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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거래혜] 1.천하제일(天下第一)의 기연
만력(萬曆) 28년.
악양(岳陽) 부근의 천민 거주지, 무지촌(無知村)에서 단 한 명, 공자(公子)라 불리는
소년이 있다.
사문도(謝文道)... 바로 그다.
8년이란 시간이 흘러, 어느덧 사문도의 나이도 13세. 어릴 적 귀여웠던 이목구비(耳目
口鼻)가 점차 뚜렷해지며 서서히 미소년(美少年)으로 만들어지고 있었다.
"곽 군사(軍師)님 오실 때가 됐나...?"
책 속에 파묻혀 읽고 있는 사문도. 사문도가 처음으로 꺼낸 말이다.
"예, 주군(主君). 분명... 오늘이 약속하셨던 날이에요."
옆에 있던 소년이 대답한다. 역시 많은 소녀들의 시선을 끌 만한 용모지만, 사문도에
비하면 새 발에 피다.
"천비(天飛)... 다른 아저씨들은?"
사문도가 책을 덮으며... 아무렇게나 집어 던지더니 또 묻는다.
"어제 저녁에 나가셨으니까... 정오(正午) 무렵이면 오시겠죠."
강천비(姜天飛). 그 소년의 이름이다. 무지촌 생활에서, 사문도를 충(忠)으로 섬기는
소년으로, 사문도보다 한 살이 작다. 사문도에게 배운 무공도 있어, 실력도 나쁘진 않
은 편이다.
"주군, 걱정이라도 되세요?"
"아니. 혈귀(血鬼) 아저씨가 동행(同行)하셨으니... 괜찮으리라 믿어."
"훗... 역시, 괜한 질문을 했군요."
이마에 송글송글 맺힌 땀을 닦으며, 강천비는 도(刀)를 쥐고 수련에 들어간다. 푸른
가을하늘... 그리고 시원한 바람이 강천비의 무더움을 씻어주는 듯하다.
책을 덮고, 강천비의 섬세한 동작을 보고 있던 사문도가 고개를 끄덕인다.
'하루가 다르게 동작이 좋아지는군. 처음 딱딱하던 움직임이 어느새 물 흐르듯 바뀌어
버렸으니.
강호 1류 무사 정도는 되어야, 천비를 꺾으리라 장담할 수 있을 것이다. 놀라운 일이
야...'
고개를 숙이며, 다시 독서에 몰두하려던 사문도의 귀에, 별안간 낯익은 목소리가 울려
퍼진다.
"소궁주(小宮主)님!!"
곽경환(郭更換)의 목소리다. 그 목소리에 무표정이던 사문도의 얼굴에 안도감이 떠오
른다.
사문도가 몸을 일으켜 곽경환의 보따리를 받는다.
"뇌 아저씨는...?"
"하하, 간만에 좀 쉬다 오겠노라고 악양루(岳陽樓)로 간 걸로 알고 있습니다."
"악양루라... 곧 오시겠군요."
사문도가 보따리를 받아 마루에 놓으며 풀어보려는 찰나,
"하하!! 소궁주님, 이번에는 확실히 수확이 좋은 듯하더군요."
손으로 어깨를 주무르며 파초선(芭蕉扇)을 내젓는 곽경환의 얼굴에도 안도감이 드리운
다.
"군사님, 냉수라도 한 잔..."
"아, 고맙네. 마침 물이라도 마실까 하던 참이었는데..."
강천비가 건네준 냉수 한 사발을 받으며 마시는 곽경환. 이때, 의아한 눈초리로 자신
을 바라보는 사문도의 시선을 느끼게 된다.
"군사님, 이 무서(武書)... 진짜 북해빙궁(北海氷宮)의...?"
"그렇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복사본이긴 하지만, 내용엔 이상이 없는 듯하다고 했으니
까요."
"이런 무서가... 어떻게 낙양(洛陽)에 있었는지...?"
믿기 힘들다는 듯, 사문도가 그 무서를 바라본다.
"최근 강호(江湖)의 소문을 들어 보니, 건주여진(建州女眞)의 노아합적(奴兒哈赤: 누
르하치)이란 자가 급성장하여 여진(女眞)을 통일하고, 북해빙궁마저 공격하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그 때 흘러나온 책이 아닐까 싶습니다만..."
"건주여진이... 북해빙궁을?"
"예. 최근 여진의 움직임이 범상치 않은 듯합니다."
"여진이라... 앞으로, 명(明) 제국의 걸림돌이 될지도 모른다는 말씀을 하고 싶으신
것 같군요."
사문도의 날카로운 지적에, 곽경환이 고개를 끄덕인다.
"군사님, 앞으로 두 시진(時辰) 정도만 제게 아무도 보내지 마세요. 수라쌍성(修羅雙
星) 아저씨들이나, 뇌 아저씨라도 상관없어요."
"알겠습니다!"
그리고 곧바로 강천비를 향해 눈길을 돌린다.
"천비, 넌 대지양단(大地兩斷)의 첫 초식 수련을 시작해도 괜찮을 것 같으니... 이걸
읽어라."
하며, 아무렇게나 돌아다니고 있던 무서 한 권을 강천비에게 던진다.
"예...? 버, 벌써... 대지양단을...?"
"너 정도면 충분해. 내공(內攻)만 뒷받침된다면 말이지. 일단 읽어보고, 내공 수련에
들어가도록 하란 말야. 알겠지?"
"예...!!"
"아까 말한 대로, 두 시진 동안은 아무도 접근 못하게 막아 줘."
하며, 그 두꺼운 무서를 들고 사문도가 방으로 사라진다.
"휴우... 난 자려니, 천비 너도 좀 쉬지 그러나."
"아니, 주군께서 명을 내리셨으니... 여길 지킬 생각입니다."
곽경환은 강천비의 굳은 의지에 내심 감탄하며 방으로 들어간다.
"그럼... 수고하게나."
"편히 주무세요."
곽경환과 사문도가 사라지고, 한순간 새 지저귀는 소리만 울린다. 그리고 얼마 후엔
책장 넘기는 소리만 들릴 뿐...
두 시진 정도가 지나갔을 무렵, 강천비가 무서를 덮고 눈을 감으며 숨을 들이마신다.
"후우... 주군은 아직이신가...?"
하며 혼잣말을 중얼거릴 때, 발자국 소리가 강천비의 귀에 울려 퍼진다.
"누구지...?"
하며 눈을 떠 보니, 세 사람이 이리로 오고 있다.
"여... 천비, 여기서 뭘 하는 거냐?"
"곽 군사는?"
태무극과 오태청의 질문에, 강천비가 빙긋 웃으며 몸을 일으킨다. 태무극과 뇌명은 얼
굴이 벌겋게 물들어 있는데 반해, 오태청은 그리 취하지 않은 듯하다.
"곽 군사님께서는 주무시고, 주군께서는 독서 중이십니다."
"호오... 곽 군사가 좋은 무서라도 건진 모양이구만."
오태청이 중얼거리자, 강천비가 고개를 갸웃거린다.
"글쎄요. 잘 생각은 안 나지만, 북해... 뭐라고 하신 것 같은데 말예요."
그 말에, 태무극과 뇌명의 얼굴에서 술이 확 깨는 게 눈에 들어온다.
"혹시... 북해빙궁... 북해빙궁 말인가?"
"맞아요! 북해빙궁... 깜빡했네요."
그러자, 그 말에 정신이 번쩍 드는 듯 태무극과 뇌명의 두 눈에서 취기가 완전히 날아
간다.
"어, 어떻게... 북해빙궁의 무서가 여기까지..."
오태청도 놀랍다는 듯, 혼잣말을 내뱉으며 생각에 잠긴다.
'소궁주님께서 분명히 재능이 있으시긴 하지만... 북해빙궁의 궁주조차, 오의(悟意)를
깨닫는데 2년이나 걸렸다는데... 분명, 이해하시는데 많은 시일이 소모될 테지... 빠
르면 반년 정도...?'
하며 고개를 내젓던 찰나, 문 열리는 소리와 함께 곽경환이 걸어 나온다.
"곽 군사, 북해빙궁 무서를 구했다고 했던데..."
뇌명의 질문에, 곽경환이 하품을 늘어지게 하더니 대꾸한다.
"으하함.... 구했지요. 항상 구하던 낙양서점(洛陽書店)에서."
비뚤어진 관건(關鍵)을 바로 쓰더니, 곽경환이 마루에 털썩 주저앉는다.
"거 참. 낙양서점에... 그런 고가물(高價物)도 있단 말이오?"
"그러게 말입니다. 주인이란 사람도, 그 서적의 가치를 모르더군요. 은자 한 냥에 사
왔지요."
네 사람은 마루에 앉고, 강천비는 사문도의 방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긴다.
'북해빙궁... 역시, 새외(塞外)에서 제일 까다롭다는 무공을 단시간에 독파(獨破)하기
엔 힘들단 말일까.'
이때, 사문도의 방문에 그림자가 비친다. 그에 강천비가 고개를 돌리려던 찰나, 문 열
리는 소리와 함께 사문도가 무표정한 얼굴로 걸어 나온다.
"하하! 소궁주님, 저희들 왔습니다!!"
태무극의 말에, 모두들 인사를 한다. 사문도는 웃음을 지으며,
"좀 늦으셨군요. 그래, 뇌 아저씨는 좀 쉬다 오셨어요?"
"예, 소궁주님! 오다가 형님들을 만나 한 잔 하고 왔습니다."
"그래도... 술은 그리 좋은 게 아니니, 너무 많이 드시진 마세요."
흑피(黑皮)로 된 신발을 신으며 마당 중앙에 우뚝 서는 사문도.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흑색 일색이다.
'정말, 멋진 분이시다...!'
강천비는 사문도를 볼 때마다 이런 생각이 든다. 굳게 다문 연분홍색 입술과 흰 피부,
별처럼 빛나는 두 눈동자는 신(神)이 만들어도 이렇게 잘 만들지 못하리라 믿는다.
이때, 사문도가 쌍수(雙手)를 가슴 앞으로 모으고... 시간이 얼마 안 가, 양쪽 소매가
부풀어오른다.
"...?"
다섯 사람이 의아한 눈초리로 이를 바라본다. 이때, 사문도의 쌍수 중앙에 희디흰 백
색 기류(氣流)가 소용돌이친다.
"서... 설마...!!"
이를 바라보고 있던 태무극이 어처구니없다는 듯 사문도를 바라본다. 하지만 나머지
사람들은 아직 모르겠단 눈빛이다.
이때, 사문도가 쌍수를 빙 돌리더니, 앞을 향해 쭉 뻗으며 소리친다.
"빙백신장(氷白神掌)!!"
그러자 소용돌이치던 그 기류가, 일순간 번쩍이며 세찬 한풍(寒風)과 함께 큰 나무로
돌진하고... '쾅' 하는 소리와 함께 그 큰 나무가 두꺼운 얼음으로 뒤덮힌다.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두 눈을 껌뻑이며, 방금 전에 있었던 일을 가만히 되새겨보
는 5인. 분명 북해빙궁 최고의 절기라고 이름난 빙백신장이다.
워낙 심오(深奧)한 무공인지라, 범인(凡人)은 평생을 연구해도 깨달을 수 없다는 오의
를, 사문도는 한 번의 독서로 깨달아버린 것이다. 하지만, 당사자인 사문도 자신은 불
만족스런 표정인데...
"쳇... 내공이 모자라니, 위력도 형편없군!"
거대한 나무 한 그루를 얼려버릴 정도의 위력을, 사문도는 형편없다고 평가하는 것이
다. 그리고 그 말에 다섯 사람이 다시 경악한다.
"휴... 좀 쉬다 올 테니까, 걱정 마시고 저녁 먼저 드세요."
강천비를 제외한 네 사람은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린다.
"주, 주군... 전...?"
"내공 수련하고 있어. 호위는 필요 없으니까."
"아, 예..."
하늘을 바라보던 사문도가 목적지를 정하고, 그리로 움직인다.
몇 초 지나지 않아, 이들 다섯은 사라진 사문도의 뒷모습만 멍하니 떠올린다.
장강 중류의 명소(名所), 동정호(洞庭湖)는 빼어난 경치와 맑은 물 탓인지, 사시사철
관광객들의 발걸음이 끊이지 않는 곳이기도 하다. 근처 악양루(岳陽樓)에서 동정호를
바라다보며 마시는 술맛은, 가히 천하제일이라 불릴 정도라고 한다.
그런 동정호의 유람선(遊覽船)을 타고, 사문도가 유유히 즐거운 한때를 보내고 있다.
“이렇게 혼자 나오는 것도... 몇 개월 만인지...”
안개로 자욱한 동정호 안은, 십 장 안팎의 물건은 구별조차 하기 힘든 듯하다.
사문도가 사람들의 시선이 자신에게 쏠려있다는 걸 느끼자, 벌레 씹은 얼굴이 된다.
대체적으로 소녀들은 흠뻑 빠진 듯하고... 또래의 소년들에겐 그런 사문도가 좋을 리
가 없다.
다만, 사문도의 전신에서 풍기는 고독이 아무도 근접하지 못하는 근원이었다.
‘검이라도 갖고 오길 잘 했군. 앞으로는 이런 곳은 좀 자제해야 되겠어.’
하며 난간에 기대앉아 맑은 동정호를 바라보며 생각에 잠기려는 찰나,
“어이, 너 때문에 경치가 잘 안 보인다! 비켜줬음 좋겠는데!!”
사문도가 시선을 들어 그 자를 바라본다. 약관(弱冠) 정도나 됐음직한 사내가 자신을
째려보고 있었던 것이다.
“천풍공자(天風公子) 장유승(長有勝)이다!!”
“천풍공자라면... 사파(邪派) 사냥꾼?”
여기저기서 무림인(武林人)으로 보이는 듯한 사람들이 수군거리고 있다. 그리고 그럴
무렵, 사문도가 빙긋 웃으며 대꾸한다.
“당신이 여기 전세 낸 건 아닐 테고... 정 경치가 보고 싶다면, 당신이 자리를 옮기
는 건 어때?”
그 말에, 삽시간에 사람들의 시선이 그리로 쏠린다. 사문도는 여전히 태연하기만 하다
.
“저, 저런...!!”
“쯧, 또 사람 하나 맞는 꼴 보게 됐구만!!”
여기저기서 안 됐다는 듯 사람들이 수군거리는 가운데, 장유승이 사문도의 앞에 멈춰
선다.
“너... 검을 갖고 있는데, 무림인이 아니란 말이냐?”
“물론 무림인이지.”
“천풍공자... 내 소문을, 듣지 못한 게냐?”
“글쎄... 천풍공자? 무학(武學) 연구하기도 바쁜 판에, 내가 네깟 인간의 이름을 왜.
..”
사문도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장유승의 주먹이 사문도의 오른쪽 턱에 꽂히고... 사문
도는 저만치 갑판(甲板)에 나가떨어진다.
차마 못 보겠다는 듯, 사람들은 눈을 질끈 감아버린다. 하지만, 얼마 후 간단히 일어
서는 사문도의 모습을 보고 놀란다.
“뭐야, 그거... 그것도 주먹으로 친 거야...? 간지럽군, 간지러워.”
사문도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조소를 날리며 일어서서 오른쪽 뺨 언저리는 누른다.
장유승은 도저히 믿기 힘들다는 표정이다.
‘약하게 치긴 했지만... 분명 얼얼할 텐데...’
“손버릇이 더럽군. 정파(正派) 출신인 듯한데 말야. 너나 나나 돈 내고 탄 건 마찬가
진데... 심하잖아?”
둘의 나이 차는 분명 적지 않다. 하지만 자꾸 반말 투로 나오는 사문도를 바라만 보고
있자니 장유승이 부아가 치밀어 오르는 건 너무도 당연한 일이다.
“황당하기 그지없군. 네 어머니께서 예절 교육도 안 시켜 주더냐, 꼬맹아?”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사문도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싹 사라진다. 누구보다 모친을
사랑했던 사문도이기에, 화가 치밀어 오르는 것을 참기가 힘들 것이다.
“뚫린 입이라고... 연장자(年長者)라고, 그렇게 지껄여도 된다고 배운 누구보다 낫다
생각하진 않나?”
울컥하는 성격을 이기지 못한 장유승이 이번엔 전력으로 주먹을 날린다.
“대가릴 까놓을 자식! 뒈져 버려!!”
사문도의 복부(腹部)에 그 무지막지한 주먹이 꽂히려는 찰나, 사문도의 신형(身形)이
사라진다.
“...!!”
장유승은 실소를 뱉으며 주위를 두리번거린다. 이때, 장유승은 뒤에서 울리는 사문도
의 목소리에 전신이 굳어 옴을 느낀다.
“다른 건 모르겠지만... 불쌍하신 우리 어머님 욕하는 건, 절대 용서 못 한다.”
한없이 차갑고도 고요한 목소리에, 장유승이 잠시 주춤하는 사이, 사문도의 오른발이
장유승의 등 한복판에 꽂힌다.
“선풍각(旋風脚)!!”
미처 막을 틈도 없었던 터라, 장유승은 그대로 동정호 속으로 곤두박질친다.
“쳇... 힘도 없는 주제에 까불기는... 그러고도 사파 사냥꾼이라니, 한심한 녀석!!”
사문도가 두 손을 탁탁 털며 흐트러진 상의(上衣)를 가다듬는다. 이때, 물에 빠진 생
쥐 꼴을 한 장유승이 숨을 헐떡거리며 갑판 위로 올라온다.
“벌써 올라오셨나? 계실 바에, 아예 푹 잠겨 있는 게 더 좋았을 텐데...”
사문도의 조롱 어린 말을 씹으며, 장유승이 부들부들 떤다.
“네 자식이... 감히 날 이 꼬라지로 만들고도 살아남기를 바란 건... 아닐 테지...!!
”
“미안하지만, 내가 죽기보다야 네가 죽는 게 중원(中原)을 위해서 훨씬 경제적일 걸?
”
“더 이상 네깟 애송이랑 노닥거릴 시간 없으니까... 죽어주면 좋겠구나!!”
장유승이 허리에 차고 있던 검을 뽑아 사문도에게 달려든다. 그제야 사람들이 슬금슬
금 피하기 시작한다.
“선풍각으로... 정신을 못 차렸겠지. 물론...!!”
사문도는 고개를 내저으며 이리저리 날아오는 장유승의 검을 피해낸다. 사문도는 피하
면서도 빙백신장의 구결을 떠올린다.
‘이걸로, 당분간 반성이나 좀 하는 게...?!’
쌍수를 펼치기 직전, 어디선가 들리는 미세한 파공성에 사문도가 급히 몸을 숙인다.
“허헉...”
쿵 소리와 함께, 장유승이 바닥에 고꾸라진다.
‘침(針)이었던 것 같은데...?’
쓰러진 장백경의 목덜미에 꽂혀 있는 쇠털만한 침을 보고, 사문도가 고개를 갸웃거린
다.
‘점혈(點穴)을 짚었다... 그냥 잠만 들게 해 놓은 것이로군. 정교하면서도 확실한 솜
씬데... 누구지?’
침을 뽑아 가볍게 쥐고 사문도가 얼굴을 찌푸린다.
‘저 놈도 저렇게 됐다는 건... 최소한, 저 놈 편은 아니란 뜻이겠지?’
하며 사문도가 침이 박힌 장유승을 이리저리 훑어본다. 바로 그때다.
“그거, 이리 줘!!”
사문도가 막 침을 면밀히 살피려는 순간에, 한 소녀가 낭랑한 목소리로 사문도에게 그
침을 내놓으라고 요구한다.
“이 침, 네 거야?”
“그럼, 아니란 말야?”
당당한 소녀의 태도에, 사문도가 피식 웃으며 하나 더 묻는다.
“이 침을 던진 이유가 뭐지?”
사문도가 소녀의 두 눈을 직시하며 귀찮은 듯 묻는다. 자신보다 약간 작은 키에, 대조
적으로 백의(白衣)를 입고 있으며 무엇보다도 첫인상이 당차게 느껴진다.
이목구비(耳目口鼻) 중에서 큰 눈이 무척 인상적이며, 단정히 묶은 머리카락은 어깨에
서 찰랑거리고 있다.
“그딴 질문 답 원하지 말고, 내 거니까 돌려달라고!!”
소녀의 차가운 반응에 사문도가 피식 웃으며 입을 연다.
“쳇, 도둑이 큰소리친다더니, 이런 재수 없는 일이 다 생길 줄은...”
“뭐야...?”
소녀가 이맛살을 찌푸리며 독사눈으로 사문도를 노려본다.
“경고다. 내가 순순히 달라고 할 때 준다면 그냥 용서해 주겠지만, 그게 싫다면 여기
에 평생 잠들게 해 줄 테니까 아무 거나 선택해!”
소녀가 앙칼진 목소리로 소리치지만, 사문도는 더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천천히 갑판
으로 걸어간다.
“도대체 어디서 이런 천방지축(天方地軸)이 나타나서 이렇게 사람 피곤하게 만드는
거야...”
사문도가 혼잣말을 내뱉으며 아까 있던 난간에 기댄다.
“야, 너!! 죽어도 좋단 말이지?”
펄펄 뛰며 악을 쓰는 소녀를 외면한 채, 사문도가 눈을 감으며 대답한다.
“얼굴이 철면피(鐵面皮)라도 유분수지... 경고다. 조용히 해라. 세상은 네 맘대로 안
된다는 걸, 이번 기회에 가르쳐 줄 테니!!”
추상같은 사문도의 태도에 소녀는 한순간 움찔하다가, 수치심으로 떨리는 손가락으로
침을 뭉텅이로 뽑는다.
“감히 날 깔봐? 소원대로 죽여주마. 폭우이화침(暴雨梨花針)!!”
삽시간에 소녀의 쌍수에서 절기 하나가 펼쳐진다.
“폭우이화침이닷!?”
“피, 피하자!”
실력이 딸리는 무림인들은 이리저리 피해 다니고 있다. 그들이 피해다니고 있을 무렵,
사문도의 얼굴에서는 순간적으로 주름이 새겨진다.
‘폭우... 이화침...!?’
왜 모르겠는가. 폭우이화침은 천마궁(天魔宮)의 혈겁(血劫). 그 사건의 주역 세력 중
하나인 사천당문(四川唐門)의 독문 무공란 것을.
이화송이들의 환영(幻影)이 폭우처럼 쏟아진다. 하지만 사문도는 침착하게 쌍수를 가
슴에 모으고 정신 통일한다.
“빙백신장!!”
빙백신장을 날리며, 사문도는 가슴 아픈 기억을 떠올린다.
‘당세천(唐世天)의... 무남독녀...?’
사문도의 빙백신장에 기(氣)가 더해지자, 삽시간에 환영이 깡그리 사라진다.
“앗!!”
이화 환영이 사라지자, 소녀는 급히 그 자리에서 몇 걸음 떨어진다. 정신을 차리고 보
니, 방금 전까지 서 있던 자리가 새하얗게 얼음으로 뒤덮여 있다.
그리고 소녀의 뒤로 거구의 사내가 나타난다.
“내... 내 폭우이화침을...?”
소녀가 믿을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내젓더니 사문도의 차가운 눈동자를 바라본다. 그
리고 그때, 그 소녀의 어깨를 감싸주는 사내가 있다. 소녀의 어깨를 감싸주고 있는 사
내는, 다름아닌 당세천이다.
‘저 나이에 빙백신장을 사용했다... 믿기 힘들지만...
분명 중원인(中原人)인데... 북해빙궁의 무공을 그대로 사용하다니...?’
당세천이 사문도와 얘기해봐야 되겠다는 생각을 한 것은 그때였다.
“설란(雪蘭)아... 너는 여기 있거라.”
“예...”
당세천이 뚜벅뚜벅 걸어 사문도 앞에 멈춘다. 사문도는 여전히 곱지 않은 시선이다.
“누구신지?”
사문도의 당돌한 질문에 당세천이 고개를 갸웃거린다.
‘빙백신장을 사용한 소년이라... 북해빙궁과 관련이 있을까...?’
“누구시냐고 묻지 않았습니까?”
다그치는 사문도의 음성에 당세천은 얼굴을 살짝 찌푸리며 무거운 얼굴로 대답한다.
“사천당문의 문주(門主), 당세천이라 한다.”
그 말을 들은 사문도의 전신이, 걷잡을 수 없이 세차게 떨려온다.
‘역시... 내 짐작이, 옳았단 말인가...!’
“내 신분을 밝혔으니... 소년도 밝히는 게 예(禮)가 아니겠는가?”
당세천의 질문에, 사문도가 잠시 머뭇거린다.
‘이 자가 내 이름을 알고 있을지는 의문이지만, 안 밝힌다면... 내 처지가 곤란해진
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친 사문도는 결국 사실대로 말하기로 결정한다.
“... 사문도라 합니다.”
“사... 문도...?”
당세천이 사문도의 이름을 곰씹어 보지만, 전혀 생소한 이름이다. 그제야 사문도가 한
시름 놓는다.
“저 소녀가... 따님입니까?”
아직도 약간 얼떨떨한 표정의 소녀를 가리키며 사문도가 묻는다.
“그렇다네. 내 무남독녀로, 설란이라 하지.”
“시건방진 구석이 있더군요. 실력은 괜찮은 듯 하지만...”
사문도의 말에 안타까운 듯 고개를 끄덕이는 당세천.
“어릴 적부터 너무 오냐오냐하며 키웠더니... 지금 이 모양이라네. 참, 소협(小俠)은
... 나이가?”
“정확히, 올해 열 셋입니다.”
“그런가. 우리 설란이와 동갑이로군.”
뭐가 그리 좋은지, 얼굴 가득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이는 당세천.
“사문과 스승을... 가르쳐줄 수 있는가?”
당세천의 질문에, 사문도가 일순간 당황한다.
“사문과... 스승님 말씀인가요?”
“그렇다네. 어떻게 소협 같은 나이에, 무공을 그 정도 실력까지 키운 사림이 누군지
궁금해지는군.”
당세천은 사문도의 답변을 기다린다. 사문도는 마땅히 할 말이 없어 발만 동동 구르고
있다. 이때,
“도, 독각혈룡(毒角血龍)이다!”
누군가의 외침에, 모두들의 시선이 그리로 쏠린다.
“...!!”
독각혈룡은, 동정호에 가끔씩 나타난다는 희대(稀代)의 명물이다.
비단같이 부드러우면서도 쇠만큼 단단한 비늘로 무장하고 있다 한다. 그리고 독각혈룡
의 내단(內丹)은 족히 일 갑자(甲子) 이상의 내공을 일시에 올려주는 효능이 있다고도
한다.
하지만, 이번 독각혈룡은 거의 5백 년 이상 묵은 듯하다. 적어도 3갑자 이상은 그냥
얻을 수 있을 정도다.
“호오... 전설인줄로만 알았던 독각혈룡을... 이곳에서 볼 줄은...!”
사문도에게 했던 질문은 잊어버린 듯, 당세천은 핏빛을 한 비늘을 덮고 있는 형형한
눈빛의 독각혈룡을 바라본다. 바로 이때, 당세천에게로 한줄기의 전음이 날아온다.
‘문주님, 몽고(蒙古)에서 사신이 오고 있다는 소식입니다!’
갑작스레 울려 퍼지는 전음에, 당세천이 흠칫하다가 전음을 날린다.
‘지금 귀환하겠다. 그 때까지, 잘 영접하고 있도록!’
‘존명!’
그리고 전음이 끊어진다.
“독각혈룡을... 잡을 생각인지요?”
사문도의 질문에, 잠시 생각하던 당세천이 입을 연다.
“난 됐네. 휴양차 온데다, 난 내공엔 자신이 있는 몸이라 말일세.”
사문도가 실웃음을 짓더니 천천히 갑판으로 걸어간다. 그러자 주변에서 구경하고 있던
사람들이 알아서 길을 만든다.
이미 실력 있으면서도 성격 급한 몇몇 무림인들은 독각혈룡에게 뛰어든 채다. 사문도
는 독각혈룡을 놓치기 싫은지라, 가볍게 몸을 풀고 뛰어들 준비를 해본다.
“사 소협, 가 볼 생각인가?”
당세천의 질문에, 사문도는 고개를 끄덕이며 쥐고 있던 침(針)을 당세천에게 날린다.
“언젠가 다시 만날 날이 있을 겁니다. 그때까지 만수무강(萬壽無疆)하시고... 수련
많이 해 두시길.”
사문도가 동정호로 뛰어내리자, 첨벙 소리는 나지 않고 물살 위로 사문도가 달리는 모
습만 비친다.
“저, 저 경공술(輕功術)은...?!”
“사라졌다는 무력답수(無力踏水)가 아닌가!!”
여기저기서 무림인들의 경악성이 터지는 가운데, 당세천이 사문도가 던진 침을 받고
생각에 잠긴다.
‘사문도라... 기묘한 소년이로군.
빙백신장도 그렇고... 사라졌다는 경공술인 무력답수까지 전개하는 걸 보면...’
이때, 뒤에 있던 당설란이 유유히 사라지는 사문도의 뒷모습을 보며 이를 간다.
“두고 보자... 다음에 만나면, 오늘의 치욕은 꼭 갚아주고 말 테니...!!”
당세천이, 뾰루퉁한 표정으로 혼잣말을 내뱉는 당설란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다가 얼굴
을 찌푸린다.
‘그러고 보니... 그 녀석, 생김새나 분위기나... 한 사람을 꼭 빼닮은 것 같기도 한
데...’
천마궁(天魔宮)에서 처치했던 사무종(謝武宗)과 많은 게 닮았던 것이다.
무엇보다 죽기 직전에 빛을 발하던 사무종의 눈동자를 박아놓은 듯, 반짝이는 사문도
의 눈동자가 나무도 비슷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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