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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1-12
형통한 삶을 사는 비결 / 이성우 목사
오늘은 장애인선교주일로 지키는 주일입니다. 이 땅에는 선천적인 장애이든지, 혹은 후천적인 장애이든지 장애를 가지고 한 평생을 불편을 감수하면서 힘겹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이 있습니다. 특별히 요즘에는 갈수록 환경적인 영향 탓으로 인해서 태어나면서부터 장애를 가지고 태어나는 사람들이 많이 있으며, 또한 후천적인 장애를 갖게 되는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산업현장의 작업환경이라든지 오염된 먹을거리로 인해서, 혹은 기후와 생활환경에서 여러 가지 좋지 않은 환경에 오래 동안 노출되어 있음으로 해서 생겨나는 장애가 앞으로는 점점 더 많아지게 될 것입니다. 거기에다가 교통사고로 인한 후천적 장애를 입게 되는 경우는 엄청난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더군다나 더 큰 문제는 현대인들의 경우에는 여러 가지 요인에 의해서 육체적인 장애 보다는 정신적인 장애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갈수록 더 많아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육체적인 장애의 경우에도 물론 자신뿐만 아니라 주변 사람들에게도 어려움을 주는 경우가 많이 있지만, 정신적인 장애야 말로 주변사람들에게 심각한 악영향을 끼칠 수 있는 문제이기 때문에 심각한 사회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이런 사실 때문에 앞으로 교회가 해야 할 역할과 사명은 더 커져가고 있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육체적인 장애이든지 아니면 정신적인 장애이든지 간에 아직도 우리 사회는 장애인에 대한 편견과 부당한 대우가 심각한 수준에 머물러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물론 예전에 비하면 많이 나아지긴 했지만 여전히 이 문제는 더불어 살아 가야 할 우리 모두가 함께 풀어가야 할 숙제임에 틀림이 없으며, 그런 의미에서도 교회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감당해야 할 과제와 사명이 크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 인간은 개인적으로 형통한 삶을 살아가는 것도 행복한 일이요 누구나가 원하는 바이지만, 개인적인 형통한 삶도 따지고 보면 더불어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과 함께 형통한 삶을 살아가는 것이 전제될 때 비로소 가능한 것입니다. 개인은 공동체를 떠나서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인데, 공동체를 구성하고 함께 살아가는 다른 구성원들의 삶이 형통하지 못할 때 결과적으로는 개인의 형통한 삶도 보장되지 않기 마련입니다. 그런 까닭에 오늘을 살아가는 현대인들이 갈수록 개인주의가 팽배해져가는 이 시대 상황 속에서 우리 그리스도인들부터라도 나 혼자만의 행복한 삶, 형통한 삶을 추구해 갈 것이 아니라 공동체 전체가 함께 더불어 형통한 삶, 행복한 삶을 살아가기 위한 노력들을 힘써 해나가야 할 줄로 믿습니다.
구약성경을 통해서 만나게 되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경우를 보더라도 그들은 철저하게 공동체로서 존재하였으며, 생사를 같이하는 운명공동체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물론 하나님께서도 그들을 대하실 때마다 공동체로 그들과 관계하셨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경우를 하나 든다고 한다면 여호수아 7장을 보면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리고 성을 정복하고 나서 그 여세를 몰아서 아이 성 정복에 나섰다가 어이없게도 실패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이유가 바로 아간이라고 하는 한 사람의 범죄 때문이었음을 말씀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 땅에 세워진 주님의 몸인 교회도 공동체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습니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들이 한 하나님을 아버지로 고백하는 믿음을 가지고 모인 공동체로서 커다란 하나님의 가족 공동체인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교회를 가리켜서 ‘신앙 공동체’라는 표현을 쓰기도 합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2장에서 성령의 여러 가지 은사를 설명하면서 그 유명한 지체의 비유를 말씀하고 있는데, 이것은 곧 한 몸 안에 붙어 있는 여러 지체가 있듯이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도 그와 같은 이치임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 성도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고 있는 공동 운명체이기 때문에 나 한 사람이 교회 안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아주 큰 것이며, 동시에 교회 공동체의 여러 가지 사정과 형편은 곧장 각 개인에게 커다란 영향을 끼치게 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인 여호수아 5장 1절-12절까지의 말씀은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인 가나안 땅을 향해서 진격해 나가는 과정 중에 있었던 중요한 사건이었던 요단 강 도하와 가나안 땅의 관문이라고 할 수 있는 여리고 성 정복 사건 사이에 있었던 일을 소개하고 있는 내용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 내용을 말씀드리면, 여호수아가 모세의 뒤를 이어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새로운 지도자로 세움을 받고 나서 그들을 이끌고 가나안 땅을 향해서 진격해 가는 과정 중에 첫 번째 장애물이었던 요단강을 하나님의 지시대로 믿음을 가지고 순종함으로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으로 기적같이 건너게 되고 나서 그 일을 잊지 않고 기념하기 위한 기념비를 요단강 도하 후에 첫 번째 유숙 지였던 길갈에 세운 후 여리고 성을 정복하기 직전에 행했던 두 가지 종교 의식과 관련된 내용으로 되어 있습니다.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백성들이 요단강을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으로 마른 땅으로 건너게 된 사건은 마치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를 기적같이 건너게 되었던 사건만큼이나 큰 비중과 의미를 갖게 되는 사건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이 일을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대로 가나안 땅을 반드시 주실 것이라는 확신을 다시 한 번 확인하게 되었던 것이며, 새로운 지도자 여호수아의 지도력이 하나님에 의해서 모든 백성들 앞에서 확인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더 나아가서 이 요단강 도하 사건을 통해서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백성들은 사기가 충천해 있었으며, 이 일을 통해서 그동안 출애굽 이후부터 요단강을 건너게 되기까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서 행하신 놀라운 일들을 전해들은 가나안 땅의 원주민들은 상대적으로 사기가 저하되고 큰 두려움에 사로잡히게 되었기 때문에 이제 곧 가나안 땅 정복 전쟁을 수행해야 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입장에서는 더 없이 중요한 의미를 갖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백성들의 입장에서는 요단강 서편 땅인 가나안 땅에 대한 본격적인 정복 전쟁을 시작하면서 반드시 승리를 거두고 차지해야만 했던 여리고 성 정복전쟁은 여러 가지 면에서 큰 부담이 되었던 것이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여리고 성 정복은 향후에 계속 이어지게 될 가나안 땅 정복 전쟁의 첫 걸음이라고 하는 점에서 백성들의 사기와 관련된 중요한 문제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여리고 성은 여호수아가 보냈던 정탐꾼들의 보고에 의하면 규모에 있어서나 견고함에 있어서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의 공격에 대비해서 군인들이 철통같은 방위태세를 갖추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에게 있어서 여리고 성은 여간 부담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었던 것이 사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백성들은 출애굽 이후 40년 동안이나 그토록 사모하며 준비해 왔던 가나안 땅 정복을 서둘러 이루고 싶었고, 거기에다가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요단강을 기적같이 건넘으로써 사기가 충천해 있었기 때문에 그 여세를 몰아서 여리고 성을 정복해 들어가고자 하는 욕심을 자연스럽게 가지게 되었을 것이라는 생각을 본문 1절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요단 서쪽의 아모리 사람의 모든 왕들과 해변의 가나안 사람의 모든 왕들이 여호와께서 요단 물을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서 말리시고 우리를 건너게 하셨음을 듣고 마음이 녹았고 이스라엘 자손들 때문에 정신을 잃었더라.”
이런 상황이라면 제가 보기에도 주저하지 않고 여리고 성을 정복하기 위한 공격을 서둘러 시작하는 것이 옳을 것 같은 생각이 들게 되는데, 바로 그 순간에 하나님께서는 여호수아에게 중요한 명령을 내리고 있으며, 하나님의 명령을 받은 여호수아가 자신들의 상황에서 자연스럽게 가질 수 있는 생각들을 다 내려놓고 그 명령대로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백성들이 순종하고 있는 장면이 바로 오늘 본문 말씀의 주된 내용을 이루고 있습니다.
본문 2절을 보면, ‘그 때에’라는 말로 시작되고 있습니다. 이 표현은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백성들이 요단강을 건너고 나서 승리한 기분에 흠뻑 취해서 들떠 있으면서 새로운 승리에 대한 기대감으로 한껏 부풀어 있었을 상황을 염두에 두고 하는 표현입니다. 또한 이 표현은 어마어마한 적들을 코앞에 두고 대치하고 있어서 두려움 가운데 빠져있는 상황을 염두에 두고 하는 표현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이 말은 승리로 인한 감격에 빠져있을 때, 그리고 곧 있게 될 적들과의 새로운 전쟁으로 인한 두려움 가운데 빠져있을 때, 앞서 있었던 장애물을 성공적으로 통과하고 나서 주어진 승리의 기쁨을 또 다시 주어지게 될 장애물을 넘어서기까지 계속 유지해 가기 위한 형통한 삶의 비결을 말씀하기 위한 마중물과 같은 역할을 하고 있는 표현이라는 말입니다.
여호수아를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어진 명령의 내용이 무엇이었습니까? 그것은 참으로 뜻 밖에도 모든 남자들이 할례를 행하라는 것이었고, 그 명령에 대해서 여호수아는 지체하지 않고 할례를 행했을 뿐만 아니라 그 이후에 유월절 절기의식을 지키고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는데, 사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을 정복하기 위한 여러 가지 준비 가운데 가장 중요한 준비였음을 잊지 말아야 할 줄로 믿습니다. 왜냐하면 할례를 행한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하는 표시를 몸에 간직하는 것이며, 유월절 절기 의식을 지키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으로 구원받은 존재임을 다시금 기억하도록 만들어 주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 정복을 코앞에 두고서 할례를 행하게 하심으로써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정체성을 다시 한 번 확인함으로 택한 백성과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임재를 확신시키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또한 가나안 땅은 하나님의 백성에게 주어지는 땅이었기 때문에 그 땅을 차지하기 위한 기본적인 자격 조건을 갖출 수 있도록 하셨던 것입니다.
더불어서 유월절 절기 의식을 지키는 것은 출애굽의 하나님을 고백하며, 애굽 군대를 물리치고 기적을 일으키셔서 그들을 죽음의 자리에서 보호해 주셨던 그 하나님의 능력이 지금도 그들 가운데 함께 하셔서 또 다른 대적인 가나안 군대도 능히 물리쳐 주실 것이라는 확신을 갖도록 하심으로써 새로운 용기와 도전의 열정을 갖도록 하시기 위한 목적을 가지고 있었으며, 이제까지의 모든 일들이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은 것임을 깨닫도록 하시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더 중요한 사실은 할례를 행하며, 유월절 절기 의식을 지키는 것은 이미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서 그들에게 명령하신 것이었기 때문에, 가나안 땅 정복을 앞두고 이 명령을 순종하여 실천에 옮김으로써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고자 하는 새로운 결단을 보여 주고 있는 것이며, 가나안 땅 정복 전쟁의 승패가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에 달려있음을 다시 한 번 고백하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다시 말하면, 오늘 본문 말씀은 형통한 삶을 살아가기 위한 비결을 말씀하시면서 그 비결로 하나님의 백성이 되어서 하나님의 은혜를 입고 살아갈 뿐만 아니라, 그 은혜에 대해서는 깊이 감사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뿐만 아니라 결코 하나님 앞에서 교만하지 말 것과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함으로써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맺고 살아감으로써 하나님의 임재하심의 중요한 조건을 갖추고 살아갈 것을 말씀하고 있음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이 시대는 그 어떤 시대보다 힘들고 어려운 시대이며, 지금 우리 앞에는 크고 두려운 일이 버티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을 풍성하게 경험하며 살아왔음을 부인할 수 없는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 아침 말씀을 통해서 계속해서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을 경험하며 형통한 삶을 사는 비결을 분명하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이 말씀을 깊이 깨닫고 마음에 새겨서 하나님 앞에서 형통한 삶을 살아가시는 여러분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