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현재 기준으로 서울특별시의 총 인구수는 약 10,197,320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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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요약
한반도 중앙부에 있는 대한민국의 수도.
면적 : 605.52㎢
행정구분 : 25구 522동
시청 소재지 : 중구 태평로1가 31
시의 꽃 : 개나리
시의 나무 : 은행나무
시의 새 : 까치
1394년(태조 3)부터 한국의 수도가 되어 정치·경제·산업·사회·문화·교통의 중심지가 되어 왔다.
2. 역사
1) 고대
출토유물과 고고학적 연구 결과 BC 4000년경 선사시대부터 한강을 중심으로 집단거주가 밝혀졌다. 북방과 중국을 통하여 금속문화가 전래되고 부족연맹체 사회가 형성되었고, BC 108년 한사군이 설치되어 진번군(眞番郡)의 세력하에 있었다. 한사군 자체의 변천과 우리 민족의 저항으로 진번군 세력이 물러가고 마한(馬韓)에 속하였다.
BC 18년경부터는 백제 세력이 이 지역에서 성장하기 시작했는데 백제의 발상지는 하북위례성(河北慰禮城)으로, 지금의 도봉구 미아동 지역으로 추정된다. 그후 고구려·백제·신라의 삼국이 고대국가를 형성하자 한반도의 중심지로 삼국이 세력 충돌을 일으키는 군사적 요충지가 되었다.
고구려의 광개토대왕은 392년 백제를 공격하여 서울지역을 일시 점령하였고, 이어서 475년 장수왕이 다시 백제를 점령한 후 북한산주(北漢山州)를 설치, 위례성을 남평양(南平壤)이라고 하였다. 그후 실지회복을 꾀하고 있던 백제는 점차 국력을 신장하여 영토확장을 염원하던 신라와 연합하여 551년 고구려 세력을 한강 유역에서 물리쳤다.
그러나 백제의 옛 수도였던 이 지역을 신라가 차지함으로써 신라와 백제 간의 동맹은 깨어지고 다시 전쟁이 발발하였다. 이 전쟁으로 백제 성왕이 전사하였고, 신라 진흥왕이 이 지역을 완전히 차지하여 신주(新州)를 설치한 후 북한산주 또는 남천주(南川州)라고 개칭하였다.
신라는 삼국을 통일하고 전국을 9주로 나눌 때 한산주에 편입시켰다. 경덕왕은 한산주를 한주라 개칭하고 이 지역을 한양군(漢陽郡)이라 하였다.
2) 중세
고려 성종에 이르러 12목(牧)의 하나인 양주목(楊州牧)으로 승격하여 지방행정구역의 중요한 단위가 되었고, 이에 따라 정치적 비중도 높아졌다. 1067년(문종 21)에 이르자 3소경(小京:서경·동경·남경)의 하나인 남경(南京)으로 승격하고 유수관을 두어 지방제도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당시 남경의 범위는 동으로 대봉(大峰:낙산), 서로 기봉(岐峰:안산), 북으로 면악(面嶽:북악산), 남으로 사리(沙里:용산 남단)에 이르렀다. 남경의 설치는 서울 역사상 획기적이었던 것으로, 이때 처음으로 궁궐이 창건되었고, 인근의 백성들을 이주하게 하여 도시로서의 면모를 갖추었다. 그후 숙종이 현재의 청와대 자리에 새 궁궐을 낙성하고 천도를 계획하였으나 숙종의 사망으로 무산되었다.
1231년 이래 몽골의 침입을 받고 수도를 잠시 강화로 천도하여 한때 남경은 몽골군의 주둔지가 되기도 하였다. 충렬왕 때 중국 원(元)나라의 간섭으로 3경 제도가 무너지자 남경은 지방단위의 하나인 한양부(漢陽府)로 개칭되었다. 공민왕에 이르러서는 배원(排元) 정책을 취하고 3경 제도를 부활시키는 한편 남경의 궁궐을 중수하여 한양천도론이 대두되었다. 한양천도론은 우왕 때 더욱 고조되어 1382년 9월과 그후 공양왕 때 잠시 천도하기도 하였다.
1392년 7월 조선왕조를 개창한 이성계는 왕조의 면목과 인심을 일신할 목적으로 승려인 무학국사와 하륜 등 중신들의 의견에 따라 1393년 도읍지를 한양으로 정하고 종묘·사직·궁궐을 짓기 시작하여 이듬해 11월 한양천도를 단행하였다. 1395년 한양부를 한성부로 개칭하고 경복궁을 준공하였으며, 1396년 4월 한성부의 행정구역을 설정하고 같은 해 9월 도성과 문루를 완성하였다.
행정구역은 도성(都城)과 성저(城底)로 구성되었는데, 도성은 성 안의 땅으로 궁궐·관청·도로·하수도·시장 등의 위치가 정해졌다. 성저는 성벽으로부터 사방 10리에 이르렀는데, 북으로는 북한산, 남으로는 한강 노도(露渡), 동으로는 양주의 송계원(松溪院)·대현(大峴:牛耳川)·중랑포(中浪浦)·장안평(長安坪), 서로는 양화도·고양의 덕수원(德水院:응암동)·모래내[沙川]를 따라 난지도에 이르렀다. 이로써 한성부는 수도로서의 내용과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1398년 왕자의 난이 일어나고 정종이 즉위하면서 한때는 수도를 개성으로 옮겼다가 태종이 즉위하면서 다시 한성으로 환도하였다. 그 이듬해 궁궐을 수축하고 도읍지로서의 시설을 보완하였다. 운종가(종로 1~2가)를 비롯하여 각종 도로를 설치하고, 그 양편에는 가가(街家:상점)를 만들었다. 간선도로변에는 구거(溝渠:배수구)를 설치하였다.
1428년 성 안 인구는 10만 3328명, 성 밖 인구까지 합하면 11만 명이었고, 그 뒤 200여 년간 20만 명 선을 유지하였다. 1592년 선조 때의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그리고 1624년 인조 때에 일어난 병자호란으로 인명과 재산에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이 당시의 도시형태는 경복궁을 중심으로 좌우에 종묘와 사직을 배치하고 주요 관청이 들어서 있는, 지금의 세종로와 상업지역으로 행랑과 시전이 있는 종로가 있었다. 종로 북쪽은 양반계급의 주거지인 북촌이 있었으며, 남쪽은 하급관리와 세력이 없는 선비들의 주거지인 남촌이 있었다.
행정구역은 조선왕조 500년을 통하여 성 안을 가리키는 도성과 성저로 크게 구별되었다. 관할구역인 도성과 성저를 동·서·남·북·중의 5부(部)와 성저 10리 지역으로 나누었다. 각 부에는 영(令)을 두었는데 이는 오늘날의 구(區)에 해당하는 것이다. 5부는 처음 태조 때 52방(坊)으로 구분하고 그 아래 계(契)·동(洞)·통(統)을 두었으며, 성종 때는 52방을 49방으로 하였다. 1894년 갑오개혁 때 5부제를 5서제(署制)로 고치고 47방 288계 775동으로 하였다.
3) 근세 이후
1876년 개항 이래 새로운 문명시설이 생겨났다. 근대적인 병원·학교·교회·신문사 등이 세워졌으며, 1898년 서대문과 홍릉 사이에 전차가 개통되었다. 1895년 한성군으로 격하되고 5부가 5서로 개칭되었다가 이듬해 다시 한성부가 되었다. 1899년 경인선이 개통되고 전화가 가설되었으며, 1900년 한강 가교(假橋)가 준공되었다.
1910년 국권을 침탈한 일본은 경성부(京城府)로 바꾸고 경기도 밑에 두어 그 지위를 격하시켰다. 1911년 경성부의 하부기관을 5부 8면으로 구분하여 성 안은 동·서·남·북·중의 5부로, 성 밖은 용산·서강·숭신·두모·인창·은평·연희·한지의 8개 면으로 구분하였다. 1914년 면(面) 제도를 폐지하고 부제(府制)를 실시하면서 용산·숭신·인창·한지·두모면의 일부를 경성부에 편입시켜 경성부의 행정구역을 확대시켰다. 명칭은 정(町)으로 바꾸었다.
을사조약 당시 약 25만 명이었던 인구가 자체의 인구증가와 일본인 거류민의 급격한 증가로 1936년에는 73만 명을 돌파하게 되자 행정구역을 133.94㎢로 확장하였는데, 이때 고양군·시흥군·김포군 관내의 면들이 편입되었다. 지역 확대에 따라 용산·동부·영등포에는 출장소가 설치되었다. 종로·남대문로·태평로를 중심으로 번화한 도심지가 형성되었고, 청량리·마포·돈암동·영천·영등포 등의 전차 종점과 전차노선 부근에 도시화가 이루어졌다.
남산 북사면 일대의 필동·남산동·인현동·쌍림동·장충동·회현동과 남대문 밖 서울역 부근의 후암동·용문동·원효로 등지 및 용산 방면에 일본인 주택지가 생겨 일본식 목조가옥이 들어섰다. 8·15광복을 2년 앞둔 1943년에는 경성부의 행정구역을 종로·중구·동대문·성동·서대문·용산·영등포의 7개 구로 나누어 구제(區制)를 실시하였고, 1944년에는 인접지역인 연희면을 편입하여 다시 행정구역을 조정하고 여기에 마포구를 신설하였다.
4) 광복 이후
1945년 8·15광복과 동시에 경성부가 서울시로 개칭되었고, 그 이듬해에는 경기에서 분리되어 중앙정부의 직접적인 통제를 받는 서울특별자유시가 되었으며 종전까지의 일본식 동명이었던 정(町)을 동(洞)·가(街)·로(路) 등의 명칭으로 바꾸었다.
1949년 특별시로 승격되면서 고양군 뚝도면·숭인면·은평면 일원과 시흥군 도림리·구로리·번대방리 등이 편입되어 시역이 136.06㎢에서 268.35㎢로 확장되었다. 그해 성북구가 신설되어 모두 9개의 구로 개편되었고 인구는 140만여 명에 이르렀다.
6·25전쟁을 겪고 1955년 부산에서 수도를 서울로 환도하자 인구가 급증하였고 수도로서의 기능도 급속도로 팽창하였다. 1962년 서울특별시행정에 관한 특별조치법이 제정되어 국무총리 직속기구가 되었다. 시장의 행정적 지위도 장관급으로 격상하는 동시에 1963년 시역을 대규모로 확장하여 593.75㎢가 되었다. 이때 편입된 지역은 양주군·광주군·시흥군·김포군·부천군의 일부지역 7개면 54개리로 주로 강남지역이었다.
1973년 3번째 시역확장이 이루어져 605.33㎢가 되었으며, 도봉구와 관악구가 신설되어 11개구가 되었다. 1975년 강남구, 1977년 강서구, 1979년 은평구와 강동구, 1980년 동작구와 구로구가 신설되었다. 1988년 중랑구가 동대문구에서, 노원구가 도봉구에서, 양천구가 강서구에서, 서초구가 강남구에서, 송파구가 강동구에서 각각 분리, 신설되었다. 1994년은 수도로 정한 지 600년이 된 해였다.
1995년 3월 강북구가 도봉구에서, 광진구가 성동구에서, 금천구가 구로구에서 각각 분리, 신설되었다. 1973년 시역확장 이후 고정된 면적에서 구의 증설은 모두가 관할지역의 인구조정을 위해서 취해진 행정적 조치였다.
2001년 현재 종로·중·용산·성동·동대문·중랑·성북·도봉·노원·은평·서대문·마포·양천 ·강서·구로·영등포·동작·관악·서초·강남·송파·강동·광진·금천·강북 등 25개구 522개동으로 이루어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