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덕궁 부용정에서 술판을 벌인 사람
얼마 전, 안중근 의사의 일생을 조명하는 글을 집필 중인 P교수가 흥미로운 증언을 했다. 박정희 대통령의 서체와 이토 히로부미의 서체가 비슷하다는 것이다. 나는 일찍이 평행이론처럼 일치하는 두 사람의 삶에 관한 글을 쓴 바 있었다.
두 사람에게는 묘한 공통점이 있다. 가난한 농민의 아들로 태어나 정상까지 무섭게 출세하였으며 공교롭게도 사망일과 그 원인까지 일치한다. 이토 히로부미는 1841년 10월 14일에 태어났고, 박정희는 1917년 11월 14일에 태어났다. 태어난 날짜가 ‘14일’로 같았다. 이토 히로부미 생일의 한 달 후가 박정희의 생일인 셈이다. 이토 히로부미의 일본 국장(國葬)일이 11월 4일인 것을 감안하면 11월 14일이라는 박정희의 생일이 예사처럼 느껴지지 않는다.
사망일과 원인은 똑같다. 이토 히로부미는 1909년 10월 26일, 하얼빈 역에서 안중근 의사가 쏜 총에 의해 사망하였고, 박정희는 1979년 10월 26일, 궁정동 안가에서 김재규가 쏜 총에 의해 쓰러진다. 그날은 이토 히로부미가 사망한 지 정확히 70년 되는 날이었다. 이토 히로부미는 67세, 박정희는 63세의 나이로 모두 60대에 세상을 떠난 것이다.
인생의 쌍곡선도 비슷했다. 이토 히로부미는 44세 무렵에 실질적인 총리가 되었으며, 박정희는 44세에 5.16에 성공하여 2년 3개월 동안 군사 정부의 수령으로 활동하였다. 두 사람 모두 헌법을 새로 고쳤는데, 이토 히로부미는 일본 메이지 정부의 헌법 초안을 만들었고, 박정희는 세 번이나 헌법에 손을 대었다.
두 사람 모두 유신(維新)에 매달렸다는 점도 같다. 1868년 12월, 일본은 막부가 종식되고 메이지 천황을 앞세운 하급무사출신 개화파 혁명군들이 정권을 잡고 입헌군주제를 세웠는데 여기에 가담한 28세의 이토 히로부미는 처음으로 조정관직에 진출하여 메이지유신(明治維新)의 총아로 활동하였다. 1972년 10월, 박정희는 장기집권을 위하여 유신체제를 가동하였는데, 그의 유신체제는 반대세력을 제거하고 일인독제체제를 수립하기 위한 비상조치의 하나로 그가 시해될 때까지 무려 7년 동안 지속되었다.
만주와의 인연도 깊었다. 이토 히로부미는 일본이 대륙으로 뻗어나가기 위하여 만주가 필요하다고 보고 만주국 건설의 청사진을 꿈꾸었다. 1909년 10월, 고령의 몸으로 만주 하얼빈까지 간 이유도 러시아와 철도협상을 벌이기 위해서였다. 박정희는 알려진 대로 만주의 신경(지금의 장춘)군관학교를 거쳐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였고, 8·15 광복 전까지 주로 만주 관동군에 배속되어 중위로 복무하였다. 이토 히로부미는 만주에서 죽고, 박정희는 만주를 발판으로 성장하였다.
이토 히로부미는 1866년 우메코와 재혼하였는데, 그녀는 시모노세키의 기생 출신이었지만 가장 아름다운 일본의 현모양처형 총리 부인이 되었다. 박정희도 1950년, 육영수 여사와 재혼하였는데, 육영수 여사는 지금까지도 한국의 대표적인 현모양처형 영부인으로 회자되고 있다. 우연인지 몰라도 우메코 사망(1924년 4월 15일) 1년 뒤인 1925년에 육영수 여사가 태어났으며, 우메코 사망 50년 뒤인 1974년 8월 15일, 육영수 여사는 광복절 기념식장에서 일본에서 태어난 조총련계 재일 한국인인 문세광에 의해 피살되었는데, 놀랍게도 문세광의 모친은 육영수 여사와 같은 ‘육(陸)’씨였다. 육(陸)씨는 결코 흔하지 않은 성씨이기에 두 사람의 인연은 기이할 정도라 하겠다.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안중근 의사와 박정희를 저격한 김재규의 삶도 평행이론처럼 닮아있다. 안중근 의사의 사망일은 1910년 3월 26일이었다. 김재규는 1926년 3월 6일에 태어났다. 안중근 의사가 사망한 날인 ‘26’이라는 숫자는 김재규가 태어난 해인 ‘26’과 일치한다. 유난히 ‘26’과 인연이 깊은 두 사람은 똑같이 ‘26일’을 거사일로 잡았다. 안중근 의사는 1909년 10월 26일에 이토 히로부미를, 김재규는 70년 후인 1979년 10월 26일에 박정희를 저격한 것이다.
이토 히로부미와 박정희의 평행이론은 여기서 끝이 아니다. 정조가 사랑했던 창덕궁 부용정에서 술판을 벌인 사람은 역사상 단 두 명이었다. 바로 이토 히로부미와 박정희다. 그들에게 ‘규장각의 저주’라도 내린 것이었을까. 이토 히로부미는 규장각의 책 천여 권을 일본으로 무단 반출한지 몇 달 지나지 않아 안중근 의사의 총에 쓰러졌고, 박정희는 안가의 술상 앞에서 김재규의 총에 의해 목숨을 잃고 말았다. 우연이 반복되면 필연이라 하였던가. 이토 히로부미와 박정희, 안중근 의사와 김재규의 운명을 회상하며, 다시는 규장각의 저주가 되풀이 되지 않기만을 기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