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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가 박병춘의 여러 전시에 관한 평론가와 기획자들의 언급이다. 지나간 각각의 그 개인전에는 저마다 그들의 평론이 의미 있었고, 갤러리 분도의 이번 전시에는 좋든 나쁘던 내 짧은 비평이 들어간다. 하지만 이 한국화가의 미술 세계를 옆에서 지켜보아왔으며, 쓸데없는 레토릭을 구사하지 않고 간결한 그 평론(들)은 내게 좋은 참고문헌이 되었다. 또 그 텍스트의 요지를 뽑아낸 위의 문구들은 이 새로운 전시를 접하는 관객들에게도 유용한 길잡이가 될 것이다. ● 평론가 고충환이 쓴 글은 작가의 방법론을 설명하고 있다. 박병춘은 본 그림을 그리기에 앞서 그 대상지를 찾아 산과 들을 헤맨다. 그 로케이션 과정에서 그린 사생을 작업실에 가지고 와서 화폭에 옮긴다. 작가와 같은 방법을 취하는 미술가들이 몇 명 더 있다. 그렇지만 박병춘만큼 과정을 정직하게 지키는 이는 드물다. 고충환의 해석과는 별도로, 나는 박병춘의 작품이 실제 경관의 재현 위에 주관적인 이차적 질서의 관찰이 더해진 결과라고 본다. 나는 미술 비평에 인지 논리학을 끌어 쓰길 좋아하는데, 이 경우 작가는 자연이라는 대상을 두 번 거듭하여(즉 재귀적으로) 해석한 것이고, 그것을 지켜보는 평론가는 세 번 거듭하여 관찰하는 셈이고, 관객은 네 번 거듭해 관찰하고, 이 재귀 과정은 논리적으로 끝없이 순환된다. ● 학예연구사 김준기의 지적은 그동안 많은 한국화가들이 종이와 먹과 붓에 지나치게 집착하며 그 물건들과 필선을 신성시하는 경향을 이 작가는 거부한다는 뜻이다. 김준기는 다른 화가들이 보여주는 그러한 경향을 '필선 페티시(fetish)'라고 후련하게 치고 있다. 나도 동감하는데, 이 물신화 경향은 프로이트 정신분석학 용어인 페티시보다 맑스와 루카치의 경제학, 사회학 개념인 물화(reification)가 더 알맞은 것 같다. 전통 화론에 대한 작가들의 관념은 권위에 대한 지배 복종 관계가 특정한 사물이나 행위에 의미를 지나치게 부여하면서(그래야 그 공동체에 끼일 수 있으므로) 정작 예술 그 자체를 소외시킨다는 점에서 그렇다. 이러한 한국화의 물화 현상을 화가 박병춘도 포착하면서 이에 대한 반동 의지를 작품 속에 담아내고 있다. 한 획 속에 우주의 구성 원리를 담아낸다고 주장하는 전통적인 필선 앞에 고작 꼬불꼬불한 라면발이라니!
큐레이터 신현진의 설명은 작가가 예전에 쌈지 스페이스에서 벌였던 다양한 양식 실험을 염두에 두고 한 기술이다. 작가는 수묵과 한지에서 벗어나서 '진지한 장난'을 벌여왔다. 그는 이것도 수묵화의 연장선 위에 있다고 믿는다. 예컨대 작가는 그림을 포대처럼 걸었다. 고무대야를 잘라서, 생 라면을 부숴서 산수를 표현했다. 칠판에 그림을 그려 넣었다. 진지한 그림에 장난감을 붙여 놓았다. 작가가 벌이는 진지한 장난은 그 이후로도 계속 이어졌다. 내가 보기에 2010년 말에 사비나 미술관에서 선보였던 개인전 『산수콜렉션』은 그의 회화 양식 범주 내에서 필선 구사법의 실험과 오브제 설치 실험의 결정판이었다. ● 갤러리 분도의 이번 전시는 경쾌함, 단순함, 소박함으로 기획 방향을 잡았다. 왜? 바로 이전 전시에서 현란하고 복잡하고 번뜩이는 구상을 쏟아 넣은 작가에게 연투를 바라지 않기 때문이다. 그에게 약 박자의 템포를 줌으로써 도리어 내실 있는 전시를 선보이고 싶은 바람이 있다. 이것은 상업미술전시공간들이 휘두르는 힘으로부터 적어도 이곳만은 작가의 권리를 보장해야 한다는 우리의 원칙이기도 하다(물론, 힘으로 휘두른다고 휘둘릴 그도 아니지만). 전시 기획자로서 나 또한 스펙터클에 대한 욕심이 안 생기리란 법은 없다. 하지만 논리적으로 생각한다. 오브제 실험에 대한 집착 또한 종이와 먹과 붓에 대한 물화 현상과 다를 게 뭐가 있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박병춘은 이 개인전을 위하여 본인이 할 수 있는 최대치의 노력을 끌어냈다. 그는 강원도 오지 산자락과 제주도 섬의 풍광을 발로 찾아내어 작품에 담아내었다. 그 모든 그림 속에는 박병춘의 미술이 화단에서 위치한 좌표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그림을 보면 눈에 띄는 것들이 있다. 아마도, 작품이 공개되는 기간 동안 큐레이터와 도슨트들이 지겹도록 듣고 대답해야 할 질문이 있을 것이다. 그 수고를 덜기 위해 여기에 내가 대신 내 의견을 남긴다. '도대체 희뿌연 수묵에 도드라져 뵈는 패러글라이더 따윈 무슨 뜻인가?' ● 아무리 봐도 산수화 속에 배치될 이유가 없는 것일뿐더러 현실적인 공간감도 결여된 그것들은 몇 가지 함축된 의미를 가진다. 이는 첫째, 그것은 일상 속에서 익숙하고 생생함으로 인지되는 원색이다. 따라서 현대 도시인들에게는 산과 들녘이 비일상적인 여행을 통해 아련한 기억으로만 남은 수묵 채색과 구분된다. 따라서 둘째, 그가 그리는 진경산수화는 이러한 장치를 통해 관념산수화의 전통과도 완전히 단절되지 않는 여지를 마련한다. 그 장치들은 작가만이 가지는 주관적인 대상이다. 예컨대 그것들은 마르셀 프루스트의 소설들에서 곧잘 사용되는 연상기억법의 내러티브처럼 어떤 물건이나 장소 또는 음악이 특정한 기억을 떠올리게 하는 연상을 작가도 경험해 왔을 것이다. ● 끝으로 셋째가 나로서는 가장 중요한 사견인데, 그 우스꽝스럽고 이질적인 부분들은 그 자체가 서양화에서의 강조점으로 처리되지만, 작가는 관객들에게 그것들을 무시하고 건너뛰어 수묵으로 이룬 산수를 감상하도록 은연중에 지시한다. 누군가가 억지 욕심을 부리지 않으면 항상 변하지 않을 자연, 거기에 작가의 의식이 개입된 부분은 곧 점잖게 해결될 일종의 돌발 상황일 뿐이다. 그렇지만 예측 불가능한 삶은 그 자체가 활력이기도 하다. 그 속에 상상력이 끼어들 여지가 마련된다. 바로 예술이니까. 가령 그림 속 코끼리들, 한비자에 나오는 코끼리는 사람들이 보지 못한 상상 속 동물이었다. 그 당시에는 누구도 보지 못한 코끼리를 서로 다른 모습으로 그렸던 것처럼 박병춘의 넘실대는 그림에 펼쳐진 익숙하고도 낯선 공간은 우리로 하여금 저마다의 아련한 꿈을 미적인 의식 속에 온전히 이끌어 낸다. ■ 윤규홍
Vol.20110620a | 박병춘展 / PARKBYOUNGCHOON / 朴昞春 / painting
▲ 박병춘 `욕지도를 날다`(2011)(사진=갤러리 이레) |
** 박병춘 작가(45)는 충북 영동 출신으로 공사판도 전전해 본 입지적인 한국화가입니다.
현재 덕성여대 교수로 재직중이며 한국화에 대한 실험정신으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죠.
서울 라마다호텔엔 외국유명화가처럼 고객들의 뜨거운 호응으로
작가 작품 전시전용 객실이 마련되어 있다 합니다.
첫댓글 좋은글,
잘 봤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