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2013년 다해 9월8일 연중 제23주일
[청주] 고집과 소신 -
청주 교구 감곡 매괴 성모 성당 반 영억 라파엘 신부
† 제1독서 : 지혜 9, 13 - 18
† 제2독서 : 필레몬 9ㄴ - 10. 12 - 17
† 복음 : 루카 14, 25 - 33
오늘 전례
오늘은 연중 제23주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당신을 따르려면
자신의 십자가를 짊어지고 따라야 한다고 가르치십니다. 9월 순교자
성월을 지내면서, 이 땅의 신앙 선조들이 보여 주었던 십자가의 삶을
떠올리며 더욱더 충실한 신앙생활로 나아가기를 다짐합시다.
★ 지혜서의 저자는 인간의 보잘것없음을 강조하며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거룩한 영을 보내지 않으시면 어느 누구도 하느님의 뜻을 깨달을 수
없다고 밝힌다(제1독서).
★ 감옥에 갇힌 바오로에게 종의 신분인 오네시모스가 주인 필레몬을
피해 찾아왔다. 바오로는 필레몬에게 편지를 써 보내며 오네시모스를
종이 아니라 사랑하는 형제로 맞아들이기를 권고한다(제2독서).
★ 예수님께서는 수난과 죽임을 당하시러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길에
동행하는 이들에게 당신의 길을 따르는 이의 자세에 대하여 말씀하신다.
곧 자기가 가진 것을 기꺼이 버릴 줄 알며 십자가를 지고 가려는
마음가짐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복음).
◈ 오늘의 묵상
새장에 새 한 마리가 있었습니다. 그 새는 오랜 기간 그 안에서 주인이
주는 모이만 먹으며 살아왔습니다. 자기의 본성이 날개를 활짝 펴고
하늘 높이 나는 것이지만, 그럴 수 없는 현실에 절망하였습니다. 어느
날 주인은 새장의 문을 열어 주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새를 놓아주기로
한 것입니다.
그러나 막상 새장 문이 열리자 새는 걱정이 앞섰습니다. 아직까지
날갯짓을 해 보지 않았고, 새로운 세상에 적응한다는 것이 쉽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는 먹고 자는 것에 신경 쓰지 않았습니다.
주인이 주는 모이나 먹으면 그만이었습니다. 그래서 새장은 이미 열렸으나
그 새는 좀처럼 나가려 하지를 않습니다. 지금처럼 새장 안에 있는 것이
현실적으로 최선의 방법이라 생각한 것입니다.
우리 자신이 어쩌면 이러한 새장 속의 새인지도 모릅니다. 열등감, 죄의식,
상처, 분노, 죽음에 대한 공포 등 각자 자신만의 새장에 갇혀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 새장의 문을 여셨습니다.
우리를 가두고 있는 모든 것에서 우리를 해방시켜 주셨습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우리도 혹시 새장 속의 새처럼 문이 열려 있음에도
거기에서 벗어나지 않으려고 하는 것은 아닐까요? 우리도 날갯짓을
포기하고, 새장에 갇힌 채 재산, 명예, 쾌락, 분주함 등의 ‘모이’나 먹으며
안주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너희 가운데에서 누구든지 자기 소유를 다
버리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참된
자유를 누리려면 새장에서 벗어나려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모이’를 과감히 포기하고 날갯짓을 연습해야 합니다.
- 매일 미사 -
◈ [청주] 고집과 소신 / 반영억라파엘 감곡매괴 성모성당 신부
2013년 다해 9월8일 연중 제23주일
<자기 소유를 다 버리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 루카 14,25-33
고집과 소신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하느님의 큰 사랑 안에 머물 수 있는 은총이
함께하길 기도합니다.
우리는 성경을 통해 주님의 말씀을 접하면서 위로와 평화,
구원을 기대합니다. 그러나 때때로 기대와는 다른 말씀을 접하면서 긴장할
때가 있습니다.
마태복음에 보면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지 마라.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왔다. 나는 아들이 아버지와, 딸이 어머니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갈라서게 하려고 왔다. 집안 식구가 바로 원수가 된다”고 적혀
있습니다. 오늘 복음도 “누구든지 나에게 오려면 자기 아버지와 어머니,
아내와 자녀, 형제와 자매, 심지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누구든지 제 십자가를 짊어지고 내 뒤를 따라오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하시며 자기소유를 송두리째 버릴
것을 요구하고 계십니다. 그렇다면 “부모를 공경하라”는 계명은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하느님은 사랑이시고 그 아드님은 우리를 구원하신다고 하였는데 이렇게
엉뚱한 말씀을 하시면 마음이 흔들리고 맙니다. 성당에 나가면 좋은 일이
생길 줄 알았는데 영 딴판입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영생을 보장 받는다고
했는데 귀가 막힐 노릇입니다. 그러나 실망하지 마십시오. 주님께서는
우리의 생각보다 훨씬 크신 분이시고 약속에 충실한 분이시기 때문에
우리에 대한 신의를 결코 저버리지 않으십니다.
우리는 ‘출가’ 라는 말을 씁니다. 속세의 가정을 떠나 승려가 되기 위해
불문에 드는 일을 말합니다. 뜻을 품고 수도원으로 들어가 덕을 닦는
일을 들어 말하기도 하고 결혼을 하여 부모님 품을 떠나갈 때도 ‘출가’
라는 말을 합니다. ‘출가’는 소위 가족과의 불화나 갈등으로 다시
돌아오지 않을 생각으로 집에서 나가는 ‘가출’하고는 다릅니다. 출가는
단순히 집을 나가는 것이 아닙니다. 집착을 떠나는 것입니다. 더 큰
뜻을 이루기 위해서 소중한 하나를 포기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더 큰
것을 선택하였으면 거기에 투신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목적을
이룰 수 없습니다.
결혼도 마찬가지 입니다. 결혼을 하면 배우자가 있고 자녀가 따르기
때문에 이제 그에 대한 그만한 책임이 주어지게 마련입니다. 한 가정의
주체가 되었다면 이제 부모에게 기대거나 무엇을 바라지 말고 홀로
서야 합니다. 지금까지 모든 것을 뒷받침 해 준 부모로부터 독립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더 많은 수고와 땀을 흘릴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속칭 마마보이가 되어 성숙한 인격체로 설 수가 없고
불행한 인생을 살아가게 됩니다.
부모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식을 이제 놓아 주어야 합니다. 자식에 대한
집착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그래야 그도 바로 설 수 있습니다. 자식은
내 소유물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지켜보면서 남모르게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지 사사건건 이래라 저래라 하거나 기대하면 실망이
커집니다. 내가 신경을 안 써 주면 혹시 잘못되지 않을까? 하는 노파심이
온갖 일에 ‘간섭과 참견’이 될 수 있습니다. 따라서 때가 되면 서로에게서
자유로워야 하고 또 자유를 주어야 합니다. 그것이 사랑입니다. 사랑은
자유를 주는 것입니다. 또한 집착에서 자유로워지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은 바로 출가의 의미를 새롭게 해줍니다. 주님께서 약속하신
영원한 생명의 길이 좋은 것임을 안다면 하느님의 사랑이 우선이라는
것입니다. 사실 한 분이신 하느님을 흠숭하는 것이 가장 우선입니다.
그리고 하느님을 흠숭하는 사람은 하느님의 모상을 닮은 다른 사람들을
결코 소홀히 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사랑의 우선순위를 확실히
선택하면 아무 문제가 될 것이 없습니다. 오히려 더 큰 축복이 주어집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서는 내가 목숨을 내놓기 때문에 나를 사랑하신다.
그렇게 하여 나는 다시 목숨을 얻는다”(요한10,17). 고 말씀하셨습니다.
결국 우리도 어렵고 힘들더라도 지금 하느님을 선택하면 바로 그 선택을
통해서 다시 더 큰 것을 얻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우리 삶의 첫째자리에
놓아야 할 것은 주님이십니다. 주님은 언제나 내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보다 더 위에 두어야 합니다. 예수님과 세상을 놓고 결정적으로
선택해야 할 것은 고통을 감수하더라도 예수님이십니다.
상식적으로 우리가 복숭아 농사를 지면서 이른 봄에 가지치기를 하고
시간이 흐르면 적과를 하게 되는데 욕심이 생겨 하나라도 더 얻으려
그냥 모든 것을 방치한다면 그해의 수확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아깝게
생각되더라도 과감하게 정리할 것은 정리해야 좋은 열매를 얻을 수
있습니다.
뜻을 품었으면 그에 맞갖은 투신을 해야 합니다. 탑을 세우려면 공사를
잘 마칠 수 있을지 계산해 보고, 임금이 싸움을 해도 먼저 지금 군대의
수로 이길 수 있을지 헤아려 보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렇다면 하느님의
나라를 차지하고 구원을 얻는데 있어서 그만한 준비가 없어서야
되겠습니까? 세상에는 약삭빠르게 계산하면서 왜 그 좋은 머리를 하느님
나라를 차지하는 것에는 쓰지 않느냐? 는 말씀이 들리는 듯합니다.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그만한 투신과 결단이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어린 아기가
어머니 뱃속으로부터 세상에 나왔으면 탯줄을 끊어야 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마찬가지로 하느님의 나라를 차지하는 과정에서 하느님의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을 끊어버리는 것은 마땅합니다.
따라서 천상을 위해서 유익하다면 나의 집착과 소유의 마음을 과감히
버리십시오. 죄악의 고리를 단호하게 끊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남을 바라보는 부정적인 생각과 시선을 거두어야 합니다. 자기의 못된
습성을 알면서도 바꾸지 않는 사람을 소신 있고 주관이 뚜렷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아닙니다. 그 사람은 고집이 있는 사람입니다. 고집,
그것도 그냥 고집이 아니라 똥고집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아무쪼록 하느님 앞에 그리고 우리의 이웃 앞에 쓸데없는 고집불통이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하느님 앞에 소신 있는 여러분의 믿음을 자랑하시기
바랍니다. 언제어디서나 하느님께서 요구하는 것에 반대되는 것이면, 또
이쪽도 저쪽도 아닌 미지근한 것이면 단호한 결단을 내리시기 바랍니다.
주님의 제자인 여러분, 하느님 앞에 적당한 타협이나 양다리 걸치기,
어중간은 없습니다. 하느님을 선택하면 결코 후회하지 않을 것입니다.
언제나 하느님 안에서 기뻐하시기 바랍니다. 사랑합니다.
- 청주 교구 감곡 매괴 성모 성당 반 영억 라파엘 신부 -
◈ [인천] 지금 나의 모습은 어떠할까요?
저는 일정표를 매우 중요하게 생각해서 여러 곳에 저의 일정을
남겨둡니다. 스마트폰은 기본이고, 컴퓨터에도 똑같은 일정이
저장되어 있습니다. 또한 들고 다니는 수첩에도 그리고 사무실
칠판에도 일정표가 적혀 있습니다. 무려 4군데에다가 똑같은 일정을
적고 있는 것이지요. 이는 예전에 어떤 본당에서 강의를 하기로
했다가 일정을 적지 않아 펑크를 냈던 경험이 있기 때문입니다.
머릿속으로만 기억하고 있다가 큰 실수를 한 것입니다. 그 뒤에는
혹시라도 약속을 펑크 내지 않을까 싶어서 여러 곳에 일정을 남겨두고
있습니다. 이렇게 일정표를 이용하다보니 일을 훨씬 계획성 있게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아무런 계획 없이 그냥 시간 가는대로 일을
한다면 어떨까요? 일을 제대로 할 수 없는 것은 물론 실수가 일어날
수 있는 가능성이 많아질 것입니다.
세상의 일을 잘 하기 위해서는 계획성 있게 해야 하고, 또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계획을 세워서 철저히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하느님의 일에 대해서는 계획을 세우는 사람들이 많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냥 시간이 나면 하느님의 일을 하는 것처럼 생각하고,
그냥 막연하게 언젠가는 하느님의 일을 할 것이라고 말만 할 뿐입니다.
더 중요한 하느님의 일을 이렇게 계획 없이 제대로 할 수 있을까요?
얼마 전에 이런 분을 만났습니다.
“신부님, 요즘 너무 바빠서 성당에 못 나갔어요. 그런데 이제 좀
한가해지니까 열심히 성당에 다니겠습니다.”
주님을 섬기는 것이 단순히 자신의 컨디션에 따라서, 그리고 자신에게
주어진 일의 양에 따라 결정되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가장 중요하기 때문에 신중한 작전과 노력이
필요하다고 말씀하시지요. 그래서 탑의 비유, 적과 맞서고 있는 임금의
비유를 말씀하시면서 용의주도한 계획이 필요하다고 하십니다.
그러나 많은 이들이 이러한 준비보다는 앞선 형제님처럼 순간적인
기분만을 쫓고 있는 것 같습니다. 하느님의 일은 순간적인 기분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막연하게 하느님의 일을 할 것이라는
예상만으로 들어갈 수 있는 하느님 나라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보다는
철저한 계획과 노력을 통해서만 간신히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 계획의 첫 번째에는 하느님을 세상의 그 어떤 것보다도 더 중요한
분으로 생각해야 합니다. 예수님도 말씀하시지요.
“누구든지 나에게 오면서 자기 아버지와 어머니, 아내와 자녀, 형제와
자매, 심지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하느님 아버지를 가장 윗자리에 모셔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시기 위한
말씀입니다. 그런데 지금 나의 모습은 어떠할까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한 우리들의 준비와 노력들을 다시금 점검해야
할 때입니다.
아무리 세상이 고단함만 선물할지라도 그 한 사람이 있다는 사실이
우리가 삶에 더욱 분발해야 하는 간절한 이유가 됩니다(박성철).
우리가 짊어지는 십자가는 어떤 십자가?
나의 단점들
나의 단점들, 얼마나 많습니까? 저도 많은 단점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예전에 비해서 많이 좋아지기는 했지만 게으르기도 하고, 또한 뒤로 미루는
성격도 가지고 있습니다. 다른 이들의 말을 들어주기보다 오히려 더 많은
말을 하는 단점도 있네요. 아무튼 너무나 많은 단점들을 가지고 있는
우리입니다. 그런데 그 많은 단점들을 단 번에 고치는 것이 가능할까요?
절대로 불가능합니다.
맞나요? 그렇다면 불가능하다고 단점을 가지고 있는 내 모습을 변화시키려는
노력을 포기해야 할까요? 괜한 곳에 헛힘 쓸 수 있다고 그냥 대충 살아가야
할까요?
그 수많은 단점들을 한 번에 고친다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그 중에서 딱
하나만 고치려고 노력한다면 어떨까요? 즉, 오늘 하루를 살면서, 그 많은
단점 중에서 딱 하나만 고치려고 노력해보십시오. 그리고 내일은 또 다른
단점을 고치도록 노력해보면 어떨까요?
이렇게 해서 일 년을 보내게 된다면 어떨까요? 나의 단점 365개를 고치기
위해서 노력을 했고, 그 자체로 우리는 만족하며 행복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나는 단점이 너무 많아서 틀렸어.’하면서 포기한다면? ‘이 모든
단점들을 언제 다 고칠 수 있겠어?’라며 포기한다면?
아마 나의 한 해를 돌아보게 되는 연말에, 단 하나의 단점도 고치지 못한
나를 만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 인천 교구 성소 국장 조명연 마테오 신부 -
◈ [기타] 섭리를 이해한다는 것은...
소나무 신부와 함께 하는 마음의 산책
2013년 다해 9월8일 연중 제23주일 복음묵상
‘저 사람은 세우는 일을 시작만 해 놓고 마치지는 못하였군.’ 할 것이다.
(루카14,30)
---
오늘은 섭리(攝理)라는 말과 함께 개인적인 고백을 해보련다.
참으로 많은 계획들 안에서 살아가야만 하는 것이 우리의 삶이다.
실천한 계획과 실천하지 않거나 못한 계획 중 어느 것이 더 많을까?
물론 계획의 내용에도 경중(輕重)은 있기 마련이다.
스스로에게도 관대한 점수를 매기지 못할 것 같다.
지천명(知天命)이라는 나이를 넘어선 지금, 지나간 시간을 뒤돌아보니,
스스로 세운 계획보다는 그분의 뜻에 의해 움직여졌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고향을 떠나 이렇게 살게 되리라고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더욱이 선교적 삶을 살게 될 것이라는 생각은 추호도 해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이렇게 일본이라는 나라에 오게 되었고, 삼십 개국이
넘는 국적의 사람들이 살아가고 있는 공동체에서 사목을 하고 있다.
그분의 섭리였다는 고백 이외에는 달리 설명할 방도가 없다.
왜 나름대로, 삶의 방향에 대한 계획이 없었겠는가?
하지만, 그분께서는 나를 이런 방향으로 이끌어주셨다.
사실 한 번도 내가 욕심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 적이 없었다.
하지만, 걸어온 길을 돌아볼 때, 나의 계획에는 늘 인간적인 욕심이
섞여 있었음을 인정하게 된다. 그리고 그러한 욕심이 옳지 않았다면
하느님께서는 예외 없이 꺾어주셨음을 체험한다.
앞으로도 어떤 방향으로 나의 삶이 전개될지 알 수 없다. 다만 그분께서
이끌어주실 것을 믿고 따를 수 있는 은총을 청할 뿐이다.
어떨 때는 이렇게 살아야만 하는 형편이 불편할 때도 있다.
하지만, 나의 어리석음에 모든 것을 걸 수는 없다.
그분의 섭리, 그분의 이끄심에 응답하는 삶이 가장 나답게 살 수 있는
길임을 믿어야 한다.
물론, 섭리에 대한 이해는 늘 과거형일 수밖에 없다.
즉 지난 후에 깨닫는다는 뜻이다.
그러기에 하느님에 대한 신뢰가 우선적으로 요구된다.
잘 살고자 하는 마음과 실천에 대한 노력이 있는 한,
그분께서는 가장 좋은 길로 우리를 이끄실 것이라는 믿음이다.
‘뒤돌아보니 발자국마다 은총이었다’는 오래 전 작고한 어느 목사님의
고백이 우리 모두의 고백이 되기를 희망해본다.
- 사이타마 교구 오타(太田)본당 주임
김 대열 프란치스코 사베리오 신부 -
https://www.facebook.com/WithfatherPinetree
소나무 신부와 함께 하는 마음의 산책
◈ [서울] 연중 제23주일
2013년 다해 9월8일
서울대교구는 3곳의 순례길을 선포하였습니다. ‘말씀의 길, 일치의 길,
생명의 길’입니다. 10일에는 한국의 주교님들께서 이 길을 순례하신다고
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따라, 우리가 서로 하나가 된다면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순교자 성월’을 지내면서 순교의 의미에 대해서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순교자’라는 말은 무엇입니까? 저는 가톨릭 용어
사전을 찾아보았습니다. 순(殉)이란 죽은 자의 뒤를 이어 10일 이내에
따라 죽음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순교란 자신이 신봉하는 신앙을 증거하기
위해 목숨 바치는 행위를 말합니다. 전에는 이를 치명(致命)이라고 하였는데,
이는 그리스도께서 가르쳐 준 믿음, 즉 신앙의 진리를 증거하기 위해 생명을
내놓은 사람을 말합니다.
그런데 2세기 중엽부터 교회는 재판소에 끌려가서 말씀의 증언을 하고도
죽지 못한 자를 증거자(證據者), 피로써 증언한 자를 증인(證人, Martyrs)
이라 불렀는데, 이 후자의 경우를 순교자라 하였습니다. 순교자는 세례를
받지 않았어도 혈세(血洗)의 은혜로 구원이 가능하다고 교회는 가르치고
있습니다(요한 15, 13). 성 아우구스티노는 그들을 위해 위령 기도를 하기보다,
오히려 찬미의 기도를 바쳐야 마땅하다고 하였습니다.
조선 시대 천주교 신자들을 사학죄인(邪學罪人, 천주학쟁이)이라 하여,
대역죄로 다스리는 바람에 2만 여 명의 순교자가 나왔습니다. 그리고
6·25 때는 많은 성직자 수도자 신자들이 공산군에게 끌려가 순교하였습니다.
그래서 결국 한국은 103위의 영광스러운 순교 성인을 모시게 된 것입니다.
‘순교자 성월’은 세상 사람들이 보면 어리석은 삶을 살다가 죽어간 사람들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순교자란 세상의 가치를 따라 살지 않고, 하느님의 뜻을
따르다가 박해를 받고 가장 소중한 목숨까지 바친 사람들입니다. 비록
세상에서는 많은 기쁨과 영광을 얻지 못했지만 천상에서는 영원한 생명을
선물로 받았음을 우리는 신앙으로 고백하고 있습니다.
우리 사회를 이끌어가는 고마운 사람들이라는 ‘공익광고’가 있었습니다.
화재의 현장에서 사람들을 구하다 순직한 소방관의 사진도 나왔습니다.
철로에 떨어진 사람을 구하려다가 다리를 절단한 역장님의 사진도
나왔습니다. 가난한 이들을 위해, 노숙자들을 위해서 무료로 진료를 하는
사람들의 사진도 있었습니다. 우리 사회를 이끌어 가는 것은 이렇게 드러나지
않는 곳에서 자신을 희생한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라는 내용의 광고입니다.
우리들은 그분들의 희생과 그분들의 숭고한 뜻을 잊지 않고 기억하겠다는
내용입니다. 세상은 물질, 명예, 욕심, 권력이라는 것을 따라가는 것 같지만
진정 세상을 움직이는 것은 양보, 희생, 인내, 겸손이라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공익광고에서 이야기 하듯이 우리 사회를 진정으로 이끌어가는 힘은 ‘도덕적인
자질, 희생, 겸손, 인내’와 같은 가치입니다. 능력만으로는 사회를 이끌어가기가
힘들기 때문입니다. 운전면허를 따면 누구나 운전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운전하는 사람의 마음에 따라서 차는 우리를 편리하게 하는 운송수단이 되지만
운전하는 사람의 마음이 잘못되면 차는 사람들을 다치게 하는 흉기가 되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성서말씀은 우리가 참으로 따라야 할 가치를 말해 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느님 앞에 나설 때 꼭 갖추어야 할 것들을 제시해주고 있습니다.
첫째는 세상의 것과 하느님이 것이 무엇인지를 식별하는 지혜가 있어야
합니다. 둘째는 참된 지혜는 자신의 십자가를 기꺼이 지고 가는 것입니다.
셋째는 십자가의 삶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저는 복음을 묵상하면서 ‘십자가’를 생각하였습니다. 저는 제가 지고 있는
십자가를 생각하였습니다. 1997년도 IMF 당시에 형은 사업에 실패를 하였고,
그 때부터 제가 부모님을 위한 집을 마련하고 생활비와 병원비를 마련해야
했습니다. 저는 그것을 십자가라고 생각했습니다. 제가 지고 가는 십자가는
세상 사람들의 십자가에 비하면 그렇게 무거운 것도 아니었습니다. 낳아주시고,
길러주신 부모님을 모시는 것은 십자가가 아니고, 당연한 도리이며,
축복이었습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는 십자가의 삶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당부합니다. “그대는 그를 더 이상 종이 아니라 종 이상으로, 곧 사랑하는
형제로 돌려받게 되었습니다. 그가 나에게 특별히 사랑받는 형제라면,
그대에게는 인간적으로 보나 주님 안에서 보나 더욱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그대가 나를 동지로 여긴다면, 나를 맞아들이듯이 그를 맞아들여
주십시오.”
- 서울 대 교구 성소 국장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 [수원]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사랑하려면, 먼저 미워하라
2013년 다해 9월8일 연중 제23주일
< 자기 소유를 다 버리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
복음 : 루카 14,25-33
<사랑하려면, 먼저 미워하라>
정신과 의사 이무석씨 책 ‘30년 만의 휴식’(101-7쪽)에, 캐나다 멕길대학
정신과 교수인 다반루 박사가 한 우울증 환자를 치료한 사례를
소개합니다.
환자는 30대 회사원이라고 합니다. 그는 자신이 매우 초라하고
못나 보여서 견딜 수가 없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는 매우 소심하고
복종적인 사람이었습니다. 의사와 이야기 할 때도 머리를 항상
내리깔고 바닥만 보며 이야기 하였습니다. 목소리도 떨고 있었습니다.
이런 사람의 사회생활은 굳이 이야기하지 않아도 엉망일 수밖에
없습니다.
다반루 박사는 이렇게 묻습니다.
“왜 나를 쳐다보지 못하십니까? 무엇을 두려워하십니까?”
그는 몹시 당황하다가 자기 마음속에 떠오르는 상상을 털어놓기
시작했습니다.
“제가 ... 선생님을 마주 쳐다보는 것은 건방진 행동이에요. 선생님은
화가 나서 저를 ‘버릇없는 놈’이라고 소리 지르실 거예요.”
“그리고요? 그때 당신은 어떻게 하십니까?”
그는 어찌할 바를 모르다 잠시 뒤 울음을 터뜨리며 큰 소리로 자신이
하고 있는 상상을 말합니다.
“저도 화가 나요. 의자로 선생님을 후려쳐 버려요. 선생님의 머리는
박살이 나고 골이 흘러 나와요. 선생님의 눈도 튀어나왔어요.”
그 때 박사가 다시 묻습니다.
“눈은 무슨 색이지요?”
“초록색이요. ... 아! 그런데 선생님의 눈은 초록색이 아니군요. ...”
그는 비로소 초록색에 대한 기억을 떠올립니다. 초록색은 아버지와
관련이 있는 색이었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너무나 엄한 분이셔서 동생과 싸우면 항상 자신만
야단쳤고 몸이 약한 어머니를 무시하고 자주 때렸다고 합니다. 나중에
힘이 생기면 아버지를 반드시 죽이겠다는 생각을 했다고 합니다. 자신을
서재에 불러놓고 한 시간씩 설교를 하곤 했는데, 아버지의 서재에
걸려있던 그림이 초록색이었던 것입니다. 즉 이 환자는 자신이
증오하지만 죄책감으로 자신 속에 묻어 둔 아버지의 모습을 이 의사에게
투영시켜 그의 분노를 표출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런 경우 아버지에
대한 분노가 해결되지 않으면 그것이 어떻게든 다른 이들에게 전이되어
누구와도 편한 관계를 맺지 못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이미 눈에 증오와
죄책감과 두려움 등의 비늘이 씌워져 모든 것들을 비뚤어진 시각으로
보게 되기 때문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짓고 자신의 탓을 이야기하기
보다는 다른 사람에게 그 화살을 돌리게 된 것과 같습니다.
어쨌든 이 환자는 비로소 자신의 문제를 인식하게 되었고 아버지를
이해하려 노력했으며 상태가 하루가 다르게 호전되었습니다. 다반루
박사가 환자를 5년 뒤에 다시 만났는데 그는 사람들 앞에서 당당했고
뛰어난 유머감각이 있었으며 성공적으로 직장생활을 잘 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이 환자가 자신의 문제를 누군가에게 털어놓으려 하지 않았다면 자신을
볼 수 없었을 것이고 그러면 우울증에서 벗어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우리는 누군가와의 관계를 위해 반드시 또 누군가와의 관계를 통해 나를
변화시켜야 합니다. 우리는 본래 완전하지 않고 완전으로 가는 도정에
있기 때문입니다.
‘은밀하게 위대하게’란 영화가 있습니다. 특수 훈련을 받고 남한에 파견돼
바보역할을 하며 임무를 기다리는 김수현이 주인공입니다. 조국을 위해
목숨을 당장이라도 내어 놓아야 하는 훈련을 받았지만 2년 동안 슈퍼에서
일을 도와주며 살아가는 동안 동네 사람들에게 정이 들어갑니다. 특히
무뚝뚝하고 짠순이인 슈퍼 주인아주머니는 자신을 위해 일해 주는 바보
동구(김수현)를 친 아들처럼 여기며 몰래 장가갈 밑천까지 조금씩 저금을
해 놓습니다.
‘바보’, 그 역할은 세상 사람들과 온전한 관계를 맺지 못하는 과거를 지닌
우리 자신들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누군가의 희생을 먹고 조금씩 변화되게
되는 것이고, 온전한 관계를 알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북한에서 더 이상 이 간첩들이 필요하게 되지 않자 스스로 자결하라는
명령이 내려왔지만 동네 사람들의 정에 끌려버린 김수현과 동료들은
죽기를 거부합니다. 과거가 죽으니 살고 싶어 진 것입니다. 결국 조국을
위해서 목숨을 바쳐야 한다고만 쇠뇌 당해왔던 공작원 마음 안에 새로운
무언가가 자라나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써서 먹을 수 없는 죽은 물을 살아있는 샘물로 만드는 이야기가
구약성경에 여러 번 나옵니다. 특히 써서 마실 수 없는 물에 모세가
나뭇가지를 넣어 달게 만들었다는 마라의 샘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
나뭇가지는 바로 십자가를 상징할 것입니다. 십자가의 희생만이
죽어가는 우리를 살아있는 생명수로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예언자 엘리사는 죽은 물에 소금을 넣어 생명의 샘으로 변화시킵니다.
소금 또한 누군가가 물에 녹아 사라지는 희생이 있어야만 그 본성을
변화시킬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마찬가지로 영화에서의 남파공작원들을 변화시킬 수 있었던 힘은 바로
북어 두고 온 어머니를 그리워하는 김수현에게 그 어머니의 사랑을
느끼게 해 주었던 슈퍼 주인아주머니의 사랑과 희생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먼저 미워하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먼저 떠나야합니다.
떠나서 나를 받아주고 사랑해 주는 그 사랑의 원천에서 내가 과거를 털고
새로운 인간으로 탄생해야만 온전한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수준의 인간으로
탈바꿈할 수 있는 것입니다. 먼저 자기 소유를 다 버리지 않으면 당신의
제자가 될 수 없다는 뜻은, 당신처럼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
과거의 모든 것들을 떠나고 버릴 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손과 발이 없지만 희망의 전도사로 활약 중인 닉부이치치의 결혼
이야기는 참 재미있습니다. 그의 불구는 누구도 자신을 좋아하지 않을
것이라는 자멸감을 가져다주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만나고
나서는 그렇게 태어난 것도 주님의 섭리가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스도를 받아들이고 변하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는 자신의 처지로서는 어림도 없는 미녀를 좋아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녀는 이미 사귀는 남자가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부이치치는
밀어붙입니다. 그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지금부터 1년 동안 우리 서로 연락을 하지 맙시다. 이메일도 전화도
문자도 하지 맙시다. 그리고 1년이 지난 뒤에도 우리 사랑이 줄어들지
않는다면 하느님이 뜻으로 알고 함께 합시다.”
1년이 지나도 그들의 사랑은 줄어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결혼까지
이르게 되었고 아이까지 갖게 되었습니다.
부이치치는 먼저 하느님께 다가갈 줄 알았고, 또 모든 인연을
하느님께 맡길 줄 알았습니다. 먼저 떠날 줄 알 때야만, 먼저 하느님께
향하기 위해 내가 좋아하는 것을 내려놓을 줄 알 때야만, 참다운 관계,
영원한 사랑이 가능해 지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나에게 오면서 자기 아버지와 어머니, 아내와 자녀,
형제와 자매, 심지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 수원 교구 오산 성당 전삼용 요셉 신부 -
◈ [수도회] 더 큰 바다로 나아가기 위해서
2013년 다해 9월8일 연중 제23주일
"자기 소유를 다 버리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루카 14,25-33
더 큰 바다로 나아가기 위해서
수도생활, 봉헌생활도 시대의 변화와 함께 과거와는 양상이 많이
달라졌습니다. 과거 수도생활 하면 즉시 떠오르는 단어들이 세상과의
결별, 고행, 극기, 보속, 기도 등등이었습니다. 약간은 울적한 회색빛깔을
지닌 삶이었다고나 할까요?
그러나 현대의 봉헌생활에서 더 강조되는 요소들이 있습니다. 친교,
기쁨, 형제애, 세상에 대한 가치 부여, 세상을 위한 적극적인 헌신
등등입니다.
혈육으로 맺어진 부모형제들에 대한 생각도 이젠 많이 달라졌습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수도회 입회하면 이제 가족과는 끝이구나 생각들
많이 했습니다. 그러나 많은 경우 더 이상 그렇지 않습니다. 전보다 더
굳은 영적 유대 속에 혈육으로 맺어진 부모형제에 대한 사랑도 많이
강조되고 있습니다. 너무나 당연한 일이고 바람직한 일입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건네시는 이 말씀, “누구든지 나에게 오면서
자기 아버지와 어머니, 아내와 자녀, 형제와 자매, 심지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예수님의 말씀을 문자 그대로 해석하면 그분의 제자가 되기 위해서는
부모형제를 헌신짝처럼 버리라는 극단적인 말씀, 어떻게 생각하면
예의도 뭣도 없는 사람의 말처럼 여겨집니다.
그러나 사실 강조점은 다른데 있습니다. 보다 적극적인 해석이
필요합니다. 하느님께 보다 많은 우선권을 두라는 강조말씀입니다.
이 시대 사방을 둘러보면 참으로 안타까운 일 한 가지는 하느님의 자리가
점점 축소되고 있는 현실입니다. 하느님께서 점점 역사 뒤로, 무대 뒤로
사라져가는 느낌입니다. 서구의 경우 가톨릭 재단에서 운영하는 많은
학교 교실에서 십자가를 떼라 마라 계속 논란중입니다. 너무나 편안히
그어오던 성호 한번 긋기가 어려워졌습니다.
더 나아가서 수도자들의 일상생활 안에서도 하느님 이야기, 신앙
이야기가 점점 사라져만 갑니다. 하루 가운데 하느님을 생각하고
만나고 대화하는 시간, 하느님과 함께 보내는 시간은 급격히 줄어들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다시 한 번 회복해야 할 삶의 태도가 ‘하느님께 우선권’을
두는 생활방식입니다. 물론 세상의 모든 것들이 다 의미가 있고 가치가
있고 아름답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들은 하느님께서 몸소 지으신
피조물들입니다. 하느님 보다 더 우위에 있어서는 안 될 대상들입니다.
하느님께 우선권을 두는 삶을 지향한다면 꼭 우리가 취해야 할 필요한
한 가지 요소가 있습니다. 바로 포기입니다.
“너희 가운데에서 누구든지 자기 소유를 다 버리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우리가 이 세상 살아가면서 모든 것을 다 선택할 수 없습니다. 모든
것을 두 손에 다 쥘 수가 없습니다. 더 큰 선, 더 큰 아름다움, 더 큰
가치를 선택하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취해야할 태도는 기존에 우리가
지니고 있던 것들에 대한 과감한 포기입니다.
큰 바다로 나아가기 위해서라면 반드시 작은 시냇물을 포기해야 합니다.
더 크고 맛있는 사과를 쥐고 싶다면 그 전에 쥐고 있는 작은 사과를
던져버려야 합니다. 이렇게 성장하고 변화하는 삶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포기는 본질적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봉헌생활, 수도 생활하는 사람들에게
있어 포기는 너무나도 당연한 일상적 과제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 포기는 슬프고 안타까운 일이 절대로
아닙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가치 있고 가장 아름다운 대상이며 모든
것을 다 주고 바꾸어도 아깝지 않은 예수 그리스도를 선택하고 그분을
따르기 위한 것이므로 정말 기쁜 일이며 행복한 일인 것입니다.
우리의 하느님은 사랑과 자비의 하느님이기도 하지만 때로 무서울
정도로 질투하시고 우리에 대한 욕심이 끝도 없으신 분입니다. 그런데
그 질투와 욕심은 바로 우리를 위한 것입니다. 우리 영혼의 구원, 우리
삶의 아름다운 결론인 영원한 생명을 위한 질투요 욕심인 것입니다.
적당이가 아니라 모든 것을 바쳐서 당신을 추종하기를 원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완전히’ ‘절대’를 요구하십니다. 이런 하느님의
요구에 적극적으로 응답한 사람들이 바로 사제요 수도자들인 것입니다.
- 살레시오회 한국 관구 부 관구장 양승국 스테파노신부 -
◈ [서울] 올림픽 경기 종목 '인생살이'
2013년 다해 9월8일 연중 제23주일
올림픽 경기종목 ‘인생살이’
공짜를 좋아하면 대머리 된다는 말이 있는데 아마 비하된 말이겠지요.
아마 몇 십 년 전까지 공짜 좋아한 얌채들 중 대머리가 많았나봅니다.
세상 대머리가 되어도 공짜 좋아하겠지만 하늘나라엔 공짜 없다 합니다.
하늘나라 영원세상에는 십자가를 진 노력의 공(功勞)이 재산입니다.
세상 것들을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여 비우고 버릴 때도 마찬가지고요.
하늘나라 차지는 올림픽 경기종목 ‘인생살이’라 보면 맞을 겁니다.
“누구든지 제 십자가를 짊어지고 내 뒤를 따라오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루카 14,27)”
- 이기정 사도 요한 신부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