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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면과 위로의 하나님
히 13:22~25
22 형제들아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권면의 말을 용납하라 내가 간단히 너희에게 썼느니라
23 우리 형제 디모데가 놓인 것을 너희가 알라 그가 속히 오면 내가 그와 함께 가서 너희를 보리라
24 너희를 인도하는 자들과 및 모든 성도들에게 문안하라 이달리야에서 온 자들도 너희에게 문안하느니라
25 은혜가 너희 모든 사람에게 있을지어다
지난 2025년 1월 12일 주일에 히브리서 강해 첫 설교를 <감췄던 비밀의 열쇠 그리스도>를 시작하여 오늘에 이르기까지 총 60강의 설교를 하게 되었습니다. 오늘의 본문은 마지막 인사말을 통해 히브리서를 기록한 저자가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에게 전하고자 했던 핵심 메시지와 그 안에 담긴 위로와 권면의 말씀이 담겨 있습니다. 당시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은 유대교의 전통과 핍박 사이에서 신앙이 몹시 흔들리고 있었을 때였습니다. 그런 그들에게 히브리서를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우월성을 전하므로 시험에 빠질 수밖에 없는 그리스도인에게 힘을 실어주고 싶어 했습니다. 결코, 예수님을 구주로 믿고 사는 것이 헛된 것이 아님을 강조하기 위하여 그리스도가 천사와 모세 그리고 아론의 제사보다 뛰어남을 말하였고, 예수님을 배반하지 말고 복음의 본질을 끝까지 붙잡으라는 간곡한 외침입니다.
본문에서 눈에 띄는 단어는 권면의 말(Word of exhortation)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도덕적인 훈계가 아니라 히브리서 전체에 흐르고 있는 것으로 ‘권면의 말을 용납하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이 글을 읽는 그들의 마음에 깊이 새겨 넣으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누구에게 권면의 말을 할 때 자칫 마음을 상하게 할 수도 있습니다.
한 목사님이 한평생 자신의 영적 멘토(Spiritual Mentor)로 지내셨던 목사이셨던 아버지가 85세의 연세에 소천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 아버지를 잃고 몹시 낙심하고, 슬퍼하고 있을 때 조문을 온 친구 목사가 위로 한답시고 “여보게! 장수하시다가 하나님께 부르심을 받아 가셨으니 얼마나 호상(好喪)인가?” 하더랍니다. 위로하고 격려하려고 던진 말이 목사님께는 비수로 마음을 찌르는 아픔으로 다가왔다고 말한 것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누구에게 권면하는 말이 상대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한다면 오히려 독이 될 수 있음을 보인 교훈이었습니다. 바울 사도 역시 바로 이런 점을 염두에 두고 디모데의 감옥에서 풀려 났음에 대한 소식을 전하면서 그의 권면에는 상대의 마음을 헤아리고 있음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당시의 성도들은 “예수를 믿는데 왜 우리는 감옥에 가고 재산을 뺏기는가?”라는 의문을 가졌을 것입니다. 이때 사도 바울의 가장 아끼는 동역자 디모데가 갇혔다가 풀려난 소식은, 고난이 곧 하나님의 버림받음이 아니며 복음의 여정 중에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일임을 확인시켜 줍니다. 그리고 그들이 섬기는 하나님은 우리의 삶에서 멀리 떨어져 계신 분이 아니라 내 삶의 중심에 계시며 나의 작은 신음에도 응답하시는 하나님이심을 강조하면서 저들에게 위로의 말을 전하고자 하는 마음을 읽을 수 있습니다.
바울은 많은 그리스도인에게 위로의 말씀을 배경으로 하고 있기에 그가 전하는 권면의 말씀이 설득력이 있고 기쁘게 받아들이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마음을 보듬어 주는 위로와 권면을 떼려야 뗄 수 없는 상호보완적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향하여 말씀하실 때 선지자와 예언자를 통하여 사람의 마음을 콕콕 찌르는 말씀을 전하십니다. 이를 전 12:11 “지혜자들의 말씀들은 찌르는 채찍들 같고 회중의 스승들의 말씀들은 잘 박힌 못 같으니 다 한 목자가 주신 바이니라”고 표현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듣는 자에게는 채찍같고, 벽에 박히는 못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그만큼 하나님의 말씀은 제대로 들을 때 아프다는 것입니다.
만약에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이라며 권면으로만 택하신 백성에게 나오셨다면 기꺼운 마음으로 순종할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을 것입니다. 권면과 위로가 있기에 하나님의 말씀이 꿀송이처럼 달고 기쁨이 있습니다. 성경에서는 선지자와 제사장을 이스라엘 백성에게 보내셔셔 선지자를 통하여 권면의 말씀을 듣게 하시고 제사장을 통하여 보듬어 주고 죄인의 자리에서 용서의 자리로 인도하시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이처럼 우리는 성경을 볼 때 하나님께서 성도에게 어떻게 위로하고 계시며 지금도 성령으로 위로하시는 것을 느껴질 때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권고의 말씀을 더욱 신뢰할 수 있고, 믿음으로 순종할 수 있으리라 봅니다. 성경에서 ‘위로’를 뜻하는 헬라어 ‘파라클레시스’는 단순히 곁에서 달래주는 것을 넘어, ‘곁으로 불러내어 힘을 북돋우다’라는 역동적인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광야에서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하신다는 표징으로 보여준 것이 낮에는 불기둥과 밤에는 구름기둥이 있었습니다. 광야에서 낮은 강렬한 햇볕으로 살갗이 타들어 가는 듯한 아픔을 겪을 수 있습니다. 그대로 노출되면 견딜 수 없는 것이 광야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구름으로 차일을 펴듯이 그들 백성을 보호하여 주셨습니다. 이와는 반대로 밤중이 되면 뼈속같이 스며드는 추위가 있습니다. 여기에 필요한 불기둥으로 저들이 추위를 견딜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또한 아침마다 하늘에서 내리는 만나로 저들의 허기진 배를 채우셨고, 때로는 메추라기 떼를 보내셔서 저들의 영양을 채우셨음을 보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의 삶으로 들어오셔서 저들과 함께 낮과 밤을 지내시며 저들의 필요에 때를 따라 공급하시므로 채우시는 위로의 하나님으로 나타나신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하나님이 상한 심령에 어떤 모습으로 다가와 위로하여 주시는지 열왕기 상 17과 19장에 기록된 엘리야 선지자의 도피에서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17장에서 엘리야가 활동하던 시기의 북이스라엘은 영적으로 가장 어두운 밤을 지나고 있었습니다. 왕 아합과 그의 왕비 이세벨은 이스라엘의 전통적인 신앙을 버리고, 비와 풍요의 신이라 불리는 바알을 국가 종교로 삼았습니다. 엘리야는 아합 왕 앞에 당당히 나아가 선포합니다. “내 말이 없으면 수년 동안 비도 이슬도 내리지 아니하리라.” 이 선포는 단순히 기상 예보가 아니라, 생명의 주권이 바알이 아닌 여호와 하나님께 있음을 알리는 도전장이었습니다. 하지만 이 선포 직후, 엘리야는 아합의 분노를 피해 생명을 건 도피 여정을 시작해야만 했습니다.
하나님은 도망자가 된 엘리야를 아무도 모르는 그릿 시냇가로 숨기셨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아주 특별한 방법으로 그를 먹이셨습니다. 아침저녁으로 까마귀가 떡과 고기를 가져다주었습니다. 본래 까마귀는 본래 자신의 새끼도 돌보지 않을 만큼 탐욕스러운 새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본성까지 거스르며 당신의 종을 돌보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상식을 깨는 방법으로 우리를 먹이십니다. 내가 기대했던 통로가 막혔다고 절망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생각지도 못한 사람, 뜻밖의 상황을 '나의 까마귀'로 고용하셔서 당신의 삶을 지탱하게 하실 것입니다. 엘리야는 매일 아침 배달되는 떡을 보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오늘도 하나님이 나를 잊지 않으셨구나”라는 확신이었을 것입니다. 평강은 창고가 가득 찰 때 오는 것이 아니라, 공급하시는 분이 신실하다는 것을 깨달을 때 찾아옵니다.
성경은 시간이 흘러 그릿 시냇물조차 말라버렸다고 기록합니다(왕상 17:7). 최후의 보루마저 사라지는 절망적인 순간입니다. 때때로 우리가 의지하던 마지막 시냇물(직장, 건강, 조력자)이 마를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시냇물이 마른 이유는 하나님이 엘리야를 버리셨기 때문이 아니라, 그를 사르밧 과부의 집으로 옮겨 더 큰 기적을 경험하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마지막 남은 가루 한 움큼으로 떡을 만들어 대접한 과부에게, 하나님은 가뭄이 끝날 때까지 가루통과 기름병이 마르지 않는 기적을 베푸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 삶의 가뭄이 심해지고 이세벨 같은 세상의 위협이 당신을 두렵게 합니까? 하나님은 오늘 당신에게 말씀하십니다. “내 곁으로 와서 잠시 숨으라.”
그릿 시냇가는 고립된 장소가 아니라 하나님과 깊이 사귀는 장소입니다. 까마귀가 물어다 주는 아주 작은 위로의 조각들에 감사하십시오. 비록 시냇물은 마를지언정, 우리를 먹이시는 하나님의 사랑은 마르지 않습니다.
엘리야의 이야기는 단순히 “배불리 먹이셨다”는 것을 넘어, 지친 영혼을 어떻게 다독이시는지에 대한 하나님의 깊은 사랑을 보여줍니다. 이 대목에서 한 가지 이야기를 곁들여 보겠습니다
한 화가가 '평안'이라는 주제로 그림을 그리기로 했습니다. 많은 화가가 잔잔한 호수나 평화로운 들판을 그렸지만, 1등을 차지한 그림은 전혀 뜻밖이었습니다. 그 그림 속에는 거대한 폭포가 쏟아져 내리고 천둥번개가 치는 험한 절벽이 그려져 있었습니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그 절벽 틈새 작은 나뭇가지 위에 지어진 둥지 속에서 작은 새 한 마리가 엄마 새의 품 안에서 곤히 잠들어 있는 것이었습니다. 주변은 아수라장이지만, 보호자의 품 안에 있기에 누리는 절대적인 평안이었습니다.
엘리야에게 하나님은 바로 그 ‘둥지’가 되어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엘리야에게 "왜 무서워하느냐"라고 꾸짖지 않으셨습니다. 대신 그가 배고플 때 먹이시고, 지쳤을 때 잠들게 하시며, "네가 갈 길을 다 가지 못할까 하노라"라며 그의 연약함을 먼저 이해해 주셨습니다.
열왕기상 19장에 등장하는 로뎀나무 아래의 엘리야는 성경에서 가장 인간적이면서도 위로가 되는 장면 중 하나입니다. 갈멜산에서 850명의 거짓 선지자와 싸워 이겼던 당당한 영웅 엘리야가, 이세벨의 협박 한 마디에 무너져 광야로 도망친 순간이기 때문입니다.
엘리야는 하룻길을 걸어 광야로 들어가 로뎀나무 아래 앉았습니다. 그의 심신은 완전히 바닥이 난 상태였습니다. 그는 하나님께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거두시옵소서”라고 기도합니다. 이는 단순한 겸손이 아니라, 이제 할 만큼 했으니 차라리 죽여달라는 번아웃(Burnout) 상태의 절규였습니다. 그는 기도를 마친 후 로뎀나무 아래서 깊은 잠에 빠집니다. 극심한 스트레스와 피로가 그를 덮쳤던 것입니다.
히브리어로 ‘레템(Retem)’이라 불리는 로뎀나무는 사실 거대한 활엽수가 아닙니다. 사막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빗자루 모양의 가시 섞인 관목으로, 높이가 1~2m 남짓에 불과합니다. 이 나무가 주는 영적 교훈은 매우 깊습니다. 로뎀나무는 화려한 그늘을 제공하는 나무가 아닙니다. 잎이 거의 없고 가지가 앙상해 겨우 한 사람의 머리를 가릴 정도의 빈약한 그늘을 만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완벽한 환경(거대한 숲)에 있을 때만 위로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가진 것이 초라하고 인생이 메말랐을 때, 그 보잘것없는 로뎀나무 그늘조차도 하나님의 안식처가 될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엘리야가 자포자기하고 있을 때, 하나님은 그를 꾸짖지 않으셨습니다. 대신 천사를 보내 그를 어루만지시며 숯불에 구운 떡과 물 한 병을 주셨습니다. 로뎀나무는 하나님의 세밀한 배려를 상징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영적으로 실패했을 때 논리적으로 설득하시기보다, 먼저 먹이시고 재우시며 육체와 마음의 회복을 기다려 주시는 분임을 알려줍니다.
엘리야는 로뎀나무 아래서 받은 새 힘으로 40주 40야를 걸어 하나님의 산 호렙에 이르게 됩니다. 로뎀나무는 인생의 종착역이 아니라 재충전을 위한 간이역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로뎀나무 아래 잠시 멈추게 하시는 이유는, 우리를 포기하셨기 때문이 아니라 더 먼 길을 가기 위한 에너지를 공급하시기 위함입니다.
"로뎀나무 그늘은 세상에서 가장 작고 초라한 그늘이었지만, 엘리야에게는 하나님의 품 안처럼 가장 안전한 피난처였습니다." 혹시 지금 스스로가 '로뎀나무 아래의 엘리야'처럼 느껴지시나요?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숯불 떡과 물, 그리고 따뜻한 어루만짐이 당신 곁에 이미 와 있을지도 모릅니다.
엘리야를 돌보시고 그에게 쉼을 허락하셨던 하나님은 오늘에도 변함없이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가 된 저와 여러분을 성령으로 우리와 함께하시므로 위로의 은혜를 베풀어 주십니다. 이것을 인정하고 누려 보십시오! 아주 작은 것이라도 하나님께서 내게 위로하여 주신다는 것을 받아들일 때 우리는 하나님의 위로를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제 목회에서 빼놓을 수 없는 위로의 경험은 뜻하지 않는 문제가 불거져 교회를 내려놓고 떠나야 할 지경에 놓였을 때 나타난 주님의 위로였습니다. 얼마 있으면 떠나야 할 강단에 올라 무릎을 꿇었을 때 하염없는 통곡이 나왔습니다. 그렇게 울고 있는데 주님이 제 오른편에 등을 보이시며 서 계신 것입니다. 그분의 얼굴은 볼 수 없었지만, 영감으로 예수님도 머리를 숙이시고 울고 계셨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이것이 저에게는 큰 위로가 되었습니다. 나의 아픔에 찾아오시고 함께 울어 주셨던 주님의 사랑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주님의 음성이 제 마음에 세미하게 들려왔습니다. “종아! 내 사랑하는 아들아! 왜 우느냐? 나 하나로 만족할 수 없더냐? 모든 것을 잃었다고 탄식하지 말고 나로 인하여 기뻐할 수 없더냐?” 그때 주님의 음성이 분명하게 제게 들려지면서 깨달은 것이 있습니다.
이런 위로를 통하여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가 무엇인지 마음에 담아 두면서 더욱 하나님의 권면의 말씀이 제게 더욱 생생하게 들려 지는 것을 체험하였습니다.
히 13:24 “너희를 인도하는 자들과 및 모든 성도들에게 문안하라 이달리야에서 온 자들도 너희에게 문안하느니라”고 하였습니다. ‘문안하라’로 번역된 헬라어 원어는 ‘아스파조마이(ἀσπάζομαι)’입니다. 이 단어는 단순히 ‘안녕’이라고 말하는 것 이상의 풍성한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이 단어의 일차적인 의미는 ‘팔을 벌려 껴안다’, ‘기쁘게 맞이하다’입니다. 당시 고대 근동의 인사법인 입맞춤이나 포옹을 동반한 격한 반가움을 뜻합니다. 특히 이 단어는 상대방을 귀하게 여기고 존중한다는 태도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즉, 마지못해 하는 인사가 아니라 상대의 존재 가치를 인정하는 적극적인 행위입니다.
성경에서 성도 간의 문안은 단순한 에티켓이 아닌, ‘영적 연대감’의 확인입니다. 그들이 아무리 어려운 환경에 처하여 있었더라도 하나님의 위로가 성령을 통하여 그들에게 나타났고, 이런 경험이 그들에게 있었기에 예수님이 구주가 되심과 그분의 부활을 믿고 힘차게 따를 수 있었음에 대한 확증을 보이는 표현이었습니다.
구약의 엘리야가 경험했던 '어루만짐'과 '세미한 소리'는 오늘날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님의 내주하심과 세밀한 인도하심의 예표(Type)라고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성령을 소개하실 때 ‘보혜사(Para-kletos)’고 부르셨습니다. 이 단어의 원어적 의미 자체가 하나님의 위로 방식을 고스란히 담고 있습니다. 성령은 ‘파라(곁에)’와 ‘클레토스(부름받은)’가 합쳐진 말로, 고난당하는 자의 곁에 서서 돕는 ‘변호사’나 ‘조력자’를 뜻합니다.
"하나님은 우리 밖에서 우리를 위로하시던 분에서, 성령을 통해 우리 안에서 우리와 함께 울고 웃으시는 영원한 위로자가 되셨습니다."
하나님의 위로와 권면으로 우리는 시들지 않는 생생한 신앙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워하시는 승리의 믿음으로 전진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