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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05년 7월 25일 오후 2시 30분경. 은색 스타렉스 차량 한 대가 강변북로에서 마포대교 북단과 연결되는 지점을 통과하고 있었다. S자 도로를 지나느라 속도가 줄어들자 갑자기 차량 문이 열리면서 한 여성이 도로 위로 굴러 떨어졌다. 자칫하면 뒤따라오던 다른 차량에 치일 수도 있는 아슬아슬한 상황. 다행히 이 여성은 도로 갓길로 떨어져 화를 면했지만 달리는 차 안에서 몸을 던진 터라 몸이 성할 리 없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이 여성은 달리는 차 안에서 뛰어내리는 무모한 행동을 했을까. 마포경찰서 홍익지구대 공대식 형사가 전하는 ‘잠실 여대생 납치사건’검거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보자.
그시각 순찰 중인 경찰들에게 동시에 다급한 무전이 떨어졌다. 처음엔 이 사건이 전날 자정께 발생한 잠실 여대생 납치사건과 연관이 있으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112에는 폭력사건으로 신고가 들어왔기 때문이다. 무전으로 통보받은 내용은 ‘한 여성이 마포대교 북단 편의점 앞에 쓰러져 있다’는 것이었다. 목격자의 말에 따르면 달리는 차량 문이 열리더니 웬 남자가 한 여성을 때리고 발로 차더라는 것이다. 결국 여성은 차 밖으로 굴러 떨어졌고 문제의 스타렉스 차량은 그 길로 전속력으로 달아났다는 내용이었다.
도대체 무슨 일일까. 신고를 받은 공 형사의 머릿속에는 잠시 동안 갖가지 생각들이 교차했다.
짐작하기조차 어려운 갖가지 사건들이 발생하는 요즘 또 하나의 엽기적인 사건이 발생한 것일까. 여성을 상대로 이 같은 위험한 짓을 한 ‘나쁜 사내’는 누구일까. 또 그는 왜 산 사람을 상대로 그런 잔인한 짓을 한 것일까. 아무리 생각해봐도 단순 폭력 사건은 아니었다.
원한? 연인 간의 폭행? 이것도 아닌 것 같았다. 목격자가 있을 것이 뻔한 벌건 대낮에 저지른 무모한 범행을 설명하기엔 앞뒤가 맞지 않았다. 원한관계에 의한 범행이라면 목격자를 피해야 했을 것이고 연인 간의 폭행이라면 너무 잔인했다.
그렇다면 뭐지? 어쩌면 남성이 밀어낸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차 안에 있던 여성이 목숨을 걸고 ‘탈출’한 건 아닐까?”
순간 공 형사의 머리속에는 전날 자정께 통보받은 여대생 납치사건이 떠올랐다. 아무리 생각해도 달리는 차 안에서 뛰어내리는 행동은 그야말로 자살행위나 다름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무모한 행동을 해야했던 여성의 행동은 ‘납치’라는 극한 상황에서나 가능한 일이었다. 이어지는 공 형사의 얘기.
당시는 이미 잠실 여대생이 납치된 지 14시간이 지난 시점으로 범인들이 여대생을 데리고 언제 어디로 이동할지 알 수 없는 상황이었다. 특히 납치된 사람의 목숨이 걸려있는 다급한 상황인 터라 순찰을 도는 경찰들은 비상사태에 돌입해 있었다. 무전을 접한 순간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용의차량이 납치사건과 관련 있을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을 열어두고 순찰을 돌았다.
아니나 다를까. 차에서 몸을 던진 여성은 전날 자정께 납치된 여대생 임승희 씨(가명·20)로 드러났다. 임 씨는 납치된 동안 겪은 극한 공포로 심신이 만신창이가 돼 있었지만 구급대에 의해 신속히 후송돼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경찰은 초비상이 걸렸다. 피랍자가 탈출한 돌발상황에서 범인이 무고한 시민들을 상대로 어떤 추가범행을 저지를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피랍자의 안전이 확인된 이상 한시라도 빨리 범인을 검거해야만 했다. 경찰은 범인이 이동할 것으로 예상되는 도로에 경찰 인력을 배치, 용의차량 검거에 들어갔다.
수배된 은색 스타렉스 차량이 모습을 드러낸 것은 이날 오후 3시경. 이대 로터리 부근이었다. 만리동에서 공덕로터리를 지나 이대 로터리를 향해 질주하던 용의차량이 무전을 접하고 때마침 그 인근에서 순찰 중이던 공 형사의 눈에 들어왔다.
최초 목격자가 차량번호를 기억해 알려준 탓에 용의차량이 70마 XXXX 은색 스타렉스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언제 어디서 나타날지 모르는 상황에서 바짝 긴장하고 순찰을 돌고 있는데 이게 웬일인가. 저만치서 용의차량이 보였다. 이것저것 생각할 겨를도 없이 우리는 차를 돌려 무조건 용의차량을 추격했다. 차량 통행이 많은 로터리 일대에서 한바탕 대낮의 추격전이 벌어졌다. ‘놓치면 끝장’이라는 생각으로 얼마나 추격했을까. 간신히 순찰차로 용의차량 앞을 가로막아 정지시키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그것으로 상황이 끝난 것은 아니었다. 납치범이 무슨 짓을 할지 모르는 위험한 상황이었다. 자포자기 심정으로 경찰에게 위협을 가하거나 자해를 시도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공 형사는 차량으로 다가가 권총을 겨누며 상대를 제압했다. 납치범이 두 명이라는 정보와 달리 차 안에는 젊은 남자 한 명만 타고 있었다. 바로 납치범 중 한 명인 윤현석 씨(가명·31)이었다. 윤 씨는 한참 동안 차에서 내리지 않고 버티다가 결국 모든 것을 포기한 듯 차에서 내렸다.
총을 딱 겨누니 저항을 할 엄두도 내지 못하더라. 납치사실에 대해서도 순순히 인정하는 모습이었다.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은 ‘죄송합니다. 제발 쏘지 마세요’ 이 한마디였다. 공범에 대해 물으니 전화통화를 해서 나중에 만나기로 했다고 말하더라. 14시간 동안 가녀린 여대생을 끌고다니며 벌인 숨막히는 납치극의 범인이 검거되는 순간이었다.
경찰은 곧 공범 박승한 씨(가명·38)의 검거에 돌입했다. 하지만 박 씨의 행방은 묘연했다. 박 씨는 이날 새벽 윤 씨와 헤어져 임 씨의 부모에게서 몸값을 건네받기 위해 돌아다니다 윤 씨가 검거되자 차를 신사동에 버리고 잠적한 상황이었다.
조사 결과 이 사건은 금전 갈취를 목적으로 꾸민 전형적인 납치사건으로 드러났다.
범행을 개시하기 얼마 전인 7월 중순경 지인의 소개로 알게 된 두 사람은 ‘한몫 단단히 챙겨보자’는 목표하에 위험한 범행을 계획하게 된다. 바로 사람을 납치한 뒤 몸값을 두둑이 받아내자는 계획이었다. 이들은 부유층이 많이 모여사는 아파트 근처를 배회하며 밤늦게 귀가하는 여성을 범행대상으로 정했다. 당시 특정 직업이 없었던 윤 씨는 ‘한탕’만 하면 거액의 돈을 손에 쥘 수 있다고 판단, 박 씨의 범행제안을 받아들이게 된다. 실제로 윤 씨는 경찰조사에서 “카드빚 2억 원이 있는데 지난 금요일 아는 사람 소개로 만난 박 씨가 ‘돈이 되는 일’이 있다고 제안해 범행을 저질렀다.”고 진술했다.
범행을 공모한 두 사람은 24일 오후 11시 50분경 송파구 잠실 종합운동장 인근의 한 아파트 버스정류장에서 범행대상을 물색하고 있었다. 때마침 버스에서 내려 집을 향해 걸어가던 임 씨가 두 사람의 눈에 들어왔다. 이들은 임 씨의 뒤를 따라갔다. 밤늦은 시각 아파트 주변에는 인적이 없었다.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한 두 사람은 임 씨를 제압한 뒤 강제로 차에 태워 납치했다. 눈 깜짝할 사이에 벌어진 일이었다. 저항 한 번 제대로 해보지 못한 채 납치된 임 씨는 테이프로 양 손이 결박되고 눈마저 가려진 상태로 무려 14시간 이상을 끌려다녀야 했다.
임 씨가 평소 귀가시간이 지나도록 집에 돌아오지 않자 임 씨의 집은 발칵 뒤집혔다. 임 씨의 가족이 납치사실을 알게 된 것은 임 씨가 납치된 직후였다. 임 씨는 납치 직후 범인들의 눈을 피해 휴대전화로 집번호 단축키를 누른 뒤 “가만히 있을 게요. 시키는 대로 할 게요”라고 말함으로써 납치상황을 가족에게 알린 것으로 드러났다. 하지만 임 씨의 가족들은 임 씨의 안전을 위해 섣부른 행동을 할 수 없었다. 추후 임 씨의 생사마저 불확실한 상황에서 임 씨의 가족들은 범인의 연락을 기다리며 피를 말려야만 했다.
범인들로부터 돈을 요구하는 첫 협박전화가 걸려온 것은 다음날 오전 11시경.
차에다 돈을 싣고 정확하게 11시 30분에 출발하세요.” “다른 생각하면 딸의 목숨을 보장할 수 없습니다.
이런 식으로 범인들은 검거되기까지 4시간여 동안 무려 총 15차례에 걸쳐 전화를 걸어 임 씨의 몸값으로 1억 원을 요구한 것으로 드러났다.
하지만 임 씨는 납치된 후에도 끝까지 침착함을 잃지 않았다. “임 씨는 납치된 후 차 안에 감금되어 서울과 경기 일대를 끌려다녔음에도 범인들을 자극하지 않은 채 탈출의 기회를 노렸다. 장시간 결박되어 있던 임 씨는 범인들에게 피가 통하지 않는다는 식으로 통증을 호소해 범인들이 결박을 풀어주도록 유도했다. 그리고 마포대교 북단을 지나갈 무렵 차량속도가 줄어든 틈을 타서 차량 문을 열고 탈출했다”는 것이 경찰 관계자의 얘기다.
경찰은 먼저 검거된 윤 씨의 진술 등을 토대로 또 다른 공범인 박 씨가 이날 오후 8시 50분경 비행기를 타고 제주도로 도피한 사실을 확인하고 제주도로 수사대를 급파했다.
제주도 시내의 PC방과 여관 100여곳을 일일이 탐문수색한 결과 경찰은 27일 오전 제주 이도2동에 소재한 한 여관에서 박 씨를 추가로 검거, 사건을 종결지었다.
박 씨는 서울 소재의 미대를 졸업한 후 지방대학에서 강사로 재직 중인 엘리트로, 대법관까지 지낸 법조인 아버지를 둔 명문가의 자제로 밝혀져 더욱 충격을 주었다. 부인과 자녀 둘을 두고 단란한 가정을 꾸려왔던 박 씨는 의류사업이 실패하면서 5000만 원의 빚을 지게 됐고 빚 독촉에 시달린 끝에 이 같은 범행을 저지르게 된 것으로 전해졌다.
경찰은 공범 중 한 명인 박 씨가 상당히 부유한 집안의 자제라는 점에서 정확한 범행동기를 집중추궁했다. 사업실패로 아무리 큰 빚을 졌다해도 5000만 원 정도는 박 씨 집안의 경제사정을 감안하면 충분히 감당할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박 씨는 경찰 조사에서 “사업이 실패하자 월 120만 원 남짓한 강사료로는 버티기 힘들었다. 박사과정을 마칠 때까지 부모의 도움을 계속 받아왔기 때문에 더 이상 부모님께 손을 벌릴 수 없었다”며 뒤늦은 참회의 눈물을 흘린 것으로 전해진다.
인질강도 혐의로 구속기소된 박 씨와 윤 씨는 각각 징역 3년6월과 징역 3년을 선고받았다. “박 씨 등은 피해자에게 흉기를 휘둘러 상해를 가하지도 않았고 실제 돈을 받아내지도 못했지만 14시간이나 끌고 다니며 정신적 상처를 준 데다 피해자와 합의도 원만히 이뤄지지 않은 점 등을 감안해 중형을 선고한다”는 것이 법원의 판단이었다.
(옮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