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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6-02 디베랴 바다에서
요한복음 21장 1절
“나는 나의 유골이 세느 강변, 내가 그토록 사랑했던 프랑스 국민 한가운데서 안식 취하기를 원하노라.” 이 유언은 보나파르트 나폴레옹의 유언입니다. 프랑스 파리의 엥발리드 성당 안에는 보나파르트 나폴레옹의 무덤이 있습니다. 그러나 나폴레옹의 시신이 누워있는 것이 아니라 재가 들어 있습니다. 나폴레옹이 1821년 아프리카의 고도인 세인트 헬레나 섬에서 죽어 매장되었는데, 20년 후에 그의 유해가 프랑스로 돌아 올 때에 화장을 해서 갖다 넣은 것입니다. 이렇게 유언한 것을 그의 대리석관 입구에 크게 양각해서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유언에 사랑한다고 할 정도로 나폴레옹은 프랑스 국민을 사랑했습니다. 그것도 보통 사랑한 것이 아니라 ‘그토록’ 사랑했다고 유언할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그의 ‘그토록’ 사랑은 너무나 많은 사람을 죽게 했습니다.
그가 세계를 정복하려고 200만 명 이상의 유럽 여러 나라 국민과 군인들이 죽어야 했고, 그가 그토록 사랑했다는 100만 명 정도의 프랑스의 젊은 병사들이 죽어야 했습니다. 그러므로 그의 사랑의 실상은 그가 사랑한다고 하는 정복욕의 성취를 위한 도구에 지나지 않았던 것입니다.
또한 아돌프 히틀러도 그의 연설 중간중간마다 독일과 게르만 민족을 사랑한다고 이야기 했습니다. 그러나 그 사랑 때문에 600만 명의 죄 없는 유태인은 독가스를 마시고 죽어야 했습니다.
또한 2002년 9월 11일 미국의 뉴욕의 맨하탄에서 ‘알라’를 사랑한다는 모슬렘 자살 특공대 ‘알카에다’대원들이 비행기를 타고 세계 무역 센터 빌딩에 충돌하므로 그들과 비행기의 승객은 물론 이 빌딩의 약 6000여 명의 사람이 폭삭 무너지는 빌딩과 함께 시체도 찾지 못하고 억울하게 죽고 말았습니다.
이상 세 가지 사랑의 사례를 보면서 여러분들은 이들의 사랑이 진정한 사랑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그러나 이것은 결코 진정한 사랑이 아닙니다.
이것은 이기심에 불과합니다. 그리고 여기에 동조하면 집단 이기주의자들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들이 이렇게 당당하게 사랑한다고 할 수 있는 이유는 그들 나름대로 그것을 사랑이라고 착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착각은 너무나 어이없고, 무섭고, 상상할 수 없는 미친 짓을 유발할 뿐입니다. 그리고 이들이 이렇게 빗나간 사랑을 하면 할수록 더 많은 사람의 생명을 앗아가는 비극만 생겨날 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그저 사랑하라는 명령만 하신 것이 아니라 우리가 어떻게 사랑하여야 하는지 구체적으로 보여 주시면서 명령하셨습니다.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라는 사랑하는 방법과 기준을 우리에게 명확하게 알려 주신 것입니다. 그 말씀과 아울러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한 것같이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의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사랑한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어떤 행위를 가리킵니까?
글로벌 찬양의 교회 창립 4주년 감사예배를 드리는 오늘은 주님께서 요한복음 21장을 통해서 보여주신 사랑의 실천이 무엇인지 함께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어떻게 사랑해 주셨습니까?
먼저 찾아오셨습니다.
요한복음 21장 1절입니다.
“그 후에 예수께서 디베랴 바다에서 또 제자들에게 자기를 나타내셨으니 나타내신 일이 이러하니라.” 부활하신 예수님은 디베랴 바다 즉 갈리리 호수로 제자들을 먼저 찾아가셨습니다.
더구나 14절을 보면 “이것은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 세 번째로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것이라.”고 기록된 것을 보면 주님께서 세 번씩이나 제자들을 먼저 찾아가신 것입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마가의 다락방에 두 번, 그리고 갈릴리로 한번 찾아오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세 번씩이나 찾아가셨던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와 3년 동안이나 함께 했던 제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어떤 사람들이었습니까? 모두가 비겁자들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잡히시자 행여 자신들에게도 어려움이 올까 봐 슬그머니 뒤꽁무니를 뺏습니다.
아니 그 정도만 해도 괜찮습니다. 예수님의 눈을 바라보면서 베드로는 저주까지 하면서 부인했던 배반자들입니다. 그렇지만 주님께서는 그들을 찾아가셨습니다.
그렇다면 왜 그들을 찾아가셨습니까? 복수하기 위해서입니까? 아니면 비난하기 위해서입니까?
주님께서는 자기 사람들로 삼으신 그들을 변함없이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자기 사람들로 삼으신 그들을 끝까지 사랑하겠다고 약속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끝까지 사랑하신다는 말씀은 배반했건, 도망을 쳤던, 침을 뱉었던, 채찍으로 때렸던, 창으로 찔렀던, 어떠한 잘못과 죄를 저질렀던 간에 포기하지 않고 사랑하신다는 말씀이셨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렇게 하실 수 있으십니까?
사랑은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대단한 힘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강한 자를 먼저 움직입니다. 힘 있는 자를 움직여서 힘없는 자를 찾아가게 하십니다.
힘없는 자가 힘 있는 자를 찾아가는 것은 아부거나 굴종이지 사랑은 아닙니다. 사랑이라는 놀라운 힘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자신에게 등을 돌린 사람이라도 찾아 갈 수 있습니다.
그렇게 우리를 찾아오신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우리가 죄인이었을 때에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인간으로 오셨습니다. 그것도 가장 낮고 천한 모습으로 말구유에서 태어나셨습니다. 세상에 아무리 가난하고 추해도 아기를 낳을 때, 말 밥통 속에서 태어나게 한 예는 없을 것입니다.
이 세상의 사람이 만든 모든 종교는 그들의 교주나 창시자를 무조건 찾아가서 머리를 조아리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창조주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이 창조하신 인간에 불과한 세례 요한을 먼저 찾아가셔서 무릎을 꿇고 세례를 받으셨습니다. 그리고 날마다 쓰러지고, 넘어지고, 성령을 근심케 하는 우리들에게 오늘도 잊지 않고 찾아오셔서 은혜를 베풀어 주십니다.
그리고 “내가 너희를 찾아가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먼저 찾아가 사랑하라.”말씀하십니다.
먼저 말을 거셨습니다.
요한복음 21장 4절과 5절입니다.
“날이 새어 갈 때에 예수께서 바닷가에 서셨으나 제자들이 예수이신 줄 알지 못하는지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얘들아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 대답하되 없나이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 자신을 배반하고, 3년 동안 가르쳤던 주님의 말씀과는 전혀 관계없이 주님을 만나기 이전의 삶의 터전으로 돌아간 제자들을 먼저 찾아가셨습니다. 그들을 찾아가서 위로해 주고, 주님께서 주시고자 하는 평안을 전해 주러 가신 것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자기들을 찾아오셨건만 그들은 그것도 모른 채 자신들의 일에 몰두해 있는 것입니다. 정말 한심하다 못해 화가 날 일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들에게 먼저 말을 거셨습니다.
“얘들아 고기가 있느냐?”
사람들은 상대방이 먼저 말을 걸어주기를 기다립니다. 특히 가까운 사이일수록 상대가 먼저 말을 걸어주기를 기다립니다. 그러나 기다려도 말을 걸어 주지 않을 때, 오해가 쌓이고 나중에는 회복이 불가능한 상태가 되고 맙니다.
사랑을 어렵게 하려고 하지 마십시다.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먼저 말을 걸어 주십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먼저 말을 거셨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에덴동산에서 돌이킬 수 없는 죄를 짓고, 두려워서 벌벌 떨고 있을 때,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하나님께서 먼저 말을 거셨습니다. 만일 아담과 하와에게 하나님께서 먼저 말을 걸어 주시지 않았다면 모든 것은 거기서 끝이 나고 말았을 것입니다.
고린도 전서 13장은 유명한 사랑장입니다. 그러므로 7절에서는 사랑은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사랑은 ‘모든 것을 바란다.’는 말씀은 헬라어로 ‘엘피조(elpizo)’로 하셨습니다. 이 말의 뜻은 사랑은 모든 것을 바라는 것인데 ‘터무니없이 황당한 것을 공상으로 바란다.’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상대방이 가장 아름답게 되기를 바란다.’는 뜻입니다.
사랑은 상대방이 가장 아름답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그 안에 하나님의 형상이 존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사랑은 상대방이 아름다운 하나님의 형상으로 회복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배반자였던 사람, 나를 아프게 했던 사람, 도저히 용서할 수 없을 것 같았던 사람이 추한 배반자의 모습에서, 이기주의자의 모습에서, 위선자의 모습에서 하나님의 아름다운 형상으로 회복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사랑하는 사람은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에게 먼저 말을 걸게 되는 것이 당연합니다.
먼저 필요를 채워주셨습니다.
요한복음 21장 6절, 9절, 13절입니다.
“가라사대 그물을 배 오른 편에 던지라 그리하면 얻으리라 하신대 이에 던졌더니 고기가 많아 그물을 들 수 없더라,” “육지에 올라 보니 숯불이 있는데 그 위에 생선이 놓였고 떡도 있더라” “예수께서 가셔서 떡을 가져다가 저희에게 주시고 생선도 그와 같이 하시니라”
주님을 3년 동안이나 따라다녔던 제자들은 꿈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자신들이 따르고 사랑하는 예수님께서 머지않아 유대의 왕이 되신다는 기대였습니다. 이렇게 생각하니 웬만한 고생은 그다지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때가 되면 반드시 한자리 차지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결과는 그들의 기대와 전혀 다르게 결론지어지고 말았습니다. 그렇게 능력 많았던 예수 그리스도께서 허망하게 붙잡히시고, 힘없이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입니다. 그러니 닭 쫒던 개 지붕 쳐다보는 격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3년 동안 꾸었던 꿈을 접고 다시 옛날로 돌아 간 것입니다.
그래서 밤바다에 밤이 새도록 그물을 던졌습니다. 그런데 빈 그물만 올라옵니다. 그러니 허탈해지고 말았습니다. 가족들 보기에도 민망할 정도였습니다. 그때 부활하신 주님께서 먼저 찾아오셨습니다. 그러나 자기들이 주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있음에도 주님께서 먼저 말을 걸으셨습니다.
“얘들아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 “없나이다.” “그물을 배 오른 편에 던지라. 그리하면 얻으리라.” 그리하여 그물을 던졌더니 큰 고기가 일백 쉰 세마리나 되었습니다.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가난한 제자들이 고기를 잡지 못하므로 굶을 수밖에 없을 때, 주님은 그들이 염체가 없어서 도저히 요구할 수 없었음에도 고기를 잡게 해 주시고, 조반을 친히 지어 놓으시고 “와서 조반을 먹으라.”하시고 난 후 떡을 가져다주시고, 생선도 가져다 주셨습니다.
이렇게 주님께서는 우리들이 무엇이 당장 필요한지 미리 하시고 채워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고린도 전서 13장 4절에서 “사랑은 언제나 온유하며”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마태복음 5장 5절에서 “마음이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라고 하신 것과 마태복음 11장 29절에서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라고 하실 때의 온유와는 다른 단어입니다. 이때 사용된 단어는 ‘프라우테스(prautes)’ 즉 야생동물을 길들여서 말을 잘 듣게 만든 상태를 말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온유를 ‘크레스튜오마이(kreestuomai)’ 즉 ‘필요를 채워 준다.’ 라는 표현을 사용했습니다. 사랑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표현 같지만, 주님께서 제자들의 필요를 채워주셨기 때문에 주님께서 제자들을 사랑한 것을 ‘필요를 채워주는 것’으로 표현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주님께서 이렇게 제자들의 필요를 채워줄 수 있었던 것은 어떤 이유에서입니까?
생명의 등가성(等價性) 즉 같은 값어치로 인식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자신의 생명과 죄인인 우리의 생명을 같은 값어치로 인정하시기 때문입니다. 도저히 같은 가치로 인정할 수 없는 하나님과 인간의 생명이지만, 주님은 우리를 주님 자신처럼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호흡을 우리에게 불어 넣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주님께서는 나만 사랑하신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를 사랑하셨다는 것을 잊지 않으시기를 바랍니다. 국적과 국경과 빈부귀천을 막론하고 모두 같은 값어치로 인정하십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면 무엇보다도 사랑하는 사람의 필요를 우선적으로 채워 주는 것입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최대의 걸작은 ‘모나리자의 미소’입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67세에 죽기까지 그 그림을 자기 옆에 걸어 두고 있었습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이렇게 이 작품에 마음을 기울이는 이유는 이 작품을 그리기 위해서 그는 무려 열 번 이상 시체를 해부했고, 특히 얼굴을 세심하게 관찰했기 때문입니다. 혼신의 정열을 기울였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이 그림은 불과 세로 77cm. 가로 53cm의 작은 그림입니다.
그럼에도 어찌해서 이 그림이 세계 최고의 명화이며, 프랑스와 1세가 그토록 소중하게 소장했다가 온 세계 인류가 다 볼 수 있도록 ‘루브르 박물관’에 기증했을 때, 박물관에 많고 많은 그림 중에서 유독, 이 그림만 방탄유리로 보호하고 있는 이유를 확실하게 알고 계십니까?
이유는 바로 ‘모나리자의 눈’ 때문입니다. 모나리자의 미소를 머금은 눈을 바라보십시오.
옆에서 그 눈을 보아도, 앞에서 그 눈을 보아도, 걸어가면서 그 눈을 보아도 모나리자는 미소를 머금은 채 계속해서 여러분의 눈과 마주치게 됩니다. 어느 각도에서도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보는 사람과 시선을 마주치게 되기 때문입니다.
서로 사랑하는 사람들은 그의 눈 속에 내가 있고, 내 눈 속에 그의 눈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랑은 주님과 시선을 마주치는 것입니다.
그러나 시선이 마주치려면 먼저 찾아가서 상대방의 곁에 머물러야 합니다.또한 먼저 말을 걸고, 늘 대화해야 합니다.또한 무엇이 필요한지 관심을 갖고 채워 주어야 합니다.
누가복음 22장 60절부터 62절에서 베드로가 주님을 부인합니다.
“이 사람아 나는 너 하는 말을 알지 못하노라고 방금 말 할 때에 닭이 곧 울더라.”
61절에 “주께서 돌이켜 베드로를 보시니 베드로가 주의 말씀 곧 오늘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생각나서” 62절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 하니라.”
주님을 배반했던 베드로가 주님의 맑고 깊은 눈과 마주쳤을 때, 그때에야 “곧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생각났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시선과 마주쳤을 때, 주님에 대한 사랑이 회복되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처럼 주님을 멀찍이 따라가게 되면 주님의 눈을 볼 수 없으므로 시험에 들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주만 바라보아야 합니다. 주만 바라보아야 주님처럼 사랑할 수 있습니다.
사랑은 먼저 찾아가는 것입니다. 먼저 말을 거는 것입니다. 그리고 먼저 필요를 채워 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