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
김여정
그 후 오십 년이 넘는 세월의 강을 건너온 얼굴들은 반지르르한 윤기라곤 찾아
볼 수 없고, 이마에 잡힌 깊은 주름과 반백이 성성한 모습은, 누가 보아도 영락없
는 할머니 할아버지들이다. 벌써 육순을 넘어 칠십 고개를 치달아 가지만 가벼운
욕설로부터 시작되는 인사말이 서로 격식을 갖추지 않아도 편하게 어우러진다.
초등학교 동창인 우리들은 농사를 지으며 평생 고향을 지키는 이도 있는가하면
기관장으로 정년퇴임한 친구도 몇 명 있고 서울에서 사업을 하여 부를 누리고 있
는 사람도 있다. 그동안 성장과정과 살아온 습관과 직업이 다양하지만 변죽이 잘
맞는 모임이다.
술잔이 몇 순배 돌아가더니 초장부터 노래판이 벌어졌다.
“인생은 나그네 길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느냐”
재순이와 구섭이의 노래 소리가 구성지다 노래가사가 인생의 무상을 담은 내용
이기에 촉촉이 가슴으로 젖어 든다. 흘러간 노래 가락에 젖어 흥겹게 율동하며 합
창하는 소리가 애원 하 듯 하는 친구들의 모습에서 세월은 이렇게 속절없이 흘러
가는 것을 우리가 10년 후에도 모임을 할 수 있을까? 그때는 어떤 모습으로 변
해 있을까......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는 것이라 생각하니 나의 자화상이 투영되어
쓴웃음을 짖고 서글퍼졌다.
내가 동창회에 처음 나갔을 때가 이십 년 전이다. 그들은 일찍부터 모임을 가졌
지만 나는 연락이 와도 가지 않았다. 한참 배워야할 시기에 늑막염으로 학업을 중
단하고 휴양 차 쉬다보니 배움을 접고 일찍이 결혼하였다. 그 후 누구를 만나는
것조차 꺼려지고 부끄럽기 만했다.
우리는 일 학년서부터 육 학년까지 한 교실에서 공부했으며 흉허물이 없고 가
까운 이웃동네에 살아온 서로의 집안 사정까지도 잘 아는 사이다. 불참하다 처음
만났을 때에는 삼십 년의 세월이 무심하여 길에서 만나도 알아보지 못 할 정도로
낯설고 서먹하기만 하였다.
친구들의 변한 모습을 보며 옛날 생각이 떠올랐다. 참새별명을 가진 N은 명랑
하고 귀여운 모습으로 우리들을 항상 웃기더니 의젓한 중년부인이 되었고, 오락시
간이면 옛날 호랑이 장가가던 날 하면서, 전설 같은 이야기로 흥미를 끌어내던 이
야기꾼 K는 야무진 체구에 아직도 입담 좋고 위트가 있어 인기이다. 수줍음 잘 타
던S가 술도 잘 마시고 유머러스로 분위기를 살리며 빨리 친구들과 어우러지게 되
었다.
그 후부터 해마다 한번씩 갖는 정규 모임에 빠지지 않았다. 그리고 자녀들 결혼
식에도 참석하여 축하 해주고, 하다 보니 자연스러워 졌다.
이번에도 통지서를 받고 며칠 전부터 마음이 설레 이었다 반가운 얼굴들을 하
나하나 떠올리다보니 입가에 웃음이 번진다.
오늘 또 우스꽝스럽게 이야기를 시작하며 “얘들아” 하는 L씨를 보니, 학교 다
닐 때 손을 들고 벌을 받으면서 두 줄기 누런 굴 젖이 들락날락 훌 적 거리며 씩
씩대고 흘겨보던 모습이 떠올라 웃음이 난다. 그의 특기는 고무줄 끊기와 줄넘기
줄 빼앗기 공기 돌 감추기 반에서 심술꾼으로 유명했다.
그 날도 고무줄놀이를 하는데, 심술꾼이 고무줄을 끌고 가는 것을 빼앗기지 않
으려 꼭 잡고 있는 나에게 줄을 퉁겨 얼굴과 손목에 벌겋게 부러 나고 어찌나 아
팠던지 엉엉 울고 말았다. 그 일로 해서 지금까지도 친구를 보면 웃음이 먼저 난
다.
오늘도 넉살좋은 그가 복숭아 서리를 하다 들켜 진흙 논바닥에 빠져 신발을 잃
어버린 이야기와 닭서리를 하다 주인에게 들켜서 논밭으로 쫓기는데 놀랜 닭이
“꼬꼬댁 꼭꼭”소리를 내는 바람에 닭을 집어 던지고 닭 소리나는 반대 방향으로
도망쳤다는 이야기에 모두들 박장대소를 했다. 너도나도 한통속이 되어 서리를 하
던 그때의 천방지축 소년 시절로 돌아간다. 그 시절은 서리를 하다 더러 들킨다해
도 너그럽게 용서 해주던 인심 좋은 때였다.
이렇게 웃고 즐거운 시간을 보내다 보면 모든 시름을 털고 동심으로 돌아간다.
우리들 손자 손녀의 나이로 돌아가 철없는 아이들이 되어 서로이름을 부르는 자
리가 이모임뿐이다.
한가지 서글픈 것은 벌써부터 한 명 한 명 줄어들기 시작하여 30여명이 넘던
회원이 24-5명 정도 모인다 이번에도 법무사 일을 하는 Y씨가 간암 수술을 받고
항암치료중이라 참석하지 못 하였다. 그의 쾌유를 빌며 잠시 각자의 종교대로 기
도를 했다.
가는 세월 그 누가 막을 수가 있으랴, 한번 오면 가는 것은 당연한 이치이건만
마음이 착잡하고 서글퍼지는 것은 나이를 먹는 탓일까? 친구를 잃는 안타까움일
까 세상에 왔다가 가지 않은 사람이 없듯이 인생은 태어나 생로병사로 없어지는
변화의 진리로 윤회하는 것을......
세월 따라 가는 인생 앞으로 우리가 몇 번이나 더 만날 수 있을까! 멀리 떠나는
동기간을 보내듯 차부까지 가서 손을 흔들며 못내 아쉬운 마음으로 내년을 약속
하였다. 그 날 어줍은 몸짓으로 춤추던 친구들의 모습이 영 잊혀지지 않고 그리움
으로 남아있음은 어린 시절부터 이어진 온 몸으로 인생을 이야기한 소중한 인연
들이기 때문일 것이다.
2006/23집
첫댓글 세월 따라 가는 인생 앞으로 우리가 몇 번이나 더 만날 수 있을까! 멀리 떠나는
동기간을 보내듯 차부까지 가서 손을 흔들며 못내 아쉬운 마음으로 내년을 약속
하였다. 그 날 어줍은 몸짓으로 춤추던 친구들의 모습이 영 잊혀지지 않고 그리움
으로 남아있음은 어린 시절부터 이어진 온 몸으로 인생을 이야기한 소중한 인연
들이기 때문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