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교역자 시절, 한 자매가 남자 친구가 생겼다고 자랑했습니다.
어느 교회 다니는 청년이냐고 물었더니 교회에 다니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그 얘기에 “얼른 헤어져라. 왜 만나냐?” 하고, 탐탁지 않게 말했습니다.
다음 주가 되었습니다.
그 자매가 다시 얘기했습니다.
제가 얘기한 내용을 남자 친구한테 했다는 것입니다.
그랬더니 “무슨 목사가 그러냐? 목사면 목사답게 잘 되기를 기도해줘야지.”라고 하더랍니다.
그런 얘기를 그때만 들은 것이 아닙니다.
밤 10시 넘은 시간에 고등학교 동창한테서 전화가 온 적이 있습니다.
막 자리에 들려다가 전화를 받았습니다.
고등학교 친구들끼리 모인 술자리에서 제 얘기가 나온 김에 한 친구가 전화를 한 것입니다.
제가 얘기했습니다.
“이 시간에 먹은 건 전부 허리로 간다. 대충들 먹어라.”
“야, 넌 목사가 왜 그 모양이냐?”
“왜?”
“목사면 목사답게 이 시간까지 먹어도 건강에 지장 없게 해달라고 기도해줄 생각을 해야지, 왜 악담이냐?”
목사다운 것이 어떤 것입니까?
여러분은 목사한테서 어떤 것을 기대하십니까?
목사한테 어떤 것을 기대하느냐 하는 얘기는 신앙을 어떤 것으로 생각하느냐 하는 얘기와 직결됩니다.
목사는 무조건 좋은 말을 해주는 사람입니까?
그러면 신앙은 자기한테 좋은 일이 생기게 하는 방법이 됩니다.
신앙 좋은 사람일수록 돈도 잘 벌고 병에도 안 걸리고 자녀들이 공부도 잘할 것입니다.
원하는 대로 다 이루어질 것입니다.
그런데 목사는 그런 사람이 아닙니다.
목사는 무조건 좋은 말을 해주는 사람이 아니라 어떻게 사는 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옳은지를 가르쳐주는 사람입니다.
그러면 신앙은 자기한테 좋은 일이 생기게 해주는 방법이 아닙니다.
자기를 하나님 보시기에 바르게 세워주는 원칙입니다.
한때 우리나라 기독교에 기복신앙이 범람했던 적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 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요삼1:2)”라는 말씀이 특히 유명했습니다.
예수만 잘 믿으면 범사가 잘 되고 병도 낫는다고 합니다.
예전만큼은 아니지만 지금도 그런 식의 폐단이 전혀 없지는 않을 것입니다.
신학을 하기 전, 교회에서 부흥회를 했습니다.
부흥강사가 전형적인 3류 부흥사였습니다.
“물질 축복을 받고 싶으십니까? 십일조를 하세요. 자녀가 복을 받았으면 좋겠습니까? 주의 종을 잘 섬기세요. 건강 축복을 받기를 원하십니까? 새벽기도를 하세요. 물질 축복은 십일조로, 자녀 축복은 주의 종 잘 섬김으로, 건강 축복은 새벽기도로! 이것만 하면 다 된 것 아닙니까? 더 이상 무엇을 더 바랍니까?”
축복(
祝福
)은 빌 축(祝)에 복 복(福)을 씁니다.
축복은 복과 같은 뜻이 아니라 복을 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축복과 복을 같은 뜻으로 잘못 쓰는 경우가 왕왕 있습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을 위하여 축복하는 것은 맞습니다.
“하나님, 제가 아무개를 위하여 축복합니다.”라는 얘기는 얼마든지 할 수 있습니다.
그 사람이 복을 받았으면 좋겠는데 자기가 복을 줄 능력이 없으니 하나님께 복을 비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 아무개를 축복해주세요.”라는 말은 쓸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복을 주시는 분이지, 복을 비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누구한테 복을 빈다는 말입니까?
또 주의 종이라는 표현도 맞지 않습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주의 종이지, 목회자만 주의 종이 아닙니다.
그런데 그때 그 부흥 강사는 축복을 복과 같은 뜻으로 잘못 썼고, 목회자만 주의 종인 것처럼 잘못 얘기했습니다.
그 정도는 사소한 잘못에 불과합니다.
기독교를 왜곡한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우리가 신앙의 이름으로 하나님께 기대할 것이 고작 세상에서 돈 잘 벌고, 자녀가 좋은 대학 가고, 아프지 않고 건강한 것인 양 얘기한 것은 경우가 다릅니다.
정말로 그렇다면 그것은 신앙이 아닙니다.
설마 예수님이 우리를 잘 먹고 잘살게 해주려고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겠습니까?
신앙은 세상 일이 자기한테 유리하게 풀리게 하는 힘이 아닙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바른 삶을 사는 원칙입니다.
신앙이 있으면 자기한테 좋은 일이 생기지 않고 자기가 좋은 사람이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