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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아름다운 세계 배낭여행 원문보기 글쓴이: 바이칼3
일본 1 - 일본의 건국 신화와 김해 가야인이 세운 고대 왜국(倭國)
조선(朝鮮) 과 일본(日本) 은 전혀 다른 글자 처럼 보이지만 조선(朝鮮)의 朝(조)는 “아침
조” 이고 鮮(선)은 “고울 선” 이니 “빛나다, 선명하다” 는 뜻으로 아침 해가 비치는
나라를 뜻하며, 일본(日本)의 日(일)은 “날 일” 자로 해를 뜻하고 本(본)은 “근본 본”
자로 뿌리를 뜻하니 “해의 뿌리” 라.... 그럼 해뜨는 곳, 즉 “해뜨는 나라” 라는 뜻 입니다.
다시말해 조선(朝鮮) 과 일본(日本)은 “해뜨는 나라” 라는 같은 뜻이니, 중국어와 영어는
어순이 주어 + 동사 + 목적어인데 비해, 우랄알타이어인 몽골과 한국어 및 일본어
는 주어 + 목적어 + 동사로 어순이 같으니..... 옛날에 고유 문자는 없었지만 해를
숭상하던 기마민족이 해뜨는 곳을 찾아 동쪽으로 진출해 세운 나라 라는 생각이 듭니다.
2천년전 한반도인이 청동기와 벼농사 기술을 가지고 일본으로 건너갈 무렵 일본 원주민인
조몬인들은 신석기시대로 이주민들이 야요이 문화를 이루어 왜 소국들을 건설했는데,
유홍준 전 문화재청장은 “한국인들이 건너가 일본을 세웠다고 해서 한국인들이 우쭐댈
일이 아니고, 그렇다고 일본인들이 열등감을 느낄일도 아니니 저 한반도에서 건너간
사람들은 이후 일본인화 되었고 현재의 한국인들과는 다르기 때문” 이라고 말했습니다.
(1) 일의대수(一衣帶水) 일본
흔히 일본의 왕(천황) 은 한국계라고도 하고.... 왜국은 고대에 김해가야인이 건너가 건국
했다고도 하며 백제가 문자와 농경, 직조 방법등 찬란한 문명을 전해주었다고도
하지만, 우리에게는 왜구의 시달림과 임진왜란 및 일제 식민지배의 아픈 기억이 있습니다.
일본 면적은 38만km² 로 한국10만km²의 4배에 가까우며 인구는 1억 2천 630만으로 한국 5천 160만
보다 두배 반인데 일의대수(一衣帶水) 라 했듯 멀고도 가까운 나라 일본은 한일어업협정, 독도문제,
무역적자 및 2002년 월드컵 공동개최, 일본문화 개방과 한류(韓流) 등 매일같이 부딪히는 대상 입니다.
일본과 한국의 관계 및 일본의 역사, 문화등을 정확히 알고 슬기롭게 대처해 21세기 미래를
헤쳐갈 동반자가 되는게 좋겠고.... 설사 미래에 서로 전쟁을 한다고 쳐도 “지피지기
면 백전불태” 라고 했으니 이웃나라 일본을 알면 전쟁에서 이길 가능성이 높아진다고 봅니다.
기원전 4천년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에서 인류 최초의 문명이 일었났으니 메소포타미아의 천지창조
신화에는 태초에는 하늘도 땅도 이름이 지어지지 않고 민물의 신 아프수와 바닷물의 신 티아마트
둘 뿐이었는데, 이 둘로 부터 하늘신 아누와 에아와 마르두크가 태어났으니 마르두크는 티아마트
를 물리치고 주검을 둘로 나누어 반쪽을 하늘의 지붕으로 삼고 나머지 반쪽은 땅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리스 천지창조 신화에는 최초로 무한한 공간인 카오스가 생기고..... 땅 가이아와 영혼을
부드럽게 하는 사랑 에로스가 나타났으며, 가이아는 산맥의 신 오레를 만들고 바다의
신 폰토스와 하늘의 신 우라노스를 낳았으며 가이아는 우라노스와 관계하여 크로노스
를 낳았으니 가이아가 크로노스를 시켜서 우라노스의 물건을 자른후, 크로노스가 약속을
지키지 않자 가이아는 크로노스의 아들 제우스를 도와 올림포스 신들의 시대를 열었습니다.
중국의 창조신화는 혼돈 상태에서 알이 생겨났고 알의 안에 잉태된 반고가 잠에서 깨어
도끼를 휘둘러 하늘과 땅을 가른 후에, 하늘을 손으로 받치고 땅을 발로 누르면서 세상
을 넓혔고 1만 8천년 동안 지탱했으니... 그 동안 하늘과 땅은 벌어지기 시작하며
반고의 몸도 커지면서 결국 9만리나 벌어졌으니, 반고가 늙어 죽을 때 숨은 바람과
구름으로 눈은 태양과 달로 몸뚱이는 산맥으로 피는 강으로 털은 풀과 나무로 변합니다.
우리나라의 단군신화는 환인(桓因)의 서자 환웅(桓雄)이 인간세상을 구하고자 하니 천부인
(天符印) 3개를 받아 환웅이 무리 3천을 이끌고 태백산(太白山) 꼭대기 신단수(神壇樹)
밑에 내려와 신시(神市)라고 했으며 풍백(風伯), 우사(雨師), 운사(雲師)를 거느리고 곡(穀),
명(命), 병(病) 등 무릇 인간의 3백 60여 가지 일을 주관하고 인간세상에 살며 다스렸습니다.
이때 곰 한 마리와 호랑이 한 마리가 굴에서 살면서 신웅(환웅)에게 빌기를, “원컨대 변화하여
사람이 되었으면 합니다.” 라고 하니 신웅이 신령스러운 쑥 한 타래와 마늘 20개를 주면서
이르기를 “이것을 먹고 백일 동안 햇빛을 보지 아니하면 사람이 될 것이다.” 라니 삼칠일(三七日)
곰은 여자의 몸이 되었으니 환웅과 결혼해 단군을 낳으니 평양성에 도읍해 조선이라 했습니다.
(2) 일본 건국신화
일본의 천지창조 신화는 우리나라에 1285년에 편찬된 일연의 삼국유사와 유사한 책인 712년에
오노 야스마로(태안만려, 최인호씨는 백제 피란민의 아들이라고 함?)에 의해 편찬된 고지키
(古事記 고사기) 에 나오며, 또 우리나라에 현존하는 최초의 역사서인 1145년 고려 김부식의
삼국사기 같은..... 720년에 도네리 친왕이 편찬한 니혼쇼키(日本書紀 일본서기) 에도 나옵니다.
우니나라 단군신화에 해당하는 일본 천지창조 신화는 처음에 다카마가하라에서 고토아마쓰카미,
가미요 나나요라는 신이 태어났고, 후에 이자나기와 이자나미신이 태어났으니 이자나기
와 이자나미는 아시하라나카쓰쿠니에 강림해 결혼하여 일본 열도를 형성하는 오야시마
(大八洲)를 만들었고, 다양한 신들을 낳았지만 불의 신 가구쓰치를 낳던 이자나미가
가구쓰치의 불의 기운에 의해 타 죽으니...... 이자나기는 이자나미를 찾아 황천으로 떠납니다.
이자나미는 이미 황천의 음식을 먹은지라 이승으로 데려올수 있는 기회를 놓쳐버린데다가 이자나미 또한
흉하게 변해버렸으니, 경악한 이자나기는 도망쳐 게카레를 피하면서 미조기(禊)라는 의식을 치렀으니
이 때에도 여러 신들이 태어났는데... 왼쪽 눈을 씻으면서 태어난 신이 태양의 신 아마테라스, 오른쪽 눈
을 씻으면서 태어난 신이 달의 신 쓰쿠요미, 코를 씻으면서 태어난 신이 폭풍의 신 스사노오 였다고 합니다.
스사노오는 이자나미가 있는 저승에 가고 싶을 때마다 울부짖어 폭풍을 일으켰기 때문에 천지에 막대한
피해를 끼쳤으며 아마테라스에 의해 다스려지던 다카마가하라에 까지 닿았으니... 아마테라스는
스사노오가 다카마가하라를 빼앗으려는 것으로 오해하고는 활과 화살을 들고 스사노오를 맞이했는데,
스사노오는 오해를 풀기 위해 자신이 지니고 있던 물건에서 신을 만들어내서 결백을 증명(?) 하였습니다.
그러자 아마테라스는 스사노오를 용서했지만 스사노오가 다카마가하라에서 아마테라스의
벼 논을 짓밟고 주거에 똥칠을 하므로.... 이에 수치심을 못이긴 아마테라스는 아마노
이와토라는 동굴에 숨어버리니 세상은 어둠 속에 잠기었고 신들은 곤란에 빠지게 됩니다.
그러나 여러 신들의 지혜에다가 나라 사람들이 근심에 잠겨 아마테라스가 숨어버린
동굴 앞에 제상을 차리고 춤추고 노래하며 여신을 불렀다고 하니..... 아마도 이것은
고대 일본에 벼농사를 시작하였다는 것과 일식에 대한 기억이 합친 것으로 보입니다?
스사노오는 그 책임을 물어 인간 세상으로 추방되어 이즈모노쿠니에 강림하였으며 바다를 건너가
한반도에서 머리 8개 달린 괴수 야마타노오로치(용, 이무기) 의 꼬리속에 감추어진 검을 가져
왔다 하는데..... 이른바 곡옥, 동경과 더불어 일왕(천황)을 뜻하는 삼종의 신기가 되었다고 합니다.
다카마가하라에 있던 여러 신들은 아시하라나카쓰쿠니를 지배할 존재는 오로지 아마테라스의 자손
이라고 하여 몇명의 신을 이즈모에 내려보냈으니, 오쿠니누시도 자신을 위한 궁전 건설을 해주는
조건으로 자신의 나라를 양보할 것을 약속하였는데.... 이 궁전은 후일 이즈모타이샤(출운대사)가
되며, 아마테라스의 자손인 니니기는 아시하라나카쓰쿠니 평정 임무를 받아 규슈 휴가에 강림합니다.
태양의 여신 아마테라스계의 “이세의 신사” 외에 스사노오의 “이즈모대사” 도 두번째 큰(오래된) 신사로
모시는 것으로 봐서 두 계열이 합쳐졌다 보는데 일본 원주민은 신석기시대 조몬인이니 BC 3세기 부터
한반도에서 볍씨와 청동기를 가진 사람들이 일본에 건너가 야요이 문화를 이루고 왜 소국을 건국하니,
가야계인 아마테라스 후손과 신라계인 스사노오 후손이 싸워 가야계가 일본을 건국한 것으로 여겨집니다?
(3) 천손 니니기의 하강은 김해 금관가야 김수로 신화?
태양의 여신 아마테라스의 손자 니니기가 하늘로 부터 다카지호다케 (高天穗岳 고천수악) 구시후루봉에
내려왔다고 하는데.... 오늘날 남큐슈 지방에 해당하며 근처에 가라쿠니다케(韓國岳 한국악) 가 있으니,
곧“구시후루”는 김수로왕이 김해 “구지봉” 에 내려왔다는 건국신화를 일본에서 차용한 것이라고 봅니다?
또한 니니기가 땅에 강림한 후 “이곳은 한국(韓國)이 보이니 좋은 땅이고 가사사의 곶
과도 통하여 아침해가 비치는 나라, 저녁 해가 비치는 나라이다! 라 말하고는 반석
에 기둥을 세우고 궁궐을 지어 살았다“ 라고 말한 것이나..... 북쪽의 가장 높은 산
이름을 가라쿠니(韓國岳 한국악) 라고 부르는 것은 그가 "가야 사람" 이라는 뜻입니다?
규슈 가고시마현과 미야자키현의 경계에 에비노고원이라고 불리는 기리시마(霧島 무도) 다카지호다케
(高天穗岳 고천수악) 북쪽에 최고봉 가라쿠니다케(韓國岳 한국악)는 왜국으로 이주해온 김해 가야인
들이 자신의 고향땅이 바라보이는 산이라고 해서 가라쿠니다케 韓國岳(한국악) 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문자가 없었던 고대 한반도는... 오래토록 말로만 지명이 전해지다가 훗날 적국인 원수의 나라 이민족
중국에서 한자가 전해지니, 가야를 뜻하는 말은 가야(加耶·伽耶·伽倻)·가라(加羅)·가량(加良)·가락
(駕洛)·구야(狗邪· 拘邪)·임나(任那), 한(韓)으로 썼으니 모두 같은 뜻으로 가야 = 가라 = 한(韓) 입니다.
고구려 시조도 주몽(朱蒙 삼국사기, 삼국유사, 동국통감, 중국 사서), 추모(鄒牟 삼국사기,
광개토왕릉비, 모두루 묘지) 2가지에다가..... 또 삼국사기에는 중모(中牟) 와
중해(衆解), 상해(象解), 삼국유사에 추몽(鄒蒙), 일본서기에 중모(仲牟), 일본의 신찬
성씨록에는 주배(朱背) 와 도모(都慕) 로도 적힌건 우리나라가 문자가 없었기 때문 입니다.
(4) 조몬 문화와 야요이 문화에 왜(倭)
일본 조몬 문화는 BC 3000년경 부터 BC 4세기 까지 신석기시대 일본 원주민의 문화로 토기의 표면
에 새끼줄 형태의 무늬가 있어 붙여졌다고 하며, 야요이 문화는 BC 3세기경 큐슈에서 발생하여
본토의 긴키지방으로 퍼져나갔으니 한반도로 부터 이주한 도래인들에 의해 영향을 받았다고 보여
지는데, 농업(벼농사)이 시작되었고 초기에는 청동기 그리고 후기에는 철기가 함께 전파되었습니다.
제럴드 다이아몬드 는 퓰리처상 수상작 "총,균,쇠" 증보판에 "일본인은 어디서 왔는가" 를
수록했으니... 2,000년전 야요이시대에 벼농사등 선진 농업기술을 가지고 이주한
한국인이 일본인의 조상이며 고고학, 분자생물학, 인류학과 언어학 연구를 통해 한국인
과 일본인은 “유전자 DNA” 가 거의 같으니 성장기를 함께 보낸 “쌍둥이” 같다고 했습니다.
오사카대 고하마 모토쓰구 교수는 1949년 부터 수만명의 유골을 조사했으니 이른바 일본인의 원류를
밝히기 위한 프로젝트인데, 그 결과 일본 원주민인 조몬인과 한반도 도래인의 비율이 “1: 8.6”
이라고 밝혔으니 오늘날 일본인의 피 속에 원주민인 “조몬인의 비율은 겨우 10%”라는 얘기인데,
조몬인들이 신석기문화로 벼농사를 모르니 생산력이 낮은지라 인구 자체가 아주 적었기 때문 입니다.
현대 일본인의 혈통 비율 중에서 원주민인 조몬인은 3%~13%를 차지하니 한반도등 도래인인
야요이인은 87%~97% 를 차지하는데, 특이 예로 홋카이도 아이누인의 혈통 비율 중에서는
조몬인은 66~79%를 차지하며..... 류큐인의 혈통 비율 중에서 조몬인은 27% 이니 한반도
에서 온 사람인 다수의 야요이인이 소수인 일본 원주민인 동북쪽으로 밀어낸 결과로 보입니다?
3세기 중엽에 갑자기 언덕 꼭대기에 전방후원분 형태의 수혈식(竪穴) 석실인 거대한 고분이 조성되기
시작하였는데 한반도로 부터 도래 집단의 무덤일 가능성이 높으니, 신라 금관 장식인 곡옥등이
발굴되며 그후 고분은 평야지대에 흙을 파서 산처럼 보이는 봉분을 만들고 해자를 두른 양식으로
“경주왕릉의 10배”에 달하는 상상을 초월하는 거대한 규모의 횡혈식 석실형태의 고분이 축조됩니다.
왜(倭)는 본디 순하다는 뜻이었는데, 그런데 왜소하다는 뜻의 왜(矮)와 음이 같다보니 우리나라에서
혼동하여 뜻이 변한 것으로 보이는데..... 실제로 일본 원주민은 남방의 말레이인과 혼혈도 있고
키가 작은 것이 사실이고 또 왜구의 침입을 당하면서 미운 마음에 그리 굳어진 것이라 여겨집니다!
왜(倭)는 3세기에 편찬된 중국의 삼국지 위지 (魏志) 왜인전에 처음 나오며,
한사군 (漢四郡) 의 대방으로 부터 한반도의 해안지방을 거쳐 대마도,
일기도를 지나 큐슈 중부의 야마대국에 이르는 노정이 자세히 적혀있습니다.
238년에서 247년 사이에 중국에 사신을 파견했던 여왕 히미코는 당시 100여개의 소국으로 갈라져
있던 왜국의 연맹왕으로 생각되는데.... 이보다 훨씬전인 서기 57년에 후한 광무제가 왜노(倭奴)
국의 왕에게 금인을 하사했다는 기록이 있으며 이 금인이 큐수 서북부 지가도에서 발견되었습니다
(5) 왜인(倭人)의 정체?
오늘날 왜인(倭人) 이란 곧 일본인을 가리키는데, 그런데 고대에도 그러했을까? 하는 의문이
드니 삼국사기에는 왜인이 신라를 침략해온 기사가 스무차례가 넘는데, 그중 벌휴 이사금
때인 서기 193년 왜인 천여명이 흉작으로 기근이 들어 걸식하러 왔다는 기사가 있으니....
이는 바다를 건너 왔다고는 보이지 않으며 혹 경상도 남부에 거주하는 왜인이 아닌가 합니다.
첨해(249) 유례(295), 내물(393) 실성이사금(408) 때의 대규모 침공과 399년 수도 서라벌(경주)
포위 기사를 보면 큐슈에서 건너온 군사가 주축을 이루었다고 보여지지만... 그러나
조분(232), 걸해(346), 눌지이사금(444) 때는 왜군이 불시에 나타났고, 선박을 이용했다는
기록이 없을뿐더러 육지에서 침공해왔다고 생각되어 지니 경상도 남부 왜인들이 아닌가 합니다?
산해경(山海經)에는 개마국(고구려)이 북으로는 중국의 연나라와, 남으로는 왜(倭) 나라와 국경
을 접하고 있다고 하였으며, 또 후한서에는 마한(馬韓)은 54국이 있는데 북으로 낙랑군과
남으로는 왜(倭)와 맞붙어 있다고 하였으며... 사마천의 사기(史記)에도 마한 54국이
나오는데 충남14, 경기12국, 전북이 11국인데 비해 전남은 6국에 불과한 것은 무슨 이유 일까요?
또 위지 동이전 韓(마한) 조에 “'한(韓)'" 은 동쪽과 서쪽으로 바다를 한계(東西以海爲限) 로 하며,
남쪽은 '왜' 와 접해(南與<倭>接) 있으니....” 접(接)이라는 글자는 육지에서 경계를 나눈다는
뜻이며, 韓(변진) 조에 “ '독노국' 은 '왜' 와 접해(<瀆盧國>與<倭>接界) 있다” 독로국은 거제도나
부산 동래(복천동 고분, 일명 거칠산국) 로 보는데 역시 “왜(倭) 와 접(接) 한다” 는 글자가 보입니다.
그외 倭(왜) 조에“倭(왜)로 가자면... 동쪽으로 가면 그 북쪽 해안인 구야한국(狗邪韓國)에
이르는데 7000여리 이다 到其北岸狗邪韓國” 여기서 구야한국은 김해 금관가야
를 말하는데, 왜로 가는 길목이다 라는 뜻이니 3곳 모두 왜와 접한다는 뜻으로 전남
영산강 일대와 경남 도서지방에 산재한 전방후원분과 연관이 있는게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나해 이사금때 가라에 포상 8국이 침입하여 신라가 구원한 기사가 나오는데 포상 8국은 경남 도서지방
과 전남지방에 존재했으니, 그후 신라의 방해에 대한 보복으로 서기 212년 8국중 골포(骨浦 마산)·
칠포(柒浦 칠원)· 고사포(古史浦 고성) 3국이 신라의 갈화성(竭火城, 울산)을 공략하다가 패했으며,
가야는 신라에 왕자를 볼모로 보냈다니 그럼 포상 8국도 전남 거주자들 처럼 왜인이 아닌가 싶습니다?
한반도에서 일본 묘제인 전방후원분이 전남 나주의 반남면 신촌리와 복암리등에 왕릉
규모 14기를 비롯해 광주 월계동, 고흥 안동, 완도, 해남에 경남 고성군 송학동
고분군 1호분등 수십기가 발견되어 금동관과 금동신발에 환두대도가 출토됐습니다.
나주 처럼 영산강 유역인 광주 월계동 ‘장고분’ 도 엄청 크지만 해남 장고봉 고분은
봉분 길이 82m, 높이 9m에 이르니 황남대총등 신라 경주의 대형 고분 보다
훨씬 크며 무덤 내부 구조와 제례양식이 규슈 전방후원분과 빼 닮은 듯 흡사합니다.
해남 장고봉 고분은 80년대초 학계에 처음 보고됐으며 국립광주박물관이 2000년 도굴 갱을 확인하고
긴급 시굴조사로 내부를 일부 확인했지만 공식 발굴은 20년 뒤인 2020년 가을에야 시작했으나, 무덤
석실은 2021년 2월말에 다시 묻혔으니 일각에서는 뒷감당을 못할 정도로 발굴의 파장도 고려했을 것
이란 해석이 나오는등 조사내용은 한반도 전방후원분 무덤 주인 논란을 다시 불러일으킬 공산이 큽니다.
해남 장고봉 고분에서 규슈 왜 고분과 판에 박은 얼개와 뚜껑 달린 토기 접시(개배)에다가 철제
갑옷 조각, 철촉 등 무기류가 묻힌 사실이 확인된건 국내 학계에 부담이 될 수도 있으니...
일본의 고분과 판박이인 무덤으로 인해 일본 우파 학자들이 또다시 “임나일본부설의 근거” 로 삼을
수 있다는 우려 까지 나오니 반박할 “대응논리가 미약한지라 자신이 없으니 발굴 도중에 중단하고
덮은 것” 인데.... 이 사람들이 바로 왜인으로 그들이 건너가서 왜국을 세운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광개토대왕 비문에 399년에 신라 서라벌을 포위한 가야, 왜의 연합군을 고구려 5만 구원군이 격퇴
했다는데 만약 고구려 원군이 아니었으면 신라는 이때 망해 가야와 왜국땅이 되었을 것입니다.
고구려군은 왜군을 추격하여 서기 400년에 함안의 아라성에 이르렀더니, 성안에 왜인(倭人)
이 가득하였다고 하였으며 김해 종발성에서 왜군이 패퇴하였음에도 404년에
경기도 임진강과 예성강 어귀에 상륙하여 고구려의 군과 싸운 왜군의 정체는 무엇일까요?
중국의 사서인 후한서에는 서기 57년에 후한(後漢) 광무제가 왜노국(倭奴國)의 왕에게 사신을
통해 금인을 하사했다는 기록이 있으며.... 이 금인이 규수 서북부 지가도에서 발견되었는데,
물론 이때의 왜노국은 왕국이라기 보다는 규슈 북부 지방의 작은 성읍국가 였다고 짐작됩니다.
중국의 사서인 위지(魏志) 동이전에 보면..... 238년에서 247년 사이에 중국에 사신을 파견
했던 야마대국 邪馬臺國 여왕 히미코는 당시 수십개의 소국으로 갈라져 있던 규슈
왜국의 연맹왕으로 생각되는데...... 히미코 여왕은 규슈 북부를 지배하고 있었다고 봅니다.
(6) 진무와 스진 그리고 오진!
아마테라스 여신의 손자로 규슈에 하강한 천손 니니기의 증손자인 진무왕(신무 천황)이 큐슈를
떠나 세토나이까이를 지나 오오사카 남쪽 나니와(난바)에 상륙하여 가시하라에 야마토(大和)
조정을 열었다고 하는데.... 초대 진무(신무 神武)에서 10대가 스진(숭신 崇神)인데, 신(神)
자가 들어가는 두사람을 동일 인물이라고 보며..... 나머지 8명은 가공의 인물이라고 여겨집니다.
일본 건국연대인 BC 660년은 믿기 어렵고 큐슈에서 3세기에 나라가 형성되었는데 720년에 쓰여진
일본서기의 초기 연대는 두 갑자(甲子)인 120년을 내리면 과장과 일부 왜곡은 있지만 삼국사기
등의 기록에 비추어 사실과 맞아 떨어지며, 일본에서 태어나서 자란 동성왕이 15세인 479년 왜군
500인의 호위를 받고 나와 백제왕위에 오르는 때인 케이타이(繼體 계체) 왕 때 부터는 믿을만 합니다.
홍원탁의 “백제와 대화 일본의 기원” 에도 자세히 나오거니와, 최인호씨는 소설 제4의제국 (3국+ 가야)
에서도 일본 학자 “에가미 나미오” 의 족적을 빌려 김해 대성동 13호 고분의 주인공이 일본 10대왕
인 스진(숭신 崇神 미마키)이라고 말하는데, 에가미씨는 그때까지 일본에서 고대왕국이 자생했다는
기존 학설에 도전하여 대륙에서 한반도를 거쳐온 기마 민족이 “일본” 을 세웠다고 주장했던 인물입니다.
대성동 13호 고분에서는 그때 까지 일본계 유물로 알려져 있던 바람개비
파형동기등이 대량 출토되고, 청동 솥이며 호랑이띠 고리등 기마민족의
유물이 쏟아지면서 주인공을 정복왕조 창시자 숭신으로 추정했던 것이니...
즉 규슈를 정복한 스진(숭신)의 본국이자 거주지가 김해였던 것이니, 최인호
씨는 스진(숭신) 의 "한왜(韓倭) 연합왕국(고분문화)" 이라고 부르는데....
그 후손 오진(응신)이 오사카에서 야마토(大和) 왜국을 세운 것으로 봅니다!
(7) 임나 일본부는 백제 근초고왕의 정복 인가?
일본서기에는 14대 쥬아이(중애) 천황(일왕) 사후에 왕후 진구(神功 신공)가 임신(훗날 오오진 천황)
중에도 삼한을 정벌하여 가야지방에 임나일본부를 설치했다고 나오는데..... 그러나 양식있는
일본학자와 세계 역사학자들은 당시 미개한 일본 수준으로 볼 때 이는 불가능한 일이라고 판단합니다.
이는 서기 369년에 백제의 근초고왕과 근구수왕자가 마한(전라도 지방)을 복속시킨 여세
를 몰아 가야 땅을 아우른 것을 마치 왜국이 한 것으로 일본에서 차용한 것으로 보이는
데, 진구황후를 서기 249년 위지 왜인전에 나오는 야마대국의 여왕 히미코와 일치
시키려다 보니, 부득이 역사를 2갑자(120년) 나 올려서 기록해야 했던 것이라 여겨집니다!
일본에서는 임나 일본부를 자기네가 설치한 식민지 관청으로 보고 우리는 전면 부인하는
실정인데.... 하지만 우리쪽 기록에도 신라의 강수가 임나 출신이라는 등 임나에
대한 여러가지 기록이 있으니 오히려 백제가 설치한 관청이거나, 아니면 위에
말한 김해 가야의 스진(숭신)이 규슈를 정복한후 모국을 “임나” 라고 불렀다고도 봅니다.
399년에 서라벌을 포위하여 신라를 거의 점령했던 왜(규슈)와 가야(김해 : 임나)의 연합군이 고구려
5만 군사의 남정으로 인해 패퇴해 일본으로 도망치게 되는데.... 이 세력이 숭신왕(천황) 의 후손
인 오진(응신)왕으로 그간에 개척했던 터전을 이어받아 일본의 규슈에서 오사카로 진출해 왜국
야마토 왕조를 열게되는 것이고 옛 고향땅 김해를 일컫는 말이 “임나 일본부” 인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532년에 신라국 이사부에게 망하는 가야(구형왕)는 김해-부산 지방의 가야 잔존세력이었다고
여겨지는데..... 부산 동래구 복천동에는 1990년대에 “복천 박물관”이 문을 열었으니 복천
고분군에서 철제 갑옷과 투구, 철덩이, 마구및 신라에서 하사한 왕관등이 쏟아졌으니 400년
전투에서 망한 가야의 잔존세력으로 신라의 부용국으로서 532년 까지 존재했음을 말해줍니다.
다시 말해 부산 복천동 세력은 독노국(혹은 거칠산국)으로 김해가야에 속해 있었다고 보는데
400년에 신라 서라벌을 구원한 고구려 5만 구원군이 추격해 남진하니..... 김해 본국이
고구려군 5만에 망하는데, 다른 일이 없었으면 신라와 가야는 고구려의 영토가 될뻔 했습니다.
396년 비수대전(淝水大戰) 의 결과 건국된 모용수의 후연은 5호 16국 중에 가장 강대했으니 그가
죽은후, 모용보왕 시대에 왕자 모용희가 3만 군대를 이끌고 고구려를 침공해 신성과 남소성을
함락해 고구려인 5천을 포로로 잡고 700리 땅을 차지하니 남진한 고구려군은 황급히 철수합니다!
광개토대왕은 전연에서 책봉을 받은 조부 고국원왕 처럼 후연(後燕)의 모용보로 부터 "평주목 요동대방이
군왕" 에 책봉됐는데 후연이 모용수가 죽은후 북위의 공격을 받아 수도 중산이 함락되고 북쪽 열하지방
용성으로 쫃겨오니 국토나 인구가 30% 로 쪼그라든지라..... 북위의 재침에 대비하기 위해서는 국력을
회복해야 하니 마침 고구려가 대부분 군대를 서라벌 구원차 내려 보내니 이 기회를 타서 침략한 것입니다.
고구려군이 서라벌에 100명 정도만 남긴채 철수하니 신라는 김해가야 땅을 차지하는 행운을 얻었지만
이미 왜군의 포위공격에 국력이 많이 상했고 또 교통이 불편하던 시대에 고구려 눈치도 보아야 하니
직접 통치를 하지 못하고... 저 복천동세력이 김해가야를 잇게해서 왕관을 하사하는등 부용국으로
삼았다가 532년 법흥왕때 백제가 동진하니 대비코자 이사부를 보내 전쟁 없이 접수한 것으로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