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1독서
▥ 사도 바오로의 필리피서 말씀 3,3-8ㄱ
형제 여러분,
3 하느님의 영으로 예배하고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자랑하며 육적인 것을 신뢰하지 않는 우리야말로 참된 할례를 받은 사람입니다.
4 하기야 나에게도 육적인 것을 신뢰할 수 있는 근거가 있기는 합니다.
다른 어떤 사람이 육적인 것을 신뢰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나는 더욱 그렇습니다.
5 여드레 만에 할례를 받은 나는 이스라엘 민족으로 벤야민 지파 출신이고, 히브리 사람에게서 태어난 히브리 사람이며, 율법으로 말하면 바리사이입니다.
6 열성으로 말하면 교회를 박해하던 사람이었고, 율법에 따른 의로움으로 말하면 흠잡을 데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7 그러나 나에게 이롭던 것들을, 나는 그리스도 때문에 모두 해로운 것으로 여기게 되었습니다.
8 그뿐만 아니라, 나의 주 그리스도 예수님을 아는 지식의 지고한 가치 때문에, 다른 모든 것을 해로운 것으로 여깁니다.
복음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 15,1-10
그때에
1 세리들과 죄인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가까이 모여들고 있었다.
2 그러자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이, “저 사람은 죄인들을 받아들이고 또 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군.” 하고 투덜거렸다.
3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 비유를 말씀하셨다.
4 “너희 가운데 어떤 사람이 양 백 마리를 가지고 있었는데 그 가운데에서 한 마리를 잃으면, 아흔아홉 마리를 광야에 놓아둔 채 잃은 양을 찾을 때까지 뒤쫓아 가지 않느냐?
5 그러다가 양을 찾으면 기뻐하며 어깨에 메고
6 집으로 가서 친구들과 이웃들을 불러, ‘나와 함께 기뻐해 주십시오. 잃었던 내 양을 찾았습니다.’ 하고 말한다.
7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이와 같이 하늘에서는, 회개할 필요가 없는 의인 아흔아홉보다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 때문에 더 기뻐할 것이다.
8 또 어떤 부인이 은전 열 닢을 가지고 있었는데 한 닢을 잃으면, 등불을 켜고 집 안을 쓸며 그것을 찾을 때까지 샅샅이 뒤지지 않느냐?
9 그러다가 그것을 찾으면 친구들과 이웃들을 불러, ‘나와 함께 기뻐해 주십시오. 잃었던 은전을 찾았습니다.’ 하고 말한다.
10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이와 같이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 때문에 하느님의 천사들이 기뻐한다.”
♠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의 묵상글
<‘하느님의 사랑’과 ‘하느님의 기쁨’>
오늘 우리가 들은 비유는 죄인을 끝까지 찾으시는 ‘하느님의 사랑’과 회개한 죄인 하나를 두고 즐거워하시는 ‘하느님의 기쁨’에 대한 말씀입니다.
비유 속에서 목자는 ‘잃은 양’을 '찾아낼 때까지' 뒤쫓아 다닙니다.
여인 역시 ‘잃은 은전’을 '찾아낼 때까지' 샅샅이 뒤집니다.
이는 잃은 것을 찾으시는 구원의 주체가 하느님이심과 또한 ‘먼저’ 찾으시고 ‘끝까지’ 찾으시는 ‘신실하신’ 하느님의 사랑을 말해 줍니다.
그리고 잃은 것을 되찾은 후에, “함께 기뻐해 주십시오.”(루카 15,6.8)라고 말씀하심은 이 비유의 정점이 잃은 것을 되찾는 것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이를 되찾은 후에 ‘이웃과 함께 기쁨을 나누는 것’에 있음을 말해줍니다.
사실 이 기쁨은 너무도 커서 도저히 나누지 않고는 못 베기는 기쁨입니다.
왜냐하면 양 한 마리를 잃어버린 아픔이 마치 백 마리의 양을 모두 잃어버린 것처럼 아팠고, 은전 한 닢을 잃어버린 슬픔이 마치 열 닢을 전부 잃어버린 것처럼 슬펐기에, 양 한 마리를 되찾은 기쁨은 마치 백 마리의 양 전부를 되찾은 것처럼 기뻤고, 은전 한 닢을 되찾은 기쁨이 마치 열 닢 전부를 되찾은 것처럼 기뻤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양들을 맡기신 아버지께 대한 ‘충실함’이요, 은전을 결혼의 징표로 주신 신랑이신 예수님께 대한 ‘신의’입니다.
비록 보잘 것 없는 죄인 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마치 전부인 양 소중히 여기시는 하느님의 지극하신 사랑입니다.
‘하나 안에서의 전부인 사랑’, ‘전부 안에서의 하나인 사랑’, 바로 이 사랑이 십자가에 매달린 한 마리의 어린 양이신 예수님의 전 인류를 구원하신 전부인 사랑입니다.
바로 이 크신 사랑을 만나면 그 누구도 기쁘지 않을 수가 없고, 나누지 않을 수가 없고, 회개하지 않을 수가 없게 됩니다.
그러니 '회개'는 당신을 만나기 위한 조건이 아니라, 당신과의 만남의 결과요, 당신 사랑의 결과입니다.
그리고 그 '기쁨'은 하느님과의 만남의 기쁨이요, 재회의 기쁨이요, 나를 찾아오신 하느님의 크나 큰 사랑에 대한 기쁨입니다.
바로 이 기쁨이야말로 요한복음 사가가 말한 '아무도 빼앗아가지 못할 기쁨'(요한 16,22)입니다.
사실 이 비유는 “이 사람은 죄인들을 맞아들이고 또 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군.”(요한 15,2)하고 투덜거리는 바리사이들과 율사들을 향하여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따라서 이 비유 말씀은 “사람의 아들은 잃은 사람들을 찾아 구원하러 왔다”(루가 9,10)는 당신 자신의 소명과 행위를 옹호하는 말씀입니다.
오늘도 우리는 이렇게 우리를 찾고 계시는 음성, 곧 “아담아 너 어디 있느냐?”(창세 3,6) 하고 우리를 부르시는 하느님의 음성을 들어야 할 일입니다.
그리고 우리를 찾아 목숨까지 바치신 당신의 외아들을 만나야 할 일입니다.
또한 잃었던 양을 되찾기 위해 광야를 쫓아다니며, 잃었던 은전을 되찾기 위해 등불을 켜고 집안을 쓸며 샅샅이 뒤지는 목자의 사명도 깊이 새겨야 할 일입니다.
사실 이는 ‘이미’ 우리가 받은 ‘하느님의 사랑’과 ‘하느님의 기쁨’을 증거하는 일입니다.
하오니, 주님!
오늘 우리도 사랑하되 ‘먼저’ 사랑하고 ‘끝까지’ 사랑하며, 보잘 것 없는 하나를 사랑하되 ‘전부’를 사랑하고 소중히 사랑하며, 주님께서 주신 이 큰 기쁨을 형제와 더불어 나누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나와 함께 기뻐해 주십시오.”
(루카 15,6)
주님!
저를 먼저 찾으시고 끝까지 찾으시니 찬미를 받으소서.
보잘 것 없는 하나를 사랑하되 전부를 사랑한 것처럼 사랑하고,
먼저 사랑하되 끝까지 신실하게 사랑하시니 찬미를 받으소서.
보잘 것 없는 죄인 하나이지만 전부인 양 소중히 여기시니
바로 이것이 제가 지닌 최상의 기쁨입니다.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의 묵상글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
“형제 여러분, 나는...나의 주 그리스도 예수님을 아는 지식의 지고한 가치 때문에 다른 모든 것을 해로운 것으로 여깁니다.”
(필리 3,8ㄱ)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 이것이 바오로 사도에게는 지고의 가치라고 합니다.
이것은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 말고도 다른 지식이 많다는 뜻이고, 실로 다른 지식을 많이 아는 사람이 참으로 많습니다.
이런 사람을 옛날 우리 수도원에서는 백과사전이라고 했는데, 요즘은 ChatGPT라고 하면 좋을 것입니다.
지난번 미국에 갔을 때 한 형제를 만났는데 저는 이 형제를 통해서 ChatGPT를 처음 경험했습니다.
그때 오늘 독서에서 얘기하는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뭐냐?’라고 물었더니 1초도 안 지나서 다음과 같이 대답하는 것이었습니다.
“사도 바오로는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을 통해 하느님의 사랑과 은혜를 체험하며, 자기의 삶이 변했다고 강조했습니다.
이 지식은 단순한 정보 습득을 넘어서는 영적 경험과 관계의 발전으로, 이를 통해 신앙인들은 삶의 가치와 방향성을
새롭게 하고, 하느님을 향한 사랑과 순종을 키워가게 합니다.”
이런 경험을 하고 저는 너무도 놀랐습니다.
너무도 잘 알고 있기에 놀랍기도 했고 1초도 안 되어 답을 제공하기에 더 놀랐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은 잡다한 정보의 습득이 아닙니다.
제가 옛날에 그 ‘백과사전 형제’를 보면서 느꼈던 것은 존경스러운 것이 아니었고, 그 쓸데없는 지식을 왜 그리 많이 모으고 있고 모아놓고 있느냐 그것이었습니다.
영적인 지혜 곧 하느님을 많이 알아야지 그런 것들을 많이 알고 있는 것은 쓰레기들을 내 머리 안에 수북이 쌓아놓고 있다는 그런 느낌이었던 것인데, 실제로 그 형제는 얼마 안 있다가 수도원을 떠났습니다.
실로 우리는 그리스도를 많이 알아야 하고 하느님을 많이 사랑해야지, 그러지 않고 다른 걸 많이 아는 것은 쓰레기를 많이 모으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오로는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 외에 다른 지식은 쓰레기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리스도를 진정으로 아는 것은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아는데 하느님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그리스도를 진정으로 아는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론을 아는 것입니다.
앞서 얘기한 ChatGPT도 그리고 악령들도 그리스도론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란 그것을 통해 하느님의 사랑과 은혜를 체험하고, 정보의 습득을 넘어서는 영적인 체험과 관계의 발전으로 이어진다고 잘 알지만, ChatGPT 자신은 하느님 사랑과 은혜를 체험치도 않고 관계도 발전하지 않지요.
프란치스코가 권고에서 얘기하듯 악령들도 천상과 지상 일을 얼마나 잘 압니까?
신학자를 수백 수천, ChatGPT를 수백 수천 합쳐놓은 것보다 예수 그리스도를 더 잘 알고 있어도 당신과 내가 무슨 상관있냐고 하는 것이 악령이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은 바오로처럼 그것을 통해 인생이 바뀌어야 하고, 그리스도와의 관계 안으로 들어가야 하며 하느님 사랑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렇게 예수의 원수였던 바오로가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것을 알고 난 다음엔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요 종’이라고 자기의 모든 서간에서 자신을 소개하지요.
이처럼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을 가진 우리는 다른 것들은 쓰레기로 여기는 한편, 그리스도와의 관계 안으로 들어가고 하느님 사랑 안으로 들어가야겠습니다.
- 작은형제회
♠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의 묵상글
<주님의 자비를 믿으십시오>
고해성사를 볼 때마다 의지의 약함을 깨닫게 됩니다.
같은 고백을 반복하기 때문입니다.
진정으로 뉘우치고 결심했다면 같은 잘못을 범하지 말아야 할 터인데, 성찰해 보면 여전히 약점을 드러내고 맙니다.
그래서 늘 고해 신부님 앞에 얼굴을 붉힙니다.
때로는 전혀 모르는 신부님께 고해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넘어짐을 통해서 '하느님의 은총이 없이는 제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구나!' 돌아보게도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 때문에 하느님의 천사들이 기뻐한다”(루카 15,10) 하시며 죄인의 회개를 촉구하십니다.
의인 아흔아홉도 소중하지만 죄인 하나도 결코 그 소중함이 덜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죄인이 회개하면 기쁨이 더합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자비를 입는 죄인 하나가 바로 나라면 그 은총이 얼마나 큰 것인지요?
의인 아흔아홉 중의 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교만함은 없어야 하겠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양 옆의 두 강도 중 하나는 구원되었습니다.
그는 서둘러 회개하였습니다.
죽음을 앞둔 순간이었지만 옆에 계신 예수님께 “예수님, 선생님의 나라에 들어가실 때 저를 기억해 주십시오”(루카 23,42) 하고 간절히 청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으로부터 “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루카 23,43)라는 대답을 얻어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축복의 때를 놓치지 않아야 하고, “회심의 노력이나 기간은 죽는 순간까지 항구해야 합니다.”(시리아의 성 이사악)
못된 행실을 버리고 돌아서는 모습을 주님께서는 언제나 반기십니다.
우리 눈에 보이는 죄인의 모습과 하느님께 드러나는 죄인의 모습은 분명히 다릅니다.
투덜거리는 사람이 아니라 주님의 말씀을 듣는 사람이 되기를 희망합니다.
“어떤 이들은 주님께서 약속하신 것을 미루신다고 생각하고 있지만, 사실은 여러분을 위해서 참고 기다리시는 것입니다.
아무도 멸망하지 않고 모두 회개하게 되기를 바라시기 때문입니다.”
(2베드 3,9)
이사야는 “주님께 돌아오너라. 그분께서 그를 가엾이 여기시리라. 우리 하느님께 돌아오너라. 그분께서는 너그러이 용서하신다.”(이사 55,7)고 말합니다.
요엘 예언자도 “주님의 말씀이다. 그러나 이제라도 너희는 단식하고 울고 슬퍼하면서 마음을 다하여 나에게 돌아오너라. 옷이 아니라 너희 마음을 찢어라. 주 너희 하느님에게 돌아오너라. 그는 너그럽고 자비로운 이 분노에 더디고 자애가 큰 이 재앙을 내리다가도 후회하는 이다.”(요엘 2,12-13)고 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더욱이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다.”(루카 5,32)고 말씀하십니다.
따라서 부끄럼 없이 살면 좋지만 혹 부끄러운 모습이 있더라도 주님을 찾으십시오.
그것이 주님을 기쁘게 해드리는 일입니다.
허물을 안고 있음에도 우리에 대한 사랑을 놓지 않으시는 주님을 믿고 그분의 자비를 청하십시오.
“회개한 죄인의 모습이 가장 아름답습니다.”
(성녀 소화데레사)
넘어지지 않는 것도 중요하지만, 넘어져도 일어설 용기를 지녀야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단 한 번도 용서하시는 일에 소홀하신 적이 없습니다.
우리도 용서를 구하는 일에 결코 소홀하면 안 됩니다.”
(프란치스코 교황)
고해성사를 통해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을 확인하는 날 되시길 바랍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내덕동 주교좌 성당
♠ 전삼용 요셉 신부님의 묵상글
<오늘 복음은 회개한 양이 되라는 말씀이 아니다>
바리사이들은 예수님께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 것을 보고는 투덜거립니다.
“저 사람은 죄인들을 받아들이고 또 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군.”
예수님은 잃어버린 양 한 마리를 찾아 나서는 목자와 은전 하나를 찾아 마을 사람들에게 함께 기뻐해 달라고 말하는 어떤 부인의 비유를 말씀해 주십니다.
“이와 같이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 때문에 하느님의 천사들이 기뻐한다.”
한 사람의 회개는 하느님을 정말 기쁘게 해 드리는 일입니다.
1967년 8월에도 온 국민이 한 사람의 생명이 살아난 것 때문에 기뻐했던 적이 있습니다.
충남 청양 구봉 광산에서 김창선 광부가 수직갱도의 붕괴로 120미터 아래에 갇히는 일이 있었습니다.
다행히 그곳에는 전화가 있어 그가 살아있다는 소식이 온 나라에 퍼지게 됩니다.
언제까지 버틸지도 모르는 한 사람을 위해 열악한 장비로 수많은 사람이 투입되어야 하고 막대한 돈이 들어야 하는데, 구조를 하는 것이 현명한 일이냐고 반대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이에 전 국민에게 그 가족들이 나서서 자신들의 남편이자 아버지를 살려달라고 빌었습니다.
결국 모든 것을 제쳐놓고 구출작업을 하는 것으로 결론이 났고, 2,200여 명이 구조작업에 투입되었습니다.
김창선 씨는 떨어지는 물방울을 옷에 묻혀 그 옷을 씹으며 15일을 버텼습니다.
그가 절망에 빠질 때 가족들은 온 국민이 기도하고 있다고 힘을 주었습니다.
16일째 극적으로 구조되었고, 이는 갱도 밑에서 세계에서 가장 최장 시간을 버틴 기록이 되었습니다.
구출 당시 김 씨는 건강도 정신도 또렷한 상태였습니다.
이 일로 온 국민이 기쁨을 누렸습니다.
한 사람이 살아서?
그럴까요? 그래서 기쁠까요?
애초에 대부분은 그런 사람이 존재하는지도 몰랐고, 사실 4일째 되는 날 김창선 씨에게 전화가 오기 전까지는 그를 포기하려고 했었습니다.
그러면 왜 기쁜 걸까요?
내가 한 생명을 구하기 위해 2,200명과 엄청난 돈을 투입해 살려낼 수 있는 나라에 살고 있다는 것이 기쁜 것입니다.
나도 저런 처지가 되면 나를 똑같이 구해줄 나라에 산다는 것이 기쁜 것입니다.
한 나라가 하느님 나라가 되는 방법은 한 영혼을 구할 수 있는 목자들이 많게 하는 일입니다.
이런 일을 하는 사람들은 한 사람의 생명이 얼마나 소중한지 아는 사람들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체’를 영합니다.
우리가 모두 하느님을 모실 성전이 될 수 있는 존재들입니다.
만약 내가 잃어버린 양을 찾아 나서는 목자가 되지 못한다면 나는 하느님 나라에 사는 게 아닙니다.
의인 아흔아홉은 적어도 하느님 나라에 있는 게 행복한지 아는 회개한 신앙인들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주인을 기쁘게 하지 못합니다.
주인에게 사명을 받은 목자만이 주인을 기쁘게 합니다.
우리는 돌아오는 양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이미 회개한 사람들입니다.
세례를 받아서 파견받는 목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오늘 복음은 회개하라는 뜻으로 하는 말씀이 아닙니다.
우리는 모두 하느님 백성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그냥 머무는 사람이 아니라 목자가 되라는 말씀입니다.
이것이 하느님 나라에 머무는 가장 확실한 길입니다.
회개는 양이 아니라 목자가 되게 합니다.
내 생명이 소중하면 다른 사람의 생명도 소중합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양이 되면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을 찾아 나서는 목자가 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김창선 씨도 1982년 매몰 14일 만에 생존한 태백 탄광 사고 생존자들을 찾아가서 힘을 주었습니다.
그들은 김창선 씨의 사례를 보고 버틸 수 있었다고 했습니다.
김창선 씨는 말합니다.
“죽기 좋아하는 사람은 없겠죠.
하지만 내 목숨 하나가 그토록 소중한 거라곤 사고를 당하기 전에는 생각도 해본 적이 없었습니다.”
한 이야기만 더 소개하겠습니다.
복자품에 오른 바로톨로 롱고(Bartolo Longo)의 이야기입니다.
바르톨로는 나폴리 대학에 다니는 동안 가톨릭 신앙에서 멀어졌습니다.
반 가톨릭 교수들에게 둘러싸인 그는 교회에 대한 그들의 회의주의와 경멸을 흡수했습니다.
그의 호기심으로 인해 그는 강령술에 참여하게 되었고, 결국 사탄 숭배에 가담하게 되었고, 심지어 강신술의 ‘사제’가 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이 길은 그에게 명확성이나 진실을 가져다주기는커녕, 영적으로나 정신적으로 혼란스럽게 만들었습니다.
그는 괴로운 환상과 악몽과 함께 끊임없는 공포, 어둠, 깊은 슬픔을 경험했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신비술 수행을 계속했고 점점 더 방황하게 되었습니다.
결정적인 사건은 폼페이에서 일어났는데, 그곳에서 바르톨로는 절망과 자살 충동에 압도되어 사탄과의 계약의 결과를 반성했습니다.
그는 가톨릭 신부가 하느님께 봉헌된 것처럼 사탄의 신부로서 마귀에게 속박되어 있다고 느끼면서 자신이 영원히 저주 받을 것을 두려워했습니다.
이 절망적인 상태에서 그는 자신에게는 구원이 없다는 믿음과 씨름했습니다.
바르톨로가 갑자기 묵주기도에 관해 들었던 약속, 즉 “묵주기도를 전파하는 사람은 구원받을 것입니다.”라는 약속이 기억난 것은 바로 이 강렬한 암흑의 순간이었습니다.
이 기억은 그에게 희망의 불꽃을 가져다주었습니다.
감동에 사로잡힌 바르톨로는 땅에 엎드려 복되신 동정 마리아께 기도했습니다.
그는 그녀의 약속이 참이라면 묵주기도 신심을 전파하는 데 일생을 바치겠다고 간청했습니다.
그 순간 그는 오랫동안 느꼈던 고통과는 극명한 대조를 이루는 깊은 평화의 느낌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삼종기도를 알리는 교회 종소리가 울리기 시작하여 이 은총의 순간을 더욱 확증해 주었고, 바르톨로는 자신의 진정한 소명을 찾았다고 느꼈습니다.
그는 즉시 도미니코수도회 신부인 알베르토 라덴테(Alberto Radente) 신부를 찾았고, 그 신부는 그에게 영적인 지도를 제공했고, 결국 그의 고백을 들었습니다.
정기적인 모임과 기도, 참회를 통해 바르톨로는 묵주기도에서 자신의 구원을 위한 길 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신비주의의 위험을 피하고 그리스도를 믿도록 돕는 사명을 발견하면서 교회와 화해했습니다.
바르톨로의 개종은 너무나 심오하여 남은 생애를 묵주기도에 바쳤고, 궁극적으로는 폼페이에 유명한 묵주기도의 성모 성당을 짓고 특히 가난한 사람들과 고아들을 위한 자선 사업에 헌신했습니다.
그의 삶은 특히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전구를 통해 하느님 은총의 구원 능력에 대한 증거가 되었습니다.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워….’란 어메이징 그레이스를 작곡한 존 뉴턴 사제는 처음엔 노예상이었습니다.
하느님의 은혜를 깨닫고는 그냥 있을 수 없었습니다.
사제가 되어 인간이 얼마나 귀중한 존재인지 알려주는 목자의 삶을 살았습니다.
목자가 되기 전까지는 아직 회개한 것이 아닙니다.
구원받아 내 생명이 얼마나 소중한지 알면 죽어가는 이들을 두고 풀만 뜯는 양으로 남아있을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회개는 우리를 양이 되는 것을 넘어서서 이젠 길 잃은 양을 살리는 목자가 되게 합니다.
- 수원교구 조원동 주교좌 성당
♠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의 묵상글
<내가 이토록 주님으로부터 극진한 사랑을 받는 존재인데...>
예수님 시대 유다 사회 안에서 공공연하게 무시당하고 멸시당하던 부류의 사람들이 있었으니, 세리, 창녀, 죄인들이었습니다.
특히 거룩함과 불결함을 항상 명확하게 구분하던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에게 그들은 벌레만도 못한 존재였습니다.
그래서 대놓고 무시하고 상종하지도 않았습니다.
천국과는 거리가 먼 사람으로 여겼습니다.
그런데 이땅에 강생하신 예수님께서는 허리를 굽히시고 자세를 낮추신 후, 세상 자상하고 부드러운 시선으로 그들을 바라보셨습니다.
그들과 눈높이를 맞추시고, 어쩔 수 없는 그들의 처지를 이해하셨습니다.
다른 무엇에 앞서 예수님께서는 그들도 하느님 아버지로부터 극진한 사랑을 받는 귀한 존재로 여기셨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해서든지 그들의 실추된 품위와 가치를 되찾아줄 수 있을까 고민하고 또 고민하셨습니다.
오늘의 비유 말씀, 아흔아홉 마리 건강한 양들보다 한 마리 길잃은 양을 찾아 나서는 양치기, 등불을 밝히고 집안 곳곳을 샅샅이 뒤지며 은전 한 닢을 찾는 부인의 스토리는 바로 하느님께서 우리 죄인들을 얼마나 극진히 사랑하시는지를 명확히 드러내고 있습니다.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는데, 그 누구에게도 듣지 못했던 위로와 격려의 말씀을 예수님으로부터 들은 세리와 창녀, 죄인들은 너무나 감동을 받은 나머지 삶의 근본이 흔들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내가 이토록 주님으로부터 극진한 사랑받는 존재인데, 앞으로도 계속 이렇게 살아서야 되겠는가?' 하는 삶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과 성찰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이분이야말로 내 남은 인생을 올바른 길로 이끌어 주실 주님이라는 확신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그간 종사해왔던 어둠의 직업을 뒤로 하고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사방에서 몰려오기 시작한 것입니다.
놀랍게도 말씀을 선포하시는 예수님의 제일 앞쪽에 세리와 창녀, 죄인들이 초집중하며 말씀을 경청하고 있었습니다.
얼마나 은혜로운 복음 대목인지 모르겠습니다.
우리의 하느님께서는 방황과 타락의 길, 어둠 속을 헤매고 있는 사람들을 절대로 무가치한 존재나 실패작으로 여기지 않으십니다.
구치소나 교도소에 한 번 다녀왔다고 인생 낙오자로 낙인찍지 않으십니다.
그보다는 당신의 뜨거운 사랑과 한없는 자비를 통해 그들이 당당히 일어설 수 있도록 지속적으로 자극하시고 격려하고 계십니다.
이렇게 하느님의 자비는 나락으로 떨어진 한 인간을 다시금 일어설 수 있도록 힘을 주십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을 온전히 믿고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받아들여 주신다는 사실을 확신하게 된 세리, 창녀, 죄인들은 비로소 지신의 비참한 처지를 진지하게 돌아보기 시작합니다.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는지, 무엇이 잘못되었는지를 세심하게 성찰하기 시작합니다.
결국 가장 중요한 것은 있는 죄인인 우리를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받아들여 주시고, 이해해주려고 백방으로 노력하시고, 어떻게든 바닥에 널부러져 있는 우리를 일으켜 세우고자 안간힘을 쓰시는 우리 주님의 자비로운 모습입니다.
그 주님 모습으로 인해 우리는 참다운 회개를 하고 새롭게 시작하게 되는 것입니다.
- 살레시오회
♠ 송영진 모세 신부님의 묵상글
<바로 ‘내가’ 잃은 양입니다>
1)
‘되찾은 양의 비유’와 ‘되찾은 은전의 비유’는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에게 말씀하신 비유입니다.
당시에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은 자기들은 의인이라고 자처했던 자들이고, 세리들을 ‘구원받지 못할 죄인들’이라고 생각하면서 무시하고 업신여겼던 자들입니다.
‘되찾은 양의 비유’는 예수님께서 그런 그들에게 두 가지 가르침을 주려고 말씀하신 비유입니다.
(1) 나는 ‘모든 사람’을 구원하려고 왔다.
(2) 의인이라고 자처하는 너희도 잃은 양들일 뿐이다.
오늘날의 신앙인들 가운데에도, 특히 성직자들 가운데에는, 자기도 ‘잃은 양’일 뿐이라는 것을 생각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것처럼 우리도 길 잃은 영혼 하나를 찾으러 나가야 한다.” 라고 말하는 경우가 있는데, 자기 마음대로 자기 자신을 아흔아홉 마리 쪽에 두고 잃은 양을 ‘다른 사람’으로만 생각하는 것은,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의 모습과 다르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이 아니라 ‘바로 나’입니다.
‘내가’ 잃은 양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를’ 구원하려고 오셨습니다.
이 말에 대해서 “나는 예수님을 떠난 적이 없다. 나는 ‘잃은 양’이 된 적이 없다.” 라고 반박할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는데, 그 교만과 위선 자체가 ‘잃은 양’의 모습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사람’을 구원하려고 오셨기 때문에 ‘모든 사람’을 만나셨습니다.
세리들은 그 ‘모든 사람’ 가운데에서 일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도 만나셨고, 의인이라고 자처하는 그들도 구원하려고 애를 쓰셨습니다.
그런데 세리들 쪽에서는 예수님께서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을 만나시는 일에 대해서 아무 말이 없었는데,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 쪽에서는 예수님께서 세리들을 만나시는 일에 대해서 비난하는 일이 많았습니다.
예수님을 독점하고 싶어서 그랬을까?
그것은 아닐 것이고, 무엇이든 예수님에게서 흠 잡을 것을 찾으려고, 또 트집거리를 찾으려고 그랬을 것입니다.
루카복음 7장에, “저 사람이 예언자라면, 자기에게 손을 대는 여자가 누구이며 어떤 사람인지, 곧 죄인인 줄 알 터인데.”라는 어떤 바리사이의 말이 있습니다(루카 7,39).
2)
‘되찾은 양의 비유’에서 “아흔아홉 마리를 광야에 놓아둔 채” 라는 말은 잃은 양 하나를 찾으려고 애쓰는 목자의 애타는 심정을 나타내기 위한 표현일 뿐입니다.
이 말 자체에 큰 의미를 둘 필요가 없습니다.
또 7절의 “회개할 필요가 없는 의인 아흔아홉보다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 때문에 더 기뻐할 것이다.” 라는 말씀은 양을 되찾은 목자의 기쁨을 강조하는 표현이고, 의인들에 대해서는 기뻐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닙니다.
이미 ‘회개의 완성’에 도달한 의인들은 언제나 항상 주님께 ‘큰 기쁨’을 드리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잃은 양 하나’를 되찾은 기쁨도 ‘큰 기쁨’입니다.
무엇이 더 큰 기쁨이냐고 묻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앞에서 말한 “바로 내가 잃은 양이다.” 라는 말에 연결하면, 주님께서는 ‘나의 회개’를 크게 기뻐하시고, 또 내가 회개한 뒤에 충실하게 신앙생활을 하는 것도 크게 기뻐하십니다.
반대로, ‘내가’ 죄를 짓고, 죄 속에서 살면서 회개하지 않고 있으면, ‘크게’ 슬퍼하시고, 회개했다가 다시 죄를 지으면 ‘더 크게’ 슬퍼하십니다.
3)
그런데 우리는 우리가 회개해야 하는 이유나 목적이 일차적으로 ‘나 자신의 기쁨’이라는 것을 잊으면 안 됩니다.
내가 회개해서 구원을 받게 되면, 그것은 나 자신이 가장 먼저, 가장 크게 기뻐하게 되는 일입니다.
그리고 그런 나를 보면서 주님께서 함께 기뻐하실 것입니다.
내가 회개하는 것은 주님을 위해서가 아니라, 바로 나 자신이 살기 위해서입니다.
나를 주님께서 애타게 찾으시는 것도 당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나를 위해서입니다.
신앙생활 자체가 ‘나 자신’이 구원받으려고 하는 생활입니다.
잘하고 있다고 자랑할 것도 없고 생색 낼 것도 없습니다.
병에 걸린 내가 병원에 가는 것은 나 자신이 아프기 때문이고, 의사를 위해서가 아니라 나를 위해서 갑니다.
그리고 의사가 시키는 대로 약을 먹는 등 여러 가지 노력을 하는 것도 ‘나를’ 위한 일이지 의사를 위한 일이 아닙니다.
그러다가 병을 고치고 건강을 되찾게 되면, 의사도 기뻐하지만 ‘나 자신’이 가장 크게 기뻐하게 됩니다.
신앙생활은 바로 그런 생활입니다.
- 전주교구 상지원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의 묵상글
<깨달음의 은총, 깨달음의 여정 - 깨달음의 사랑과 지혜, 그리고 자유>
“거룩하신 그 이름을 자랑하고,
주를 찾는 마음은 즐거워하라.
주님 생각하라, 그 권능을 생각하라,
언제나 그 얼굴을 그리워하라.”
(시편 105,3-4)
새벽, 교황님 홈페이지에서 교황님의 읽은 글귀가 잊혀지지 않습니다.
“희망은 모든 신자의 선물이자 의무이다.”
모든 신자가 희망의 선물을 지니고 희망의 순례자로 살아야 하는 의무를 지닌다는 말씀입니다.
“믿음은 우리를 하느님께 인도하는 여정이다.”
하느님을 향한 믿음의 여정이라는 말입니다.
믿음의 길을 통해 하느님께 이릅니다.
“기도할 때, 성령은 우리의 도움이 되기 위해 오신다.”
기도와 성령은 함께 갑니다.
기도의 사람은 성령의 사람입니다.
모두가 평범한 말마디이지만 마음에 새롭게 와 닿으며, 우리의 깨달음의 여정에 일조합니다.
오늘 옛 어른의 말씀도 마음에 와닿습니다.
“나 자신만큼은 나를 포기해서는 안된다.
어떤 상황에서도 나를 해쳐서는 안된다.”
<다산>
“스스로 해치는 자와는 더불어 말할 수 없고, 스스로 포기한 자와는 함께 일할 수 없다.”
<맹자>
새삼 ‘넘어지는 게 죄가 아니라 자포자기의 절망으로 일어나지 않는 게 죄’임을 실감합니다.
스스로 포기한 자포자기 절망의 사람이 되는 일은 결코 없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니 넘어지면 즉시 일어나 다시 시작하는 파스카의 삶이 제일입니다.
평범하나 지극히 지혜롭고 용기있는 파스카의 삶입니다.
이 또한 깨달음의 여정에 도움이 되는 말마디들입니다.
어제의 느낌을 잊지 못합니다.
은은한 향기로 남아있는 사람과 만남이나 글이 있는가 하면, 상처나 기분 얹짢은 느낌으로 남아있는 사람과 만남이나 글도 있습니다.
어제 읽은 글이 그러했습니다.
글은 사람이라 했는데 웬지 교만하고 건방지다 싶었고 느낌도 편치 않았습니다.
그런가 하면 얼마전 독료한 책은 친지들에게 품격있고 아름답고 감동적인, 향기로운 책이라 적극 추천하기도 했습니다.
역시 글은, 말은, 사람입니다.
추사 김정희의 '문자향 서권기(文子香 書卷氣)'라는 말마디에 적극 공감합니다.
문자의 향기와 서책의 기운이라는 뜻으로, 학문적 수양의 결과로 나타나는 고결한 품격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쓴 글에서는 문자의 향기가 느껴지고 마주 대하면 책의 기운이 풍깁니다.
정말 이런 책이 깨달음을 주는, 길이 보관하고 싶은 책입니다.
이런 고전(古典)의 책같은 사람이라면 늘 만나도 새롭게 느껴질 것입니다.
문자향 서권기의 정점에 있는 책이 바로 성서입니다.
오늘 복음과 독서를 읽으며 묵상하는 순간 “아, 예수님과 바오로 사도는 진정 깨달음의 사람, 각자(覺者)구나!”하는 깨달음이 마음을 쳤습니다.
이런 깨달음이 우리의 눈을 열어주어 이해의 지평을 넓혀주고 자유롭게 합니다.
깨달음의 사랑과 지혜요, 깨달음의 자유입니다.
“아, 그렇구나!” 깨달음의 지혜가 참으로 우리를 날로 자유롭게 합니다.
그러니 이런 깨달음을 주는 사람이나 글이 말이 좋은 사람이자 글이요 말이라 할 수 있습니다.
숱한 눈이 없는 지식들보다는 보는 눈을 주는 깨달음의 지혜가 백배 낫습니다.
그러니 깨달음의 여정은 개안의 여정이 됩니다.
깨달음의 사람을 각자(覺者)라 부르는데, 깨달을 '각覺'자 안에는 볼 '견(見)' 자가 들어 있어 깨달음과 보는 눈이 밀접한 관계에 있음을 봅니다.
실로 영적성장은 깨달음의 여정, 개안의 여정을 통해 날로 깊어지는 사랑과 지혜, 자유의 삶에 있음을 봅니다.
제가 참 많이 나눈 무지의 병의 치유에도 깨달음의 사랑과 지혜가 답임을 깨닫습니다.
참으로 부단히 추구할 바 깨달음의 은총이요 깨달음의 여정을 통해 무지로부터 벗어나 날로 내적으로 자유로워지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무지의 사람들인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과 깨달음의 예수님과는 참으로 극명한 대조를 이룹니다.
“저 사람은 죄인들을 받아들이고 또 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군.”
투덜거리는 자기중심적 율법주의적 폐쇠적 사고로 꽉 막힌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이 참 답답하게 느껴집니다.
신학 지식은 많았을지 몰라도 무지에 눈먼, 참으로 자유롭지 못하고 지혜와 사랑이 결핍되어 있음을 봅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주님의 되찾은 양의 비유와 되찾은 은전의 비유를 통해 빛나는 예수님의 깨달음의 지혜입니다.
하느님의 기쁨에 대한 예수님의 깨달음이 진정 복음입니다.
두 예화의 결론에서 하느님의 마음을, 하느님의 기쁨을 전하는 예수님의 깨달음의 사랑과 지혜가 참으로 우리를 자유롭게 하고 기쁨을 줍니다.
깨달음에서 나오는 다음과 같은 확신의 고백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이와 같이 하늘에서는, 회개할 필요가 없는 의인 아홉보다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 때문에 더 기뻐할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이와 같이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 때문에 하느님의 천사들이 기뻐할 것이다.”
아무리 공부 많이 하여도 지식이 많다 하여도 이런 깨달음에 이르지 못합니다.
말 그대로 깨달음의 지혜와 사랑의 은총을 통해 하느님을 체험한 예수님이심을 깨닫습니다.
새삼 무지에 대한 답은 깨달음의 지혜와 사랑, 그리고 자유뿐임을 확인하게 됩니다.
아무리 지식이 차고 넘쳐도 깨달음의 눈이 없으면 모두가 무거운 짐의 쓰레기 더미에 불과할 뿐이겠습니다.
바로 복음에 자주 등장하는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이 좋은 반면교사가 됩니다.
오늘 필리피서의 주인공 바오로 사도야말로 예수님에 버금가는 각자임을 봅니다.
참으로 깨달음의 지혜와 사랑, 깨달음의 기쁨과 자유로 충만한 바오로의 고백이 덩달아 우리를 기쁘게, 자유롭게 하고 용기백배 힘을 줍니다.
진리이신 주님께 대한 깨달음이 참으로 우리를 자유롭게 함을 봅니다.
“주님 안에서 기뻐하십시오.
하느님의 영으로 예배하고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자랑하며 육적인 것을 신뢰하지 않는 우리야말로 참된 할례를 받은 사람입니다.
...나에게 이롭던 것들을 나는 그리스도 때문에 모두 해로운 것으로 여기게 되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나의 주 그리스도 예수님을 아는 지식의 지고한 가치 때문에, 다른 모든 것을 해로운 것으로 여깁니다.
나는 그리스도 때문에 모든 것을 잃었지만 그것들을 쓰레기로 여깁니다.
내가 그리스도를 얻고 그분 안에 있으려는 것입니다.”
깨달음의 중심에 진리 자체이신 그리스도 예수님이 계십니다.
얼마나 많은 이들이 이런 깨달음의 경지를 누리지 못하고 무지의 어둠속에서, 온갖 잡다한 쓰레기 더미속에서 무거운 짐에 눌려 힘겹게 살아가는지요!
말 그대로 살 줄 몰라 불행이요 살 줄 알면 행복입니다.
참으로 날마다 이 거룩한 미사 중 주님께 청해야 할 깨달음의 은총입니다.
깨달음의 사랑과 지혜, 자유의 은총입니다.
오늘따라 마음에 새롭게 와닿는 주님의 초대말씀입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마태 11,28)
아멘.
- 성 베네딕도회 요셉 수도원
♠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의 묵상글
<회개>
시간이 흐르면서 변화되는 것이 있습니다.
변화에 적응하는 사람이나 기업은 성장하고,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는 사람이나 기업은 힘들게 됩니다.
40년 전에 논문 쓸 때입니다.
당시는 원고지에 손으로 쓰는 경우가 많았고, 수동 타자기로 논문을 작성했습니다.
저는 기업체에서 근무하는 청년의 도움으로 전동 타자기로 논문을 작성했습니다.
글씨체도 예뻤고, 깔끔했습니다.
5년 후에 석사 논문을 쓸 때입니다.
대부분이 전동 타자기로 논문을 작성했습니다.
저는 기업체에 다니는 주일학교 교사의 도움으로 삼보컴퓨터로 논문을 작성했습니다.
편집과 교정이 간편했습니다.
컴퓨터의 도움이 없었으면 논문 완성이 어려웠을 겁니다.
지금은 손으로 논문 쓰는 사람, 타자기로 논문 쓰는 사람을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컴퓨터를 이용해서 자료를 검색하고, 논문을 작성합니다.
전화기의 발전은 눈이 부실 정도입니다.
제가 어릴 때는 집에 전화기가 없는 가정이 많았습니다.
전화기를 설치하려면 예치금도 많이 냈습니다.
처음 전화기가 집에 들어왔을 때가 생각납니다.
50년이 지났는데 아직도 전화번호가 기억납니다.
이동통신이 발전하면서 사람들은 저마다 손전화를 가지고 다니기 시작했습니다.
30년 전입니다.
인터넷과 연결된 스마트폰은 말 그대로 똑똑합니다.
전화기로 예약하고, 전화기로 은행 업무 보고, 전화기로 문자 보내고, 전화기로 검색합니다.
어쩔 수 없습니다.
시대의 흐름에 적응하고, 함께 가야 합니다.
‘ChatGPT 4o’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생성형 인공지능입니다.
구글, 네이버, 다음이 검색엔진이라면 챗지피티는 대화를 통해서 문제를 해결해 줍니다.
대화를 통해서 질문에 응답합니다.
대화를 통해서 새로운 방향을 제시해 줍니다.
마치 개인비서처럼 저를 도와줍니다.
강론 준비할 때, 한국어를 영어로 번역할 때, 문제의 해결 방안을 찾을 때 도움을 받고 있습니다.
2025년 생성형 인공지능의 흐름에 대한 강의를 들었습니다.
기존의 대화를 통한 인공지능도 계속 발전할 거라고 합니다.
대화는 물론, 시청각을 통한 인공지능이 시작될 거라고 합니다.
행동하는 인공지능도 시작될 거라고 합니다.
인공지능은 기업과 개인의 자문을 해 줄 거라고 합니다.
창의적인 작업, 예술, 콘텐츠 제작 분야에서 활용이 증가할 거라고 합니다.
AI 기술의 발전과 함께 AI 윤리 문제에 대한 논의도 심화할 거라고 합니다.
다양한 산업 분야에서 특정 업무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맞춤형 AI 해결책이 더욱 많이 개발될 거라고 합니다.
데이터 처리가 클라우드에 의존하지 않고, 기기 자체에서 실시간으로 처리되는 엣지 AI의 사용이 증가할 거라고 합니다.
이러한 흐름은 AI 기술의 성숙도와 함께 점차 많은 분야에 영향을 미치고, AI가 사회 전반에 걸쳐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될 거라고 합니다.
이런 흐름 역시 피할 수 없다면 배워야 합니다.
오늘 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시대의 흐름을 정확히 읽었습니다.
그리고 그 흐름에 자신의 모든 걸 바쳤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나에게 이롭던 것들을, 나는 그리스도 때문에 모두 해로운 것으로 여기게 되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나의 주, 그리스도 예수님을 아는 지식의 지고한 가치 때문에, 다른 모든 걸 해로운 것으로 여깁니다.”
바오로 사도는 육적인 것들을 추구하면서 살았다고 합니다.
성공, 명예, 권력, 재물을 중요한 가치로 여겼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다마스쿠스로 가는 길에서 예수님을 체험했습니다.
그리고 이제 영적인 것들을 추구하게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십자가, 복음, 부활, 영원한 생명을 중요한 가치로 여겼습니다.
우리는 바오로 사도의 이런 체험을 ‘회심’이라고 부릅니다.
삶의 방향을 근본적으로 바꾸는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바리사이에서 이방인을 위한 사도가 되었습니다.
수많은 사람을 하느님께로 인도하는 신앙의 별이 되었습니다.
복자 최일광(안드레아)는 종교를 배반하라는 말을 듣고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나에게는 두 개의 하느님 나라가 있습니다.
하나는 이 세상에 있는 하느님 나라요, 다른 하나는 저 하늘에 있는 하느님 나라입니다.
이 세상에서는 임금을 섬기며 살고, 저 하늘에서는 영원히 하느님을 섬길 것입니다."
당시 교회는 백정이었던, 천민이었던 최일광을 형제로 받아들였습니다.
복자 최일광 안드레아에게 모두가 ‘하느님의 자녀’라고 부르는 교회 공동체가 하느님 나라였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하느님께로 갈 수 있는 새로운 길을 알려주십니다.
그것은 ‘회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이와 같이 하늘에서는, 회개할 필요가 없는 의인 아흔아홉보다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 때문에 더 기뻐할 것이다.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 때문에 하느님의 천사들이 기뻐한다.”
그렇습니다.
주 그리스도 예수님을 아는 지식의 지고한 가치 때문에 다른 모든 것을 버릴 수 있는 것이 진정한 회개입니다.
- 미국 댈러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성당
♠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의 묵상글
<기쁜 소식>
갑곶성지에 있을 때의 일 하나가 생각납니다.
부활 시기였는데, 한 순례객이 물어볼 것이 있다면서 제게 오셨습니다.
“성지까지 왔으니 십자가의 길을 하자고 일행에게 말하니, 한 분이 부활 시기에는 예수님 부활의 기쁨을 나누는 시기라서 십자가의 길을 해서는 안 된다고 하세요.
전에도 부활 시기에 와서 십자가의 길을 한 적이 있었는데, 제가 잘못한 것인가요?”
그렇지 않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전례 주년은 신자들의 신앙을 위한 것으로, 한 해를 보내며 구원의 사건들을 기억하고 기념하도록 돕는 것이지요.
따라서 우리 삶은 과거의 일을 기억하며 지금 열심히 살아서 다가올 종말을 향해 신앙의 여정이기에, 부활 시기에도 주님 고통과 죽음을 묵상하고, 사순 시기에도 부활의 기쁨을 누릴 수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런데 걱정이 되는 것입니다.
이 자매님이야 제게 물어봐서 해결되었지만, 많은 분이 모두 사순 시기에만 십자가의 길을 해야 한다는 완고한 마음을 가지고 있지 않을까 싶었습니다.
앎이란 정말로 중요합니다.
자기에게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도 큰 영향을 미치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잘못된 지식을 전달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제대로 알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반대편에 있었던 사람들,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이 바로 제대로 알려고 하지 않았던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하느님의 뜻은 전혀 알려고 노력하지 않고 자기들의 관습만이 옳다면서 하느님의 반대편에 서게 됩니다.
모든 사람의 구원을 위해 오신 예수님인데, 그들은 죄인들을 받아들이고 그들과 음식을 먹는다면서 죄인 취급을 합니다.
그래서 잃어버린 양과 은전의 비유를 들려주십니다.
이 비유 말씀은 잃어버린 것을 되찾는 것과 되찾은 뒤에 이루어지는 기쁨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이렇게 죄인 한 사람의 회개를 크게 기뻐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인간의 기준으로만 생각하면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게 됩니다.
그런데 이 인간의 기준으로만 생각하고, 인간의 기준으로 판단하고 있으니 심지어 하느님을 단죄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앎은 과연 어떤가요?
하느님의 사랑을 알려고 노력하지 않고, 그 사랑에 반대되는 말만을 고집하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요?
하느님께서는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잔치를 벌인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기쁜 소식인 것입니다.
겸손의 마음으로 사랑에 집중하면 하느님 나라에 가까워지기 때문입니다.
- 인천가톨릭대학교 성김대건성당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