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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록>
육해군기 헌납에 대하여
본 편은 1935년 4월 7일 해군기 헌납의 날에 마이크를 통해 경성방송국에서 방송한 것으로, 당시 잡지 '국방(國防)'에 게재된 것이다.
나는 일전에 육군에 애국기(愛國機)를 헌납하고 오늘은 또 해군에 보국기(報國機)를 헌납한 문명기입니다.
일전에 육군에 헌납했을 때 조선어로 방송을 했기 때문에 오늘은 ‘국어’34)로 그 의미를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나 국어를 그리 잘하지 못하기 때문에 듣기 불편한 점도 있으시겠지만, 모쪼록 잠시 조용히 경청해 주시길 바랍니다.
우리나라는 아시는 바와 같이 바야흐로 글자 그대로 비상시국에 직면했고, 특히 지난 22일 완전히 국제연맹에서 탈퇴했습니다. 세계의 굴레에서 벗어났다는 것은 도리어 국가를 위해 통쾌한 일이라고 봅니다.
저는 일찍이 독일의 폐위된 황제 카이저가 주장한 '황화론(黃禍論)'이라는 책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그 속에 황색인종은 백색인종의 화근이 된다는 것이 적혀 있는데, 이는 그들이 인류로서의 우월감에서
34) 일본어.
우리 황색인종을 경멸하고 또 차별적 대우를 한다는 의미로 저는 매우 유감스럽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우리 대일본제국은 어떻습니까. 제가 말씀드리지 않아도 여러분은 잘 알고 계시겠지만, 황통은 면면히 2,500여 년 이어져 내려오고, 나라를 지키는 데 용감한 결사의 황군이 있으며, 죽음을 보는 것처럼 천황 곧 국가로 한 몸의 불가분의 관계에 있어서 온전히 일원적이고, 세계 어느 나라라 할지라도 우리나라만큼 국체를 가진 나라는 없습니다.
특히 제가 든든하게 생각하고 세계에 자랑할 만한 특색은 일청전쟁과 일러전쟁을 통해 포로를 내지 않았다는 점이라고 봅니다.
그중에는 적의 손에 붙잡힌 경우도 약간은 있지만, 모두 칼이 부러지고 탄환이 바닥나 신체의 자유를 잃고 어쩔 수 없이 적에게 붙잡힌 것입니다. 특히 상하이사변의 구가 소좌와 같이 천황폐하에 대해 송구스러운 일이라며 할복한 일은 장렬하고 귀신을 울리게 하는 것으로, 세계에 그러한 충절 무비한 군인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또한 육탄3용사가 묘행진(廟行鎭)의 이슬로 사라진 저 맹렬하고 용감한 행동은 또 어떻습니까.
독일이나 러시아는 모두 세계의 강국을 불리고 강병을 자랑하고 있었지만, 일러전쟁이나 일독전쟁의 저 포로는 어떻습니까.
따라서 그들이 황색인종은 백색인종의 화근이 된다고 하는 것은 도리어 우리나라와 같은 우월하고, 게다가 세계의 평화를 애호하고 있는 나라에 대해 잘못된 견해를 갖고 있는 것으로 보고 저는 이와 같이 훌륭한 세계에 자랑할 만한 국체를 지닌 대일본제국의 신민이 된 데 대해 매우 감사하고 또 영광으로 생각하고 있는 사람으로, 일전에 조선어로 이런 점에 대해 강하게 역설한 바입니다.
다음으로 우리나라에서는 1935년과 1936년을 국제위기라든가 난국에 조우하고 있다고 하고 국민은 이 국난을 돌파해서 비상시국을 정복해야 한다며 전국 곳곳에 국방의회가 창설되어 총후(銃後)의 국민은 결속하고 일치해서 이를 타개하는 데 매진해야 합니다. 그래서 불초 저 또한 영덕 국방의회장으로 추천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 사명을 완수하고 본분을 충분히 다하기 위해서는 먼저 민심을 작흥하고 다수의 비행기를 헌납하는 일이 무엇보다 급선무라 보고, 지나치게 나서고 주제넘게도 일전에 약간의 헌금을 했습니다.
그랬더니 육해군성에서도 흔쾌히 받아주는 영광을 얻어 정중하게 대응해 주신 일은 너무나 큰 영광이어서 감격하고 있습니다.
본디 비행기라 함은 아시는 바와 같이 현재의 전쟁에 반드시 필요한 긴요한 병기입니다.
저는 일전에 미국이 5개년 계획을 세워 매년 비행기 800대를 제조해 4,000대를 갖춘다는 사실을 보고 다소 불안한 마음을 품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우리나라에는 예부터 전통의 야마토 다마시(大和魂), 곧 일본정신이 있습니다.
숫자에 있어서는 물론 그들에게 뒤지겠지만 황국정신으로 이를 제압하면 크게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고 봅니다.
이러한 경우를 맞는다면, 이렇게 말하는 저도 앞서 헌납한 문명기호(文明琦號)에 타서 이전부터 혈맹한 비행사와 함께 적진에 뛰어 들어가 육탄이 되어 그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할 각오입니다.
현재 총독부 안에 탄생한 조선국방비행기헌납회가 비행기의 부족을 우려해 더욱 많은 비행기를 만들어낼 목적으로 창설되었기 때문에 근래 각지에서 기부가 들어오고 있고, 그중에는 눈물겨운 헌금을 하신 분도 있다고 하는데, 저는 진심으로 이에 감사하고 또 기뻐하고 있는 바입니다. 부디 여러분도 헌금하시길 이 기회를 빌려 부탁드리고자 합니다.
이상과 같이 우리나라는 세계에서 유일무이의 국체를 갖고 예부터 의는 군신이고 정은 부자라고 말씀하신 성천자(聖天子)를 위로 받들고 세계의 맹주가 될 운명을 갖고 있으며, 특히 우리 조선은 시정25년, 일시동인(一視同仁)의 혜택을 입고 있을 뿐만 아니라 최근의 총독 정치는 농촌진흥은 물론 산업개발·도시의 발전 등 실로 눈부신 진전을 보이고 있음은 여러분과 함께 기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저는 이러한 고마운 국토에 생육할 수 있기 때문에 성은의 광대무변함에 감사하고 일사보국의 마음을 더욱 공고히 해 신국 일본이 번영하고 또 번영하기를 기원해 마지 않습니다.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더 있습니다만 시간 관계상 이것으로 마치겠습니다.
발문
여기에 내가 이 책의 한 페이지를 더럽히는 데 흔쾌히 승낙하게 된 까닭은 저자 문명기 씨가 내 고향 경상북도 사람이고 내가 근무하는 영덕 사람이라는 점 및 지방 공공을 위해 헌신적 노력을 계속하고 군치(郡治)에 원조를 아끼지 않는 점에 대한 것이라기보다, 오히려 환력에 가까운 고령임에도 불구하고 기력이 정정한 장정을 능가하는 동분서주, 거의 편안히 쉬는 날이 없이 활동 속에서도 휘호와 시를 쓰는 등 더욱 정관(靜觀)하는 사생활을 찬미할 만한 점이 많음을 느끼고 있다.
저자를 위해 인물과 그 사상 내지 이 책의 주장 등에 대해서는 다수의 서문과 기타 충분히 언급된 것으로 믿고 나는 여기에 사족을 다는 일을 피하고 단지 저자의 반면(半面)을 소묘하여 친우의 행동을 칭송하는 데 그치고자 한다.
이 책은 그가
경상북도 도회의원이자
조선국방비행기헌납회 부회장이자
영덕문묘직원(文廟直員)이자
영덕국방의회장이자
영덕 난국시사(蘭菊詩社) 사장으로,
연미복 같은 딱딱한 공인 문명기의 소론, 오시마(大島) 줄무늬 문양의 하카마(袴)를 입은 마음씨 좋은 할아버지 운암거사(雲岩居士)의 담편(談片), 기타 곳곳에 흘러나온 언설 창작의 결정으로, 그의 전모를 엿볼 수 있는 것임을 의심하지 않는다.
저자는 지인들의 수상(壽像)35) 건설 제안을 오랫동안 고사하고 거절해 왔지만, 이 책을 그야말로 스스로 건설하는 자신의 수상임을 잃지 않을 것이다.
시정 27세의 청년을 축복하면서 각필한다.
황기 2597년36) 기원절 날.
영덕군수 권영세(權寧世)
35) 그 사람이 살아 있는 중에 만드는 동상이나 초상화.
36) 1937년.
1937년 4월 20일 인쇄
1937년 4월 25일 발행
저자 경상북도 영덕군 영덕읍 문명기
발행자 경상북도 영덕군 영덕읍 문명기
인쇄자 대구부 상정(上町) 54번지 카부라기 군조우(鏑木軍三)
인쇄소 대구부 상정 54번지 대구인쇄합자회사
발행소 조선 경상북도 영덕군 영덕읍 운암서재(雲岩書齋)
<출전 : 文明琦, '(眞の世界平和へ) 所志一檄', 盈德 : 雲岩書齋, 1937년>
7. 박흥식(朴興植)
1) 매진할 뿐
바야흐로 전 세계가 고뇌하고 발버둥치고 고통당하고 있다.
열강은 엄청난 형상으로 분화구 위에서 서로 싸우고 있다.
그야말로 질풍노도의 격동기이다. 분규·혼란은 심각해지고 보편화되어 갈 뿐이다.
진정한 세계평화는 언제 이루어지려는가.
실리와 실력 앞에서는 국제 간의 신의도 도념(道念)도 없다. 누구를 원망한들 소용없다.
세계의 비상시이긴 하다.
그러나 비상시 없이 이 국가의 약진은 있을 수 없다.
따라서 우리는 이 약진이 약속되어 있는 비상시를 오히려 기꺼이 극복할 각오가 있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저 단호히 소신을 향해 ‘매진’할 뿐이다.
적이 설령 백만 명이라 해도 두려워하지 않고 나아가려는 기개와 각오를 누가 어찌 하겠는가.
신동아 건설이라는 대사명은 이처럼 가벼운 것이 아니다.
장래 국가적 규칙은 어쩌면 더욱 우리에게 속박과 굴레를 요구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우리의 영광이며 우리 자손들의 행복을 위한 것이라고 한다면 우리는 기꺼이 이를 감수할 것이다.
<출전 : 朴興植, 「邁進あろのみ」, '總動員' 第2卷 1號, 國民精神總動員朝鮮聯盟, 1940년 1월, 12~13쪽>
2) 광명의 천지를 향하여
과거 5개년 동안 동아의 평화를 위하여 싸워온 제국은 오늘날 또다시 세계의 평화와 질서를 위하여 성화를 들게 되었다.
‘일지사변(日支事變)’37)으로 말하면 공존공영의 향토, 신동아를 건설하려는 팔굉일우(八紘一宇)의 대정신과 이것을 완수시키려고 모든 희생과 노력을 다하여온 제국의 성심을 종내 이해치 못하고 끝까지 반항하여 온 중경(重慶)정권을 응징하고 각성시키려는 천의적(天意的) 정전(征戰)이 있다.
그러나 이번 타도 영미(英米)를 부르짖고 봉화를 든 태평양전쟁으로 말하면 과거 1세기동안 그릇된 우월감에 빠져서 동아민족을 멸시하여왔고 자기나라의 이익을 위하여 세계의 약소민족을 희생시켜온 영미, 또 근자(近者)에 있어서는 동아를 유지하고 세계의 평화를 기원하는 제국의 진의를 역이용하여 동아를 침략하고 세계의 패권을 노리는 오만무례한 앵글로 색슨 영미를 타도하여 동아의 평화 한걸음 나아가서는 세계의 신질서를 재건하려는 도의적(道義的) 성전(聖戰)이다.
20여년 우리 제국은 은인자중하여 참지 못할 것을 참아왔고 양보하지 못할 것을 양보하여 왔었다.
그러나 우리는 천의에 따라 이 아시아의 적을 물리치는 동시에 정의에 따라 이 인류의 적을 격파하여야 할 때를 만난 것이다.
이 정의의 포성(砲聲)이 태평양의 파도를 높이자 우리 황군정예는 세계전쟁사에 기원을 지을 만한 혁혁한 전과를 거두었고 소위 적성포위장(敵性包圍障)은 일사천리(一瀉千里)로 거의 파괴되고 말았다.
동아의 여명 세계의 평화가 올 날도 머지않은 장래의 일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 전승을 기뻐하는 동시에 여기에 취하여서는 안 될 것이요.
또 만심(慢心)하여서는 안될 것이다.
전투에 있어 승리를 얻으면 얻을수록 우리의 각오는 이와 반대로 지구전의 대책을 강구하여 한번 가다듬고 두 번 단속하여야 할 것이다. 필승불패의 신념을 가지는 동시에 만전을 기하는 준비를가지는 것이 우리의 상식이다. 그리고 우리는 ‘전장에는 만전 노련한 ‘황군(皇軍)’38) 정예가 있고 총후(銃後)에는 성전 5년을 단련된 우리 비전투 전사가 있다’ 이러한 금도(襟度)39)와 자긍을 가져야 할 것이다.
그러면 총후인 우리의 최대의 의무와 노력은 무엇이냐 하면 첫째 자기의 직분에 충실하여 지도당국과의 혼연일치(渾然一致)한 협조하에 국내의 모든 체제와 태세를 준비하여 우리 황군장병으로 하여금 털끝만한 후려(後慮)도 없이 그 임무에 혜념(惠念)40)케 하도록 하여야 할 것인 동시에 국내전쟁수행의 능력을 확보할 것이다.
이것을 구체적으로 말하여 보면 첫째 고도국방국가의 체제를 정비하여야 할 것이다.
이번 전쟁은 종래의 사변과도 달라 어느 때 우리 머리 위에 우리 적기가 떠오를 지도 예측하지 못할 바이요.
어느 때 공습의 참극을 눈 앞에 볼지도 알 수 없다는 것을 우리는 각오하여야 할 것이다.
그리고 둘째는 방첩(防諜)에 대한 관념을 전보다 더욱 철저케 하여야 할 것이다. 황군을 신뢰하고 정부를 신임하여서 유어부설(流言浮說)에 미혹치 말 것은 물론 일상생활의 일거일동(一擧一動)에 주의하여
37) 중일전쟁.
38) 일본군.
39) 다른 사람을 포용할 만한 도량.
40) 남이 헤아려 돌보아 줌을 높여 이르는 말.
부지불식(不知不識) 간이라도 또는 있어서는 안 될 것이다.
현대 전쟁은 경제전이라고 한다. 경제의 파괴는 패전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때 우리는 국가 금융대책에 순응하여 극도로 통화팽창을 경계하는 동시에 일사반립(一糸半粒)의 물자라도 절약하여 물자의 확보를 도모하여야 할 것이다.
이번 전쟁이 우리의 승리로 돌아오는 날 그대의 우리 국력의 진전은 문자 그대로 호화스러울 것이다.
우리 반도인이 각각 자기의 직역(職域)을 통하여 대동아공영권 내에 일대약진을 하여야 될 기회도 이때이다.
금일까지의 전통적 소극적 의기-소극주의를 단연 타파일척(打破一擲)하고 세계의 활무대(活舞台)로 활동의 날개를 펴야할 것이다. 그렇지 못하면 영영 ‘시대의 낙오자’가 확립되어 호주(濠洲)까지를 그 권내에 넣게 된다면 지금의 일본, 조선, 사할린(樺太), 대만, 만주를 합한 약 200만 평방킬로미터의 면적은 약 12배나 되는 2,400만평방천의 면적으로 변하여 실로 광대하고 광명 있는 천지가 될 것이다.
이때의 우리는 아무 것이라도 좋다. 혹은 호주로 진출하여 목축을 경영함도 가능하다 혹은 프랑스령 인도차이나나 태국(泰國)에 진출하여 농사에 종사함도 가능하다.
무진장한 자원을 이용하여 혹은 생산업 혹은 무역을 도모함도 가능하다. 누구든지 무슨 직업이든지 불문하고 총립 총진출하여 제국국책에 순응하여 국가백년대계의 기초를 굳게 세워야 할 천여(天與)의 시기라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우리의 힘을 다하고 최선을 다하여 최후의 승리를 목표로 일로매진(一路邁進)하자.
우리나라 역사의 영예를 위하여 우리 자손의 행복을 위하여!
끝으로 성수무강(聖壽無疆)과 아울러 황군의 무운장구(武運長久)를 축원하고 이것으로 끝을 막는다.
<출전 : 朴興植, 「光明의 天地를 향하여」, '朝光' 8卷 2號, 1942년 2월, 113~114쪽>
3) 대조(大詔)를 받자옵고 광영을 빛내오리
국정 참여의 반갑고 고마운 이 획기적 사실은 반도 2천 5백만 동포의 오직 감격과 감사 속에 황국에 바치는 충성심으로 충만하여 있다. 더구나 황공하옵게도 4월 1일에는 천황폐하께옵서 국정참여에 관한 조서(詔書)를 환발(渙發)하옵시어 반도인으로 하여금 ……(1줄 판독불가)…… 이는 오직 일시동인(一視同人)의 홍대(鴻大) 무변(無邊) 하옵신 어성려를 내려 주시옵신 바로 이 광영이 감격은 끝이 없으며 고마옵신 성려에 봉답하기 ……(1줄 판독불가)…… 다할 것을 이때 더욱 깊이 가슴에 간직하여야 할 것이다.
먼저 우리는 스스로 돌아보아 항상 황민으로서의 자질을 연마하고 이 중책을 다하기에 발분 진력하여야 할 것이다.
태평양전쟁을 싸우는 우리 국민으로 더구나 이 전쟁을 완수하기에 정진하는 신민으로서의 본분을 다하기에 조금도 유감없는 수련을 쌓고, 나아가서는 이 수련을 실행으로 발휘하여 자각을 더욱 굳게 하여야 할 것이다.
그리하여 이 국정참여의 큰 뜻을 빛내고 황은에 만분의 일이라도 봉답하도록 당자☐ 자각하고 충심을 다하여야 할 것이다.
<출전 : 朴興植氏 談, 「各界 人士의 感激과 感想-大詔를 받자옵고 光明을 빛내오리」,'매일신보', 1945년 4월 5일>
8. 송문헌(宋文憲)
1) 싱가폴 함락에 부쳐
황해도지사 산본문헌(山本文憲. 야마모토)41)
한번 성단(聖斷)이 내리자 진무(神武)의 군(軍)은 신속하고 과감하게 영국 동방 침략의 거점 싱가폴을 마침내 공략해 일장기를 서태평양에 펄럭이고 대동아전쟁에 불멸의 금자탑을 세웠습니다.
삼가 대어능위(大御稜威)의 빛을 받아 육지와 바다와 하늘에서 용감히 전투한 황군(皇軍) 장정 각위에 대해 온몸으로 감사의 뜻을 표하는 바입니다.
영국이 세계의 운명을 지배한다고까지 호언장담한 아성(牙城) 공략의 결과, 우리나라는 대동아의 전략거점을 확보하는 동시에, 중요지역을 우리 관제하에 두는 등 그야말로 전황 진전에 획기적 의의를 부여한 것이라 하지 않을 수 없고, 그들의 동아 경제의 뼈대는 이로써 큰 균열을 가져왔고 영제국의위세를 더욱 퇴색시키게 되었습니다.
이번 대전은 숭고한 건국(肇國)의 이상에 심연(深淵)하는 대동아공영권(大東亞共榮圈) 수립의 성전(聖戰)으로서, 국민은 그 심원한 성격을 깊이 인식해 필승불패의 신념을 더욱 견고히 하고, 현혹되거나 좌절하는 일 없이 모두 하나가 되어 총후(銃後)의 철벽진을 굳게 다짐으로써 인정으로도 물적으로도 반도가 떠맡은 사명을 완수하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아울러 ‘반도인(半島人)’42) 제군은 이제 내선일체(內鮮一體)의 대패(大旆) 아래 결집해서 완전하게 황국신민(皇國臣民)이 되어 대동아 민족 향도(嚮導)의 중책을 맡기 위해 진전·향상에 노력하기를 간절히 바라마지 않습니다.
하물며 적은 만만치 않은 호적(豪敵), 반드시 싸움을 장기전으로 이끌어 만반의 태세를 다시 갖추어 전세를 만회하려고 권토중래를 도모할 것임은 불을 보듯 뻔한 일입니다. 우리는 결코 승리에 취하지 말고, 견고히 대지에 발을 내딛고 서서 이른바 와신상담, 뿌리와 온몸의 힘으로 부딪혀 싸워 이겨내겠다는 마음가짐으로, 일부러라도 하기 힘든 어려움을 참고 함께 앞으로 더욱 더 강화·요청되어야 할 여러 시책에 대해 과감히 모든 능력을 발휘하여 성지(聖旨)를 받들고 있는 장병 각위의 무훈에 보답해야 할 것입니다.
<출전 : 山木文憲, 「新嘉坡陷落に就て」, '東洋之光' 第4卷 第3號, 1942년 3월, 46~47쪽>
41) 송문헌(宋文憲)의 창씨명.
42) 조선인.
9. 서춘(徐椿)
1) 조선동포의 대동아 전쟁관
우리나라와의 전쟁 상대인 미국·영국·장제스(蔣介石)·네덜란드의 면적과 인구를 우리 일본의 그것과 비교하면 적의 총면적은 우리 일본의 면적의 50배이고, 총인구는 우리 일본의 거의 10배이다.
면적에서 보자면 76만 5,000평방킬로미터를 갖고 3,830만 평방킬로미터를 상대로 싸우는 셈이고, 인구에서 보자면 불과 1억을 갖고 10억을 상대로 싸우는 셈이다. 만약 맹자의 이른바 “작은 나라는 큰 나라를 이길 수 없고, 적은 군사는 많은 군사를 이길 수 없다”는 것이 전쟁 승패를 좌우하는 철칙이라고 한다면, 그렇게 방대한 면적과 많은 인구를 동시에 적으로 삼아 전쟁을 시작한 우리 일본은 참으로 우려할만한 상태에 있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결코 그렇지 않다.
맹자가 무슨 말을 하고 있든 간에, 또 세계가 어떻게 보고 있든 간에 “대동아전쟁의 승리는 반드시 우리에게 있다”는 필승의 신념을 갖고 과감히 일어선 것이다.
그렇다면 그 이유와 근거는 무엇인지, 이 문제에 대한 의견을 서술하는 것이 이 논고의 목적이다.
먼저 이번 전쟁의 성격을 생각해 보건대, 동서의 전쟁 모두 기존의 전쟁처럼 할양지와 배상만으로 끝날 것 같지는 않다는 것이 특징 가운데 하나다. 제1차 세계대전이라는 25년 전의 전쟁은 엄청난 규모와 또 5년이라는 시간이 걸렸음에도 결국 패전국의 할양지와 배상으로 종식을 고했다.
붕괴한 것은 단지 오스트리아 한 나라뿐이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그렇게 간단하지가 않다.
그 이유는 한마디로 설명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제1차 세계대전의 경험으로 일단 항복한 패전국은 비참한 처지에 놓이게 된다는 것을 열국들은 너무나 잘 알고 있다.
또 하나 더 큰 이유는 독일의 국력 증대가 너무 빨랐다는 사실이다.
즉 제1차 세계대전에서 승리한 쪽인 연합국이 패전국 독일을 재기 불가능하도록 억누르기 위해 토지를 빼앗고 배상을 부과하고 군비를 극도로 제한했는데, 단단히 묵어 두었을 터인 독일이 불과 4반세기도 지나지 않은 시간에 영국·미국·프랑스를 능가하는 정도로까지 강해진 것이다.
이 사실만을 보더라도 이번 전쟁은 한 쪽의 할양지·배상·군비제한 정도로는 끝나지 않을 것임을 상상할 수 있다.
아울러 또 하나의 객관적 이유가 있다. 그것은 교통·과학·병기의 발달에 기인하는 이유이다.
인류4000년의 역사를 고려하면 일국의 지배하에 놓이는 토지의 면적은 교통·과학·병기의 발달 정도와 정비례해서 점차 확장되어 온 것이다. 이와 반대로, 한때는 국토가 확장되더라도 교통, 과학, 병기의 발달정도가 이에 미치지 못하면 그 국토는 다시 수축된다. 알렉산더 대왕의 국토, 로마제국의 국토, 칭기스칸·쿠빌라이의 국토, 나폴레옹의 국토가 유지되지 못한 것은 당시의 과학·교통·병기의 발달이 당시의 광범위한 국토를 유지할 수 있을 정도로 발달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설명해야 한다.
이에 대해 옛날로 거슬러 올라갈수록 소국이 많고 현대로 내려올수록 한나라의 국토가 점차 확대되어 왔음은, 여기서 말하는 국토 대(對) 과학·교통·병기의 관련법칙에 의해 설명되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이번 동서의 대전이 일어날 때까지 약 4반세기의 과학·교통·병기의 발달은 사상 미증유의
비약적 발달이었다.
인류 4000년의 역사를 되돌아 보건대, 그 어떤 시대의 25년간의 과학·교통·병기의 발달을 보더라도 이 4반세기 동안의 발달과 비교하면 훨씬 미치지 못한다. 다른 시대의 거의 200년~300년을 필요로 하는 발달 정도를 불과 4반세기로 축소시켜 성취한 것과 같다. 과학·교통·병기의 이러한 경이적 발달은 한 나라의 지배하에 놓이는 국토의 넓이를 지금과 같은 상태 그대로 놓아두지 않는다.
현재의 열강 중에서 몇몇 나라를 깨부수고 남은 열국의 세력 범위를 더 확장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번 전쟁에서 예컨대 영국·미국을 철저하게 깨부숴야 한다. 쉽게 말해서 도쿄(東京)에서 오사카(大阪)까지 기차로 11시간, 또 도쿄에서 광둥(廣東)까지 비행기로 11시간 걸린다고 한다면, 도쿄에서 계산한 거리는 오사카도 광둥도 동일하다. 이러한 계산으로 가면 도쿄에서 호주, 네덜란드령 동인도 부근까지 비행기로 날아가는 시간은 홋카이도(北海道)에서 신의주까지 기차를 타고 가는 시간 보다 훨씬 빠르다는 계산이 된다.
나는 대동아공영권(大東亞共榮圈) 확립이 가능하다는 가장 확실한 객관적 이유는 여기에 있다고 단정한다.
이상으로 나는 ① 제1차 세계대전에서의 독일 패전의 경험, ② 그 뒤 20년간의 빠른 독일 부흥, ③과거 4반세기 동안의 과학·교통·병기의 경이적 발달이라는 세 가지를 들어 이번 전쟁은 동서의 어느 전쟁을 불문하고 할양지·배상·패전 측의 군비제한 등의 방법에 의해 간단히 끝날 것 같지 않다는 이유를 제시했다.
한 쪽의 할양지·배상 정도로 끝나지 않는다고 한다면, 그렇다면 무엇으로 끝날 것인지가 다음 문제가 된다.
이 문제에 대한 해답은 간단하다. 즉 우리도 적도 전 국력을 기울여 어느 한쪽이 완전히 피폐해서 붕괴할 때까지 싸운다. 따라서 싸움은 필연적으로 장기전이 될 수밖에 없다.
다시 말해 이 전쟁은 배상, 할양지 정도로 끝나지 않는 동시에, 필연적으로 장기전이 된다.
이런 점이 이번 전쟁이 종래의 전쟁과는 그 성격을 달리하는 까닭이라고 본다.
이번 전쟁은 할양지·배상 정도로 간단히 끝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게다가 한쪽이 붕괴될 때까지 장기간에 걸쳐 싸워야 한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면적에서 보더라도, 인구에서 보더라도 큰 격차가 있어서 작은 세력으로 큰 세력을 상대로 싸우는 입장이다. 그런데도 필승의 신념은 결코 우리 쪽에 있다고하는 것은 과연 무엇을 근거로 말하는 것일까?
지금부터 그 근거에 대해 설명하도록 하자.
먼저 면적이 아무리 넓어도, 인구가 아무리 많아도 그것이 문제가 아니라는 점은 우리 국민은 이미‘지나사변(支那事變)’43) 5년의 경험으로 분명히 깨달았다. 때문에 그 논리를 설명하는 데 많은 말을 낭비할 필요도 없겠지만, 여기에 굳이 몇 가지를 덧붙이자면 다음과 같다. 첫째, 맹자는 앞서 언급한 것(“작은 나라는 큰 나라를 이길 수 없고, 적은 군사는 많은 군사를 이길 수 없다”)과 같이 말을 했지만 인류 4000년 역사의 실제는 정반대이다. 4000년 인류의 역사는 그야말로 작은 나라가 큰 나라에 이긴 역사이고, 작은 군사로 많은 군사를 지배한 역사이다.
역사 이전의 일은 기록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증명할 방법은 없지만, 그러나 분명 그러했을 것이다.
3000년 전의 무왕은 불과 3,000명이라는 적은 병사를 이끌고 은(殷)나라 주(紂)의 1억 명이라는 대군을 상대로 싸워 불과 3개월 만에 이를 무찔렀다.
요는 모두 정의가 있는가에 달려 있는 것이지, 국토의 대소 또는 군사의 많고 적음에 있는 것이 아니다.
700년 전 몽고의 칭기스칸·쿠빌라이는 불과 십 수만 명 무지몽매한 몽고족을 이끌고 일어나 아시아대륙의 전부를 정복하고 그 말발굽은 구라파의 헝가리까지 미치지 않았던가. 요는 아군의 전투정신과 훈
43) 중일전쟁.
련·단결 정도의 여하에 달려 있는 것이지, 숫자의 많고 적음에 있는 것이 아니다. 이를 요컨대 인류의 역사는 정의의 편에 서서 굳게 단결한 소수가 부정하고 불의하며 용맹하게 싸우려는 정신이 부족한 다수에 이기고, 또 이를 지배해온 기록이다. 무왕과 쿠빌라이의 예는 그 가장 현저한 예인데, 동서양을 불문하고 역사의 각 항은 모두 이에 대한 기록이고 증거이다. 무왕은 방백리(方百里) 정도의 작은 토지에서 일어나 일거에 중국 400주(州)에 군림했다. 그 면적은 1대 50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몇 천배에 달한다.
쿠빌라이는 몽고족 십 수만을 이끌고 몽고의 일각에서 일어나 저 멀리 구라파의 헝가리까지를 그 말발굽 아래 두었다. 사람 숫자에서 보건대 1대 10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몇 백배·몇 천배에 달한다.
그런데 지금 우리 일본은 대동아권 내의 10억의 주민을 영국·미국의 압박·굴레에서 해방시키고자하는 신성한 사명을 수행하려는 것이니, 정의는 단연코 우리 일본에 있는 것이며, 부정하고 불의한 것은 영국·미국 측에 있지 않겠는가.
필리핀에서, 말레이에서 황군이 가는 곳의 주민들이 음식과 물을 주며 황군을 환영하는 것은 정의가 우리에게 있다는 분명한 증거이다.
다음으로 용맹하게 싸우려는 정신에 있어서, 단결심에 있어서 우리 대일본제국의 국민은 단연 세계열국에서는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뛰어나다.
이런 점은 영국·미국의 국민은 도저히 우리 일본 국민의 발바닥에도 미치지 못한다.
이와 같이 우리 일본은 정의의 편에 서 있으며, 굳게 단결하고 있다.
이는 최후의 승리는 반드시 우리 일본에 올 수밖에 없는 첫 번째 이유이자 증거이다.
또 다음과 같이 생각해도 알 수 있다. 즉 무왕이 불과 3,000명을 이끌고 그렇게 큰일을 해냈고, 칭기스칸과 쿠빌라이가 불과 십 수만 명으로 그렇게 큰일을 해냈다는 역사적 사실을 보면 단결력에 있어서, 용맹한 정신에 있어서, 병기의 우수함에 있어서, 문명의 정도에 있어서 가장 뛰어난 우리 일본이, 게다가 세계 총인구의 20분의 1에 해당하는 1억 신민을 갖고 있는 우리 일본이 저 영국·미국·장제스를 물리치고 대동아공영권을 수립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 아니다.
그러나 국민의 일부에는 아직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사람이 상당수 있는 모양이다. 즉 “5년 동안이나 계속된 지나사변이 아직 끝나지 않았는데 새로 영국·미국 두 대국을 상대로 전쟁을 하게 되었다.
사태가 심각해지고 있다. 다행히 서전에서 큰 전과를 올렸다. 바라건대 최후까지 행운이 이어지길 바란다”라는 식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아직 일부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이는 필승의 신념이라 할 수 없다.
인식이 크게 부족하다.
첫째, 지나사변 발발과 동시에 우리 일본은 영국·미국과도 전쟁을 시작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깨달아야 한다. 좀 더 자세히 말하자면 지나사변 이전부터 이미 영국·미국과 싸우고 있었다.
그러나 사변 이후에 관한 일 만을 보더라도 영국·미국은 장제스에게 다수의 군사고문을 보냈다. 전쟁자금을 빌려줬다. 무기를 제공했다. “다른 사람의 샅바로 씨름을 한다”는 말이 있는데, 장제스는 5년 동안 영국·미국의 샅바로 우리 일본과 씨름을 한 것이다. 이를 우리 일본의 입장에서 보자면 지나사변 발발과 동시에 영국·미국과도 싸운 셈이다. 그런데 이는 지나사변이 몇 백 년 지속되어도 마찬가지일 테니 장제스를 철저하게 깨부수기 위해서는 어차피 영국·미국을 물리쳐야 한다. 이 논리는 지금 깨달은 것이 아니다.
지나사변 당초부터 알고 있었는데, 우리 일본은 필승의 준비가 갖추어질 때까지 은인자중(隱忍自重)하며 5년을 보낸 것이다.
어쨌거나 지나사변 5년 동안 우리 일본은 이미 전쟁목적의 90% 이상을 달성했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인식할 필요가 있다.
우리 일본의 입장에서 본 지나사변의 전쟁목적은 중국에서의 반일용공의 정권을 무너뜨리고 우리 일본과 굳게 제휴하는 정권을 수립하는 데 있다. 배상은 필요 없다. 토지도 필요 없다.
단지 그것뿐이다. 그런데 이 목적은 이미 훌륭하게 달성하지 않았는가.
보통은 “황군이 중국에서 점령한 지역은 주요도시와 이를 잇는 철도연선뿐이다. 이를테면 점과 선에 지나지 않는다.
주요도시 혹은 철도연선에서 3리만 벗어나면 장제스의 군대나 비적들이 있어서 위험하다.
이것으로는 부족하다”라고 한다.
이는 어느 정도는 사실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설령 사실이라 해도 이러한 논자의 결론은 틀린 것이다.
가령 소를 제어하는 데 소의 몸 전체를 묶을 필요는 없다. 필요 없을 뿐만 아니라 도리어 불편하다.
간단히 코에 코뚜레를 끼우기만 하면 된다. 말을 제어하는 논리도 같다.
중국이라는 소 혹은 말을 제어하는 데 중국 전체를 방방곡곡 점령할 필요는 없다.
주요도시와 철도연선만 손에 넣으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이것만으로 중국은 이미 코뚜레를 끼운 것과 같고 재갈을 물린 셈이 된다.
고삐를 잡고 있는 우리 일본의 뜻대로 된다. 동쪽으로 이끌면 동쪽, 서쪽으로 이끌면 서쪽으로 자유자재로 움직일수 있다.
이는 지나친 추상론이라서 이해하기 어렵다고 한다면, 구체적으로 실례를 들 수도 있다.
중국중부의 상하이·난징·항저우 세 곳을 연결한 삼각형 지대를 ‘델타’ 지대라 하는데, 이 델타 지대는 놀라울 정도로 물자가 풍부하다.
쌀만 보더라도 4,000~5,000만 석이 나온다고 한다.
그런데 이 지대의 치안상태도 점과 선을 벗어나면 안전을 보장하기 어려운 점은 중국의 다른 점령지역과 마찬가지다.
그러나 난징·항저우 두 곳을 잇는 방비선을 확보함으로써 쌀은 단 1석도 장제스 쪽에 갈 수 없다.
그렇다면 그 풍부한 쌀이 우리 일본에는 1석도 들어오지 않는 이유는 무슨 까닭인가 하는 질문을 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그 대답은 간단하다.
즉 성전이 내세운 목표에서 보건대 그쪽 주민들의 생활을 무시하면서까지 쌀을 일본에 가져오고 싶지는 않기 때문이다. 이를 전리품 취급을 하며 가져올 생각이라면 얼마든지 가져올 수 있다. 가져올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가져오지 않는다는 점에 성전을 성전이라 할 수 있는 이유가 있으며, 영국·미국식 침략주의·착취주의와 다른 점이다. 이 델타 지대의 일은 단지 예로 든 것뿐이고, 기타 점령지역도 모두 같다. 과거 5년 동안의 황군의 용전분투에 의해 전쟁목적의 90% 이상을 이미 달성했다는 것은 이러한 엄연한 객관적 사실을 근거로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점과 선을 3리만 벗어나면 위험하다는 것도 사실이지 않은가 하는 말을 하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이는 일의 진상에 어두운 자의 말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소는 뿔을 만지면 공격하게 마련이다.
말은 뒤쪽으로 다가가면 차기도 한다. 군자는 위험에 다가가지 않고 위험한 곳은 돌아가는 것이 현명하다.
다시 말해 중국에서 점과 선을 벗어나면 위험하다는 것은 소와 말의 예에서 볼 수 있는 정도의 의미를 갖고 있을 따름이다.
다음으로 지나사변은 장제스 측에서 보면 전쟁이다. 잔혹한 전쟁이다. 그러나 이를 우리 일본의 입장에서 보면 실전적 연습, 혹은 연습적 실전 정도의 의미를 갖고 있다. 장제스는 전력을 기울여, 또 부족한 부분은 영국·미국 등의 나라의 힘을 빌려 싸웠지만 연전연패, 마침내 국토의 절반 이상을 잃고 쓰촨(四川) 일각으로 내몰리고 말았다.
‘참패’라고 하는 말이 있는데, 장제스의 패전이 바로 참패에 해당한다.
아무리 장제스가 강변을 하더라도, 한쪽에 전력을 남기지 않고 싸웠기 때문에 졌다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 일본은 어떤가 하면, 우리나라는 5년 동안 한편으로는 장제스와 전쟁을 벌이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생산력 확충이라는 명목으로 전쟁준비를 하고 있었다.
5년 동안 우리 일본이 해온 일에서 장제스와의 전쟁은 오히려 부차적인 것이었고 전쟁준비가 주된 것이었다.
새로운 전쟁의 준비쪽이 주였기 때문에 5년 동안 우리 일본의 국력은 소모되기는커녕 도리어 사변 전에 비해 수십 배 증가 했다.
그저 자존심만 강하고 그에 비해 둔감한 영국·미국은 이러한 사실을 알지 못했다.
덕분에 오늘날 비참한 꼴을 당하고 있다. 그러나 국민생활이 다소 궁핍해진 이유는 무엇인가 하면 그 대답도 간단하다. 즉 민수품(民需品) 일부를 국방력 증강에 사용했기 때문이다.
지나사변을 전쟁이라 하면 우리 군은 실습 정도의 전쟁을 했다. 왜냐하면 5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연전연승, 아주 작은 희생만 치렀기 때문이다.
또 지나사변을 연습이라 하면 우리 군은 실전 그대로 연습을 했다. 연습은 역시 연습일 뿐, 보통의 연습을 해서는 아무래도 병사들은 실전감각을 가질 수 없다.
그러나 지나사변의 경우에는 보통의 연습의 경우와는 다르다. 장제스의 군대가 쏘는 총알에 맞으면 죽을 것이 분명하기 때문에, 설령 결과적으로 보건대 연습 정도의 의미만 갖고 있다 해도 이에 임하는 황군 장병들은 실전감각을 갖지 않을 수 없다. 따라서 이를 실전 그대로의 연습이라 한다.
5년 동안 교대로 실전 그대로의 연습에 참가한 장병들 숫자는 결코 적지 않다. 이것만을 보더라도 곧바로 알 수 있다.
세계가 넓다고는 하지만 5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쉬지 않고 실전 그대로 맹훈련을 한 육해공 장병 ○○○○만(원문—역자) 이상을 갖고 있는 나라가 대체 어디에 있단 말인가. 이와 같이 한편으로 국내에서는 생산력 확충으로 국력을 사변 이전의 수십 배나 증강시키고, 다른 한편으로는 ○○○○만(원문—역자) 이상의 육해공 장병들에게 실전적 맹훈련을 시켜 대동아전쟁을 시작했기 때문에 서전에서 세계를 경악케 할 정도의 큰 전과를 올릴 수 있었던 것이다. 결코 우연이 아니고 또 일시적으로 운이 좋아서 이긴 것도 아니다.
또 우리는 지나사변 5년간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실로 귀중한 경험을 했음을 밝혀둘 필요가 있다.
그것은 다음과 같다.
장제스의 전술전략은 중국 고유의 전술전략이 아니고 그의 독특한 발안에 따른 전술전략도 아니다.
영국·미국의 군사고문의 지도에 따른 전술전략이었다. 다시 말해 영국·미국의 전술전략이었다.
따라서 사변 5년 동안 연전연승한 것은 실은 영국·미국의 전술전략에 이겼음을 의미한다.
지나사변을 통해 영국·미국의 전술전략을 음미하고 그 뒤통수를 쳐서 반드시 이길 수 있는 비결을 우리 황군이 얻을 수 있었다.
또 장제스의 군대가 휴대하는 병기는 육해공의 병기를 불문하고 대부분 영국과 미국 양국에서 만든 것이다.
이 또한 장제스의 군대에서 빼앗았기 때문에 일일이 해부해서 연구하고 그 종류와 성능을 전부 파악하게 되었다.
지나사변 5년 동안 우리 군은 영국·미국의 전술전략을 꿰뚫게 되었다.
영국·미국의 병기의 종류와 성능도 전부 알게 되었다.
이 경험은 지나사변에서의 다른 어떠한 전과보다 높이 평가되어야 한다. 실로 귀중한 경험이다.
손자병법에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전백승이라고 했는데, 이 소중한 경험을 토대로 대동아전쟁을 시작했기에 서전에서 그렇게 큰 전과를 올린 것이지, 결코 우연한 전과가 아닐뿐더러 일시적으로 운이 좋았기 때문도 아니다.
이를 영국과 미국 입장에서 본다면 영·미는 장제스를 돕고 항일(抗日)에 열중한 나머지 5년 동안 그들의 전술전략을 우리 일본이 꿰뚫고 있고 병기의 종류와 성능을 파악하고 있음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덕분에 영국과 미국은 지금 비참한 꼴을 당하고 있다. 자신이 뿌린 씨앗이라고는 하지만 참으로 안타깝다.
다음으로 우리는 지나사변 5년의 전과에 의해 영국·미국 격쇄(擊碎)의 발판을 마련했다는 귀중한사실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쉽게 얘기해서 광둥(廣東)을 점령하지 않고는 홍콩(香港) 공략은 어렵다.
프랑스령 인도네시아의 진군 없이는 말레이의 공격은 어렵다. 이것만 보더라도 지나사변 5년의 전과가 대동아전쟁을 위해 얼마나 효과적이었는가를 알 수 있지 않은가.
이와 같이 생각하면 지나사변 5년은 영국·미국과 싸우기 위한 준비 기간이었음을 알 수 있는 동시에 서전의 큰 전과가 우연이 아닌 당연히 이길 수밖에 없기에 이긴 것임을 알 수 있으리라.
이를 반대로 말하면 만약 지나사변 5년의 전과 및 경험 없이 영국과 미국을 상대로 전쟁을 시작했다고 한다면 황군이 강하다고는 하지만 서전에서 그렇게 큰 전과를 올리지는 못했을 수도 있다.
이와 같이 생각할때, 팔굉일우(八紘一宇)의 우리 건국이상을 현현하는 데 있어서 지나사변 5년의 전과는 실로 높이 평가
되어야 함을 알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일부에서 품고 있는 감상, 즉 “5년 동안이나 계속된 지나사변이 아직 끝나지 않았는데 또 영국·미국 두 대국을 상대로 전쟁을 하게 되었다. 사태가 심각해지고 있다.
운운” 하는 생각은 당연히 수정되어야 한다. 즉 “지나사변 5년 동안의 전과, 경험과 국내의 준비로 영국·미국에 대한 승산을 확립하고 준비를 갖추어 필승불패의 신념 아래 영국과 미국을 상대로 일어선 것이다.
이 준비와 경험이 있었기에 서전에서 그렇게 큰 전과를 획득했다. 따라서 이 전쟁은 제아무리 수십 년·수백 년 계속되어도 승리는 단연코 우리에게 돌아온다”라고 수정되어야 한다.
또 영국·미국과의 전쟁에서도 점과 선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이미 우리나라는 홍콩·마닐라·싱가포르 등 약 30곳을 손에 넣었지만, 남방이 넓다고는 하지만 수십 곳을 손에 넣어두면 충분하고, 이들 지역의 구석구석까지 점령할 필요는 없다. 결코 그럴 필요는 없다. 예컨대 뱀을 죽이는 데 꼬리에서 머리까지 잘게 자를 필요는 없다.
머리만 잡으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우리는 이런 준비와 신념이 있어서 일어선 것이다. 따라서 결코 패할 걱정은 없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전승에 취하거나 안심해서는 안 된다. 전쟁은 이제부터이다. 긴장의 끈을 늦추어서는 안 된다.
특히 북방에 강적이 있으니 그저 남방에만 신경을 쓰고 북방의 방어를 느슨하게 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
특히 이 북방의 일은 반도에 살고 있는 2,400만 신민(臣民)들이 모두 떠맡겠다는 각오와 결심이 있어야 한다. 일본 내지의 7,000만은 북방에 대한 걱정 없이 안심해서 남방에 임할 수 있도록 하는 방도는 이것뿐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이는 인적 자원의 구성 비율에서 보더라도 또 지리적 위치에서 보더라도 당연한 일이다.
우리에게 이러한 신념이 있어서 일어났다. 그러나 최후의 승리를 획득하는 그 순간까지 흔들림 없이 일억일심(一億一心), 총력을 기울일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1942년 3월 5일 각필(櫊筆))
<출전 : 徐椿, 「朝鮮同胞の大東亞戰爭觀」, '朝鮮' 1942년 3월호, 25~35쪽>
2) 조선총독 고이소(小磯)장군론
매일신보(每日新報) 주필 서춘
호담뇌락(豪膽磊落)한 노력가(努力家)
정3위 훈1등 공1급 육군대장 고이소 구니아키(小磯國昭) 총독은 1880년 3월 야마가타현(山形縣) 신조촌(新庄村)의 사족이며 오가이군(最上郡) 군장인 고이소(小磯進)씨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어렸을 때에는 순직 쾌활한 성격과 귀공자다운 모양을 가져서 야마가타현립중학교(山形縣立中學校)에는 지금도 고이소 총독의 학생시대의 여러 가지 이야기가 늙은 교원들 사이에 주고 받아진다.
동 중학 재학 중에는 기계체조가 득의였고 언제든지 일요일에는 도보로 160리나 떨어진 신상촌의 부모에게 문안을 드려서 효성의 지극함에 좌우사람들을 감동케 하였다.
성적은 그다지 우수한 편은 아니어서 육군사관학교에 들어갈 때에도 보결인가 맨 끝으로인가 들어 갔으며 육군대학 12기 졸업 성적도 이관중치(二官重治), 삼산원(杉山元), 향추향(香椎香), 평매기연태랑(平梅崎延太郞), 연준육(烟俊六), 진진차(秦眞次) 장군들의 뒤였다. 1901년에 육군소위가 되어 1937년 육군대장에 승진할 때까지에 보병 제50연대장 참모본부과장, 육군 항공본부 총무부장, 육군성 정비국장,중일전쟁 당시에는 군무국장 겸 군사참의원 간사장 아라키(荒木) 육상 때의 차관을 지나서 1932년 무토(武藤) 원수를 따라 관동군 참모장이 되고 1934년 제5사단장으로 1935년 12월에서 1938년 7월까지의 국제정세가 점차로 폭발하려는 분화산처럼 급박해 질 때에 조선 군사령관의 중대책임을 완수한 다음 1939년 4월에서 8월까지의 히라누마(平沼)내각과 1940년 1월에서 7월까지의 요나이(米內)내각의 두 차례에 걸쳐 척무대신에 친임되어 초비상시국하의 척무행정에 찬연히 빛나는 정치적 족적을 남겼다.
소기 총독은 일찍 좌관(佐官)시대부터 세가와(瀨川章友), 이시하라 간지(石原莞爾) 양 장군과 함께 출우(出羽)지방 출신의 3호걸이라고 별명을 들으면서 장차 제국의 육군을 두 어깨에 짊어질 것이라는 촉망을 한 몸에 모았었다.
용모는 호장하고 성격은 활달하나 끝까지 치밀하고도 과학적인 일면을 가진 절대의 노력가이다.
1917년경 총독이 아직 중좌였을 때 현재 연맹총장 파전(波田)중장이 육군대학 학생시절에 동 대학에서 병요지지(兵要地誌)를 강의하였는데 그때 벌써 조선 관문 사이의 해저터널 건설의 중요성을 강조하여 젊은 장교들의 피를 끓게 하였다.
소좌시대에 저술한 '국방자원론'은 오늘의 대동아 경륜의 근본이념과 구상을 같이하여 국민 각층 각계의 절찬을 받았으며 항상 웅대한 구상과 선구적인 판단력을 발휘하여 일부에서는 ‘소기의 대포’라는 소리도 들었으나 그 대포가 하나도 조준이 틀림없이 맞게 되어 소기 총독의 식견의 치밀함을 여실히 증명하고도 남음이 있다.
대륙에의 관심은 향토의 대선배 사토 모부히로(佐藤信淵)의 혼동비책(混同秘策)의 대륙 경륜론에 자극되어 소년시대부터 움트기 시작하였다고 한다.
육군부대에서도 중국통으로 알려오다가 만주사변이 폭발하자 당시 군무국장이였던 총독은 군사외교의 일원화를 비롯하여 경천동지의 대활약을 하여 만주사변 처리의 절대한 공적을 남긴 후 다시 관동군의 참모장으로서 전 세계의 시청을 모으면서 만주국 발전을 위하여 군사 정치 경제 문화의 전 부문에 걸쳐 소년 때부터 가슴에 그려오던 국가 경영의 방책을 구현시키려고 놀라운 활약을 하였던 것이다.
항상 육군성의 군무국장의 자리는 육군대학의 수재만이 차지하는 전통을 총독이깨뜨렸을 때 놀랐는데 세상 사람은 이때부터 ‘정치가 소기’의 존재에 새로운 놀람과 기대를 더욱 크게하기 시작하였다.
총독은 공사를 가장 엄격하게 구별하는 전형적인 무인이다. 공인으로서의 정복을 입었을 때에는 위풍이 좌우를 진압케 하여 오히려 가까이 하기 힘든 느낌까지 주는 한편, 한번 정복을 벗고 사사로운 인간으로 돌아왔을 때에는 실로 인정이 샘물처럼 솟아 흐르는 온정가이다.
일찍이 조선군사령관 시대에 부하의 장교 한사람이 결혼을 하고 인사를 하러 들어갔더니 때마침 감기로서 이불을 덥고 누워있던 총독은 즉시 옷을 갈아입고 현관에 나와서 정중히 신혼부부를 맞이한 다음 “대단히 반갑다, 아무쪼록부부화락하게 아들딸 많이 낳고 국가에 봉공하여 달라”고 마치 가부와 같이 간곡한 축하의 인사를 하여 그들 젊은 부부를 감격케 하였다. 이와 같은 이야기는 수없이 많아서 부하들은 모두 소기 장군을 친어버이와 같이 경모하고 있다.
남화(南畵)와 서도(書道)의 대가(大家)
총독은 실로 경건한 경신가인 동시에 가장 성스런 종교가이기도 하다. 일찍이 제19대의 조선군사령관으로 있을 때 사령부 직원들에게 항상 훈시한 것은 세계에 빛나는 성신(性神)의 대도이며 팔굉일우(八紘一宇)의 황국의 대이상이었다.
아침 저녁으로 반드시 불단 앞에 눈을 감고 고요히 앉아서 법화경을 외우는 일련종(日蓮宗)의 독신가라는 것은 부내 신당정(新堂町)에 있는 총독의 생질녀 다카하시(高橋登茂)여사가 이야기하는 일반에게 잘 알려지지 않았던 총독의 일상생활의 한 폭이다. 또 비상히 근엄한 사무가인 한편에는 보통 사람으로서는 따를 수 없는 공부가이다. 두 번째의 척무대신이 되어 대만(臺灣) 시찰을 갔을 때에 백도를 넘는 찌는 듯한 더위를 무릅쓰고 온 섬 안의 곳곳을 하나도 빠짐없이 자세히 순찰을 하고 사탕의 경작을 직접 지도하여 도민들에게 지금까지도 잊혀지지 않음은 정치가로서의 사무적인 근엄한 성격을 대표하며 조선 사령관 당시에도 밤 12시 오전 2, 3시까지 전등불 밑에 단연히 앉아서 독서삼매경에 빠지고 있던 것은 총독의 비범한 노력가로서의 성격을 말하는 것이다.
전혀 방면이 다른 경제 교육 종교 사회 관계의 회합에 초대를 받아 출석하여도 강연할 것을 미리 준비해 가는 일은 한 번도 없으나 거기서 하는 이야기는 한 말 한마디 마다 주옥과 같이 빛나고 끊임없이 흘러나오는 열렬한 대웅변이여서 전문가들로 하여금 경탄케 하는 해박한 학식과 깊은 연구를 가졌다.
총독의 취미는 많고 넓어서 여기에도 특징이 뚜렷하다.
승마, 궁도, 당구는 물론이고 단가(短歌)와 서화와 가도(歌道)는 너무나 유명하다.
갈산(葛山)이라는 아호를 가지고 흰 종이 위에 살아있는 용이뛰는 듯한 힘찬 필력으로 웅건한 성격이 여실히 나타나게 쓰는 글씨는 고(故) 견양목당(犬養木堂)과 함께 당대 정치가들 중에서 명필의 이름을 떨쳐서 서도 애호가들의 찬탄을 한 몸에 모으고 있다.
자기자랑을 극히 싫어하는 총독에게서 오직 한 가지의 자랑을 사람마다 들을 수 있는 것은 그의 아름다운 노래소리이다. 근엄하고 위장한 체구에서 봄 꾀꼬리처럼 부드럽고도 연연한 목소리로 반도 정서가 사무친 백두산절(白頭山節)은 그 노래의 총본가 우에다(植田國境子)도 황홀한 속에서 감탄을 연발하게 하는 명창이다.
그리고 갈산이라는 아호는 총독이 어렸을 때부터 한적(漢籍)를 탐독하고 그 후 대좌시대에 대륙 만주의 각지를 시찰하여 청조(淸朝) 문화에 깊은 이해를 느낀데 붙인 것이다. 항상 동분서주하는 정치생활 중에서 짧은 여가를 타서 화필을 들어 그리는 남화는 벌써 평범한 화가의 수준을 훨씬 돌파하였으며 문학을 이야기하고 예술을 평론하는 총독은 마치 청년다운 생기와 정열에 두 뺨이 홍조된다.
‘풍류장군’이라는 이름은 비로소 우리들의 소기 총독을 두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총독은 자기 자신에게는 준엄하기 추상과 같고 다른 사람에게는 따뜻하기 봄 하늘과 같다.
더욱이 자신의 잘못과 부족함은 누구에게든지 가르침을 받고 비판을 받기에 주저치 않는다.
일찍이 관동군 참모장으로 있을 때 어떤 연희 석상에서 전기 우에다(國境子)를 만나 자신만만한 목소리로 백두산절을
읊었더니 “그것이 다 노래입니까”하고 야유를 당하였다.
이에 총독은 즉시 국경자의 제자가 되어 기어이 지금과 같이 훌륭한 목소리의 주인공이 되었거니와 여기에도 무엇이든지 철저히 완성시키려 하는 정열과 누구에게라도 자기의 부족함의 가르침을 받는다는 겸손한 총독의 성정이 눈에 보는 듯이 나타나 있다.
총독의 술을 사랑함의 지극함도 누구나 알고 있는 유명한 사실이다.
양주, 중국주, 일본주 할것 없이 얼마든지 마신다.
그러나 술에 취하여 술에 정복되는 적은 한 번도 없다. 밤새이도록 한 손에 술잔을 들고 군사를 이야기하고 정치를 평론하며 교육을, 경제를, 산업을, 사회를 토론하는 총독의 웅변은 실로 현대 일본정치가 중에서 커다란 광채를 나타내고 있다.
그러나 이 웅변보다도 더욱 빛나는 것은 총독의 혁혁한 무훈이다.
일러전쟁 때에는 제30연대의 중위로서 출정하고 장렬한 육박전을 감행해야 공 4급을 배수한 것을 비롯하여 시베리아의 넓은 평원에서 세운 공훈에 의하여 공3급 그 유명한 만주사변 때의 활약에 의하여 광영의 공2급을 배수하였다.
또 소병문(蘇炳文)의 흐른바일 사건과 열하(熱河) 작전에는 청사에 길이 빛나는 무훈을 남기시고 장고봉(張鼓峰) 사건 때의 용감무쌍한 활약은 당시의 소련 극동군 사령관 블류헤르를 면직시키는 동기를 만든 것은 너무나 유명한 숨은 사실이다.
“조선은 그립다. 마치 옛집을 찾아가는 느낌이다. 내가 조선에 있을 때와는 정세도 대단히 바뀌었고 반도의 실정도 비약적으로 발전하였다는 것은 대체는 짐작한다.
군사령관으로 3년 동안이나 있었고 또는 척무대신으로서 외지 행정을 직접 맡아본 것이 있으니 조선에 대하여서도 약간의 의견을 가지지 않은 것은 아니나 오늘은 이야기 할 시기가 아니다. 장차 기회를 봐서 적당한 의견을 발표하여 실행에
옮기려고 한다.”
이것은 총독이 지난 29일 친임식을 끝내고 신문기자단을 통하여 반도 2천4백만 민중들에게 보낸 총독으로서의 첫 말이었다. 태평양전쟁이 반도가 짊어지고 있는 역사적 특수 사명은 10억 동양인들의 발전과 동아공영권 건설의 추진력이 되고 있는 이때에 일찍부터 일본 유수의 남진론(남진론)의 제창자였고 또한 만주 이주협회장의 중임을 맡아 만주개척에 온 정력을 바쳐온 소기 총독의 탁월한 정치적 구상과 과단성 있는 실천력이 반도통치 사상에 찬연히 빛나는 새로운 금자탑을 세우고도 남음이 있을 것이다.
남녀노소를 불구하고 반도의 전 민중은 두 팔을 들어 우리들의 새 총독을 맞이하며 마음으로부터 우러나는 기쁨과 신뢰와 기대를 가지고 온정 총독의 지휘를 기다리는 바이다.
<출전 : 徐椿, 「朝鮮總督小磯將軍論」, '半島史話와 藥土滿洲', 新京:滿鮮學海社, 1943년, 37~39쪽>
10. 유광렬(柳光烈)
1) 대전 후의 세계관
1.
1942년의 신춘은 왔다. 1941년도 바야흐로 저물려든 12월 8일에 아(我) 제국은 폭만(暴慢)한 미영(米英)을 상대로 포화를 퍼붓는 정의의 전(戰), 대동아전쟁을 선(宣)하여 육해공으로 경이적 전과를 거두는중에 아등(我等) 국민은 1942년의 신춘을 맞았다.
삼가 어능위(御稜威)하의 ‘황군’44)의 필승을 축원하는바이다.
'춘추(春秋)'의 편집자로부터 대전 후의 세계관을 써 달라 한다.
대개 인류의 역사는 심히 단순치 아니한 것이다. 어떠한 천재적 사회과학자나 박식달고(博識達考)의 평론가로도 도저히 명일의 세계를 말할 수 없음은 마치 기상관측자가 명일의 천후를 정확히 말할 수 없음과 같이 지난한 일이다.
그럼으로 속담에 ‘내일 일을 말하면 귀신이 웃는다’고 하였고 또 현하 전지구상에는 거대한 전쟁이 진행 중이다.
현재를 비판하고 또는 미래를 예측하기에는 안전(眼前)의 현실이 너무도 가까이 있기 때문에 더욱 불가능하게 한다.
그러나 이 거대한 현실 중에도 우리는 한가지만은 확실히 말할 수 있으니 그것은 인류역사는 항상 불의를 배제하고 정의로 진행하여 편파와 독점을 배제하고 공정과 평형으로 진행한다는 것이다.
‘지나사변’45)이 일어나던 1937년에 근위(近衛) 제1차 내각이 성립된 후 근위 수상은 그 포부담으로 국내로는 사회정의를 실현하고 국제로는 국제정의를 실현하기를 기한다 하였는데 동년 7월 7일에 지나사변이 일어나서 미영의 의장(擬裝)한 세력인 장개석(蔣介石) 정권과 교화(交火)를 하게 되었고 그것이 점차 확대 노골화하여 필경 작년 12월 8일의 대동아전쟁에 이르고 만 것이다.
2.
그럼으로 전후의 세계관은 이 국제정의와 사회정의의 실현으로써 관찰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것을 횡(橫)으로 지역을 표준하여 보고 종(縱)으로 역사의 변천 및 전후의 사상동향 등으로 보려한다.
첫째 지역적으로는 영(英) 제국의 붕괴이다. 영국은 ‘엘리사베드’조(朝) 이래에 영 황실의 윤허하에 공연히 세계적 해적이 된 자이니 그 해적의 발달이 현재 소위 7대양을 지배한다는 영국 해군을 이루었든 것이요 이 해군의 힘은 서반아(西班牙-스페인)의 무적함대를 이기고 구주에서의 불란서를 제(制)하고 항해의 선진자인 서반아, 화란(和蘭-네덜란드), 포도아(葡萄牙-포르투갈) 등을 차제로 정복하고 서반구에는 가내타(加奈陀-캐나다)를, 아불리가(亞弗利加-아프리카)의 대부분을 침략하였으며 소사운하(蘇士運河) 개착(開鑿) 이후로는 지부랄탈, 말타, 소사운하, ‘아덴’을 지나 3억7천만의 인도를 영유
44) 일본군.
45) 중일전쟁.
하고 마래(馬來-말레이), 비루마(미얀마), 호주, ‘보르네오’, 신서란(新西蘭-뉴질랜드), 지나(支那-중국)의 향항(香港-홍콩), 상해(上海), 양자강(揚子江)에까지 뻗치인 소위 해양제국이 된 것이다.
영 본국은 4천7백만의 인구를 가진 도서(島嶼)로서 외부로부터의 수입이 없으면 그 본토산으로는 3개월을 지(支)치 못하는 것인데 세계제일의 소맥이 난다는 가내타, 세계제일의 양모가 난다는 호주 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부강국 노릇을 하든 것이다. 그럼으로 이런 지역에서 의, 식, 주의 물자를 수입하기 위하여는 우세한 해군이 절대로 필요한 것이다. 그러나 이런 전쟁에 대서양에서는 독일의 해항정(海航艇)에게 달마다 수십만 톤(噋)의 상선(商船)이 침몰되고 지중해에서는 이태리(伊太利)의 공·해군에게 곤혹(困惑)되며 동아에서는 대동아전쟁이 일어난 이래 불과 수일에 영국의 신예를 사랑하든 주력전함 ‘프랜스·어브·웰스’호와 ‘으리펄스’호가 격침되었고 향항은 물론 그들의 동아 침략의 아성이라 한 신가파(新嘉坡-싱가폴)가 낙성(落城)될 날이 불원(不遠)한 것으로 보아 영국의 생명인 해군이라는 것이 도저히 금후에는 그 해양제국을 유지할 수 없을 것은 자명한 바이니 이것이 붕괴이론의 기일(其一)이요.
영국은 공업국이다. 그들의 식량은 식민지에서 가저오고 그 본국은 소위 세계의 공장이라고 자칭하든 바이라.
그것은 18세기 말엽 이래로 소위 산업혁명으로 산업조직을 가장 먼저 혁신하였고 해외에서 염가로 약□(掠□)하는 식료와 원료로 생산하는 상품이 다른 어느 나라의 상품보다도 싸다는 자신하에 자유주의 경제학자 아담 스미스의 제자들이 집요히 이를 실행하였든 것이다.
그러나 식민지의 원료가의 등귀, 국내 노동자의 생활향상 등은 도저히 종전과 같은 세계시장에서 자유로 경쟁할 수 있는 값싼상품을 만들지 못하게 된 것이요 연전(年前)에는 아(我) 섬유공업의 산품이 영령 제 지역을 홍수같이 뒤덮은 때에 자유무역의 본가라고 자칭하든 영국이 황망히 ‘오타와’회의로써 영령 제 지역에 고율관세 장벽을 쌓고서야 소강을 얻었으니 영 해군이 전시의 우위를 보(保)치 못함과 같이 평시의 산업전에 패한 것은 자명하니 이것이 영국 붕괴이유의 기이(其二)이요.
영국은 본토의 4천7백만, 가내타의 1천수백만, 호주의 8백만 등이 순연한 영 본토인의 동근(同根)이요 아불리가의 흑인과 인도의 3억7천만 면전(緬甸-미얀마), 마래, 보르네오 등의 동양인은 2백2십여 국어를 하는 유색인으로 영국에 대한 원차(怨嗟)가 높은 터이니 이들이 해방을 요구할 것은 당연하고 이것이 영국 붕괴이론의 기삼(其三)이다.
3.
둘째로 미국의 패퇴를 예상한다.
미국에 대하여 세(世)의 경제학자는 자본주의 발달의 한 변체(變體)라고까지 한다.
영국과 같이 식민지에서는 약탈하여 자본주의를 성육시킨 것은 본격적이다.
미국은 비교적 자국 내에서 원료, 생산, 판매를 자영하여 그만큼 발달된 것이라고 하여 변체라고 하는 모양이다.
그러나 실상은 미국 그 자체가 영국의 한 식민지로서 성장한 것이다.
세(世)에서는 청교도의 자유이니 무엇이니 하나 기실은 영 본토나 구주에서의 영년(永年)의 쟁패전 중에서 피한 자 및 그 본국에서 실패한 방랑자 등이 집합하여 건국한 것이요 이것은 아미리가(亞米利加-아메리카)의 인연(人烟) 희박, 물
중지대(物衆地大)한 광대한 지역이 그렇게 하게 함이다.
그럼으로 그들에게 첫째 동근동혈(同根同血)의 국민적 단결이 결여하다.
둘째로 그들은 군사상으로 심히 □방(□倣)하다. 불과 수만의 군으로 대치하든 독립전쟁에 영 본국을 익였다는 것도 영불(英佛)쟁패의 소산이요 미서(米西)전쟁에 익인 것도 퇴세의 서반아의 약점이 있었든 것이요 지난 번 구주전쟁에는 열국이 피폐한 틈을 타서 서부전선에 파군(派軍)하였든 것이 상대편인 독일의 피폐와 내분으로 승전국 측에 들게 되었는데 이것을 마치 자국이 전쟁만 하면 이기는 듯이 폭만하게 생각하여 세계의 경찰이라 방언케 된 것이며 13주(洲)로부터 48주로 발전하고 동아의 비률빈(比律賓-필리핀)이라는 근거지까지 두게 되었으나 이번에 대동아전쟁의 발발로 동아에서 패퇴할 것은 물론 그 폭압하에 있든 남미는 그 인종이 서반아인이 허다한만큼 서반아가 독·이와 같은 전체주의국으로 발전하는 이상 미국의 대 남미 세력은 쇠퇴치 않을 수 없고 만일 영 본국이 독·이에게 쫓기어 가내타로 가게 되면 같은 ‘앙글로삭손’의 내분까지도 예상할 수 있다.
셋째로는 불국의 쇠퇴이다. 이번에 독일에게 제압된 이래로 힘써 부흥을 책(策)하고 있으나 ‘알싸스로렌’이 독일에 넘어갈 것은 물론 튜니쓰, 아불리가의 불령(佛領)이 독·이의 경영이 되지 않을가 하며 불인(佛印-프랑스령 인도네시아)은 일불(日佛) 합의하에 대동아공영권에 들게 될 것이니 하여간 영국에 차(次)하든 불 제국으로는 쇠퇴라 할 수 밖에 없다.
넷째로는 구주 소국의 변형이다. 화란, 포도아, 백이의(白耳義-벨기에) 등 소국이 그 본토를 직힐국방력도 없으면서 해외에 광대한 식민지를 가지고 있고 더욱 화란은 해군의 실력이 없으면서 동아의 내정(內庭)인 동인도를 가지고 있는 것은 영(寧)히 소지(笑止)할 일이다.
이것은 전혀 영국의 심원한 음모하에 구주의 강국이 점령할 것을 예방하기 위하여 서상(敍上) 소국으로 하여곰 점(占)케 하고 사실상 주인은 영국이 된 것인데 영국의 붕괴에 따라 변형될 것은 물론이다.
동인도가 아(我) 대동아공영권에 들게 되고 백령(白領) 정말령(丁抹領-덴마크령) 등이 독, 이의 지도하에 변형되리라고 보게 된다.
다섯째로는 소련의 변형이다. 소련이 독일에게 성하지맹(城下之盟)을 맺일 여부는 예단할 수 없으나 소련이 종래와 같이 공산주의, 세계적화주의(世界赤化主義)로만 일관할 수는 없을 것이다.
첫째 자국을 방위하기 위하여 이번에 국가주의에 굴복하였으며 (물론 처음부터 적색국가주의이나) 둘째 영, 미와 연
결하기 위하여는 민주주의와 타협하고 신교(信敎)의 자유를 허치 아니하였는가.
독일에게 쫓기어 깊이 ‘우랄’ 산동(山東)으로 오든지 또는 현 스탈린 정권에 변동이 있을른지 소련의 진로에 일변(一變)이 있을 것도 예측된다.
이상으로 보아 전후의 세계를 대체로 예상하여 보았으나 이것은 주로 파괴되는 방면을 본 것이요 건설의 방면은 아니다. 그러면 건설방면은 여하한가.
4.
건설방면은 파괴방면보다 더 예측하기 어려운 것이다. 그것은 건설은 그 시기에 따라 방법이 일정치 않기 때문이다.
첫째로 아국(我國)이 지금 진행하는 대동아공영권은 일(日), 만(滿), 지(支) 일체에 다시 태국(泰國)과의 공수동맹, 불인(佛印)의 공동방위, 동인도의 포함 등이니 대체로 이것이 완성하면 전시와 평시를 물론하고 원료의 자급과 유무상통의 확보가 될 수 있으며 다시 이것이 면전, 인도의 해방에 이를 때에는 미영의 질곡하에 있든 동아 10억의 민중이 자산(自山)의 천지에 활보케 될 것이요 신(新)지나와 몽고(蒙古)의 성장은 광대한 부원(富源)을 개발하게 되리니 이리되면 태평양, 인도양, 북미양(北米洋)이 동아인의 호수(湖水)가 될 것이다.
둘째로 독일의 구주신질서는 어떠한 것인가. 동구라파로 진(進)하여 ‘우쿠라이나’의 곡창과 ‘코카사쓰’의 유전을 확보하고 ‘뽀헤미아’와 ‘알싸스 로렌’의 철은 유유(愈愈) 구주의 서울로서 공업국의 면목을 가질 것이니 이것은 히틀러 총통의 ‘마인캄푸’의 그리는 이상이요 백림(伯林-베를린)으로부터 토이기(土耳其-터키)의 ‘비산친’을 지나 ‘이란’의 ‘박다르’로 나오는 삼(三)B정책은 카이제르가 그리든 이상이니 전자는 접양주의(接壤主義)로 진출할 것과 해외식민경영이 노다공소(勞多功小)한 것을 지적하였다.
이것은 히틀러가 재야시대의 주장이요 또 독일이 한창 비밀군비를 진행하는 중에 있어서 해외식민지를 주장하여 영, 불이 눈을 등잔같이 뜨고 덤비는 것을 피하려는 정책도 가미하였었겠지만 또 진리로 보아도 해외식민지 경영과 접양지 발전은 얼른 그 우열을 판단키 어렵다.
그러나 지금의 독일=특히 영국을 타도한 후에는 서상(敍上) 이자(二者)를 병행할 수도 있고 아불리가의 광대한 영령(英領)과 소국령의 경영을 지도하게도 될 것이다.
셋째로 이태리는 여하한가. 이태리는 뭇솔리니가 말한 바와 같이 “지중해의 주인이 되려 하는 것이요 고(古) 로마제국을 부흥하려 하는 것이다.” ‘발칸’반도로부터 근동(近東)의 제국(諸國) 토이기, 이란,이락을 위압하고 아불리가의 제 지역=리비야, 튜니쓰, 소말리란드, 애치오피아, 애급(埃及-이집트) 등을 장중(掌中)에 넣어 대제국을 건설하려는 것이다.
5.
넷째로 구주에 있든 20여 소국은 모다 독·이와 지도하에 들되 특히 종래의 영미 중심의 소국 대립을 배제하고 실제 경제와 복리를 위하여 적지적소(適地適所)의 생산을 시키는 동시에 소국분립의 관세를 철폐하고 통화로 미, 영 본위의 금본위에서 이탈하여 빠터제(制)로 될 것이니 이리되면 ‘빨칸’의 농산물과 백이의의 공산품이 종래와 같은 관세장벽이 없이 상호교환할 것이 예상된다. 이것이 일은바 구주연방안(案)인데 구주가 이렇게 구주 자체를 위하여 단결한다든지 동아가 동아인 자신을 위하여 단결하는것을 미영은 극도로 싫여한다.
히틀러는 말하기를“영국은 3백년동안 구주에 새 큰 세력이 일어나는 것을 방해하여 놓고 그 동안에 세계제패를 하였다”
하고 다시 “영국은 구주와 빨칸(소국 대립의 대표적 지역)화를 기도하고 불국은 독일의 ‘빨칸’화를 기도한다”고 보(報)하였다.
그러나 영, 불, 미의 오래 쓰든 상투수법인 ‘분립시켜 지배한다’는 원칙은 구주인은 구주인 자신을 위한 단결과 동아인의 동아인 자신을 위한 단결하에 분쇄되고 만 것이다.
다섯째로 불국은 여하? 비록 패잔국이나 고도의 문화를 가진 나라이다. 독일의 ‘빨칸’화를 기도하든 불국이 어느 틈엔가 독일은 철과 같은 국민적 단결이 되는 반면에 불국 자신이 소당분립(小黨分立)으로 ‘빨칸’화하여 자유의 감주에 심취하여 국방보다 딴쓰를 더 좋아하고 건전한 부부생활 보다 자유연애를더 탐구한 대상(代償)으로 금일의 고배를 물고 넘어진 것이다.
그러나 불란서는 19세기 사상에 일 역할자이며 고도의 문화를 가진 나라이다.
불란서의 문예, 불란서의 철학, 불란서의 미술은 그 국민의 정신력을 볼 수 있고 과거에도 여러 번 비참한 국난이 있었으나 아모리 깊은 상처를 받았을지라도 아픈 다리를 끌고 일어서는 것은 나폴레온시대에 그러하였고 보불전쟁에 그러하였으니 독일도 불란서에게만은 주권 기타를 충분히 존중하여 히틀러의 일은바 “독일의 발전을 방해치 못하도록 결박만 지어두면고만”일 것이다.
여섯째로 영국은 어찌할 것인가. 동맹국에게 머리를 숙이고 말 것인가? 그 근기를 가지고 영불 백년전쟁과 같이 서상(敍上)의 붕괴과정을 밟으면서도 최후까지 항전할 것인가. 영불 백년전쟁이 매일매야(每日每夜)의 전쟁이 아니었든 것과 같이 이번의 영국 패퇴전도 이번 전쟁이 영국의 굴복으로 마친 후에도 다시 그 화심(禍心)을 재발하여 중래(重來)하지 않을가 보(保)키 난(難)한 점도 있는 바이다.
6.
이제 전후의 사상계는 어찌 될 것인가.
히틀러는 금반 아국과 군사동맹을 강화하고 미영에 선전하는 동시에 최후의 승리를 강조하고 이것이 동일의 5백년 또는 1천년 계획인 것을 말하였다.
그럼으로 이번 전쟁이 그친다 하여도 의연히 세계신질서 건설은 경계하에 진행되고 그러니만큼 값싼 낙관이나 자유주
의는 금물인 동시에 엄숙한 국민적 내지 대 지역적 단결도 개인보다 전체에 대한 행복을 강화하여 나갈 것이요 실력이 말을 한다는 ‘역(力)’의 철학은 군고(軍鼓)의 뒤에서 높이 울릴 것이다.
또 인간생활의 물질방면을 맡은 경제는 통제하에 놓이고 일정한 계획하에 놓일 것이니 이러한 대 지역의 수십억 인구
의 공영을 위하여는 이윤만을 근본 토대로 하는 자유주의 경제로는 도저히 불가능하기 때문이다.아(我) 동아공영권의 지도 이상인 일본정신에 대하여 전 평소(平沼)수상은 “만물이 각득기소(各得其所)하는 것이라” 하였고 또 일본의 이상은 미영이 침략을 배제하고 팔굉일우로 사해가 한 집같이 살자는 것이니 즉 침략의 대(代)하는 도의의 세계를 건설함에 있는 것이다.
‘뭇소리니’는 공산주의를 박(駁)하여 왈(曰) 사람은 어느 경우에는 도덕적이요 어느 경우에는 영웅적이지 공산주의와 같이 “경제적 인간만 주장하고 사람을 ‘생산수단’으로만 보는 것은 분만(憤懣)하는 바이다” 하고 다시 “사람에게 어느 정도의 소유욕을 허함은 그 인격의 완성을 위하여 필요한 것이요 사유를 부인하고 관료로만 경영하는 소련의 산업은 정체하리라” 하였다.
아(我) 일본정신에 의한 경제와 문화는 물론 만인이 각득기소(各得其所)하는 이상의 세계로 전 동아의 해방과 자유를 구하게 될 것이니 이것은 근위(近衛) 공(公)이 말한 바 국제로는 국제정의 국내로는 사회정의를 실현함에 있음이요.
다시 이것은 필자가 모두에 말한 평형의 실현이라 할 것이다. 즉 지구 5분의 4를 지배하던 미영이 물러가고 동아와 구주는 다 각각 자신을 위하여 각득기소(各得其所)하는 신질서를 세우게 될 것이요 국내적으로 전 국민을 위한 경제와 문화는 만인이 다 잘 사는 공평한 생활을 하게 될 것이다.
비록 어떠한 파란, 굴곡, 우회가 있을지라도 인류역사의 진전은 항상 이 가도(街道)로 진행하는 것이다.
<출전 : 柳光烈, 「大戰後의 世界觀」, '春秋' 1942년 2월호, 24~28쪽>
2) 대동아선언의 의의
1.
황송하옵게도 지난 12월 8일에 광영에 대한 선전의 대조(大詔)를 환발(渙發)하옵사 동아영원의 평화확립의 대의를 소시(昭示)하옵셨는데 이 성려(聖慮)를 봉체(奉體)하여 금차 제국의 성전을 동아를 해방케 하는 ‘대동아전쟁’46)이라 하게 되고 79의회에서의 도조(東條) 수상의 ‘대동아전쟁’의 의의와 금후 제국의 태도에 대한 연설은 전 세계의 이목을 용동(聳動)케 하는 바로 이것은 ‘대동아선언’으로서 세계사적 의의를 가진 것이다.
18세기 말엽으로부터 20세기에 걸쳐 수백 년에 걸친 영미(英米) 양국의 세계침략은 이에 20세기 중엽의 동아의 발흥(勃興), 특히 우리 일본제국의 발흥으로써 그 종지부를 찍게 되었다.
나는 이 대동아선언에 대한 세계사적 의의를 조명하여 더욱 우리 국민의 감격과 분기(奮起)를 촉구하고 그 책임의 중대함을 경고하는 바이다.
2.
서양인 중 특히 영국인들은 ‘이스트 이즈 이스트’ ‘웨스트 이즈 웨스트’ 동은 동이요 서는 서라고 하여 의연히 구별하나 이것은 그들이 그들 자신의 방편을 위한 구분이요 결코 그들이 서방에 있다 하여 서방에 만족하는 것이 아니요 동아를 그 배하(配下)에 두려는 야망 속에는 이 구별을 도외시 하고 침침연침략(駸駸然侵畧)을 계속하여 동아인의 피로 그만큼 그들은 비대하고 금일의 세계적 부강을 이룬 것이다.
서양인의 동양침략은 그 연원이 자못 심원(深遠)하니 중세기의 대상들이 인도(印度)의 부를 육상교통으로 무역에 의하여 얻은 것을 해로로 의하여 침략에 의하여 얻으려는 데에 거대한 화심(禍心)이 잠재했던 것이다.
콜럼버스가 아메리카(亞米利加)대륙을 발견하고 페르디난드 마젤란(Ferdinand Magellan)이 태평양을 횡단한 것을 그들 백인의 역사가들은 한결 같이 인류역사에 큰 공헌이나 한 듯이 추장(推奬)하나 기실(其實)은 해로로 동아에서 황금을 약탈하여 가겠다는 것이 그 주된 목적이요 세계의 미개지(未開地)를 모두 그 침략하에 두려한 것은 콜럼버스가 항해를 떠날 때에 ‘어떠한 지역이든지 정복하는 대로 포르투갈(蒲萄牙)과 스페인(西班牙)이 반분하자’는 약속이 있었다는 것으로도 명백한 바이다.
이러한 불순한 동기하에 세계침략을 개시하여 맨 먼저 포르투갈인은 인도와 말레이 반도(馬來半島) 중국(支那) 광동(廣東)에 세력을 세우고 스페인인은 필리핀(比律賓)섬을 점령하며 대만(臺灣)에 근거지로 삼았고 뒤미쳐 온 네덜란드인(和蘭人)이 포르투칼인을 구축(驅逐)하였던 바 다시 나폴레옹전쟁으로 강대해진 영국이 프랑스(佛國)와 동아침략의 경쟁을 하여 수많은 곡절(曲折)을 지난 후 인도와 말레이 반도, 미얀마(緬甸)는 영국의 손에, 남양군도(南洋群島)는 영국의 후견하에 네덜란드령으로, 베트남(安南)은 프랑스령(佛領)으로 되고 이 경쟁에 선수권을 잡은 영국은 백 년 전에 아편전쟁(阿片戰爭)을 일으키어 중국에서 가장 부유한 지역인 양자강(揚子江) 유역을 그 지배하에 두게 되었다. 남북 아메리카주에서도 앵글로 색슨족은 부절히 원주민을 박해하고 그 피 위에 미국을 건설한 후 40년 전에는 동아침략에
46) 1941년 발발한 태평양전쟁을 뜻함.
한 몫을 들어 미서전쟁(米西戰爭)으로 필리핀을 점령하고 중국에 대하여 문호개방 기회균등을 주장하게 된 것이다.
이와 노선을 달리하여 러시아(露西亞)는 시베리아(西伯利亞)를 횡단하여 호시탐탐(虎視耽耽) 만주(滿洲)로 남하, 전 동아를 병탄(倂呑)하려는 기세였다.
3.
이 서양인의 동아침략은 그 근본적 동기가 동아의 황금과 실물을 약탈하고 영지를 점령하려는 데 있었으나 다시 이것을 구체적으로 보아 외적, 내적, 중요한 소인을 몇 가지를 고찰하면 첫째 외적으로는유럽(歐羅巴)이 중세기의 암흑을 지나서 종교개혁, 문예부흥 등으로 인심(人心)을 일신(一新), 과학의 발전을 촉진하여 모든 산업에 새로운 기계력을 이용하고 이것이 동기로 자본주의가 발흥되었는데 이 자본주의로 산업혁명을 가장 먼저 발전시키어 완성케 한 것이 영국이요 지리적으로 섬나라인 영국은 구주(歐洲)의 모든 강국을 그 우세한 해군력으로 차례로 굴복시키고 이 우세한 해군력은 한없이 이윤을 추구하는 자본주의의 교양에 의하여 세계시장의 형성을 요구한 것이니 비록 실력의 차이로 포르투갈
(葡) 네덜란드(蘭) 프랑스(佛) 러시아(露)는 그 노정(路程)은 달리하였으나 모두 동곡이교(童曲異巧)인것이다.
즉 저들의 문예부흥 이래 과학의 발달 경제력의 증장(增長)은 그대로 군사력이 되어 동아침략을 개시한 것이요 다시 이것을 내적원인으로 볼 때는 동아인 자체가 각성치 못하였던 소이(所以)이다.
우리 제국 도쿠가와 막부(德川幕府)의 삼백년 쇄국(鎻國)은 국민의 세계적 발전을 저해한 바가 심대(甚大)하였고 중국은 한족(漢族) 자신의 자주국이 아니요 여진족(女眞族)의 지배하에서 그 진취의 지상이 저하되었던 관계로 이 서양인의 치열한 동아침략에 하등의 반격을 준비 또는 실현치 못하였던 것이다.
4.
과연 영미를 수반으로 한 세계침략을 안정(安政) 5년 미국의 위협에 의한 우리나라의 개국으로써 그 대체의 취서(就緖)가 된 것이니 만일 이때에 우리나라의 메이지유신(明治維新)에 의한 발흥이 없었더라면 동아는 그대로 저들의 과분(瓜分)하에 신음하게 되어 암흑의 대륙이란 별명을 듣는 아프리카(亞弗利可)의 제2번이 되었을지 아메리카가 인디언같이 저들의 살육에 일임하게 되었을지 실로 전율할 바이다.
그러나 이 우리나라의 발흥은 1894년의 일청전쟁(日淸戰爭)에 의하여 근대국가로서의 완성을 보이었다.
그 후로 열강의 중국 과분열(瓜分熱)은 더욱 증장되어 필경 동아를 병탄하려는 러시아와 우리나라가 정면충돌을 하게 되어 세계를 재차 경동시키었다. 이 일러전쟁(日露戰爭)은 실로 대동아 발흥의 광명을 동아의 모든 민족에게 방사(放射)한 것이다.
한족은 비로소 중국을 현대적 국가로 개조하면 서양인의 병탄을 면(免)할 수 있다는 신념을 가지게 되었고 인도인은 비로소 영국의 100년 질곡(桎梏)을 벗어나서 자주의 국가를 세우겠다는 희망에 불타게 되었다.
이에 우리나라의 지사(志士) 간에는 아세아주의(亞細亞主義)가 활발하게 그 토구(討究)의 문제로 오르게 되고 이 아류를 급(汲)한 손일선(孫逸仙)47)도 아세아주의를 제창하게 되었다.
손일선은 그가 서거하던 해에 북경회의(北京會議)를 하기 위하여 가는 도중 고베고등여학교(神戶高等女學校)에서 ‘대아세아주의’에 대한 일장의 강연을 한 것은 그가 사상적으로 연소용공(聯蘇容共) 등 수많은 굴신곡절(屈伸曲折)을 지나면서도 최후적 원숙(圓熟)은 ‘대아세아주의’에 도달한 것을 알 수 있으며 그는 ‘일본이 없이는 동아가 없다’는 것을 솔직히 명언(明言)한 것으로 보아 그의 중심사상은 ‘대동아주의’였던 것이다.
이 대동아주의는 일본민족의 선각과 일러 전후의 전승에 의하여 동아 각 민족에게 편만케 된 것이다.
5.
우리나라는 이 대동아주의를 국시로 하면서도 오히려 수많은 은인자중(隱忍自重)을 하였었는데 저들 영미는 우리나라를 과소평가하여 파리근대강화(巴里近代講和)에서는 호주백인주의(濠洲白人主義)의 이기주의하에 인종평등안을 부인하여 유색인종을 영원히 차별하겠다는 태도를 보였고 워싱턴(華盛頓)회의에서는 영미 오(五), 오(五) 아국 삼(三)으로 영원히 우리나라의 해군을 저들보다 열위(劣位)에 두려하였고 신사협약(紳士協約) 이래, 우리나라인의 제한이민도 배일법안으로 거부하였고 우리나라의 상품을 모든 미, 영의 영지에서 고율관세로 거절하고 만주사변이 일어나자 스팀슨은 불승인주의(不承認主義)를 내두르고 중일전쟁에는 원장(援蔣)태도를 계속하여 동아자신의 향상을 극력방지(極力防止)하고 동아를 영원히 저들의 식민지화 하려한 데서 우리나라는 이번의 ‘대동아전쟁’을 선언하게 된 것이다.
미영 양국이 스스로 그 분한(分限)을 알아서 미국은 남북아메리카의 광대한 지역에서 그 제패를 하고 영국은 캐나다(加奈陀)와 아프리카 일단에서 그 자위(自衛)를 책(策)하고 구태여 동아에서의 패권(覇權)에까지 손을 내밀지 아니하였던들 금일의 대동아전쟁은 그 시기를 달리하였을 것이요 세계역사도 또한 다른 문구로 기록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미국은 제1차 세계대전 이래 그 산업 즉 저들의 자본주의가 최고도로 증대하여 남북아메리카로만은 만족치 못하게 되었고 영국의 노대(老大)자본주의도 동아에서의 착취가 그 부강유지의 최중(最重)한 요소가 되는 데서 필사적 대항을 하게 되었으니 금일의 대동아전쟁은 시로 이러한 역사적 약속하에 한 숙명적이라고도 볼 수 있는 바이다.
6.
개전 이래 근근(僅僅) 50여 일 동안에 황군은 말레이 반도 삼천리 전선을 석권하고 은은(殷殷)한 포격은 영국의 동아 착취의 중요거점인 싱가폴(新加波)에 군항을 건설하려할 때에 원해상(元海相)이던 아메리카는 ‘영국 해군이 동양에서 타의 제약을 받아 자유로 활동할 수 없게 되면 영국은 마치 빈혈병자 같이 일복일쇠약(日復日衰弱) 일로를 밟을 수밖에 없다.
왜 그러냐 하면 영국이 금일의 성대를 보게 된 것은 동양의 자원을 이용함에 의한 것으로 그 자원을 이용하여야만 영국은 막대한 이익을 얻고 자본의 활용에 의하여 세계를 웅비(雄飛)할 수 있다.
동양은 영국의 보고(寶庫)이다.
이것을 유지하기 위하여 싱가폴 군항이 절대 필요하다.’ 운운(云云)한 것으로 보아 저들의 자본주의에 의한 동아 착취는 그 본질상 불가피요 동아의 보고를 내놓고는 빈혈병자가 된다고 절규한 것으로 보아 동아인의 피를 빨아가는 것이 유일한 목표이었던 것도 알 수 있다.
47) 손문(孫文).
그런데 이 흡혈의 최중요한 근거지를 싱가폴이 함락되면 저들은 패퇴(敗退)치 아니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7.
그러면 제국이 싸우고 있는 대동아전쟁이 백색인종인 미영과 싸운다 하여 인종전쟁이냐 하면 절대로 그런 것은 아니다. 첫째, 같은 백인 중에도 미영의 착취적 구질서에 대함에 도의적 신질서를 건설하려는 독이(獨伊)와는 동맹의 굳은 약속하에 독이는 구주에서의 신질서를 우리나라는 동아에서의 신질서를 각각 분담하기로 된 것이니 미영의 세계적 착취제패를 분쇄하여 그 지역 자신의 이익을 위한 공영권을 건설하는 것이다.
금후 구주의 신질서는 구주 자신을 위하여 모든 정치, 경제, 문화를 건설하게 될 것이요, 동아는 동아자신을 위하여 모든 정치, 경제, 문화를 건설하게 될 것이다. 79의회에서 도고(東鄕) 외상은 ‘제국으로서는 적국 측이 선전(宣戰)하는 인종전은 예상하지 아니하고 그 필요도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또 제국은 편협(偏狹)한 배타적 의도를 가지고 싸우는 것도 아니므로 동아공영권의 관념과 같은 것도 하등 배타적
폐쇄적 성질을 가진 것은 아니라 따라서 위 공영권과 권외의 우호국과의 경제교통과 같은 것도 건설과정의 나아감에 수반하여 수차 긴밀하게 될 것은 명백하다.’ 한 것으로 보아 이 대동아전쟁이 배타적, 인종적 전쟁이 아닌 것은 명백하다.
8.
대동아공영권의 건설은 그 구도가 심히 웅대하여 일(日) 만(滿) 화(華) 삼국이 일체로 될 뿐 아니라 프랑스령 인도차이나(佛印)와의 공동방위, 태국(泰國)과의 공수동맹(攻守同盟)으로 미영의 괴뢰(傀儡)가 된 중경(重慶)정권을 제하고는 전 동아가 일치하여 추진하는 세계사적 대전쟁이요 대건설이다.
전쟁이 일어난 지 불과 2개월에 황군은 필리핀, 네덜란드령 인도(蘭印)를 차례로 석권하고 홍콩과 말레이 반도를 장중(掌中)에 넣었으며 멀리 호주의 문호(門戶)인 브리튼 섬에 상륙하여 20년 전 파리강화회의에서 영인호주주의(英人濠洲主義)를 고조(高調)하고 인종평등안을 악살(握殺)하던 호주영인의 심담(心膽)을 서늘케 하였으니 이 세계사상 미증유의 전과에 대하여 국민은 오직 무한한 감사를 바칠 뿐이다.
도조 수상의 연설에 대동아전쟁의 지도방침으로는 ‘전략적(戰畧的) 거점을 확보함과 공(共)히 중요자원지역을 우리 관제(管制) 아래에 수(收)하여 이에 의하여 우리 전력을 확충하면서 맹방(盟邦) 독일, 이탈리아 양국과 협력 상호 응(應)하여 적극적 작전을 전개 미영 양국을 굴복시킨다.’ 하였고 대동아공영권 건설에 대하여는 ‘공영권 건설의 근본방침은 우리 조국의 대정신에 숙원하는 것으로 대동아의 각 국가 및 각 민족으로 하여금 각득기소(各得其所)케 하고 제국을 핵심으로 하는 도의에 기(基)한 공존공영의 질서를 확립함에 있다.’ 하였다.
그러므로 이때까지 미, 영의 질곡 아래에서 신음하던 각 민족을 해방하여 각득기소케 함은 물론이나 이를 위하여 우리 제국의 최후 승리가 절대조건이요 동아의 안정은 제국이 근간(根幹)이 될 것이므로 동아방위의 기지를 확보치 않으면 안 된다.
이에 의하여 ‘홍콩, 말레이 반도는 여러 해 영국령이었던 위에 동아 화란(禍亂)의 기지가 되었으므로 제국은 철저적으로 화란을 제거할 뿐 아니라 이들을 대동아방위의 거점이 되게 한다.’
‘필리핀 제도는 금후 민중이 제국이 수행하는 대동아전쟁의 진의를 해(解)하여 대동아공영권의 일익으로 협력하는 경우에는 제국은 흔연(欣然)히 저들에게 독립의 영예를 여(與)하고 미얀마에 대하여도 필리핀 제도와 동양(同樣)의 대우(待遇)를 하고 네덜란드령 인도와 호주에 대하여는 현재와 같이 제국에게 항전을 계속하는 경우에는 용사(容赦)없이 격쇄(擊碎)하고 제국의 진의를 이해하여 협력하여 오면 그 복지발전에 충분히 이해 원조한다.’ 하였다.
이것으로 보아 동아를 미영으로부터 해방하는 동시에 미영의 권토중래(捲土重來)의 침략을 방비할 것을 엄중히 제시한 바이다.
다시 남방개발의 구체적 방침으로는 ‘제1로 자원획득, 특히 전쟁수행 상 긴요한 자원을 확보할 것.
제2로는 남방자원이 적성국가로 향하여 유출함을 저지할 것.
제3으로는 작전군의 현지생활을 확보할것.
제4로는 재래의 기업을 우리나라에 협력하도록 유도할 것’ 등이며 이 경영을 위하여 국내산업을 국가본위로 중점주의에 치중할 일 특히 우리나라가 금후 거대한 대륙국가인 동시에 거대한 해양국가인 임무를 다하기 위하여 선박의 건조(建造)가 급무인 것을 역설(力說)하고 이 세계사적 건설을 위한 인재양성을 위하여 교육의 쇄신, 의료의 향상을 거(擧)하여 금후의 전쟁과 건설이 여하히 장구(長久) 또는 전면적인 것을 알렸다.
9.
서상(叙上)으로써 대동아전쟁의 역사적 원인 및 근원, 이것이 대동아 건설의 전면적 진출에까지 이르는 계열 및 그 장래의 진로를 일고(一考)하였거니와 끝으로 이 대동아 선언과 우리 국민과의 관계 세계사적 의의를 말하여 결어를 삼으려 한다.
동아 각국은 지역적으로 보아 접근하였을 뿐 아니라 먼 역사적 인연으로 시간적으로도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일본과 조선이 언어와 신앙으로 같은 계열에 속함은 그중에도 현저한 사실이거니와 일찍이 중국 문헌에 나오는 우리나라의 문신(文身)의 원시적 습속은 남양군도의 유속(遺俗)이며 수천 년의 동화귀일(同化歸一)을 지낸 오늘에 오히려 일본의 일부 가옥제도에는 남양의 풍속이 남아있다 하니 이러한 모든 것을 볼 때에 대동아는 그대로 한 공영권을 이루는 것이 당연한 바이요 다시 현실문제로 지역적으로 볼 때에 동아인이 스스로 자주 자립치 못하고 필리핀이 격원(隔遠)한 미국의 속령이 되고 말레이나 미얀마가 수만리를 떨어져 있는 유럽의 영국의 속령이 되고7천만 인구가 사는 남양군도가 하등의 실력도 없는 구주의 작액소(猎額小)의 하나의 소국인 네덜란드의 속령이 되었다는 것은 심히 부자연스럽다느니 보다 같은 동아인으로서 참을 수 없는 의분을 느끼는 바이다.
저들 영미를 수반으로 한 동아 착취국들은 표면 관대(寬大)를 가장하여 남양 각지의 풍속과 기타를 그대로 방임하는 듯 하나 그 실제 저들은 착취 이외에 하등 동포적 정애(情愛)로써 대하지 않았기 때문에 문화의 향상을 꾀하지 아니하여 원주민 문화는 천년 하루와 같이 뒤지고 모든 산업도 그 종주국 본위로 단일작에 종업케 하여 언제든지 경제적으로 저들에게 예속케 하였으니 이 모든 불의와 편파를 광정(匡正)하여 진실로 동아인 전체가 공영하도록 계도(計圖)하는 것은 당연 또 정당한 것이다.
역사적으로 인연이 깊고 지역적으로 접근한 나라끼리 그 구성국가 등 자체를 위하여 합리적 해결을 하는 것이 대세이요, 또 이윤만 추구하던 미영의 자유주의 경제를 국가와 국민 전체를 위한 공익 우선의 경제로 대위(代位)하는 것이 대세이다.
이러한 거대한 역사적 사명 수행이 대동아 선언의 금후 행진과정이 될 것이다.
<출전 : 柳光烈, 「大東亞宣言의 意義」, '朝光' 第8卷 第3號, 1942년 3월, 64~69쪽>
3) 북방수호와 조선의 지위
1.
현하 진행 중인 대동아전쟁은 ‘황군’48)의 비도(比島)49)공략, 마래(馬來-말레이)반도의 석권, 소남도(召南島)의 함락, 난인군(蘭印軍)의 전면 항복, 면전(緬甸-미얀마)의 난공(蘭貢) 함락 및 이에 의한 장(蔣)정권50)의 수혈로 차단 등으로 사상(史上) 미증유의 전과를 거두고 뒤를 이어서 인도의 해방운동,호주의 전율, 루스벨트는 망연자실하고 거방(倨倣)한 처칠로도 전도 암담을 탄(歎)하게 되었다.
이 때문에 이 남, 서 태평양에서의 미증유의 승리는 그대로 아(我) 제국의 대동아공영권 완수의 일대 성공으로 보여진다. 그럼으로 이 전승에 감격한 1억국민은 오직 고열(苦熱)과 장기(瘴氣)와 싸우는 남방의 장병에게 무한한 감사를 바치게 되니 이것은 당연, 차(且) 정당한 바이다. 그러나 승전 속에서 오히려 방심을 불허하고 남방의 대승에 감사하는 동시에 이만 못지 않게 삭풍한설을 무릅쓰고 북방을 수호하는 장병에게도 심심한 감사를 잊지 아니할 바이라 한다.
금차 미나미(南) 총독이 동상(東上)을 앞둔 담화 중에 “이번 남방의 혁혁한 전과를 거둔 것은 북방수호가 완전한 데 부(負)한 바이 불소(不少)”함을 말하고“남방에만 현혹함이 없이 북방의 중요성을 재인식 시키겠다”함은 의미심장한 말이며 본문을 초(草)하는 중에 건천(建川) 대사(大使)의 후임으로 소련에 부임중인 좌등(佐藤) 대사는 “대동아공영권 건설에 매진하고 있는 아국(我國)으로서는 북방의 안전감을 일층 확보할 필요가 있는 것으로서 나의 사명도 여기에 있다고 생각한다.
이에 대한 구체적 외교방책은 물론 말할 수 없다. 패전에 패전을 거듭하고 있는 미영양국이 일소(日蘇)국교에 중대한 영향을 줄 책동과 모략을 하고 있으나 우리로서는 끝가지 황도외교(皇道外交)로서 모든 정세에 대응할 뿐이다” 한 것으로 보아 아등(我等)의 북방에 대한 경계는 일시라도 소홀히 하지 못할 바이다.
2.
그러면 이 북방문제라는 것은 대체로 무엇인가? 79의회에서 토고(東鄕) 외상(外相)51)은 “일소 간에 현존한 중립조약에 대하여 양국에서 이것을 엄수한다고 함에 대하여는 아모 변화도 없다. 그 점에 대하
48) 일본군.
49) 비률빈(比律賓) : 필리핀.
50) 중국 장제스(蔣介石)의 국민당 정권.
51) 도고 시게노리(東鄕武德).
여는 소련정부에서 대동아전쟁 발발 후에도 이것을 엄수할 것을 재삼 언명하였다” 한 것으로 보아 일응 염려없다고 볼 수 있는 바이다. 그러나 현하의 국제정국은 일시도 방심을 불허한다. 일소중립조약은 작년 4월 마츠오카(松岡) 외상이 구라파를 방문하고 돌아오는 길에 체결한 것으로 양국 중 어느 편이든지 제3국의 군사적 대상이 될 때에 상호중립을 유지할 것을 약(約)한 것이다.
그러나 다시 회고할 때에는 1925년에 체결한 일소수교기본조약이 있었음에 불구하고 장고봉사건 ‘노몬한’사건 등 기다(幾多)의 불상사건이 있었든 바이니 환언하면 이 수교조약이 충실히 실행되었드면 이 중립조약은 필요치 아니 하였을른지 모른다.
이 중립조약이 체결된지 월여(月餘)에 독소(獨蘇)전쟁이 일어났다. 이와 동시에 1938년 9월 27일에 체결된 일, 독, 이 삼국동맹과의 관계는 이 중립조약에 아모러한 영향이 없다 할 수 있었으니 그것은 동맹조약 제3조에 아직 참전치 아니한 제3국에 의하여 공격되는 때에는 상호원조를 규정하였으나 제5조에 “소연방에는 하등 영향을 급(及)치 아니할 것”을 특별히 규정한 때문이라 볼 수 있었고 상(尙) 독일의 맹격 앞에 황망히 영미의 원조를 받게 된 소련이 동 7월 12일 막사과(莫斯科-모스크바)에서 체결한 영소(英蘇)군사협정에도 그 상호원조의 범위를 대독(對獨)전쟁에 국한하였고 다시 작년12월 8일에 대동아전쟁이 발발하는 동시에 동 11일에 일독이 삼국 간 신군사협정에도 그 범위를 대(對)미, 영 전쟁에 국한하였고 일소중립조약과는 하등 저촉되는 바이 없다.
그럼으로 전 세계가 전쟁 속에 든 금일에도 표면상으로 보아 일소 간에는 조약상으로 보아서 하등 문제될 것이 없는 것이다.
3.
그러면 이 탄탄대로와 여(如)한 북방문제에 대하여 오히려 1억 국민에게 경종을 울리어 북방을 수호하라 하는 소이는 어대있는가. 그것은
1. 주의상 문제이요
2. 국제정세의 격변이다
첫째, 모국(某國)은 공산주의의 국가이다. 비록 그것이 동(同)국의 국내문제이라 할지라도 세계의 변혁을 책하고 있는 국제공산당이 그 국도(國都)에 있어서 항상 타국의 적화(赤化)를 책(策)하고 있으며 특히 지나(支那-중국)에 대하여는 지나공산당(중국공산당)을 원조하여 서안사변, 국공합작-그것이 연(延)하여 대일 전면항전에까지 나오게 된 것을 상도(想到)할 때에 그 배후에 있는 바를 경계치 않을 수 없는 바이다.
지나 고대사의 신화에는 간혹 인신우신(人身牛身)의 초인(超人)이 있음을 본다. 모국(某國)은 국제공산당의 촉수가 있을 때마다 그것과 모국 정부와는 별것이라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이 말을 20세기의 있는 신수(身首)가 각이(各異)하다는 괴기로만 보고 말 것이냐 또는 에집트의 스핑쓰 같이 불가해라고만 하고 말 것이냐 이에 대하여 아국 조야의 경계는 결코 심상한 것이 아니다.
아(我) 근위(近衛) 3원칙에도 공동방공(共同防共)이라는 것이 뚜렷하게 나타났었고 방공특수 지대에 주둔군을 둘 것으로 역설하였으며 일소중립조약 체결한 후에도 아국의 조야는 이 중립조약이 있다하여 공산주의에 대한 경계를 소홀히 할 것이 아님을 말하였고 과반 일미교섭의 파열에도 아 방공군(軍) 주둔의 주장과 미국의 전면 철퇴의 주장이 한 중요한 조건으로 상정되었든 것을 생각할 때에 이 대동아전쟁은 영미의 착취적 자본주의를 배제하는 동시에 이 방공문제가 중요한 핵심이 된다고 볼 수 있다. 둘째로 국제정세의 격변으로 생기는 사태의 경계이니 현재 모국은 서부 구로(歐露)에서 독일군과 사투를 계속하고 있느니만큼 동아에서 아국과의 마찰이 있을 것을 극력으로 피하려 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 정세에 대한 장래는 여하할가?
또는 실제주의인 모국은 영미로서의 받는 바 원조의 이(利)와 동서 양면작전의 해(害)와를 천칭(天秤)에 걸고 비교하여 그 평형을 보아 어느 때 이상이 있지 않을가 하는 기우도 없지 아니하다.
이것은 물론 현재에는 그런 사태가 없고 또 상상도 되지 않지만…….
4.
말은 잠시 옆길로 나가서 조선과 북방관계의 과거를 일고하여 보려 한다. ‘반도인’52)은 실로 몽고로 부터 남하한 민족이 대부분이라 할 수 있으나 그 후 점차 문화를 흡수하고 또는 일즉부터 농경시대에 들어오자 북방에 어떠한 강한(强悍)한 민족이 일어날 때 마다 조선은 그 비말(飛沫)에 곤혹되였든 것이다.
지금은 같은 반도인 중에 그 구별조차 할 수 없는 고구려인도 북방에서 발흥한 것이요 요(遼)·금(金) 등의 제국(諸國)이 발흥할 때에는 조선을 침략하여 대륙 경영에 한 지반을 삼으려 한 일이 있고 몽고가 발흥하여 세계를 석권할 때에도 먼저 조선을 그 배하(配下)에 두어 지반을 삼고 ‘달로화적(達魯花赤)’(몽고의 관명(官名))이 조선에 주재하여 그 지반 수비에 주력하였고 다시 이 지반을 토대로 하여 소위 홍안(弘安)의 원구(元寇)로 아국에 침입하였고 그 후 한(漢)민족의 위세가 전 만주에 미첫을 때에는 반도인에게 숭명(崇明)사상을 심을만큼 명의 세력이 조선에 미첫으나 일조(一朝) 여진족(女眞族)이 만주에서 일어나자 조선은 다시 그 배하로 들어갔으며 시국이 변전하여 여진족의 청조가 쇠퇴하자 불군(佛軍)의 강화도 침입, 영국의 거문도 점령, 청조의 최후 발악인 조선에 주둔군 파견은 필경 일청전쟁의 도화선이 되었다.
태평(太平) 육군보도부장의 금년 만주국 건국절의 석(夕)에 한 강연 일절 중1894, 5년에 아국은 무고히 침략되려는 조선의 위급을 구(救)키 위하여 당시 세계 일(一)의 대국이든 청국과 국운을 도(賭)하여 패하였다. 전후 마관조약(馬關條約)에서 요동반도를 할양케 하였으니 이것은 영토를 탐내서 그런 것이 아니라 조선을 견고케 하기 위하여는 요동반도를 영유 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유래 일본 내지를 완전히 하기 위하여는 조선의 안전을 절대 필요로하고 조선을 안전케 하기 위하여는 만주를, 안전케 함을 절대 필요로 한다는 것이 아국의 전통사상이었다.
이 정신으로 로서아가 만주, 조선을 병탄하려 하는데 대하여 감연히 일어났다.
물론 일로전쟁도 명목은 조선에 있었으나 실상은 만주로부터 침략 로서아를 격퇴하는 것이 목적이었든 것은 두말할 것도 없다.
한 것으로 보아 조선과 북방수호의 관계가 어떻게 중요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5.
다시 현하의 국제정세에 대하여 좌등(佐藤) 군무과장이 지난 3월 10일 육군기념일의 석(夕)에 한 강
52) 조선인.
연 중 적, 미·영의 기도에 다하여 한 말을 보면 미·영은 독·소전에 큰 기대를 걸고 또 아불리가로부터 근동지방, 코카사쓰를 경(經)하여 소련 급(及) 같은 근동지방을 경하여 인도 급 지나에의 유대를 견고히 하고 일·독·이의 제휴를 방해하면서 위선 독·이의 봉첨(鋒尖)을 좌(挫)하고 이어서 일본에 공세를 취하려 하는데 그 공세는 어느 방면으로부터 올 것인가.
피등이 열망하는 제일의 도(途)는 소련을 강요하여 차(此)와 협동하여 연해주 등을 기지로 하여 북방으로부터 일본 본토에 공세를 취하려 하는 것일 것이리라.
송강(宋岡) 외상이 막사과(莫斯科)를 방문하였을 때에 말이 우연히 연해주의 문제에 급(及)하자 스탈린은 특히 끈으로써 자기의 목을 매는 시늉을 하며 연해주를 방(放)함은 소련으로서는 스사로 목을 매는 것과 같은 것이라는 것을 강조하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아등은 북방의 여하한 사태에도 응할 수 있는 준비는 이미 충분히 정비되어 있는 것이다.
한 것으로 미·영의 소련을 유(誘)하여 연해주에 작전기지를 만들 여부에 대하여는 충분히 경계할 바이다.
그러면 그 시기는 어느 때일 것인가.
또는 그러한 가능성이 있는가.
그것은 소련이 현존한 일소중립조약을 엄수하고 있는 이상 예상되지 않으나 이에 대하여 좌등(佐藤) 군무과장은 다시
미·영은 공중과 해상에서 ‘게릴라’전을 행하면서 교교히 군확(軍擴)과 공세준비에 광분하리라.
자(玆) 수년간에 긍(亘)한 비행기 함선 등의 소모전과 전력 확충의 경쟁시대를 예상할 수 있다.
그 다음 북으로 올른지 남으로 올른지는 모르나 미국의 군확 완성 후 1, 2년 후이나 2, 3년 후 어느 시기에 미·영은 제국에 대하여 결전을 구하여 올 계제를 상정하여 두지 않으면 안 된다.
한 것으로 금후를 더욱 경계할 바이다.
6.
이에 다시 대동아전쟁에 대한 모국(某國)의 태도를 검토하건대 모국의 태도로는 종래에 미·영의 착취하에 있든 동아민족의 해방을 위한 이 전쟁을 당연히 찬동하여야 할 것이나 개전 이래 모국 신문지는 이것을 도로혀 비방하는 태도로 나온 것은 피등이 종래에 원장(援蔣)53)하든 관계상 또는 미·영에 영합하는 것이라고 밖에 볼 수 없다.
그 현저한 일례로는 기 국의 친영미 정치가로 유명한 모씨가 주미대사로서 부임하든 날 마침 대동아전쟁으로 일어났음으로 모씨는 루스벨트에게 여(余)의 ‘와싱톤’에 도착과 일(日)을 동(同)히 하여 미국의 영토와 미국의 무장력이 마치 소련이 5개월 반 전에 몽(蒙)한지 불의 타격에 못하지 않은 타격을 타국으로부터 수(受)하였다.
현하국제정세로부터 발생한 차 사태는 구주 급 기타 대륙에 야기되는 중인 전쟁을 거는 바의 동일한 세력과 동일한 ‘이데올로기’에 의하여 기(起)한 자이라.
차 시련의 일(日)에 여(余)는 자국민의 따뜻한 동정을 미국민에게 증(贈)하고 아울러 동종의 시련을 받고 있는 양 국민이 일층 긴밀한 친
53) 장제스 정권을 지원함.
선관계를 결(結)할 사(事)를 확신한다.
하였고 이에 대하여 루스벨트의 답사가 있어서 크게 동병상련의 태도를 보히였다.
그러나 그렇다하여 이것을 곧 모국이 미국과 특별히 친선관계를 맺는다든지 또는 미국을 위하여 기지를 빌려줄 전도라고 볼 수는 없다. 그것은 대개 국가의 사절은 그 주재국에 찬사나 위사(慰辭)를 정(呈)하여 외교관계를 원활히 하는 것이 본무임을 생각할 때에 서상(敍上)의 모국 주미대사의 말도 일종의 외교사령으로밖에 보혀지지 안는다고 할 수도 있다. 이와 동양으로 모국의 주일대사는 아국과의 우의관계가 결코 변치 안는다는 말과 또는 모든 현안해결에 대하여 아 도고(東鄕) 외상과 누차의 간담을 거듭한 바로 보아 외교관의 사령을 하등 할인 없이 그대로 해석할 수는 없다.
요는 구주전쟁이나 대동아전쟁의 진전에 의하야 어떠케 천칭이 적측으로 기울지 않는 이상 모국의 중립은 변치 않을 것이요 도는 변할 리도 없는 것이다.
그러나 이에 대하야 어떠케 예비 경계할 것인가?
이 이상으로 논의를 전개할 수는 없다.
7.
다만 아국은 방공상으로 또는 국방상으로 그 중핵점이 내지 조선 만주를 연결하여 북방에 있는 것은 틀림없는 바이다. 만주국 10주년 기념에 아국 조야의 논의를 거두어 보건대 일본 만주 북지를 연결한 지대는 일본국방의 본환(本丸)이요 지나 본부는 한 외곽을 이루는 것이니 일선자(一扇子)에 비하면 내지 만주 북지는 부채의 사복이요 지나 본부는 부채살이요 남양의 동인도, 마래(馬來), 면전(緬甸) 등은 부채의 면에 그린 화(花) 모양이라 하였다.
현하 남방의 혁혁한 성과로 중인(衆人)의 눈은 한결 같이 선면(扇面)에 그려진 찬란한 꽃을 보고 있으나 실상 부채의 생명은 사복에 있는 것이니 이 사복의 작용으로 부채는 열리기도 하고 닫치기도 하며 진(進)하여는 바람을 내이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조선은 일본과 만주, 북지를 연결하여 그 중간에 놓이어 부채 사복 중에도 중핵 사복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첫째는 아국의 방공상으로의 조선의 지위, 둘째로 국방상으로의 조선의 지위, 셋째로 산업으로의 조선의 지위를 일고하여 보려 한다. 만주국과 함께 조선은 공산주의국가와 접양지대이다.
또는 공산주의는 이제 초기의 구주에 배회하던 일 괴물이 아니라 다소의 변질은 있었다 할지라도 구아(歐亞)에 연긍
(連亘)한 국가를 이루었다. 이것이 사상전으로서의 일부 부심득(不心得)의 인(人)에게 가수(加手)하여 오지 않을가 하는 염려가 있다.
둘째, 국방상으로의 조선의 지위는 얼른 생각나는 것만 들어도 첫째로 전시에나 평시에나 국민의 생활상 필수품인 식량의 공급지이요 둘째로는 특수광물이 조선은 내지만 못지않게 풍부하니 이것이 아국 금후 장기전에 큰 공헌을 할 것이며 셋째, 산업상으로 조선은 만주와 같이 추운 곳도 아니요 남방과 같이 더운 곳도 아니요 무슨 공업에든지 적응할 만한 기후이요 풍부한 전력, 즉 도처에 있는 하천을 이용한 수력전은 다수한 공업을 발흥케 하고 연 30여 만씩 증가되는 반도의
인적 자원도 전도양양하다. 더욱 교통 기타도 대륙성과 해양성을 병유(倂有)하여 북으로 대륙, 남으로 해양에 얼마든지 진전활용이 자재(自在)한 지위에 있으니 미나미(南) 총독의 이른바 농공병진은 서상(敍上) 식량증산과 공업발흥을 병행하자는 뜻이나 아닌가 한다.
그 뿐 아니라 현대의 국방산업은 국가의 가장 중핵지대에 두어 이것을 사수하지 않으면 안되는데 조선이 대륙에서 일조(一朝) 유사(有事)할 때에는 식량으로 공산으로 인적 자원으로 가장 적당한 지위에 놓이어 있다.
즉 제1선도 아니요 국내 오지도 아닌 병참지 역할을 하기에 가장 이로운 지위에 있다 하겠다.
이에 따라 아국이 전체로서 대동아공영권의 맹주로서의 지위에 있는 관계로 조선만 위한다는 조선의 특수성보다 전 동아적 견지로 보는 조선의 역할이 추출 입론되고 시시격변하는 현하 국제정국에 처하여 1억 국민은 일체로 조선의 북방 수호의 중요지대인 것과 부채로 치면 중핵 사복이라는 것을 인식하고 만반 유감없는 준비를 하여 두지 않으면 안 된다. 과거의 역사로 보아 모든 해결은 항상 대륙에 이어진 것이다.
<출전 : 柳光烈, 「北方守護와 朝鮮의 地位」, '朝光' 1942년 4월호, 37~43쪽>
4) 대동아전쟁의 성전 의의
1.
대동아전쟁은 이제 남태평양에서 치열 가혹한 결전이 계속되고 8월 1일부터 반도에는 징병제와 해군지원병제가 실시되어 전 반도는 감격 속에 쌓여있다. 삼가 대조를 봉배한 1억 국민은 한결같이 순국의 정신에 불타고 있는 바이어니와 금후 장기에 걸치어 계속할 피의 결전에 대하여 누구나 깊이 명간(銘肝)할 바는 이 전쟁의 특질과 및 필승의 신념이나, 이하 요(聊)히 금차 대동아전쟁의 특질과 및 도의를파지(把持)한 아국(我國)에 최후의 필승이 올 것을 밝히려 한다.
첫째 이 전쟁은 생존을 위한 전쟁이나 아국은 메이지유신(明治維新)이래 몇 번이나 생존을 위하여 국운을 건 전쟁이 있었으되 일찍이 금차와 같은 전쟁은 미증유(未曾有)일 것이다.
일청전쟁(日淸戰爭)은 거만한 노대청국이 자국의 실력에 맞지 않게 조선을 점유하고 이를 엿보던 열강이 조선을 점거함으로 인하여 생길 아국의 불안을 제거하기 위하여 싸운 것이요, 일러전쟁(日路戰爭)은 러시아국이 만주(滿洲)를 근거로 남하하여 조선을 병탄(倂呑)하고 아국을 협위하려함으로 이를 구축배제하려는 전쟁이었다.
그런데 금차의 미영(米英)은 아국에 대하여 중국은 말할 필요도 없이 아국민의 수십만의 피를 흘리어 쌓아놓은 만주에서까지 배척되게 하려는 데서 10여 년 전에 만주사변이 일어났고 이를 계기로 미영에 등을 댄 장(蔣)정권의 가열한 배일이 중일전쟁을 도발한 것이다. 선시(先是)하여 아국은 이 지구상에 사는 인종으로서 색의 황백을 물론하고 다 같이 생존할 권리가 있음을 주장하여 파리강화회의에서 인종평등안을 주장하였으나 정의를 공렴(空念)하는 미영은 이를 일고도 하지 않았으며 1924년에 미국에서는 배일이민법안(排日移民法案)이 정식으로 성립하여 우리나라 사람은 한사람도 들어가지 못하게 되었고 지광인희(地廣人稀)한 호주(濠洲)는 영국의 전단(專斷)하에 백인호주주의를 고집하여 황색인종
은 한 사람도 들이지 않게 되었고 이렇게 분방(分方)이 막힌 아국이 근면과 절약을 참으며 상품을 만들어 상업입국(商業立國)을 책(策)하자 상업상 자유주의를 표방하던 영국은 황망히 오타와회의를 열어서 영국령 각지에 고율관세를 매겨 우리 상품을 거부하였을 뿐 아니라 영국의 사주를 받은 네덜란드(和蘭)까지도 관세장벽(關稅墻壁)으로 이를 거부하고 필경은 아국과 가장 가깝고 가장 특수한 관계가 있는 중국에서도 배일이 격심하며 사적(史的) 인연으로 40년 동안 혈한(血汗)으로 지반을 쌓은 만주에서까지 배일이 심하여 나카무라(中村) 대위 학살, 만보산(萬寶山) 조선농민 구축에 이른 것이니 이상의 계열로 보아 그들이 책동한 바는 종시일관 우리 국민을 도서(島嶼)와 반도 속에 질식시키려는 악의를 포장한 것이다.
이것을 그대로 간다면 우리 국민은 상업은 쇠하고 인구는 감소하여 쇠망의 일로를 밟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2.
사람으로서 절대로 생존에 필요한 것은 토지인데 시(試)하여 그 상태를 보건대 우리 제국은 내외지를 합하여 67만 평방 킬로(일본만은 38만 평방 킬로)로 일본의 인구밀도는 1평방 킬로미터에 200인 가까운 숫자이요.
이를 영국령 캐나다의 918만 평방 킬로에 900여만 인구와 동 호주에 770만 평방 킬로에 700만 인구는 모두 1평방 킬로에 거의 1인에 불과한 것이다. 우리나라 사람이 여하히 우수할 지라도 이 숫자로만 보아서는 저들보다 200배의 노력을 하지 않으면 저들의 부를 필적할 수 없다는 소박한 이론이 추출된다. 200배의 노력도 사실상 불가능하거니와 더욱 경제에 노력은 하나의 요소에 불과하고 자력(資力)이나 기타요소와 배합된 후에야 효력을 발생하는 것이다.
물론 토지만이 유일한 요소도 아니나 이렇게 유리한 조건을 가진 자에게 같은 역량 및 근면으로는 대항이 불가능할 것도 일(一) 응인(應認)치 않을 수 없다. 히틀러는 말하기를 “지상에서 가장 고귀한 권리는 자기의 소속한 토지를 경작할
권리요. 가장 신성한 희생은 사람이 그 토지를 위하여 흘리는 혈조(血潮)이라” 하였다. 물론 이 말도 유일한 진리도 아니요. 아국의 대전 태도와는 그 성질을 달리하는 바이다. 소도(小島), 반도(半島)에 질식을 감수하고 쇠퇴를 좌대(坐待)할 수 없을 것은 자명한 바이다. 이 때문에 고(故) 신도호(新稻戶) 박사는 악악(諤諤)한 언론으로 미영의 조야(朝野)와 논쟁하였고 아 조야의 지사는 국제의 교의(交誼) 또는 전쟁의 난국임을 고려(顧慮)하여 노골로 말하지 아니하였으나 ‘민족영원의 발전을 위하여 유언을 써두라’는 논의가 빗발같이 날리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므로 아국은 이 미영의 공식정책에 대하여 감연(敢然) 생존을 위하여 일어난 것이다.
둘째로 이 전쟁은 대동아방위의 전쟁이다. 황송하옵게도 선전대조(宣戰大詔)에는 “이와 같이 추이(推移)할까 동아안정에 관한 제국 적년(積年)의 노력은 실(悉)히 수포(水泡)에 귀(歸)하고 제국의 존립 또한 정히 위태에 빈(瀕)하였다. 사태는 이미 여기에 이르렀으니 제국은 이에 자존자위(自存自衛)를 위하여 궐연히 일어나 일체의 장애를 파쇄할 수밖에 없다”고 훈(訓)하시었다. 근(謹)히 배(拜)하건대 ‘제국의 존립이 또 정(正)히 위태에 빈하였다’ 함은 우리 제국의 이 싸움이 생존을 위한 전쟁임을 훈시하신 것으로 배찰되고 ‘이제 자존자위를 위하여’라 하심은 방위전쟁임을 훈시하신 줄로 배찰되는 바이다.
서상(叙上)과 같이 우리 제국은 일청(日淸), 일러(日露)의 양 전역이 모두 동아의 안정을 위한 방위전쟁이었거니와 이번 역시 대동아를 방위하려는 방위전쟁이다.
그러나 적측인 미영을 보건대 영국은 대서양 중에 놓인 잉글랜드(英蘭)라는 한 섬으로부터 지중해,홍해를 지나 인도(印度), 말레이(馬來), 미얀마(緬甸)를 차례로 잠식하고 200년 동안 집요한 동아침략은 홍콩(香港)을 흡반(吸盤)으로 7천 리 장강(長江)을 유니온잭으로 뒤덮었고 미국은 입을 열면 정의와 인도를 말하나 미 본국이 개국 이래 부절(不絶)한 침략으로 13주로부터 48주가 된 것은 물론 알라스카(러시아에서 매수) 1867년, 하와이 1898년, 필리핀(比律賓) 1898년, 괌섬 1898년, 츠와이라1899년, 니카라과 조차(租借) 1916년, 파나마 수원조차(水源租借) 1923년, 스우닌섬 1924년 등이 모두 침략의 소산(所産)이다.
다시 저들의 동양에 대한 태도를 보면 침략 이외에 도의를 주장함은 볼 수 없으니 영국이 싱가포르 군항을 건설할 때에 원해상(元海上)이던 아메리는 “영국해군이 동양에서 타의 제약을 얻어 자유로 활동할 수 없게 되면 영국은 마치 빈혈병자 같이 일복일쇠약(日復日衰弱)의 일로를 밟을 수밖에 없다.
왜 그러냐하면 영국이 금일의 성대를 보게 된 것은 동양의 자원을 이용함에 의한 것으로 그 자원을 이용하여야만 영국은 막대한 이익을 얻고 자본의 활용에 의하여 세계를 웅비(雄飛)할 수있다.
동양은 영국의 보고(寶庫)이다. 이것을 유지하기 위하여 싱가포르군항이 절대필요하다.”
그는 해양은 영국이 빈혈병자가 안 들리게 하는 흡혈의 대상으로 보고(寶庫)인 것을 절규하였고 영국의 제국주의를 대표한 시인 키프린은 그의 화이트피플스·버든에서 백인은 의례히 유색인종을 지배하듯이 구가(謳歌)하였다.
또 미국의 마한 대좌(大佐)는 미국이 중국시장을 점령하여야 할 것을 역설한후 “중국에 대한 문호개방주의는 중국에 대한 호의의 문제가 아니라 중국시장에 자유로 진입할 수 있는 것이 긴요하기 때문이다” 하였고 1925년 1월 미국해군성 특별위원회의 보고에는 “미국의 대외국책은 하나도 침략적 성질을 가진 것이 아니나(?) 그러나 문호개방주의를 위해서는 강력한 해군력의 지지를 요한다.”
또 해군대학교감 타우싱 대좌의 말에는 “미국의 인구가 점점 증가하고 제조공업이 발달함에 따라 우리들은 미국민의 생활유지의 목적으로써 익익(益益) 널리 다대(多大)한 가치가 있다. 이 문호개방을 위해서는 공세적 해군을 가지지 않으면 안 된다.”
이 입론(立論)은 알라스카의 매수, 하와이, 필리핀(比律賓)의 점령 파나마운하 개통 이래 미국 해군의 태평양집중 미드웨이, 웨이크, 괌, 마닐라 등 수많은 진격로를 만들며 동아의 유일한 안정 세력인 아국을 에이, 비, 씨, 디 포위선54)으로 위협하기에 이르기까지 그들의 일관한 주의이다.
그러나 이에 대조하여 아국은 일찍이 남북 아메리카나 구주에 대한 일편의 야심이라도 가진 일이 없었고 오직 동아를 방
위하는 데 그쳤을 뿐이라 그러므로 금번의 전쟁도 전혀 동아 방위를 위하여 일어난 전쟁이요, 이 방위를 위해서는 아국의 대방침으로 도조(東條)수상은 ‘홍콩, 말레이 반도는 다년 영국령이었던 위에 동아화란(東亞禍亂)의 기타가 되었음으로 제국은 철저적으로 화란을 구제할 뿐 아니라 이들을 대동아방위의 거점이 되게 한다.’ 하여 방위지점을 확보하고 방위전쟁을 계속할 것을 말하였다.
3.
셋째로 이 전쟁은 해방을 위한 전쟁인 것이다. 이 전쟁이 종래에 동아전체가 미영의 착취하에 놓였던 것을 해방하는 전쟁임은 물론 구체적으로는 지난 8월 1일에 결행된 신중국(新中國)에 대한 치외법권
54) 당시 일본과 적대관계에 있던 미국(America), 영국(Britain), 중국(China), 네덜란드(Dutch)를 가리킨다.
철폐와 조계환부(租界還付)와 함께 동아의 일각에 새로이 미얀마(緬甸國)가 탄생한 것이다.
중국의 불평등조약은 실로 과거 일세기에 걸친 미영의 체제하에 성립된 것이니 중국의 국부 손문(孫文)은 40년 동안 이를 위하여 분투하였고 그가 북경 법국병원(法國病院)에서 영원의 여정(旅程)에 오를 때에도 이를 유촉으로 남긴 것인데 이번에 아국이 대동아전 진행중 솔선하여 이를 결행함은 이 전쟁이 해방을 위한 전쟁이기 때문이다.
버마는 50년 동안 영국의 질곡하에 신음하던 바 이번에 신국가로 탄생하였다.
그 신생한 선언에는 “버마 민중은 아세아를 결합하는 아세아의 지도자를 대망하던 중 드디어 이를 대일본제국에 발견하였다. (중략-원문) 전민중은 결속하여 영미적 세력으로부터 해방을 목적하는 일본육군과 공히 돌진하였다.” 하여 이번의 해방전쟁인 의의를 밝혔고 또 미국령이었던 필리핀도 불원에 신국가로 탄생할 것이며 인도도 아국과 협력하여 신생의 기운이 점차 성숙하여 찬드라 포스 씨는 지금 크게 활동 중이며 네덜란드령(蘭令)이었던 동인도에도 도조 수상은 원주민에게 금년 내로 정치에 참여케 할 것을 언명하여 불원에 중앙참의원이 실시케 되리라 하니 이것도 모두 이 전쟁이 해방을 위한 전쟁인 까닭이다.
4.
넷째로 이 전쟁은 이해(利害)를 떠난 것이니 1938년 12월 22일 중일전쟁 처리에 대한 고노에(近衛)수상 이야기 중에는 동아신질서 건설의 공동목적으로 선린우호(善隣友好), 공동방공(共同防共), 경제제휴(經濟提携)를 말하고 “일본이 중국에 구하는 것은 구구한 영토가 아니요 전비(戰費)의 배상이 아님은 자명하다.” 하였고 그 후대 동아전쟁이 발발하여 혁혁한 전과를 얻은 후에도 태국(泰國)의 성장조성, 미얀마의 신생, 필리핀의 신생, 인도의 신생에 진력(盡力)하고 방위지점만 점하여 영토나 배상 등 전리(戰利)에 착복한 전쟁이 아님을 보임은 종시일관(終始一貫)한 대의이다. 연전(年前)에 폴리쉬어 씨는 아국의 동서문명의 장점을 흡수 성장시킴에 대하여 칭양(稱揚)한 후 “아시아를 짊어진 자여! 아세아 제국(諸國)이 일찍이 귀국에 준 것에 대하여 이를 백배하여 보수(報酬)하기를 자랑하다 지금은 노예가 된 여러 나라의 현자로부터 얻은 석일(昔日)의 교훈에 대하여 그들에게 자유를 반례(返禮)로 하라” 하였다.
일찍이 우리나라는 중국의 유교와 인도의 불교를 동점에 의하여 받아들여서 금일의 문화형성이 일요소를 삼았거니와 금일에는 미영의 노예가 된 지나와 인도에게 자유의 반례를 하게 된 것을 기뻐하며 이 전쟁을 하고 있는 것이다.
다섯째로는 문화를 옹호하는 전쟁이다. 세계의 모든 식자(識者)가 지적하는 바와 같이 미영의 금권주의와 소련의 공산주의는 모두 아국의 동아의 고유한 도덕과 배치되는 바이다. 이 전쟁은 동양의 고유문화를 옹호하여 그 안전과 명랑성으로 세계문화에 공헌하려는 도의세계건설의 전쟁이다. 히틀러는 독일국민 및 전구주인에게 볼셰비즘 방어로 구주의 고유문화를 옹호할 것을 주장하였거니와 대동아전쟁은 동아의 고유문화 옹호에 있음도 큰 사적의의를 가지는 것이다. 서상(敍上)과 같이 그들의 야망, 침략, 정복에 대함에 생존, 방위, 해방 문화건설에 있는 이 전쟁은 필승할 것을 확신하고 또는 최종의 승리가 빛나기까지 매진할 바이다.
<출전 : 柳光烈, 「大東亞戰爭의 聖戰意義」, '朝光' 第9卷 第9號, 1943년 9월, 35~38쪽>
11. 유억겸(兪億兼)
1) 반드시 전쟁에서 승리하여 공을 취하자(戰必勝功必取)
태평양전쟁의 원인은 1941년 12월 8일 오전 11시 45분에 환발(渙發)하옵신 대미영선전(對米英宣戰)이 완미(頑迷)한 미·영 양국이 과거 5년간 끊임없이 제국의 확호부동(確乎不動)의 국시인 대동아공영권건설 성업을 은현간(隱顯間)에 방해한 데 있다. 그중에도 근년에 완미한 미·영 양국이 주동이 되어 소위 ABCD 대일(對日)포위진영을 만들어 가지고 불손하게도 경제단교와 무력위협으로써 제국에 도전하여 오던 중 더욱 최근에 이르러 미국은 비열하게도 영국과 통모하여 제국의 공정한 주장을 무시할 뿐이라.
과거 8개월간 일미회담 중에 제국의 은인자중(隱忍自重)하는 태도를 멸시하고 제국에게 중국과 프랑스령(佛領) 인도차이나로부터의 무조건 전면적 철병, 남경국민정부의 부인, 일본·독일·이탈리아 삼국조약의 파기를 무리하게도 요구하였다. 종래로 완미한 미국이 이와 같이 가공적(架空的) 원칙론을고수함은 제국의 실력을 모르고 자국의 강대함을 자긍하는 우월감에서 나온 것이었다.
이번 태평양전쟁은 국제체제에 있어 국가주의적, 국수주의적, 전체주의적 입장에서 세계질서의 건설을 목적하는 일본·이탈리아 등 현상타파의 추축(樞軸)국가와 세계주의적, 자유주의적, 개인주의적 입장에서 추축국가를 대항하는 미·영 등의 현상유지 국가의 투쟁전이다. 완미한 미영 양국은 현상을 유지하고 저 말할 때 마다 반드시 인도주의, 박애주의 하면서 동아 10억여 민중의 공존공영을 불관(不關)한 태도로 자국에 유리한 원칙론을 묵수(墨守)함에만 급급하여 오던 터로 지난 해 4월 이래의 일미회담 중에서도 미국은 항상 비겁하게도 영국과 통모하여 이기적 원칙론을 주장한 것이다. 따라서 태평양전쟁은 대동아공영권 내의 10억여 민중의 공존공영을 위한 대동아해방의 성전으로 만주제국, 중화민국
국민정부, 태국,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등 대동아의 여러 나라가 제국의 성전 목적을 철저히 양찰(諒察)하고 적극적 협력을 함으로 과거 100여 년간에 누적한 미영인화삼제(米英人禍芟除)55)에 제국이 예정한대로 단호 매진하고 있으니 동아 천지는 머지않아 다시 광명이 와서 동양인의 동양의 석일(昔日)의 자태로 환원할 것이다.
이와 같은 성전에 참가한 우리 반도 2천 4백만 민중들은 ‘정의필승’의 신념과 ‘철석(鐵石)’의 결의를 견지하고 미동도 말고 질서 정연히 각자의 직장을 전장으로 알고 성전완수에 전력을 경주하여야 할 것이다.
충성용무(忠誠勇武)한 제국 육해공군 장병은 완미한 미영 양국을 응징코자 진공(進攻)한 지 수순여(數旬餘)에 적의 근거지를 차례차례 통쾌하게 격파 또는 점령하고 멀리 하와이(布哇)를 기습하여 정예를 자랑하던 미국 태평양 함대를 삽시(霎時)56)에 재기불능의 대타격을 주고 또 영국 동양함대를 도처에서 격멸하며 말레이(馬來) 루손(呂宋), 보르네오 등지에 적전(敵前) 상륙을 단행하여 파죽지세로 적군을 섬멸하며 홍콩(香港)을 함락시키고 곧이어 마닐라를 점령하여 세계의 이목을 놀라게 하고 시시각각
55) 삼제(芟除) : 풀을 깎듯이 베어 없애 버림.
56) 삽시간. 극히 짧은 시간동안.
이 적적한 혁혁한 전과를 거두어 태평양의 제해권, 제공권을 확보하고 있지 않은가.
우리들 총후의 1억 국민은 이렇게 전선을 대동아전면에 걸친 전고(前古) 미증유의 대전쟁을 수행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평시와 별로 다름없이 안온히 각자의 생업에 정진하고 있게됨은 물론 국은이거니와 ‘전필승공필취(戰必勝攻必取)’의 신념에 불타는 충용초쌍(忠勇焦雙)57)한 육해공군 장병의 신고(辛苦)에 의함이다.
그런즉 총후국민은 항상 군관의 시조(施措)를 절대 신뢰하고 일치단결하여 신도(臣道)실천, 직(職)을 함으로써 직역봉공(職域奉公), 출정장병을 고무격려 하여야 할 것이다.
우리들은 장래할 어떠한 곤고만난(困苦萬難)이라도 결연히 극복하고 태평양전쟁의 최후승리를 단정코 획득하여야 한다. 태평양전쟁은 제국의 성쇠 뿐이라. 동아의 융체(隆替)58), 세계의 평화가 달려있으니 총후국민은 일억일심이 되어 여하한 장기전에라도 대비하여야 한다. 연칙 ‘천시불여지리(天時不如地利), 지리불여인화(地利不如人和)’ ‘유단대적(油斷大敵)’이라 한 말을 명심하여 항상 긴장한 가운데에서 상부상조하여 안으로는 ‘황태(荒怠)를 상계(相戒)’하고 밖으로는 ‘사악(邪惡)한 사상의 침투를 방지’하여 ‘필승불감’의 신념을 견지하고 ‘헌신보국(獻身報國)’을 항념하고 ‘성전목적’을 관철할 결의를 구현하여 ‘동아 영원의 평화를 확립하여 제국의 광영을 보전할 일’을 촌시(寸時)라도 망각하여서는 안 된다고 절규하노라.
<출전 : 兪億兼, 「戰必勝功必取」, '朝光' 第8卷 2號, 1942년 2월, 110~112쪽>
12. 이묘묵(李卯默)
1) 구주전쟁과 미국의 책동
제1차 구주대전의 장(場)인 땐직 자유시(自由市)와 이와 파란(波闌, 폴란드)을 연접하는 소위 ‘폴란드지대’를 둘러싼 히틀러 총통 대 영·불·폴 외교전은 1939년 8월 22,3일 경을 계기로 하여 백열화(白熱化)해진 것이다.
주(駐) 베를린 영국대사 헨드슨의 8월 23일 히틀러 왕방(往訪)을 위시하여 세 차례의회담, 그 뒤를 이어 독·폴란드 문제를 평화적 수단으로 해결해보려는 영국의 외교, 영·불의 공동선언으로 위협, 폴란드와 독일과의 직접교섭, 심지어 무솔리니의 중재까지도 수포화(水泡化)하고 급기야 히틀러는 “독일로 불인(不忍)할 폴란드의 도전과 독일 동부에 존재한 혼란 상태를 제거하기로 결심”하고 폴란드 응징의 장도(壯途)에 나선 것이 9월 1일의 일이었다. 영·불은 즉시 8월 25일 폴란드와 체결한 상호원조조약에 기하여 9월 3일 오전 11시 기한부로 독일의 폴란드 군사행동 중지를 요구한 것이다.
정한 시일에 독일의 회답이 없음으로 영국과 프랑스는 9월 4일 하오 5시 대독일 선전포고를 하였다.
57) 무쌍(無雙)의 오기로 보임.
58) 성하고 쇠함.
이것이 제2차구주대전의 폭발 독·폴란드전 당일(9월 1일) 정말(丁抺, 덴마크)이외 6개국은 즉시 국외중립(局外中立)을 선언하였으나 미국은 영·불이 선전포고한 2일후 즉 9월 5일에야 국외중립을 선언하게 되었다.
비록 미국정부로서는 중립을 성명하였으나 미국인의 대독(對獨)여론은 제1차 구주대전과 달라 영국이나 프랑스의 미국
내 선전필요의 여지가 없이 연합국 측으로 동정이 전경(全傾)하게 되었다.
이 동정의 화염이 교회교단으로 부녀구락부로 신문잡지로 영화로 라디오로 미국의 한끝으로부터 다른 한끝에 지연(芝延)하게 되었고 이 동정의 결정(結晶)인 현금, 식료품, 의료품등을 대서양 월편(越便)으로 보내는 동시에 소위 영국의 전아(戰兒)를 데려다 미국가정에서 양육하도록 된 것이다. 그러나 미국정부로 원영(援英)의 초보(初步)를 내놓기는 영·불의 대독 선전포고 1주년을 맞은 작년 9월 3일의 일이었다. 미국 대통령 루즈벨트는 의회에 향하여 “미국은 함령(艦齡)초과된 구축함 50척을 영국에 양도했고 이 대상(代償)으로 가라비안해에 있는 영국해군 근접지 약간의 조차주(租借州)를 99년 기한으로 하고 획득하였다.”고 성명하였다.
이것이야말로, C. S 폴레스너(미국인, 선박항해소설로 1938년 테잇 문학상 수령자)의 말과 같이, 미국으로 영국에 제공할 수 있는 최진품(最珍品)의 하나였다. 그 대상(代償)으로 미국은 뉴먼든펜드에서 영국령 ‘귀에나’까지의 4,500리 간에 열재(列在)한 영국령 도서(島嶼) 8개소를 미 해군 근접지로 99년간 조차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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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즈벨트 대통령은 작년 12월 27일 “노변한담(爐邊閑談)”으로 격월(激越)한 반(反)추축국 연설을 감행했고 적극적 원영(援英)의 급무(急務)와 민주주의 옹호를 강조하며 미국이야말로 “민주주의제국의 중대한 병기창”이 되지 아니하면 안되겠다고 민중에게 절규한 것이다. 이 노변한담의 뒤를 이어 올해 1월10일 대통령은 “미국 국방촉성법안”(속칭 원영무기대여법안(援英武器貸與法案))을 하원에 제출하여 약간의 수정으로 상·하 양원에 통과되고 3월 21일 대통령의 재가서명으로 효력을 발생하도록 된 것이다.
그 법의 내용의 대체는
1. 대통령은 미국국방상 절대필요하다고 인정하는 외국정부를 위하여 각 장관(육·해군 기타) 관할하에 있는 병기창, 공장, 조선소에서 각종 국방기재 제조할 사(事).
2. 그 제조한 국방기재를 매각, 양도, 교환, 대여 또는 기타 방법에 의하여 우(右) 외국정부에 공급(供給)할 사(事).
3. 우(右) 외국정부를 위하여 각종 국방기재에 시험, 실험, 수선, 장비, 재제(再製), 기타 조치를 하여그 기능을 회복케 한다.
4. 기재(器材)에 대한 국방정보를 우(右) 외국정부에 송달할 사(事).
5. 우(右) 외국정부에 여하한 국방기재든지 수출함을 허(許)하며 그 공급에 대한 지불 및 배상방법은여좌(如左)함.
영국, 중국의 군수품 주문을 미국정부의 주문형식으로 하여 생산군수품은 차입형식으로 영국에 주어 전쟁 종료 시 미사용 또는 불파손된 물자는 그대로 미국에 반환하고 사용한 또는 파손된 군수품은 물품으로 반제(返濟)할 사(事).
6. 외국대여 무기의 가격이 13억 불 이내면 의회의 승인이 불필요하고 그 액수 이상의 경우면 승인을얻을 사(事).
7. 본법은 1946년 6월 30일까지 유효함(단 상·하 의원의 다수결로 하시(何時)든지 이 법을 폐기할수 있음).
그리고 우(右) 무기대여법 실시에 필요한 예산 70억 불이 상·하 양원에 통과되어 대통령의 서명으로 효력을 발생하게 되었다.
미국은 구축함 50척의 양도로 영국의 연일 격침·상실되는 선박의 극소 일부를 보충하게 하며 따라 우(右) 원영(援英)무기대여법으로 적극적으로 자매 민주주의국인 영국을 원조하기로 되어있으니 이제 당면한 큰 문제는 무기연송(連送)에 필요한 선박문제였다. 미국은 1917년 대전시에 생긴 간첩법(間諜法) 제2장에 의하여 올해 3월부터 미국 입항중인 독일·이태리 양 교전국의 선박을 위시하여 중립국제(諸) 선(船)까지 강제상선(强制上船), 감시, 억류, 징발을 결행하게 되었다.
이 편법과 수단으로 원영(援英)정책실행상 불가결한 선박을 보충하도록 한 것이다. 동시에 미국은 중·남미 제국(諸國)을 권유하여 동일한 행동을 취하게 하여 급기야 4월 26일 화부(華府-워싱턴)에서 ‘아메리카주 제(際) 경제고문회의’를 개최하고 거기 참석한 범미 21개국 대표는 ‘재(在)미주(米州)항만의 외국선박징발이용’을 결의·결행한 것이다.
이 안(案)이 결의되던 순간 중남미 제국에 독·이태리 선박 160척이 입항 중이었다고한다.
미국 자국항에만도 올해 3, 4월 중 재항한 외국선박이 이태리 선박 2,008척 독일 선박 2척, 덴마크 선박 39척이었는데 이것을 전부 몰수하고 6월 6일 ‘외선박(外船舶)징발법’이 제정되어 미 자국 상선은 물론, 아메리카주 상업에 종사하는 외국선박감시제도 정하여 □□ 프랑스 선박 12척(9만톤), 유고슬라비아 선박 15척(7만5천 톤)도 □□을 받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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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무기가 있다! 싣고 갈 선박이 있다. 그러나 사처(四處)에서 맹렬히 활동하는 독일 유보트(잠수함)은 어찌하나?
하는 매우 □□하고도 델리키트한 문제가 남았다.
이 문제는 미국의 항용 고조하는‘해양자유’의 원칙에 기인하여 대서양중립초계제도 시행으로 해결을 짓기로 한 것이다. 초계(哨戒)(영어로는 페트롤)는 “해상의 일정한 수역 중 침략행위를 하는 함정유무를 살펴보는 것이다.”고 정의하고, 대
전(大戰) 초에는 300리 혹점(或點)에서는 천리 내에 초계를 하였다. 그러나 이것으로만 원영(援英)물자 수송에 완전·원만한 방법이라고는 루즈벨트 대통령 자신도 믿지 아니하고 이 이상의 방법이 오리라는 것을 오래전에 ‘노변한담’으로 말해둔 것이다.
미국의 국책은 마침 제1로 히틀러가 서반구 정복의 수를 연장하거나 혹은 이를 위협하는 때는 필요에 의하여 수하지역(水河地域)에서도 적극적 반격을 가하지 아니하면 안 되겠다.
또 그의 제해권 획득기도에 대하여도 단호히 반항하지 아니하면 안 되겠다.
우리에게는 미국공격의 기지로 이용될 수 있는 어떠한 지구의 일각에서라도 히틀러주의를 배제하는 일이 최대의 요무(要務)라고 주장한다.
미국의 해양초계정책은 대영물자수송원조의 역할을 하고 있으나 물자수송에 좀더 필요한 모든 수단을 취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 이것은 할 수 있는 일이요, 반드시 해야될 일이요, 또 앞으로 될 것이다. 누구나 순시(瞬時)라도 용기와 신념을 잃어서는 안 된다.
운운으로 역력히 미국의 밟고 나갈 전도를 암시한 것이다.
4월 25일 기자단과의 회견석상에서 루즈벨트 대통령은 미국의 중립초계실시의 이유로 첫째는 미국시민의 투자와 권익이 있는 곳에 독일함(獨逸艦)이나 비행기 공격의 위험이 증가된다는 것과 둘째로는 미국조차용 해군근거지가 최근에 생겨나는 것을 설명하였으나 누구나 이것을 그 표기가(表記價)대로 믿을 수가 없었다.
독일해군최고당국자는 이 소위 중립초계는 대영공급(對英供給)확보책으로 적성행위인 것을 지적하는 동시에 대담한 경고를 발하였다.
1. 독일은 전시 금제품(禁制品)을 전쟁지역에 운수하려는 미 선박을 실력으로 배제함.
2. 미국이 초계제를 기용(起用)하면 독일은 실력으로 이 적성행위를 제거할 권리가 있음.
3. 무허가로 항해하는 중립국 선박은 적성이 있다고 인정하고 무경고 격침함. 운운이었다.
미국정부 최고당국자들은 이 경고를 전후하여 ‘히틀러 타도’와 ‘해양자유’를 고조하여, 국내인심을 선동하며 ‘국가비상시선언’을 발포하여 미국국방 최대한도의 강화를 절규한 것이다.
미 정가(政家)의 논조가 얼마나 감정적이라는 것을 제시하기 위하여 미 육·해군장관의 연설의 일부와 소위 ‘무제한 국가비상시선언’ 전문을 인용하기로 한다.
스티븐슨 육군장관의 5월 6일 밤, 라디오 방송요지
독일의 대영봉쇄는 마침내 효과를 발휘하여 영국은 미국에서 가는 군수품 수취에 곤란을 느낄 뿐 아니라 식료품의 부족을 벌써 느끼기 시작한다. 오늘의 독일은 1917년 동양(同樣)으로 무모(無謀) 비인도주의적 수단으로 대서양상 미국 통상자유를 박탈하여 미상선의 항행(航行)을 위협할 뿐 아니라 봉쇄구역을 서반구에 확장하여 미 상선의 출입까지를 금지하게 되었다.
히틀러는 국제법을 유린하고 그 야만행위를 서반구까지 □□하려고 한다. 여차한 독일의 무모활동 앞에는 미국으로 오늘까지 취해온 대영원조는 불충분하다. 군수품의 영국도착을 확보하기 위하여는 미국의 해군력을 즉시 이용하지 않으면 안된다.
눅스 해군장관의 5월 7일 연설의 요지
우리는 방금 무서운 위험에 빠져있다.
우리의 유일한 안전한 길은 영국의 해군력 보급에 있을 뿐이다.
나치스의 승리는 우리가 아는 문명에 최악의 다침을 의미함이며 영 해군의 멸망은 즉시 우리 해군을 고립시키어 일방으로는 우세한 독·이태리 연합함대를 대하게 되고 타방으로는 강한 일본해군의 위협을 받게 된다. 미국은 영국해군력을 결코 멸망케 할 수 없다. 만일 대서양을 연결하는 ‘함선의 교(橋)’가 없어진다면 우리들은 과연 어떻게 될 것인가를 상상해보라.
위 두 장관의 연설의 뒤를 이어 지난 5월 27일 ‘노변한담’으로 미국의 무제한국가비상시를 여좌(如左)히 선언했다.
1939년 9월 8일 구주전쟁 발발의 사태에 비(備)하는 의미로 제한부 국가비상시상태가 선언되었고 그 선언에 의하여 미국 국방충실을 위하여는 평시에 가진 제한 내에서 모든 수단을 다 강구해왔다.
그러나 그 후, 정세는 추축국이 당초 천명한 전쟁목적에 머물지 아니함이 명백해졌다.
즉 추축국가는 현존한 민주주의 체제를 전 세계에 긍(亘)하여 복멸(覆滅)하고 그 육·해·공군의 저항력을 파괴시킨 후 전 세계의 인종과 경제를 장악하려고 한다. 이렇게 증대해가는 위협에 대하여 미국이 무관심하다는 것은 진실로 위험한 일이라고 안할 수가 없다. 그리고 여기에 대한 당연한 대책으로 안전보장을 위하여 미국과 서반구는 오늘까지의 평화사태를 탈출하고 서반구에 대한 여하한 적성세력의 포위 혹은 미국영토 내지 사회에 외국인 스파이의 약탈적 침입일지라도, 서반구에 대한 침략적 기지 설치와 동양(同樣)으로 이것을 즉시, 또 결정적으로 배제 대항할 수 있는 든든한 무력을 확보하지 아니하면 안 되겠습니다. 그러므로 나, 프랭클린 펠레노 루즈벨트 미국 대통령은 미국이 무제한 국가비상시상태에 직면한 것을 선언한다. 이 무제한 국가비상시상태는 서반구 어떤 부분에 대한 경우든지 모든 침략을 의도하는 행위, 혹은 위협을 언제든지 배격할 수 있는 기초위에 미국의 육·해·공군이 나란히 민간의 국방력을 건설하자는 것을
선언함이다.
이 선언과 병행하는 것은 고도국방과 경제적 전시체제를 수립하는 것이다. 미국은 준(準)전시시대에 처하면서도 작년 10월 강제징병법을 채용하여 전미(全米) 1,600만인이 등록되었고 목하(目下) 80만의 신병이 군사훈련을 받고 앞으로 적어도 200만의 육군병원(陸軍兵員)에게 최근대적 장비를 할 터이며 1946년에 완성을 목적으로 태평, 대서양 함대를 위한 40억 불의 예산으로 2,000척의 건함(建艦)계획이 진행 중이며 공군도 비행사 훈련이 연 2만 명이요, 연산(年産) 5만대의 항공기 생산력을 갖게 할 계획으로 적극적 군비확충을 기도하는 것이다.
이 군비가 얼마큼 신속하게 대규모적으로 되어간다는 것은 국방비 예산에 표현된 숫자로도 짐작할 수 있는 것이다.
작년도 예산이 16억 불에 비하여 금년도 미국 국방비는 160억 불(邦貨 800억 원)이라 한다.
이 방대한 군사예산을 원활히 소화시키기 위하여 작년 5월에 국방회의와 국방자문위원회를 설치하여 국방계획과 경제동원의 스타트를 군호(軍號)하였다. 국방자문위원회는 국방의 계획화와 그 지도의 최고위원회요, 이외에 대통령 직속인 O.P.M. 즉, 생산관리국이 있어 군수품의 우선적 생산을 명하고 또 필수품의 징발과 구입, 가격통제의 임무에 당하고 있다. 이 기관들은 협의의 국방을 맡은 것이나 그 외에 긴급 국방조정국(O.E.M.)이 있어 그 속에 원영부(援英部), 중앙관리부, 정보부 3부를 두어 대통령 관방을 통하여 대통령에게 직속된 것이 있고 그 다음으로 경제국방국이라는 것이 있어 성질로는 대통령의 자문기관이나 실제로는 각성(各省) 각보(各補)국방기관의 활동을 통일하며 연락을 원활케 하는 강력
중앙종합기관이 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이 경제국방국은 미국무역위체, 대외투자, 크레디, 선박, 국제통신, 특허권 및 재미외국자산 등 경제전의 무기 일절과 그 활동을 통일, 조정, 감독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작년 4월 10일 덴마크, 노르웨이(諾威)를 비롯하여 독일에게 점령된 제국(諸國), 다음으로 독일·이태리, 마침내 아국(我國) 재미(在米)자금동결까지도 이 기관의 소속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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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7월 7일 미 대통령 루즈벨트는 의회에 특별교서를 보내 미국해군부대가 같은 날 정오에 아이슬란드도(島) 영주(迎駐) 상륙한 지(旨)를 발표하였다. 그 교서의 요지를 보면 미 해군은 같은 섬에 있는 영국수비대를 보충교체하기 위하여 진주했다. 이것은 미국 대통령과 동도(同島) 수상 요한슨 씨 간에 완전한 양해가 있어 되었다.
미국정부는 나치스 세력이 대서양의 전초지점을 서반구 공격용 해·공군기지로 점령한 위험을 간과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일단 이 섬이 나치스 손에 들어가는 경우면 제1로 그린랜드, 북미대륙의 북방지역이 위협에 폭로가 되고 제2로 대서양 북방항로가 위험에 빠지고 제3으로 원영(援英)무기수송로가 위협을 당하게 된다고 한다. 미국의 동도(同島) 진주로 대서양의 주권소재 현황에는 하등 변경이 없겠다는 것을 언명했다.
이 조치는 미국 내외에 일대 센세이션을 야기한 행동으로 미국신문은 전적으로 루즈벨트 대통령을 지지했다.
뉴욕·헤럴드·트리뷴지는 “이번 루즈벨트 대통령의 조치는 순연(純然)한 방위적 행동으로 동적(動的)방위다.
즉, 루즈벨트 대통령은 이번 행동으로 서반구 동적 방위 단순히 그린랜드와 북미의 보호뿐 아니라 의회와 국가가 미국보전의 기초인 ‘대영군수품의 불단(不斷)의 류(流)’를 확수(確守)할 절대적 필요한 방위인 것을 명백한 진리라고 말하는 것이다.”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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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은 이번 대전 당초에 국외중립을 선언했다. 미국은 전통적으로 역사적으로 보아 일반 국제공법에서 말하는 중립보다도 더 엄중한 중립법을 기용(起用)·시행해온 나라다. 그러면 여태까지 취해온 미국의 정책-구축함 양도, 영해군기지 조차, 외국선박 징발, 원영(援英)무기대여, 초계, 외국자금동결, 아일랜드 진주 등-을 보아 과연 미국은 중립국인가를 질문하는 사람이 미국에도 없지 않은 것이다.
설혹, 미국이 아직도 국외중립국이라면 지금까지 해 온 모든 행동의 구실과 변명은 어디에 있는가?
그리고 미국은 이 류(類)의 중립을 지켜 계속해갈 것인가 또는 참전을 할 것인가가 매우 흥미있는 문제이다.
우리 평론계의 한 분으로 요네다(米田實)는 (참외교시보(參外交時報) 제88호) 1907년 제2차 헤이그 평화회의에서 결정된 ‘해전과 중립국의 권리·의무에 관한 조약’ 제6조절(條節) “중립국은 여하한 명의
(名義)를 가짐에 불문하고 교전국에 대하여 직접 또는 간접, 군함, 탄약 또는 일체의 군용재료의 교부(交附)를 불득(不得)함.” 하는 조목하에 미국의 구축함 양도, 초계, 대영무기대여 등은 명연(明然)한 비중립국의 소위요 국제공법의 권위자의 일인(一人)인 오펜하임의 ‘국외중립국의 공평의무’ 정신에 불합치된다 하여 철두철미하게 미국의 소위는 일 교전국의 것이라 주장하며 기타 대다수의 사람도 미국은 군사적으로 경제적으로 벌써 참전했다고 단정을 내린다.
미국으로는 대독전쟁의 정식유고(正式有告)가 있기 전까지는 어떠한 종류의 또는 어떤 수단·방법으로의 원영책(援英策)이든지 간에 미국의 국책이요, 미국의 제일선 방위요, 전 인류의 문물제도와 이상을 옹호하는 천부의 사명으로 믿는다. 물론 이것은 영국의 문화가 같고, 피가 같고, 정치이상이 같다는데서 생기는 동정-극도의 맹일적(盲日的) 동정-인지는 모르나 일반적으로 대(對)영·미인의 태도는 극히 감정적이라는 것만은 사실이다.
그렇다면 미국인의 독일에 대한-좀 더 협의적으로 말하면 히틀러에 대한-태도가 극도의 감정적인 것도 사실이다. 이 자연적 감정을 싸두르고 표면에 내세운 이론화한 대(對) 제2차 구주대전의 미국의 국책은 무엇인가? 이것은 물론 영·미공동선언의 8개 조목이다.
이 공동선언에 논급(論及)하기 전에 미국의 변칙행동을 변호하는 법칙근거를 탐구하자면 제1로 켈록·뿌리안 부전조약(不戰條約)59)에 있다 한다.
즉 만일 부전조약국 중 한 나라가 이 부전조약을 범할때는 다른 조약국 등은 그 침략국에 대하여 평상시의 중립법 이행의 의무가 없어지고 침략을 받은 나라에 재정, 물질, 군수품을 공급할 것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소위 1934년 9월 부다페스트에서 개최되었던 만국국제법학회의 ‘부전조약해석’문으로 미국국제학계에서는 시카고대학교 교수 겸 해군성법률고문인 퀸시우 라잇 씨를 위시하여 고집하는 것이다. 그리고 한걸음 더 나아가 최근에 보는 상선 호송이나 상선 무장까지라도 전쟁의 행위는 아니요, 오직 국제법에서 말하는 또 미국이 제1차 대전 시에도 시행한 무장중립이라 한다. 이 무장중립은 1780년과 1800년에도 ‘자유항해와 자유통상’의 원칙을 시인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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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은 과연 참전하는가? 미국 내에 참전까지 대중을 선동하기 위하여 여러 가지의 선전재료를 돌려왔는데 그중에 중요한 것의 몇 가지를 들면 히틀러의 승리는 앵글로색슨의 문화와 세계의 문화에 최종막을 닫는 셈이다.
영국의 해군이 파멸되면 히틀러의 공격의 위험이 즉래한다. 민주주의를 옹호하자.
폭력을 배제하자, 타도 나치즘, 영국은 우리의 싸움을 대신 싸운다, 영국원조를 철저히 하자 등이다.
대전의 대세가 연합군 측이 심히 불리하던 한동안은 히틀러가 미국을 내습(來襲)하느냐 못하느냐의 문제로 매우 불안을 느끼는 점이 있으며 이로 각 언론기관이나 육해군 측 전문가들의 이론(異論)도 분분하던 것이다.
대중용이요 간단하나마 으리벌쓰·다이제스트 제38권 228호에 실린 조안 티 폴런의 ‘히틀러가 미국을 내습할 수 있을까?’하는 논문은 전문가의 의견을 종합한 것으로 전적으로 독일의 미국상륙작전은 불가능한 것으로 돌리고 따라서 이런 류의 송구(悚懼)로 참전을 주장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민주주의 옹호하자!”는 표어는 미국참전여론 선동에 적지 않은 위력을 발휘하나 여기에도 극단 고립파로는 박박(駁撲)이 없는바가 아니다. 예를 들자면 지난 5월 23일 ‘미국제1협회’ 뉴욕대회 석상에서 린벅은 고립파의 입장을 밝히며 정부의 ‘민주주의 옹호’로 참전까지 유도하는 정책을 제지 없이 논박한것이다.
그 연설의 요지를 들면 첫째, 미국의 운명은 미국 자신이 결정할 것이고 구주대전과 연결해 생각할 것은 아니다.
둘째, 구라파야 어떤 나라가 지배하게 되든지 그로 인하여 그 국민을 대서양 피안으로 파견할 것은 아니다. 셋째, 민주주의라는 것은 전쟁으로 말미암아 생기고 옹호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넷째, 국외의 민주주의를 보호하기 위하여 국내의 민주주의를 상실할 것은 아니다. 운운으로 철두철미 불간섭, 미국제일, 국내민주주의 옹호론을 고창한 것이다.
“영국의 싸움은 우리의 싸움!”이라는 슬로건은 무엇보다도 유력하게 대중의 지지를 받은 국책이다.
조지 갈루프 박사의 미국 여론조사에 의하면 고(故) 체임벌린 영국 수상과 히틀러의 뮌헨회의 직후, 미국대중의 55퍼센트가 무기, 비행기, 기타 군수품을 전쟁이 터지는 경우면 영국으로 수송하자는 데 찬성했다고 하리만큼 원영책(援英策)만큼은 극단의 고립파를 제한 외에는 다 지지하는 것이다.
원영(援英)이라는 것을 보통 양키의 특징이라고 보는 ‘이기적’ ‘타산적’으로만 생각해서는 오늘의 미국인의 대영원조의 기분을 모르는 것이라고 한다. “사갈 돈이 있든 없든 외상으로 가져간 물건 값을 물게 되든지 못59) 1928년 8월 27일 프랑스의 파리에서 영국·미국·프랑스 등 15개국에 의하여 체결된 전쟁포기에 관한 조약.체결 당시 프랑스 외무장관 A.브리앙과 미국 국무장관 F.B.켈로그가 주도하였다 하여 ‘켈로그-브리앙조약(Kellogg-Briand Pact)’이라고 한다.
되든지”이라는 정신으로의 원영(援英)이라 한다. 이런 정신의 고취를 목표한 유명한 여류시인 빈센트밀레이의 “영국은 이제는 도서(島嶼)가 더 없다”라는 시는 대인기를 끌고 있다고 한다.
전 대통령 후버씨도 원영(援英) 찬성자의 일인으로 고립파와 참전파와의 중간지위를 차지하고 있다.
그의 지난 6월29일 방송연설에 의하면 “
(1) 영국과 중국에 모든 원조를 주라, 그러나 전쟁지역에 군대는 파견 말 것.
(2) 서반구 방위를 위하여 충분히 무장하라, 그러나 무장이 완성되기까지는 전쟁을 일으키지 말라.
(3) 평화와 전쟁의 결정권을 의회에 주라. (4) 미국은 타국의 자유를 강제하지 말라.
(5) 미국 국경 내자유개선에 노력하라.
(6) 미국은 평화회의에 출석할 그 날을 위하여 준비하라. (
7) 미국은 전쟁권외에
있어 확보할 수 있는 무비(無庇)의 실력으로 평화회의에 임하도록 하라”가 소위 후버 씨의 ‘미국불패상태유지의 7개 조목’이다.
오늘 미국 위정자들의 진로는 어디로 향하여가는 것인가? 그들은 영국을 원조하기 위하여는 전쟁이아닌 그 외 모든 방법을 다한다고 하였다. 이를 위하여는 국내 전시체제도, 무기대여법도, 외국선박징발령도, 방대한 국방비도 외자동결(外資凍結)도, 미도(米島) 진주도 다 기성사실로 오로지 원영(援英)에 매진할 따름이다. 원
영(援英)을 더 한층 충실히 함에 따라 히틀러의 경도(傾倒)를 하루바삐 촉진시키려고 할진대 호송도 상선 무장도 중립법 개정도 필연의 것이다. 이 모든 것을 독일이 인견(忍見)하면 별문제나, 실력으로 배제하려고 한다면 이제 생기는 정미(正味)결과는 전쟁 그것 뿐일 것이다.
“역사는 반복되지 않는다”하나 루즈벨트가 밟는 이 길은 고(故) 윌슨의 제2기 임선(任選) 후의 길과 방불(彷彿)하다 아니할 수가 없다. 국민을 부지불식간에 유도하여 중립에서 무장중립, 무장중립에서 전쟁이라는 보조로 점진적으로 인도하되 최종계단에 와서는 일을 벌써 기성사실화 하여 국민이나 의회가 달리 피할길이 없게나 하지 않을까 한다.
그러면 미국의 참전목적은 어디 있을까? 이것은 물론 지난 8월 14일 대서양에서 영·미가 발표한 공동선언에 있다 할 것이다. 즉
(1) 영·미 양국은 영토적 기타의 확장을 인정치 않는다.
(2) 영·미 양국은 관계 제국민의 자유의사에 합치 아니하는 영토적 변경이 생(生)함을 욕구치 아니한다.
(3) 영(英)과양국은 모든 국민이 그 생존의 정치형태를 선택하는 자유로운 권리를 존중하고 폭력으로써 박탈당한 그 주권과 자치권이 □□됨을 원한다.
(4) 영·미 양국은 모든 국민의 기(其) 경제의 번영을 위하여 필요로 하는 무역과 원재료를 균등한 조건으로 획득할 보증을 줌을 당연한 의무로써 협력한다.
(5) 영·미양국은 모든 국가가 그 경제적 이익과 개인과 사회의 안전보장을 목적하고 완전한 경제적 협력을 실행
하기를 요망한다. (6) 나치스 독일의 폭정을 타도한 후, 영·미 양국은 모든 나라에 자국이 영토 내에서 안전하게 생활할 수 있는 방도를 부여하고 동시에 모든 국토의 인민은 협위(脅威)와 결핍이 없이 자유롭게 생활할 수 있는 보장을 여(與)함과 여(如)한 평화수립을 희망한다.
(7) 이러한 평화는 모든 인민으로 하여금 공해(公海)와 대양을 하등의 간섭이 없이 항해할 수 있는 기저가 됨을 요한다. (8) 영·미 양국은 세계의 모든 국가가 현실적 동시에 정신적 이유도 폭력의 이용을 포기할 것임을 확신한다. 육해공의 군비가 자국의 국경 외에서 협위를 주고 또한 쓸 만한 위험이 있는 국가에서 □용되는 □□□의 평화는 기대할 수 없으며 영·미 양국은 일반안전보장의 광범 차(且) 항구적 제도의 확립까지 여기(如期)한 국가의 군비철폐는 불가결임을 믿는다. 영·미 양국은 평화를 사랑하는 국민으로부터 군비의 압도적 중하(重荷)를 경멸케 하기 위하여 실제적 수단을 원조하고 조성하고자 하는 바다.
이 공동선언은 너무나 추상적이요, 이상적이다. 미국의 위정가의 진정한 고백을 구할 수가 있다면 아마도 좀 더 현실적이요, 좀 더 이기적일 것이다. 커렌트·히스토리 올해 6월호에 기재된 커씨의 「미국의 장래」라는 논문은 미국이 왜 싸워야 되느냐 하는 물음에 제일 정직한 대답이 있는 것 같다. 즉, ‘팍스아메리카나!’ 상언(詳言)하면 옛날 로마 평화시대가 있었고 다음 대영제국의 평화시대가 있어왔으니만큼 이제는 미국 평화시대의 서광이 떠오른다는 것이다. 그의 논조에 의하면 이 제2차 세계대전 후 세계의 패권자는 독일도 영국도 아니고 미국이라 한다. 이것은 피할 수가 없는 역사적 사명이라 한다.
서반아(西班牙-스페인)는 무적함대가 깨진 후로 대영제국의 평화시대가 왔고 이 대전에서 독일을 물리치는 미국은 세계에 ‘팍스 마리카나’를 확립하는 미국이라 한다. 그렇다면 해상 영·미 양 거두의 회견은 ‘팍스 브리태니카’를 ‘팍스 아메리카나’로 전환하는 일종 풍자적인 세사적(歲史的) 회견은 아니였든가?
1941년 10월 4일 밤
<출전 : 李卯默, 「歐洲戰爭과 米國의 策動」, '春秋' 第2卷 10號, 1941년 11월, 48~57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