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실역 1번 출구 버스 정류장
김명
그러니까 목적지가 용인인 내가 잠실역으로 가게 된 건 의학적으로 보면 알츠하이머형 치매나 혈관성 치매 등으로 몰아붙이는 입 빠른 그들 말이 맞아서가 아니고 순전히 건망증이랄까 공상이랄까 를 하다가 차선을 잘못 타고 치열하게 끼어들지 못하고 하는 느슨함 때문이다
그러니까 그렇게 낯선 길을 돌고 돌고 하다가 잠실역 1번 출구 앞 버스 정류장에서 그녀를 본 것은 순전히 내 눈이 좋아서가 아니라 이른 새벽 출근하는 사람이 한가했고, 그때 바람이 조금 불었고, 지하 출구를 막 올라온 치마 밑단에 매달려 살짝살짝 흔들린 레이스를 따라간 것뿐이다
그러니까 바람이 문제이다, 레이스가 문제이다, 1번 출구가 문제이다, 정류장에 정차한 버스 때문에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한 참을 그렇게 있는 차가 문제이다
그러니까 잠실에 바람이 불었다. 지하철역 1번 출구에서 불쑥한 솟구친 그녀를 휘휘 휘감고, 용인으로 가야 할 눈은 새벽 버스 정류장에서 꽃잠을 자다가 꽃꿈을 꾸었다
-시선 2010년 가을호-
빗방울
빗방울이 달려온다
빗방울이 천장에서 노크하는 동안
바람은 유리문을 열고 들어온다
비릿한 당신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는다
잘 썰어 다진 고기와 야채를 넣고 어제 만난 이야기를 씹는다
당신이 허공에 푹푹 빠진다
슬픔은 남아 있는 이들의 몫이라고 빗방울은 훌쩍거린다
레몬쥬스가 담긴 유리잔이 쨍그렁거린다
이제 그만 집으로 돌아갈 시간 포크와 냅킨을 휴지통에 던져버리고
굿바이
내 몸을 수색하는 당신은 별이다
세 개의 별을 화장실에 꽁꽁 묶어놓고 하지 못한 말이 두리번거리다 설거지통에서 접시를 탄다
유리창 안에서 당신이 손을 흔든다
굿바이
내일 찾아오는 바람은 차양을 탁, 탁 두드리고
빗방울은 동그랗게 사라진다
- 시선 2011년 여름호 -
악어
장롱 속에 악어 한 마리 누워 있다
그 종(種)이 에르메스 벌킨*인지 다미아나*인지 길거리표 인지
등가죽에서 푸르게 빛이 난다
안개가 희미하게 남겨진 습지에 웅크린 몸은 가만히, 천천히 움직이는데 새벽이면 그 느린 파동이 들린다
아마존을 어슬렁거린다
세렝게티 초원을 거닌다
문명이 들어서고 악어는
뉴욕에,
빠리에,
서울 변두리 재래시장에
생존의 영역을 넓혔다
그중의 한 마리가 십오 년 된 장롱 속에서 숨을 쉬고 있다
육촌인지 팔촌인지 먼 오빠의 아들 결혼식 그녀의 까칠한 손이 악어에 끌리어 길을 나선다
이억 이천만 년을 살아온 가죽이 햇살을 받아 탱탱하다
- 『열린시학』2011년 여름호
전설
큰 인물이 난 마을에는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이야기가 있는데요 누가 어떻게 만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요 그 출발지가 뒷산 연못이라고도 하구요 어떤 이는 봉우리에 뱅뱅 꼬여선 소나무라고도 하구요 어떤 이는 부엉이 모양 생긴 저 바위라고도 하구요 동네 사람들은 그냥 그런가 보다 하고 그렇게들 살았는데요
경상도 부엉이 마을에도 그런 거룩한 바위가 있는데요 산 좋고 물 좋은 첩첩 산골에 사람 좋은 총각이 살았는데요 동네 꼬마들이 바부바부 놀리기라도 하면 해맑은 미소만 히~죽 띄우는데요 별들도 잠이 든 오월 어느 날 사냥꾼이 쳐 놓은 올무에 걸려 밤새도록 자귀나무 아래에서 몸부림을 쳤는데요 부엉이는 부엉부엉 우는 깊은 밤이었고요 하늘에 별들도 사라지고요 찔레꽃잎이 뚝, 뚝 지는데요
총각이 붉게 지던 그날 밤부터 마을에 부엉이가 살지 않았다는데요 항간에는 해가 봉우리를 넘어갈 때 바위에 부엉이 그림자가 깃든다고도 하구요 부엉부엉 슬픈 노래를 불렀다고도 하구요 비가 오는 날이면 가끔 소나무 위에 앉았다 날아가곤 한다는데요 그런 날이면 자귀나무 주변에 흐드러진 찔레꽃이 붉게 물든다는데요
ㅡ『시에 』2010, 가을호
내 시를 다 써먹었다
김 명
인터넷카페에서 그녀를 만났다
킬리만자로의 하이에나처럼 이곳저곳을 어슬렁거리다가 얼마 전 유명문예지로 등단한, 철물점을 경영하는 그녀를 만났다. 첫 발자국에 등(燈)이 밝혀지고 “철물점 여자 홍정순 인사드립니다.” 한다. 편안한 미소로 한 상 크게 차려 쐬주도 권한다. 제대로 하는 신고식이다. ‘오시면 드실 수 있는 음식’을 보다 답글을 올리니 꼬리에 대강 막걸리가 달렸다. 횡재다, 대강대강 만든다는 유명상표 ‘대강막걸리’라니
그녀의 시를 본다. 장갑, 빠루, 철물점 여자, 고무다라 공사현장에서 쓰는 연장이다, 궁리하던 문맥을 뚫은 송곳이다 벼락같은 우주의 기운*을 받고 땅을 여는 연장**이 영검한 문명이다
‘노가다’판에서 이십 년을 넘게 보낸 초보 시인이 제일 잘하는 일상을 시로 쓰려는데 그 내공이 무르익기도 전에, 술 꼬장 하듯 주저리주저리 펴기도 전에, 내 영역의 용어들을 원로시인이, 중견시인이, 철물점 그녀까지 다 써 버렸으니 신작시가 나올 때마다 떨리는 아차, 한발 늦었구나!
내 연장, 내 밥그릇, 내 시
* 윤관영의 시 「피뢰주 서다」에서 빌림.
** 정진규의 시 「삽」에서 빌림.
―『시에티카』 2010년 하반기 제3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