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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신상담<오왕 합려(闔閭), 부차(夫差), 월왕 구천(句踐)>
와신상담 臥薪嘗膽<오왕 합려(闔閭), 부차(夫差) - 월왕 구천(句踐)>
생각했던 일이 불의의 암초를 만나 좌초되거나 타인의 견제와 방해로 어긋났을 떄 와신상담의 고사를 떠올리게 된다. 여기서 와신臥薪은 복수에 뜻을 품고 아침저녁으로 섶에 누워 출입할 때마다 사람들에게 시켜 외치게 했다는 오나라 합려의 아들 부차와 관계된 말이고 “부차야, 너는 월나라 사람들이 너의 아버지를 죽인 것을 잊었느냐?
상담嘗膽은 부차에게 잡혀가 온갖 모욕과 치욕을 감당했던 월나라왕 구천句踐의 복수심의 발현으로 생겨난 고사이다.
월나라로 돌아온 구천은 몸을 수고롭게 하고 속을 태우면서, 자리 옆에 쓸개를 놓아두고 앉거나 누우면 쓸개를 바라보았으며 먹거나 마실 때 또한 쓸개를 맛보며 ‘너는 회계의 치욕을 잊었느냐?’고 스스로에게 말하면서 설욕의 강한 의지를 불태웠다.(吳旣赦越, 越王句踐反國, 乃苦身焦思, 置膽於坐, 坐臥卽仰膽, 飮食亦嘗膽也. 曰, 汝忘會稽之耻邪.) 구천은 손수 밭 갈고 부인은 길쌈을 하였으며, 고기를 먹지 않고 현인을 찾고 빈객을 우대하면서 백성들과 고락을 같이하며 부국강병하며 치욕을 되갚을 복수의 칼을 갈았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합려, 부차, 구천의 일생을 지켜보면서 원한은 원한을 낳고 복수는 또 복수를 낳는 아픔과 악순환의 고리를 바라보게 된다.
짧은 생을 살면서 원한과 복수의 생이 얼마나 고통스럽고 원한을 갈고 간 시간 만큼 생의 시간도 짧아지게 됨을 자각하게 된다.
다만 생각해 볼 수 있는 점은 절망적 상황이 거기서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임을 알게 되고 눈을 뜨게 된다면 와신상담이 복수극이 아니라 용서와 관용으로 승화되어 지난날을 해석할 수 있지는 않을까? 복수의 기저에는 공포가 있고 용서의 기저에는 사랑만이 있을 뿐이다.
춘추오패의 일인인 초장왕 (楚莊王)이 죽은후 초(楚)와 진(晉)이 남북으로 대치하고 제(齊)와 진(秦)이 동서도 견제하는 4강시대가 된다. 이시기에 남쪽에서 오(吳)와 월(越)이 본격적으로 등장을 하게되는데, 주요한 인물은 춘추오패에서 4번째 패자가 되는 오왕 합려闔閭와, 마지막 패자 월왕구천句踐, 그리고 오왕합려의 둘째 아들로 춘추오패에 넣기도 하는 오왕 부차夫差가 이 시기에 오, 월 스스로는 황제 후손을 주장하였다.
현재는 오는 주나라 희성, 월은 하나라 사성으로 정의 된다. 사마천은 사서에서 월나라 국성은 사(姒)씨로서 하왕조에서 나왔다고 한다.
오(吳)나라는 주문왕의 큰 아버지가 만든 나라라고 전해지는데, 주나라의 고공단보(古公亶父, 주태왕(周太王), 주나라 시조)의 세명의 아들 중 장남 오 태백(吳太伯, 오나라의 시조, 주태왕의 장자)과 차남 중옹(仲雍)이 남쪽으로 내려가 나라를 세우고 국호를 구오(句吳)라 칭한다. 그 뒤 태백이 죽고 아들이 없어 중옹이 이어 받았다. 제19대 군주 수몽이 즉위를 하자 국호를 구오에서 구(句)를 빼고 오(吳)나라로 국호를 개칭하고, 이때부터 왕을 칭했다. 오왕 합려는 제24대 군주로 오왕으로서는 제6대 왕이다.
월(越)나라는 하(夏)나라의 시조인 우(禹) 임금의 후손으로 알려져 있다. 월나라 왕성은 고(顧)씨인데 중국에서 "구"로 발음되므로 구씨이다.
월은 고대 남방 민족의 통칭으로 이 지역 사람들과 중원 사람들과는 언어가 달라 대화가 되지 않았다. 중국에서 백월은 '배예'이며 중국 '배', '백'씨의 일부는 백월과 관계한다고 믿어진다.
오왕 합려闔閭
합려(闔閭, ? - 기원전 496년, 재위 : 기원전 544년 ~ 496년)는 중국 춘추전국시대 오나라의 제24대 임금이며, 제6대 왕으로, 휘는 광(光)이다. 사기 오태백세가(史記 呉太伯世家)에 의하면, 공자 광의 아버지의 제번(諸樊)은 오의 초대 국왕 수몽(寿夢)의 장자였다. 수몽에는 이외에 3명의 아들이 있었고 그 중에서도 막내 계찰은 현인으로서 명성이 자자했다. 아버지 수몽도 거기에 기대하여 계찰을 차기 왕으로 정하고 싶은 마음이 바라고 있었다. 그러나 계찰(季札)은 형을 두고 자신이 왕위에 즉위하는 것에 원치 않고, 받으려고 하지 않았다. 거기서 우선 제번이 왕위를 이어, 그 후를 동생인 여제(余祭)가 잇는 등 형제 계승의 순서에 이었고, 마지막에 계찰에 왕위가 오도록 하였다. 그러나 계찰은 여매(余昧)로부터 왕위를 양보하지만, 거부하여 도망해 버려, 왕위는 결국 여매의 아들인 요(僚)가 계승되게 되었다.
이것에 광은 불만을 품었다. 지금까지 형제의 사이에 차례로 왕위를 돌려 왔으니까 계찰이 왕이 된다면 어쨌든, 계찰이 도망간 다음은 차례대로 장자의 아들인 자신이 왕위를 이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줄곧 생각했다. 그는 자신의 불만을 숨기면서 요를 시중들어 장군으로서 활약하고 있었다. 그 때, 초나라의 오자서가 망명해 와 광의 야망을 헤아렸고, 암살자 전제(専諸)를 추천했다. 전제는 요에게 다가가 물고기 요리를 올렸다, 물고기 안에 감추고 있던 비수를 꺼내어 오왕 요를 찔러 죽였고, 스스로도 또한 호위에 살해당했다고 기록되고 있다.
요가 죽은후 공자 광은 즉위해 오왕합려가 된다. 오자서, 손자병법의 손무와 함께 강대국 초나라와 전쟁을 별였고 기원전 506년에는 당(唐)나라, 채(蔡)나라와 연합해 초나라의 수도 영(郢)을 함락시키고 초나라를 거의 멸망 직전으로 몰아넣었다. 그러나 이듬해(기원전 505년)에 본국이 월나라에 침략 당하고, 동생 부개가 왕을 칭하고 쿠데타를 일으켰기 때문에 가까스로 도망친 초왕을 추격하지 못하고, 허둥지둥 본국에 돌아와 난을 평정했다. 기원전 496년, 10년 전의 원한을 풀기 위해 월나라로 쳐들어간다. 그러나 월나라의 장군 범려의 책략에 막혀 패배하고 다리에 활까지 맞아 상처가 덧나 죽게 된다. 아들 부차에게 구천이 부친을 죽였던 것을 잊지 말라고 유언을 남긴다. 그를 묻은 언덕에는 호랑이가 나타났다고 해서, 후치우(虎丘)라고 불렀다.
오왕 부차夫差
부차(夫差, ? ~ 기원전 473년) 오나라 25대 임금이며 제7대이자 마지막 왕이다. 춘추오패의 한 사람으로 꼽기도 한다. 오왕 합려의 차남이다.
오왕 합려가 월나라 장수가 쏜 화살에 맞아 죽으면서 합려는 태자 부차(夫差)에게 “월나라를 절대로 잊지 말라.(必毋忘越)”는 유언을 남기고 눈을 감았다. 부차는 이 일을 잊지 않기 위해 침실에 들어서도 합려의 유언을 반복하게 하고, 잘 때는 방바닥에 장작을 쌓아놓고 그 위에서 잠을 잤다.
「부차는 복수에 뜻을 품고 아침저녁으로 섶에 누워 출입할 때마다 사람들에게 시켜 외치게 했다. “부차야, 너는 월나라 사람들이 너의 아버지를 죽인 것을 잊었느냐?”(夫差志復讐, 朝夕臥薪中, 出入使人呼曰, 夫差, 而忘越人之殺而父耶.)」
여기에서 와신상담(臥薪嘗胆)이라는 고사가 생겨났다.
오자서의 도움으로 국력을 충실히 키운 오나라는 그 힘을 착착 쌓아갔다. 후환을 두려워한 월나라 구천이 침략을 단행했지만, 반격하여 구천을 몰아붙인다. 구천이 항복을 하자, 오자서는 구천을 사살하여 후환을 없애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월나라 범려는 빼어난 미인 서시를 바치면서 항복을 구걸하였고, 월나라의 뇌물을 먹은 재상 백비의 권유로 월왕 구천을 살려두게 된다. 결국 월나라의 책략으로 목숨을 건진 구천은 거짓된 충성심을 보여주고 다시 월나라로 귀환하게 된다.
오왕 부차는 계속 국력을 신장하여, 북쪽으로 황하 유역에 진출하여, 패자를 꿈 꿀 수 있게 된다. 그렇지만 오자서는 월나라의 복수를 두려워하여, 부차에게 간언했다. 이것으로 인해 부차와 오자서는 의견이 충돌하게 되고, 월나라 범려의 반간계에 의해 기원전 484년 백비의 중상모략으로 오자서에게 자결을 명한다. 기원 전 485년, 부차는 군대를 거느리고, 제나라를 쳐서, 제후의 맹주로 인정을 받으려 하였다. 하지만, 원래부터 화북의 맹주였던 진나라가 이것에 맹렬히 반대했다. 기원전 482년, 주도권 다툼으로 인해 진나라와 오나라 사이의 전쟁이 일어난다. 그때 오왕 부차가 나라를 비운 틈을 노려 월나라가 오나라를 공격하고 황자와 그 형제들을 함께 처형한다. 진나라와의 주도권 다툼과 월나라와도 두 개의 전쟁을 치러야 하는 오나라는 결국 패망한다.
월왕 구천句踐
구천(句踐, ? ~ 기원전 464년) 월나라 군주 윤상(允常)의 아들. 구천 및 월나라 왕들은 하나라의 초대 시조인 우왕의 방계 후손이라 한다. 본인 스스로도 이를 자랑스럽게 여겼다. 기원전 500년부터 기원전 497년까지 월나라 왕태자의 신분으로 부왕 윤상(允常)의 대리청정을 맡았으며 기원전 497년에 부왕의 서거로 즉위하고 범려를 측근으로 두어 나라를 강대국으로 만든다.
오왕 합려는 월나라를 없애기 위해 대군을 거느리고, 침략을 강행하자 범려의 계책으로 오군은 대패하고, 합려는 이 때의 부상으로 사망하게 된다. 부차가 오왕으로 즉위해 와신하며 오자서의 도움을 받아 월나라를 쳐들어가고 월나라를 멸망 직전까지 몰아붙인다. 충신 범려의 진언에 따라 빼어난 미인 서시를 부차에게 바치면서 항복을 청하고, 부차는 오자서의 맹렬한 반대를 무릅쓰고, 이것을 수용한다. 강화 체결 후 월왕 구천은 오왕 부차의 말을 끌어 주는 등 3년 동안 오왕 부차의 종처럼 생활했다. 부차의 하인이 되어 열심히 부차를 섬겨 방심을 유도하여 다시 월나라로 돌아온다. 구천은 이 때의 억울함을 잊지 않고 방에 쓴 쓸개를 매달고 매일 그것을 맛보면서 복수를 맹세한다. 이것이 와신상담이라는 고사이다.
「월왕이 오나라에 복수를 하겠다는 생각을 한 것은 하루 이틀이 아니어서, 밤낮을 가리지 않고 몸을 괴롭히고 마음을 수고롭게 하였다. 피곤하여 눈이 감기면 여뀌로 문질렀고, 발이 시리면 물에 적셨으며, 겨울에는 얼음을 안고, 여름에는 불을 잡았다. 마음에 근심하며 뜻을 괴롭게 하고, 문에 쓸개를 달아 놓고 들어갈 때 나갈 때에 맛을 보며 입에서 끊지 않았다. 한밤중에는 눈물을 흘리면서 울고, 운 후에는 다시 울부짖었다. 그러자 신하들이 말했다. “왕은 어찌 그리 깊이 근심을 하십니까. 복수를 하고 옛일을 헤아리는 것은 왕의 근심할 바가 아니라 우리 신하들이 해야 할 급한 임무입니다.”(越王念復吳讐非一旦也, 苦身勞心, 夜以接日. 目臥則攻之以蓼, 足寒則漬之以水. 冬常抱冰, 夏還握火. 愁心苦志, 懸膽於戶, 出入嘗之, 不絶於口. 中夜潸泣, 泣而復嘯. 於是群臣咸曰, 君王何愁心之甚. 夫復讐謀故, 非君王之憂, 自臣下急務也.)」
월나라로 돌아간 구천는 착착 국력을 기르고, 부차가 출타한 틈을 타서, 오나라 침략을 단행한다. 오의 황태자 우를 참하자, 오왕 부차는 급히 되돌아 오지만, 힘을 기른 월나라를 이기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오나라를 멸망시킨 구천은 월나라의 수도를 현 장쑤 성 연운항으로 옮기고, 제후들을 모아 중원의 패자가 된다.
범려는 또다른 총신인 문종에게 구천은 고생은 함께 할수 있으나 낙은 함께 할수 없는 관상이니 떠나자 하였으나 문종은 이를 거부하고, 범려는 사직하고 천하를 주유한다. 예견대로 구천은 신하들에 대한 숙청을 자행하여 문종 역시 죽임을 당한다. 구천은 패자를 자청하다 기원전 464년에 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