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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 바울에게 물어보는 7가지 질문들-5
인간의 죄의 본성은 악해서 어느 누구도 죄를 안 지을래야 안 지을 수가 없는 입장에 있기 때문에 은혜만 바라보고 사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다음의 말씀을 해석해 주십시오!
사도 바울의 답변 요약
“우리가 율법은 신령한 줄 알거니와 나는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 팔렸도다 나의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노니 곧 원하는 이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그것을 함이라 만일 내가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내가 이로 율법의 선한 것을 시인하노니 이제는 이것을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 바 악은 행하는도다 만일 내가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이 질문에 대한 바울의 답변은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로마서 7장에서 말하고 있는 경험은 그리스도인이 거듭남의 경험을 하기 전에, 머리로는 진리를 깨달았기 때문에 깊은 죄책감을 느끼고 있으면서도 아직 성령으로 중생의 경험을 하지 못했기 때문에 죄의 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갈등을 묘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마도 바울 자신이 바리새인으로 있으면서 하나님의 율법이 거룩하며 선하다는 사실을 인정하기는 하지마는 계명의 요구를 순종 할 수 없는 형편에서 울부짖고 있었던 과거의 자기 자신의 옛 모습을 그리고 있는 것 같습니다. 자기 자신이 죄 아래 팔려 있다든지, 원하지만 선을 행하는 대신에 악을 행한다는 표현은 성령으로 거듭난 자의 간증일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거듭나기 이전의 갈등에 대한 묘사를 가지고 중생한 그리스도인이 경험하는 매일의 생활처럼 생각하는 것은 이 말씀의 의도를 오해하여 잘못 적용하는 것입니다. 그는 자기의 속절없는 상태를 깨닫고 울부짖는 모습을 그리면서 성령의 능력으로 죄의 힘에서 해방되지 못한 자는 아무도 하나님의 뜻을 행할 수 없으며,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며 의로운 생활을 살 수가 없다는 사실을 7장에서 강조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여기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7장의 울부짖음에 대한 해답을 그 다음 장인 8장에서 명쾌하고 적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이 정죄 받지 않는다는 말씀을 하면서, 그는 성령을 좇는 자들은 죄와 사망의 힘에서 벗어나게 되며 하나님의 율법의 요구를 이룰 수 있는 능력을 얻게 된다고 말씀합니다. 다시 말해서 죄의 본성을 이기고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생애를 살 수 있게 되는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7장에서 울부짖던 사람이 성령의 힘으로 거듭나게 된 이후에 더는 죄와 죄의 본성의 힘에 눌려서 노예가 되어 끌려 다닐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승리가 가능해 지는 것입니다. 자, 그러면 바울의 말씀을 직접 읽어 보도록 합시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를 인하여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육신을 좇지 않고 그 영을 좇아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 육신을 좇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좇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또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 몸은 죄로 인하여 죽은 것이나 영은 의를 인하여 산 것이니라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빚진 자로되 육신에게 져서 육신대로 살 것이 아니니라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로마서 8:1-14.
여기서 잠시 우리가 가지고 태어나는 인성 문제에 대하여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자유주의 신학으로 불리우는 신신학은 인간의 본성에 대한 오해 위에 세워져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본성을 이해함
잘못된 신학은(신신학 또는 자유주의 신학이라고 불리움) 인간의 본성에 관한 그릇된 견해 위에 세워져 있습니다. 참으로 이것은 우리가 신신학을 구별해 낼 수 있는 중요한 논증의 자료 가운데 하나입니다. 이 문제에 대한 네 가지의 핵심 주제를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 보면서 검토해 보겠습니다.
1. 인간은 원죄(original sin)를 가지고 태어나지 않는다.
원죄의 개념은 어거스틴의 기독교 사상 가운데 새겨져 있던 것입니다. 그는 이교 사상으로부터 이것을 받아들였는데, 이 사상의 골자는 인간은 아담의 죄로 인하여 태어날 때부터, 심지어는 수태되었을 때부터 죄인이라는 것입니다. 또한 이렇게 되어버린 상황을 바로 잡기 위하여 인간 스스로 혹은 하나님 자신까지도 아무 일도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런 그릇된 주장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께서는 어떤 사람은 구원해 주시고, 또 어떤 사람은 영원한 형벌을 받도록 예정해 두셨다는 가설을 믿게 되었습니다. 어떤 기독교 신자들은 다윗이 드린 회개의 기도를 들어 이 견해를 뒷바침 하려고 합니다. 이렇게 주장하기 위하여 대개 현대역 성경을 인용하는데 그 번역된 구절 속에는 번역자의 사상에 내포되어 있는 원죄에 관한 편견이 나타나 있습니다. 그러나 흠정역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습니다.
“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음이여 모친이 죄 중에 나를 잉태하였나이다” 시편 51:5. 그러나 새 국제역(NIV) 은 똑 같은 구절을 의역함으로써 다음과 같은 원죄에 대한 편견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진실로 나는 태어날 때부터 죄인이었으며 나의 어머니가 나를 잉태하였을 때부터 죄 있는 사람입니다” 시편 51:5 (NIV 영어 성경 번역).
히브리 원전의 이 성경절에는 어떤 원죄나 범죄에 대한 언급이 나타나 있지 않습니다. 또한 이어지는 성경구절을 살펴보면 다윗은 밧세바로 더불어 지은 죄로부터 완전히 정결함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중심의 진실함을 주께서 원하시오니 내 속에 지혜를 알게 하시리이다 우슬초로 나를 정결케 하소서 내가 정하리이다 나를 씻기소서 내가 눈보다 희리이다” 시편 51:6,7.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시편 51:10.
이 구절들은 다윗이 원죄를 가지고 태어났다는 사상을 전혀 인정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은 인간이 죗된 성향을 가지고 태어나며,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떠나가려고 하는 본질적인 경향이 있음을 지적해 줍니다. 거듭나지 않은 인간은 자연스럽게 죄를 범하게 되어 하나님으로부터 격리되어 버립니다. 인간은 어떤 다른 사람이 아닌 바로 자신이 지은 죄에 대하여만 책임이 있다는 사실을 성경은 강조합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내게 범죄하면 그는 내가 내 책에서 지워 버리리라” 출애굽기 32:33.
“범죄하는 그 영혼은 죽을지라 아들은 아비의 죄를 담당치 아니할 것이요 아비는 아들의 죄악을 담당치 아니하리니 의인의 의도 자기에게로 돌아가고 악인의 악도 자기에게로 돌아가리라” 에스겔 18:20.
이런 성경 구절들은 원죄라고 불리우는 신신학의 교리를 강력하게 부인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조상들이 지은 죄로 말미암아 인간들을 죄인으로 심판하지 않으십니다. 만일 원죄의 사상이 성경적이라면 하나님께서 침례 요한에 관해서 이렇게 말씀하시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는 저가 주 앞에 큰 자가 되며 포도주나 소주를 마시지 아니하며 모태로부터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누가복음 1:15.
아담이 범한 죄 때문에 멸망당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우리 자신이 짓는 죄 때문에 죄인이 되는 것이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로마서 3:23.
“이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로마서 5:12.
2. 하나님께서 개인의 영생과 멸망에 관해 미리 예정해 놓지 않으셨다.
원죄의 개념을 받아들이면 논리적으로 결국 예정설을 인정하게 된다. 성경은 인간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결정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만일 여호와를 섬기는 것이 너희에게 좋지 않게 보이거든 너희 열조가 강 저편에서 섬기던 신이든지 혹 너희의 거하는 땅 아모리 사람의 신이든지 너희 섬길 자를 오늘 택하라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 여호수아 24:15.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 모음 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치 아니하였도다” 마태복음 23:37. 예수께서 갈바리에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심으로 모든 사람을 그에게로 이끄셨지만, 각 개인은 이미 손에 쥐어진 구원을 받아들일 수도 있고 거절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3. 인간의 구원은 조건적이다.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한번 구원받은 사람은 영원히 구원받게 된다”는 사단의 이론이 신신학(자유주의 신학)과 관련이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러한 가르침이 상당히 미묘하고 교묘한 방법으로 교회 안에서 전해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죄를 이기든지 이기지 못하든 지를 불문하고 결국에는 구원받게 될 것이라고 믿는 사람들은 “한번 구원받으면 영원히 구원받는다”는 사단의 거짓을 인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견해를 받아들이는 것은, 구원의 전제 조건은 순종이라는 사실을 부인하는 것입니다. 성경이 거듭하여 단언하고 있는 다음과 같은 말씀들을 주의 깊게 읽어 보면, 순종하지 않는 그리스도인은 결국 멸망하게 된다는 진리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오직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또한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저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히브리서 10:38.
“만일 의인이 돌이켜 그 의에서 떠나서 범죄하고 악인이 행하는 모든 가증한 일대로 행하면 살겠느냐 그 행한 의로운 일은 하나도 기억되지 아니하리니 그가 그 행한 허물과 그 지은 죄로 인하여 죽으리라” 에스겔 18:4.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요한복음 3:16.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도다 이것이 옳다 인정하심을 받은 후에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임이니라” 야고보서 1:12.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들을지어다 하나님이 세상에 대하여는 가난한 자를 택하사 믿음에 부요하게 하시고 또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나라를 유업으로 받게 아니하셨느냐” 야고보서 2:5.
“여호와의 인자하심은 자기를 경외하는 자에게 영원부터 영원까지 이르며 그의 의는 자손의 자손에게 미치리니 곧 그 언약을 지키고 그 법도를 기억하여 행하는 자에게로다” 시편 103:17,18.
“저가 빛 가운데 계신 것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요한일서 1:7.
“어떤 사람이 주께 와서 가로되 선생이여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어찌하여 선한 일을 내게 묻느냐 선한 이는 오직 한 분이시라 네가 생명에 들어가려면 계명들을 지키라” 마태복음 19:16,17.
“이기는 자에게는 내가 내 보좌에 함께 앉게 하여 주기를 내가 이기고 아버지 보좌에 앉은 것과 같이 하리라” 요한계시록 3:21.
4. 성도들에게는 죄를 이길 수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승리케 하는 능력이 공급됨.
진실된 그리스도인들이 받아들이는 참된 성경적인 진리는 성도들이 죄를 지금 이 순간에 이길 수 있고, 또 이길 것이라는 가르침입니다. 신신학(자유주의 신학)은 성도들이 예수께서 오실 때까지 계속 죄를 지을 수 밖에 없다고 가르칩니다. 이에 대해서 성경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능히 너희를 보호하사 거침이 없게 하시고 너희로 그 영광 앞에 흠이 없이 즐거움으로 서게 하실 자” 유다서 24.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에게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신실하사 너희가 감당치 못할 시험당함을 허락지 아니하시고 시험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고린도전서 10:13.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빌립보서 4:13”
“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사 티나 주름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 하심이니라” 에베소서 5:27.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얻은 것이라)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에베소서 2:4-6.
“깨어 의를 행하고 죄를 짓지 말라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가 있기로 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기 위하여 말하노라” 고린도전서 15:34.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갈라디아서 5:16.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박았느니라” 갈라디아서 5:22-24.
“용이 여자에게 분노하여 돌아가서 그 여자의 남은 자손 곧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며 예수의 증거를 가진 자들로 더불어 싸우려고 바다 모래 위에 섰더라” 요한계시록 12:17.
“성도들의 인내가 여기 있나니 저희는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의 믿음을 지키는 자니라” 요한계시록 14:12.
“그에게 허락하사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를 입게 하셨은즉 이 세마포는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로다 하더라” 요한계시록 19:8.
“이 사람들은 여자로 더불어 더럽히지 아니하고 정절이 있는 자라 어린양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라가는 자며 사람 가운데서 구속을 받아 처음 익은 열매로 하나님과 어린양에게 속한 자들이니 그 입에 거짓말이 없고 흠이 없는 자들이더라” 요한계시록 14:4,5.
“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사 티나 주름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 하심이니라” 에베소서 5:27.
“불의한 자는 그대로 불의를 하고 더러운 자는 그대로 더럽고 의로운 자는 그대로 의를 행하고 거룩한 자는 그대로 거룩되게 하라” 요한계시록 22:11.
위에 인용한 성경절들은 죄를 이기고 승리할 수 있는 힘을 하나님께서 주시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신신학의 도덕적 패배주의 이론을 꼼작 못하게 막아버립니다. 신신학의 이러한 오류를 받아들이면, 그 결과로 인해서 다음과 같은 두 가지의 엉뚱한 가정 중 한가지에 도달하게 됩니다.
A) 하나님께서는 죄인들을 하늘로 데려가심으로서 하늘 나라를 다시 죄로 오염되게 하실 것이다.
B) 하나님께서는 죄인들 중에서 하늘로 데려갈 수 있는 성도들을 당신 자신이 임의대로 만드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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