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도 원숭이가 살았었다.
-조선 왕조 실록이 전해 주는 제주도 원숭이의 실체! -
한참 오래 전의 이야기다.
고속버스를 타고 가다가 심심해서 사 본 주간지에
눈을 끄는 기사가 있었다.
정확한 제목은 생각은 안 나지만 이런 기사였다.
“ 한국에도 원숭이가 살았었다.”
능히 사람의 관심을 크게 끌만한 기사였다.
큰 기대를 가지고 읽었으나 내용은 무슨 생태학적 근거가 있었던 것이 아니라 옛날에 쓰여진 여러 글들에서 언급된 원숭이를 가지고 구성한 것이었다.
내용 중에 지금까지 별로 기억되는 것은 없었었지만 그 흥미로운 테마만은 머릿속에 오랫동안 남아 있었다.
조선 실록이 번역되고 인터넷으로 검색이 가능하게 되었다.
세계 어디에 내놓아도 손꼽힐 이 민족의 지적재산(知的財産)이 중학생에게도 사용이 가능하게 개방되었다니 국사 연구의 저변을 거대하게 넓혀줄 큰 걸음이라 아니 할 수가 없다.
가끔 이 사이트에 들어가서 이것저것 검색하는 것이 취미가 된지 한 달이 넘어선 어느 날 문득 옛날에 보았던 원숭이 테마의 기사가 생각났다.
나는 무심코 원숭이 라는 기사를 검색창에 넣어 보았다.
조선 왕조 오백년 기록에 원숭이라는 단어가 여든 두 개가 떴다.
호기심이 불타오르기 시작한 나는 밤늦도록 그 여든 두개의 원숭이 관련 기록을 전부 조사해 보았다.
실록에서 원숭이라는 단어는 대부분 인간의 행태를 비유하거나 비난할 때 사용되었었고 진짜 원숭이에 대한 기록은 몇 개 되지가 않았다.
있대야 일본이나 유구에서 원숭이를 보내왔다던가 등의 기록들이었다.
내가 잔뜩 기대했던 것에 비하면 조금은 실망스러운 것이었다.
그러나 --- 마침내 정말 원숭이가 한국에 살았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기록이 세종 실록에서 두 개가 발견되었다.
세종 16년 4.11일[서기1434년]에 임금이 전라도 감사에게 지시하기를,
“첨지중추원사(僉知中樞院事) 김인( 金? }이 제주 목사(濟州牧使)로 있을 때 원숭이 여섯 마리를 잡아 길들이게 하여, 지금의 목사 이붕(李鵬)에게 전해 주고 왔는데, 특별히 사람을 보내어 육지에 가져오게 할 것은 없으니, 만일 어떤 사람이든지 와서 주의하여 먹여 기르겠다면 육지로 가지고 나와서 풀이 무성한 섬[島]이나 갯가에 놓아기르게 하되, 혹시라도 사람들로 하여금 잡아 가지 못하게 하고 힘써 번식하도록 하라.”라는 기록과
다른 하나는 세종 18년 6.16일[서기1436년]
"제주 안무사(濟州按撫使) 최음산(崔淫山)이 원숭이[ ?子]와 노루[獐] 한 쌍을 바치니,명하여 상림원(上林園)에서 기르다가, 그 뒤에 인천(仁川) 용유도(龍流島)로 옮겨 놓아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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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깐 여기서 산사람이 얼굴을 내밀겠습니다.
앞의 김인의 한자와 원숭이의(뇨자) 한자가 자꾸 사라집니다.
몇 번을 수정해도 마찬 가지군요.
조선왕조실록의 본문에 들어가 보니까 거기서도 마찬가지 일이
생기고 있습니다. 윈도우에 문제가 있는 것인지 포탈에 문제가 생긴 것인지 모르지만 정상화 되는대로 다시 수정 하겠습니다.
불편하시더라도 넓으신 마음으로 이해해 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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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왕조 500년 역사에 안보이던 원숭이가 연거푸 단 2년의 사이를 두고 세종 조에 두 번이나 나타나 있는 것이었다.
두 기록 다 제주도에 원숭이가 살았었다는 기록이다.
그리고 한반도의 원숭이가 살았다는 기록은 실록에서 사라져 버린다.
나는 적어도 제주도에는 원숭이가 살았다는 사실이 발견된 사실이 반가웠지만 의문점이 일기 시작했다.
원숭이라 함은 사는 장소는 깊은 숲속이며 먹이는 풀이나 나무 열매가 되어야 하는 것이 우리의 기본 상식인데 그 정상적인 상식에 반하는 비상식들이 위의 짧은 기록들에서 발견된다.
그것들은 세종이 지시한 내용 중에 원숭이를 풀이 많은 섬이나 갯가에 놔주라는 내용과 실제로 2년 뒤에 바친 원숭이들을 지금 인천 공항이 들어선 용유도에 놓아기르도록 하라는 말이었다.
원숭이를 아는 사람이라면 왜 하필 섬에 원숭이를 놓아 주는가? 하는 것과 한 걸음 더 나아가 되어 왜 갯가에 놓아 주어야 하는 것인가 ? 가 그 의문의 핵심들이 된다..
나는 궁리에 궁리를 거듭했지만 알 도리가 없었다.
나는 원숭이가 아니라 풀도 먹고 갯가의 어패류도 먹는 다른 짐승을 가리키는 것이 아닌가 몇 번이나 생각을 해보았다.
나는 용유도를 몇 번 가 보아서 그 쪽 갯벌을 잘 아는 편이었다.
그래서 그 갯벌에서 나는 것이 무엇인가 생각을 해보니
제일 많은 것이 여러 종류의 게였고 다음이 맛살과 바지락 그리고 낙지..또는 짱둥어 정도였다.
나의 한정된 지식으로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그런 것들을 원숭이들이 먹을 턱이 없었다.
그래서 행여 다른 동물들을 옛 분들이 잘못 아시고 잘못 쓰지 않았나 하는 의심도 해보았다.
물개나 물범 또는 수달등을 생각해 본 것이다.
그러나 항상 걸리는 것은 세종께서 직접 지시하신 풀이 많이 있는 곳에 놓아주라는 말씀이 또 걸리는 것이었다.
며칠을 두고 그 괴상한 원숭이의 정체를 의심하다가 문득 원숭이를
나타내는 한자[?子]가 보기에도 처음 보는 한자임에 신경이 쏠렸다.
원숭이라면 원[猿] 자이어야지 이런 이상한 문자가 또 쓰여 질 이유가 없었다.
나는 다시 조선 왕조 실록에 되돌아가 앞의 괴상한 한자를 검색창에 넣어 보았다.
그랬더니 검색어에 해당되는 것은 위의 세종 때 두 기록뿐이었다.
82개의 원숭이 검색어중 오직 세종 때의 두 원숭이 기록만이 예의 괴상한 한자들을 쓰는 것은 너무 이상했다..
실록 원문에서 나는 다른 원숭이들을 어떻게 쓰나 봤더니 주로 원(猿)자나 후(?)자를 썼었다.
나는 다시 전자 옥편에서 상기 이상한 글자를 검색 해보았더니 '뇨'라고 읽고 원숭이라는 말도 있었지만 원뜻은 개가 짖다, 또는 탐욕스러운 짐승이라고 되어 있어서 어느 것이 맞는 말인지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었다.
정말로 이상했다.
분명 원숭이로 번역되어 있는데 그 내용도 이상하고 한자도 이상했다.
더구나 세종 16년의 두 번째 글은 번역자가 이 괴상한 한자의 번역에 자신이 없었던지 괄호 안에 원어인 한자 표기까지 써넣은 것이 또한 이상했다.
나는 한자의 뜻부터 밝히기로 작정했다.
여기저기 알아보다가 결국 중국에 있는 연변 대학교 교수로 있는 동포에게 이메일을 보내고 전화를 몇 번이나 되풀이 한 끝에 그 한자도 옛글에서 쓰던 말이지만 역시 원숭이라는 뜻이라는 답을 얻었다.
결론은 기록이 틀린 것이 아니라면 원숭이는 원숭이되 아주 특별한 종류의 원숭이라는 추측이 갔다.
그래도 이상한 기록 내용에 대한 나의 의구심은 계속되어 제주도에 살았다는 원숭이의 존재가 아리송하기만 했다..
그것이 무엇일까?
나는 실록의 내용을 마음속에만 두고 몇 달간 세월을 보냈는데 우연한 기회가 왔다.
어느 날 평소 잘 알고 지내던 미국인에게서 전화가 왔다.
가족들이 미국에서 왔는데 아들 취미가 동물이라서 서울 대공원에 가고 싶으니 어떻게 가는지 길을 알려 달라는 말이었다.
짧은 영어로 설명하는 것도 귀찮아서 내가 데려다 줄 테니까 올 때는 전철을 타고 오라고 말하고 그 주말에 가족들을 데리고 서울 대공원으로 갔다.
그러나 막상 도착하고 보니 한국 남자의 의리가 그런 것이 아니어서
나는 가족들을 동물원 관광까지 안내하지 않을 수 가없었다.
껑충껑충 뛰면서 즐기는 두 자녀들과 함께 한참을 돌다가 동남아시아 관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거기에 필리핀 원숭이라는 것이 있었다.
바로 그 우리 앞에서 정말 깜짝 놀랄 안내문을 발견했다.
무심코 본 안내판에 그 원숭이들이 필리핀의 저지대나 망그로브 숲에 주로 살며 갯벌에서 게나 조개 같은 것을 잡아먹고 산다고 써 있었다.
그래서 게 잡이 원숭이[crab catching monkey]라고 부른다는 설명까지 붙어있었다.
이거야 말로 세종께서 말씀 하시던 것과 꼭 같은 것이 아니겠는가!
나는 환호했다.
망그로브 숲이라는 것은 열대지방의 해안이나 하구 주변의 물속에
자라나는 숲이었다.
뿌리를 짠 물속에 넣고 줄기는 빽빽하게 밀생하는 식물로서 물고기의 보금자리이기도 해서 각국에서 보호하고 있는 숲도 많다.
그 나무는 펄프의 원료로 쓰기도 하고 단단한 뿌리는 현지인들이 숯을 만드는데 쓰기도 한다.
무슨 다른 단서라도 얻을까 해서 그 원숭이를 잘 살펴보았지만 원숭이를 잘 모르는 나는 그놈에게서 다른 원숭이와 별다른 점을 찾기가 어려웠다.
어쩐지 손가락이 길어 보이는 것이 갯바닥의 게 구멍을 잘 뒤지겠다는 생각만 들었을 뿐이었다.
그날 조급증이 이는 것을 참고 미국인 가족을 즐겁게 관광하도록 끝까지 안내하고 돌아온 나는 자료를 뒤져 보았다.
자료는 의외로 풍부했다.
- 게잡이 원숭이- 어지간한 동물 관계 서적에는 대개 CRAB CATCHING MONKEY라는 필리핀 원숭이의 설명이 있었다.
게잡이 원숭이는 열대우림의 저지대나 주로 해변가에 살면서 갯벌의 어패류도 잡아 먹지만 식물성 과일이나 농작물도 잘 먹는 습성이 있다.
이 원숭이는 또한 사람들을 별로 두려워하지 않고 인가 근처에
살면서 여러 가지로 피해를 주기 때문에 크게 환영을 받은 동물은
아니다.
내가 크게 놀란 것이 이 게잡이 원숭이의 엄청나게 넓은 분포 지역이었다.
필리핀은 물론 보르네오 섬, 그리고 말레지아까지도 이 게잡이 원숭이의 원서식지였다.
그 뿐만 아니었다. 이 지역의 게잡이 원숭이들은 먼 변방으로 이주를 나가 아득히 먼 인도양 건너 아프리카 연안의 모리셔스 섬이나 남쪽의 파라우 섬 그리고 멀리 북쪽 홍콩까지에서도 터를 잡고 살았다. 이 지역의 게잡이 원숭이들은 토종들이 아니라 멀지 않은 과거에 동남 아시아에서 건너온 것들이라 한다.
이 역마살이 낀 원숭이들이 제주도와 가까운 홍콩까지 올라와서 산 것을 보면 제주도로의 이주도 별로 어려운 일은 아니지 않겠나하는 짐작도 갈만하다.
이 원숭이가 이렇게 인도양 과 태평양 언저리에 퍼진 것은 바닷길이 닿는 해안 일대에 서식했기 때문에 무슨 방법으로든 해상의 길을 건너 이주했을 기회를 만났을 가능성이 내륙의 원숭이들 보다는 높았을 것이고 또 인간의 주변에 서식하기를 좋아 했던 습성도 먼 장거리 바닷길을 다녔을 인간들과 동행했을 가능성도 크다는 이야기가 된다.
엣날 뱃사람들은 애완용으로건 또는 식용으로건 배에 원숭이를 태우고 바닷길을 떠났으리라는 짐작도 해볼 수 있다.
식용이라니까 이상하게 생각하시는 분들이 많을 것이지만
원숭이를 식용으로 먹는 민족들은 동남아시아 각국에 아주 많다.
그리고 옛 유럽 뱃사람들은 배에 살아있는 염소나 양등의 가축을 싣고 다니다가 자신들이 도착한 섬에 후일에 대비해서 방목용으로 놓아 주거나 식량으로 삼았다.
동물중 그래서 게잡이 원숭이들이 바닷길을 다니는 고대 남방 민족의 뱃사람들과 동행해서 제주도에 정착했을 가능성을 배제 안할 수가 없다.
제주도의 동물중 게잡이 원숭이와 비슷한 존재로서 제줏개를 들 수가 있다.
제줏개는 본토에 있는 진돗개나 풍산개와 같은 북방견의 모습보다 거의 완벽한 남방견의 외모를 띄고 있다.
가진 품성도 진돗개와 사뭇 다르다.
이 한국의 전통 토종개는 잘 알지도 모르는 토종개 전문가라는 사람들에 의해서 진돗개의 잡종쯤으로 평가 절하 되고 있는데 언젠가는 이 자랑스러운 우리의 토종개 제줏개를 이 블로그에서 소개하고자 한다
세종 때 홀연히 나타났다가 없어진 이 게잡이 원숭이의 전모를 그럭저럭 밝혔다고 생각은 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조선왕조 500년의 세월에 딱 두 번 나타난 제주도의 원숭이들에게만 붙여진 독특하고 복잡하기 그지없는 원숭이 이름은 여전히 미스테리였다.
나는 여러모로 추리를 해봤다.
당시 조선에 들어온 원숭이들은 일본 원숭이들이었다.
-- 일본 원숭이--
윗 사진에서 보다시피 게잡이 원숭이와 일본 원숭이는 얼굴부터
판이하게 다르다.
내가 직접 서울 대공원에서 본바로는 게잡이 원숭이들이 일본 원숭이보다는 몸집도 훨씬 작았었다.
그걸 아는 지방관이 그렇게 일본 원숭이와 차별화된 이름을 부여했는지도 모른다.
한 참을 더 생각해보니 그 것보다도 제주도를 100여년 넘게 지배했던 몽골인들에게 그 해답을 얻는 것이 더 좋을 듯하다.
그 단서는 게잡이 원숭이들이 홍콩지방에 까지 이주해서 살고 있다는 사실에 있다.
몽골인들은 남송을 점령해서 그 인적 자원을 여러 곳에 활용했었다.
몽골인들은 일본을 침공 했을 때도 몽골군이라고 알려진 병력의 대다수가 실은 전 남송군이었었다.
더구나 제주도를 개발하는데 필요한 해운은 몽골인들에게 생소한 기술이었다.
그들은 제주도를 개발하면서 이들 남송인들을 대거 투입했었을 것이다.
게잡이 원숭이가 사는 홍콩 지역은 남송의 영토였었다.
이들 남송인들 중에 게잡이 원숭이가 사는 지역에서 온 인사가 고향에서 보던 게잡이 원숭이를 보고 그들의 고향에서 다른 토종 원숭이들과 차별화해서 부르던 이름을 그대로 사용 한 것이 전해지지 않았겠는가 하는 추리가 되는 것이었다..
제주도의 게잡이 원숭이들은 그렇게 숫자가 많지는 않았던듯했다.
세종께서 잘 번식시키라고 지시했던 것이 그것을 증명한다.
그런 숫자도 많지 않았던 제주도 원숭이가 실록에 단 두 번만 나오고 멸종 된 것은 ------ ?
여러 이유가 있을 것이다.
제주도에 살다가 멸종 된 동물들은 사슴이나 산돼지 같은 것들도 있지만 그래도 그 것들은 근래까지도 생존해있었다.
제주도 게잡이 원숭이들의 멸종은 기후의 변화를 그 이유로 들 수가 있을듯하다.
이 원숭이의 기록이 있었던 때인 1500년도 무렵부터 1750년도까지 약 250년간 한반도에 소빙하기[小氷河期]가 있었다는 것이다.
일본 원숭이야 한 겨울이 되면 완전히 양털 코트를 연상 시킬 만큼 긴 털로 덮히는 생리적인 보온 장치가 있지만 게잡이 원숭이는 그렇지가 못하다.
그래서 긴 세월 제주도까지 덮친 혹심한 추위가 이들 소수의 원숭이를 멸종 시킨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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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소빙하기면 조랑말이 먼저 사라지겠지요..
영장류인 원숭이가 말보다 어리석을까요?
그리고 조선에 살았었지 한국에 산 건 아니라 생각합니다.
조선 왕조 500년 역사에 안보이던 원숭이가 연거푸 단 2년의 사이를 두고 세종 조에 두 번이나 나타나 있는 것이었다.
두 기록 다 제주도에 원숭이가 살았었다는 기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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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濟州)에 관련된 <조선왕조실록>의 내용이군요... 세종 16년 4월 11일과 세종 18년 6월 16일의 기사이고요...
그 당시 제주(濟州) 이외의 지역에도 원숭이가 분명히 자연서식하였는지 궁금하네요...
<세종실록지리지>에 따르면, 제주(濟州)에서 원숭이가 살았다는 내용이 나오지는 않습니다.
그 당시에 원숭이가 제주(濟州)에서만 살았다면 특이한 사항이므로, 무언가 관련 기록이 남겨졌을 것 같습니다만...
<조선왕조실록>에서 "원숭이"를 검색해보면,
왜국과 유구국이 원숭이를 조선(朝鮮)에 조공으로 바쳤다는 기록은 다수 나옵니다.
그렇게 바쳐진 원숭이들이 나중에 어떻게 처리되었는지를 구체적으로 알 수 있을까요???
모두 자연사??? 계속 번식???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에서는 두충(杜沖)이 경상도(慶尙道) 경주부(慶州府) 양산군(梁山郡)과 동래현(東萊縣), 전라도(全羅道) 제주목(濟州牧) 정의현(旌義縣)과 대정현(大靜縣)에서 산출되었다고 합니다.
아무튼, 조선(朝鮮)의 제주(濟州)는 특별한 지역으로 보이네요... 원숭이와 두충(杜沖)이 관계되는 지역이라서.....
조선왕조 실록에서 기록한 지명(역사적 해석)이 모두 현재 한국의 지역(역사적 해석)으로 편입될 수는 없어 보입니다. 주도 세력이 만든 나라가 대한민국이라고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만... 그러므로 한국에 원숭이가 있었다라는 것은 분명히 정확한 표현은 아니라고 보여집니다.
"조선=대한민국" 이라고 볼 수는 없다고 봅니다. 전세계 조선사의 관점에서 해석해 보면, 조선의 리더들의 후예들의 정체성이 대한민국으로 해석될 수 있고, 그 밖의 영역에서 한국색(언어, 역사, 문화)이 남아있던 사람들의 집단이 인민공화국이 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어떻게 보면 그 밖의 영역의 범주가 더 광범위하고, 서양 문화와 더 가까울 수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그들은 무엇인가 부족한 것이 분명히 있어 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