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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6.30(주일) 요한복음 6:30~40 ‘내 아버지의 뜻‘
요한복음 6장 30-40절을 통해 ‘내 아버지의 뜻’이라는 제목으로 함께 은혜를 나누기를 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병이어의 기적을 통해 5천 명의 무리를 기적의 양식으로 먹이시고 그들의 마음을 사로잡으셨습니다. 이에 유대인들은 예수님께 하늘로부터 내린 만나와 같은 표적을 보여달라고 하며 예수께로 모여듭니다. 이 과정에서 예수님은 그들에게 영생의 길을 제시하시고, 아버지 하나님의 따뜻한 사랑과 깊은 뜻을 선포하십니다. 이 땅을 살아가는 우리가 깨닫고 순종해야 할 ‘아버지의 뜻’은 무엇일까요? 함께 살펴보고 은혜나누기를 원합니다.
1. 또 다른 표적을 구하는 무리(30-34절)
예수를 찾아온 무리는 예수께서 예수님을 믿을 수 있도록 조상들이 광야에서 먹었던 하늘로부터 내린 만나와 같은 표적을 보여달라고 합니다(30,31절).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먹을 것이 없다고 불평했을 때, 하나님께서 40년 동안 독특한 양식 ‘만나’로 이들을 먹이셨습니다.
예수님 주변에 있던 사람들은 ‘만나’에 대해 알고 있었습니다. ‘지상에 독특한 음식이 있었는데 모세가 준 만나’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들의 말을 듣고 “만나는 모세가 아닌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라고 정정해 주셨습니다.
만나에는 다음과 같은 특징이 있습니다. 첫째, 하나님께서 일용할 양식으로 주셨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먹는 음식은 일하고 노력해 얻은 결과이지만 만나는 하나님께서 은혜로 거저 주신 음식입니다. 둘째, 매일 만나를 주셨습니다. 귀찮아도 매일 음식을 먹어야 하듯이 ‘만나’도 매일 주셨습니다. 셋째, 우리가 일용하는 양식과 성격이 똑같다는 것입니다. 만나를 먹는다고 영생하지 않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40년 동안 만나를 먹고도 모두 죽고 말았습니다. 만나는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신 것이지만, 그것을 먹어도 사람들은 영생하지 못하고 죽게 됩니다. 만나는 영원한 생명의 떡을 예표하는 양식입니다. 구약 시대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주신 만나를 먹으면서, 영원히 썩지 않는 양식을 주실 메시아를 바라보았습니다.
그러나 오늘 유대인들이 예수님께 와서 믿도록 행하시는 표적을 원하는 것은 오병이어의 기적을 통해 떡을 먹고 배불렀기 때문입니다(26절). 그들은 예수님 자체보다 또 다른 세상 표적을 구합니다. 우리는 표적을 구하는 것을 믿음으로 착각합니다. 예수님이 아닌 세상에 눈에 보이는 표적을 구하는 것은 헛된 믿음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는 우리 가운데도 주께서 보여주신 표적이 많을수록 믿음이 좋다고 여기는 풍조가 있습니다. 이것은 내 안에 기복과 세상 가치관이 있기 때문입니다.
한국교회의 위기는 ‘기복주의 신앙과 이기적인 신앙’입니다. 기복이란 복받기를 위하여 빈다는 말입니다. 성경에는 시편 1편을 비롯하여 ‘복’이라는 단어가 수없이 등장합니다. 인간이 하나님께 복을 비는 것은 별다른 문제가 없습니다. 그러나 ‘기복주의 신앙’이란 복을 물질적인 복으로 전락시키고, 그 물질이 ‘신앙의 기준’이 된다는 것입니다. 더 많아지고, 더 높아지고, 더 건강해지면 믿음이 좋은 것이고, 그렇지 못한 사람은 믿음이 없는 것이 되는 것이지요. 기복주의 신앙은 목적이신 하나님도 복을 받기 위한 수단으로 전락되어, 돈이 신이 된 맘모니즘이 교회에 팽배하게 되었습니다. ‘세상의 가치관’과 ‘교회의 가치관’이 동일시 된 신앙이 바로 ‘기복주의 신앙’입니다. 또한 ‘이기적인 신앙’이란 자신이 속한 공동체는 어떻게 되는 관계없이 자기만 구원받고 잘 살면 된다는 신앙입니다. 천국 문에 이런 말이 써있다고 합니다. “단체입장 환영, 개인입장 불가” 교회가 사회적 책임을 방관하다보니, 사회가 교회를 향하여 손가락질 하게 되었습니다. 이제 교회도 ‘이기주의적 신앙’의 결과로 자기들끼리만 잘 먹고 잘 살자고 하는 ‘이기적 집단’으로 전락되고 있습니다. 물론 그렇지 않은 교회와 성도들이 많이 있지만, 사회의 판단이 그렇습니다. 지하철에서 사람들이 싸우면, 옆에 있는 사람이 이렇게 말한다고 합니다. “왜 여기서 싸워요. 여기가 교회인 줄 아세요?” 바라기는 우리 때문에, 우리교회 때문에 세상이 조금 더 깨끗해져서, 우리 때문에 살 맛나는 세상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런 ‘기복주의와 이기주의 신앙’을 가지면, 말씀을 보아도 그 말씀을 올바르게 해석하지 못하게 되고, 같은 사건과 말씀 앞에서 엉뚱한 적용을 하여 오늘 본문의 유대인들과 같이 엉뚱한 표적을 찾게 됩니다. 따라서 성도는 질병의 치료나 꿈을 이루는 표적보다 주어진 환경에서 말씀이신 예수님을 만나야 합니다. 예수님을 찾아온 무리는 예수께 표적을 요구하며, 만나를 먹었던 이스라엘 백성처럼 하늘에서 내려오는 떡을 구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들의 물질적인 욕구를 채워주는 것이 아니라, 진정한 떡을 알려주시를 원하십니다.
적용) 현재 나는 어떤 기복적인 표적을 구하고 있습니다. 내가 말씀을 통해 구할 것은 오직 예수 뿐임을 믿습니까?
2. 하늘로부터 주신 참떡을 말씀하시는 예수님(35-37절)
예수님은 표적을 구하는 유대인들에게 모세가 준 떡은 ‘참 떡’이 아니고(32절) 자신이 하늘에서 내려온 ‘참 떡’이라고 말씀하십니다(35절).
요한복음은 다른 복음서들과 달리 예수님의 신성과 메시아적 역할에 초점을 맞춘 독특한 문체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특징은 예수님께서 자신을 소개하는 "나는 ~~~이다"라는 구절들을 통해 두드러지게 나타납니다. 이 구절들은 단순한 자기소개가 아닌, 예수님의 본질과 역할, 그리고 그분과의 관계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열쇠를 제공합니다.
1) 생명의 근원: "나는 생명의 떡이다" (요한복음 6:35) 예수님은 5천 명의 양식 기적 이후, 자신이 생명의 떡임을 선포합니다. 이는 육체적인 양식을 넘어 영혼의 영생을 주는 유일한 존재임을 의미합니다. 마치 굶주린 자가 떡을 먹고 살아가듯, 예수님을 믿는 자는 영생을 얻게 된다는 약속입니다. 2) 세상의 빛: "나는 세상의 빛이다" (요한복음 8:12) 예수님은 자신을 세상의 빛이라고 부르며, 어둠 속에서 헤매는 사람들에게 진정한 빛을 제시합니다. 이 빛은 단순한 육체적인 빛이 아니라, 죄와 어둠으로부터 구원하며 영생으로 인도하는 진리와 정의의 빛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자는 어둠에서 벗어나 빛 속으로 나아가 진정한 삶을 경험하게 됩니다. 3) 양의 문: "나는 양의 문이다" (요한복음 10:7, 9) 예수님은 자신을 양의 문으로 비유하며, 안전과 평화로운 목초지를 제공합니다. 이는 예수님이 선한 목자이며, 그분을 믿는 자들을 위험과 멸망으로부터 보호하고 영생으로 이끄심을 의미합니다. 예수님 안에서만 진정한 안식과 평화를 얻을 수 있다는 약속입니다. 4) 선한 목자: "나는 선한 목자이다" (요한복음 10:11)
예수님은 자신을 선한 목자라고 부르며, 양들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사랑을 보여줍니다. 이는 예수님의 희생적인 사랑과 구원의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 죄를 위해 목숨을 바치시고, 영생으로 이끄시는 유일한 목자입니다. 5) 부활과 생명: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요한복음 11:25) 예수님은 자신이 부활과 생명임을 선포합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죽음을 이기고 영원한 생명을 주는 능력을 가지고 계심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을 믿는 자는 죽음을 넘어 영생에 이르게 된다는 약속입니다. 6) 길, 진리, 생명: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요한복음 14:6) 예수님은 자신을 길, 진리, 생명이라고 부르며,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고 영생으로 이끄는 유일한 길임을 강조합니다. 예수님을 통해서만 우리는 하나님을 알 수 있고, 진정한 삶을 경험하며, 영생에 이를 수 있습니다. 7) 참 포도나무: "나는 참 포도나무다" (요한복음 15:1)
오늘 본문 35절에서는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않고,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즉, 하나님이 하늘에서 내려주신 참 떡인 만나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놀라운 사실은 누구든지 2,000년 전에 33세에 죽은 청년 예수, 그분을 만나서 믿으면 인생이 배고프거나 목마르거나 허무하지 않습니다. 인생이 빛으로 가득하고 영원한 생명과 부활과 진리로 샘솟는 놀라움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믿기 어려운 말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기에 망정이지 상식적이고 합리적인 기준으로 본다면 받아들이기가 무척 힘든 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내가 생명의 떡이다. 내가 너희의 음식이다”고 하십니다. “하루 세 끼 밥을 먹고 만나를 먹어도 죽지만 나를 먹으면, 나를 만나고 나를 믿으면 인생에서 놀라운 기적이 시작된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을 모든 사람들이 믿는 것은 아닙니다. 36절 말씀을 보십시오. 그러나 내가 너희더러 이르기를 너희는 나를 보고도 믿지 아니하는도다 하였느니라 기적을 보인다고 해서 모든 사람들이 믿는 게 아닙니다. 기적을 보고도 믿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믿는다는 것과 믿지 않는다는 것은 인식의 문제, 감각의 문제가 아닙니다. 마음속에 믿지 않는 ‘오만’의 문제입니다. 하나님을 거부하고 싶은 불신앙, 인간의 교만, 자존심의 문제입니다.‘진리’가 아니라서 믿지 않는 게 아닙니다. 참 진리라도 인간에게 믿지 않겠다는 마음이 있는데 이것을 ‘죄’라고 합니다. 꺾이기 싫은, 순종하기 싫은, 굴복하기 싫은, 끝까지 나를 고집하고 주장하며 이기려는 것을 ‘죄’라고 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예수님을 만나고자 더 이상 모세가 전해 준 떡을 찾지 말고 내가 직접 이 생명의 떡인 예수님을 찾고 그 분을 통해 이 생명의 떡을 먹어야 합니다. 생명의 떡이신 예수를 믿기만 하면 이 땅에서 가진 것이 없어도 영생이 있기에 걱정할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를 믿지 않으면 이 땅에서 아무리 많은 것을 가지고 누려도 영생이 없기에 두려움만 가득할 뿐입니다. 영생을 얻은 성도는 날마다 생명의 떡을 먹어야 합니다. 성경에서 생명의 떡을 먹는 것은 단순히 육체적인 행위를 넘어 영적인 의미를 지닌 중요한 개념입니다.
1)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입니다. 가장 근본적인 방법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6장 35절에서 예수님은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나를 믿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은 그분을 구원자로 인정하고, 그분의 말씀과 가르침을 따르는 것을 의미합니다. 2) 말씀을 묵상하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또 다른 방법은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4장 34절에서 "내가 먹는 양식은 하나님의 뜻을 행하여 그 일을 이루는 것이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배우고, 그 말씀대로 행하는 것은 영적인 양식을 먹는 것과 같습니다. 또한 기도를 통해 하나님과 교통하고, 그분의 은혜와 축복을 받는 것도 생명의 떡을 먹는 것과 연관됩니다. 생명의 떡을 먹는 비결은 날마다 말씀 묵상을 통해 내 죄를 보고 나에게 다가온 사건을 해석하며 회개의 적용을 하는 것입니다. 3) 성찬 예배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성찬 예배에 참여하는 것 또한 생명의 떡을 먹는 중요한 방법입니다. 성찬 예배에서 우리는 예수님의 희생과 구원을 기억하며, 그분의 몸과 피를 상징하는 떡과 포도주를 섭취합니다. 이는 예수님과 영적으로 연합하고, 그분의 생명력을 받는 것을 의미합니다. 4) 사랑과 봉사를 실천하는 것입니다. 사랑과 봉사를 실천하는 것도 생명의 떡을 먹는 것과 연결됩니다. 마태복음 25장 35절에서 예수님은 "내가 배고플 때 먹여주고, 목마를 때 마시게 하고, 나그네일 때 데리고 와 머물러 주고, 헐벗을 때 옷 입혀주고, 병들 때 찾아와 보살피고, 옥에 갇혀 있을 때 찾아와 보았느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우리가 궁핍한 사람들을 돌보고 사랑하는 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것과 같음을 가르쳐줍니다.
결론적으로 생명의 떡을 먹는 것은 단순한 행위가 아닌,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분의 말씀을 묵상하며 기도하고, 성찬 예배에 참여하며, 사랑과 봉사를 실천하는 삶 전체를 의미합니다. 이러한 삶을 통해 우리는 영적인 성장을 이루고, 영생을 얻을 수 있습니다.
37절에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어쫓지 아니하리라’ 이것은 ‘불가항력 은혜’입니다. 불가항력은 은혜의 속성입니다. 하나님이 은혜를 주시면 거부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지옥까지 가서 택하신 자를 데려오십니다. 아무리 고집스럽게 거부해도 그분께서는 ‘은혜의 줄’로 동여매십니다. 주님께서 부르실 때 망설이지 말고 얼른 돌아오십시오. 인생의 반환점에서 머뭇거리지 마십시오. 속히 돌이키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매를 대서라도 강제로 데려오십니다.
[큐티인간증] [감옥에서 받는 만나, 남상원]
3년 전 겨울, 저는 징역 4년 형을 선고받고 법정 구속되어 현재 수감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죄명이 횡령이라고 해도 개인적으로 유용한 돈이 없고, 제가 대표로 있던 회사의 투자가가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이라 무죄 또는 집행유예를 받을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그런 제 예상과 달리 저는 곧바로 구치소로 이송되어 죄수복을 입고 한 평 남짓한 독방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실감이 나지 않다가 시간이 조금씩 흐르면서 감옥에 들어왔다는 사실이 인정되었습니다.
잠도 오지 않는 밤이 되니 “재판을 잘 받고 오라”던 아내와 아이들이 보고 싶어 가슴이 미어졌습니다. 그리고 주일 아침이 되자 교회에 너무 가고 싶어졌습니다. 낯선 환경에서 매일 아침 말씀을 묵상하면서 그동안 제가 얼마나 표적과 세상이 주는 만나를 구하며 살아왔는지 깨닫게 되었습니다(30~31절). 지난날 저는 주식과 경마로 재산을 탕진하고 술과 음란에 빠져 지냈으며, 동창과 바람까지 피워 교회의 치리를 받기도 했습니다. 그럼에도 진정한 회개를 하지 못하니 사업체를 시작하면서 다시 죄의 길에 들어섰습니다. 제가 만든 펀드를 성공시켜 유명해지고 많은 부를 누리고 싶었습니다. 교회 공동체에서 수많은 예배를 드리고 권면을 받았음에도 주님이 제게 주시는 음성으로 듣지 못했습니다. 또한 내 기준으로 남을 판단하는 교만이 가득하기에 하나님 아버지의 뜻이 무엇인지 알지 못했습니다(39~40절).
이렇게 감옥에 갇혀서야 비로소 제가 죄인임을 처절히 알게 되었습니다. 지금은 이런 고난을 허락하셔서라도 생명의 떡을 주기 원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이 깨달아져 감사할 따름입니다(35절). 때마다 저를 찾아와 기도해주시고 매주 주일설교 요약과 편지를 전해주는 지체들에게 고마운 마음을 전합니다. 형을 마치는 날까지 날마다 말씀 묵상으로 하나님을 더 알아가고 저의 죄를 회개하며 공동체의 소중함을 잊지 않겠습니다. 적용) 내일 아침 6시에 큐티하면서 생명의 떡이신 주님과 교제하겠습니다. <큐티인>을 전한 수감자들이 구원받도록 10분간 기도하겠습니다.
적용) 나는 영생을 얻은 자로서 날마다 생명의 떡을 먹고 있습니까? 나는 어떤 말씀도 나의 구원과 거룩을 위한 말씀으로 믿고 받아들입니까?
3. 아버지의 뜻, 영혼구원(38~40절)
예수님은 자신이 생명의 떡으로 이 땅에 온 이유는 아버지의 뜻을 이루기 위함이라고 하십니다(38절). 하나님 아버지의 뜻은 무엇입니까? 하나님 아버지의뜻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어 영생을 얻게 하는 것입니다(39,40절). 즉 아버지가 아들에게 주신 자 중에서 하나도 잃어버리지 않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것입니다.
39절의 "내게 주신 자 중에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는 말씀은 하나님 아버지께서 예수 그리스도께 맡기신 모든 사람을 마지막 날에 영원한 생명으로 다시 살리실 것이라는 약속을 담고 있습니다. 이는 예수님을 믿는 자 누구에게나 주어지는 확실한 약속이며,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과 구원의 은혜를 보여주는 부분입니다. "잃어버리지 아니하고"라는 표현은 ‘하나님의 완전한 보호와 섭리’를 강조합니다. 아무도 하나님의 손 안에서 빼앗길 수 없으며, 하나님의 약속은 반드시 이루어질 것입니다.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이라는 표현은 ‘영혼의 불멸과 부활’을 의미합니다. 육체는 죽더라도 영혼은 영원히 살아 있으며, 마지막 날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영원한 생명으로 변화될 것입니다. 이 말씀은 우리들에게 ‘영원한 생명의 확신’을 줍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누구나 죽음 이후에도 영원히 하나님과 함께 살 수 있다는 약속입니다. 이는 우리 삶에 큰 위안과 용기를 줍니다. 또한 이 말씀은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에 대한 감사’를 불러 일으킵니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 구원할 수 없었지만,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또한 이 말씀은 우리에게 ‘믿음의 삶’을 살도록 격려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삶을 통해 영원한 생명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또한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 ‘사랑과 봉사의 삶을 실천’하도록 격려를 받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우리는 주변 사람들에게도 사랑을 나누고 봉사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에게 있어서 최고의 사랑은 바로 ‘영혼구원’입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최고의 선한 일 역시 ‘영혼구원’입니다.
이런 아버지의 뜻을 이해하신 예수님은 어떤 환경에서도 ‘영혼구원’을 목적으로 아버지의 뜻을 이루셨습니다.
십자가에서 온갖 수치와 고통을 받으시면서도 그것을 마다하지 않고 아버지의 뜻을 행하셨습니다. 예수님 처럼 우리도 영혼 구원의 일이라면 고난이 찾아오더라도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이것이 나를 향한 하나님 아버지의 뜻입니다.
적용) 현재 나는 무엇을 목적으로 살고 있습니까? 나는 영혼구원의 사명을 하나님 아버지의 뜻으로 믿습니까?
결 론
마태복음 6장 9,10절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10.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입니다. 기도라고 하면 무엇이 가장 먼저 떠오릅니까? 많은 경우에 기도를 내가 원하는 것을 얻어내기 위한 수단으로 생각합니다. 자녀의 합격, 남편의 승진, 그리고 사업의 번창을 간구합니다. 이런 기도는 너무나 당연하고 연약한 인간이 절대자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데 있어서 전혀 문제 될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내가 구하고 있는 내용이 하나님의 뜻과 상반될 때입니다. 모든 신앙의 문제는 기도에서 시작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기도에 문제가 생기면 신앙에도 문제가 생길 수 있습니다. 건강한 기도를 하고 있는가, 기도의 방향이 잘못되어 있지 않은가 살펴보아야 합니다. 기도에 열심은 있지만, 방향에 문제가 있다면 헛수고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기도가 성경적으로 바른 기도인가 살펴보아야 합니다.
주님은 기도의 방향을 분명하게 가르쳐주십니다. 나의 소원을 이루는 것보다 더 우선되는 주제는 하나님의 뜻입니다. 종종 하나님의 보좌를 흔드는 기도라는 말을 합니다. 강력한 기도라는 뜻이겠지만 어떻게 보면 우리가 하나님도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다는 인상을 심어줍니다. 기도의 목표는 내 뜻과 소원의 성취 이전에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이어야 합니다. 특히 한국 기독교에는 샤머니즘의 영향을 많이 받아서 ‘비나이다, 비나이다’ 형태의 기도를 합니다. 그러나 그런 기도에는 윤리성이 없고, 공동체성도 보이지 않습니다. 단지 지금 나의 소원이 이루어지는 것에 집중합니다. 복권을 사고 “당첨되게 하시면 반 뚝 잘라 건축 헌금 내겠습니다”라고 기도합니다. 어떤 사람은 외국에 여행을 갔다가 신고를 해야 하는 불법 물품을 가지고 들어오면서 “하나님이 그냥 무사 통과하게 해주세요.”하고 기도합니다. 내 문제가 해결되기만을 바랄 뿐이지 윤리성이 없습니다. 자기 집이 두 개나 있는데 또 다른 아파트 청약 경쟁이 있을 때 “꼭 당첨되게 해주세요.”하고 기도합니다. 다른 사람의 삶이나 공동체성은 전혀 고려하지 않습니다.
기도 뿐 아니라 우리 성도의 삶의 목표도 분명해야 합니다. 우리는 생명의 떡되시는 예수님의 불가항력적 은혜로 구원의 반열에 서게 되었습니다. 그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아버지의 뜻은 아버지가 아들에게 주신 자 중에서 하나도 잃어버리지 않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것이라도 말씀하십니다. 참으로 위로가 되고 귀한 말씀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여기에 머물러서는 안됩니다. 이것을 뛰어넘어야 합니다. 우리도 예수님처럼 나 자신에게 주신 사명을 알아 아버지의 뜻인 영혼구원을 위해 살아야 합니다. 기복과 세상가치관으로 표적을 구하지 않고 오직 예수만을 구하며, 성경의 모든 말씀이 나의 구원을 위한 말씀임을 깨달아 경고의 메시지 조차도 잘 듣게 하시며, 오직 예수님처럼 영혼구원이라는 아버지의 뜻을 이루는 삶을 살아가는 성도님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