영화의 시작은 천설봉에서 전설의 꽃이 피길 기다리는 탁일항(장국영)의 모습으로 시작됩니다. 눈보라 속에서 꽃이 피길 기다리는 탁일항 앞에 청나라 황제가 보낸 군사들이 나타납니다. 황제의 병환을 낫게 하기 위해 전설의 꽃을 찾아 이곳에 온 군사들은 꽃을 자신들에게 달라고 탁일항에게 얘기하지만 탁일항은 일언지하에 거절합니다. 군사들과 탁일항은 검과 창을 맞붙습니다. 황제보다 중요한 인물이 세상 어디에 있느냐는 질문에 탁일항은, 나에게 중요한 인물은 한 여인이다라고 대꾸합니다. 그 여인이 이제부터 나올 연예상(임청하)이며 영화는 명나라 말기로 돌아갑니다.
무림 명문 문파 무당파의 어린 제자 탁일항은 당돌한 소년입니다. 호기심도 많은 이 소년은 혼자 밖에 나갔다가 늑대떼를 만나게 되었지요. 그때 꼬마 탁일항을 늑대로부터 구해준 이가 바로 연예상입니다. 사실 이때만 해도 연예상이란 이름이 붙지 않은 상태였습니다. 늑대와 함께 자라났다고 해서 낭녀(狼女)라고 불렸다나요. 늑대소녀에 의해 목숨을 건진 탁일항은 직후에 한 장군을 만나게 됩니다. 충직한 언행으로 꼬마 탁일항의 마음을 사로잡은 이 장군이 바로 중국사에서 배신의 아이콘으로 통하게 되는 오삼계입니다. 이때만 해도 오삼계가 역사에 남을 배신자가 될지 몰랐지요.
무당파 수제자로서 검술을 연마하며 꼬마 탁일항은 어느새 청년이 됩니다. 꽃잎이 휘날리는 가운데 꼬마가 검을 휘두르고 그 실루엣이 어느새 청년 탁일항(장국영)으로 변하는 이 장면이 참 인상적이었지요. 나이든 사부는 정통 후계자인 탁일항에게 무당파를 맡기려고 하지만 탁일항은 조직을 이끌어가야 되는 권력의 향방에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사부 밑에는 무당파의 당주 자리를 노리는 야심가 백운과 그 딸이 탁일항이 맡을 후계자 자리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습니다. 문파 내의 이런 정치적인 갈등은 탁일항을 더욱 더 밖으로 나돌아다니게 만듭니다. 그러던 어느날 탁일항은 무공이 탁월한 아름다운 여인(임청하)을 만나게 되고 정체모를 그녀를 쫒아 인적이 드문 계곡까지 따라가게 됩니다.
백발마녀전이 홍콩에 개봉했을 당시, 세계적으로 큰 인기를 누렸던,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블록버스터 쥬라기 공원으로부터 백발마녀전이 홍콩 박스오피스 1위를 지켜냈었다는 얘기가 있습니다. 이 영화가 그토록 큰 인기를 누렸던 것에는 많은 이유를 찾을 수 있겠지만 그중 가장 큰 이유는 바로 계곡에서 보여준, 장국영과 임청하, 탁일항과 연예상의 로맨틱한 러브씬이 아닌가 싶습니다. 로맨틱과 에로틱 사이를 환상적으로 오간 두 사람의 러브씬은 더없이 환상적이었었지요. 사랑에 빠진 탁일항은 이름없이 낭녀(狼女)로만 불리던 여인(임청하)에게 연예상이란 이름을 붙여줍니다.
김춘수 시인의 명시(名詩) 꽃에는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는 시구가 있습니다. 탁일항이 그녀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녀는 다만 하나의 낭녀(狼女)에 지나지 않았다고나 할까요. 인간이 아닌 늑대와 함께 했던 그 여인에게 인간으로서의 이름, 그것도 당현종과 양귀비의 고사에서 비롯된, 천상에서 노니는 선녀의 옷이란 뜻을 지닌 무지갯빛 치마 예상(霓裳)이란 이름을 붙여줍니다. 탁일항이 그녀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녀는 탁일항에게로 와서 아름다운 예상이 되었습니다.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의미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운명은 두 남녀의 사랑이 영원히 이어지도록 내버려두지 않습니다. 정파의 후계자였던 탁일항과 사파의 살인도구였던 낭녀(狼女) 연예상 사이에는 잔인하고도 서글픈 운명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강호 정파를 노리고 있던 사파 마교(魔敎)의 교주는 오늘날로 얘기하면 샴쌍둥이 같은 육신을 가지고 있는 존재였습니다. 한쪽은 남자, 다른 한쪽은 여자의 몸이 붙어있는 몸이었지요. 그중 한쪽인 남자의 몸 길무상(오진우)은 어릴 때부터 키워온 낭녀(임청하)를 짝사랑하고 있었습니다. 자신의 사랑을 받아주지 않는 낭녀(임청하)가 야속했던 길무상은 낭녀(임청하)의 모습으로 변하여 무당파의 본산을 습격합니다. 그리고는 탁일항의 사부이자 무당파의 당주인 자양진인을 살해합니다. 무당파 제자들은 살육을 저지르는 이의 겉모습만 보고는 낭녀(임청하)가 그러했다고 믿습니다.
비극은, 연예상에 대한 믿음을 저버린 탁일항에 의해 일어납니다. 길무상의 질투로 인해 이뤄진 모질고 끔찍한 형벌을 참아내고 사랑하는 탁일항을 찾아온 연예상이지만, 탁일항은 그런 그녀를 믿지 못합니다. 탁일항의 불신(不信)은 아름답던 연예상의 검은 머리카락을 하얗게 만들어버리죠. 이 영화의 주제가 제목이기도 한 홍안백발(紅顔白髮)은 이 상황에서 연예상에게 일어난, 여전히 아름다운 얼굴과 갑자기 희게 변해버린 머리카락을 잘 설명해주는 단어이기도 합니다.
뒤늦게 나타난 마교교주 길무상에 의해 무당파 본산에서 이뤄진 살육이 연예상이 아닌 길무상에 의해 저질러졌음을 알게 되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입니다. 길무상, 그리고 그의 등 뒤에 붙어있는 길무상의 파트너는 엄청난 무공으로 무당파의 고수들을 위기에 몰아넣습니다. 머리가 하얗게 변해버린 연예상의 도움까지 더해져서 간신히 길무상 일행을 물리치지만 탁일항을 바라보는 연예상의 눈은 싸늘합니다. 예전의 그 사랑스러운 여인의 모습은 찾을 수가 없습니다. 백발의 마녀로 변해버린 옛 연인의 머리카락을 되돌리기 위해 그리고 그녀로부터 용서를 얻기 위해, 그리고 그 사랑을 되돌리기 위해 탁일항은 천설봉으로 향합니다. 그리고 기적을 일으킬 수 있는 꽃이 피길 눈보라 속에서 오매불망 기다립니다.
명의 시대가 끝나고 청나라가 천하를 차지하고 그 청나라의 황제가 위독해지기까지 오랜 시간이 흘렀지만 탁일항은 천설봉의 꽃이 피길 기다렸습니다. 그리고 영화의 앞부분에 등장했던 청나라 군사들과 맞붙게 되는 것이죠. 임청하가 백발마녀 연예상 역을 맡고 장국영이 연예상을 사랑하게 된 탁일항 역을 맡아 무협 영화로서 그리고 멜로 영화로서 도달할 수 있는 최고의 경지의 연기를 보여줍니다. 영화 촬영 당시 중년의 나이에 접어든 임청하였고 알고보니 성적 취향이 일반 남자들과 달랐다고 하는 장국영이었지만 이 영화 속의 임청하는 첫사랑에 빠져든 아름다운 여인 그 자체였고 장국영은 여인과의 사랑을 잊지 못하는 남자 그 자체입니다.
폭포와 호수, 계곡을 오가며 벌이는 그들의 사랑은 얼마나 아름다웠으며, 호된 매질을 견디며 연인 탁일항을 찾아가는 연예상은 얼마나 비장했으며, 죽음을 각오하며 찾아온 연인 탁일항마저 자신을 믿지 않는 가운데 슬픔과 분노로 머리가 하얗게 변해버리는 장면은 얼마나 섬찟하였는지 모릅니다. 홍콩 무협영화의 전통을 충실히 이어나가면서도 이토록 아름답고도 서글픈 무협영화는 우리 생애 다시 볼 수 없을 지도 모릅니다. 배우로서의 길을 충실히 걷던 장국영은 더이상 세상에서 볼 수 없으며 중년을 지나 노년으로 향하고 있는 임청하에게선 예전의 날렵하던 모습을 찾아보기 힘들어졌으니까요.
참고로, 낭녀(임청하)를 짝사랑하다가 그 애정이 증오로 바꿔버린 길무상(오진우)은 탁일항을 비롯한 무당파 고수들과 연예상(임청하)까지 상대로 격전을 치르던 끝에 등과 등이 붙어져 있던 살이 날카로운 검에 베어져 죽음을 맞이하게 됩니다. 한 육체로 붙어 있다가 마지막 순간 두 사람으로 나눠진 길무상과 그 파트너는 그제서야 편안히 등을 대고 누울 수 있게 됩니다. 한국팬들에겐 무간도 2편으로 인해 뒤늦게 재조명을 받은 홍콩의 중견배우 오진우는 이 영화에서 애정에서 집착으로 변해가는, 그로테스크한 모습의 마교교주 길무상 역할을 충실히 잘 소화해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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