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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독서
<태양 아래 새로운 것이란 없다.>
▥ 코헬렛의 말씀입니다. 1,2-11
2 허무로다, 허무! 코헬렛이 말한다. 허무로다, 허무! 모든 것이 허무로다!
3 태양 아래에서 애쓰는 모든 노고가 사람에게 무슨 보람이 있으랴?
4 한 세대가 가고 또 한 세대가 오지만 땅은 영원히 그대로다.
5 태양은 뜨고 지지만 떠올랐던 그곳으로 서둘러 간다.
6 남쪽으로 불다 북쪽으로 도는 바람은 돌고 돌며 가지만 제자리로 되돌아온다.
7 강물이 모두 바다로 흘러드는데 바다는 가득 차지 않는다.
강물은 흘러드는 그곳으로 계속 흘러든다.
8 온갖 말로 애써 말하지만 아무도 다 말하지 못한다.
눈은 보아도 만족하지 못하고 귀는 들어도 가득 차지 못한다.
9 있던 것은 다시 있을 것이고 이루어진 것은 다시 이루어질 것이니
태양 아래 새로운 것이란 없다.
10 “이걸 보아라, 새로운 것이다.”
사람들이 이렇게 말하는 것이 있더라도
그것은 우리 이전 옛 시대에 이미 있던 것이다.
11 아무도 옛날 일을 기억하지 않듯 장차 일어날 일도 마찬가지.
그 일도 기억하지 않으리니 그 후에 일어나는 일도 매한가지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 음
<요한은 내가 목을 베었는데, 소문에 들리는 이 사람은 누구인가?>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9,7-9
그때에 헤로데 영주는 예수님께서 하신 7 모든 일을 전해 듣고 몹시 당황하였다.
더러는 “요한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났다.” 하고,
8 더러는 “엘리야가 나타났다.” 하는가 하면,
또 어떤 이들은 “옛 예언자 한 분이 다시 살아났다.” 하였기 때문이다.
9 그래서 헤로데는 이렇게 말하였다.
“요한은 내가 목을 베었는데, 소문에 들리는 이 사람은 누구인가?”
그러면서 그는 예수님을 만나 보려고 하였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말씀의 초대
코헬렛은 “허무로다, 허무! 모든 것이 허무로다!” 하고 말한다(제1독서). 헤로데 영주는 예수님께서 하신 일을 전해 듣고 몹시 당황하며, “소문에 들리는 이 사람은 누구인가?” 하며 예수님을 만나 보려고 한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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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헬렛은 “허무로다, 허무! 모든 것이 허무로다!”라며 태양 아래 새로운 것이란 없다고 말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 하신 모든 일을 전해 들은 헤로데 영주는 몹시 당황하며, “요한은 내가 목을 베었는데, 소문에 들리는 이 사람은 누구인가?”라며 예수님을 만나 보려고 한다(복음).
오늘의 묵상
“허무로다, 허무!”(코헬 1,2)로 시작되는 코헬렛은 때로 독자를 당황하게 합니다. 유다교 안에서도 이 책을 경전에 포함시킬지를 두고 마지막 순간까지 주저하였습니다. 성경의 다른 책들과는 색깔이 다르고 어떤 부분에서는 너무 비관적이고 회의적으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코헬렛은 인간 지혜의 한계를 보여 주는 책입니다.
지난 월요일에 보았던 것처럼 잠언에서는 인과응보, 그것도 현세에서 이루어지는 인과응보를 가르칩니다. 그런데 그 가르침을 전적으로 부인하지는 않더라도, 현실의 삶은 꼭 그렇게 질서가 있지만은 않습니다. 노고에 반드시 보람이 있다고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코헬렛은 그런 세상을 이해하려고 애를 쓰지만 결국 그러지 못합니다. 그가 이르게 되는 결론은 세상에 대한 밝은 지식이 아니라 오히려 인간 지혜가 가지는 한계에 대한 분명한 인식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할까요? 코헬렛 1장에서는 아직 거기까지 말하여 주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그가 말하는 허무에는 분명 우리가 공감할 수 있는 부분이 있습니다. 세상 모든 것을 인간이 알 수 있다고, 또는 알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교만이라는 점입니다. 그것은 선악과를 따 먹고 눈이 밝아져 하느님처럼 되려고 하는 것과 같은 태도입니다.
코헬렛은 인생의 신비를 다 파악하지 못한 채 살아가는 것이 인간의 몫이라고 말합니다. 오늘의 독서와 복음에 머문다면, 화답송 시편이 이러한 인간에게 주는 대답이 되겠습니다. “저희 날수를” 헤아린다는 것도 인간이 자신의 한계를 아는 것을 뜻합니다. 이렇게 불안정한 인간, 덧없이 사라지는 인간에게 안식처는 하느님이십니다.(안소근 실비아 수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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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릴래아와 페레아의 영주 헤로데 안티파스(기원전 4년-기원후 39년 통치)는 예수님의 가르침과 행적들에 관한 소식을 듣고 몹시 당황합니다. ‘당황하다’로 번역된 그리스어 동사 ‘디아포레오’는 신약 성경 전체에서 세 번 더 발견되는데(사도 2,12; 5,24; 10,17 참조),
그때마다 하느님에게서 온 매우 특별하고 기묘한 행적을 목격한 놀라움과 당혹감을 표현합니다. 사실 헤로데를 그토록 당혹스럽게 한 것은, 예수님께서 세례자 요한인지 엘리야인지 옛 예언자 가운데 하나인지의 문제가 아니라, 죽었던 이가 되살아났다는 바로 그 소문이었습니다. 죽은 이의 부활은 사실 내세의 존재와 의로운 생애에 대한 죽음 뒤의 보상(상선벌악)을 뜻하기에, 헤로데처럼 세상의 재물과 쾌락만을 탐닉하며 오늘만 사는 이는 커다란 두려움과 당혹감에 빠질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 제1독서 코헬렛의 저자는 노년에 이르러 “허무로다, 허무! 모든 것이 허무로다.”라고 고백합니다. 인간의 유한한 본성과 반복되는 세상사는 그저 인생의 권태로움과 무상함을 일깨워 줄 뿐이라는 것입니다. 그는 이런 냉정한 성찰을 기반으로, 오직 하느님께서 모든 것에 존재의 의미를 부여하신다는 결론에 이릅니다. 세상의 가치가 아닌 하느님의 지혜를 찾으며 그분을 경외하고 신뢰하는 삶을 이어 가는 가운데, 비로소 인생의 성공과 행복을 이룰 수 있다고 인정합니다.인생은 길어야 8, 90년이며, 세월이 지나고 돌아보면 찰나와도 같겠지요. 감정과 소유의 노예가 되어 주님을 알아보지 못한 헤로데 같은 모습이 아니라, 일상의 권태와 무상함, 모순과 한계에도 흔들림 없이 하느님을 바라보며, 영원한 생명에 보탬이 되는 삶을 살아가기를 기원합니다.(강수원 베드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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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문에 예수님께서는 예언자이셨나 봅니다. 소문에 예수님께서는 꽤나 유명하셨나 봅니다. 소문에 예수님께서는 …… 소문에 예수님께서는 …….
이천 년 동안 예수님에 관한 소문은 무성하였습니다. 저마다 자신의 삶의 처지에서 예수님을 이해하고 받아들이고 때로는 거부하며 내친 결과가 예수님에 관한 무성한 소문으로 전해지고 또 전해졌겠지요. 소문을 다 믿을 필요는 없지만 그렇다고 소문의 가치를 애써 무시할 이유도 없습니다. 어찌 되었거나 소문을 통하여 교회는 지금까지 제 모습을 유지하고 다듬어져 왔으니까요.
문제는 다양한 소문을 듣고 불안해하는 태도에 있습니다. 헤로데가 예수님을 만나 보고 싶어 한 것은 다른 뜻, 다른 권력, 다른 유명세를 견디기 힘들었기 때문입니다. 세례자 요한도 죽인 헤로데가, 새로운 가르침을 얻어 새롭게 거듭나고자 예수님을 만나고 싶어한 것은 분명 아닙니다. 헤로데의 호기심은 권력에 대한 애착,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닙니다.
예수님의 소문에 헤로데는 당황하였습니다. 자신이 저지른 일이 잘못이었음이, 그 잘못이 드러날까 불안했을 터이지요. 헤로데의 모습이 저의 일상 모습인 것 같아 헤로데의 마음에 한참이나 머물며 이 묵상 글을 적고 있습니다.
무성한 소문과 그에 따른 다양한 해석들에도 교회는 지금껏 여유로운 의젓함으로 살아왔습니다. 잘못과 흠이 없어서가 아니라, 그 잘못과 흠을 겸허히 받아들이고 오로지 예수님의 자비만을 바랐기 때문입니다. 소문이 어떻든 예수님을 어떻게 평가하든, ‘나는 예수님 앞에 솔직히 서 있는가?’가 무엇보다 중요하겠지요. 오늘도 여전히 끝기도 때 저는 하루 동안 저지른 잘못으로 아파하고 용서를 빌겠지요. 다만 자비로우신 예수님께서 위로해 주시기를 바라고 또 바랄 뿐입니다.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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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제1독서에서는 이 세상 모든 것이 덧없음을 이야기합니다. 모든 것은 어느 순간에 생겼다가 또 언젠가는 사라진다는 것이지요. 재물도 명예도 인기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렇다면 변하지 않는 것은 무엇입니까? 바로 하느님이십니다. 따라서 코헬렛은 하느님을 모르는 이들이 겪게 되는 무상함을 노래하고 있는 것이지요. 하느님을 모르는 이들은 이런 무상하고 덧없는 삶을 살아가다가 죽음을 맞이해야 하기에, 그 앞날이 얼마나 불안하겠습니까?
오늘 복음에는 헤로데가 등장합니다. 세례자 요한을 죽인 헤로데가 불안에 떱니다. 예수님께서 기적을 베풀고, 병을 낫게 해 주었다는 소문을 들었기 때문이지요. 더욱이 소문은 꼬리를 뭅니다. 죽은 세례자 요한이 살아났다고도 하고, 엘리야가 나타났다고도 합니다.
그런 가운데 헤로데는 죄책감에 시달리다가 호기심에 못 이겨 예수님을 만나 보려 합니다. 그러나 그런 자세로는 결코 주님을 알아 뵙지 못합니다. 하느님은 호기심의 대상이 아니기 때문이지요. 오늘날에도 “기적을 행하면 나도 믿겠다.”라는 식의 말을 많이 합니다. 그렇지만 믿음을 전제로 하지 않으면 헤로데처럼 결코 예수님을 체험하지 못할 것입니다.
물론 나중에 헤로데는 예수님을 만나지요. 예수님께서 붙잡혀 빌라도에게 넘겨졌을 때, 헤로데는 예수님께서 행하시는 표징이라도 보려고 이것저것 캐물었지만, 예수님께서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으셨습니다(루카 23,9 참조). 예수님과 참된 만남을 이루려면 믿음으로 다가가는 수밖에 없습니다. (김준철 토마스 아퀴나스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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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로데는 탐욕스럽고 피비린내 나는 권력에 젖어 살았기에, 오늘 제1독서에 나오는 인생무상의 말씀을 뼈저리게 느꼈을 것입니다. 헤로데는 예수님의 기적을 보고, ‘죽었던 세례자 요한이 다시 살아온 것’이라는 소문에 집착했습니다. 한때 세례자 요한을 의인이라고 생각했지만 그를 참수시킨 헤로데의 마음속엔 죄책감이 감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세례자 요한의 영험이 예수라는 자에게서 나오는지 알고 싶었습니다. 헤로데는 자신의 진정한 모습을 잃어버린 채 표류하는 영혼이 되었습니다.
이에 반해 구약의 마지막 예언자 세례자 요한은 하느님의 의로움과 회개를 요구하였습니다. 불같은 하느님의 예언자 엘리야는 하느님의 말씀을 따르지 않고 양다리를 걸치는 거짓 예언자들을 단죄하였습니다. 이 두 인물은 하느님의 진리로 돌아오라는 양심의 목소리를 우리에게 들려줍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자신에게 근본적인 질문을 종종 합니다. “예수님의 가르침과 법이 나에게 어떤 의미를 주고 있을까? 이 비참하고 허무한 인생을 견디어 내면 하늘 나라의 영광이 나에게 주어지는 것일까?” 하고 반문합니다. 그때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마태 11,28). 예수님 안에서 참된 안식을 얻는 자녀가 되도록 합시다. 헤로데처럼 진리의 목소리에 귀를 막은 채 허무의 심연 속에 빠져들지 맙시다. (류한영 베드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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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의 인물 가운데 「코헬렛」의 저자가 가장 철학자와 같은 인물이라고 평할 수 있습니다. 자연의 순리와 인간사의 흐름을 관찰한 뒤 모든 것은 ‘허무’라고 결론짓는 그의 모습에는 우주의 원리와 인생사의 의미를 캐묻는 고대 철학자의 풍모가 엿보입니다.
그러나 「코헬렛」의 저자가 경험하고 확인하는 허무는 경험을 초월하는 차원이 아니라 ‘실존적 차원’의 허무이기에 학문적 관찰의 대상이 아니라 끌어안고 살아가며 넘어서야 할 삶의 과제입니다. 「코헬렛」의 저자는 추상적인 사유를 목적으로 하는 유형의 철학자가 아니라, 인생을 제대로 살아가고자 하는 구도자이자 실천가로서의 철학자라 하겠습니다. 그가 직면한 허무는 인간의 수고와 삶 전체가 무의미한 것으로 판명될 수 있다는 마음속 깊은 곳의 불안과도 같은 것이라 하겠습니다.
「코헬렛」을 읽다 보면, 참으로 염세적이고 회의적인 세계관으로 일관하는 ‘허무의 철학’에 도달한 것 같은 인상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많은 주석가들의 견해처럼, 철저한 현상 인식은 사람들이 순진하게 의지하는 피상적인 낙천주의를 벗겨 내려는 의지의 표현입니다. 그 저자는 진정으로 의미 있고 행복한 삶이 무엇인지 알고 싶은 열정을 지니고 있었을 것입니다. 인간적 업적과 소유, 지식, 쾌락 따위에 대한 무조건적인 긍정은 삶에 대한 잘못된 이해를 낳는 것을 알기에 먼저 그 환상을 깨야 했을 것입니다. 「코헬렛」 1장과 2장에서 말하듯, ‘세상의 임금 노릇’을 하는 것이 얼마나 허무한 것임을 아는 사람만이 참된 행복을 알아볼 눈을 뜨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이 허무요 바람을 잡는 일”(코헬 2,17)이라는 인식에 도달했을 때 비로소 ‘삶의 덧없음’을 넘어설 수 있는 진정한 ‘행복의 철학’을 시작합니다. 그리고 그 답은 ‘하느님의 손에서 오는 즐거움’(코헬 2,24 참조)에 눈을 뜰 때 주어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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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탄생과 활동은 많은 사람에게 기쁨이었습니다. 그러나 어떤 자들에게는 위협이었습니다. 예수님에 관한 이야기를 들은 사람들 가운데 많은 이가 희망을 가졌습니다. 그러나 어떤 자들은 불안감에 휩싸였습니다.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 가운데 많은 이가 자유와 해방을 누렸습니다. 그러나 어떤 자들은 살의와 증오에 불탔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에 대하여 많은 사람이 권위 있는 새로운 가르침에 탄복하였습니다. 그러나 어떤 자들은 혼란을 겪어야 했습니다. 예수님의 기적을 보고 많은 사람이 하느님을 더욱 찬양하였습니다. 그러나 어떤 자들은 하느님을 모독하는 행위로 여기고 죽일 궁리까지 하였습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많은 사람에게 디딤돌이 되었지만, 어떤 자들에게는 걸림돌이 되었습니다.
그러면 오늘 복음의 헤로데에게는 어떠하였을까요? 그에게 예수님께서는 ‘제2의 요한 세례자’일 뿐입니다. 눈엣가시였던, 자신의 불의와 불순을 드러내 알렸던, 자신의 치부를 폭로했던 걸림돌 중의 걸림돌인 요한이었던 것입니다. 요한의 정의 앞에서 헤로데가 자유롭지 못했던 것처럼 이제 그는 예수님의 출현으로 다시 자유롭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이제 우리 자신에게 스스로 물어봅시다. 우리가 바라보는 십자가가 우리에게 걸림돌이 되고 있습니까, 디딤돌이 되고 있습니까? 오늘 받아 모시는 성체가 우리에게 걸림돌이 되고 있습니까, 디딤돌이 되고 있습니까? 지금 듣는 하느님의 말씀이 걸림돌이 되고 있습니까, 디딤돌이 되고 있습니까?
예수님께서는 당신께서 언제나 우리의 삶을 한층 더 새롭게 해 주시는 디딤돌이 되시기를 바라십니다. 그러한 예수님을 걸림돌로 받아들이게 하는 까닭은 바로 우리의 잘못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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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과 헤로데 가문 사이에는 질긴 악연이 존재합니다. 이 악연은 주님의 탄생 전부터 시작되어,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 이후까지 지속되고 있습니다. 아니, 어쩌면 21세기를 살아가는 오늘날까지 계속 이어지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주님과 헤로데 가문 사이의 악연은 생명과 죽음, 빛과 어둠의 관계입니다. 진리와 거짓, 정의와 불의, 평화와 불화의 관계입니다. 주님께서 보시기에, 헤로데는 탐욕스럽고 권력에 젖어 사는 가련한 인생입니다. 명분과 체면의 틀을 깨지 못하는 어리석은 지도자들 가운데 한 사람일 뿐입니다. 반대로 헤로데가 보기에, 주님께서는 언제나 불편한 진실이시고 진리이십니다.
사람들은 언제부터인지 종교와 정치는 분리되어야 한다고 주장해 왔지요. 그러나 그것은 정치 지도자들이 자신들의 욕구를 채우려는 변명에 불과할 따름입니다. 종교도, 정치도 백성이 없이는 무용지물일 뿐입니다. 모두가 백성을 위한 행위이고, 백성이 참여해야 비로소 제대로 된 종교이고, 정치이지요.
헤로데는 그러한 진실을 왜곡하거나 피하려 드는 가련한 정치의 수장입니다. 지금 우리의 마음은 누구를 따라가고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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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 시대의 이스라엘은 로마가 통치했습니다. 그들은 총독을 보내 이스라엘을 지배했지만, 겉으로는 왕이 다스리는 체제를 유지했습니다. 당시 임금은 ‘헤로데 안티파스’로, 헤로데 대왕의 아들이었습니다. 자신과 부인 ‘헤로디아’를 비난한다고 요한 세례자를 죽게 했던 인물입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의 ‘기적’을 소문내자, 헤로데 임금은 만나고 싶어 합니다. “요한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났다.”는 주장에 호기심을 드러냅니다. ‘신비스러운 사건’은 쉽게 사람들의 주목을 끕니다. ‘기적과 예언’에 대한 소문이 퍼지면 누구나 한번쯤 가 보고 싶어 합니다.
하지만 정말 ‘신비스러운 사건’은 성경 안에 넘치도록 있습니다. 성경의 기적에는 잠잠하면서 사람들의 소문에는 ‘혹한다면’ 성숙한 모습이 아닙니다. 먼저 ‘주변의 기적’에 눈떠야 합니다. 사방을 둘러보면 어디에나 기적의 꽃은 피어 있습니다.
신앙인은 기적에 놀랄 사람이 아닙니다. 평생 기적과 함께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성체성사의 기적입니다. 우리가 원하면 언제든지 우주를 만드신 분을 모실 수 있습니다. 운명을 주관하시는 분을 만날 수 있습니다. 성체 안의 예수님을 느끼지 못하면, 아무리 기적을 보고 예언을 들어도 ‘호기심의 만족’ 이상을 넘지 못합니다. 오늘날에도 헤로데의 모습은 많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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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례자 요한의 죽음은 참으로 억울합니다. 영적으로 뛰어났던 분이 한 여인의 증오로 말미암아 어이없는 종말을 맞이하였던 것입니다. 그 여인은 헤로데 임금과 불륜 관계에 있었습니다. 요한이 헤로데 임금의 잘못을 꾸짖자 그를 제거할 기회를 찾던 여인이 세례자 요한을 죽음으로 몰아넣고 말았던 것입니다. 우리 역사 안에서는 흔한 일이지만, 성경에서는 또 다른 느낌을 받습니다.
요한은 구세주의 등장을 준비하였던 분입니다. 광야에서 회개를 부르짖었고 위선을 질책하는 직언으로 이스라엘을 뒤흔든 분입니다. 그러한 요한에게 편안한 죽음은 썩 어울리지 않습니다. 그의 죽음에는 그리스도의 죽음을 암시하는 것이 있어야 했습니다. 바로 억울함입니다.
세상에는 억울한 죽음이 많습니다. 그 죽음들이 그냥 묻혀 버린다면 정말 억울한 일입니다. 그리스도와 연결되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죽음과 연결되어야 억울한 죽음이 빛을 발합니다. 그리스도와 연결되려면 어떠해야 하겠습니까?
봉헌이어야 합니다. 자기 자신을 위하여 죽은 것이 아니라 누군가를 위해 죽었다는 봉헌이어야 합니다. 세례자 요한도 이스라엘을 위하여 자신을 내어 놓았기에 기꺼이 죽음을 받아들일 수 있었고, 그리스도의 죽음에 동참할 수 있었습니다. 헤로데 임금은 하느님의 도구였을 따름입니다.
미국의 퓨 연구소(Pew Research Center)에서 과거보다 훨씬 오래 사는 데 대한 미국인의 태도를 조사했습니다. 응답자들은 암을 완치하고 인공 팔다리를 자유롭게 장치할 시대가 오리라는 데 대해 낙관했으며, 수명을 연장하는 의학의 발전들은 전체적으로 좋아지리라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절반 이상이 노화 과정을 늦추는 것은 이 사회에 오히려 나쁘다고 답변했습니다. 고령화로 경제적 부담은 점점 커질 수밖에 없고, 세대 간의 협력이 줄어들어 가족 구조의 변화가 올 수밖에 없다고 말합니다. 그 밖에도 많은 문제로 이 사회에 나쁜 결과를 가져올 것이라고 예상합니다.
그렇다면 더 오래 살 수 있는 치료가 나온다면 받겠느냐는 질문에 어떻게 답변했을까요? 사회에 나쁜 영향을 줄 수 있기에, 대부분 치료를 받지 않겠다고 답변했습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응답이 있었습니다. 자기는 그렇지 않다고 하면서도, 전체 인구의 3분의 2 정도의 사람들은 치료를 적극적으로 받을 것이라 예상한다는 것입니다. 즉, 나는 그렇지 않지만, 남은 그럴 것이라는 것이지요. 하지만 나는 남과 다를까요?
아무튼 과학과 의학의 발달로 기대수명은 점점 늘어날 것입니다. 그런데 오래 사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어떻게 사느냐일 것입니다. 남과 다른 나는 특별하니 더 오래 살아야 한다는 것도 아니고, 죽음보다 먼저 어떻게 지금을 사느냐가 중요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시하신 삶은 죽음을 뛰어넘는 삶이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 어떻게 지금을 사느냐라는 사실을 잊어 버립니다.
오늘 복음에는 헤로데 영주가 나옵니다. 헤로데 영주는 헤로디아의 간계로 귀찮은 방해꾼을 처리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백성들 사이에서 이상한 소문이 나도는 것입니다.
죽었던 요한이 부활하여 놀라운 기적을 행하고 있다, 엘리야가 다시 살아났다, 옛 예언자 한 분이 다시 살아났다 등의 소문이었습니다. 이 소문은 예수님의 기적 활동을 보고 유다인들이 품었던 메시아에 대한 기대에서 나온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헤로데는 긴장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자기가 했던 일이 잘못임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진짜로 예수님이 메시아라면 과거의 자기 잘못으로 벌을 받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이런 두려움으로 제대로 된 판단을 하지 못합니다. 자기의 잘못을 인정한다면, 곧바로 뉘우침의 행위를 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헤로데는 자기가 받을 벌, 죽음에까지 이를 수 있는 벌을 떠올리며 두려워할 뿐입니다.
우리 역시 죄를 멀리하고 선을 행하는 지금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단순히 이 세상에서 오래 사는 것이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보다는 어떻게 사느냐가 중요합니다.
오늘의 명언: 희망이 있어서 희망을 갖는게 아니다. 희망을 가진 사람이 되고 싶어서 희망을 갖는다. 절망한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아서 절망하지 않는다. 누구도 희망을 뺏을 수 없다(김영민).
끝까지 놓지 말아야 할 대상!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오늘 첫 번째 독서 코헬렛 말씀은 나이 들어가는 사람들은 매일 백번 천번 곱씹고 되뇌어야 할 말씀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입으로는 더 이상 아무런 미련도 없다, 이미 다 버렸다, 다 내려놓았다고 외치지만, 끝까지 내려놓지 않고, 마지막 순간까지 물러서지 않는 오늘 우리들에게 꼭 필요한 말씀은?
“허무로다, 허무! 모든 것이 허무로다!”
그렇다고 해서 너무 비관적이고 회의적으로만 생각해서는 안될 일입니다. 허무한 대상이 있고, 절대 그렇지 않은 대상이 있습니다. 잠시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저녁 연기나 아침 이슬 같은 대상들, 허무한 대상들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끝까지 놓지 말아야 할 대상이 있으니, 보다 영속적인 대상, 보다 고귀하고 품위 있는 대상, 우리를 결코 실망시키지 않을 대상이신 우리의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이고, 그분을 사랑하고 추종하는 영적 생활입니다.
나이 들어갈수록 우리가 무엇에 목숨을 걸고 있는지, 어떤 대상에 최상위 가치를 부여하고 있는지 수시로 성찰해야 하겠습니다. 정말이지 아무 것도 아닌 대상, 뜬 구름 같은 대상에 절대 목숨을 걸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공동체 생활을 하다 보면 정말 아무것도 아닌 일에 목숨을 걸 때가 한두 번이 아닙니다. 단 한 걸음만 물러서면 아무 문제도 되지 않을 일이었는데, 그 순간을 못 참아서 몇 날 몇 일을 두고 서로 상처를 주고받습니다. 때로 건너지 말아야 할 강도 건너고 맙니다.
사실 마음 크게 먹으면 모든 것 다 포용이 됩니다. 단 하루만 지나고 나면 아무것도 아닌 일입니다. 머리 맞대고 으르렁대면서 싸울 일 하나도 없습니다.
목숨처럼 중요시여기는 TV채널, 크게 마음먹고 양보하면 아주 마음이 편해집니다. 안 보면 큰일날 것 같은 주말 드라마, 안 봐도 아무 일 생기지 않더군요.
심각해 보이는 형제의 결점, 눈 한번 찔끔 감아보니 아무것도 아니었습니다. 도저히 용서 못 할 일이라고 생각했었는데, 그이의 허전한 뒷모습을 바라보니 모든 것이 다 용서될 뿐 아니라 측은해 보이기까지 했습니다.
사실 이런 것들을 포함해서 그 모든 것이 헛됩니다. 그토록 우리가 소중하게 생각했던 인연들, 그토록 우리가 자부심을 가졌던 학벌, 직책, 성과, 업적들 아무것도 아닙니다. 우리가 그토록 심혈을 기울여 쌓아왔던 그 모든 것들, 특히 육적이고 인간적인 것들은 결국 한 순간 연기처럼 사라지고 말더군요.
이런 우리 인간의 실상에 대해서는 오늘 화답송에서도 잘 나와 있습니다.
“천 년도 당신 눈에는 지나간 어제 같고, 한 토막 밤과도 같사옵니다. 당신이 그들을 쓸어 내시니, 그들은 아침에 든 선잠 같고, 사라져 가는 풀과 같사옵이다. 아침에 돋아나 푸르렀다가, 저녁에 시들어 말라 버리나이다.”
보십시오. 이것이 우리네 인생입니다.
코헬렛의 저자는 자신이 살았던 암울한 시대 상황을 자신의 글에 반영합니다. 그래서 그의 글의 톤은 무척이나 비관적입니다. 우울합니다.
“세상 만사 허무로다! 인생은 덧없구나. 모든 것이 허무로다!”
그는 인생의 단맛 쓴맛을 다 맛보았을 것입니다. 부귀영화도 마음껏 누려봤을 것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좋은 시절이 가고 생의 가장 밑바닥까지 내려도 갔을 것입니다.
잘 나가던 시절, 괴로웠던 시절, 행복했던 시절, 괴로웠던 시절을 회상하며, 저자는 결론으로 모든 것이 덧없다, 모든 것이 지나간다, 모든 것이 무(無)로 돌아감을 강조합니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은 여기서 끝나는 것이 되어서는 안 되겠지요. 모든 것이 지나가고 최종적으로 남게 되는 것이 우리의 하느님이십니다.
언젠가 우리가 재가 되고, 가루가 되어 허공에 흩날려도, 자취가 없이 사라져도 우리에게 영원히 남을 소중한 것 한 가지가 있는데, 그것은 바로 우리가 예수님을 추종하고자 몸부림쳐왔던 우리의 신앙 여정입니다.
세월이 흐르고 흘러 언젠가 우리가 세상을 떠나고, 결국 우리 앞에 남을 오직 한 가지는 하느님 앞으로 나아가는 우리의 영혼이며, 우리가 이 세상사는 동안 모아둔 영적 보화들입니다.
꽃을 시들고 잎은 떨어집니다. 세상 모든 것은 시시각각으로 변합니다. 영원할 것만 같았던 가치들과 사고방식들도 아침이슬처럼 사라집니다. 그 모든 것이 사라지고 우리 앞에 오직 한 가지 필요한 것이 남는데, 그는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내 기도가 정말 기도인지 알아보는 확실한 방법
전삼용 요셉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헤로데는 예수님의 모든 소식을 전해 듣고는 “요한은 내가 목을 베었는데, 소문에 들리는 이 사람은 누구인가?”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의 소식을 듣는다는 게 헤로데에게는 자신이 죽인 요한을 떠올리게 했습니다. 이것은 모든 기도하는 이들에게 나타나는 첫 번째 현상입니다.
기도는 어둠에 있던 나를 점점 빛이신 주님께 들어 올리는 일입니다. 마치 어둡던 방 안에 햇빛이 들기 시작하면 떠다니는 먼지들이 눈에 들어오게 되는 것처럼 주님께 다가갈수록 먼저 나의 죄들이 드러나기 시작합니다. 이 과정을 거치지 않는다면 어쩌면 진정한 기도가 되고 있지 않은 것입니다.
영화 ‘미션’The Mission(1986)에서 로드리고 멘도사라는 인물은 예수회 선교사인 가브리엘 신부를 만난 후 엄청난 변화를 겪습니다. 멘도사는 처음에 과라니 원주민을 붙잡아 노예로 파는 무자비하고 완고한 용병으로 묘사되었습니다. 그의 삶은 폭력, 탐욕, 권력을 중심으로 전개됩니다. 멘도사의 도덕적 타락은 분노에 차서 두 사람이 사랑했던 여자를 두고 결투를 벌여 자신의 동생까지 죽입니다.
멘도사는 감옥에 갇혀있는 동안, 연민과 겸손, 흔들리지 않는 신앙을 구현하는 예수회 가브리엘 신부를 만나게 됩니다. 이전까지 동생과 애인을 증오하기만 했던 그가 사제를 만나니 지금까지의 자기 죄악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사람을 노예로 팔아먹는 사냥꾼이었다는 사실이 부끄럽게 여겨집니다.
멘도사를 정죄하는 대신 가브리엘 신부는 그에게 구원의 길을 제시합니다. 그는 멘도자를 초대하여 자신이 노예로 삼은 바로 그 사람들을 돕는 임무에 자신과 다른 예수회 회원들과 동행하도록 합니다. 그는 자신의 죄를 속죄하기 위해 갑옷과 무기 등 무거운 짐을 지고 산을 넘어 과라니 종족이 사는 곳에 도달하기 위한 험난한 여정을 떠납니다. 그들에게 다가갈수록 자신이 끌고 오는 짐의 무게는 그를 더 짓누릅니다.
과라니 마을에 도착하자마자 원주민들은 그를 예전의 납치범으로 인식하고 복수를 선택할 수도 있었습니다. 대신 그들은 칼로 그의 짐을 끊어 떨어뜨려 버리고 그를 용서함으로써 그에게 자비를 나타냅니다. 이러한 용서의 행위는 멘도사에게 해방을 안겨주고 그들을 위해 죽기까지 봉사할 결심을 하게 합니다. 그는 원주민 공동체를 파괴하려는 식민지 세력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예수회와 함께 싸우면서 사명의 수호자가 됩니다.
햇빛 속의 먼지처럼 멘도사의 죄는 가브리엘 신부와 높은 곳에 사는 과라니 종족에 가까워질수록 더 명확히 드러납니다. 이처럼 기도의 과정에서 하느님 사랑의 빛 안에서의 진정한 자기 성찰은 필수적입니다. 내가 성찰한다기보다는 저절로 나의 죄가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궁극적인 용서를 깨닫고 주님께 충실할 마음이 생깁니다. 이것이 기도로 자신의 영혼을 하늘과 빛으로 들어 올리는 모든 이가 겪는 과정입니다.
하느님께 갈수록 나의 죄가 크게 보여서 “내 탓이오!”가 저절로 나오고 다른 사람들이 판단되지 않으며 그 큰 죄를 용서해 주신 분께 찬미와 영광이 나오고 그분의 뜻을 위해 목숨을 내어줄 마음이 생기면 기도한 게 됩니다. 이러한 과정을 거치지 않는다면 그건 기도한 게 아닙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내우외환(內憂外患)’이란 말이 있습니다. 지나고 나면 내우외환은 대나무의 마디처럼 더 높이 자랄 수 있는 디딤돌이 되지만, 시련과 아픔의 순간은 힘들기 마련입니다. ‘가지 많은 나무는 바람 잘 날이 없다.’라고 합니다. 신문사에 있을 때는 없었던 일들이 본당에서는 파도처럼 밀려오곤 합니다. 오랜 동안 투석하는 어르신이 있습니다. 힘든 중에도 성체를 모시면서 기뻐하였습니다. 뜻하지 않는 교통사고로 남편과 아들이 병원에 있는 자매님이 있습니다. 남편은 재활운동하면 된다고 하고, 아들은 자가 호흡을 할 수 있으니 다행이라며 미소 짓는 자매님을 보았습니다. 욥에게 시련과 고통이 스나미처럼 밀려왔듯이 힘든 시간을 보내는 분이 있습니다. 잘 되는 사업에 어려움이 생겼습니다. 변호사가 일을 처리하지만 비용은 지불해야 합니다. 건강하던 아들이 바이러스에 감염되어 병원에 입원했습니다. 다행히 아들은 건강을 회복해서 퇴원했습니다. 노상강도에게 가방을 빼앗겼습니다. 불편함이 있지만 크게 다치지 않은 것이 다행이라고 합니다.
알렉산드르 푸쉬킨은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여워하지 말라/ 슬픔의 날 참고 견디면 기쁨의 날이 오리니/ 마음은 미래에 살고 현재는 늘 슬픈 것/ 모든 것은 순간에 지나가고 지나간 것은 다시 그리워지나니/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노하거나 서러워하지 말라/ 절망의 나날 참고 견디면 기쁨의 날 반드시 찾아오리라/ 마음은 미래에 살고 현재는 언제나 슬픈 법/ 모든 것은 한순간에 사라지지만 가버린 것은 마음에 소중하리라/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하지 말라/ 우울한 날들을 견디며 믿으라, 기쁨의 날이 오리니/ 마음은 미래에 사는 것 현재는 슬픈 것/ 모든 것은 순간적인 것, 지나가는 것이니/ 그리고 지나가는 것은 훗날 소중하게 되리/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하지 말라/ 설움의 날은 참고 견디면 기쁨의 날은 오고야 말리니” 저는 이 시(詩)를 깊이 묵상하지 않았습니다. 저의 삶이 만족스러운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고난과 절망이 파도처럼 밀려온 적도 많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물론 계절이 변하는 것처럼 제 삶에도 굴곡이 있었지만, 하느님께서는 제게 감당할 만큼의 용기와 위안을 주셨습니다. 오늘 여러분은 푸쉬킨의 글을 읽으면서 어떤 느낌이 드시는지요?
오늘 제1독서는 인생이 헛되다고 합니다. 모닥불이 아름답지만 재가 되듯이 건강했던 사람도, 지혜롭던 사람도, 권력을 지녔던 사람도, 부유했던 사람도 언젠가는 모두 한 줌의 흙이 되기 때문입니다. ‘타다가 꺼지는 그 순간까지 우리들의 이야기는 끝이 없다.’는 노랫말처럼 우리도 누군가를 따뜻하게 해 주는, 어둠을 밝게 비춰주는, 빛으로 하나가 되도록 이끌어주는 모닥불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모닥불의 삶을 살 수 있다면 우리의 인생은 결코 헛되지 않을 것입니다. 인생은 늙고 병들어 흙이 되지만, 끝없이 이어지는 이야기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 이야기는 깨달음이 되었고, 희망이 되었고, 천국의 열쇠가 되었습니다. 그 이야기는 문화와 문명이 되었고, 역사와 신앙이 되었습니다. 마더데레사, 이태석 신부님은 기꺼이 모닥불의 삶을 살았습니다. 그분들의 삶은 이야기가 되었고 우리 삶의 등불이 되고 있습니다. 강물이 바다로 흘러가지만 바다는 넘치지 않는다고 합니다. 하느님께서 함께 하심을 믿으면 결코 우리의 인생이 헛되지 않습니다. 하느님의 자비하심과 하느님의 사랑은 결코 부족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헤로데는 예수님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만나고 싶어 했습니다. 헤로데는 예수님의 어떤 이야기를 들었을까요? 권력, 명예, 재물에 대한 이야기는 아니었을 겁니다. 그것은 이미 넘치도록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헛되고 헛된 인생, 재가 되어 흙으로 돌아갈 것 같은 인생의 이야기는 아니었을 겁니다. 밀알 하나가 썩어야 많은 열매를 맺는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겁니다. 성한 사람에게는 의사가 필요 없지만 아픈 사람에게는 의사가 필요하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겁니다.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라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서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겁니다. 예수님의 이야기를 듣고 예수님을 만났지만 어떤 사람은 슬퍼하며 예수님을 떠났다고 합니다. 가진 것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헛되고 헛된 인생에 집착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그물을 버리고, 배를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고 합니다. 예수님의 이야기 속에서 세상이 줄 수 없는 참된 행복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타다가 꺼지는 그 순간까지 끝나지 않는 모닥불의 이야기를 만들어 가면 좋겠습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
<만남>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그러면서 그는 예수님을 만나 보려고 하였다.”(루카 9,9)
주님의 사람만이
오롯이 주님을
만날 수 있답니다
착한 사람만이
착하신 주님을
만날 수 있답니다
올곧은 사람만이
올곧으신 주님을
만날 수 있답니다
부드러운 사람만이
부드러우신 주님을
만날 수 있답니다
너그러운 사람만이
너그러우신 주님을
만날 수 있답니다
깨끗한 사람만이
깨끗하신 주님을
만날 수 있답니다
주님의 사람만이
참으로 주님을
만날 수 있답니다
<요한은 내가 목을 베었는데, 소문에 들리는 이 사람은 누구인가?>
이용현 알베르토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보면 헤로데가 사람들로부터 예수님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나서 무척 당황했다고 전합니다. 그 이유는 사람들이 요한이 되살아났다고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자 헤로데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요한은 내가 목을 베었는데, 소문에 들리는 이 사람은 누구인가?”
‘죄 짓고는 못산다’는 말이 있습니다. 아마도 헤로데 역시도 세례자 요한을 죽이고 나서 그렇게 마음이 편하지 않았을 것이고, 그 세례자 요한을 넘어서는 더 크신 분이 나타났다고 했을 때 어쩌면 더 두려워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죄를 짓는다는 것은 어쩌면 마귀에게 발목이 잡혀있는 것과도 같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만약 우리가 죄로부터 벗어나지 못할 때 구원의 가능성 역시도 멀어지게 됩니다. 그런데 그 죄로부터 벗어난다는 것이 인간 스스로는 참 힘든 일입니다. 어쩌면 잘 낫지 않는 상처와도 같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치유가 필요한 데 그 치유는 인간의 힘으로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영을 통해 가능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하느님의 영을 받아들일 수 있는 방법은 곧 참된 회개입니다.
역사 안에서 볼 때 헤로데 안티파스는 결국 회개하지 못했고, 나중엔 헤로데 아그리빠 1세로부터 추방당하고 귀양 중에 쓸쓸히 죽어갔다고 기록은 전합니다.
우리가 죄를 짓고 두려워 할 수 있다는 것은 어쩌면 어서 회개하라는 싸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양심입니다. 그렇게 인간은 다른 짐승들과는 달리 양심을 가진 존재입니다. 우리가 진정 회개했을 때 하느님은 그 회개를 받아주시는 자비로우신 분이십니다. 그리고 그 하느님의 자비하심 안에서 우리는 구원의 길로 나아가게 될 것입니다.
“요한은 내가 목을 베었는데, 소문에 들리는 이 사람은 누구인가?”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
송진욱 도미니코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는 예수님을 향해 여러 말들이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어떤 이는 죽은 요한이 되살아났다고, 또 어떤 이는 엘리야가 나타났다고 하면서 요한의 목을 벤 헤로데는 소문의 예수님을 두고 도데체 누구인가. 그리고 예수님을 만나보려고도 하지요. 우리는 여기에서 무엇을 알아야 할까요, 예수님에 대해 말한 이들은 예수님의 가르침과 기적들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생각했지요. 도대체 이 예수란 사람은 누구인가. 예수님의 말씀과 행위를 듣고 보았던 이들의 입에서 죽은 요한, 그리고 엘리야, 마지막으로 예언자 중 한 사람이 살아났다고 하였지요. 즉 그들 역시 예수님의 말씀이 틀리지 않았음을, 그리고 기적이 하늘로부터 왔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요.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예수님을 누구라고 생각하십니까. 당연히 사람의 아들, 메시아, 구세주! 네 맞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더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위에 언급한 말은 대답입니다. 대답이 대답으로 끝나면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독서에서처럼 이 세상에서의 노고가 우리에게 무슨 보람이 있겠습니다. 주님의 일은 과거에서처럼 현재에도 이루어져야 함을 우리가 알아야 됩니다. 이것이 예수님을 통해서 이루어져야 함을 고백할 때 예수님이 누구인지 우리가 답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복음에서는 예수님에 대해 제대로 답을 한 이들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메시아로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누군가가 여러분에게 예수가 누구인지 묻는다면 여러분은 무엇이라 답하시겠습니까. 예수님은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십니다. 아멘!
허무의 병, 무지의 병 - “약(藥)은 사랑의 하느님뿐이다!”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사랑과 겸손의 하느님입니다. 하느님이 선물처럼 우리를 찾아오시듯 시(詩)도 그렇게 선물처럼 찾아옵니다. 저에게는 그렇습니다. 참 맘에 드는 시가 찾아왔을 때 기쁨은 참으로 오래갑니다. 얼마전 “꽃”이라는 시가 찾아 왔고 그때도 나눴지만 곱게 피어난 맨드라미꽃이 너무 아름다워 지인에게 재차 시화(詩畫)를 부탁하여 어제 저녁 무렵, 세상사에 지쳐있는 많은 분들에게 선물했습니다. 사랑의 나눔도 중요하기에 저녁 묵상시간, 휴식시간에 나눴습니다.
“꽃같은
하루
꽃같이
살자”
새삼 무슨 설명이 필요하겠는지요. 하루하루 꽃같은 선물을 주신 하느님께 감사하며 꽃같이 기쁘게 살자는 것입니다. 8월 중순에 찾아온 시인데 지금도 기쁨과 향기로 남아있는 시입니다. 더불어 꽃과 관련된 잊지 못하는, 몇 번이나 인용한 시도 있습니다.
“꽃이
꽃을 가져오다니요
그냥 오세요
당신은
꽃보다 더 예뻐요”
가난한 자매가 꽃같은 미소로 꽃 한송이를 들고 왔기에 즉시 써드린 답시에 만족했고 행복했습니다. 정말 꽃같은 예쁜 영혼을 만나면 “꽃보다 예쁘다!” 감탄하곤 합니다. 하느님 모상대로 창조된 아름다운 영혼, 꽃같은 영혼입니다. 더불어 생각나는 매3주간 저녁성무일도 첫째 시편 후렴입니다.
“이스라엘의 집안들아 주님을 찬양하라,
그 이름 노래하라, 꽃다우신 이름을”(시편135,3)
꽃다우신 이름을, 하느님을 찬미하는 기쁨으로, 맛으로 살아가는 여기 수도자들입니다. 찬미의 기쁨, 찬미의 행복을 능가하는 것은 지상에 없습니다. 바로 영혼의 병에, 죽음에까지 이르게 하는 치명적 영혼의 병, 무지의 병, 허무의 병에 약(藥)은 단하나 생명과 사랑의 하느님뿐임을 고백하는 위의 내용들입니다.
우리는 무의미한 우연적 존재가 아니라 하느님의 참 좋은 선물, 꽃다운 섭리적 존재라는 것입니다. 무려 25년전 저를 찾아와 큰 위로를 줬던 “민들레꽃” 시도 생각납니다. 순간 창밖 샛노랗게 피어난 민들레꽃들이 하늘의 별처럼 보였습니다.
“어!
땅도 하늘이네
구원은 바로 앞에 있네
뒤뜰 마다
가득 떠오른
샛노란 별무리 민들레꽃들
땅에서도
하늘의 별처럼
살 수 있겠네”<2001.4.16.>
바로 지금까지 내용들이 오늘 제1독서 코헬렛과 짧은 루카복음에 대한 답을 줍니다. 코헬렛을 성경에 넣느냐 역사상 큰 논난이 있었으나 성경에 속함으로 얼마나 영적사고가 풍부해졌는지 감사하게 됩니다.
“허무로다, 허무! 코헬렛이 말한다. 허무로다, 허무! 모든 것이 허무로다. 태양 아래에서 애쓰는 모든 노고가, 사람에게 무슨 보람이 있으랴?...눈은 보아도 만족하지 못하고, 귀는 들어도 가득 차지 못한다. 있던 것은 다시 있을 것이고, 이루어진 것은 다시 이루어질 것이니, 태양 아래 새로운 것이란 없다.”
일부 생략했지만 단숨에 읽혀지는 구구절절 공감이 가는 체험적 진리의 말씀들입니다. 작자의 허무의 병이 얼마나 깊은지 짐작이 갑니다. “그리스도를 본받아”의 저자인 중세기의 대영성가 토마스 아 캠피스의 “코헬렛의 삶에 대한 대부분의 부정적 묘사는 최고의 지혜이니, 모든 것이 헛되고 덧없는 세상에서 하느님을 섬기는 일이 우선적임을 깨닫게 하기 때문이다.”라는 언급에 공감합니다.
생명과 하느님을 찾아 만나야 비로소 치유될 허무의 병, 무지의 병이요, 치유보다는 예방이 백배 낫습니다. 허무의 병, 무지의 병에 시달려 고생하기 전 생명과 사랑의 하느님을 선택하여 삶의 중심에 모시고 친교의 사랑과 신뢰를 날로 두터이 하자는 것입니다. 삶은, 행복은, 천국은 선택입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제대로 선택을 못해 삶의 중심, 삶의 의미 상실로 정신질환을 겪고 있는지요!
오늘 제1독서의 주인공 헤로데 영주가 삶의 중심과 의미 상실의 전형적 본보기입니다. 요한 세례자를 죽임으로 대죄를 지은 헤로데는 예수님의 등장에 전전긍긍 당황해 하고 불안해 합니다. 애당초 하느님 중심의 삶도 없었던 우유부단한 헤로데에겐 답이, 약이 없습니다. 세상에 하느님 중심을 대체할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세상에 얼마나 많은 이들이 하느님 중심 자리에 우상들을 두고 방향과 중심, 의미를 잃고 지리멸렬한 혼돈과 방황의 삶을 살아가는지요. 헤로데는 오늘날도 무수합니다. 고맙게도 오늘 화답송 시편 90장이 허무의 병, 무지의 병에 대한 참 좋은 치유제가 됩니다. 시편 저자처럼 고백하시기 바랍니다.
“주님, 당신은 대대로 저희 안식처가 되셨나이다.”
“주님, 저희 날수를 헤아리도록 가르치소서. 저희 마음이 슬기를 얻으리이다. 돌아오소서, 주님, 언제까지리이까? 당신 종들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주님, 아침에 당신 자애로 저희 채워 주소서. 저희는 날마다 기뻐하고 즐거워하리이다. 주 하느님의 어지심을 저희 위에 내리소서. 저희 손이 하는 일에 힘을 주소서. 저희 손이 하는 닐에 힘을 실어 주소서.”
얼마나 좋습니까. 생명과 사랑의 하느님이 아니고는 무지와 허무의 블랙홀, 심연에서, 늪에서 벗어날자 아무도 없습니다. 참으로 하느님을 믿고 희망하고 사랑하는 찬미의 사람들은 무지와 허무의 심연은 역설적으로 하느님 사랑의 충만임을 깨달을 것입니다. 무엇보다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무지와 허무의 병에 대한 최고의 처방약임을 깨닫습니다. 그러니 생명과 사랑의 하느님께 찬미와 감사로 응답하는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아멘.
김준수 신부님
“세례자 요한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났다.”(9,7)
저는 아직도 호기심이 참 많습니다. 『호기심과 기쁨에는 공통된 속성이 있다. 긍정적인 경험에는 대부분 호기심과 기쁨이 어느 정도 깃들어 있다. 음악, 춤, 요가, 운동, 독서, 영화, 하이킹, 여행, 속 깊은 대화, 어린 시절의 놀이 등이 긍정적인 경험에 포함된다. 호기심의 감정적 패턴은 우리 뇌의 신경회로에서 나타난다. 우리 뇌 속을 들여다볼 수 있다면, 흥겨운 경험으로 인해 마약 성분이 섞인 도파민이 분출되는 현상을 확인할 것이다. 』 (토드 카시단의 「행복은 호기심을 타고 온다.」 중에서)
호기심은 누군가가 나에게 안겨주는 것이 아니고 내가 적극적으로 찾아내고 만들어 가는 것이라고 하네요. 모든 것이 호기심의 대상이고 기쁨의 재료들입니다. 나이가 들수록, 소임이 적어지고, 활동할 기회가 적어지다 보니 의욕이 떨어질 때 그 무엇인가에 호기심을 갖는다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저 역시도 시간적인 여유와 함께 마음의 여유가 생기게 되니 밀려 두었던 호기심이 발동했었죠. 그래서 저는 새삼스럽게 ‘책 읽기’와 ‘여행과 걷기’ 등에 부쩍 많은 호기심이 생기기 시작했고 그렇게 즐기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런 결과 허리와 다리가 아픈지는 모르지만 말입니다. 이런 호기심은 익숙하고 친숙한 것을 새로운 눈으로 다시 보고 새롭게 보는 것이 필요하고, 이런 삶의 호기심이 삶의 활력을 불러일으키고 삶의 기쁨이라고 봅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 보면 헤로데는 사람들로부터 “예수님께서 하신 모든 일을 전해 듣고 몹시 당황하였다.”(9,7)하고 전합니다. 헤로데가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당황한 까닭이란 그 자신이 과거 행하였던 일 곧 ‘세례자 요한의 목을 베었던 일’ 때문입니다. 그래서 “세례자 요한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났다.”(9,7)라는 소문은 바로 그의 내면에 침잠해 있던 세례자 요한의 일에 대한 후회와 두려움의 느낌을 자극했던 것입니다. 물론 세례자 요한은 분명히 죽었습니다. 그런데 죽은 요한이 되살아났다는 소문은 헤로데에게 “소문에 들리는 이 사람은 도대체 누구인가?”(9,9)하는 호기심을 불러일으켰으며, 그런 연유에서 예수님을 만나고 싶어 했던 것입니다. 헤로데가 예수님에 대한 호기심은 사실 드러나지는 않았지만, 그의 마음속 깊은 곳, 잠재된 속 깊은 느낌은 바로 불안이며 두려움에서 기인하였다고 느껴집니다. 사실 헤로데가 예수님을 만나고 싶어 했던 것은 예수님을 더 잘 알고 더 많이 알고 싶어서가 아니었음을 우리는 압니다. 더더욱 예수님을 만남으로써 회개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지극히 천박한 호기심과 자신의 불안 요인을 자기 눈으로 다시 확인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흔히 큰 죄를 짓고는 불안하여 살기 힘들다, 고 합니다. 그래서 자수해서 광명 찾자, 는 말이 나왔는지 모르겠습니다. 헤로데는 세례자 요한을 어리석게 목을 벤 이후 끊임없이 자책하고 후회했지만, 그를 주검에 이르게 한 일로 내면의 불안과 두려움을 안고 살아왔을 것입니다. 그런 두려움과 불안에서 그는 예수님을 만나 보려고 했었던 것입니다. 사실 사람은 누구나 정도의 차이일 뿐 이런저런 일들로 인해 그 내면 깊이에는 영혼의 질병과도 같은 불안과 두려움이 내재해 있기 마련입니다. 이런 상태에서 살아간다는 것은 살았으면서도 죽은 것과 같은 삶이기에 그 삶은 평안하고 평온할 수 없습니다. 우리 또한 헤로데처럼 우리 내면에 깊이 잠재되어 아직 드러나지 않은 불안과 두려움이 있다면 미루지 말고 참으로 상처 입은 치유자이신 예수님을 만나 어제와 다른 참 평화를 누리며 살아가도록 합시다. 호기심에서가 아닌 사랑하는 마음으로 예수님을 만나는 하루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평화가 너와 함께!” (마르6,50; 요20,20)
<‘길을 찾지 못해 헤매는 상태’>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오늘 복음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헤로데 영주는 이 모든 일을 전해 듣고 몹시 당황하였다.'(루카 9,7)
'이 모든 일'은 예수님의 기적에 대한 이야기들뿐만이 아니라, 바로 앞 장면에서 보여준 제자들의 활동에 대한 이야기도 포함될 것입니다.
이토록 그분의 제자들마저 그 권능을 행하는 것을 전해들은 헤로데는 몹시 당황했던 것입니다.
'당황했다'는 말의 원어의 뜻은 ‘길을 찾지 못해 헤매는 상태’로 ‘몹시 불안한 상태’에 빠진 것을 말합니다.
우리는 헤로데의 이 혼란을 들여다 볼 필요가 있습니다.
사실 본문에 따르면, 그가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들은 것은 세 가지였습니다.
‘죽은 요한이 살아났다는 것’과 ‘엘리야가 나타났다’는 것과 ‘옛 예언자 한 분이 다시 살아났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헤로데는 자신이 목을 벤 요한이라고 단정합니다.
"요한은 내가 목을 베었는데, 소문에 들리는 이 사람은 누구인가?" 그러면서 그는 예수님을 만나보려고 하였습니다. (루카 9,9)
그가 예수님을 만나보려고 한 것은 단순한 호기심이나 의혹, 혹은 소문을 확인하거나 그분을 따르기 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오히려 예수님을 시험하고자 하는 왜곡된 마음으로 업신여기고 조롱하기 위해서 예수님을 만나고자 했습니다.
이를 루카 복음사가는 이렇게 전해줍니다.
'헤로데도 자기 군사들과 함께 예수님을 업신여기고 조롱한 다음, 화려한 옷을 입혀 빌라도에게 돌려보냈다.'(루카 23,11-12)
사실 우리도 예수님께서 하신 '이 모든 일'을 들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뿐만이 아니라 그분의 제자들이 행한 권능도 보았습니다.
그런데도 여전히 당황하고 혼란스러워한다면, 우리도 ‘길을 찾지 못해 헤매는 상태’에 떨어지고 말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몹시 불안할 때, 얼른 주님께 의탁하고 신뢰를 회복해야 할 일입니다.
오히려 온갖 혼란과 의혹, 조바심과 노파심, 불안과 두려움에 쌓이는 유혹의 순간이 바로 ‘우리 주님’께서 오히려 우리를 더 간곡히 부르시고 계실 때임을 알아차려야 할 일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소문에 들리는 이 사람은 누구인가?”(루카 9,9)
주님!
당신은 제가 당신을 찾기도 전부터 저를 찾으시는 분.
그토록 저를 쫄쫄 따라다니시니 저의 추종자입니다.
제가 당신을 믿지 못해도 저를 믿으시는 분.
그토록 저를 믿으시니 저의 신자입니다.
어떤 처지에서도 제 곁에 있어주시는 분.
그토록 옳고 그름을 따지기보다 아픔을 먼저 보시니 당신은 저의 벗입니다.
제가 당신을 사랑하지 못해도 저를 사랑하시는 분.
그토록 저를 사랑하시니 저의 연인입니다.
말하기도 전에 저의 마음을 아시는 분.
그토록 훤히 저를 아시니 당신은 저의 스승이십니다.
끝까지 저를 놓지 않으시는 분.
그토록 저를 소중히 여기시니 당신은 저의 아버지이십니다.
하오니, 주님!
저는 당신의 사랑받는 새끼입니다.
결코 떨어질 수 없는 당신의 소중한 존재, 당신의 것, 당신의 사랑입니다.
어쩔 수 없는 당신의 사랑, 그 놀라움, 사랑이신 당신을 찬미합니다.
아멘.
심흥보 베드로 신부님
프랑스어로 ‘데쟈뷔’라는 말이 있습니다. ‘가시감’이라는 말로도 번역되는데, 처음 보는 대상이나, 처음 겪는 일을 마치 이전에 보았다는 느낌을 받는 이상한 감각이나 환상을 일컫는다고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헤로데는 “요한은 내가 목을 베었는데, 소문에 들리는 이 사람은 누구인가?”(루카 9,9) 하는 의문을 제기하면서 예수님에 대해 궁금해 합니다.
오늘 주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고 있는 우리에게 있어 같은 질문을 다른 형식으로 묻게 합니다.
여러분이 주 예수님을 믿어서, 누구를 만나 무엇을 하려고 하십니까?
세상에 속한 다른 사람들처럼 권력있고 돈많은 사람에게 다가가서 그 길을 따라가려고 하고 있는지? 아니면 예수님을 믿는 예수님의 사람으로서 예수님께서 선포하고 시작하신 하느님 나라의 건설을 위해, 나보다 경제적으로 어렵고 사회적으로 나약한 이들을 찾아 복음의 기쁨을 전하고 이루고 있는지 스스로 자문하게 합니다.
“그는 예수님을 만나 보려고 하였다.“
함승수 신부님
“도둑이 제 발 저리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잘못을 저지른 사람은 그에 대해 아무도 뭐라 하지 않아도 마음이 조마조마해진다는 뜻입니다. ‘양심의 가책’ 때문입니다. 죄책감이 자신을 무겁게 짓누르기에 늘 마음이 불편합니다. 자리에 누워도 잠이 잘 안오고 힘들게 잠이 들어도 악몽에 시달립니다. 그러다 꿈이 아닌 현실에서까지 안좋은 일이 생기면 하느님께서 자기에게 벌을 주셔서 그런거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우리의 잘못 하나 하나에 벌을 주시고 괴롭히시는 쪼잔한 분이 아닙니다. 우리가 괴로워지는 건 스스로 저지른 잘못이나 과오를 바로잡기 위해 노력하지 않고, 적당히 뭉개려고 들기 때문입니다. 자기 체면과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다’고 자기 합리화를 해보지만, 그럴수록 내 양심을 때리는 채찍질이 더 거세지고 아파지지요.
오늘 복음에 나오는 헤로데 영주가 그런 모습입니다. 그는 군중들 사이에서 들리는 예수님의 여러 소문을 듣고 몹시 당황합니다. 사람들 앞에서 자기 체면을 지키기 위해 무죄한 의인인 요한을 살해했던 자기 잘못이 떠올랐기 때문입니다. 안그래도 그 잘못에 대한 죄책감 때문에 괴로워하던 와중에, ‘요한이 살아났다’는 소문이 들리니 혹여 되살아난 요한이 자신에게 복수를 하러 오진 않을까 걱정되었을 겁니다. 그가 요한이 아니라고 해도 이스라엘 백성들이 고대하는 ‘엘리야’나 위대한 예언자라면 잘못을 저지른 자신에게 벌을 내릴지도 모르니 두려웠겠지요. 헤로데가 그런 모습을 보이는 건 당연하고도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그가 사람을 죽였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을 다 소유한 권력자라고 해도 자기 잘못으로부터, 그런 잘못을 저지른 자신을 책망하는 마음으로부터 자유로울 수는 없습니다. 또한 죄를 저질렀으면 죗값을 치러야하는데 그러질 않았으니, 예수님이라는 존재가 무섭고 두려워질 수 밖에 없습니다. 그분이 나를 심판하고 벌주는 무서운 분이라서가 아니라, 내가 벌 받을 짓을 하고도 회개를 하지 않았기에 그렇습니다.
한 가지 다행인 것은 헤로데가 예수님을 만나보려는 마음을 품었다는 것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상황이 낙관적인 건 아닙니다. 헤로데가 예수님을 만나보려고 한 것은 예수라는 이가 대체 누구인지, 그가 사람들이 말하는대로 되살아난 요한이거나 위대한 예언자의 현현이 맞는지를 제 눈으로 ‘확인’하기 위해서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과의 만남을 통해 긍정적인 방향으로 변화되려면 그분 말씀을 귀기울여 듣고 마음에 간직한 채 그분 뜻을 따르는 노력이 뒤따라야 하는데, 그 과정에서 수반되는 시련과 고통을 기꺼이 감수하려는 용기와 의지가 있어야 하는데 헤로데에게서는 그런 부분이 보이지 않는 것이지요. 그런데 그런 점은 우리에게도 있을 겁니다. 신앙생활에 임하는 우리 마음가짐에 주님을 닮아가려는 ‘지향’이, 그분 뜻을 따라가려는 ‘의지’가 없을 때, 그러면서 ‘어떻게 해야 세상에서 더 성공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해야 힘들고 괴로운 상황을 잘 피해갈 수 있을까?’하는 ‘물음’만 던질 때 그렇게 되지요. 그러니 예수님을 만나고 싶다는 열망을 마음에 품어야겠습니다. 그분을 만나되 호기심으로 말고 그분을 닮고 싶다는 간절함으로 만나야겠습니다.
죄를 지은 사람은 양심의 무거운 짐을 벗을 수 없다. <루카 9, 7-9> 9월 26일
이석진 그레고리오 신부님
살인죄를 짓고 죄의 가책은 죽음까지 가져갑니다. 어떤 살인자가 당시에 잡히지 않았다가 오랜 시간이 지나 잡혔을 때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이제야 마음을 놓았다.” 즉, 마음 졸이며 안절부절못하다가 잡히고 나서야 양심의 평화를 얻었다고 합니다. 죄를 지은 사람은 용서받기 전까지 불안하고 초조하게 지냅니다.
오늘 헤로데는 요한을 억울하게 죽인 다음 마음은 언제나 편하지 않아 어떤 부스럭 소리만 나도 양심이 요동쳤나 봅니다.
주님이 공생활 시작하며 많은 이변이 일어나니 ‘그 존재가 누구냐? 혹시 자기가 죽인 요한이 다시 살아난 것이 아닌지?’ 의식하며 직접 예수님 만나보려고 했다고 합니다.
사람은 죄를 짓고 그 결과를 책임지지 않고 흔적을 없애려 하지만, 양심은 마음 깊은 곳에 숨어서 따라다닙니다.
수도자의 규칙은 정주 서원을 하여 장상의 허락 없이 수도원 밖에 나가지 못합니다. 혹시 급하게 나가도 전화로 허락받아야지 허락 없이 밖을 나가면 편하게 일을 보지 못합니다. 기도 시간도 허락 없이 빠질 수 없습니다.
이같이 하느님이 양심을 주신 이유는 진실하고 바르게 살아가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양심을 거슬러 살려 하지 말고 양심의 지시를 따라 진실하고, 선하고, 아름답게 살아야 합니다.
죄를 짓고 불안에 떨지 말고 하루속히 죄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아담과 하와가 금한 실과를 따먹고 나무 뒤에 숨었다는 말은 인간의 심리상태를 잘 묘사하는 것입니다. 지금도 죄를 지으면 주님 앞에 나가서 죄를 뉘우치며 자비를 구하며 편한 마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죄를 짓고 머뭇거리면 건강에도 해롭고 노이로제, 우울증이 불안한 마음에서 일어납니다. 바른 양심, 깨끗한 양심으로 살아갈 때 자유, 평화, 기쁨 중에 살게 됩니다.
양심은 믿음, 희망, 사랑 이전에 주님이 주신 선물이며 양심 따라 사는 길이 하느님의 뜻 중에 가장 큰 것입니다. 법정에서 법관을 속여도 자기 양심을 속일 수 없습니다.
양심이 지시하는 대로 선을 행하고 악을 피하면서 살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 만나기
한창현 모세 신부님
오늘 복음에는 예수님을 이해하는 세 가지 부류의 사람들이 나옵니다. 첫 번째 부류는 예수님을 세례자 요한이 죽었다 살아난 존재로, 두 번째는 예수님을 세상 종말에 오기로 약속한 엘리야라 보았습니다. 마지막은 예수님을 옛 예언자 중 한 분이 다시 살아난 이라 생각했습니다. 헤로데 영주는 이 세 가지 가능성에 대해 듣고 몹시 당황했습니다. 헤로데는 만에 하나 첫 번째 부류의 사람들이 말하는 내용이 사실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마음이 쓰였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후 복음을 보면 헤로데는 예수님을 죽이려 했음(루카 13,31)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예수님을 만난 후에는 예수님이 일으키는 어떤 표징이라도 보고 싶어 했습니다(루카 23,8). 헤로데에게 예수님은 위협적인 존재였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단순한 호기심의 대상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오늘날 예수님을 바라보는 세상 사람들의 시선도 헤로데와 크게 다르지 않아 보입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우리는 예수님에 대해 충분한 설명을 해주지 못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너무 낙담하지 마십시오. 헤로데 앞에서도 예수님께서는 묵묵히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따르셨습니다. 예수님은 존재 자체로 하느님을 세상에 증거하셨습니다. 예수님처럼 우리의 존재 자체도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에 대한 설명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요한은 내가 목을 베었는데, 소문에 들리는 이 사람은 누구인가?"(루카 9, 9)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우리가 진정
사랑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묻습니다.
의심과 소문
사이에 계신
예수님을
바라봅니다.
무성한 소문은
예수님의 실체를
있는 그대로
드러내지
못합니다.
잠깐 나타났다
사라지는 것들이
소문입니다.
요한 세례자의
죽음을
애도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헤로데는
자신의
권력유지에만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사람에 대한
예의가
하나도
없습니다.
이렇듯
욕망의 길은
더 큰 욕망과
거래하며
또 다시 양심을
예수님을
호기심으로
전락시킵니다.
우리의 입이
소문이 아닌
하느님 말씀을
나누고
하느님께서
하신 일들을
나누는 것이
성체를 받아먹는
신앙인의
자세입니다.
지나가는
풍문은
결코
믿음이 되지
못합니다.
헤로데가
모르는 것을
어린이들은
압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의
풍문을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살아계신 예수님을
따르는 것입니다.
요한 세례자를
떠도는
유령으로
만드는
헤로데의 병든
시간은
멈추어야 합니다.
소문을 퍼뜨리고
소문에 마음을
빼앗긴다는 것은
우리가 여전히
헛된 욕망에
빠져 산다는
것입니다.
누군가를
다스린다는 것은
먼저 내 입과
내 마음을
먼저 다스린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헤로데를
아십니다.
우리가
사랑하는 것이
눈 먼 권력이
아니라
살아있는
복음이기를
기도드립니다.
살아있는
오늘의 복음이
우리를 이끕니다.
실험자가 지도를 들고 길에 서 있습니다. 그리고 지나가는 사람을 붙들고 지도를 보여주며 길을 알려 달라고 부탁합니다. 행인은 친절하게 길을 알려주려고 합니다. 그런데 바로 그때 큰 나무판을 든 사람들이 우르르 지나가고, 동시에 지도를 든 실험자를 비슷하게 생긴 사람과 바꿔치기합니다. 행인은 과연 실험자가 바뀌었다는 사실을 알아챘을까요?
여러 차례 반복했지만 대부분 알아채지 못했습니다. 심지어 성별이 바뀌었음에도 알아채지 못하는 일도 있었습니다. 주의 깊게 변화를 보지 않아서일까요?
실제로 우리 뇌는 변화를 생각보다 섬세하게 감지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이런 말도 있나 봅니다.
‘인간은 기본적으로 자기가 관심이 없는 것은 제대로 보지 못한다.’
‘내가 보고 싶은 것만 본다.’
기본적으로 인지능력의 불완전함을 가지고 있는 인간입니다. 특히 착각의 늪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이유는 자신의 불완전함을 인정하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이 겸손은 말만으로 생기지 않습니다. 계속된 성찰과 묵상을 통해서만 가능합니다. 나의 실수를 줄이고 다른 이들과 함께 할 수 있는 여백을 만들게 됩니다.
헤로데 영주가 등장합니다. 그는 예수님께서 하신 모든 일을 전해 듣고는 몹시 당황하게 되지요. 왜냐하면 지은 죄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는 헤로디아 딸의 청에 의해 세례자 요한의 목을 베어 죽였습니다. 사실 은근히 제거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을 것입니다. 헤로데 영주에게 세례자 요한은 사사건건 자기 일에 반대하는 귀찮은 방해꾼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죄라는 생각보다는 약속을 지킨다고 생각하고서 헤로디아 딸의 춤값으로 세례자 요한의 목을 베어 죽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민중 속에서 이상한 소문이 나돌았습니다. 죽었던 요한이 부활하여 놀라운 기적을 행하고 있다느니, 엘리야가 다시 살아났다느니 하는 소문이었습니다.
이를 어떻게 받아들였을까요? 자기가 지은 죄를 스스로 알고 있었기 때문에, 힘든 시간을 보내게 됩니다. 예수님을 자기가 죽인 요한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자신의 권위를 내세우려고 했지만, 오히려 마음의 상태는 맨 밑바닥으로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자신이 가장 힘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보이고 싶었지만, 가장 힘없는 모습이 되고 말았습니다. 제대로 판단하고 결정을 내린 것이라 생각했지만, 가장 잘못된 판단이었습니다.
자기 인지능력을 대단하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불완전함을 인정하는 겸손을 통해 우리는 제대로 된 판단과 결정을 할 수 있습니다. 삶의 후회를 줄여나갈 수 있습니다.
잘못된 점만 찾지 말고, 해결책을 찾아라(헨리 포드).
캄캄한 지하 감옥에서도 도덕성의 회복을 크게 외쳤던 세례자 요한!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헤로데 왕가의 타락은 끝도 없이 이어졌습니다. 해도 해도 너무했습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헤로데 안티파스는 부친이었던 헤로데 대왕의 세 아들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헤로데 대왕이 죽고 나서 영토는 세 아들에게 분배되었는데, 헤로데 안티파스는 갈릴래아와 페레아를 차지하게 되었지요.
한번은 헤로데 안티파스가 로마로 가던 도중에 동생이었던 헤로데 필립보를 방문하게 되었는데, 그는 아버지 헤로데 대왕의 손녀이자 자신의 조카였던 헤로디아를 아내로 삼고 있었습니다. 헤로디아는 이 사람 저 사람의 눈길을 끌만큼 빼어난 미모를 지니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그런데 여행도중 헤로데 안티파스는 헤로디아와 눈이 맞게 되었고, 조카인 헤로디아에게 결혼을 신청하였습니다. 헤로디아는 이에 질세라 즉시 OK했습니다. 로마에서 돌아오자 마자 헤로데 안티파스는 아내였던 아레타 왕의 딸을 쫒아내고 헤로디아를 아내로 맞이했습니다.
보십시오. 이 끝도 없는 헤로데 왕가의 윤리적 타락을...마치도 짐승들과도 별반 다를 바가 없습니다. ‘헤로데 안티파스 사건’은 동생의 아내와 결혼한, 있을 수 없는 사건, 불륜 가운데 불륜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아버지의 손녀이자 자신의 조카와 결혼한 근친상간의 죄도 성립되었습니다. 참으로 수치스런 일이었고, 있어서는 안 될 일이었지만 당시 헤로데 왕가에서 버젓이 벌어진 일이었습니다.
그 순간 율법학자들이나 바리사이파 사람들, 대제관들, 당시 한 자리씩 차지했던 사람들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헤로데 안티파스의 철저한 타락 앞에서 입을 다뭅니다. 침묵을 지킵니다. 살기 위해 자신을 낮춥니다.
그때 유일하게 비난의 목소리를 높였던 사람이 세례자 요한이었습니다. 헤로데 왕가의 추문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도저히 그래서는 안 된다며 엄중히 비난합니다.
이때 헤로데 안티파스의 모습은 눈여겨볼만합니다. 그는 세례자 요한의 탁월한 인품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차원이 달라도 한참 다른 세례자 요한의 사람됨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를 두려워했을 뿐만 아니라 보호해주었습니다. 세례자 요한이 안 된다고 경고할 때 마다 속으로는 몹시 괴로워하면서도 그의 말을 기꺼이 들어왔습니다.
그러나 헤로디아는 반대였습니다. 끊임없이 바른 말을 내뱉는 세례자 요한이 얼마나 미웠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호시탐탐 세례자 요한을 처치할 기회를 노리고 있었습니다.
마음이 유약했고, 또 여자에 약했던 헤로데 안티파스는 마침내 꽤 ‘매혹적’이었던 헤로디아의 간계에 넘어갑니다. 헤로디아는 당시 열일곱 살이던 자신의 딸 살로메에게 대연회석 상에서 춤을 추게 합니다.
당시 대연회장에서 양가집 딸에게 춤을 추게 하는 관습이 없었습니다만 ‘갈 데 까지 간’ 왕가였던 만큼 공주의 신분으로서 남들의 구경거리가 되는 것조차 부끄럽게 여기지 않았습니다.
살로메가 얼마나 춤을 잘 추었던지 헤로데는 정신이 거의 나간 상태에서 실언을 합니다. 헤로디아는 단 한번 찾아온 그 기회를 놓치지 않습니다.
“세례자 요한의 머리를 달라고 청하여라.”
헤로데 안티파스는 내심 엄청 당혹스러웠지만 연회 참석자들 앞에서 말만 내세우는 엉터리란 비난을 면하고 싶었습니다. 이런 얼토당토않은 일로 인해 세례자 요한은 참수 당하게 됩니다.
헤로디아는 기뻐 날뜁니다. 예로니모가 전하기를 당시 헤로디아는 너무 기쁜 나머지 죽은 요한의 혀를 바늘로 찔렀다고 합니다.
청렴결백했던 세례자 요한, 하느님의 영으로 충만했던 세례자 요한이었기에 거칠 것이 없었습니다. 헤로데 왕권도 두렵지 않았습니다. 헤로데의 부도덕, 헤로디아의 사악함 앞에 정면으로 맞섰습니다.
그리하여 캄캄한 감옥에서도 도덕성의 회복을 외칠 수 있었습니다. 그로 인해 의로운 선구자는 쓸쓸히 죽어갔고, 구약 마지막 예언자로서의 사명을 순교로서 완수하였습니다.
의인의 길은 언제나 춥고 배고픈 것입니다. 예언자의 길은 언제나 고독하고 쓸쓸한 가시밭길입니다.
죄인에게 죄를 고백해봐야 죄에서 벗어날 수 없는 이유.
전삼용 요셉 신부님
미국에 있는 어떤 교회에 새로운 목사님이 부임했습니다. 큰 꿈을 안고 교회를 위해 불철주야 섬기던 목사님은 얼마 가지 않아서 몹시도 실망하게 되었습니다. 교인들이 교회 일이나 복음을 전하는 일에 너무나도 무관심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목사님은 강단 밑에 엎드리어 주님께 울부짖으며 도와 달라고 청하는 도리밖에 없었습니다. 그때 주님께서는 그에게 한 가지 지혜를 주셨습니다. 목사님은 모든 교인에게 편지를 쓰고서, 이와 아울러 그곳 지방 신문에 이러한 광고를 게재했습니다.
“다음 주일 오후에 ‘교회의 장례식’을 거행합니다!”
사람의 장례식은 몰라도 교회의 장례식이라는 광고는 역사 이래 처음 있는 일이기에 교인들은 물론 다른 사람들까지 많이 왔습니다. 드디어 교회의 장례를 치르기 위한 예배순서가 시작되었습니다. 마지막 차례로 교인들이 강단 앞에 놓여있는 관에 나와서 고인에게 경의를 표하는 예식이 있게 되었습니다.
교인들은 과연 관 속에 누가 누워있을까 하는 호기심에 모두가 한 줄로 서서 자기의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관속을 들여다보는 사람마다 마치 약속이나 한 듯이 모두가 심각하게 굳어지는 것이었습니다. 관 안에는 거울이 들어있었습니다. 지각 있는 교인들은 금방 목사님의 뜻을 알 수가 있었습니다. 자신이 죽었기 때문에 교회가 죽은 것을 알게 되었던 것입니다.
거울은 신비한 힘이 있습니다. 거울 안에는 자신의 흐트러진 모습을 가다듬어야 하는 모습이 들어있습니다. 그래서 지금의 흐트러진 모습을 보게 합니다. 거울이 없이는 자신을 다잡을 수 없습니다. 이런 역할을 하신 분이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리스도는 우리가 닮아야 할 거울입니다. 그분과 벗어난 모습을 보면 어색해서 견딜 수 없어야 그리스도를 만나고 있는 것입니다.
오래전 어느 신문에서 전과자들의 간담회를 연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절도 전과자들은 자신의 경험담들을 털어놓았습니다. 이때 멈칫하게 하거나 절도를 포기하고 나오게 된 이야기도 있었습니다.
한 명의 전과자가 말했습니다.
“주인이 코를 골고 자면 도둑질하기에 아주 편합니다. 코 고는 소리에 맞추어 한 발짝씩 떼어 놓으면 행진곡에 맞추어 입장하듯이 들킬 염려가 없습니다. 그런데 집이 너무 고요하면 그냥 포기하고 나오고 싶습니다.”
그런데 다른 전과자가 말했습니다.
“난 도둑질하러 들어갔을 때, 그 집 현관에 놓여있는 신발들이 가지런하면 긴장하게 됩니다. 그러나 만일 흐트러져 있으면 내 집같이 마음 놓고 들어갑니다. 하나를 보면 열을 알 수 있거든요.”
어떤 전과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도둑질하다가 뛰쳐나온 적이 있는데, 갑자기 어떤 사람이 불쑥 나타나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깜짝 놀라 칼을 빼 들었죠. 근데 그 괴한도 칼을 들었습니다. 그제야 알았습니다. 그 괴한이 저라는 것을. 그날은 도둑질할 수 없었습니다.”
죄를 짓는 사람에게 가장 두려운 것은 ‘거울’입니다. 카지노에는 거울이 없다고 합니다. 자기가 죄에 빠져있을 때 그러면 안 된다는 것을 압니다. 그래도 변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러고 있는 자기 자신을 본다면 사정이 달라집니다. 자아가 제일 두려워하는 것은 자기 본 모습이 드러나게 만드는 거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헤로데는 예수님의 소식을 듣고 “요한은 내가 목을 베었는데, 소문에 들리는 이 사람은 누구인가?” (루카 9,9)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그 소식만으로도 헤로데의 죄를 드러나게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헤로데가 흐트러진 모습을 하고 있다고 보여주는 거울이셨습니다.
제가 오산 성당에 있을 때 정말 제 죄가 드러나게 하는 많은 분을 만났습니다. 특별히 할머니 신자분들이 많았습니다. 봉성체를 했던 한 할머니는 지금도 제 뇌리에 남아 제가 나이가 들어가면서 그분의 모습과 더 벗어나는 것 같아서 마음이 아프게 합니다. 그분은 돌아가셨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그 온화한 모습은 저에게 거울이 되고 있습니다. 저도 그렇게 나이 들고 싶어지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저희 어머니도 고아로 남의 집에서 일만 하고 매도 맞으며 자라서 다 죽이고 자신 도 죽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고 합니다. 하느님께 불평하는 게 당연해 보이기도 합니다. 그때 바다로 걸어오시는 예수님께서 나병환자촌으로 가시는 것을 보며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을 듣고 깨달으셨습니다.
“나병 환자도 사는데 너는 왜 못 사느냐?”
예수님은 당신이 안 해줘서가 아니라 자아가 불평 자체임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렇게 어머니는 다시 살 힘을 얻으셨습니다. 모든 죄의 원인이 나에게 있음을 보지 못하면 죄는 영원히 계속됩니다. 십자가를 보며 우리는 어떤 기도를 드립니까?
“제 탓이요, 제 탓이요, 저의 큰 탓입니다.”
거룩한 이들은 너무도 깨끗해서 내 죄가 드러나게 합니다. 내 죄가 드러나는 것은 너무도 아픕니다. 그러나 살려면 그 거울들 속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역할을 하도록 교회를 세우셨습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모습을 한 이들이 모인 공동체입니다. 교회는 거울의 방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래서 교회 안에 있으면 자신이 저지르는 죄가 보입니다. 헤로데처럼 자기 잘못을 고치기를 원하면 교회에 머무를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교회 밖에 머무를 것입니다. 이렇게 구원받을 이가 결정됩니다. 교회 안에 들어오지 않는 것 자체가 헤로데가 되겠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집회서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자기 잘못을 솔직히 고백하는 이는 수치를 면하리라.” (집회 20,3)
야고보 사도는 말합니다.
“서로 죄를 고백하고 서로 남을 위하여 기도하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의 병이 낫게 될 것입니다.” (야고 5,16)
결국 죄 없는 이들 앞에서 죄를 고백해야 합니다. 죄 있는 사람들 앞에서 고백해봐야 “우리도 다 죄짓는데?”라고 말할 것입니다. 죄를 안 지으면 오히려 그 공동체에 머물기 어려울 것입니다.
죄를 고백하는데 부끄럽지 않으면 그 죄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거룩한 공동체가 필요합니다. 내 죄를 고백하기 어려운 거룩한 공동체. 그리고 그 공동체에서 내 죄를 고백할 용기. 이것이 나의 육체와 영혼의 병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길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이 그러셨고 또 우리가 그런 공동체가 되기를 원하십니다.
예수님은 우리 죄가 드러나게 하는 거울이시고 또 내 죄가 부끄러운 것임을 알게 하는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교회 공동체가 이런 모습이어야 새로 들어오는 신자들을 죄에서 건져낼 수 있습니다. 같은 죄를 짓는 공동체에서 죄를 고백해봐야 부끄럽지 않아서 죄에서 돌아서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거룩한 공동체를 형성합시다. 이것이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공동체입니다. 죄에서 벗어나려면 부끄럽지만 내 죄를 고백할 대상이나 공동체가 꼭 필요합니다. 그리고 교회는 세상을 거룩하게 하도록 반드시 그러한 공동체가 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오강남 교수의 ‘세계 종교 둘러보기’를 읽었습니다. 종교는 으뜸가는 가르침이고, 엉킨 실타래를 푸는 것처럼 인생의 질문에 대한 답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러 종교가 있지만 대부분의 종교는 3가지 특징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첫 번째는 궁극적인 실재에 대한 체험이 있습니다. 모세는 떨기나무 아래에서 하느님을 체험했습니다. 엘리야는 침묵의 소리에서 하느님을 체험했습니다. 예수님은 광야에서, 겟세마니 동산에서 하느님을 체험했습니다. 부처님은 보리수나무 아래에서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마호메트는 동굴에서 하느님을 체험했습니다. 이와 같은 체험은 신비하고, 비이성적인 경우가 많습니다. 대부분의 종교는 이와 같은 궁극적인 실재에 대한 체험에서 시작됩니다. 체험은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본인의 노력으로 깨달음을 얻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절대자의 계시로 인해 깨달음을 얻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행동의 변화입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광야로 나갔습니다. 엘리야는 바알의 거짓 예언자들을 물리쳤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선발하였고, 하느님나라를 선포하였습니다. 부처님은 깨달음을 전하였습니다. 마호메트는 이슬람 왕국을 만들었습니다. 주님의 부활을 체험했던 제자들은 두려움을 떨쳐버리고 담대하게 복음을 선포하였습니다. 교회를 박해하던 바오로는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이방인의 사도가 되었습니다. 야고보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하였습니다. “여러분의 믿음에 행동이 없다면, 실천이 없다면 그것은 진정한 믿음이 아닙니다.” 세 번째는 교리와 제도입니다. 종교는 교리와 제도를 통하여 세상을 변화시키려고 하였습니다. 교회는 4가지의 기본 교리를 이야기합니다. ‘천주존재, 강생구속, 삼위일체, 상선벌악’입니다. 교회는 7가지 성사를 이야기합니다. ‘세례, 견진, 성체, 병자, 고백, 혼인, 신품’성사입니다. 교회는 하느님 백성의 공동체입니다. 하느님의 백성에는 직분에 따라서 ‘성직자, 수도자, 평신도’가 있습니다. 종교는 개인의 체험, 행동의 변화, 사회의 변화를 추구합니다.
오늘 우리는 헤로데의 가슴과 예수님의 가슴을 만납니다. 헤로데의 가슴은 예수님의 가슴을 알 수 없습니다. 헤로데는 예수님이 누구인지 몰랐습니다. 가슴에서 멀리 있었기 때문입니다. 권력에 취한 사람은 예수님이 누구인지 알기 어렵습니다. 욕망의 노예가 된 사람도 예수님이 누구인지 알 수 없습니다. 부족함을 모르는 사람도 예수님이 누구인지 알기 어렵습니다. 2000년 교회의 역사를 보아도 많은 시련과 아픔이 있었습니다. 예수님과 가슴을 가까지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뜻과 세상의 뜻이 달랐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욕망, 재물, 권력이라는 바벨탑을 쌓으려 하기 때문입니다. 욕심 때문에, 이기심 때문에, 원망 때문에 더불어 살아가는 이웃들에게 아픔을 주고, 상처를 주었습니다. ‘이념, 민족, 세대, 지역’이라는 갈등으로 많은 사람이 죽었습니다. 자연재해로 인한 난민도 있지만, 우리의 폭력과 전쟁 때문에 생겨난 난민이 더 많았습니다. 오늘 우리는 세상의 뜻대로 사는 사람을 보았습니다. 물질적인 부와 권력은 지녔지만 ‘미덕’이 없었던 헤로데입니다. 그는 화려한 궁궐에 살았지만, 인생은 행복하지 못했습니다. 남을 위한 빵을 만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탐욕을 위해서 무고한 사람들을 죽였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뜻대로 사시는 분을 만날 수 있습니다.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그분은 배고픈 사람들을 위해서 빵을 많게 하셨습니다. 그분은 세상의 질서와 세상의 편견을 깨끗하게 부숴버렸고 하느님의 뜻을 먼저 생각하였습니다. 그분은 십자가를 지고 가면서도 골고타의 언덕에서 마지막 숨을 거두면서도 행복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일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욕심과 우리의 이기심만을 위해서 살아간다면 세상은 헛되고 헛될 뿐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주님께서 걸어가신 길을 충실히 살아간다면 세상은 단 10분을 살았어도 의미 있고 가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인생은 그 삶의 길이로 측정할 수 있겠지만, 인생은 그 삶의 가치로도 측정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갈망이 있는 사람과 가슴을 가까이하십니다. 예수님은 힘과 욕망과 재물로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런 걸 찾는 사람의 가슴은 예수님의 가슴을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예수님이 곁에 있어도 알아보지 못합니다. 가슴이 따뜻한 사람은 지금 굶주린 사람에게서도 예수님을 알아봅니다. 지금 헐벗은 사람에게서도 예수님의 향기를 느낍니다. 지금 아픈 사람에게서 예수님의 아픔을 느낄 수 있습니다. 가슴이 함께 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가슴은 해야 할 일을 사랑하는 사람이 느낄 수 있습니다. 헤로데의 가슴은 하고 싶은 일을 사랑하는 사람이 느낄 것 같습니다. “강물이 모두 바다로 흘러드는데 바다는 가득 차지 않는다. 천 년도 당신 눈에는 지나간 어제 같고, 한 토막 밤과도 같사옵니다.”
<삶 죽음 너머 삶>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잘 살고 싶습니다
곧게 살고 싶습니다
바르게 살고 싶습니다
깨끗하게 살고 싶습니다
잘 죽고 싶기 때문입니다
곧게 죽고 싶기 때문입니다
바르게 죽고 싶기 때문입니다
깨끗하게 죽고 싶기 때문입니다
잘 죽고 싶습니다
곧게 죽고 싶습니다
바르게 죽고 싶습니다
깨끗하게 죽고 싶습니다
더 이상 돌이킬 수 없는
죽음 너머 삶을 믿기 때문입니다
태양 아래 새로운 것은 하나도 없다.
윤병훈 베드로 신부님
계절의 변화, 일출과 일몰, 삶과 죽음, 성장과 성숙, 필연과 우연의 만남, 절대와 상대, 선과 악의 공존, 전쟁과 평화, 천당과 지옥, 천주강생, 천주존재. 삼위일체, 상선벌악,
나는 다람쥐가 체바퀴 돌리는 모습본다. 이어서 나는 사람도 여전히 체바퀴를 돌리며 살아가는구나 생각했다. 사실 중요한 것은 새로운 것을 찾는 것이 아니라 이미 있는 것에서 깊은 의미의 답이 있다는 것을 먼저 확인해애 한다.
그런데 목적 지향적, 의미 지향적 인간인 데도 생활 습관이 만성적이어서 생각도 않고 체바퀴 돌리기를 답습하며 살아가기 때문에 심각한 문제가 있다. 젊음을 살고 훌쩍 지나버린 허허로운 인생이 되었을 때, 사람은 삶의 변화를 꾀하려 한다. 이를 위한 처방전으로 있는 것이서 찾으려 하지 않고 새로운 것을 찾으려 한다. 그러나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 정말 변화를 바란다면 '옷만 찢지 말고 가슴을 찢어라' 라고 비장한 각오를 하는 사순절에 들려 주시는 말씀이다.
절대적 삶의 가치, '하느님은 행복이시다.' 또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살아가라 ' 말씀이 중요하다. "헤로데는 예수님을 만나 보려 하였다."(루카9,9) 헤로데는 세례자 요한의 목을 벤자가 이다. 예수님의 행보 소문을 듣고 놀랐나 보다. 세례자 요한이 다시 살아남이 아닌가? 헤로데는 가장 두려워하고 있음이다. 헤로데는 회개의 목적이 아닌 것 같다. 새로움은 자기 가슴 안에 있다. 찢어야 했다.
<요한은 내가 목을 베었는데, 소문에 들리는 이 사람은 누구인가?>
이용현 알베르토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헤로데는 예수님께서 하신 모든 일을 전해 듣고 몹시 당황하면서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요한은 내가 목을 베었는데, 소문에 들리는 이 사람은 누구인가?” 그러면서 그는 예수님을 만나 보려고 하였다고 복음은 전합니다.
사람은 죄를 짓고 못산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것은 적어도 사람으로서 가지고 있는 양심이 있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죄를 지은 사람의 마음 속에는 그 어둠이 사라지지 않으면서 평생을 짓누르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헤로데 역시도 세례자 요한을 죽이고 나서 불안해하던 차에 예수님이 등장하여 백성들로 하여금 위대한 예언자로 인정받자 더더욱 불안해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결국 나중에 헤로데 안티파스는 사도행전 12장에서 보면 하느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은 죄로 주의 천사로부터 내리침을 당하고 벌레들에게 먹혀 죽었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가톨릭 4대교리 중의 하나가 바로 ‘상선벌악’ 입니다. 선은 상을 받게 되고 악은 벌을 받게 된다는 것이지요. 어쩌면 불교의 업보의 개념과도 유사하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그 불교의 업보의 개념과 크게 다른 점이 하나 있다면 그리스도교에는 죄 사함, 즉 하느님으로부터의 용서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죄의 굴레로부터 벗어남이며, 구원이요, 행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하느님으로부터 용서받기 위해서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은 바로 회개입니다. 진정한 회개는 바로 용서, 구원, 그리고 해방으로 나아가기 위한 갈림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미사 중에 우리가 지은 죄가 있다면 어서 회개하고 고백할 수 있는 용기를 청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하느님으로 부터 용서 받고 참된 구원의 길로 나아갈 수 있는 은총을 허락해 주십사 함께 기도했으면 합니다.
“요한은 내가 목을 베었는데, 소문에 들리는 이 사람은 누구인가?”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
예수님을 어떤 분으로 생각하는지
이기정 사도요한 신부님
사람마다 예수님을 만나보려는 이유 만나기 싫은 이유가 있을 겁니다.
헤로데는 예수님까지도 또 죽이려고 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 듭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무엇 때문에 만나려 하는 지 생각하면 복잡해져요.
예수님을 어떤 분으로 생각하는지 알면 거기에 맞게 선교하고 싶네요.
그러나 사람들이 예수님께 관심도 없으니 선교도 하기 아주 힘듭니다.
코로나 전쟁 환율변동 등에 관심있지 죽은 후 문제엔 신경도 안 써요.
예수님 만나 코로나 전쟁 금리 취업문제 등 부탁 하겠다 믿진 않겠고.
세상 살 걱정에만 쏠려있는 사람들에게 사후걱정 까지는 더 어렵지요.
헤로데가 예수님에 대해 묻다.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어제 복음에서 예수께서는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전하기 위하여 제자들을 파견하시면서 그들이 지켜야 할 규칙을 간단히 말씀해 주셨다. “길을 떠날 때 아무 것도 가져가지 마라. 지팡이도 여행 보따리도 빵도 돈도 여벌 옷도 지니지 마라. 어떤 집에 들어가거든 그곳을 떠날 때까지 거기에 머물러라. 사람들이 너희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그 고을을 떠날 때에 그들에게 보이는 증거로 너희 발에서 먼지를 털어 버려라.”(마태 9,3-5)고 하신 것이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 보면, 제자들은 스승 예수의 말씀을 그대로 따랐던 것으로 보인다. 예수님께서 지시하신 대로 한 선교의 효과는 매우 큰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그것은 바로 헤로데 왕의 동요가 그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세례자 용한이 다시 살아났다고 하기도 했으며, 또는 예언자 엘리야가 다시 살아난 것이 아닌가?
혹은 신명 18,15에서 말하듯이 다른 위대한 예언자가 나타나지 않았는가 하는 여러 가지 소문이 나돌자 헤로데 왕은 가뜩이나 세례자 요한을 죽인 것에 대해 가책을 느끼고 있었기에 “소문에 들리는 이 사람은 누구인가?”(9절)하고 물었던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을 한번 만나고 싶어 했다. 예수님께 대한 소문은 꽤나 영향이 컸었다는 생각이 든다.
이 일을 제자들의 복음선포 활동에 연결 지어 볼 때 그렇다면 우리는 하느님 말씀을 전하는데 어떠한 자세로 하고 있는지 생각해보아야 한다. 우리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이용하여 사심 없이 복음을 전할 수 있도록 하여야 한다. 이때에 많은 사람들이 우리의 삶을 보고 진리를 향하여 발걸음을 옮길 것이다.
주님 앞에 참 삶을 통하여 복음의 향기가 이웃으로 퍼져 나가도록 열심히 노력하자. 여기에 우리의 참 행복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기쁘고도 하느님께 감사하면서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삶을 위하여 기도하자.
최광희 마태오 신부님
예수님은 당신을 궁금해하는 이들에게
같은 의문을 지니게 하십니다.
대체 당신은 누구십니까?
당신은 무엇 때문에 모든 것을 내어 주시고
온전한 자기 희생의 길을 걸어가셨으며
끝까지 사랑하셨습니까?
내가 믿고 사랑하는 당신이 누구이신지
왜 당신은 저의 부족함과 약함까지도
사랑으로 감싸주시고 기다려 주시는지
나의 주님 그리스도는 대체 어떤 분이신지를 바라보게 하십니다.
당신의 시선이, 당신의 말씀이 ,당신의 사랑이
당신께 대한 의문에서 믿음으로
그 믿음이 당신께 청하고 머무르는
축복의 발걸음이 될 수 있도록 인도하여 주소서.
이 사람은 누구인가? Who then is this
"소문에 들리는 이 사람은 누구인가?”(루카 9, 9)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가을은
소문으로
오는 것이 아니라
살아있는
이 느낌으로
만나는 참 좋은
계절입니다.
참된 만남은
헛된 소문을
뜬소문을
따르지
않습니다.
참된 믿음은
참된 만남을
바탕으로
깊어집니다.
백 마디의
말보다
단 한번의
올바른 실천이
더 중요합니다.
성 요한 세례자의
삶은 살아가는
삶 자체에서
다시 만납니다.
신앙인의 기준이자
신앙인의 정확한
실체는 올바른
실행입니다.
신앙인의 정체성은
올바른 삶으로
결정됩니다.
올바른 삶은
이타적인
삶으로
드러납니다.
이타적인 삶은
성 요한 세례자가
보여준 간절한
믿음입니다.
소문은 더 많은
의심을
불러일으키지만
간절한 믿음은
참된 중심을
잡아줍니다.
중심이 없으면
삶은
변덕스러워집니다.
의심과 중심 사이에
참된 믿음이 있습니다.
믿는 만큼
깊어가는
믿음입니다.
우리가 다시
주목해야 할 것은
선구자적인 삶을
살다가 떠난
성 요한 세례자의
삶의 중심점입니다.
삶의 중심점이
없다면 믿음은
소문으로
또 다시
죽어가는
사문화의 용어로
전락할 수밖에
없습니다.
다시 우리는
어디에 중심을
두고 어디에
에너지를 쏟으며
살고 있는 지를
생각해 보는
시간입니다.
소문을 품고
사는 것이 아닌
믿음을 품고
살아가는
하느님의
사람입니다.
우리들의 정체는
올바른 믿음이며
간절한 실천입니다.
간절한 중심점에
간절한 기도가
있습니다.
인생의 목적은 ‘행복’이라고 많은 분이 말씀하십니다. 이 행복을 위해 우리는 노력합니다. 성공하기 위해, 돈을 벌려고, 좋은 직장에 들어가려고, 멋진 외모를 만들려고 노력합니다. 행복하기 위해서라는 이유를 들면서 말입니다. 그런데 이 행복은 신기루일까요? 돈을 벌어도, 소위 성공을 해도, 원하는 바를 이루어도 행복한 것 같지 않다고 말씀하시는 분이 너무 많습니다. 순간의 만족은 가져다주지만, 행복이라 할 수 있는 영원한 만족은 주지 않습니다.
행복은 성취로써 얻게 되는 단기적인 만족감이 아닙니다. 그래서 삶의 목적이라는 것을 행복이라 할 수 없습니다. 그보다 사랑하면서 저절로 얻는 것이 행복이 아닐까요? 그래서 주님의 항상 일 순위는 사랑이었습니다.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면서 행복을 얻을 수 있게 됩니다. 나중에 죽어서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 자체가 행복이 될 수 없습니다. 사랑하기에 행복의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랑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잘못된 사랑은 나만의 행복에만 머물게 됩니다. 너와 내가 모두 행복해질 수 있는 사랑이 진짜 사랑입니다.
헤로데 영주는 헤로디아 딸의 춤값으로 세례자 요한의 목을 잘랐습니다. 사람들 앞에서 했던 자신의 말의 권위를 위해서 또 체면을 살리기 위해서 아무런 죄도 없는 세례자 요한의 목을 잘라서 주었습니다. 그 결과 오늘 복음에서 알 수 있듯이, 예수님에 대한 소문에 당황해합니다. 지금의 상태에서 그는 행복할 수 있을까요? 세례자 요한의 목을 잘라서 주었을 때는 “내가 이렇게 힘 있는 사람이야.”라는 뿌듯함이 행복인 것처럼 착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죄 안에 있으면서 절대로 행복할 수가 없습니다.
이런 상태에서 예수님을 만나려고 합니다. 과연 행복해질 수 있을까요? 예수님 안에서 행복을 얻었던 사람은 헤로데처럼 의심을 품고 만나는 사람이 아니라 믿음으로 만난 사람이었습니다. 또 진리에 대한 확신을 하고 예수님을 만난 사람이 행복을 얻었지, 헤로데처럼 불안감을 가지고 예수님을 만난 사람은 아무런 것도 얻을 수가 없었습니다.
오늘 독서의 코헬렛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허무로다, 허무! 모든 것이 허무로다!”(코헬 1,2)
이 세상의 것들은 허무에 그칠 뿐입니다. 주님께서 강조하시고 당신께서 직접 보여 주셨던 사랑만이 남게 됩니다. 이 사랑이 우리의 행복을 채워줄 것이고, 우리의 존재 자체의 의미를 부여하게 될 것입니다. 허무한 세상 것이 아닌, 끝까지 남을 사랑을 실천하시길 바랍니다.
세상에서 가장 좋은 것은 자기다워지는 길을 아는 것이다(미셸 드 몽테뉴).
나의 변화와 발전을 위한 생각
어느 회사에 노총각 과장님이 계셨습니다. 이 과장님이 생일을 맞이했지요. 동료 직원 중의 한 명이 영화표 두 장을 선물로 주면서 “빨리 여자 친구 만들어서 같이 보세요.”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과장님은 뭐라고 했을까요? 이렇게 말하면서 좋아했다고 합니다.
“아싸! 두 번 볼 수 있겠다.”
곧바로 이렇게 말하는 것을 보니 계속해서 노총각으로 살아갈 것 같지 않습니까? 여자 친구 만들 생각보다 혼자 영화 두 번 볼 것을 먼저 생각하니 말입니다.
어떤 생각을 하느냐에 따라 자신의 삶이 결정된다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생각을 확장하기보다 자신의 틀에 가둬버릴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할 수 없는 일이 너무 많고, 나를 힘들게 하는 것도 많아질 수밖에 없습니다.
나의 변화와 발전을 위한 생각들을 계속해야 합니다. 남들이 부러워할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솔직함이 주는 힘
전삼용 요셉 신부님
오늘 복음의 주인공은 헤로데 영주입니다. 헤로데는 예수님의 소식을 듣습니다. 죽은 요한이 되살아난 것이라는 소문, 엘리야나 옛 예언자 한 분이 다시 살아났다는 소문이 무성하였습니다. 헤로데는 “요한은 내가 목을 베었는데, 소문에 들리는 이 사람은 누구인가?”라고 말합니다. 그러며 예수님을 만나 보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을 만나보려고 하는 것까지는 아주 고무적인 일이라 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헤로데가 자신의 잘못에서 벗어나고 싶은 생각이 없다는 데 있습니다. 그러나 적어도 예수님을 보고 싶어 한다는 것은 아주 좋은 일입니다. 다만 예수님을 만나려면 요한의 목을 벤 사실이 더욱 두드러지게 드러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빛이시기에 자신의 죄가 만천하에 드러나기를 원치 않는다면 그분을 가까이할 수 없습니다. 주님을 가까이하려면 자기 죄가 드러나는 것에 대해 솔직해져야 할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은 “반대자들의 숨은 생각을 드러나게”(루카 2,35) 하시는 분이십니다. 의로운 사람을 거부하면 의롭지 않은 사람임이 증명됩니다.
영화 ‘뮬란’(2020)은 중국 역사에서 여성이 실제로 남성으로 위장한 채 갑옷을 입고 전장을 누볐던 실화를 바탕으로 각색된 내용입니다. 이 영화의 주제는 ‘진실’입니다. 영화에서는 ‘진실과 초자연적 힘’을 결합했습니다.
태어날 때부터 뛰어난 지혜와 힘을 지닌 여성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당시 시대는 여성은 얌전하게 시집이나 잘 가면 되는 것이었습니다. 딸이 사내아이처럼 행동하는 것은 가문의 수치였습니다. 하지만 뮬란은 이런 기존의 틀을 거부합니다.
뮬란은 몸이 좋지 않은 아버지 대신 군대에 입대합니다. 그리고 남성으로 속이고 모든 훈련을 감내합니다. 하지만 자신 안에 내재한 힘을 온전히 발휘하지는 못합니다. 진실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진실할 수 없는 이유는 여성인 것이 발각되는 즉시 군에서 쫓겨나고 그러면 가문 전체가 불명예를 입기 때문입니다.
뮬란은 자신의 힘이 발휘되지 않으면 자신의 전우들이 죽게 될 것을 알고는 어쩔 수 없이 자신이 여인이라는 것을 드러냅니다. 초자연적인 힘을 얻기 위해서였습니다. 목숨을 내거는 결단이었지만, 그 진실함 때문에 자신 주위에 맴돌기만 하던 기(氣)를 사용할 수 있게 됩니다. 기는 우리로 말하면 성령님이 될 것입니다. 성령님은 진실하지 않은 사람에게 오지 않으십니다. 그리고 동료들을 구합니다.
사람이 왜 진실하지 못하게 되었을까요? ‘교만’ 때문입니다. 모든 죄는 다 교만에서 시작됩니다. 하느님과 같아지려는 마음이 교만입니다. 같아지는 것보다 높아지는 것입니다. 자기 생각이 하느님 뜻보다 우선합니다. 그런 교만함은 죄를 짓게 만들고 사람들 앞에서 그 죄가 드러나는 것을 두렵게 합니다. 그래서 하느님에게서 멀어지게 만듭니다. 아담이 주님의 존재를 느끼고 뒷걸음질 친 것과 같습니다.
진실을 고백하기 위해서는 큰 용기가 필요합니다. 사람들 앞에서 자신의 평판이 무너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야고보 사도는 병자성사에 관련된 말씀을 하며 “서로 죄를 고백하고 서로 남을 위하여 기도하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의 병이 낫게 될 것입니다”(야고 5,16)라고 권고합니다. 서로 죄를 고백하려는 겸손이 없으면 아담과 하와처럼 서로 자신의 죄를 감추기 위해 남을 비난하는 쪽으로 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하느님과 멀어지고 그분이 주시는 은총의 힘을 발휘할 수 없는 사람이 됩니다. 고해성사 때 굳이 죄를 사제 앞에서 고백하게 하는 이유가 이것입니다. 적어도 오늘 헤로데는 “내가 요한의 목을 베었다”고 고백합니다. 그래서 주님을 가까이할 마음이 생기는 것입니다.
제가 군대에 있을 때 한 달 정도 어느 부대의 중대장 운전병을 한 적이 있습니다. 그분은 제 기억으로 미스터 건국대였습니다. 대학에서 보디빌딩으로 일등을 한 적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것을 늘 자랑하였습니다. 그분은 30대 중후반이 되었고, 저는 20대 초반이었습니다. 저는 운전병으로 운동할 시간이 많아서 근육이 한창 붙을 때고 그분은 빠져나갈 때였습니다. 그분의 대학 시절만큼은 아니어도 저도 몸을 만드는 것을 좋아할 때였습니다. 그리고 어느 날 사우나에 함께 간 적이 있습니다. 그분이 저의 몸을 보며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저 멀리에서 해. 내 옆으로 오지마!”
다른 것은 몰라도 팔뚝은 제가 더 두꺼웠던 것 같습니다. 그동안 근육 자랑을 하고 다녔는데 제가 조금 더 좋다고 보았던 것 같습니다. 사람들 앞에서 잘 보이려 하는 사람은 자신과 비교될 만한 사람이 곁에 있는 것을 싫어합니다. 하물며 우리 죄의 민낯이 드러나게 만드는 주님께서 옆에 계시게 하기 위해서라면 우리가 어떤 준비를 해야겠습니까? 내 죄가 만천하에 드러날 수 있도록 나를 낮추기를 원해야 합니다. 낮아지기를 원치 않으면 주님을 가까이하기 싫다는 말과 같습니다. 이 두 가지는 동시에 일어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심을 원하고 그분이 주시는 성령의 힘을 받아 살고 싶다면 가장 우선하여서 해야 하는 일은 사람들 앞에서 죄를 고백하여 겸손해지는 일을 즐기는 것입니다. 겸손이 은총과 진리를 부르고 지혜와 힘을 발휘하며 살게 합니다. 그러려면 솔직함으로 사람들 앞에서 낮아지는 것을 즐겨야 합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신부님들과 함께 왓킨스 글렌(Watkins Glen) 주립공원엘 다녀왔습니다. 모처럼 야영장에서 텐트를 치고 함께 지냈습니다. 5명이 함께 갔습니다. 모두들 장점이 있었습니다. 장을 보고 계획을 세우고, 음식을 준비하는 신부님이 있었습니다. 동료들을 위해서 맛있는 음료수를 만들어 주는 신부님이 있었습니다. 야영의 꽃인 모닥불을 피우는 신부님이 있었습니다. 향이 좋은 커피를 직접 갈아서 마실 수 있도록 해준 신부님이 있었습니다. 특별한 재능이 없는 저는 주로 설거지를 담당하였습니다. 공원에는 따뜻한 물이 나오는 샤워장이 있었고, 설거지를 할 수 있는 시설도 있었습니다. 조용히 자신을 돌아볼 수 있는 오솔길도 있었고, 빙하가 남긴 멋진 계곡도 있었습니다. 폭포와 호수를 보고 싶으면 계곡을 따라 내려가면 되었습니다. 기도하고 싶으면 오솔길을 걸으면 되었습니다. 공원을 나가서 20분만 걸으면 눈을 맑게 해주는 멋진 세네카 호수가 있습니다. 세네카 호수는 이스라엘의 갈릴래아 호수를 닮았습니다.
함께 식사하고, 계곡의 멋진 모습을 감상하는 것도 좋았지만 가장 기억에 남은 것은 모닥불 주변에 앉아서 차를 마시며 이야기하는 시간이었습니다. 어둠 속에 모닥불은 우리를 하나로 만들어 주는 것 같았습니다. 타오르는 불빛을 가만히 바라보기도 하였습니다. 순서도 없이, 주제도 없이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생활의 지혜를 나누기도 하였고, 삶의 어려움을 나누기도 하였고, 코로나19에 대한 이야기도 나누었습니다. 신학교 이야기도하였고, 군대에서 축구한 이야기도 하였습니다. 모두 각자의 텐트로 돌아가고, 모닥불은 재가 되었습니다. 모닥불이라는 노래도 생각났습니다. “모닥불 피워놓고 마주 앉아서 우리들의 이야기는 끝이 없어라. 인생은 연기 속에 재를 남기고 말없이 사라지는 모닥불 같은 것. 타다가 꺼지는 그 순간까지 우리들의 이야기는 끝이 없어라.” 약간의 불편함을 받아들일 수 있다면 야영은 일상에서 벗어나 자연을 느낄 수 있는 추억이 됩니다. 서로가 가진 장점을 배울 수 있는 시간이 됩니다.
오늘 제1독서는 인생이 헛되다고 합니다. 모닥불이 아름답지만 재가 되듯이 건강했던 사람도, 지혜롭던 사람도, 권력을 지녔던 사람도, 부유했던 사람도 언젠가는 모두 한 줌의 흙이 되기 때문입니다. ‘타다가 꺼지는 그 순간까지 우리들의 이야기는 끝이 없다.’는 노랫말처럼 우리도 누군가를 따뜻하게 해 주는, 어둠을 밝게 비춰주는, 빛으로 하나가 되도록 이끌어주는 모닥불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모닥불의 삶을 살 수 있다면 우리의 인생은 결코 헛되지 않을 것입니다. 인생은 늙고 병들어 흙이 되지만, 끝없이 이어지는 이야기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 이야기는 깨달음이 되었고, 희망이 되었고, 천국의 열쇠가 되었습니다. 그 이야기는 문화와 문명이 되었고, 역사와 신앙이 되었습니다. 마더 데레사, 이태석 신부님은 기꺼이 모닥불의 삶을 살았습니다. 그분들의 삶은 이야기가 되었고 우리 삶의 등불이 되고 있습니다. 강물이 바다로 흘러가지만 바다는 넘치지 않는다고 합니다. 하느님께서 함께 하심을 믿으면 결코 우리의 인생이 헛되지 않습니다. 하느님의 자비하심과 하느님의 사랑은 결코 부족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헤로데는 예수님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만나고 싶어 했습니다. 헤로데는 예수님의 어떤 이야기를 들었을까요? 권력, 명예, 재물에 대한 이야기는 아니었을 겁니다. 그것은 이미 넘치도록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헛되고 헛된 인생, 재가 되어 흙으로 돌아갈 것 같은 인생의 이야기는 아니었을 겁니다. 밀알 하나가 썩어야 많은 열매를 맺는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겁니다. 성한 사람에게는 의사가 필요 없지만 아픈 사람에게는 의사가 필요하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겁니다.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라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서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겁니다. 예수님의 이야기를 듣고 예수님을 만났지만 어떤 사람은 슬퍼하며 예수님을 떠났다고 합니다. 가진 것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헛되고 헛된 인생에 집착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그물을 버리고, 배를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고 합니다. 예수님의 이야기 속에서 세상이 줄 수 없는 참된 행복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타다가 꺼지는 그 순간까지 끝나지 않는 모닥불의 이야기를 만들어 가면 좋겠습니다.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모든 율법의 완성이라고 하셨으니 저희가 그 사랑의 정신으로 하느님의 계명을 지켜 영원한 생명에 이르게 하소서.”
<요한은 내가 목을 베었는데, 소문에 들리는 이 사람은 누구인가?>
이용현 알베르토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보면 헤로데가 사람들로부터 예수님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나서 무척 당황했다고 전합니다. 그 이유는 사람들이 요한이 되살아났다고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자 헤로데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요한은 내가 목을 베었는데, 소문에 들리는 이 사람은 누구인가?”
‘죄 짓고는 못산다’는 말이 있습니다. 아마도 헤로데 역시도 세례자 요한을 죽이고 나서 그렇게 마음이 편하지 않았을 것이고, 그 세례자 요한을 넘어서는 더 크신 분이 나타났다고 했을 때 어쩌면 더 두려워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죄를 짓는다는 것은 어쩌면 마귀에게 발목이 잡혀있는 것과도 같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만약 우리가 죄로부터 벗어나지 못할 때 구원의 가능성 역시도 멀어지게 됩니다. 그런데 그 죄로부터 벗어난다는 것이 인간 스스로는 참 힘든 일입니다. 어쩌면 잘 낫지 않는 상처와도 같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치유가 필요한 데 그 치유는 인간의 힘으로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영을 통해 가능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하느님의 영을 받아들일 수 있는 방법은 곧 참된 회개입니다.
역사 안에서 볼 때 헤로데 안티파스는 결국 회개하지 못했고, 나중엔 헤로데 아그리빠 1세로부터 추방당하고 귀양 중에 쓸쓸히 죽어갔다고 기록은 전합니다.
우리가 죄를 짓고 두려워 할 수 있다는 것은 어쩌면 어서 회개하라는 싸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양심입니다. 그렇게 인간은 다른 짐승들과는 달리 양심을 가진 존재입니다. 우리가 진정 회개했을 때 하느님은 그 회개를 받아주시는 자비로우신 분이십니다. 그리고 그 하느님의 자비하심 안에서 우리는 구원의 길로 나아가게 될 것입니다.
“요한은 내가 목을 베었는데, 소문에 들리는 이 사람은 누구인가?”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
헤로데 영주의 또 다른 짓거리
윤병훈 베드로 신부님
세례자 요한을 무참하게 죽인 중죄인, 또 소문에 세례자 요한 보다 더 큰 인물, 예수에 대한 소문이 더욱 크게 증폭되자 헤로데는 미쳐간다. 권력에 대한 또 다른 위기를 느끼기 시작했고 또 다시 악행의 행위 보따리를 풀고 짓거리를 꿈꾼다.
하나의 짓거리는 헤로데 안에서 인면수심의 양육강식 동물적 본능이 발동한다. 인간관계는 꼬이고 또 다른 왜곡을 부른다. 행한 짓거리를 하느님 앞에 열어 보일 회개와 용서를 헤로데는 어린시절에 배우지 못했다. 다만 상대적인 비교에서 자기 보다 크다 싶으면 적개심을 갖고 또 다른 짓거리를 획책할 뿐이다.
이는 헤로데 안에서 상대를 존중하고 자기가 잘못이 있을 때 상대에게 용서를 청하고 회개할 상생과 협력이라는 생명 공동체성의 부재가 있었다. 한 가정은 핵가족으로 부모 사이 한 자녀가 자라고 조부모 없이 자란다. 자녀는 자라나며 인간관계를 배우지 못하고 자기만 최고일 뿐이다. 잘못했을 때라도 용서를 청하지도 회개하지도 않는다. 그런자가 자라며 권력에 군림하면 폭군이 되어 안하무인이 된다. 그리고 자기가 못마땅하면 또 짓거리를 할 뿐이다.
해로데의 짓거리, 살인자가 되고 전과범이 된다. 요즘 사람들의 크고 작은 짓거리가 사도 때도 없이 극성을 부린다. 많은 형제들 속에서, 대가족 안에서 배워야할 바르고 넉넉한 성품을 오늘은 어디서 배울까? 나는 이를 배울 장소를 마련하고 형제들과 넉넉한 자원 봉사자들과 함께 수평과 수직의 자리를 마련하고 배워가고 있다.
헤로데 영주는 예수님께서 하신 모든 일을 전해 듣고 몹시 당황하였다. 더러는 “요한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났다.” 하고, 더러는 “엘리야가 나타났다.” 하는가 하면, 또 어떤 이들은 “옛 예언자 한 분이 다시 살아났다.” 하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헤로데는 이렇게 말하였다. “요한은 내가 목을 베었는데, 소문에 들리는 이 사람은 누구인가?” 그러면서 그는 예수님을 만나 보려고 하였다.(요한9,7-9). 아휴! 어쩌나? 헤로데
<만남>
송영진 모세 신부님
<연중 제25주간 목요일>(2020. 9. 24. 목)(루카 9,7-9)
성지에 가서 순례는 하지 않고 성지를 구경만 하고 돌아오는 경우가 있습니다.
미사참례를 한다고 성당에 앉아서 참례는 하지 않고 미사를 구경만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성경을 펼쳐놓고서 하느님의 말씀을 듣지는 않고 성경이라는 책을 구경만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지상 생애 동안, 예수님과 마주치거나, 예수님 곁을 스쳐 지나가거나, 그분을 한 번이라도 본 사람은 수도 없이 많았을 텐데, ‘예수님을 참으로 만난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마티아를 사도로 뽑을 때, 그 자리에 백스무 명가량 모여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사도 1,15), 아마도 그 사람들이 예수님의 승천 때까지 ‘예수님을 참으로 만난 사람’일 것입니다. 성지순례는 성지 관광이 아니라, 하느님의 구원 역사를 좀 더 깊이 체험하기 위한 일입니다.
미사참례는 ‘지금, 이곳에서, 우리와 함께 살아계시는’ 예수님을 만나는 일입니다.
성경 독서는 살아계시는 하느님의 살아 있는 말씀을 듣고 묵상하고 실천하는 일입니다. 신앙생활은 날마다 예수님을 새롭게 만나서 예수님과 함께 살아가는 생활입니다.
그 ‘만남’은 나의 모든 것을 예수님께 드리고, 예수님께서 주시는 모든 것을 내 삶 안으로 깊이 받아들여서, 예수님과 일치를 이루는 일입니다. 다른 종교에서는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다.” 라고 말하지만, 참된 만남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스쳐 지나가는 일은 아무것도 아닌 일, 무의미하고 가치 없는 일입니다.
“헤로데 영주는 이 모든 일을 전해 듣고 몹시 당황하였다. 더러는 ‘요한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났다.’ 하고, 더러는 ‘엘리야가 나타났다.’ 하는가 하면, 또 어떤 이들은 ‘옛 예언자 한 분이 다시 살아났다.’ 하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헤로데는 이렇게 말하였다. ‘요한은 내가 목을 베었는데, 소문에 들리는 이 사람은 누구인가?’ 그러면서 그는 예수님을 만나 보려고 하였다(루카 9,7-9).”
헤로데가 당황하였다는 것을 “헤로데는 세례자 요한을 죽인 일 때문에 양심의 가책을 느꼈다.”, 또는 “죄책감을 느꼈다.”로 생각하는 이들이 있는데, 그것은 아니고, 요한의 귀신이 해코지 하지나 않을까, 라는 미신적인 불안감을 느꼈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헤로데는 양심의 가책이나 죄책감을 느끼기는커녕 요한을 죽인 일에 대해서 백성들이 특별한 반응을 보이지 않자 더욱 자신감을 얻어서 예수님마저 죽이려고 했습니다(루카 13,31).
헤로데가 예수님을 만나 보려고 했다는 것은 ‘불순한 호기심’으로 예수님을 한 번 ‘구경’해 보고 싶어 했다는 뜻입니다.
나중에 예수님과 헤로데가 만나긴 합니다.
빌라도가 재판 도중에 예수님을 헤로데에게 보냈기 때문입니다(루카 23,7).
그때 헤로데는 예수님께서 일으키신 기적에 관한 불순한 호기심을 노골적으로 드러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으시자, 예수님을 업신여기고 조롱했습니다(루카 23,11).
헤로데는 예수님을 만났지만, 그것은 만난 것도 아니고, 아무런 의미 없이 구경만 하면서 스쳐 지나가는 일보다 더 나쁜 일이었습니다. 헤로데의 죄만 더욱 커졌기 때문입니다.
헤로데와 완전히 대조되는 사람이 있는데, 그 사람은 바로 ‘자캐오’입니다.
“예수님께서 예리코에 들어가시어 거리를 지나가고 계셨다. 마침 거기에 자캐오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세관장이고 또 부자였다. 그는 예수님께서 어떠한 분이신지 보려고 애썼지만 군중에 가려 볼 수가 없었다. 키가 작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앞질러 달려가 돌무화과나무로 올라갔다. 그곳을 지나시는 예수님을 보려는 것이었다(루카 19,1-4).”
자캐오가 예수님을 보려고 애쓰는 모습은, 한 번 구경이나 하려는 것이 아님을 나타냅니다. 그는 예수님을 구경하고 싶어 한 것이 아니라, 만나고 싶어 했습니다. (아마도 새 인생, 새 생명에 대한 갈망이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 앞에 나설 용기는 없었습니다. (자신의 직업과 또 여러 가지 처지 때문에 그랬을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먼저 그를 부르셨는데 (루카 19,5), 자캐오의 마음속을 꿰뚫어보셨기 때문입니다.
한 사람 더 생각할 수 있는데, 그 사람은 ‘바르티매오’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많은 군중과 더불어 예리코를 떠나실 때에, 티매오의 아들 바르티매오라는 눈먼 거지가 길가에 앉아 있다가, 나자렛 사람 예수님이라는 소리를 듣고, ‘다윗의 자손 예수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하고 외치기 시작하였다(마르 10,46-47).”
예수님께서 그날 그곳을 지나가지 않으셨다면, 아마도 바르티매오는 그냥 그 자리에서 구걸을 하면서 살다가 생을 마쳤을 가능성이 큽니다.
바르티매오의 입장에서는 예수님께서 자기 앞으로 스쳐 지나가시는 그 순간이 일생일대의, 절대로 놓치면 안 되는 단 한 번의 기회였습니다. 아마도 그는 전부터 예수님에 관한 소문을 듣고 예수님을 만나고 싶어 했던 것 같은데, 그의 처지에서는 예수님을 만날 방법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더욱 간절하게 갈망하고 있었을 것이고, 기도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예수님께서 앞을 지나가신다는 말을 듣자 자캐오보다 훨씬 더 절박한 모습으로 예수님을 찾았고, 불렀습니다. (예수님과 바르티매오의 만남은 ‘우연’이 아니라 ‘섭리’입니다.)
자캐오도 그렇고, 바르티매오도 그렇고, 두 사람은 ‘예수님을 만남으로써’ 완전히 변화되어서 새로운 인생을 살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참으로 만난다는 것’은 바로 그런 것입니다.
‘만남’은 ‘부르심’과 ‘응답’이 합해진 일입니다. ‘부르심’을 직접 받았지만 곧바로 응답하지 않은 사람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다른 사람에게 ‘나를 따라라.’ 하고 이르셨다. 그러나 그는 ‘주님, 먼저 집에 가서 아버지의 장사를 지내게 허락해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죽은 이들의 장사는 죽은 이들이 지내도록 내버려 두고, 너는 가서 하느님의 나라를 알려라.’ 하고 말씀하셨다(루카 9,59-60).”
“고추를 말리려고 마당에 널어놓았는데, 비가 올 것 같으니까 집에 가야겠다.” 라고 말하면서 미사참례를 하다 말고 중간에 집으로 돌아가는 사람을 본 적이 있습니다. 아마도 예수님께서는 그런 경우에도 “죽은 이들의 일은 죽은 이들이 하도록 내버려 두고 너는 여기에서 나를 만나라.” 라고 말씀하실 것입니다.
그런 일은 ‘예의’에 관한 일이 아니라, ‘신앙’에 관한 일입니다.
(“나는 지금 주님이신 예수님을 참으로 만나고 있는가?”)
하늘마음 가져 행복합시다.
이기정 사도요한 신부님
아버지 헤로데는 4살 이하의 남자아기들을, 자기는 요한을 죽였습니다.
자기 남동생 부인을 가로채 살며, 요한에게 거리에서 비난 받았습니다.
예수님소문에 겁도 나지만 만나보고는, 빌라도에게 권력 회피했습니다.
권력이 좀 있다고 자기 기분대로 사는 왕가를 부러워하는 세상입니다.
신자들이 복음을 선교해도 아직 뭔가 두려워 회피하는 사람 많습니다.
보아도 만족 못 하고 들어도 마음 안 차 진리에 목마른 이세상입니다.
나를 권력에서 내리고 편안한 그냥 인간으로 마음 열 때 햇살 듭니다.
아집 버리고 창공날고 세상 놓고 영원보는 하늘마음 가져 행복합시다.
내 양 떼를 좋은 목장에서 기르리라.
성 아우구스티노 주교의 ‘목자들에 대한 강론’에서 (Sermo 46,24-25. 27: CCL 41,551-553)
“나는 내 양 떼를 뭇 민족 가운데서 데려오고 이 나라 저 나라에서 모아 들여 본고장으로 데리고 와서 이스라엘의 산들에서 기를 것이다.” 이스라엘의 산이란 성서의 저자들을 가리킵니다. 여러분이 안전한 데서 풀을 먹고 싶으면 성서에서 먹으십시오. 거기에서 듣는 것은 모두 다 기꺼이 맛보십시오. 그러나 성서 외에서 나오는 다른 모든 것은 거절하십시오. 안개 속에서 헤매지 않도록 목자의 목소리를 잘 들으십시오. 성서라는 산위에 모여 드십시오. 거기에는 여러분 마음의 기쁨이 있고 독성이나 해로운 것이 조금도 없습니다. 그것은 가장 비옥한 목장입니다. 건강한 양들이여, 찾아가 이스라엘의 산에서 풀을 먹으십시오.
“시냇물이나 사람 사는 땅 어디서나 그들을 기를 것이다.” 사실 “그들의 소리 온 땅으로 퍼져 나갈 때”에 위에서 언급한 산들로부터 복음 전파의 시냇물이 흘러 나오고 사람 사는 땅 그 어디나 양들이 풀을 먹을 수 있는 즐겁고도 비옥한 땅이 되었습니다. “좋은 목장에서 기르며 이스라엘의 높은 산들은 그들의 안식처가 되리라.” 즉, 그들은 “참 좋구나.” 할 수 있고, “사실이다. 분명하다. 우리는 속지 않았다.” 할 수 있으며 편히 쉴 수 있는 그 곳에서 안식하게 되고, 흡사 자신의 안식처인 듯 하느님의 형광 속에 안식하게 될 것입니다. 거기에서 그들은 “잠을 잘 것이며” 곧 안식을 취할 것이며 “기쁨 중에 쉬게 될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산들에서 좋은 목장을 찾아 다니며 기르리라.” 그리로부터 우리에게 도움이 오도록 우리 눈을 드는 그 좋은 산들인 이스라엘의 산들에 대해 이미 말씀 드렸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도움은 “하늘과 땅을 지으신” 주님께로부터 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희망을 그 좋은 산에다 걸지 않도록 주님은 “이스라엘의 산들에서”라고 말씀하신 다음 여러분이 그 산에 남아 있지 않게끔 덧붙여 “내가 내 양들을 기르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여러분은 그리로부터 도움이 오는 그 산으로 눈을 드십시오. 그러나 “내가 내 양들을 기르리라.”고 하시는 그분의 말씀에도 유의해야 합니다. 도움은 하늘과 땅을 만드신 주님께로부터 오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이렇게 결론지으십니다. “그리고 나는 올바르게 그들을 기르리라.” 그분 홀로 올바르게 기르시기 때문에 그분만이 양을 제대로 기르실 줄 압니다. 자기 동료를 올바로 판단할 수 있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이 세상은 옳지 못한 판단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우리가 실망했던 사람이 갑자기 회개하여 아주 좋은 사람이 되는 일도 있고 우리가 잔뜩 희망을 걸었던 사람이 뜻밖에 타락하여 아주 나쁜 사람이 되는 일도 있습니다. 우리의 두려움도 확실치 않고 우리의 사랑도 확실치 않습니다.
각자는 자신이 현재 어떤 사람인지 자기 자신도 간신히 압니다. 그는 오늘 자기가 어떤 사람인지 어느 정도는 알고 있지만 내일 어떤 사람이 될지 자기 자신도 모릅니다. 그러므로 주님만이 올바르게 기르셔서 모든 이에게 각자의 조건에 따라 이런 사람에게는 이런 것을 저런 사람에게는 저런 것을, 각자가 응당히 받아야 할 이런 저런 것을 주십니다. 주님은 당신이 무엇을 하고 계시는지 잘 알고 계십니다. 인간으로부터 재판 받으심으로써 속량해 주신 이들을 올바르게 기르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 친히 올바르게 기르시는 것입니다.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오늘 미사의 말씀은 우리에게 매우 시의적절한 질문을 던집니다.
"요한이 ... 되살아났다. ... 엘리야가 나타났다. ... 옛 예언자 한 분이 다시 살아났다."(루카 9,7-8)
사람들이 예수님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예수님이 하시는 일이 많이 놀라웠던 겁니다. 헤로데도 몹시 당황했다고 복음사가가 전할 정도지요. 마귀를 쫓아내고 병자를 치유하고 기가 꺽인 이들을 위로하는 모습에서 이스라엘 백성은 역사 안에 등장했던 여러 하느님의 사람들을 떠올리는 것 같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말하듯 "태양 아래 새로운 것이란 없다"는 코헬렛의 지혜가 이스라엘 사람들의 뼛속 깊이 박혀 있을 테니까요. 그래서 사람들은 예수님을, 자기들을 이롭게 했던 예언자와 선지자들의 되풀이 또는 환생이나 부활이라고 추측하고 간주합니다. 예수님에 대한 너무도 당연한 '무지'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메시아의 도래를 간절히 고대했더라도 하느님께서 친히 오실 것이라고까지는 짐작 못했겠지요. 메시아를 어느 지역 출신, 어느 지파의 후손의 사람의 아들로만 여긴 듯 보입니다. 실제로 예수님도 이 예언은 존중해 세상에 오셨고요. 그래도 성부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의 존재는 이스라엘뿐 아니라 이 세상에도 "완전한 새로움"이었으니, 경험과 관습에 기대어 살아온 이들에게 당연히 미지의 존재셨습니다.
그렇다고 "태양 아래 새로운 것이란 없다"는 말씀이 틀렸다는 것은 아닙니다. 태양 아래 모든 피조물에게는 그렇게 적용됩니다. 하지만 성자 예수님은 이 모두를 넘어서는 새로운 태양이시고 새로운 하늘이시지요. 그래서 예수님의 존재는 완전한 새로움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을 두고 이래저래 억측하는 군중이나 헤로데의 무지는 죄가 되지 않습니다.
성경 인물들 중에서 부정적 평가를 받는 헤로데지만, 그의 말에서도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메시지가 포착됩니다.
"이 사람은 누구인가?"(루카 9,9)
헤로데가 묻습니다. 자기가 무고하게 죽인 요한까지 떠올리는 걸 보면 마음에 찔리는 구석이 있긴 한가 봅니다. 하지만 두려움에서건, 앎에 대한 순수한 열정에서건, 사랑에서건 이 질문은 인간 삶에 중요한 화두를 제시합니다.
새로운 사람이나 사건을 맞닥뜨릴 때, 경험이나 선지식이 새로움의 자기 계시를 가려버릴 수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일생을 거처 우리 안에 차곡차곡 쌓인 선입견과 편견이 새로운 만남을 방해하는 걸림돌이 되면 곤란하겠지요. 새로움을 마주하면, 있는 그 자체로 상대를 직관하며 "이 사람은 누구인가?" 하고 질문할 수 있는 새 마음이 필요합니다.
"만나 보려고 하였다."(루카 9,9)
질문은 갈망을 낳습니다. 보고 싶은 열망입니다. 내면에서 들썩이는 추측이나 지레짐작의 함정을 넘어서 진정한 앎의 관문을 통과하고 싶은 것입니다. 서로가 바람으로 이끌린 만남은, 정도의 차이가 있긴 하지만, 대부분 일치를 기대합니다. 절대자와의 만남이 그렇고 사랑하는 이들의 만남이 그렇습니다.
그러니 새로움이 다가올 때 두려워하지 맙시다. 주님은 늘 새로운 얼굴로 우리에게 다가오십니다. 선입견의 틀에 자신을 가두지도 맙시다. 과거에 묶이면 새로움이 가져온 은총을 놓칠 수도 있습니다. 그저 지금 새롭게 오신 이분이 누구이신지 직관하고 관상하며 방향을 돌려 만남에로 나아갑시다. 새로움은 "다시"나 "되풀이"의 향수에 젖은 상태에서는 알아보기 어려운 실재입니다.
사랑하는 벗님! 지금 우리는 코로나19 감염증으로 인해 예전에는 미처 경험해보지 못했던 극한 현실을 지나고 있습니다. 흔히들 코로나가 끝나면 코로나 이전으로 돌아가 예전의 익숙했던 행복을 되찾으리라 내심 기대를 합니다만, 우리가 질문하고 준비해야 할 것은 어쩌면 "새로움"일지도 모릅니다.
어느 신문 기사에서 마음을 때리는 구절을 만났습니다. "다시 시작할 것인지, 새롭게 시작할 것인지..." 이 질문은 사회 지도층이나 신학자, 교회 지도자들에게만 국한되지 않습니다. 우리는 각자의 실존과 삶의 자리에서 어떻게 새로운 사회, 새로운 교회, 새로운 질서를 맞이할 것인
지 진지하게 기도하고 관상해야 합니다.
"'이 사람은 누구인가?' ... 만나 보려고 하였다."
오늘 이 질문을 안고 그분께 달려갑시다. 그분께서 지혜와 사랑과 진리를 주실 것입니다. 말씀을 품고 함께 기도하며 함께 이 고통의 시간을 헤쳐 나아갑시다. 우리가 먼저 새로움을 맞이할 새로운 피조물이 됩시다.
충만한 삶 -허무와 무지에 대한 답은 하느님뿐이다-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오늘부터 토요일까지 제1독서는 코헬렛입니다. 읽을 때 마다 충격입니다. 공감하면서도 이건 아니다라는 생각입니다. 오늘 그 내용을 일부 인용해 봅니다.
-“2.허무로다, 허무! 코헬렛이 말한다. 허무로다, 허무! 모든 것이 허무로다!
3.태양아래에서 애쓰는 모든 노고가 사람에게 무슨 보람이 있으랴
4.한 세대가 가고 또 한 세대가 오지만 땅은 영원히 그대로다.
8.온갖 말로 애써 말하지만 아무도 다 말하지 못한다.
눈은 보아도 만족하지 못하고 귀는 들어도 가득 차지 못한다.
9.있던 것은 다시 있을 것이고 이루어진 것은 다시 이루어질 것이니
태양 아래 새로운 것이 없다.
11.아무도 옛날 일을 기억하지 않듯 장차 일어날 일도 마찬가지.
그 일도 기억하지 않으리니 그 후에 일어나는 일도 매한가지다.”-
아주 예전 피정지도시 묘비명을 써보라 했을 때 한 수도형제의 ‘허무로다, 허무! 모든 것이 허무로다!’라는 글을 읽고 충격받았던 기억이 떠오릅니다. 허무와 무지 역시 인간의 본질이란 생각이 듭니다. 하느님을 떠났을 때 귀착점은 허무와 무지입니다. 영혼의 고질적 질병같은 허무와 무지의 어둠입니다.
윗 내용을 보십시오, 온통 회색빛 우울한 분위기 아닙니까? 결국은 무지의 소치입니다. 지혜로운듯 하나 어릭석은 무지의 코헬렛입니다. 제가 볼 때 코헬렛은 하느님 체험이 참 희박해 보입니다. 철인이지 신자는 아닌듯 싶습니다. 도대체 새로움, 놀라움이 없습니다. 삶에 감동도 감격도 감탄도 없습니다. 회개도 겸손도 기도도 사랑도 찬미도 감사도 기쁨도 평화도 행복도 자유도 희망도 믿음도 성령도 위로도 격려도 치유도 구원도 분별도 없어 보입니다. 삶의 신비와 아름다움에 대한 찬탄도 없습니다. 빛이 아니라 온통 어둠으로 가득한, 흡사 태양이 진 저녁 어둠이 깔리기 시작한 그런 회색빛 분위기입니다.
보이는 현실뿐이요 현실 넘어 영원한 세상에 대한 초월적 비전도 꿈도 없습니다. 완전히 현실의 감옥에 갇힌 영적 수인같고 숙명의 노예같습니다. 병도 보통 병이 아닙니다. 너무 부정적이요 비관적입니다. 도대체 무슨 맛, 무슨 재미, 무슨 기쁨으로 살아갈 수 있을런지요? 하느님 없이 이 거칠고 험한 인생 광야 여정, 어떻게 살아낼 수 있을런지요? 우울증에 급기야는 자살에 이를 수 있겠습니다. 그래도 코헬렛이 성서에 편입될 수 있음은 큰 축복입니다. 역설적으로 하느님 체험의 중요성을 깨닫게 해주기 때문입니다.
제가 강론시 참 많이 썼던 제목이 ‘여정’이란 말마디입니다. 삶은 여정이요, 믿음의 여정, 순종의 여정, 회개의 여정, 순례의 여정등 예를 들자면 끝이 없습니다. 산티아고 순례 체험을 바탕으로 강조한 ‘1.목적지;하느님, 2.이정표, 3.도반, 4.기도’라는 인생 순례 여정의 네요소도 생각납니다.
결국은 하느님을 향한 여정인데 하느님이 빠졌으니 코헬렛의 허무한 인생에는 이런 ‘여정’을 적용할 수가 없습니다. 제가 어디에 가든지 먼저 확인하는 것이 바로 삶의 중심인 ‘예수님의 십자가’입니다. 그런데 코헬렛에는 하느님이 빠져 있기에 삶의 중심도, 삶의 의미도, 삶의 목표도, 삶의 방향도 없습니다. 말그대로 허무와 무지의 어둠 가득한 현장입니다.
어떻게 삶의 목표도 방향도 중심도 의미도 없는 이런 무지와 허무의 분위기속에서 무미건조의 반복의 날들을 살아갈 수 있겠는지요? 말그대로 지옥일 것입니다. 하느님 아닌 그 누구가 그 무엇이 이 자리에 올 수 있겠는지요?
오늘 복음의 헤로데가 우리에겐 반면교사가 됩니다. 헤로데처럼 저렇게 살아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삶의 중심이자 삶의 의미인 하느님이 빠진 허무한 삶, 헛된 삶의 전형이 헤로데입니다.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듣고 불안과 두려움에 전전긍긍하는 헤로데의 참 허약한 모습입니다.
“요한은 내가 목을 베었는데, 소문에 들리는 사람은 누구인가?” 그러면서 그는 예수님을 만나 보려고 합니다. 바로 내면의 불안을 반영합니다. 하느님이 그 삶의 중심으로 확고히 자리 잡았다면 세례자 요한을 죽이지도 않았을 것이며 이런 내적 불안이나 두려움도 없었을 것입니다. 하느님이 중심에 없기에 걷잡을 수 없이 흔들리며 갈팡질팡 갈피를 잡지 못하는 무지와 허무의 어리석은 사람이 바로 헤로데 임금입니다.
밤의 어둠을 몰아내는 떠오르는 태양입니다. 허무와 무지의 어둠에 대한 궁극의 답은 태양같으신 하느님뿐입니다. 하느님이, 파스카의 예수님이 삶의 중심에 자리잡을 때, 우리 삶의 더불어 여정에 목표이자 동반자가 되실 때, 허무한 삶은 충만한 삶으로 변합니다. 인생고해는 인생축제가 됩니다. 코헬렛의 허무에 대한 참으로 멋진 최고의 응답이 바로 이런 좋으신 주님을 모시는 거룩한 미사시간입니다.
“주님, 아침에 당신 자애로 저희를 채워 주소서. 저희는 날마다 기뻐하고 즐거워하리이다. 주 하느님의 어지심을 저희 위에 내리소서. 저희 손이 하는 일에 힘을 주소서.”(시편90,14.17). 아멘.
<만나고 싶다면>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누군가를
만나고 싶다면
바로 내가 바로 그를
만나야 해요
나의 욕망도
나의 의심도
나의 편견도
나의 이기심도
나의 호기심도
나의 질투심도
나의 그 무엇도 아닌
바로 내가 말이지요
그래야만
오직 그래야만
그를 만날 수 있으니까요
혹여
내가 아닌
나의 무엇이
만남의 욕구를
부질없이 자극한다면
나 아닌
나의 무엇들이
완전히 사그라들 때까지
그 만남 잠시 미뤄두어요
그래도 늦지 않아요
행여
기다리고 기다려도
나 아닌 것들이
만나라고 부추긴다면
차라리 만나지 말아요
어차피
있는 그대로의 나는
있는 그대로의 그를
만날 수 없으니까요
그런 만남은
아니 만남보다 못하니까요
누군가를
만나고 싶다면
바로 내가 바로 그를
만나는 거예요
자비하신 주님과 무자비한 헤로데< 루카 9/7-9>9/24
이석진 그레고리오 신부님
오늘 복음은 역사적 두인물인 예수 그리스도와 헤로대의 이야기입니다. 주님의 자비로은 일을 듣고 무자비한 헤로데는 요한이 목을 짜른 죄가 두려워 주님이 누구신지 알보고 만나랴는 이야기입니다. 나중에 주님의 고난과 십자가형에 대한 일련의 책임도 져야 하는 헤로데의 삶은 권력을 이용하여 무자비한 행위가 역사에 남게 되었습니다.
이같이 우리는 역사 안에 자비로운 사람으로 남는 사람과 무자비한 사람으로 남은 두 부류의 사람 중에 어떤 사람인지 들어나고 의인과 악인의 차이가 생기게 됩니다.
나는 자비로운 사람인가 아니면 무자비한 사람이가? 스스로 자신을 돌아보고 자신을 넓게 깊게 살펴 보아야합니다.
헤로데는 자기에게 해롭게 말하는 사람을 잡아 감옥에 가두고 끝네 목을 짜른 사람이며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만 끝에는 세상에 자비를 주시려 온신 주님을 십자가형으로 이끌어 갔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공장하고 의롭고 생명을 지니고 있지만 해로데의 말은 사치와 허세와 거짓말로 자신을 감싸고 이끌어 가기에 무자비함을 들어내었습니다.
우리 입에서 나오는 말은 진실과 사랑이 없으면 무자비한 사람이 됩니다.
그럼으로 나는 말에 있어 자비로운 말을 하는가 자신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부정 적 말, 흉보는 말, 냉냉 한 말, 단절을 선언하는 말, 허풍을 떠는 말, 경멸하는 말은 무자비한 사람의 말입니다.
또한 우리는 무자비한 행동은 힘으로 억누르고 악압하고 오그라든 손을 가진 사람처럼 나누지 않고 주먹을 쥐고 때리고 약한 사람의 것을 빼앗고, 도움을 청하는 사람의 손을 뿌리치고, 발은 가야할 곳을 가지 않고 빛이 없는 어둠을 찾아 가고, 자기는 배부르게 막으며 배곺은 사람을 주지 않고 음식을 마구 버리는 사람, 죽음의 위험에 빠진 사람 구하지 않고 무심하게 지나치는 사람입니다. 한번은 유티브에 개가 웅덩이 빠졌는 데 다른 개가 급히 달려가서 밧줄을 구해가지고 웅덩이에 빠진 개를 구하는 장면을 보면서 사ᄅᆞᆷ이 개보다도 못한 사람은 무자비한 사람입니다.
자살 하려는 사람보고 죽어라 버려두는 사람은 얼마전 서울 시자이었던 박 원순의 신비스로운 자살을 보고 살릴 수 있었는데 죽도록 버려두는 것처럼 느낌을 주는 뉴으스의 과장을 보면서 그것 아닌데 왜 죽음을 쫓아가고 막지 않은가? 생각하면서 과정을 보면서 무자비한 사람들 죄지으면 죽어야 하는 가 죽여야 하는 가 생각하면서 사형 재도를 허락하지 말아야 한다고 강하게 느낍니다.
말이나 행동은 생각에서 나웁니다. 우리는 생각을 정화할 필요가 있습니다. 미움, 복수심, 교만한 마음, 거친 생각, 시기 질투심, 보다 윗자리를 탐하는 마음, 남을 자기 밑에 두려는 우월감 선민이식 요사이 저는 세상이 어지러운 이유는 페권주의라 생각합니다. 다른 나라 위에 있어야 할 이유가 없고 서로 도우며 서로 부족한 것을 도우며 사는 세상을 만들어 나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속한 당이나 내가 있는 자리만 무사하기를 바라는 마음도 깨끗이 씻어내고 서로 좋은 자리를 만들러 나가는 자비로운 마음을 가지고 살 때 이 땅에 자유 평화 기쁨이 넘치는 세상이 될 것입니다. 미사 시작에 자비를 구하고 영성체 전에 자비를 구하는 우리의 믿음이 헛되지 않게 기도합니다.
죄의 본성
김효석 요셉 신부님
꼬마 때 동네 구멍가게에서 껌을 훔쳤던 적이 있습니다. 당시 왜 그렇게 그 껌을 씹어보고 싶었는지 잘 기억나지는 않지만, 도둑질을 할 만큼 저에게는 매력이 있었습니다. 저는 껌을 훔쳐 아무도 없는 산길로 뛰어올라가 한번에 껌 한 통을 모두 입 속에 넣어버렸습니다. 그날 저녁 저는 끙끙 앓기 시작했습니다. 아무도 모를 거라고 생각했지만, 심장이 두근거리고 손가락이 파르르 떨리는 것을 감출 수 없었습니다. 아버지는 제가 잘못을 저질렀다는 것을 금방 알아채셨습니다. 헤로데는 자신의 결혼을 반대하는 세례자 요한을 죽였던 사람입니다. 요한만 없다면 모든 일이 순조롭게 해결될 것이라는 얕은 생각에, 자신도 원하지 않는 일을 저질렀습니다. 다 해결되었다고 믿는 순간, 헤로데는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접하게 된 것입니다. 사람들은 죽었던 세례자 요한이 다시 살아났다고 말했습니다. 그 소문은 헤로데의 죄를 다시 끄집어내고 있었습니다. 헤로데는 자신의 죄가 다시 드러나는 것이 두려웠습니다. 그는 자신이 지은 죄를 감추기 위해 노력하지만, 오래지 않아 예수님마저도 자신을 위해 희생시키게 됩니다. 자신이 지은 죄를 숨기는 것은 자신과 다른 사람을 자유롭지 못하게 합니다. 예수님의 복음은 사람의 죄를 드러냅니다.
"요한은 내가 목을 베었는데, 소문에 들리는 이 사람은 누구인가?”
함승수 신부님
어린 아이들이 어른들과 다른 점들 중 하나는 ‘주눅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잘못하여 엄마에게 혼날 때에는 서러움에 북받쳐 눈물을 뚝뚝 흘리다가도 잠시 후면 그런 부정적 감정들이 어느 새 누그러져서 언제 그랬었냐는듯 엄마에게 쪼르르 달려와 안기기도 하고 쫑알쫑알 이야기를 하기도 하지요.
그런데 엄마의 입장에서는 아이의 그런 모습이 조금은 불편하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아까 아이에게 쏟아냈던 분노가 아직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는데, 더구나 사랑하는 아이를 울게 만들었다는 자책과 후회의 감정이 아직도 남아있는데, 아무렇지 않은듯 자신에게 다가오고 말을 거는 아이를 받아주기가 쉽지 않은 것입니다. 어른은 아이보다 ‘감정 정리’가 느리기 때문입니다. 또한 아이가 서로간의 잘잘못에 관한 것을 금방 잊어버리는데 비해, 어른은 그런 것들을 마음 속에 오래 담아두기 때문입니다.
어른과 아이 사이에 이런 차이가 발생하는 이유는 살면서 어떤 가치를 우선으로 여기는가 하는 관점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아이들은 잘못한 일은 고쳐나가면 되지만 한 번 잘못된 관계는 다시 예전으로 돌리기 어렵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죄책감이나 수치심 같은 감정들을 마음 속에 오래 담아두지 않고 먼저 다가갑니다. 그들에게는 사랑하는 사람과의 ‘관계’가 우선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어른들은 관계보다는 ‘잘못’을 우선으로 여깁니다. 나에게 잘못한 상대가 먼저 나에게 용서를 청하지 않으면 그와의 관계는 절대 회복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서로간의 잘잘못을 확실히 가리고, 책임소재를 분명히 따지고 난 뒤에야 비로소 잘못된 관계를 재확립 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잘잘못을 따지는 동안 소중한 사람과의 ‘관계’는 멀어지게 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헤로데는 사람들로부터 예수님에 관한 소식들을 전해 듣고는 이런 반응을 보입니다.
“요한은 내가 목을 베었는데, 소문에 들리는 이 사람은 누구인가?”
그가 자신의 체면과 비양심 때문에 세례자 요한을 죽인 것은 되돌릴 수 없는 분명한 ‘사실’이기에, 애초에 예수님은 요한과 동일인물일 수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굳이 예수님을 자신이 죽인 요한과의 관계성 안에서 바라본 것은 아직 마음 속에 죄책감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로 인해 자신에게 어떤 식으로든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모든 사람들을 ‘심판자’로 여기게 된 것입니다.
마음이 그런 상태이니 자신을 조금이라도 불편하게 만드는 사람들을 제대로 받아들일 수 있을리가 없습니다. 예수님은 언제든 헤로데의 잘못을 용서하시고 그에게 하느님과 함께 하는 새로운 삶을 열어주실 준비가 되어있었지만, 헤로데는 그런 예수님이 불편했던 것입니다. 그가 예수님을 만나보려고 했던 것은 예수님 앞에서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용서를 청하기 위해서가 아니었습니다. 그저 예수님이 자신에게 ‘위험요소’가 아닌지를 자기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을 뿐이지요.
헤로데는 그렇게 예수님과의 관계를 통해 구원받을 수 있는 기회를 놓치게 됩니다. 예수님과의 관계보다는 자신의 잘못에만 마음을 두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과 제대로 된 관계를 맺기 위해 위험과 불편, 손해를 무릅쓰려고 하기보다는 자신의 잘못을 감추고 그 잘못이 초래할 심판을 피하는 일에만 신경을 썼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나약한 존재이기에 누구나 잘못을 저지를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잘잘못을 따지는 일보다는 잘못을 저지른 이후의 대처를 현명하게 잘 하는게 중요합니다. 헤로데처럼 영적으로 주눅들어 주님과 온전히 대면하는 것을 두려워하고 피하다보면 그분의 자비를 입을 기회를 놓치게 될 것입니다. 어린 아이가 부모에게 그러듯이 주눅들지 말고 적극적으로 주님께 다가가는 자세가 중요합니다. 주님은 우리의 옳고 그름을 따지고 잘잘못을 가리는 것보다, 우리와 ‘사랑의 관계’를 회복하는 것을 더 바라고 좋아하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이우진 신부님
찬미예수님. “허무로다, 허무! 모든 것이 허무로다!” 오늘 코헬렛의 구절이지요.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는 기도서의 쪽지를 끼워두고 항상 보았다고 하는데, 그 글귀는 다음과 같습니다.
“어떤 것도 당신을 놀라게 하거나 불안하게 할 수 없습니다. 모든 것은 사라지지만 하느님은 영원합니다. 인내는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합니다. 하느님을 소유한 사람은 아무것도 부족하지 않습니다. 저는 하느님만으로 충분합니다.”
인간은 밥을 먹어야 하고, 자동차는 기름을 넣어야 합니다. 하지만 뭐든 간에 단 한번으로 끝나는 것은 없습니다. 지속적으로 먹어야 하고, 넣어주어야 합니다. 인간의 삶 안에서 이는 하나의 허무가 될 수도 있습니다. 나름의 경지에 이르고, 나름의 업적을 쌓고 더는 없기에 허무합니다. 마치 무엇인가 있는 듯, 사막에서 신기루를 쳐다보며 걷듯 손을 뻗고 살아가지만, 결국 남는 것은 허무입니다. 그리고 이는 영성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내 안에 비는 듯한 공허함을 그 무엇으로 채울려고 해도 결국 마찬가지입니다. 인간적인 즐거움, 쾌락, 만족, 소유 등으로 채워보지만 결국 남는 것은 허무입니다. 오늘 코헬렛은 마치 우리네 인간의 이러한 삶을 말해주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여기 답이 있습니다. 요한복음에서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사람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내가 주는 물은 그 사람 안에서 물이 솟는 샘이 되어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할 것이다.”
그리고 오늘 복음환호송은 말합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답은 주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제가 처음 말씀드린 데레사 성녀의 말입니다. 성녀의 기도 다시 묵상하며 글을 마칩니다.
“어떤 것도 당신을 놀라게 하거나 불안하게 할 수 없습니다. 모든 것은 사라지지만 하느님은 영원합니다. 인내는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합니다. 하느님을 소유한 사람은 아무것도 부족하지 않습니다. 저는 하느님만으로 충분합니다.”
아멘.
행복한 날엔 행복을 만끽하십시오! 불행한 날엔 인내롭게 하느님의 때를 기다리십시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마치 흥미진진한 한편의 드라마같은 우리네 인생입니다. 때로 어디로 튈지 모르는 럭비공 같기도 합니다. 어떤 때 갑작스레 다가온, 도무지 이해할수 없는 충격적인 사건 앞에 할말을 잊기도 합니다. 그럴 때 꼭 읽어봐야 할 책이 코헬렛입니다.
코헬렛의 저자는 멋진 인생의 명언 제조기였던 솔로몬 으로 추정되기도 하고, 혹은 구약시대 위대한 현자의 한명으로 추정됩니다. 코헬렛에는 이 세상을 바라보는 유다인들의 정신세계, 사고방식이 잘 표현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코헬렛을 읽고 묵상하실 때 반드시 유념하실 사항이 한가지 있습니다. 코헬렛 문체의 분위기는 다분히 회색빛입니다. 꽤나 비관적이고 염세주의적입니다.
오늘 첫번째 독서에만 해도 '허무'라는 말로 시작합니다. 허무라는단어는 구약성경 전체를 통틀어 총 73회 등장하는데 코헬렛 안에만 38번이 사용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게 전부는 아닙니다. 물론 코헬렛 전체가 인생의 허무, 인간사의 무상함, 세상의 덧없음을 강조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코헬렛 저자는 비관주의자나 염세주의자가 절대 아닙니다. 오히려 그는 낙천주의자였으며, 인생의 산전수전을 다 겪으며 살아온 나이 지긋한 현자였습니다.
코헬렛이 반복해서 허무를 외치는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스스로가 자신의 삶의 주인공이 아니라 노예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바로 그 사람들 들으라고 코헬렛은 외치는 것입니다.
하루 온종일 하늘 한번 올려다보는 일이 없습니다. 마치 한 마리 부지런한 일개미처럼 왔다갔다 갔다왔다 정신없이 움직입니다. 머럿속은 온통 눈앞의 것들로 가득차 있습니다.
너무나 작은 것에 혈안이 되어있고, 그 작은 것 하나 놓치지 않으려고 발버둥을 칩니다. 모아놓은 재산, 높게 쌓아올린 탑 하나 있다고 기고만장함이 하늘을 찌릅니다. 하느님 경외할줄 모르고 이웃을 돌아볼 줄도 모릅니다. 코헤렛은 바로 이런 사람들을 향해 외치고 있는 것입니다.
"허무로다, 허무! 모든 것이 허무로다!"(코헬렛 1장 2절)
코헬렛 안에서 반복되는 가르침의 핵심은 단순합니다. 인생 별것 아니라는 것입니다. 특히 영원하신 하느님 앞에 우리 인간은 기껏해야 한줌 재이고, 한줄기 가느다란 연기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보잘 것 없어 보이는 우리네 인생 안에도 하느님께서 굳게 현존하시며, 그분께서 우리네 인생길에 함께 하심을 강조합니다. 그러니 너무 걱정하지도 말고, 너무 기대도 하지 말고, 매 순간을 즐기랍니다. 제한된 조건 고통스런 현실 한 가운데서도 소소한 삶의 행복을 찾고 만끽하랍니다.
비관적이고 회의적인 색체에도 불구하고 코헬렛의 저자는 생을 찬미합니다. 부정을 인정하고 난 뒤에 얻게 되는 긍정인 셈입니다. 언제나 결핍 투성이며 부조리한 이 세상이지만 그래도 세상은 살만하다고 외칩니다.
하느님께서 빛도 창조하셨지만 그림자 역시 동시에 창조하셨을을 강조합니다. 그러니 행복한 날엔 행복을 만끽할 것을, 불행한 날엔 하느님의 때를 기다리며 기꺼이 견딜 것을 당부합니다. 이것이 코헬렛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입니다.
심홍보 베드로 신부님
신자들의 마음을 잘 헤아리고 신자들이 바라는 것을 들어주고 거기에 맞춰 줄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하지만 사람들의 마음을 일일이 다 헤아리지 못하고, 온전히 채워주지 못하는 저 자신을 바라보며 송구스럽고 안타까운 마음이 듭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사람들이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자신들 나름대로 마음 속에 그리던 대상들을 연상하고 바라는 모습을 엿보게 됩니다. 헤로데 영주가 예수님의 소식을 듣고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여론조사를 하는 과정에서, 당대 유다인들이 “요한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났다.”(루카 9,7) 하고, 더러는 “엘리야가 나타났다.”(8절) 하는가 하면, 또 어떤 이들은 “옛 예언자 한 분이 다시 살아났다.”(8절) 라고 했다고 전합니다.
당대 유다인들이 예수님을 이분들과 연관하여 바라보는 이유는 이분들이 의인들이고, 다시 오셔서 자신들을 구원해 주실 것이라고 기대했기 때문입니다. 물론 예수님은 당대 유다인들이 메시아에게 기대하던 바로 그대로 유다인들에게 나타나지도 그들이 바라는 대로 행동하시거나 그들이 바라는 것을 채워주시지 않았기 때문에 결국 그들의 손에 죽임을 당하였습니다.
그런 면에서 우리는 오늘 우리가 주 에수님께 바라는 청원들이 혹시 주 예수님께서 세상을 구하시는 데 방해나 걸림돌이 되는 것은 아닌지 되돌아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미신 같고 이기적인 것만 같은 사람들의 원의를 다 들어줄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그 원의들을 잘 알고 있기는 해야 유혹에 빠지거나 혼란 속에 헤매지 않고 주님 구원의 길을 묵묵히 걸어갈 수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사람들의 원의와 주님 구원사업의 토착화된 새로운 사목적 대응으로 오늘 이 시대에 하늘 나라를 만들어 나가도록 합시다.
"소문에 들리는 이 사람은 누구인가?"(루카 9, 9)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올바르지
않는 것을
멈출 수 있는
지혜가 참된
지혜이다.
헛소리와
침묵사이에
우리가 있다.
그림자와
실체사이에
우리가
살아간다.
듣지 말아야
할 것과
보지 말아야
할 것이 너무나
많은 우리들
세상이다.
그야말로
절제가 필요한
세상이다.
절제란
떠도는 소문을
서로에게
옮기지 않는
언어의
침묵이다.
올바르지 않는
소문은 소중한
한 사람을
죽음에까지
이르게한다.
헐뜯는 험담을
이제는
멈추어야 한다.
인색한 마음
안에서는
소문만
무성할뿐이다.
소문이 아닌
참된 만남이다.
소문의
그 사람이 아닌
진짜 그 사람을
만나는 것이다.
소문과 오해는
참된 만남을
언제나
방해한다.
빠르게 판단하고
서둘러 단정하는
우리들이다.
사랑에는 언제나
성찰이 필요하다.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
무책임한
소문을 성찰하는
시간이 되어야한다.
말(言)의 순교가
필요한 때이다.
순교는
절제이다.
순교의 길은
하느님을
드러내는
절제이다.
절제는 소문의
자리가 아닌
하느님께 자리를
내어드리는
겸손이다.
교만과
소문사이에
우리가 있고
그 교만을
치유하는
절제와 반성이다.
소문의
예수님이 아닌
참된 예수님을
우리 내면에서
만난다.
소문이 아닌
소중한
한 사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