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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주년을 맞는 12.12 군사 반란 사건의 재조명:(2)ᆞ
다시보는
12.12 군사반란 사건
1979년 12월 12일에 있었던 군인들간의 총격 사건은 전두환과 하나회의
군인들에 의해 저질러진 군사반란 사건이었습니다.
당시 '합동수사본부장'을 맡고 있던 전두환 보안 사령관은 육참총장이자
계엄 사령관인 정승화를 대통령의 재가없이 보안사로 강제 연행함으로써
정국의 주도권을 쥐며 단숨에 국가최고의 실세로 군림하게된 사건입니다.
박정희 대통령 저격 사건이 불과 두 달도 채 되지 않아 벌어진 사건이기에
국민들은 숨돌릴 시간도 없이 긴박한 국가위기의 상황을 가슴 졸이며 지켜
보아야 했습니다.
국가의 안녕보다는 개인의 야욕과 욕망을 채우려는 군인들과 우리 사회의일개 덜떨어진 지도층인사의 한심스러움을 시종일관 침묵으로 지켜보았던
국민들의 심정은 어떠했을까요? 그 시대 정치권에 몸 담았던 정치인들의
비겁한 침묵은 또 어떠했을까요?
1979년 11월 6일 전두환 합동수사본부장이 수사결과를 발표하고있다.
뻘쭘히 쳐다만 본 대한민국의 모든이들의 반성과 함께 어떻게해야 진정한
애국인지 우리들의 국가 위기 대처능력을 상기하기 위해서라도 이 사건은
역사속에 묻혀버리면 않될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12.12군사반란사건이 일어나기 한달여 전에 정승화 육참총장과 전임 전성각 소장이 장태완 신임
수경사령관과 이취임 축하연을 가지고 있다.
필자인 묵은지는 그 당시 교육전문지인 모 신문사의 잡지 파트에서 편집
일을 하던 햇병아리 시절의 기자였습니다. 필자는 초임시절인 80년대초,
서울시청 2층에 위치한 언론 검열단 사무실에서 출판물 검열을 받기위해
줄을서던 무기력하고 영혼없는 기자 시절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권력층에서 비 상식적인 말도 안되는 일이 수없이 자행되며 많은 사건이
벌어지기도 했던 그 시기, 그런 시대를 살아 숨쉬었던 한 초년의 기자가
바라본 격변의 현장은 충격 그 자체 였습니다.
1979년 11월 20일 신임 수경사령관인 장태완 소장(가운데)이 청와대 외곽 진지에서 33 경비단장인
김진영 대령(왼쪽끝)으로부터 경계상황을 브리핑 받고 있다. 이들은 이로부터 불과 20여일 후 서로
상하관계에서 적으로 돌변하는 운명을 맞게 된다.
지금까지도 매년 12월을 맞이 할 때마다 기억되는 그 시절 사건들은 점점
기억속에서 희미해져 가고있는 60이 넘는 필자의 나이가 되버렸지만 이번
기회에 이 사건을 재정리하여 모든이들과 더불어 기억하고 앞으로 나라를
위해 살고자 하는 후손들이 진정으로 어떻게하고 살아야 할지를 생각하게
하기 위한 다짐의 기회로 삼았으면 합니다.
계엄령과 함께 계엄군이 광화문 중앙청(경복궁 자리)앞에 중무장을 하고 경비를 서고 있다.
1979년 12월 12일. 전두환,노태우와 하나회 위주로 조직된 신군부 세력
들은 당시 최규하 대통령의 재가 없이 불법적으로 계엄사령관인 정승화
육참총장과 이에 반발하는 일부 장성들을 불법 체포했습니다.
그렇다면 왜 이들은 계엄사령관을 불법 체포를 해야 했을까요? 그 급박
했던 전후 상황을 알아보기로 하지요.
10.26 저격 사건 이후 수경사령관에 임명된 장태완 소장이 부임 나흘만인 11월 20일 청와대를 지키는
수경사 33경비단을 초도 순시하여 단장인 김진영 대령으로부터 부대 현황을 브리핑 받고 있다.
이로부터 3주후 이들은 서로에게 총을 겨누는 적대관계가 되버렸다.
전두환의 군 생활은 일찌기 박대통령으로부터 특별히 많은 특혜와 총애를
받으며 지냈습니다. 하나회의 주역으로써 인정을 받기도 했지만 군에 대한
특별한 애착을 가진 박대통령의 마음에 전두환의 스타일이 그리 싫지만은
않게 보였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더군다나 전두환은 경호실장 차지철의 절대적 신임을 받고있어 준장시절은
거의 청와대 경호실의 작전차장으로 지냈습니다.
박정희 정권이 말기에 가까워진 1976년 12월, 경호실장 차지철은 군 장성들을 경호실에 거느리면서
위상을 과시했다. (가운데가 차지철 경호실장, 맨 오른쪽이 작전차장보인 전두환 준장이다.)
그 후 소장으로 진급한 전두환은 엘리트 필수 코스인 전방 지휘관 경력을
쌓기위해 1사단장으로 잠시 1년여 정도를 자리에 앉더니 바로 운명의 그
자리인 보안 사령관에 영전을 하게 됩니다. 모양으로 보면 이런 전두환의
출세길은 실로 놀랍고 화려한 군 엘리트 코스의 쾌속 드라이브입니다.
육군 소장 시절의 전두환
이렇게 군에서 최고의 대우를 받으며 승승장구한 전두환은 다른 동료들
이나 선 후배들에게는 선망의 대상이 되었을겁니다.
그러나 결국 군의 주요보직 가운데 꽃이라 불리운 보안 사령관의 자리를
차지한 전두환에게 그의 운명을 가르는 그 날은 다가오고 말았습니다.
김재규에 의해 일어난 10.26 대통령 저격 사건은 실로 국민들에겐 엄청난
충격의 사건이었습니다. 나라 전체가 졸지에 대통령이 저격 당했고 더욱
충격적인 것은 자신의 부하에게 죽임을 당했다는 놀라움과 함께 앞으로
다가올 국가 안위의 불안함으로 나라 전체가 술렁이고 있었습니다.
합동수사본부장으로써 대통령 저격 사건의 수사를 맡은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수사 상황을 발표하고 있다.
보안 사령관으로써 대통령 저격 사건 수사를 맡아 '합동수사본부장'이된
전두환은 막강한 권한이 제발로 찾아들게 되자 위세가 등등해져 수사를
핑계로 군 내부 문제에 간섭은 물론 정치 문제도 관여하기 시작했습니다.
상관인 정승화에게 주제넘은 정치 관여로 심하게 꾸지람을 듣기도 했고
군 인사 문제를 분별없이 거론하다 미움을 사기도 했습니다.
더군다나 수사 문제로 사사건건 상관인 정승화 계엄 사령관과 마찰속에
지내니 눈에 가시가 될 것은 자명한 일입니다. 이에 전두환은 정승화에게
어떤 꼬투리라도 잡아 반드시 제거하려는 결심을 하게 됩니다.
반대로 정승화 역시 번번히 대드는 전두환이 곱게 보일리가 만무합니다.
최규하 대통령 권한대행이 서명한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의 계엄 사령관 인사 발령안
한편, 군 내부에서도 계엄 사령관으로써 사실상의 국가 최고 권력자가 된
정승화 육참총장은 우선 군부내의 인사 조치부터 단행하였습니다.
일각에선 이때 정총장이 자신과 수시로 삐꺽 거리기만 하는 합수본부장
전두환을 동해경비사령관으로 좌천 시킨다는 소문이 나돌았는데 이것이
군사반란의 빌미가 되지 않았나 생각되기도 합니다.
박정희 대통령은 경호실에 친위세력의 든든한 힘을 실어 주었으며 결국 이것이 김재규와의 불화를 불러
일으켜 본인도 저격을 당하는 신세가 된다.(오른쪽부터 차지철 경호실장,전두환 준장 경호실작전차장보,
박정희 대통령,문홍구 중장 경호실차장,전성각 소장 수경사령관)
한없이 높아진 자신의 권한에 거침이 없던 전두환 합수본부장은 급기야
감히 자기의 상관인 정승화 계엄 사령관을 대통령 저격사건 당시 현장에
머물러 있었다는 사실을 빌미삼아 김재규와 연관시켜 가담,협력자로 엮어
체포할 궁리를 하고 있었습니다.
결국엔 11월 중순, 유학성 중장(국방부 군수 차관보),황영시 중장(1군단장),
차규헌 중장(수도 군단장),노태우 소장(9사단장) 등과 12월 12일을 기해서
정승화 계엄 사령관을 체포하자며 거사일을 모의한 후 하나회를 주축으로
박준병소장(20사단장),박희도준장(1공수여단장),최세창준장(3공수여단장),
장기오준장(5공수여단장) 등을 포섭해 나갔습니다.
12.12사태 다음 날인 12월 13일 군인들을 실은 한 때의 트럭이 시내 도로를 지나는 모습.
때마침 12월11일은 군 장성 진급 심사가 발표된 날로 그 다음날인 12일은
여기저기 장군 진급자 주변의 주요 지휘관들이 축하 회식으로 부대를 거의
비우게 된다는 점을 이용하여 비교적 손쉽게 거사를 성공시키기 위한 계산
으로 아주 치밀하게 잡은 날이었습니다.
12.12군사반란의 핵심 인물들이 보안사에 모여서 찍은 사진.
드디어 12월 12일 저녁, 보안사 인사처장 허삼수 대령은 육본 범죄 수사
단장인 우경윤 대령, 헌병감실 기획과장인 성환옥 대령, 총장공관 경계를
맡은 경비 책임자인 이종민 중령과 7명의 보안사 수사관, 33헌병대 병력
50여명을 2대의 승용차와 2대의 마이크로 버스에 태우고 계엄 사령관을
강제 연행하기 위해 한남동 육참총장 공관으로 향했습니다.
총장 공관에서 방어적 저항으로 한바탕 총격전이 벌어졌지만 주도면밀한
반란군에게는 적수가 되지 못했습니다. 결국 정승화 계엄 사령관은 이들
에게 이끌려 보안사 서빙고 분실로 강제 연행되고 맙니다.
전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이자 계엄사령관이 군사재판을 받기 위해 법정에 들어서고 있다.
이때 계엄 사령관의 연행을 두고 저항할지도 모르는 정병주 특전사령관,
장태완 수경사령관, 김진기 육본 헌병감은 보안사 허화평에게 유인되어
연희동 요정의 연회에 초대됩니다. 연회중 계엄사령관을 연행한 사실이
전해지자 연회에 참석한 장성들은 격노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미 때는 늦었습니다. 박희도 준장과 장기오 준장이 이끄는 공수
부대원들에 의해 국방부와 육군본부 역시 무력화된 뒤였기 때문입니다.
군인들이 한남동 총장공관 입구를 바리케이트로 막고있다.
이 당시 미군의 상황은 어떠했을까요? 미 8군 벙커에는 미리 피신해 온
노재현 국방 장관과 위컴 한미연합사령관, 글라이스틴 주한 미국 대사,
유병헌 한미연합사 부사령관, 김종환 합참의장 등이 모여 전전긍긍하고
있었습니다. 위컴 사령관은 9사단장인 노태우소장이 전방을 지키고 있던
9사단 병력을 자기 마음대로 빼내어 서울로 출동 시켰다는 보고를 받고
놀라움을 금치 못하며 격노했다고 합니다.
위컴 한미연합사령관
위컴은 유병헌 한미연합사 부사령관과 김종환 합참의장에게 즉각 자신의
차를 내주며 국방부로 가서 상황을 정리해 줄 것을 요구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뒤이어 국방부로 들이닥친 1공수여단 소속의 공수 부대원에 의해
제압 당하고 말았습니다.
이때 총소리에 놀란 노재현 국방 장관은 지하로 내려가 숨기에 급급했고
망연자실 소파에 앉아있던 유병헌,김종환은 곧바로 무장해제가 되어 체포
되었습니다.
12.12군사반란을 성공시킨 전두환은 초고속 승진을 한다.
물론 그 당시 일부 올바른 생각을 가진 군 지휘관들의 용기있는 행동은 높이
평가를 하지만 결국 소수의 반란군 앞에 무기력하게 무릎을 꿇는 우리 군의
모습을 과연 우리 국민들은 어떻게 생각을 하고 무엇을 기대했을까요?
당시 계엄사령관까지 올랐던 가담자 이희성의 고백.
군사반란을 성공시킨 신군부 세력들은 곧장 최규하 대통령에게 사후 승인을
받기 위하여 갔지만 거절당하고 맙니다. 할수없이 이들은 국방장관 노재현을
앞세워 재차 재가를 요구하여 결국 최규하 대통령은 13일 새벽 육참총장이자
계엄사령관인 정승화를 연행하는데 사후 재가를 해주고 맙니다.
이 재가를 시작으로 신군부 세력들은 급속도로 권력이 강화되며 모든 것을
장악하고 5공화국을 만들어 가는 일에 박차를 가하게 됩니다.
하나회를 주축으로 결속된 신군부 세력들은 제5공화국을 만들고 당당하게
중심세력으로써 표면에 등장하였습니다.
전두환, 노태우는 대한민국의 대통령 자리를 차례로 나눠 가지면서 권력의
기쁨을 원없이 구가하였습니다. 얼마나 행복하고 꿈 같았을까요?
서울 삼청동 전 중앙교육연구원 청사에 설치한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국보위)에 국보위원장인
전두환이 박충훈 국무총리 서리,이희성 계엄사령관과 함께 현판식을 하고 있다.
전두환과 노태우가 대통령으로 재임한 1993년초기까지의 '12.12 사태'는
그들에 의해 정당화 되었었지만 이 후 들어선 문민정부인 김영삼 정부는
하극상에 의한 '군사쿠데타적' 사건으로 규정 지었습니다.
글쎄요 그렇게라도 했다니 다행입니다만 그들은 이미 권력으로 십여년을
넘게 이 나라를 통치하였습니다. 마치 무능한 국민을 앞에두고 자기들은
승리의 잔을 쳐들고 히히덕 거리며 희롱이라도 하듯이 말입니다.
1980년 5월 17일 밤 임시국무회의가 열린 세종로 정부중앙청사(옛 중앙청) 회의장 주변에 무장한
수경사 병력이 1~2미터 간격으로 서 있다.
누군가가 나서서 목숨바쳐 당당하게 맞서며 잘못됨을 꾸짖고 나무라며
싸웠다면 감히 그들이 나중이라도 그렇게 당당할 수가 있었을까요?
그때 그들의 그늘아래서 정치를 하던 이 나라의 애국자(?)들이 지금도 건재
하며 애국을 논하고 있습니다. 이들이 자신들의 부끄러움을 모르고 버젓이
큰소리치고 살고있는 이상 이젠 제 자신부터 국가를 위해 분연히 목숨걸고
나설수가 있을지 의문입니다. 그저 온 몸이 오그라들며 부끄러울뿐입니다.
이런 시절도 있었다. 정병주 특전사령관이 여유있게 팔짱을 낀채 참모와 같이 부동자세로 열심히 보고를
하는 전두환 제1공수여단장의 말을 듣고 있다.
전두환, 노태우와 거사를 함께한 군사 쿠데타의 주범들.
정호영,박준병,유학성,최세창,허화평,허삼수,이학봉,장세동(왼쪽 위부터 시계방향으로)
12.12 쿠데타 과정에서 희생된 고 김오랑 중령의 묘역.(서울 동작구 국립현충원 29번 묘역)
이 곳에서 같이 희생된 정선엽 병장,박윤관 상병에 대한 추도식이 매년 12월 12일에 함께 열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