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영화는 케빈 스피이시의 영화라는 데에는 이의가 없을 것이다. 적어도 그 없이는 불가능한 영화가 아니었을까. 유주얼 서스펙트와 아메리칸 뷰티, 세븐등에서의 그의 마스크는 소시민의 그것이지만 너무나 부드러운 고무같은 감촉밖에 느껴지지 않는 표면은 그 뒤에 숨겨진 음울한 무언가를 끊임없이 의심하게 한다. 이 작품에서도 스피이시는 전부터 만들어왔던 자신의 마스크에 빠져든다. 그러나 이번에는 자신의 얼굴만으로 120분의 무게를 지탱해야 했고 철저하게 비어 있는 캐릭터를 만들어내야 했다.
케이 팩스의 결말에 대한 사람들의 분분한 의견들은 어찌보면 동일한 대답들이다. 프롯(스피이시 분)이 결국 외계인이었다느니, 인간 프롯의 몸에 외계인 프롯이 잠시 머물렀다 떠난것이라느니, 이런 의견들의 옳고 그름은 미루어두고 싶다. 영화의 미궁 속에서 헤매고 싶다면 끊임없이 헤매고 싶은 것이 내 취향이니. 막힌 길 두개를 두고 이것이 마지막이라고 다투는 것은 의미없지 않은가. 정신과 의사와 환자(그 자신이 환자라는 병식이 있건 없건 정신과의 분류체계 내에선 환자임이 틀림없다.)가 등장하긴 하나 이 영화에선 통상적인 이원화, 위계질서는 금방 허물어지고 만다. 두개의 다른 결말을 가능하게 하는 뫼비우스의 띠같은 구조는 우리가 시작점부터 무의식적으로 현실에서 권위자, 권력을 가진 자인 마크 편에서 있기 때문이 아닐까. 프롯은 정신병자이기 이전에 이미 서스팬스의 대상인 타자이고 외계인이다. 그렇기에 난 프롯을 위해서 몇가지 질문을 던져보겠다.
현상만을 놓고 본다면 프롯은 망상장애 환자이다. 자신이 외계인이라고 생각하는 그는 지구의 빛이 너무 밝아 선글라스를 벗을 수 없다고 하며 자신의 별과 삶에 대해 마크에게 자세히 이야기해준다.(조직적이고 체계화되고 논리적이며 주변사람과 잘 어울리는 등 사회적 행동에는 지장이 없으며 일관되고 따뜻한 인격을 유지하고 있다는 점에서 프롯은 망상장애의 기준에 부합한다.) 면담을 토대로 마크는 그가 환자라고 진단하고 그의 망상이 헛된 것임을 일깨우기 위해 계속 ‘듣는다.’ 하지만 마크가 자신의 판단의 근거로 삼은 것이 정말 프롯의 이야기일까? 정작 프롯이 말한 것의 내용은 그의 별에 관한 구구절절한 이야기들이라 해야하지 옳지 않을까. 진단의 원칙상 의사의 관심사는 언표의 내용이라기보다는 그림자처럼 따라붙는 언표의 형식, 외연정도가 아닐까 싶다. 예를 들면 환자가 표현한 것들과 일반적인 기준과의 양적 비교(차이 정도에 기반을 둔.)나 표현 집합체의 양식적 분류(뭐가 동반되거나 배제되고 지속되거나 주기를 두고 등등의.)같은 것들. 환자가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방어기전으로서의 증상, 끊임없이 의미를 발하며 현실과 얽혀있는 그것에 마크는 눈길을 주지 않는다. 하지만 비교와 양식의 문제, 혹은 분자과학에 입각한 물리적 인과과정이 합리적이라 할지라도 증상이 해석되어야 하는 한, 최소한의 단위로서의 의미체는 전제되어야 한다. 그러나 불안, 생각, 정동, 지속등등의 단어들은 결국 일상적인 의미에서 시작하고 관습에서 유래한다. 어디까지나 인용일 수 있고 백과사전식의 순환해석에 빠지기 쉬운 연약한 기반은 그래서 내겐 순수한 형식으로 비추어진다. 형식과 범주로 타자를 얽어매고 소외시키는 푸코식의 권력개념을 빌어올 의도는 없지만 증상이라는 이야기를 틀과 격자로 밀어넣는마크의 진단이 합리적인가. 마크가 계속 ‘듣는’ 이유또한 그에게는 이야기가 없기 때문이 아닐까? 이것이 첫 번째 질문이다.
두 번째 질문은 모양새에 관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진단은 결단이며 따라서 정보의 경중을 판단해가며 들어야 하는 건 필연적이다. 정신과 의사의 분신으로 각인된 녹음기와 프롯의 감정표출에 집중된 관찰, 최후의 수단으로 사용하는 최면술등에서 마크는 일상적이고 딱딱한 문자같은 표현보다는 정동이 묻어있으며 때론 무의식이 분출하기도 하는 음성형식의 표현에 치중하고 있다 . 그리고 프롯의 예기치 않은 반응에 집착하며 실체가 있건 없건 정체를 밝히라고 점점 몰아세운다. 어찌보면 원인을 헤쳐가는 분석가는 탐정이라 할 수 있으나 마크의 자세는 셜록 홈즈라기 보다는 경찰의 그것이다. 마크에게 치료의 순수한 의도가 있는가?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극복하고 돌아온 아버지. 이것이 나에게 남겨진 마크의 이미지이다. 하루종일 환자들과 상대하지만 진작 자신은 의붓아들에게서 끝없이 도망치는 마크는 가족이 와해되고 있는 현대의 삶 속에서 아버지없이 자란 또다른 아들의 모습이다. 그가 남성성을 되찾고 아버지의 권위를 보상받을 수 있는 곳은 환자를 보살피는 정신과 의사로서의 외면에서이다. 그러나 피곤하고 피상적이지만 일견 완전해 보였던 마크의 생활에 난데없이 그 자체로서 완전무결한 프롯이 등장한다. 평온, 자신감, 환함과 부드러움의 결정체같은 프롯은 프로이트의 원초적 어머니, 실재같은 존재이다. 그 또한 간절히 바라지만 그의 손에 의하지 않으면 용납할 수 없는 완전성 앞에서 불안에 빠진 마크는 프롯에게 자신이 환자임을 인정하게 만들기 위해 점점 신경질적이 된다. 그러나 그의 시도들은 실패하고 어느새 환자들까지 감화시키는 프롯에 자신또한 동조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클라이막스에서 프롯이 사라질지 아닐지를 그 누구보다 궁금해하는 마크의 모습은 이미 양가감정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강박증의 그것이다. 결국엔 인간 프롯의 결점을 찾아내고 그의 과거를 재구성해내기에 이르지만 그 과정은 자살을 막기 위한 의도만으로 보기엔 지나치게 흥분되어 있고 원인찾기에 집착을 보인다. 프롯의 불완전함을 증명하는 과거를 찾아내고 마크가 느끼는 안도감은 프롯을 상상적으로 처단함으로써 이루어진 것이 아닐까. 다시 권위를 되찾은 그는 프롯을 나이와 치매로 퇴화된 어머니처럼 휠체어에 앉히고 끝까지 보살피겠다고 맹세한다. 완전무결한 프롯이 사라져 되찾은 권위는 다시 프롯을 양아들로 삼음으로써 확신에 이른다. 마지막 장면에서 양아들과의 관계를 회복하는 모습에서 마크는 자신감에 차있다.
한꺼풀 벗겨보면 케이 팩스의 환자 의사관계는 일종의 권력투쟁을 연상시킬 정도로 치열하다. 하지만 시종일관 프롯이란 캐릭터는 빈자리이다. 마크와 주변인물들은 프롯에 의해 얽혀지고 풀어지지만, 갈등이 시작되고 해소되는 것은 마크에게서만 일어난다.(이 이야기는 마크의 것이다!) 증상이 나타나는 근원, 욕망의 근원은 결국 자기 자신 내부의 빈자리 때문이다. 빈 곳, 구멍을 보면 채워넣고자 하는 심리, 그건 완전함에 대한 소망일 수도 있으나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무엇-또다른 완전함에 대한 불안감때문일 수도 있다.
그렇다면 마크가 승리자인가? 관점에 따라서 다르겠지만 모두가 행복해지고 모두가 승리하게 되는, 결말만큼은 진정한 헐리우드 가족 영화라고 보아도 무방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