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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말씀의 향기♣ No2671
2월14일 [연중 제6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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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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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 오늘 미사**
https://m.youtube.com/watch?v=MiYaEETNjMc
**서울주보**
http://pf.kakao.com/_xhGxjBxb/638546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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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절망의 끝에서 하느님은 시작하십니다!>
오늘 주님을 만나 기적적으로 치유의 은총을 입은 나병 환자의 지난 인생은 참으로 혹독했습니다. 마땅한 치료약도 없던 시절, 그의 하루하루는 정말이지 지옥같은 나날이었습니다.
비참한 하루를 끝내고 차디찬 동굴 안에 몸을 눕히면서 드는 생각은 어떤 생각이었겠습니까? ‘이렇게 살 바에야 차라리 빨리 주님께서 나를 데려가셨으면... 차라리 이게 꿈이었으면...’
그러나 길고 슬픈 밤이 지나가면 어김없이 아침 해는 떠오르고, 강물에 비친 얼굴은 어제보다 더 심각해졌고... 죽음 같은 하루를 또 다시 맞이하곤 했습니다.
이렇게 죽은 목숨이나 다름없던 나병 환자가 은혜롭게도 죽음 직전에 구원자 예수님을 만납니다. 이번이 자신에게 주어진 마지막 기회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던 그는 젖먹던 힘까지 동원해서 간절히 외칩니다.
“스승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마르코 복음 1장 40절)
곰곰히 생각해 보니 나병환자의 외침은 이 세상에 가장 간절하고 열렬한 청원 기도입니다. 이토록 간절하고 절박한 기도, 이토록 겸손하고 힘있는 나병 환자의 기도를 어찌 주님께서 들어주시지 않겠습니까?
사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나병 환자의 모습은 오늘 우리의 모습과 별반 다를 바 없습니다. 한번 잘 살아보자고 죽기 살기로 노력해보지만, 그게 어디 마음대로 됩니까? 그저 다람쥐 챗바퀴 도는 듯한 지루한 일상이 끝도 없이 반복됩니다.
지금은 ‘난다긴다’ 하지만, 지금은 떵떵거리며 살지만, 세월은 어느새 쏜살같이 흐르고 순식간에 죽음의 병고 앞에 서게 됩니다. 보십시오. 인간이 하는 모든 일은 유한합니다. 인간만사의 끝은 결국 허무입니다. 인간의 끝은 절망입니다.
그러나 그 절망의 끝에서 하느님은 시작하십니다. 인간들이 모두 떠나간 후 하느님은 다가오십니다. 늦었음에도 불구하고 늘 한결같은 분이 우리의 하느님이십니다. 결국 우리가 최종적으로 믿고 의지할 분은 하느님밖에 없는 것입니다.
오늘 교차로에서 건강하고 순결한 예수님과 병들고 불결한 인간이 만났습니다. 고상하고 맑은 정신의 예수님과 좌절과 원망뿐인 한 인간이 만났습니다. 위엄으로 가득 찬 영광의 예수님과 바닥에 무릎을 꿇은 한 사람이 만났습니다. 빛과 어둠의 만났습니다. 생명과 죽음이 만났습니다. 하느님의 자비와 인간의 비참이 정면으로 마주쳤습니다. 참으로 극명하게 대비되는 두 존재의 만남입니다.
그 결과는 마치 갓 태어난 아기 피부처럼 보송보송하고 깨끗한 피부입니다. 언젠가 우리가 이 세상을 떠나 자비하신 하느님의 얼굴과 대면할 때도 결과는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그 순간은 참으로 축복된 순간이 될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 살아가면서 지은 모든 죄와 허물, 어둠과 상처는 하느님 자비의 얼굴과 마주치는 순간, 활활 타오르는 화로 위에 던져진 눈송이처럼 순식간에 사라져버릴 것입니다. 인간의 비참은 사라지고 하느님의 자비와 영광만 남게 될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필요한 한 가지 노력이 있습니다. 하느님의 터치(touch)를 가져오는 간절함이요 절박함입니다. 겸손함과 강렬함입니다.
우리 그리스도교는 철저하게도 희망의 종교입니다. 아무리 오늘 하루 우리의 삶이 혹독하고 비참하다 할지라도, 때로 더 이상 나아갈 의미를 못 찾는다 할지라도 희망을 버리지 말아야합니다. 단 한발자국도 나아갈 수 없는 막다른 길에 다다랐다 할지라도 하느님의 현존과 자비에 대한 기대를 버리지 말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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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복음묵상 동영상)
https://youtu.be/hsu_smzcDo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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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도 체제에 불순종한 적이 없으시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나병 환자를 치유해 주시는 내용입니다. 나병환자는 예수님께 “스승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라고 고백합니다. 하고자 해서 다 하실 수 있는 분은 하느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아무리 하고자 해도 안 되는 일이 더 많습니다. 나병 환자는 예수님을 하느님으로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라고 하시며 그를 치유해 주십니다. 그러나 그에게 “누구에게든 아무 말도 하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다만 사제에게 가서 네 몸을 보이고, 네가 깨끗해진 것과 관련하여 모세가 명령한 예물을 바쳐, 그들에게 증거가 되게 하여라.”라고 단단히 이르십니다.
하지만 치유 받은 나병 환자는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예수님은 분명 하느님이십니다. 하느님께서 세상 종교나 정체 체계에 순종해야 할 분이 아니십니다. 그보다 훨씬 크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나병 환자는 하느님께서 자신을 치유해 주셨으면 그만이지 모세가 명령한 것에 순종해야 할 필요를 느끼지 못합니다. 그는 예수님의 말씀도 어기고 떠나가서 이 이야기를 널리 알리고 퍼뜨리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예수님께서는 더는 드러나게 고을로 들어가지 못하시고, 바깥 외딴곳에 머무르셔야 했습니다.
오늘 복음은 공동체에 순종하지 못하는 사람은 그리스도께도 결국 순종할 줄 모르는 사람이 된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그리고 그리스도께 순종하지 못하는 것을 넘어서서 그분의 복음전파에 악영향을 미치는 사람이 된다는 것도 함께 말하고 있습니다. 이럴 때 은총을 아무리 받았다고 해도 마지막 때에 그 책임을 면할 수는 없게 됩니다.
영화 ‘캐치 미 이프 유 캔’은 미국에서 10대 후반의 나이로 수표 위조 사기범으로 활동했던 현재는 한 기업의 보안 컨설턴트가 된 ‘프랭크 윌리엄 애버그네일 주니어’의 회고록으로 제작된 영화입니다.
영화 속 프랭크 아버지는 사업가로 프랑스인 어머니와 결혼하여 프랭크를 낳아 기르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아버지가 사업 중 탈세 혐의로 국세청에 고소를 당해 사업이 망하게 되고 작은 집으로 이사를 하게 됩니다.
새로운 학교로 전학 간 프랭크는 학교 학생의 텃세에 눌리게 됩니다. 프랭크는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사기꾼의 기지를 발휘하여 프랑스어 선생 행세하며 며칠 동안 아이들에게 숙제도 내주고 텃세를 부린 학생에게 면박을 주고 또한 학교 친구의 조퇴요청서 위조를 도와주며 사기꾼의 면모를 보여줍니다.
하지만 사업이 망한 아버지와 어머니는 이혼하게 되고 그러한 상황이 싫었던 프랭크는 부친이 생일 선물로 준 25달러가 든 계좌와 수표책을 들고 집을 나오게 됩니다.
프랭크는 밖에서 버티기 위해 수표를 위조하였습니다. 하지만 은행에서 수표를 받아주지 않자 당시 항공사 팬암의 기장이 모든 사람의 관심과 혜택을 받는 것을 보고는 사회적으로 권위 있는 팬암 기장의 옷을 입고 팬암 위조 수표를 만들어 돈으로 바꿉니다.
팬암 위조 수표를 계속 만들며 돈을 쓰던 프랭크는 결국 FBI 위조 수사 전문가 칼 헨래티에게 덜미를 잡히고 뒤를 쫓기게 됩니다. 그러나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사기꾼 기술에 FBI도 농락당합니다.
프랭크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똑똑한 머리로 외과 전문의 사칭으로 병원에 취직 간호사 브란다를 만나 약혼을 하고 조용히 새로운 삶을 살 결심합니다. 진심으로 2주 동안 공부하여 변호사 시험에 합격도 합니다. 그러나 FBI의 추격으로 이 결혼은 성사될 수 없었고 프랭크는 프랑스로 탈출합니다.
미국 탈출 후 프랭크는 어머니의 고향에서 인쇄소를 차려 수표 위조하며 돈을 쓰다 결국에 체포됩니다. 프랑스에서 옥살이하던 중 칼의 노력으로 미국으로 이송됩니다. 이후 칼은 4년 동안 갱생의 시간으로 프랭키에게 그동안 쌓아 올린 위조 기술로 수표 감별사 보안 컨설턴트로 활동하게 해 줍니다.
이후 프랭크는 한 번 더 팬암 기장의 옷을 입고 도망치려고 계획합니다. 하지만 칼의 설득으로 다시 돌아오게 되고 업무에 복귀해 현재 기업에서 연간 수백만 달러의 기술료를 받고 자신을 체포한 칼과도 친구로 지내며 산다고 합니다. [출처: ‘캐치미 이프 유 캔’, 네이버 블로그, ‘누사에서의 욜로’]
프랭크가 수표를 위조하여 받아낸 돈은 지금 가치로는 수백억 원에 해당합니다. 제목에서도 볼 수 있듯이 프랭크는 요리조리 잘도 빠져나가면서 부유하게 삽니다. 하지만 법 밖에서는 어디서도 자신의 능력으로 행복할 수 없음을 깨닫습니다. 그래서 칼이 순순히 놓아줄 때 그는 다시 돌아옵니다. 자신의 능력이 나라의 법체계를 앞선다고 생각했던 이전과는 다르게 겸손해진 것입니다. 법 테두리 안에서 자신의 능력을 발휘할 때야만 행복할 수 있음을 안 것입니다. 하지만 능력이 많아지다 보면 오늘 복음의 나병 환자처럼 능력이 공동체의 법을 초월하게 할 수 있다고 착각하게 만듭니다.
은총을 받은 것보다 은총을 받은 이후가 더 중요합니다. 교만해지면 은총을 받지 않으니만 못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겸손하다는 증거는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요? 은총을 받았을 때조차 자신이 속한 공동체의 규범을 존중하고 지키는 것에서 드러납니다.
마르틴 루터는 자신이 받은 은총으로 교회의 체계를 넘어섰습니다. 반면 예수님은 새로운 교회를 세우실 분이셨지만 구약의 체계를 존중하셨습니다. 종교나 정치의 결정에 순종하여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습니다. 현재 자신이 속한 공동체의 규칙을 지키기 위해 하느님이시면서도 목숨을 바치신 것입니다. 특별히 마르코 복음에서의 겸손은 공동체를 곧 하느님의 권위로 보는 것에 있습니다. 하느님으로부터 은총을 받았다고 이 세상의 공동체를 무시해도 된다고 믿는다는 것은 마르코 복음에서는 용납될 수 없는 일입니다.
예수님은 카이사르의 것은 카이사르에게 바치라고 하시며 자신의 나라를 지배하는 로마에도 순종하셨습니다. 이는 일본의 속국이었을 때 우리나라의 존경받는 사람이 일본에게 당연히 세금을 내야 한다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당시로 치면 매국노로 찍혀야 했을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도 노예제도에 대해 반감을 갖지 않고 노예는 주인에게 충실해지라고 말했습니다.
물론 예수님께서 왜 당신을 박해하느냐고 하셨을 때 그 교회가 바로 그리스도라는 눈이 생긴 것에서 공동체 안에 그것을 세우신 분의 권위가 들어있음을 볼 줄 알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우리는 평소에 주님께 은총을 청하기도 해야겠지만 그 은총을 받았을 때를 대비하여 항상 더 겸손한 삶을 살 연습을 해 두어야 하겠습니다. 유재석 씨는 유명해지기 전부터 자신이 유명해지면 절대로 교만해지지 않겠다고 기도를 열심히 했습니다. 그래서 유명해졌지만, 여전히 많은 은총을 받습니다.
우리도 주님께서 주시는 은총에 대비해야 합니다. 그 방법이란 자신이 속한 공동체의 규범에 순종할 줄 아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나주 율리아의 경우는 주님의 은총을 많이 받으면 교회의 권위도 넘을 수 있다고 착각했습니다. 하지만 모든 공동체가 주님의 허락으로 세워진 것이고 그래서 그 공동체에 속해있다면 그 공동체의 규칙을 넘어서려는 마음은 갖지 않으려고 평소에 노력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주님께서 주신 은총이 자신과 공동체, 그리고 오히려 주님께 손해를 끼치는 원인으로 전락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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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는 예수께서 나병환자를 치유해 주시는 장면이 소개되고 있다. 이 치유 이야기는 무슨 의미를 갖고 있는지 살펴보기로 하자. 실제로 나병은 육체를 기형적으로 바꾸고 잠재적으로 전염성을 갖기 때문에 무서운 공포를 주는 병이다.
복음: 마르 1,40-45: 그는 나병증세가 사라지면서 깨끗이 나았다
나병환자의 간청을 듣고 치유해주시는 예수님을 보면서 우리는 예수께서 버림받은 인간에 대해 가지신 연민과 느끼신 고통의 의미를 알 수 있어야 한다. "가엾은 마음이 드셔서"(41절)라는 말씀의 연민은 바로 '뱃속까지' 자극시키는 고통의 의미이다. 또한 그 고통은 그 나병환자가 현실적으로 당하는 불의한 사회적 상황 때문에 더 컸을지도 모른다.
예수께서는 '손을 내밀어' 그 나병환자에게 '대시며'(41절) 법을 어기는 행동을 하시지만 나병환자는 깨끗이 낫게 된다.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41절)라는 말씀은 그를 온통 죽음으로부터의 부활과 같은 치유의 기적을 이룬다. 이 죽음으로부터의 부활과 같은 체험 때문에 나병환자는 예수님의 명령에도 불구하고 그 체험을 널리 선전하여 퍼뜨리고 있다(45절).
예수께서는 나병환자에게 그에게 일어난 일을 말하지 말라고 하시면서도 한편으로는 사제들에게 가서 보이고 '그들에게 증거가 되게'(44절) 레위기의 규정대로 나병으로부터 깨끗해진 데 대한 감사의 예물을 바치라고 명하신다. 그러나 복음에는 그가 사제에게 가서 보이고 감사의 예물을 바쳤다는 기록은 나타나지 않는다. 이것은 우선 우리가 항상 하느님의 은총 앞에 감사하는 삶을 살아야 함을 가르치고 있다. 감사의 표현은 말로써 뿐 아니라, 행동으로도 표현이 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우선 모든 것을 하느님께 먼저 감사의 표현을 하여야 하겠고 그리고 이웃 사랑으로 표현되어야 한다. 그것으로 참된 하느님께 대한 사랑과 이웃에 대한 사랑을 될 수 있다.
"그를 곧 돌려보내시며 단단히 이르셨다. 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누구에게든 아무 말도 하지 않도록 조심하여라.’"(43-44절). 이 말씀의 의미는 무엇일까? 아마 이 병은 기적적으로 회복이 되었어도 다시 사회에 복귀하기까지는 또 다른 검증과정을 통해 또 고통을 당하게 된다. 그러기에 그 기억은 예수님께 오래도록 남아있을 것이다.
또한 예수께서는 이 나환자를 통하여 장차 당신에게 닥칠 '야훼의 고통 받는 종', 즉 나병환자처럼 하느님께로부터 버림받고 천대받아 사람들이 얼굴을 가리고 피해갈 만큼(이사 53,3-4) 사람들로부터 배척을 당하고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변모될 운명을 예견한다는 것이다. 즉 당신이 행하시는 사랑과 정의에는 관심이 없고 불결과 깨끗함을 가리는 논쟁에만 힘을 소비하며, 이제 예수님을 십자가의 죽음에로 이끌어갈 구실을 마련하려고 하여 당신이 베푸시는 사랑의 행위를 왜곡하려는 사람들에 대해 느끼는 내적인 아픔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이야기는 우리에게 어떤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병을 고쳐주기 위해서 손을 갖다 대는 것으로 충분하다. 더 이상의 다른 행위가 필요치 않다. 그러나 그 기적인 완전한 것이 될 수 있으려면, 인간 사이의 혹은 민족 사이의 갈등과 경계가 모두 극복되어 한 형제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 때문에 예수께서는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하신 것이다.
(마르코는) 진정으로 예수님을 통하여 하느님과 만나기 위해 자신을 포기하려고 하는지, 그리고 인간이 만들어 놓은 인습을 무너뜨리려 하는지를 이렇게 묻고 있다. 그래서 초기교회는 "나병환자들과 더불어 걷고 주막에서 잡수시는 주 예수님"(E. Schweizer, Il Vangelo secondo Marco, Brescia 1971, p. 64)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우리 인간들 사이의 사랑과 일치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또 예수께 그 기적 후에 많은 사람들이 떼를 지어 몰려가지만 그분은 백성들과 일정한 거리를 유지함으로써 또 한 번 이해할 수 없는 인물이 된다. 지금의 모든 가르침은 오로지 수난과 죽음과 부활에서 충만하게 의미를 갖게 될 것이다. 때문에 그 때까지는 모든 것이 비밀에 싸여있을 수밖에 없다. 이것이 '메시아의 비밀'이다.
즉 예수님 당시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지만, 예수님의 전도사명이 자칫 현세적이고 정치적인 메시아니즘으로 왜곡되지 않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우리가 하느님을 믿고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이 자칫 현세적인 자신의 욕구를 채우기 위한 것일 때, 그것은 참된 신앙인의 모습이 아닌 것이다. 이러한 기복적인 신앙을 벗어버리고 진정으로 나 자신과 사회의 변화를 위해 노력하여야 한다.
제2독서: 1고린 10,31-11,1: 나를 본받으십시오.
바오로 사도는 우리에게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자제와 희생이 요구된다고 해도 그 모든 것은 하느님의 영광을 추구하는 것이라고 한다. "여러분은 먹든지 마시든지 그리고 무슨 일을 하든지 모든 것을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십시오. 무슨 일을 하든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려고 애쓰는 나처럼 하십시오. 나는 많은 사람이 구원을 받을 수 있도록, 내가 아니라 그들에게 유익한 것을 찾습니다.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것처럼 여러분도 나를 본받는 사람이 되십시오."(10,31-11,1).
이것을 나병환자의 치유에 적용해 볼 때, 우리는 예수께서 하신 것처럼, 평범한 생활 테두리를 넘어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 생기는 경우에도 기꺼이 수락하면서 우리의 사랑의 행위를 펴 나가기를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당신의 도움을 간절히 청했던 나환자에게 손을 대시어 치유해주신 예수님과 같이 그리고 모든 삶을 주님의 영광을 위해 살도록 초대하는 바오로 사도의 말씀을 우리가 살 수 있도록 하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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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인천교구 박형순 바오로 신부님(인천가톨릭대학교 교수)]
레위기에 따르면 나병 환자는 부정한 사람으로, 공동체와 함께 어울려서 지낼 수 없는 사람이었습니다.(레위 13장 참조) 그런 나병 환자가 예수님께 왔고, 도움을 청하였습니다. 복음서에서 예수님께서 만나시는 대상이 주로 병자와 죄인들이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그리 놀랄 만한 일이 아닐 수 있습니다. 그러나 레위기의 규정처럼 나병 환자는 격리되어야 하고, 그는 부정한 사람이므로 누구도 그와 접촉해서는 안 되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에게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대응은 어떠하였나요? 예수님께서는 나병 환자가 다가오는 상황을 거부하거나 피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를 보고, 피하거나 멀리하거나 못 본 체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예수님께서는 그를 가여워하십니다. 이 장면을 묵상하면 감동이 밀려옵니다. 그러한 감동은 나병 환자와 예수님의 대화에서 절정에 다다릅니다. 나병 환자는 “스승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라고 예수님께 말을 건넸고, 예수님께서는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 하고 응답하십니다. 나병 환자의 요구를 그대로 받아 주십니다. 오늘 독서에 따르면 나병 환자는 옷을 찢어 입고 머리를 풀고, 콧수염을 가리고 “부정한 사람이오.”를 두 번 외쳐야 합니다. 부정한 것과 깨끗한 것이 엄격하게 구별되는 사회에서, 예수님께서는 스스로 부정한 사람이라고 외치는 사람을 존중하시고, 부정한 그의 말을 그대로 수용하십니다.
예수님의 이러한 따뜻함이 우리에게도 희망과 용기를 줍니다. 나병 환자와 예수님의 만남 이야기는 우리에게 ‘예수님 만남 설명서’를 제공합니다. 우리가 부정한 사람이더라도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다가가는 것을 거부하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죄인이지만,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건네는 모든 말을 절대 놓치지 않으시고 귀를 기울이시고 들어 주십니다. 그런 예수님을 우리는 주님으로 모시고 있습니다. 용기를 가집시다! 희망을 품어 봅시다! 우리의 좋은 모습 때문이 아니라, 그저 우리이기 때문에 사랑으로 우리를 만나시고 품어 주시는 그분,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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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믿음>
“어떤 나병 환자가 예수님께 와서 도움을 청하였다. 그가 무릎을 꿇고 이렇게 말하였다. ‘스승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가엾은 마음이 드셔서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말씀하셨다.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 그러자 바로 나병이 가시고 그가 깨끗하게 되었다."(마르 1,40-42)
1) 이 이야기는, “예수님은 하느님과 같은 권능을 가지고 계신 분이고, 하느님과 같은 자비로운 마음을 가지고 계신 분”이라는 증언입니다. 예수님에 대한 믿음은, 그 ‘권능’에 대한 믿음과 그 ‘자비’에 대한 믿음을 모두 포함하는 것입니다. <만일에, 예수님께서 권능은 가지고 계시지만 자비가 없으신 분이라면, 사람을 사랑하지 않으시고 사람에 대해서 무관심한 분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예수님을 주님으로 섬길 수가 없습니다. 또 만일에, 예수님께서 자비로운 분이시지만 권능을 가지고 계시지 않다면, 그러면 우리는 예수님을 신앙의 대상으로 믿고 섬길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은 하느님과 같으신 분으로서, 우리가 청하는 것을 모두 들어 주실 수 있는 권능을 가지고 계신 분이고, 하느님과 함께 무한히 자비로우신 분이어서 우리의 모든 사정에 관심을 쏟고 계시고, 우리를 한없이 사랑하시는 분”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능력은 곧 하느님의 능력이고, 예수님의 마음은 곧 하느님의 마음이다.”라고 우리의 믿음을 표현할 수도 있습니다.>
2) “스승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라는 말은, “저는 예수님께서 저의 병을 고쳐 주실 수 있다고 믿습니다. 주님께서는 저를 고쳐 주기를 원하십니까?”라는 뜻입니다. 이 말은, 예수님의 권능은 믿고 있지만, 예수님의 자비에 대한 믿음은 부족하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여기서, 예수님께서 그에게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는 말은, 그가 ‘병고’를 겪고 있는 것을 가엾게 여기셨다는 뜻인데, 조금 다른 관점에서 생각하면, 그의 믿음이 부족한 것에 대해서도 가엾게 여기셨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사실 믿음이 부족하거나 없는 상태도 ‘가엾은 상태’입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손을 대신 것은 그에 대한 ‘사랑’을 나타냅니다. 그의 병이 나병이라는 점에서 예수님의 동작은 특별한 의미가 있습니다. <사랑은 상대방과 나 사이의 간격을 좁히려는(또는 없애려는) 노력입니다.> “내가 하고자 하니”라는 말씀을 원문대로 직역하면, “나는 원한다.”인데, 이 말씀은 ‘예수님의 자비’를 나타냅니다. 세상에 오신 일과 사람들을 구원하려고 애를 쓰시는 일은 모두 당신이 원하신 일이었습니다.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신 일이라고 표현할 때가 많은데, 그 순종도 당신이 원해서 하신 일입니다.) 이야기에 나오는 환자를 고쳐 주는 일도, 그가 청하기 전에 이미 예수님께서 먼저 원하신 일이었습니다. “깨끗하게 되어라.”라는 말씀은, ‘예수님의 권능’을 나타냅니다. 예수님은 의술이 아니라 당신의 의지만으로 병을 고치시는 분입니다. (병을 고치는 예수님 말씀은 당신의 의지를 나타내는 말씀입니다.)
3) 마르코복음 9장에 나오는 어떤 아이의 아버지는 예수님의 자비는 믿었지만, 권능에 대한 믿음은 부족했던 사람입니다. “‘...... 이제 하실 수 있으면 저희를 가엾이 여겨 도와주십시오.’ 예수님께서 그에게 ‘′하실 수 있으면‵이 무슨 말이냐? 믿는 이에게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 하고 말씀하시자, ......"(마르 9,22-23) ‘하실 수 있으면’이라는 말은, 예수님의 권능에 대한 믿음이 부족하다는 것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믿는 이에게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 라는 말씀의 뜻은, “주님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믿어라.”입니다. 이 말씀은, 가브리엘 천사가 마리아에게 했던 말,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루카 1,37).”라는 말에 연결됩니다. 예수님은 하느님과 하나이신 분이기 때문에(요한 10,30), 하느님처럼 예수님께도 불가능한 일이 없습니다.
4) 요한복음 5장에 있는 ‘벳자타 못 가에서 병자를 고치신 이야기’는 예수님의 권능과 자비가 동시에 드러난 일 가운데에서 가장 대표적인 일입니다. 그 이야기에 나오는 병자는 예수님이 누구인지도 몰랐고(요한 5,13), 그래서 예수님에 대한 믿음도 없었고, 병을 고쳐 달라고 예수님께 간청하지도 않았지만, 예수님께서 먼저 그를 가엾게 여기셔서 그의 병을 고쳐 주셨습니다. 병자 쪽에서 청하지도 않았는데 병을 고쳐 주신 것은 예수님의 자비를 나타내고, 한 마디 말씀만으로 병을 고치신 것은 예수님의 권능을 나타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병자에게 “나를 믿어라.”라는 말씀은 안 하셨고, “자, 너는 건강하게 되었다. 더 나쁜 일이 너에게 일어나지 않도록 다시는 죄를 짓지 마라.”라는 말씀만 하셨습니다.(요한 5,14) ‘믿음’은 은총을 받기 위한 조건이 아니라, 자기가 이미 받은 은총을 자기 것으로 잘 간직하고, 그 은총 속에서 잘 살아가는 조건입니다.>
5) 우리는 살아가면서 어떤 어려움이나 고통을 겪을 때가 많고, 그럴 때에 그것에서 벗어나게 해 달라고 간청하는 기도를 하게 됩니다. 그런데 기도해서 응답을 얻는 경우도 많지만, 아무 응답도 얻지 못할 때도 많습니다. 바로 그것이 기도의, 또는 신앙생활의 어려운 점입니다. 신앙인 자신이 “주님께서 나의 일에 무관심하신가? 혹시 나를 사랑하지 않으시는 것은 아닌가?”라고 의심하기도 하고, 주위에 있는 사람들이 “기도한다고 그 일이 해결되겠는가?”라고 비아냥거리는 말을 하기도 합니다. (의심도, 비아냥거리는 말도 모두 사탄의 유혹입니다.) 신앙인이라면 어떤 상황에도 흔들림 없이, “주님은 나를 사랑하시는 분이고, 나의 일에 항상 관심을 갖고 계시는 분이고, 내가 바라는 그것을 주시지 않더라도, ‘가장 좋은 것’을 ‘가장 좋은 때’에 나에게 주시는 분이고, 언제나 항상 나를 구원하시고 보호하시는 분이다.” 라고 믿어야 합니다. 믿는다면 계속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는 내가 바라는 것을 기어이 얻어내려고 주님께 떼쓰는 일도 아니고, 그것을 안 주시려고 하는 주님의 마음을 바꾸려고 하는 일도 아닙니다. ‘기도’는 주님께서 주시는 ‘가장 좋은 것’을 잘 받기 위해서 준비하는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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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선진국과 중진국의 차이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정치, 경제, 문화, 예술, 종교의 분야에서 이야기를 할 수 있지만 때로 그것은 주관적일 수 있습니다. 선진국은 어떤 사회적인 문제에 대해서 ‘정의’를 내리고, ‘왜?’라는 질문에 대답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중진국은 선진국이 내린 정의를 모방하고, 따라간다고 합니다. 당연히 ‘왜?’라는 질문이 없다고 합니다. 이해가 되지 않으면 외우라고 합니다. 먹고 살기 바쁜데 정의를 내릴 필요가 없다고 합니다. 대한민국은 전형적인 중진국이었습니다. 정의를 내리고, 왜라고 질문하는 대신 외국의 모델을 모망하거나, 따라했습니다. 우리 스스로도 선진국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외국에서 한국이 잘 한다는 이야기를 하면 어쩌다 잘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김연아 선수, 손흥민 선수, 박세리 선수, BTS, 봉준호 감독이 세계 최고의 수준에 올랐을 때도 대한민국이 잘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지난 1년 동안 코로나19를 겪으면서 대한민국은 방역에 대해서 새로운 정의를 내리고, 왜라는 질문을 하였습니다. 자동차를 타고 코로나19의 검사를 받는 방법을 생각해 냈습니다. 의료진이 검사소 안에 들어가고 사람들이 걸어가면서 검사를 받는 방법을 생각해 냈습니다. 일명 ‘Drive through와 Walking through'입니다. 검사받는 시간이 단축되었습니다. 소독하는 시간이 단축되었습니다. 2015년 메르스 사태를 경험하면서 ‘왜?’라는 질문을 하였고, 다양한 대처방안을 마련하였기 때문입니다. 진단키트를 긴급사용할 수 있도록 승인하였고, 대한민국의 진단키트는 전 세계 코로나19검사의 70%를 차지한다고 합니다. 코로나19에 대한 대응으로 3T(Trace, Test, Treatment)를 적용하였습니다. 확진자를 효과적으로 찾아낼 수 있었고, 감염의 확산을 차단할 수 있었고, 신속하게 치료할 수 있었습니다. 많은 국가에서 대한민국의 방역사례를 따라하려고 하였고, 대한민국은 대처방안을 번역하여 나누어 주었다고 합니다. 2020년 코로나19의 팬데믹 상황에서 대한민국은 선진국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부정한 사람은 진영 밖에 자리를 잡고 혼자 살아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3,000년 전인 구약의 시대에 감염병에 대한 지식과 이해가 없었을 것입니다. 방역의 차원에서 격리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두 가지 이유가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는 ‘두려움’입니다. 병에 걸린 사람이 곁에 있으면 같이 병에 걸릴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죄인과 함께 있으면 죄에 물들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다른 하나는 ‘우월감’입니다. 우월감이 개인과 집단에서 발생하면 ‘따돌림’으로 드러납니다. 이문열의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은 이것을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사회와 국가적인 차원에서 발생하면 ‘민족차별’로 드러납니다. 노예제도, 식민지 건설, 유태인에 대한 차별이 있었습니다. 작년에 미국에서 있었던 ‘Black Lives Matter'는 뿌리 깊은 흑인의 차별에서 발생했습니다. 두려움은 낯선 이웃을 받아들이지 못하게 합니다. 우월감은 하느님의 창조질서를 파괴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나병환자를 깨끗하게 치유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누구에게든 아무 말도 하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다만 사제에게 가서 네 몸을 보이고, 네가 깨끗해진 것과 관련하여 모세가 명령한 예물을 바쳐, 그들에게 증거가 되게 하여라.” 부정한 사람을 두려워해서 멀리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부정한 사람을 따뜻하게 맞이해서 사랑으로 돌보라고 하십니다. 부정한 사람을 차별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부정한 사람도 치유될 수 있고, 공동체의 일원으로 함께 지낼 수 있다고 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성한 사람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지만 아픈 사람에게는 의사가 필요하다. 나는 이스라엘의 아픈 사람을 위해서 왔다. 예수님께서는 두려움 때문에 선행을 포기해서는 안 된다고 하십니다. 우월감으로 약하고, 병든 사람을 차별해서는 안 된다고 하십니다. 돌아온 아들을 따뜻하게 받아들이는 아버지의 마음으로 사랑하라고 하십니다.
오늘 제2 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여러분은 먹든지 마시든지, 그리고 무슨 일을 하든지 모든 것을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십시오. 무슨 일을 하든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려고 애쓰는 나처럼 하십시오. 나는 많은 사람이 구원을 받을 수 있도록, 내가 아니라 그들에게 유익한 것을 찾습니다.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것처럼 여러분도 나를 본받는 사람이 되십시오.” 바오로 사도의 말을 충실하게 따랐던 윤동주 시인의 서시(序詩)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 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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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방종우 야고보 신부님]
<언제나 보답하는 마음으로>
+ 찬미예수님
2019년 4월 3일의 아침을 기억합니다. 전날 공부하던 학교에서 박사 논문 발표를 마친 저는 아침 일찍 눈을 뜨자마자 생각했습니다. 기약 없는 공부를 계속하던 시간이 끝나고 완연한 봄이 다가온 시점이었습니다.
“앞으로 내 앞에 어떤 일이 펼쳐질까?”
“어떤 사람들을 만나게 될까?”
로마에서의 삶을 정리하고 한국행 비행기를 탔던 순간도 생각납니다. 그곳 사람들과의 이별이 못내 아쉬웠지만 한편으로는 설렘 또한 가득했습니다. 누구를 만나던, 어떤 소임을 맡게 되던, 공부하느라 내어주지 못한 사랑을 신자분들께 마음껏 실천해야겠다는 기대도 있었습니다.
그렇게 한국에 입국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청담동성당의 여러분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금방 사랑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사랑”이라는 감정에 대해 생각해 봅니다. 남녀 간의 사랑을 주제로 하는 영화를 보면 이 감정의 여러 가지 공통된 특징이 드러납니다. 그것은 첫째로, 어떠한 사랑이든 풋풋하며 때로는 어리숙하다는 것입니다. 그 주인공들이 어린 사춘기 학생들이든, 막 대학교에 입학한 청년들이든, 노년의 어른들이든 마찬가지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은 아름다운 시절의 기억, 생각만 해도 가슴이 떨리는 시기에 이루어집니다. 본당에 있는 동안 저는 여러모로 어리숙했고 조금은 풋풋했을 것입니다. 이제 그 시간은 어느덧 과거가 되어 아름다운 기억으로 남게 되었습니다.
둘째는, 그 사랑이 영원하지는 않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어쩔 수 없는 이별이 다가왔을 때 더 진한 여운과 후회를 남기는 법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완전한 끝은 아닙니다. 사랑이란 이뤄지지 않았을 때 그만큼 강렬하고 아름다우며 날카로우면서도 애틋한 향기를 남깁니다.
오랜 외국 생활을 하고 돌아온 저는 여러 부분에서 서툴렀고, 의도했던 바와 달리 마음을 주고받기까지 적당한 시간도 필요했습니다. 그리고 이제 이곳을 떠나야 하기에 더욱 애틋한 마음으로 그 향기를 그리워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지난 시간을 돌이켜보며, 약 2년이라는 아름답고 눈부셨던 시간을 마음에 일일이 새기지 못하고 왜 그리 쉽게 지나 쳤는지 많은 후회가 되는 것도 사실입니다.
제가 서품 받을 무렵, 어떤 선배 신부님께서는 “사제의 삶이란 바람처럼 와서 먼지처럼 살다가 연기처럼 사라지는 삶이어야 한다.”고 말씀하신 바 있습니다.
한국에 입국해 얼마 지나지 않아 갑작스러운 발령으로 본당에 왔으니 저는 꽤나 바람처럼 이곳에 온 것 같습니다. 그리고 모든 사제 인사가 그렇듯, 떠나고 나면 부족함을 보완해 줄 새로운 사제가 그 자리를 메꿔줄 것이니 연기처럼 사라지게 된 것 같다는 생각도 듭니다. 사제의 삶의 세 가지 조건 중에 두 가지 조건을 꽤나 잘 지켜낸 셈입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저는 먼지처럼 살지는 못했습니다. 먼지처럼 살기에는 너무 많은 신자분들, 특히 주일학교의 부모님들이 저를 애정으로 돌보아 주셨고 작은 정성에도 크게 감동하시며 저를 격려해주셨습니다.
무엇보다 아이들은 제가 준 사랑보다 더욱 큰 사랑으로 마음을 표현해주었습니다. 주임 신부님께서는 좋은 가르침과 함께 주일학교 활동을 적극 지원해주셨고 부주임 신부님 역시 친 형과 같은 마음으로 저의 모든 일들을 응원해 주었습니다.
그리하여 이제야 깨닫습니다. 한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던 그 시기, “신자분들께 사랑을 마음껏 드려야지” 했던 생각이 얼마나 교만했는지 말입니다. 만약 다시 그 시간으로 돌아간다면, “앞으로 내가 받을 사랑에 얼마만큼 보답할 수 있을까?”라고 깊이 고민할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제 와서 부족한 과거를 후회해 무엇 하겠습니까? 이제라도 지금껏 받은 사랑을 어떻게 다시 돌려드릴 수 있을지 고민할 수밖에.
이러한 관점에서 오늘 예수님의 말씀은 저에게 매우 깊은 인상을 심어줍니다. 나병환자의 병을 고쳐주신 예수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네가 깨끗해진 것과 관련하여 모세가 명령한 예물을 바쳐, 그들에게 증거가 되게 하여라.”
주님으로부터 받은 사랑과 은총이 있다면 다른 사람들에게 증거가 되도록 노력하라는 가르침입니다. 그러므로 저는 결심합니다. 이곳 청담동성당에서 받은 사랑을 저의 새로운 소임지인 신학교의 학생들에게 그대로 전달할 것이며, 이에 보답하는 마음으로 더욱 훌륭한 사제들을 양성하고자 힘쓰겠다고 말입니다. 그리고 앞으로 신학생들로부터 받을 사랑에 보답하고자 먼저 힘써야겠다고 다짐해 봅니다.
마지막으로 우리가 함께 믿고 따르는 하느님의 모습을 바라봅니다. 역시 우리의 하느님은 우리가 한 일의 대가를 통해 은총을 베푸시는 분이 아니라 먼저 사랑과 축복을 주신 뒤 우리가 당신을 뒤따르도록 배려해주시는 분이십니다.
본당을 떠나야만 하는 지금, 제 마음은 아쉬움과 슬픔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하지만 그간 이곳에서 제가 받은 많은 사랑과 기쁨은 앞으로 제가 사제 생활을 하는데 있어 든든하고 풍요로운 버팀목이 되어 줄 것임을 알기에 감사의 마음을 가득 담아 스스로를 위로해 봅니다.
코로나로 힘든 시기도 있었지만, 지금도 우리 주일 학교 학생들은 성당을 양껏 메우고 있고 교사들도 충분합니다. 이 모든 것에는 많은 분들의 도움과 응원과 기도가 함께였기 때문임을 잘 알고 있습니다.
다시 한 번 진심으로 감사드리며, 우리 성당의 모든 분들에게 하느님의 은총과 사랑과 축복이 가득하기를 항상 응원하겠습니다. 이 모든 것에 보답하는 마음으로 언제나 기도로 함께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를 곧 돌려보내시며 단단히 이르셨다. ‘사제에게 가서 네 몸을 보이고, 네가 깨끗해진 것과 관련하여 (…) 그들에게 증거가 되게 하여라.’”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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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안민석 베드로 신부님]
<내가 하고자 하니>
오늘 복음이 우리에게 들려주는 ‘나병 환자의 치유 이야기’는 세 가지 장면으로 전개됩니다. 나병 환자의 외침, 예수 그리스도의 응답 그리고 경이로운 치유. 무릎을 꿇고 치유를 청하는 나병 환자에게 주님께서는 가엾은 마음이 드셨습니다.
가엾은 마음이란‘ 다른 이와 함께 떠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한 함께 하는 마음으로 주님께서는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십니다. 여기서 주님의 자비가 강하게 드러나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자비는 모든 장벽을 넘어섭니다. 모두가 멀리하는 나병 환자와 거리를 두려고 하지 않으십니다. 그저 말로만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라고 하시지도 않습니다. 또한, 당신의 제자들이나 누군가를 시켜서 치유하시지도 않습니다. 율법으로는 분명히 만져서는 안 되는 그와 직접 접촉을 하십니다.
율법에서는 나병 환자를 만지는 사람 역시 불결해진다고 가르칩니다. 그러나 그분의 거룩한 손은 나병으로 불결해지지 않았고, 나병 환자의 몸은 그분의 거룩한 손으로 인해 깨끗해졌습니다.
주님께서는 불결한 나병 환자를 만지신 것이 아니라, 가엾은 마음과 함께 거룩함으로 가득한 당신의 손을 건네신 것입니다. 그렇게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당신의 은총을 주십니다.
우리가 지닌 아픔과 고통에 대한 어떤 가르침만을 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애정과 연민이 가득한 몸짓으로 우리를 감싸주십니다. “나에게서 너 역시 제외될 수 없다. 너 또한 나의 자녀이기 때문이다.”라고 분명히 표현하십니다.
“스승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마르코 복음 1장 40절)라고 그분께서 원하시는 것을 하시도록 그분께 맡겨드리는 것이 믿음입니다.
믿음은 그분에게 강요하거나 내가 원하는 것만을 고집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 “하고자 하시면”이라고 맡겨드리는 것입니다.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마르코 복음 1장 41절)라는 주님의 말씀은 다른 누가 아니라, 무릎을 꿇고 애원하는 나병 환자에게 그리고 우리에게 하시는 대답입니다.
너보다 더 내가 네 몸이 깨끗하게 되기를 바란다는, 우리가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것을 주님께서 더욱더 원하고 계신다는 것을 알려줍니다.
진정 주님께서 우리를 원하시지 않은 적은 없습니다. 그분께서 우리의 구원을, 우리의 치유를 바라지 않으신 적은 한순간도 없습니다. 바로 그러한 주님의 마음을 느끼고 그 사랑을 가슴에 담으시기를 바랍니다.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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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천교구 최창덕 프란치스코 신부님]
<언택트(Untact) 시대의 기발하고 남다른 사랑법>
찬미 예수님,
이번 주일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나병 환자를 치유해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가엾은 마음이 드셔서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말씀하셨다.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 그러자 바로 나병이 가시고 그가 깨끗하게 되었다."(마르코 복음 1장 41절-42절)
나병은 전염될 수 있는 악성 피부병이었습니다. 율법에 따라 이 병에 걸린 환자는 스스로 자신을‘부정한 자’라고 외쳐서 다른 사람과의 접촉을 피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상황을 극복하셨습니다. 말씀 한 마디로 충분히 치유하실 수 있었지만, 굳이 “손을 대” 접촉하셨습니다.
모두가 부정을 탈까 두려워서 꺼리는 “불가피한 비접촉 상황” 속에서도 그분께서는 “자비로운 어루만짐”을 베푸셨습니다. 그래서 나병 환자가 애초부터 부정한 자가 아니라 단순히 악성 질병에 걸려 고통받는 하느님의 자녀임을 깨닫게 해 주셨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의도적인 접촉”으로 이루어진 소통과 공감은, 오늘날 코로나19 상황에서 감염병을 두려워하여 다른 이들과의 접촉을 꺼리는 현실을 고려해 볼 때, 우리 신앙인에게 더 적극적으로 자비로운 행동을 실천하라고 요청합니다.
코로나로 인해 평소보다 더 많은 어려움과 더 커다란 고통에 직면한 이웃들이 많습니다. 직접적인 방문이 어려운 지금, 어느 때보다 우리의 지속적인 관심과 기도와 적절한 행동이 필요합니다. 방역수칙을 잘 지키면서 효과적으로 도움을 줄 수 있는 지혜로운 방법을 찾고 청해야 합니다.
물론 이를 위해 자기 자신만을 지키려는 이기심으로 “위축되어 닫힌 삶” 에서 벗어나 어려움을 함께 나누어 극복하려는 공동선의 정신으로 “확장되어 열린 삶” 을 살아가려는 굳은 의지와 다짐이 중요합니다.
세상 사람들이 어쩔 수 없는 “언택트(Untact: 비대면)” 상황에서 “온택트(Ontact: 온라인 만남)”라는 새로운 소통과 만남의 방식을 찾아냈다면 우리 신앙인들은 주님과 영적으로 결합해서 살아가는 “특별한 일치와 유대”를 토대로 틀림없이 새로운 사랑의 방법들-가령, 공동체 미사가 중단된 기간, 여러 신자분들이 제게 기운 내라며 소리 소문 없이 사제관 문 앞에 다양한 음식을 걸어 놓았고, SNS를 통해 선물 쿠폰을 보냈습니다-을 실천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 마음을 주님과 연결된 사랑과 용기로 가득 채워서 코로나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하고, 하루하루 “독특하고 기발하며” 남다른 선행을 실천하여 기쁨과 보람의 열매를 듬뿍 맺고 행복하게 살아가기를 바랍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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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이정훈 클레멘스 신부님]
<부정한 사람이요! 그러나...>
살아가면서 많이 듣는 말이 소외, 배제, 따돌림, 차별, 무관심 등등 입니다.그리고 교회는 이러한 소리에 민감하게 반응하며 어떻게 해법을 찾아야 하는지 오늘도 고민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들은 하느님의 말씀들은 이러한 상황에 놓여있는 사람들과 우리가 그들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조금은 알려주고 있습니다.
우선 복음 선포의 소명을 가진 사람의 품성은 가엾은 마음을 간직하며 살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는 현실의 질서 안에서 나의 가르침이 필요한 이에게 제대로 사랑의 계명을 알리고,그가 공동체 안에 잘 정착할 수 있게 이끌어 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을 연극의 1막, 2막, 3막으로 나눈다면 어떨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1막까지는 참으로 두 사람의 호흡이 잘 맞아 떨어졌습니다.
그러나 2막에서는 어그러졌고, 3막에서는 선의를 베푼 예수님께서 곤란에 처하게 됩니다.
그러나 어쩌겠습니까. 복음 선포자의 운명이 그렇다면 그것을 짊어지고 살아가야 하는 것이라 생각해 봅니다.
그래서 오늘도 복음 선포의 소명을 가진 이들은 가엾은 마음을 가슴에 품고 어떠한 상황이 벌어져도 그 길을 묵묵히 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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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초등학생 때의 제 모습은 자신감 없는 소극적인 모습이 많았습니다. 남들 앞에서 말도 못 했고, 특히 해보지 않은 새로운 일에 대한 두려움을 늘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담임선생님께서 “이번에 구연동화 대회가 있으니까 우리 반 대표로 명연이가 나가라.”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사람들 앞에 서면 얼굴부터 빨개지는 제가 또 말재주도 전혀 없는 제가 사람들 앞에서 동화를 말해야 한다는 것은 불가능해 보였습니다. 그래서 선생님께 할 수 없다고 말씀드렸더니, “괜찮아. 너는 잘 할 수 있어. 선생님은 너를 믿는다.”라면서 무조건 나가라는 것입니다.
결과를 말한다면, 대회에 참석했고 저는 2등을 할 수 있었습니다. 생각보다 참가한 사람들이 잘하지 못하더군요. 그래서 좋은 성적도 얻을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 대회를 통해서 저는 한 가지 중요한 것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자신감’이었습니다. 그때의 구연동화 대회에 참석한 것이 지금 이렇게 말로 먹고사는 사람으로 만든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다가오는 모든 기회는 우리를 성장하게 합니다. 실패 역시 또 하나의 성장을 가져온다고 하지 않습니까?
주님께서는 이렇게 우리 편이 되어서 늘 좋은 쪽으로 우리를 이끌어주십니다. 따라서 내게 다가오는 모든 기회를 두려워하고 피해서는 안 됩니다.
나병 환자가 예수님께 와서 도움을 청합니다. 그 도움이란 무엇일까요? 나병이라는 병에서 해방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스승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라고 말합니다. 예수님께 대한 호칭이 단순히 ‘스승님’입니다. 주님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주님으로 생각하지 않았고, 단순히 놀라운 힘을 가지고 있는 용한 의사로만 생각했던 것입니다. 이렇게 자신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 사람인데도 예수님께서는 그의 병을 고쳐 주십니다. 왜 그랬을까요? 늘 당신께 대한 믿음을 강조하신 분이 아니십니까?
그 해답을 ‘예수님께서 가엾은 마음이 드셔서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말씀하셨다.’라는 구절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이 나병 환자의 고통을 아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굳이 율법에 금지되어있어서 사람들 입에 오르내릴 스캔들을 불러일으킬 행동인 나병 환자를 직접 만지시기도 했던 것입니다.
이렇게 주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당신께 충실하지 못한데도 불구하고 우리를 어떤 순간에서도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그 사랑을 기억하면서 오늘도 주님께 나아갈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세상의 어떤 어려움과 힘듦도 거뜬히 이겨낼 수 있으며, 그 안에서 좋은 쪽으로 성장하는 나 자신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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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해진 한계는 없습니다.>
나무나 처마 아래 등지에 벌집을 짓고 사는 일반 벌과는 다르게, 땅속에 집을 짓고 사는 벌이 있습니다. 바로 ‘땅벌’입니다. 유명한 노래 제목인 ‘땡벌’은 강원도에서 부르는 ‘땅벌’을 말합니다.
이 땅벌은 재미있는 점이 하나 있습니다. 이 벌은 큰 덩치에 비해 너무 작은 날개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공기역학적으로 도저히 날 수 없는 구조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이 땅벌은 날지 못할까요? 아닙니다. 신기하게도 잘 날아다닙니다. 날지 못할 구조이지만, 잘 나는 것은 자신의 한계를 날 수 없는 존재로 여기는 것이 아니라 당연히 날 수 있다고 믿고 있기 때문이라고 하네요.
땅벌을 보면서 한계에 대해서 다시금 생각하게 됩니다. 우리는 스스로의 한계를 만들면서 할 수 없는 이유의 숫자를 늘립니다. 그러나 세상에 정해진 한계는 없습니다. 그 한계를 만들어가지 않을 때,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것들의 숫자는 계속해서 증가하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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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우리는 사랑받는 존재입니다>
찬미예수님, 사랑합니다. 주님의 사랑으로 사랑할 수 있는 은혜가 주어지길 희망하며 갖가지 질병으로 고통을 받는 이들에게 치유의 손길이 함께하기를 기도합니다.
질병으로 다가온 고통을 이긴다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주님께 믿음을 고백해도 아픔은 지속하기 때문에 진정 그분이 함께하시는 것인지 의문이 생길 때도 있습니다. 그래도 믿는 이들은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며 기도합니다. ‘주님, 하고자 하시면 모든 것을 이루실 수 있으니 고통을 거두어 주시고 당신이 몸소 함께하고 계심을 느끼게 해 주십시오. 고통이 계속된다면 믿음이 흔들리지 않게 지켜주시고 오히려 그 아픔을 통해 당신의 수난 고통을 체험하는 시간으로 인도해 주십시오.’ 믿음은 시련은 이겨내는 힘입니다.
유다인들에게 나병은 하늘에서 내린 형벌로 저주 받은 모습이요,(레위13,34) 죽음으로 향하는 상태(욥기18,13)였습니다. 나병에 걸린 사람은 공공장소나 사람들의 모임에 나타날 수 없었을 뿐 아니라, 다른 사람과 접촉할 수 없었습니다. 혹시라도 누군가가 다가오면 자신이 ‘불결한 사람’ 이라고 외치면서 접근하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고 법으로 규정하였습니다.(레위13,45-46) 법은 접근을 막을 뿐 나병을 치유하기 위해 해 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이것이 율법의 한계입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의 나병환자는 예수님께 와서 무릎을 꿇고 “스승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마르1,40) 하며 도움을 청하였습니다. 무릎을 꿇는다는 것은 더는 다른 길이 없어서 마지막으로 마치 물에 빠진 이가 지푸라기라도 잡고 매달리는 간절한 심정으로 하소연하는 것입니다.
나병환자는 예수님 앞에 무릎을 꿇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그 이상의 것이라도 할 마음의 각오가 되어 있습니다. 사실 무릎을 꿇는다는 것은 항복의 자세입니다. ‘저의 목숨은 당신께 달렸으니 저를 살리든지 죽이든지 알아서 하십시오. 그저 저는 당신의 처분만을 기다립니다. 저는 더는 할 것이 없습니다.’라고 애원하는 자세요, ‘한 말씀만 하십시오. 당신은 저의 주인이고 저를 고쳐주실 수 있는 유일한 분이고 저의 희망이십니다.’하는 순종의 자세이기도 합니다. 결국 무릎을 꿇은 것은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는 믿음의 표현입니다. 이러한 간절함에 예수님은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는 곧바로 “나병이 가시고 깨끗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죄인이고 불결한 사람이기 때문에 하느님께 나아갈 수 없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러기 때문에 더욱 다가와야 하고 또 그 어떤 것도 장애가 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주님은 사랑과 자비로 감싸주시고 치유해 주시는 분입니다. 아무런 조건 없이 지금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받아주시는 분입니다. 사람들은 분리하고 소외시키지만, 주님의 품은 차별이 없으십니다. 우리는 누구나 사랑받는 존재입니다. 나를 사랑하시는 주님의 품에 지체함 없이 안길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사실 우리는 육체적 질병뿐 아니라 정신적, 영적인 나병을 앓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릎을 꿇고 간절하게 애원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무릎을 꿇는 자세는 우리가 주님께 나올 때 취할 가장 기본적인 자세임에도 그렇게 하지 못하는 안타까움이 있습니다. 우리가 앓고 있는 병에서 치유되려면 먼저 무릎을 꿇는 자세부터 배워야 합니다.
성 바오로회 故 유광수 신부님은 무릎 꿇지 못하는 원인을 다섯 가지로 말씀하셨습니다.
1). 자신이 믿는 주님이 어떤 분인지 모르기 때문이다.
2). 지금 자신이 어떤 병이 들었는지를 모르기 때문이다.
3). 예수님께서 자기에게 주고자 하는 선물이 무엇인지를 모르기 때문이다.
4). 교만함 때문이다. 교만한 자세란 목덜미가 뻣뻣한 자세이다. 몸이 굳어 있는 사람이고, 마음이 완고한 사람이다.
5).하느님으로부터 자신이 받은 은혜가 얼마나 큰지를 모르기 때문이다. 주님 앞에 무릎 꿇는 기쁨의 날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무릎을 꿇으면 비로소 사랑받는 나 자신을 보게 되고, 사랑해야 할 이웃을 볼 수 있게 됩니다. 그리고 행동하게 됩니다. 오늘이 그날이 되기를 희망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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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하느님의 영광을 위한 삶>
-만남, 치유, 선포-
오늘 나병환자에 관한 말씀을 대하면서 떠오른 말마디가 외로움입니다. 오늘 제1독서 레위기의 다음 나병환자의 처지를 생각해 봅니다.
“악성 피부병에 걸린 병자는 옷을 찢어 입고 머리를 푼다. 그리고 콧수염을 가리고 ‘부정한 사람이오.’. ‘부정한 사람이오.’하고 외친다. 병이 남아있는 한 그는 부정하다. 그는 부정한 사람이므로, 진영 밖에 자리를 잡고 혼자 살아야 한다.”
혼자 격리되어 사람들에게 멸시와 차별, 혐오중에 살아가는 나병 환자들에게 신체의 병이나 아픔보다는 마음의 외로움이, 아픔이 치명적일 것입니다. 나병 환자들이 상징하는 바 갖가지 사유로 고립단절되어 외롭게 살아가는 숱한 사람들입니다. 아마 분명 외로워서 수도원을 찾는 이들도 참 많을 것입니다.
‘외로우니까 사람이다.’ 라는 널리 회자되고 있는 정호승 프란치스코 시인의 시도 생각납니다. 주님이 없는 외로움은 병이자 아픔일 수 있지만 주님 안에서 겪는 외로움을 축복일 수 있습니다. 어찌보면 외로움은 주님을 찾으라는 주님의 간곡한 초대의 표지일 수 있습니다.
주님이 계시기에 외로움도 견뎌낼 수 있으며, 더 고마운 것은 외로움은 주님을 그리는 그리움으로 바뀔 수 있다는 것입니다. 아주 예전에 써놓고 애송했던 ‘외로움’과 ‘그리움’이란 시가 생각납니다.
-“삶은 외로움을 견뎌내는 것
외로움중에도 묵묵히 꽃들 피어 내는 것
하늘이 별들 피어 내듯
땅이 꽃들 피어 내듯.”-2001,8.17
-“그리움이 깊어지면 병이 된다 하지만
당신 향한 내 그리움은 기도가 되고 별이 됩니다
당신 영혼 하늘에 빛나는 별이 되어 수호천사 별이 되어
언제나 당신을 비출 것입니다”-1997.4
참 고마운 것은 주님 안에서 외로움은 곧 주님 향한 그리움으로 바뀐다는 것입니다. 외로움의 눈빛이 어둡고 무겁다면 주님을 기다리는 그리움의 눈빛은 별처럼 영롱하게 빛납니다. 제 집무실 책상 위 도예가 조카가 선물한 도자기의 핀란드 흰 올빼미 눈이 바로 그러합니다. 기다림의 눈빛처럼, 그리움의 눈빛처럼 늘 영롱하게 빛납니다. 외로움, 그리움, 기다림 모두 정답고 깊은 순 우리말입니다.
바로 오늘 복음에서 주님을 찾았던 나병환자의 눈빛이 그러했을 것입니다. 오늘 복음의 나병환자의 치유과정을 통해 우리는 ‘하느님의 영광을 위한 삶’이라는 참 귀한 진리를 배웁니다.
첫째, 갈망과 찾음입니다.
사람 누구에게나 하느님 심어 주신 당신 향한 갈망과 열정, 그리움입니다. 바로 외로움은 이런 주님 향한 갈망과 열정, 그리움에로의 초대입니다. 바로 이런 갈망의 그리움으로 주님을 열렬히 항구히 찾는 것입니다. 참으로 진정한 성소의 표지는 이런 주님 향한 샘솟는 그리움, 갈망입니다. 바로 오늘 복음의 나병환자가 이런 갈망과 찾음의 모범입니다. 놀라운 것은 그가 좌절이나 절망하지 않고 끊임없는 갈망으로 주님을 찾았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세월 흘러 나이들어도 그리움의 열정만은 식어선 안됩니다. 갈망의 열정이 있어야 깨어 기도하게 되고 마음의 순수입니다. 참으로 그리움의 갈망이, 열정이 있을 때 살아있다 할 수 있습니다. 바로 하느님 향한 목마름이요 배고픔입니다. 하여 수도자를 하느님을 찾는 갈망의 사람, 그리움의 사람이라 정의합니다.
어찌 수도자뿐이겠습니까? 모두가 마음 깊이에서는 하느님을 목말라하고 배고파합니다. 하여 영혼의 갈증을 해갈하고 배고픔을 채우고자 이 거룩한 미사에 참여한 우리들입니다.
둘째, 만남과 치유입니다.
간절히 찾을 때 저절로 기도하기 마련입니다. 주님과의 소통의 사랑이, 개방이 기도입니다. 주님을 찾을 때 기도하게 되고 주님을 만납니다. 주님을 찾지 않으면 절대 만나지 못합니다. 갈망으로 찾을 때 눈이 열려 주님을 알아보지만 찾지 못해 영혼이 눈멀어 있으면 주님을 앞에 두고도 알아보지 못합니다.
나병환자의 마음은 갈망으로 주님 향해 활짝 열려 있었고 마침내 절호의 기회가 온 것입니다. 쏜살같이 예수님께 가서 도움을 청합니다. 분명 나병환자는 이 사람 하나뿐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아마 대부분 나병환자들은 체념과 절망의 자포자기로 무너져 내려 있었던 듯 합니다.
그러나 이 나병 환자만은 주님께 희망을 두고 끝까지 찾고 기다렸던 듯 합니다. 그는 주님 앞에 무릎을 꿇고 소원을 고백합니다. 참으로 간절하고 절실한 믿음의 고백에 주님은 감동하셨음이 분명합니다. 주님을 감동시키는 순수한 믿음입니다.
“스승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이 하실 수 있습니다.”
똑같은 예수님께서 사제를 통해 이 거룩한 미사를 집전하십니다. 우리 또한 이런 나병환자와 같은 절실한 심정으로 심신의 병과 아픔을 치유해 주십사 기도할 때 심신의 치유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가엾은 마음이 드셔서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말씀하십니다. 그대로 미사은총을 상징합니다.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
그러자 바로 나병이 가시고 그가 깨끗하게 되었다 합니다. 그대로 미사에 참석한 우리 모두를 향한 주님의 치유의 구원선언입니다. 사실 심신의 치유와 건강에 미사은총보다 더 좋은 치유제도 예방제도 없습니다. 모두가 거리를 두고 멀리했지만 주님만은 나병환자와의 일치를 통해 그를 치유해 주셨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예수님의 1.가엾이 여기는 마음, 2.따뜻한 스킨쉽, 3.권위있는 말씀의 삼박자 치유의 구원원리를 배웁니다.
어찌 나병 육신의 치유뿐이겠습니까? 외로움과 그리움, 차별, 무시, 혐오로 인한 온갖 마음의 온갖 병과 아픔도 치유되니 말 그대로 온전한 전인적 치유입니다. 정말 무서운 병은 무지와 허무, 무의미, 절망, 좌절, 우울증 같은 영혼의 병, 마음의 병입니다. 계속되는 코로나로 인해, 일자리를 잃고 생활고로 인해 얼마나 많은 이들이 생존의 위기로 심신의 병과 아픔을 겪고 있는지요! 외로움이니 그리움이니 하는 말마디들은 이런 분들에게는 사치스런 감상으로 들릴지도 모릅니다.
날로 빈부의 격차가 심해진다 합니다. 어제 몇분의 형제들의 의견에도 공감했습니다. 나라만의 힘으로 역부족이니 IMF 때 금모으기 등을 통해 위기를 극복했던 것처럼, 이익공유제란 말도 나왔듯이 있는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지갑을 열어 가진 것을 나누는 거국적 사랑의 운동으로 자영업자들, 소상공인들도 함께 살도록 해야 하지 않겠나 하는 의견들이었습니다.
셋째, 파견과 선포입니다.
주님과의 만남과 치유로 끝이 아닙니다. 곧장 파견과 선포로 이어져야 비로소 치유와 구원의 완성입니다. 복음 후반부가 치유받은 나병환자의 파견과 더불어 복음 선포의 활약상을 보여줍니다.
‘그는 떠나가서 이 이야기를 널리 퍼뜨리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예수님께서는 더 이상 드러나게 고을로 들어가지 못하시고, 바깥 외딴곳에 머무르셨다. 그래도 사람들은 사방에서 그분께 모여들었다.’
치유의 구원을 받은 나병환자가 제 본연의 삶의 자리로 파견되어 복음 선포의 일꾼이 되니 그를 통해 빛나는 하느님의 영광입니다. 하느님의 영광을 위한 삶, 믿는 이들 모두의 궁극의 목표입니다. 이보다 영육의 건강에 좋은 처방의 삶도 없습니다. 바로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에 참석한 우리 모두를 향해 바오로 사도를 통해 명쾌하게 말씀하십니다.
“여러분은 먹든지 마시든지, 그리고 무슨 일을 하든지 모든 것을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십시오.---무슨 일을 하든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려고 애쓰는 나처럼 하십시오. 나는 많은 사람이 구원을 받을 수 있도록, 내가 아니라 그들에게 유익한 것을 찾습니다.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것처럼 여러분도 나를 본받는 사람이 되십시오,”
예수님과 일치된 삶을 통해 하느님의 영광을 환히 드러내는 바오로 사도 자신을 본받으라는 주님의 말씀입니다. 바로 이에 근거한 “모든 일에 하느님께 영광!”(규칙57,9) 이란 분도규칙의 말씀이 수도원 입구 정문 바위판에 새겨져 있습니다. 이어지는 복음 말미 예수님의 지혜로운 처신도 우리에게 좋은 가르침이자 깨우침이 됩니다. 바로 군중들의 과열된 열광의 분위기를 피하여 외딴곳에서 아버지와의 친교를 통해 새롭게 자신을 충전시키는 주님의 모습에서 주님의 분별의 지혜를 배웁니다.
그래도 사람들은 사방에서 예수님께 모여들었다 하니 새삼 예수님을 통해 사방으로 퍼져나가는 하느님 영광의, 하느님 생명의, 하느님 구원의 빛이자 향기임을 깨닫습니다.
주님은 연중 제6주일, 사순시기를 앞두고 우리 모두에게 참 좋은 가르침을 주셨습니다. 우리 삶의 궁극 목표인 하느님의 영광을 위한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바로 오늘 복음의 나병환자가 롤모델이 됩니다. 그러니 이를 위해,
1.주님을 찾는 지칠줄 모르는 갈망과 열정을 지니십시오.
2.주님을 만나 치유받으십시오.
3.제 삶의 자리로 파견되어 복음 선포의 삶을 사십시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우리 모두의 영육의 병과 아픔을 말끔히 치유해 주시어 당신 복음선포의 일꾼으로 각자 제 삶의 자리로 파견하시어 하느님의 영광을 위한 삶을 살게 하십니다.
“행복하여라, 죄를 용서받고, 잘못을 씻은 이! 행복하여라, 주님이 허물을 헤아리지 않으시고, 그 영에 거짓이 없는 사람!”(시편32,1-2).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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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알타반의 말씀 사랑♡
오늘 미사의 말씀은 예수님의 사랑법을 보여 주십니다.
"그는 부정한 사람이므로 진영 밖에 자리를 잡고 혼자 살아야 한다."(레위 13,46)
지금은 한센병이라 불리는 나병은, 구약 시대에는 접촉하면 전염되어 부정하게 되는 악성 피부병으로 간주되었습니다. 그 병에 걸린 이들은 공동체에서 내쳐져 소외되고 고립된 삶을 살아야 했기에, 병으로 무너지는 몸의 고통과 더불어 정신적 심리적으로도 큰 상처를 입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가엾은 마음이 드셔서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말씀하셨다.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마르 1,41)
오늘 복음에서는 그중 한 사람이 예수님께 다가와 치유를 청합니다. 제자들까지 무리지어 따라다니는 랍비에게 먼저 다가오다니, 병자로서는 어마어마한 용기를 낸 것입니다. 자칫 내쫓기는 수모와 함께 두 배 세 배의 상처를 입을 상황이 야기될 수도 있으니까요.
예수님은 금기를 깨시고 손을 내밀어 그의 몸에 대십니다. 이는 가엾이 여기는 마음에서 나온 행동이지요. 그저 말씀만으로도 충분히 고쳐 주실 수 있지만, 지금 그에게 필요한 것이 따뜻한 위로의 손길임을 아시기 때문입니다. 가벼운 터치나 악수, 다독여 주는 접촉은 같은 인간으로서 동등하게 대접을 받는다는 자존감을 되살려 주지요.
예수님은 낫기를 바라는 그의 간절한 염원이 곧 당신의 바람이라고 하십니다. 이는 아프고 고통받고 슬퍼하는 이들 하나 하나에게 가지시는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그렇게 부정함과 불결함을 벗고 깨끗하게 된 이는 몸과 마음이 함께 치유되었을 겁니다.
"바깥 외딴곳에 머무르셨다."(마르 1,45)
그런데 이 감동스런 치유 기적은 의외의 결과를 가져 옵니다. 치유된 이가 너무 기쁜 나머지 예수님의 당부를 간과하고 사제뿐만 아니라 만나는 이들에게 "널리 알리고 퍼뜨"렸기 때문에 예수님이 드러나게 다니시지 못하고 "바깥 외딴곳"에 머무르시게 된 겁니다.
"바깥 외딴곳"
이는 예수님 구원사업에서 매우 의미심장한 장소를 가리킵니다. 예수님은 모두가 손가락질하고 피하는 환자의 병뿐만 아니라 인류가 앓고 있는 모든 병고와 고통을 대신 짊어진 분이시고, 그분의 치유 방법, 사랑 방법은 고통에 허우적대는 이가 지닌 모든 아픔을 당신이 대신 다 가져가는 방식입니다. 이는 이사야 예언자가 노래한 "주님의 종의 넷째 노래"가 증언하고 있지요.
구원자 예수님은 그렇게 인간의 모든 죄악과 고통을 지고 예루살렘 도성 밖에서 최후를 맞이하십니다. 결국 예수님의 구속 사업이 완성된 자리가 바로 여기인 셈이지요.
"그래도 사람들은 사방에서 그분께 모여들었다."(마르 1,45)
그분의 가르침과, 소외된 이를 대하시는 그분의 격의 없는 친밀함, 그리고 치유 기적 이야기에 사람들이 예수님을 찾아나섭니다. 사람 대접과 존중이 그리운 이들이 대다수였을 것 같습니다. 율법의 금기를 넘어 사람을 따뜻이 어루만져 주시는 분에게서 군중은 기존 종교 지도자들에게서 볼 수 없는 파격적 권위를 느꼈기 때문이겠지요.
"나는 많은 사람이 구원을 받을 수 있도록, 내가 아니라 그들에게 유익한 것을 찾습니다."(1코린 10,33)
철저히 스승 예수를 닮으려 했던 사도 바오로의 고백에서 예수님의 마음이 보입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치고 행하신 것은 오직 아버지의 뜻이었고, 그 대상은 어둠과 그늘 속에서 좌절하고 신음하는 가련한 백성들이었지요. 그분의 중심에는 당신 자신의 이익이 아니라, 사랑하는 아버지와 사랑하는 백성이 가득 들어차 있었으니까요.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우리는 정치와 종교의 권력이 짱짱하게 행사되는 현란한 도성 한가운데가 아니라, 바깥 외딴곳에서 비천하고 부정한 사형수가 되어 십자가 위에서 차갑게 숨을 거두신 예수님 곁에 모여든 이들입니다.
그분은 세상이 강함과 부유함, 우월함을 자랑하며 손짓할 때 가장 무력하고 아프고 소외된 이들에게 손을 내밀어 어루만지는 분이십니다. 이런 그분의 사랑법이 그분이 누구신지 알게 해 주지요. 그리고 그분을 사랑하고 따르는 우리의 정체성도 되어 줍니다.
사랑하는 벗님! 우리 그리스도인은 차별과 갑질이 난무하는 세상에서 그런 예수님을 닮으라고 불리운 이들이지요. 아울러 우리 저마다의 고통을 가엾이 여기시며 깨끗하게 해주고자 하시고 치유해 주시는 예수님 손길의 수혜자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처럼 이웃을 살피고 사랑하기 위해 애쓰는 여러분 모두를 축복합니다. 예수님께 치유받아 깨끗해진 여러분을 응원합니다. 새로 시작되는 올 한 해, 예수님의 사랑법을 배우고 나누는 복된 한 해 되시길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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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양주분회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오늘은 연중 6 주일입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는 악성 피부병에 걸린 사람에 대한 구약의 율법의 규정을 알려줍니다.(레위 13,1-2,44-46)
그는 옷을 찢고 머리를 풀어야 했으며, 공공장소나 사람들이 모이는 장소에 나타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과는 접촉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혹시 누군가가 접근해 오면 “나는 부정한 사람이요”라고 외치면서 접근하지 못하도록 경고해야 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의 나병환자는 율법을 어기고 예수님께 와서 도움을 청합니다. 그만큼 믿음이 크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제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무슨 일을 하든지 모든 것을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십시오. ~교회에 방해를 놓는 자가 되지 마십시오.”(1코린 10,31-32)라고 권고하면서 ‘자신은 많은 사람이 구원을 받을 수 있도록, 자신이 아니라 그들에게 유익한 것을 찾는다.’(1코린 10,33)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복음>에서는 <제1독서>의 ‘구약의 율법’과 ‘예수님의 복음’의 차이를 극렬하게 보여줍니다. ‘구약의 율법’은 나병환자이기 때문에 사람들이 접근하지 못하도록 막아야 한다는 규정을 제시할 뿐 그를 치유하기 위해서는 아무 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복음’은 나병환자이기 때문에,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오히려 예수님께 와서 치유 받습니다.
오늘 <복음>의 나병환자는 예수님을 피해간 것이 아니라, 오히려 다가와서 무릎을 꿇고 애원합니다. 죄인이고 불결한 사람이기 때문에 하느님께 나아갈 수 없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더욱 예수님께 다가가야 한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병들었고 죄인이기에, 오히려 감싸주시고 치료해주시기 때문입니다. 이는 <요한복음>의 ‘간음한 여인에게 용서를 베푸시는 장면’에서도 잘 볼 수 있습니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간음한 여인이 죄인이기에 돌로 쳐 죽여야 한다고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죄인이기 때문에 용서받아야 할 대상이라고 하십니다. 이처럼, ‘복음’은 규정이 아니라, 사랑과 호의를 제시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나병환자는 말합니다.
“스승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마르 1,40)
이는 그가 예수님의 권능, 곧 치유의 능력을 믿는다는 것을 말해 주며, 동시에 그 능력의 행사가 자신에게 달려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 달려있음을 말해줍니다.
그러기에 오로지 예수님의 처분에 온전히 의탁하고 예수님의 뜻에 순명하겠다는 것을 드러냅니다. 마치 예수님께서 겟세마니에서 하신 것처럼, 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겟세마니에서 아버지께 기도하셨습니다.
“아빠! 아버지! 아버지께서는 무엇이든지 하실 수 있으시니, 이 잔을 저에게서 거두어주십시오. 그러나 제가 원하는 것을 하지 마시고 아버지께서 원하신 것을 하십시오.”(마르 14,36)
이는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것을 당신도 원하신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곧 자신의 뜻을 아버지의 뜻에 순명하는 온전한 의탁과 신뢰를 말해줍니다.
바로 이처럼, 나병환자도 예수님께 그렇게 하고 있음을 말해줍니다. 그는 ‘예수님께서 하시고자 한다면’ 하면서, 자신의 바람이 아니라 예수님의 바람에 의탁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게 기도하는가요? 자신의 바람을 하느님을 통해 얻어내고자 하는가요, 아니면 하느님의 바람이 우리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라는가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나병환자를 만지셨습니다. 율법에 의하면(레위 13,45-46), 나병환자를 만지거나 접촉하면 부정을 타게 되는데도, 예수님께서는 나병환자에게 손을 내밀어 만지셨습니다.
예수님의 “손”은 구원의 힘을 드러내며, 그분의 신체적 접촉은 우정과 사랑을 드러냅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부정을 탄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나병환자가 깨끗이 나았습니다.
그러니 예수님께는 거룩함이란 부정을 피하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부정을 깨끗하게 하는 데 있으셨습니다. 그것은 불결함에 닿아도 불결해지지 않는 오직 ‘거룩하신 분’만이 할 수 있는 일이었습니다.
그러기에, 오늘 <복음>의 나병환자 치유는 마치 불꽃 속에서도 떨기나무를 태우지 않으시고(탈출 3,2), 아기를 낳으면서도 동정성을 잃지 않게 하시 듯, 불결한 이를 만져도 불결해지지 않고 오히려 불결한 이를 깨끗하게 하시는 ‘거룩하신 분’이신 당신의 신성을 드러냅니다.
곧 당신이 거룩하신 분, 구원자이심을 드러냅니다. 그 거룩하신 분, 구원자 예수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말합니다.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마르 1,41)
문드러지고 부스럼투성이인 우리 영혼을 깨끗하게 해 주십니다. 오늘 우리를 새롭게 하시고 굳세게 해 주십니다. 그러니 오늘도 우리의 바람이 아니라 주님의 바람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우리 자신을 승복해야 할 일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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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스승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마르 1,40)
주님!
당신께서 하시고자 한 바를 하소서.
당신께서 바라시는 것을 저도 바라게 하소서.
당신이 하시고자 한 바를 저도 하게 하소서.
주님, 저를 만지소서.
저의 바람과 하는 일을 깨끗하게 하소서.
저를 새롭게 하시고 당신 뜻을 이루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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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마르1,41)
어떤 나병 환자가 예수님께 다가와 도움을 청하면서
무릎을 꿇고 이렇게 말합니다.
"스승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가엾은 마음이 드셔서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자 바로 나병이 가시고 그가 깨끗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시기 전에 사람들은 전적으로 율법의 지배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율법의 한 축을 이루고 있는 레위기의 말씀인 오늘 독서에서도 드러나고 있는 것처럼 율법은 사람들을 갈라놓았습니다. 부정한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으로 갈라놓아, 부정한 사람들을 구원에서 배제시켰습니다.
오늘 제2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코린토 교회에 이렇게 권고합니다.
"형제 여러분, 여러분은 먹든지 마시든지, 그리고 무슨 일을 하든지 모든 것을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십시오. 유다인에게도 그리스도인에게도 하느님의 교회에도 방해를 놓는 자가 되지 마십시오."(1코린10,31-32)
사도 바오로의 이 권고는 당시 분열되어 있었던 코린토 교회를 향한 권고이지만, 여기에 있는 우리를 향한 권고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을 통해 드러난 하느님 아버지의 뜻은 죄인과 의인이 갈라져 있지 않는, 부정한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이 갈라져 있지 않는, 모두가 하나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율법의 본질입니다.
그러니 너와 나를 갈라놓는 것은 그 어떠한 것도 하느님의 뜻을 어기는 행위가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이루시고자 죄인들과 부정한 사람들에게 다가 가셨고, 의인이 되고자 깨끗한 사람이 되고자 하는 그들의 청을 거절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당신의 모습을 닮게 하시려고, 때로는 가장 낮은 자의 모습, 가장 비천한 자의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시기도 하십니다.
율법이 아닌 율법의 본질을 살려고 애쓰는 하느님의 자녀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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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0KKY5Swz9Oo&feature=youtu.b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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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마르 1, 41)
어디로부터
정화는
기인하는가?
삶은 곧
정화의
여정이다.
마음의 정화가
간절한 때이다.
주님께서
우리의
두려움과
욕망을
치유하여
주신다.
정화는
사랑의
실천이다.
사랑으로
깨끗하게 되는
치유는 하느님과
우리의 관계에
있다.
사랑의
관계이다.
사랑이신
하느님께로의
방향전환이
필요한
시기이다.
사랑으로
새로운 삶이
시작된다.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게 하는
사랑이다.
정화는
하느님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것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투명함이다.
투명할수록
빛나는
사랑의
관계이다.
투명한
예수님의 삶이
우리를
깨끗이 한다.
참된 사랑으로
돌아가는
기쁨을 주신다.
다시
되살리기 위한
사랑이다.
내 자신이
먼저 깨끗이
되어야 세상도
깨끗하여
질 수 있다.
사람으로
얻을 수 있는
가장 큰 기쁨인
정화와 치유를
우리에게
주신다.
하느님께로
되돌아오게
하신다.
하느님
사랑으로
치유되는
은총의
주일이다.
하느님께
치유의
해답이 있음을
믿고 하느님을
향한다.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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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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