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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배구선수 인석이
堂井 김장수
배구 신동
배구선수인 대암(大巖) 김인석은 2001년 7월 29일 서울 영등포구 대림동에서 태어났는데, 태어난 지 3개월에 아버지는 병으로 돌아가시고 다리를 저는 홀어머니와 같이 생활하고 있었다. 어려서부터 가난했던 그는 배구선수라는 꿈을 꾸고 있었는데, 그래서 가난에서 벗어나고 싶어했다. 워낙 가난해서 남들 다 하는 외식을 한 번도 한 적이 없었다. 일터에 나가시는 홀어머니는 저녁 늦게야 집에 돌아오셨다. 아침과 점심은 콩나물과 김치(주말이나 방학 때는 그거라도 먹지, 학교에서는 급식을 먹었다), 저녁은 라면을 먹었다. 그것도 혼자서. 왜냐하면 전에 말했듯이 일터에 나가시는 어머니는 아들에게 맛있는 반찬 해 줄 겨를이 없으셨기 때문이었다. 그것을 아는 인석은 어머니께 대들거나 운 적이 없었다. 자신의 가난을 잘 알기 때문이었다. 그 때문에 인석이 다니던 학교에서 먼 동네로 이사를 갔는데, 시에서 도와줘서 특별히 이사를 간 것이다.
어느 날, 장래희망을 적어오라는 쪽지를 받고, 인석은 배구선수라고 썼는데, 이것을 본 친구들과 학교 선생님의 놀려대는 수모를 참아야 했다. 이런 수모를 겪은 인석은 죽는 한이 있어도 배구선수가 되겠다는 꿈을 포기하지 않겠다고 맹세했다. 그런데 인석의 등하교 길에도 놀림은 계속되었다. 인석이 다른 동네로 이사를 간 이유이기도 했다. 인석이 배구선수가 되겠다고 말했을 때, 어머니의 장애를 이유로 괴롭히는 사람들이 방관자들보다 더 많았다.
“야, 김인석! 너네 집은 가난하다며?”
“좋은 말로 할 때 학교 그만두고 노가다라도 해라!”
“친구 사이에 놀리는 것도 안 되냐?”
“인석아, 배구 포기해!”
그런데도 선생님은 아이들 편에서 인석에게 배구를 그만두고 취직하라고 압박했다. 아이들의 놀리는 것과 선생님의 괴롭힘은 멈출 기미를 보이지 않고, 대학과 취직 이외의 길이 허용되지 않는 한국 사회에서 놀림은 당연한 것이었으나, 인석은 훗날, 고통스럽고 괴로운 고뇌와 눈물의 시간이었지만 그래도 홀로 배구를 익혔기에 성공할 수 있었으며, 배구를 혼자 익히며 기술도 혼자 힘으로 익혔으나 선생님과 주변의 설득과 괴롭힘은 견딜 수 없었다고 술회했다.
선생님의 반대
초등학교 4학년 때, 결국 선생님이 인석을 호출하셨다. 선생님은 작심을 했나 보다.
“김인석, 수업 끝나고 남아.”
수업이 끝난 교실. 선생님은 인석에게,
“인석아, 선생님이 원하는 건 네가 공부를 열심히 해버릇 해서 취직하는 거야. 선생님은 네가 배구에 매달려 학업을 소홀히 하는 것이 싫고 안타까웠어. 응? 응?”
“……네.”
그래서 살포시 안아주시는 선생님.
“인석아, 우리 다시 시작해보자. 다시 시작하는 거야. 남들처럼 똑같은 길을 가면서 공부 열심히 하고 대학 가서 취직하는, 그런 모습이 보고 싶어. 어머니 장애시니까, 취직해서 정상생활 해버릇 하는……. 제발……. 응?”
선생님의 눈에 눈물이 고인다. 남들이 다 하는 것을 인석이도 하기를 바랐지만, 인석은 배구를 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런 것도 허용되지 않는 한국 사회에 염증을 느낀 인석. 그래서 선생님의 품을 뿌리치며 의미심장한 말을 남긴다.
“저는 남들과 똑같은 삶을 살기 싫어요. 제가 왜 주제와 분수를 알아야 하죠? 저는 배구선수가 꿈이예요. 제발 제 앞길을 막지 마세요!”
끝내 선생님은 울고 만다. 그것을 본 교장선생님.
“정 선생, 이게 무슨 짓입니까?”
“인석이가 꿈을 포기하는 것을 보고 싶었어요. 하지만 어쩌지요? 이제는 다 어그러지고 말았어요……."
그러시고 우시는 담임선생님. 이를 본 교장선생님은,
"남 잘되는 꼴 못 보는 심보, 정 선생은 고칠 필요가 있어요. 인석이, 따라오렴."
결국 인석을 호출하신다. 교장실에 간 인석. 그리고 교장선생님의 말씀.
“인석아, 담임선생님이 저러셔도 그냥 그러려니 하렴. 네 꿈은 이해한다. 언제 배구부 학교 알아봐 주마.”
그런 교장선생님이 고마워서 인석은 펑펑 울었다. 인석은 며칠 후 인근 초등학교로 전학을 갔는데, 담임선생님은 그런 인석을 쳐다보지도 않았다. 참 잔인하다. 꿈을 응원해 주기는커녕 그 꿈에다 악담을 퍼붓다니 말이다. 아이들은 그렇게 놀려대던 인석이 꿈을 찾아 떠난다는 소문을 듣고 인석이 떠날 때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쳐다보지도 배웅하지도 않았다. 다만 공부삼매경이다. 그들은 남을 배려하는 마음 따위는 버린 지 오래였다. 정문을 나서며 학교를 떠난 인석. 떠나면서 이런 생각을 했다.
‘다시는 이 학교에 돌아오지 않겠다.’
이 학교에 상처받은 인석은 그 학교와 미련 없이 절연(絶緣)했다. 이제는 내 마음대로 하겠다는 뜻이었다. 전학을 가면서 다시는 돌아오지 않겠다고 생각했다. 어머니의 장애를 조롱거리로 삼은 사람들과는 말도 섞지 않겠다는 결단도 함께였다. 얼마 후 전학 수속을 마친 인석은 배구부가 있는 인근 학교에서 공부와 배구를 병행했다. 성적은 상위권인데다 어머니의 처지를 아신 교장선생님이 훈련비를 내주셨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인석은 한때나마 행복했다. 그렇게 인석은 훈련과 공부를 병행하는 생활을 하게 되었다. 참, 어머니의 다리를 저는 장애는 학교와 친구들, 정부의 도움으로 석 달 만에 완쾌되었다. 덕분에 어머니의 재활을 도우며 공부와 배구를 병행할 수 있었다. 재활 1년, 어머니의 다리는 다 나았고, 인석은 어느덧 중학생이 되었고, 중학교 배구부에 입단했다. 코치는 어머니의 사연을 선생님들로부터 듣고 인석에게 여러 가지 기술을 가르쳐 주셨다. 인석은 정말 행복했다.
지금 이대로 지낼 수 없으면
중학교 1학년 때, 부잣집 아들과 같이 중학교에 다녔는데, 그 친구는 마음씨가 착하고 공부도 잘 하는 학생이고, 그 부모님도 착하신 분들이었다. 그 친구와 그 부모님은 성실하시고 정직하기도 하셨다. 아무래도 자수성가형이어서 아들도 본받은 모양이다. 그 친구의 이름은 태은(邰隱) 전경문이다. 점심시간에 그 친구와의 이야기에서,
“인석아, 그렇게 가난한데도 배구하겠다는 이유가 뭐야?”
“어머니를 위해서야.”
“어머니를 위해서 배구선수가 되고 싶어?”
“응.”
“너 어머님께 효도하려고 배구하는 거구나?”
“응.”
“그런 거라면 우리가 도와줄게.”
그 친구들의 도움으로 배구에 전념하게 된 인석. 그 소식을 들은 어머니는 크게 기뻐하셨다. 그 사이 어머니는 어느 골목에 조그만 식당을 하나 차렸고, 그렇게 크지는 않았어도 행복해하셨다. 주름진 어머니 눈가에는 눈물이 고였고, 인석도 눈물을 흘렸다. 어느 날, 인석이 핀란드 중학교 배구팀에 스카우트되자, 핀란드로 떠나는 아들에게 당부의 말을 잊지 않는다.
“지금 이대로 지낼 수 없으면 차라리 외국으로 가렴. 엄마는 그나마 부자는 아니어도 도와 줄 테니 걱정 말거라. 경문이와 걔 부모님도 도우신다 했다니 참으로 다행이구나.”
“어머니, 저 훌륭한 배구선수가 될게요. 이제는 편히 사세요.”
“승부조작이나 이상한 짓 하지 말거라. 너 승부조작 사건 알지?”
“네. 뜻밖의 돈은 악마의 돈이예요.”
“그것을 알면 되었다. 매사에 정직하게 살렴. 좋은 친구들도 잘 사귀고, 돈도 아껴 쓰렴.”
“어머니는 제가 떠나니 외롭지 않으세요?”
“경문이 부모님이랑 교장선생님이 계시니까 안심하고 가거라. 아무 걱정 말고 배구에만 전념하렴.”
며칠 후인 2014년 10월 12일, 인석은 어머니와 교장선생님, 친구들의 배웅 속에 인천국제공항을 떠났다. 인천국제공항에서 헬싱키로 떠나는 비행기 안에서 파아란 창공을 보며 떠난 것이다. 얼마 후, 핀란드에서 유학 생활을 하며 중고등학교와 헬싱키 대학을 수석으로 졸업했다. 물론 배구도 배구팀에서 정식으로 익혔다. 학교에서 장학금을 받아가며 열심히 공부한 인석이 헬싱키 대학을 졸업한 해는 2023년 2월 15일의 일이었다. 어느덧 인석은 22세가 되었다. 이역만리 헬싱키까지 와서 인문학부 학사 학위를 취득한 것이다.
외국의 기술 습득
헬싱키에 있는 동안 공부를 잘 했고, 외국의 기술들을 잇달아 습득하면서 인석은 점점 훌륭한 배구선수로 성장하고 있었다. 하지만 부상을 염두에 두고 무리하지 않고 열심히 했다. 정직하고 올바른 플레이를 한 것이다. 바른 생활을 하고 좋은 친구들도 많이 사귀었지만, 그런 인석에게도 그리운 순간들이 있었으니, 바로 어머니였다. 인석은 가끔 식당을 하시는 어머니 생각이 나서 울던 적이 많았다.
‘어머니는 어떻게 지내고 계실까? 혹시 어디 아프신 거 아닐까?’
어머니 생각이 날 때마다 울던 나날들이었지만, 어머니를 생각하며 배구를 열심히 했다. 먼 곳에 계신 어머니가 기뻐하실 순간을 상기하면서. 참, 그 동안 인석은 키가 196cm까지 자랐다. 큰 키에 근육질의 몸매, 어머니가 그것을 보시면 기뻐하실 것 같았다. 고국에 계신 어머니 때문에 많이 고뇌했지만, 배구를 통해 이겨냈다.
어머니의 식당일
한편, 어머니가 일하시는 식당에서는 손님들이 맛있는 음식을 먹고 있었다.
“인석 엄마, 이 김치찌개 왜 이렇게 맛있어요?”
“아주머니, 이 라면 맛있는데요!”
이런 칭찬의 소문들이 퍼지자 단골이 늘어난 어머니의 식당. 주 메뉴는 김치찌개, 제육볶음, 라면 등이었다. 특히 라면은 여러 가지 라면을 따로 끓이는 맛이 일품이라 많은 학생들이 좋아했다. 각 라면에 맞는 조리법으로 끓여주니 학생들이 좋아할 밖에. 라면뿐만 아니라 김치찌개와 제육볶음도 맛있다는 소문이 퍼져 동네 유명 맛집으로 유명해졌다. 하지만 어머니는 그것에 그치지 않고 공부를 열심히 했다. 국어 자격증과 요리 경연 대회에도 나가서 상을 탔다. 손님들의 칭찬이 늘어날 때마다 어머니께서는 겸손하게도,
“저희 집은 옛날부터 가난했습니다. 하지만 아들 덕에 좋은 일도 많이 하고 있으니 자식에게 체면을 세운 셈이죠. 그 동안 여러분에게 신세만 졌습니다. 그저 제 마음을 알아주시고 저희 식당을 많이 찾아 주시면 됩니다.”
라고 말하며 라면을 끓여 주었다. 위생 관리와 청결, 항균 관리도 철저히 함은 말할 나위도 없었다.
올림픽 금메달
2024년 7월 26일에 파리에서 올림픽이 열렸다. 이 올림픽에 참가한 대한민국은 남자배구 첫 금메달을 노리고 있었다. 인석도 대한민국 선수로서 이 올림픽에 참가했는데, 인석의 첫 경기는 튀니지였다. 경기 내내 인석은 열심히 했다. 리시브, 스파이크, 블로킹, 다이렉트 킬, 서브에이스 등. 인석의 활약이 연거푸 이어졌다. 그 와중에도 인석은 선수로서 반칙은 대부분 하지 않았다. 했어도 심판의 정확한 지적에는 잘 따랐으나, 석연치 못한 반칙은 거의 없다고 봐야 할 것이었다. 그렇게 25점을 올린 동료들과 인석. 결과는 3:0이었다. 뒤이어 브라질, 아르헨티나, 미국, 이탈리아 등 세계 강호들을 연거푸 꺾었다. 이 모든 것이 인석의 공이었다. 8강전에서 캐나다를, 4강전에서 이탈리아를, 결승에서 강호 프랑스를 꺾고 금메달을 땄을 때, 인석은 너무도 기뻐서 울었다.
“이 금메달을 어머님께 바칩니다.”
한국에서 이 영광스러운 경기를 본 어머니도 울었다. 친구인 경문이도 크게 기뻐했다. 올림픽이 끝난 후 인석은 헬싱키로 돌아가 귀국할 준비를 했다.
배구선수로 성공하다
“우리 인석이가 핀란드에서 돌아온대요.”
2024년 9월 30일, 대림동은 이 소식으로 난리가 났다. 이제 인석은 한국뿐만 아니라 핀란드나 세계에서 유명한 배구선수였기 때문이었다.
“우리 동네에서 그렇게 훌륭한 선수가 나왔다는 건 가문의 영광이자 동네의 자랑입니다.”
이런 말을 하는 사람도 있었다. 또한,
“인석이 엄마가 좋아하시겠어. 인석이 아버지가 보셨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이런 말을 하시는 아주머니도 계셨다. 한국 남자배구 첫 금메달을 딴 인석이 10년 만에 고향에 돌아오는 것이다. 동네에서는 인석을 어떻게 맞을까 하고 떠들썩했다. 인석이 갑자기 귀국하겠다고 한 이유는 따로 있었다. 한국에서 보내 온 어머니의 사진을 보자, 갑자기 어머니를 만나보고 싶어진 것이었다. 그 사진은 인석의 친구가 찍어서 보내 준 사진인데, 그 사진을 보니, 어머니는 이미 많이 늙으셔서, 이번에 가지 않으면 영영 어머니를 만날 수 없을까봐 걱정되어서 귀국 준비를 한 것이다. 어머니는 다행히 살아계셨지만, 당시에는 돌아가실까봐 걱정한 것이다.
10월 4일, 인석이 귀국할 때, 인천국제공항에서는 대대적인 환영 인파가 몰렸다. 떠날 때는 어머니와 교장선생님, 친구들이 배웅을 해 주었지만, 돌아올 때는 유튜버, 기자, 지인, 시민, 친척들의 열렬한 환영 잔치가 베풀어졌다. 인석은 공항 주변의 호텔에서 이틀 밤을 묵고, 볼일을 마치고 곧바로 공항철도를 타고 고향 대림동으로 갔다.
고향은 이미 재개발되어 새 아파트가 세워져 있었다. 인석이 서울역에서 대림동까지 카퍼레이드를 하고 나서 차에서 내리자, 마을 사람들과 여학생들이 열렬히 환영해 주었고, LED 전등을 단 환영 아치도 세워져 있었다.
“김인석 선수 만세! 대한민국 만세!”
“오빠, 사인해 주세요!”
“만세! 만세!”
그렇게 인석을 환영하는 소리는 가을 하늘을 울렸고, 크게 성공하여 고향을 찾아온 인석은 너무도 기쁘고 자랑스러웠다. 환영을 하지 않을 줄 알았었지만 크게 환영해 준 것이 너무나도 고마웠다. 초등학교 교장선생님이 싱글벙글 웃으시며,
“그래, 잘 돌아왔다. 자랑스럽구나.”
이렇게 말씀하셨다. 인석은,
“고맙습니다. 이건 교장선생님 덕분입니다.”
인석은 너무 고마워 교장선생님께 절을 올렸다. 길게 두 줄로 늘어선 학생들이 태극기를 흔들었고, 하늘에는 때아닌 불꽃놀이가 피어났으며 동네 곳곳에서 태극기가 휘날렸고, 또 고등학교 밴드부가 연주한 <개선 행진곡>과 <애국가>가 울려 퍼졌다. 기뻐하는 동네 사람들 속에 파묻힌 인석. 집으로 오는 길에 부모님이 다니시던 교회에 들르고, 그리운 집으로 돌아와 보니, 어머니는 가게 일을 끝내고 와서 외아들을 기다리고 계셨다.
“어머니, 제가 돌아왔습니다!”
“잘 왔다. 훌륭하구나!”
그렇게 모자간에 눈물의 상봉이 이루어졌다. 어머니와 아들 인석은 가슴이 벅차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서로 부여잡은 손 위로 뜨거운 눈물이 떨어졌다. 이것을 본 이웃들은 눈물을 흘렸다. 어머니 곁에는 경문이도 그 자리에 있었는데, 경문이도 감격에 찬 눈물을 훔쳤다.
그리운 고향에서
그리운 고향에서 어릴 적 친구들과 어울리며 즐거운 며칠을 보낸 인석. 어머니는 아들의 공로 덕분에 재건축된 신형 아파트에 살고 계셨다. 식당은 아파트 상가 건물로 이전했다. 식당에서 어머니는 아들에게 라면을 끓여 주시며 저녁 식사를 친구들과 같이 먹었다. 그러던 어느 날, 여자친구 김미혜가 찾아왔다. 미혜는 인석이 다른 초등학교로 전학을 온 후 처음 사귄 여자친구로, 인석은 표현을 못 했지만 좋아하고 있었고, 미혜도 인석이 헬싱키로 떠난 후 인석 어머니와 자주 만났다. 하지만 인석은 몰랐다. 어머니는 미혜네 집안과 사돈을 맺은 사이라는 것을. 참, 미혜는 부모님과 같이 왔다.
“인석아!”
“응? 왜 그래?”
“나 너를 좋아해. 우리 결혼하자.”
“인석아, 미혜랑 결혼하렴. 이미 결혼하기로 미혜네와 약속을 했단다.”
“저도 미혜를 좋아하고 있었지만 이 정도일 줄 몰랐어요.”
“이미 결혼식장은 교장선생님께서 알아보셨단다.”
“어디서 해요?”
“네 아버지가 다니셨던 교회 알지?”
“예. 어머니께서 다니시는 교회 말이죠?”
“그럼. 그 교회에서 결혼식을 치르도록 하자.”
2024년 10월 7일에 미혜와 인석은 결혼식을 치렀다. 그것도 아버지가 다니셨던 교회에서 결혼식을 치른 것이다. 인석이 태어나기 전 부모님이 한 교회에서 결혼하셨던 것처럼, 부자가 처음으로 결혼식을 한 교회에서 치른 것이다. 목사님의 주례와 교장선생님의 축사로 시작된 결혼식은 친구들의 노래로 절정으로 치달았고, 미혜와 인석의 키스로 결혼식은 끝났다. 신혼여행은 제주도 호텔에서 둘이서 여행을 했고, 성산일출봉에서 일출을 본 인석 부부는 서로간의 사랑을 굳게 다졌다.
신혼여행 후
4박 5일의 신혼여행에서 돌아온 후 어머니를 모시고 동네 전통시장에 다녀온 인석. 가는 곳마다 인석을 알아보는 사람들이 많아 한편으로는 자랑스러웠으나 한편으로는 곤란했다. 어머니께 쏟아지는 칭찬 속에서 시장을 돌아다녀야 했기 때문이다. 같이 다니던 경문은 자랑스러웠다. 이런 친구가 배구에서 공을 세우고 큰일을 했으니 그럴 만도 했다. 인석이 가는 곳마다 아주머니들과 할머니들이 기뻐하셨다.
“아이구, 인석이 엄마 좋으시겠네!”
“인석이 키 큰 것 좀 봐! 우리 아들도 이렇게 컸으면 좋겠네!”
“인석이 신부 좀 봐, 예쁘기도 하지!”
“인석이 선친께서 살아계셨다면 얼마나 기쁘실까?”
돌아다니면서 맛있는 것도 사고, 필요한 것도 사는 인석. 어머니, 신부, 경문은 그런 인석이 자랑스러웠고, 인석에게는 이 광경이 선거 유세장 같았다. 떠나는 동안 한 번도 외식을 못 하신 어머니를 위해 인근 국수집으로 간 인석.
“인석이 엄마, 뭐 드릴까요?”
“칼국수 네 그릇이요.”
“훌륭한 아드님을 두셨어요. 정말 훌륭해요.”
경문과 인석 부부, 어머니는 칼국수를 먹으며 회포를 푼다. 이런 금메달을 따지 않고 또 언제 딴단 말인가. 인석은 이것을 즐기면서도 한편으로는 더욱 노력해서 가장 훌륭한 배구선수가 되겠다는 꿈을 품는다. 11일에 대통령은 인석에게 체육훈장 청룡장을 수여했다. 선수에게는 최고의 훈장이었다. 인석은 이 훈장을 어머니를 비롯한 모두에게 보이며,
"이것은 모두의 덕분입니다."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이 훈장을 본 어머니. 어머니의 눈에 눈물이 고인다.
‘여보, 천국에서 보고 계세요? 우리 아들이 훈장을 받았어요.’
훈장을 내려놓고 어머니는 기도드리듯 두 손을 모았다. 인석은 특별히 군 복무가 면제되었다. 왜냐하면 남자 배구 첫 금메달을 땄기 때문이었다. 꿈같은 시간이 지나고 인석은 10월 13일 핀란드 헬싱키로 떠났다.
타향에서
그 후 인석은 핀란드 배구팀에서 활약했다. 핀란드 배구팀의 실력은 그나마 알아줄 만했지만 에스토니아, 리투아니아, 라트비아, 몰도바 등 동유럽 팀들을 잇달아 이겼다. 그래서 최고의 선수로 우뚝 섰다. 항상 부상을 조심하면서 말이다.
2026 아이치·나고야 아시안게임, 2028 LA 올림픽과 2030 도하 아시안게임, 2032 브리즈번 올림픽에도 인석의 활약은 계속되었다. 통일 한국의 대표팀에 소속되어서 금메달도 많이 땄다. 타향인 헬싱키에서 인석은 잘 적응해 가고 있었고, 바른 생활을 하면서도 늘 처음 헬싱키에 왔을 때 먹은 마음을 잃지 않았다. 그 덕분에 친구들도 한국어와 한국 문화를 배우는 물론, 한국 예절도 인석한테 익혔으며, 한국 라면과 김밥도 인석이 가르쳐 주었다. 말하자면 인석은 핀란드에서 한류(韓流)를 불러일으킨 장본인이었다. 인석이 핀란드에 한류를 불러일으켜서 핀란드 국민들은 인석에게 호의를 베풀었다. 심지어 핀란드 대통령은 백잠미 대십자 훈장을 내리기도 했다. 결국 2032 브리즈번 올림픽 국가대표 은퇴식에도 인석은 핀란드 명예 국민증을 받았다.
‘아버지, 어머니, 제가 해냈어요. 이제 은퇴했으니, 어머니를 잘 모실게요.’
2027년 12월 1일, 올림픽 예선 도중 헬싱키에서 첫 아들이 태어났다. 경재(耕齋) 김상기가 태어난 것이다. 첫아들의 출산으로 화기(和氣)가 돋게 된 인석이네 집. 생명의 숨결을 처음 느껴보는 인석 부부. 친구들도 함께 축하해 주었다.
은퇴 이후
2032년 12월 23일, 둘째 아들 송촌(松村) 김상욱이 태어났다. 어느새 인석은 두 아들의 아버지가 되었다. 헬싱키 어느 아파트에서 두 아들을 키우면서 인석은 아들들에게 가난을 물려주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다음해 3월 23일 헬싱키 배구팀을 은퇴한 후 귀국하여 통일 한국의 남자 배구 감독이 되었다. 감독이 된 인석은 선수 하나하나에게 맞는 기술과 부상 선수들에게 온정을 베푼 일, 선진 기술과 충분한 배구용품, 훈련, 선수들에게 맞는 기술을 익히도록 한 것, 학교폭력이 없도록 한 것 등으로 여러 가지 칭찬과 상을 받았다. 물론 통일 한국의 대통령으로부터 많은 상과 훈장을 받았음은 말할 것도 없고 외국의 훈장과 상도 많이 받았다. 또한 어머니께 두 아들을 보여드리니, 어머니는 어느새 두 아들의 아버지가 된 인석을 보고 기뻐하셨다. 한편, 김인석 감독은 2034 리야드 아시안게임 통일 한국 첫 금메달, 2036 서울 올림픽에서 한국의 금메달을 차지했다. 그렇게 국가대표 감독을 물러난 김인석 감독은 서울 배구팀의 감독을 맡았다.
통일 한국은 세계의 빛
통일 한국은 어느새 세계의 빛이 되어 있었다. 남북이 사이좋게 지내고 핵과 미사일을 계속 개발하던 작태, 백두혈통이니 공산주의니 하는 말은 이미 옛말이 되었다. 또한 남북이 힘을 합쳐 살기 좋은 통일 한국을 만들어 가니 통일 한국은 어느새 옛날보다 더더욱 발전해 있었고, 정치, 스포츠, 외교, 경제, 문화, 예술, 종교 등 여러 분야에서도 한국의 위상을 높여 나가고 있었다. 무역도 발달하여 사통팔달의 중심지가 된 지 오래였고, UN 본부와 그 산하기구, FIFA, IOC의 판문점 이전으로 급속도로 발전하기 시작했다. 한류열풍은 말할 것도 없고 전국의 농장들이 전세계에 농작물을 수출, 기아(飢餓) 구호에 앞장섰다. 또한, 철도도 한국을 출발해 중국과 러시아를 거쳐 유럽까지 이어지게 되었고 북한의 모든 것이 혁파되어 북한 주민들도 자유 민주주의를 누리며 살게 되었다. 남북한의 장애인들도 아무 걱정 없이 평등한 대우를 받게 되었고 장애인들에 대해 여러 가지 서비스를 제공하게 되었으며, 장애인들에 대한 차별대우도 통일 한국에서는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휠체어를 탄 장애인들이 자유롭게 이동할 수 있게 되었고, 정상인들도 장애인들도 모두가 사이좋게 지내게 되었다. 장애인 차별도 사라졌다.
어머니의 부고, 그리고
2037년 12월 2일, 배구 감독을 하던 도중 어머니의 부고장이 날아왔다. 어머니가 병원에 계셨는데, 폐렴이 심장으로 전이된 것이었다. 너무나 큰 슬픔인지라 인석은 어머니를 부르며 슬프게 울었다. 자신을 키우시느라 온갖 고생을 다하시고, 장애에서 완쾌되어 해피엔딩인가 싶던 어머니의 일생. 유언은 라면집을 인석에게 물려준다는 것이었다. 이제 어머니는 이 세상에 없다. 장례는 어머니가 다니시던 교회에서 교회장으로 치러졌다. 기도를 드리며 인석은 생각했다.
‘어머니, 이제 어머니가 못 다한 꿈을 이루겠습니다. 어머니, 하늘나라에서 만나요. 어머니, 그래도 보고 싶어요. 나는 어머니를 사랑했습니다. 살아 생전 한 번도 그런 말은 못 했지만, 사랑해요, 이제는 편히 쉬세요. 제가 없는 세상에서 아버지와 행복하게, 영원토록…….’
인석은 집에서 라면을 끓여먹으며 어머니를 생각했다. 어머니의 손맛을 닮아 라면을 잘 끓였지만 역시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은 어쩔 수 없었다. 할 수만 있다면 라면집을 경영하고 싶었지만 배구 감독을 맡고 있는 그인지라 장사에 자신이 없었던 그는 어머니의 유산인 라면집을 그냥 두고 있을 수는 없었다. 어머니가 남겨주신 식당을 경영할 사람을 공모로 넘겨주고, 자신은 라면집을 과감히 정리했다. 그 식당은 어떤 이웃이 경영하게 되었는데, 라면과 제육볶음과 김치찌개를 어머니 생전보다 더 잘 하여 서울에만 5개의 체인점을 두었고, 부산과 대구는 물론이고 전국과 해외에도 체인점을 두어서 전 세계 굴지의 라면집이 되었다.
두 아들
경재 김상기는 부친을 닮아 키가 크고 배구를 잘 했다. 훗날 미국으로 건너가 한국어 학교에서 배구를 가르쳐 좋은 스승으로 학생들과 주민들의 존경을 받았다. 비록 아버지처럼 배구선수가 되지는 못했어도 공부를 열심히 하여 미국인에게 한국어를 가르치는 한국어 선생이 되었다. 송촌 김상욱은 할머니가 라면을 끓여주시는 솜씨를 부친으로부터 이어받아 통일 한국에서 가장 라면을 잘 끓이는 요리사가 되어 외국으로부터도 여러 번 초청을 받았다. 두 아들은 아버지의 뜻을 은연중에 이룬 셈이 되었다.
최후
세월이 흘러 대암(大巖) 김인석은 어느새 노인이 되었다. 2089년 4월 11일에는 태은(邰隱) 전경문이 세상을 뜨고 7월 4일에는 아내를 잃었다. 8월에는 인석도 병이 들어 말은 할 수 있어도 몸을 움직일 수 없게 되었다. 중풍이 온 것이다. 종국(終局)에는 인석도 장애인이 된 것이었다. 세인(世人)들은 유명한 금메달리스트가 장애인이 되었다는 근황을 안타까워하며 인석을 도와주기 위해 물심양면으로 최선을 다했다. 하지만, 인석도 세월의 흐름은 거역할 수 없어서 중풍에 심장병을 앓았다. 10월 11일, 마지막을 직감한 인석은 두 아들을 불러 휠체어를 타고 산책을 가자고 했다. 산책을 가다 보니 얼마 안 가, 비가 그친 하늘을 보니, 문득 어머니가 떠오른 것이었다.
‘어머니…….’
너무나도 그리운 이름을 부른 인석. 상욱이 휠체어 손잡이를 밀며 이제 그만 집에 가자고 말했을 때, 인석은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아들들이 아무리 불러도 그는 미소만 살짝 지은 채 아무 말이 없었다. 향년 88세. 그는 그토록 그리워하던 부모님 곁으로 간 것이었다. 장례는 체육인장으로 치러졌다. 세상을 등진 인석은 그렇게도 그리던 천국으로 간 것이다. 천국에서 부모님과 기쁨에 찬 상봉을 하고 있을 것이었다. 인석의 시신은 부모님과 아내 곁에 묻혔다. 이제 인석은 하늘나라에서 통일 한국의 축복 어린 발전을 지켜보고 있으리라. 허무한 인생사에서 마지막 남은 희망을 바라보면서.
조국에 산다는 것이 힘들지는 않았건만
부모님께 효도를 못 다 한 것이 힘들었다.
이제 천국에 갔으니 마음껏 효도하리.
눈물 많던 어린 시절 지나보니 영광에 이르렀네.
통일 한국 아름다워 찬란한 인생이여
이제 천국에서 지켜보리라,
통일 한국의 기운찬 발전을.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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