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창 기억력이 좋을 나이엔 백 수 가까운 시를 외고 있었다. 주로 김소월, 박인환 등의 시와 번역시도 꽤 포함돼 있었다. 시의 독특한 운율과 멋있는 구절에 대한 그 나이의 독특한 감수성 때문에 그럴 수 있었을 뿐이지, 시와 참맛에 대해 뭘 좀 알고 있었던 것 같진 않다. 또 그럴 나이도 아니었다.
얼마 전 책을 정리하다가 「解放前後詩人選集」인가 하는 데서 박인환의 시를 다시 읽어 볼 기회가 있었는데 전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더군다나 멋있는 구절에 대한 감수성마저 둔화되고 보니 한때 그 시를 욀 수 있었던 게 신기하게 느껴질 지경이었다. 지금은 외고 있는 시가 거의 없다. 김소월의 시 서너 수 정도를 완전히 욀 수 있을 정도다. 이것들이나마 곧 잊혀질 것이다. 자주 떠올리지 않으므로.
이런 이른바 애송시와는 상관없이 나의 일상에 자주 떠오르는 시가 있다. 떠오른다기보다는 가로 걸린다고 하는 표현이 더 적절할지도 모르겠다. 시라는 고상한 게 남의 구질구질한 일상을 간섭하는 것도 뭣한데 더군다나 문지방처럼 가로 걸려서야 시의 품위에 관한 문제라고 생각하지만 어쩔 수가 없다. 그 시의 품위에 관한 문제이기보다는 차라리 나 자신의 품위에 관한 문제로 돌리고 싶다.
김수영의 시에 이렇게 시작되는 시가 있다.
'왜 나는 조그마한 일에만 분개하는가……
50원짜리 갈비가 기름덩어리만
나왔다고 분개하고 옹졸하게 분개하고
설렁탕집 돼지 같은 주인년한테
욕을 하고 옹졸하게 욕을 하고……'
<어느날 古宮을 나오면서>라는 시는 이렇게 시작되고 내가 욀 수 있는 것도 거기까지다.
중간은 왼다기보다는 이야기의 줄거리처럼 대강대강 기억하고 있고 건너뛰어서 마지막 구절을 외고 있다. '모래야 나는 얼마큼 적으냐 바람아 풀아 나는 얼마큼 적으냐 정말 얼마큼 적으냐……'
「어느 날 古宮을 나오면서」는 이렇게 끝나고 있다. 김수영의 시는 감수성도 기억력도 한창 쇠퇴해 갈 나이에 접했건만 「꽃잎」 등 몇 수는
거의 완전히 욀 수가 있는 건 이상한 일이다. 그러나 「어느 날 古宮을 나오면서」는 이렇게 잘 외워지는 김수영의 시에도 포함되지 않는다. 물론 나는 이 시가 김수영의 여러 시 중에서 잘된 시인지 그저 그런 시인지 잘 모르겠다. 더 솔직히 말한다면 김수영이란 시인이 훌륭한 시인인지 그저 그런 시인인지도 잘 모르겠다.
다만 '왜 나는 조그만 일에만 분개하는가'로 시작되는 그의 시를 통해 그를 나와 매우 친했던, 서로 약점까지 속속들이 알아서 점잖고 싶을 땐 슬쩍 피하고 싶게 친했던 사람처럼 착각하고 있을 뿐이다. 나야말로 얼마나 하찮은 일에만 분개하는가.
고작 불쌍한 안내양한테 분개하고, 1백20원짜리 연탄이 80원짜리 연탄보다 화력이 약하다고 분개하고, 동평화시장에서 산 홈웨어에 달린 열개의 단추가 하나도 안빼고 차례차례 모조리 떨어져서 다시 달고나서 분개하고, 객식구가 비씬 참기름을 헤프게 썼다고 분개하고 일기예보가 안 맞아서 분개하고, 꿀 같은 낮잠을 깨운 불청 방문객들을 증오한다. 고작 그 정도가 나의 분개의 분수이다.
그정도의 분개의 경력을 가지고 엉뚱하게도 정의파를 자처하고 싶을 때마다 이 싯귀가 떠오르면서 나는 그만 못된짓을 하다가 들킨것처럼 움찔하고 만다. 그렇다고 그 싯귀가 주는게 준엄한 경고나 가차없는 비난이란 소리가 아니다. 냉소적인 것 같으면서도 따뜻한 연민? 그건 필시 시인의 자신에 대한 연민이었으련만 그것이 읽는 사람까지를 비웃는 듯 위로한다. 마치 동변상린처럼.
그러나 하나의 작품을 완성하고 나서 떠오르는 이 싯귀는 나를 참담하게 낭패시키고 만다. 젖 빨던 시절로부터 축적한 용기에다가 뱀의 지혜까지를 빌어다 자신 있게 완성한 작품이 실은 '…50원짜리 갈비가 기름덩어리만 나왔다고 분개하는' 나의 일상의 옹졸한 분개의 한도에서 한 발자국도 못 벗어나 있다는 걸 깨닫게 해주기 때문이다.
그럴 때 나는 애꿎은 연탄재나 힘껏 쓰레기통에 미어 부딪쳐 본다. 그리고 그 분분한 먼지 속에서 중얼거린다. '모래야 나는 얼마큼 적으냐
바람아 먼지야 풀아 나는 얼마큼 적으냐
정말 얼마큼 적으냐……'
참으로 자신과, 자신의 분노와, 자신의 작품이 하찮게 느껴진다.. 그렇다고 새해의 소망을 내 분개가 큰 것에 미치도록 크게 해달라고 빌진 않겠다. 더군다나 분개로부터 아주 벗어나게 해달라고 빌지도 않겠다. 어쩌면 나는 하찮은
일에나마 분개하지 않을진대 차라리 나를 죽게 하옵소서, 라고 빌고 싶은지도 모르겠다.
하늘의 무지개를 볼 적마다 가슴이 뛰노는 일이 어렸을 적부터 어른 된 지금까지 변함이 없는데 만약 그렇지 않게 될진대 차라리 죽게 해달라고 워즈워드의 소망에 비해 그건 너무도 삭막하고 비시적인 소망이다. 그런 걸 모르진 않더라도 어쩌랴. 한번 정정당당하게 분개하지 못하고 그걸 비켜나서 하찮은 일에 속을 끓이는 옹졸함과 비굴함이 오직 내가 설 수 있는 떳떳한 자리의 말석에서의 일이니 어쩌랴. 이건 역설도 아니고 말장난도 아닌 곧이곧대로의 고백이다.
그래서 내가 「어느 날 古宮을 나오면서」를 정말로 좋아하는 까닭은 그 첫구절에 있지도 않고 마지막 구절에도 있지 않다. 실은 중간쯤에 있는, '떨어지는 은행나무잎도 내가 밟고 가는 가시밭길...' 이 구절 때문에 그 시가 좋다. 그 구절엔 옹졸함에 대한, 비굴함에 대한 한결같은
자조(自嘲)와 연민에 문득 떳떳한 긍지 같은 게 드러나 보여서다. 그러나 보다 자주 처음 구절을 떠올리면서 나는 내 일상을 산다.
- 박완서
어느날 고궁을 나오면서
시 김수영
낭송 유부식
왜 나는 조그마한 일에만 분개하는가
저 王宮 대신에 王宮의 음탕 대신에
五十원짜리 갈비가 기름덩어리만
나왔다고 분개하고 옹졸하게 분개하고
설렁탕집 돼지같은 주인 년한테
욕을 하고 옹졸하게 욕을 하고
한번 정정당당하게
붙잡혀간 소설가를 위해서
언론의 자유를 요구하고 越南파병에
반대하는 자유를 이행하지 못하고
二十원을 받으러 세번씩 네 번씩
찾아오는 야경꾼들만 증오하고 있는가
옹졸한 나의 전통은 유구하고 이제
내 앞에 情緖로 가로놓여 있다
이를테면 이런 일이 있었다
부산에 포로수용소의
第十四野戰病院에 있을 때
정보원이 너어스들과 스폰지를 만들고
거즈를 개키고 있는 나를 보고
포로경찰이 되지 않는다고
남자가 뭐 이런 일을 하고 있느냐고
놀린 일이 있었다
너어스들 옆에서
지금도 내가 반항하고 있는 것은
이 스폰지 만들기와
거즈 접고 있는 일과 조금도 다름없다
개의 울음소리를 듣고 그 비명을 지고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애놈의 투정에 진다
떨어지는 은행나무잎도 내가
밟고 가는 가시밭
아무래도 나는 비켜서 있다
絶頂 위에는 서 있지 않고
암만해도 조금쯤 옆으로 비켜서 있다
그리고 조금쯤 옆에 서 있는 것이 조금쯤
비겁한 것이라고 알고 있다!
그러니까 이렇게 옹졸하게 반항한다
이발쟁이에게
땅주인에게는 못하고 이발쟁이에게
구청직원에게는 못하고
동회직원에게도 못하고
야경꾼에게 二十원 때문에
十원 때문에 一원 때문에
우습지 않으냐 一원 때문에
모래야 나는 얼마큼 적으냐
바람아 먼지야 풀아
나는 얼마큼 적으냐
정말 얼마큼 적으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