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 아름다운 세계 배낭여행 원문보기 글쓴이: 바이칼3
중국 19 - 중국 대륙을 통일한 수나라가 고구려를 4차례 침공하다!
한인(漢人) 한족(漢族) 한자(漢字) 및 한문(漢文)의 유래가 되는 한나라(後漢, 東漢) 말기인 184년 황건적
의 난이 일어나 중국이 내란으로 빠져들었고 오호십육국 시대에 이르러 북조를 통일한 선비족
탁발씨의 북위는 이후 동위와 서위로 다시 북제와 북주로 갈라졌다가 북주가 북제를 멸했는데 외척
양견은 외손주에게서 선양을 받은후 589년에 남조 진(陳)나라를 멸하고는 405년만에 중국을 통일합니다.
1. 대륙을 통일한 수나라 문제
양견은 581년에 외손주인 북주(北周) 의 황제 정제에게서 선양(?)을 받은 뒤에 수나라를 건국하니
바로 수(隋) 문제인데, 즉위한지 8년째인 588년 10월에 차남 양광을 총사령관에 임명해 한금호
(韓擒虎), 하약필(賀若弼) 등 장수들에게 52만 대군을 맡겨 남조의 진(陳)을 공격해 건강(建康)
을 함락하고 진숙보(陳叔寶) 를 사로잡아 400년간 이어진 혼란과 분열을 끝내고 중국을 통일합니다.
양광이 총사령관이기는 하지만 전쟁을 이기게한 숨은 공신은 따로 있으니 수문제가 북주의 황제
를 죽이고 수나라를 세우자 일어난 업성 위지형의 반란을 꾀로서 진압한 사람은 고경(高熲)
이니 그는 문제에게 남쪽 진(陳) 나라를 도모할 방책을 아뢰니...... 진의 수확기에 군대를
징발해 진을 습격할 것이라는 소문을 퍼뜨리면 적은 병력을 징발하느라 수확기를 놓칠 것입니다.
진(陳)의 대병력이 모이면 우린 철수하는 것이니 이렇게 몇차례를 반복하면 으례 그러려니
하면서 익숙해질 때 우리는 진짜로 병력을 집중하여 진에 대한 토벌에 나섭니다!
또 강남의 땅은 얕은 편이라 갈대나 대나무로 창고를 만들어 식량을 저장하니 몰래
간첩을 진(陳) 나라로 잠입시켜 바람 부는 것을 살펴 저장물에 불을 지르기를 반복합니다.
589년에 북방의 강자로 중국을 괴롭히던 돌궐의 위협을 마침내 제거한 양견은 진나라
정벌을 결심하고 군대를 여뎗 갈래로 나누어 장강 하류와 중류에서 동시에 출격하니
왕자 양광은 이름뿐으로 삼군의 자문과 보고는 행군원수장사 고경 에게 집중되었습니다.
진(陳) 나라를 평정한후 양광은 진나라 후주가 아끼던 여인 "장여화"를 자신의 비로 삼으
려다가 고경의 반대에 부딪쳤으니 "그 옛날 주 무왕은 상을 멸망시킨 뒤 달기 를 바로
죽였습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가 힘들게 진을 평정했는데, 장여화 를 비로 삼으시려는
것은 말도 안 됩니다." 이 일로 앙심을 품은 양제는 훗날 기어이 고경을 죽이게 됩니다.
양견의 조상은 북위 초기 무천진(武川鎭)으로 이주하였고 양견은 호한융합시대에 태어났으며 원
이름은 보육여견(普六茹堅) 이니 북주 황제 우문태한테서 하사받은 것으로 선비어로 버들이란
뜻이라는데... 선비족인지 한족(漢族)인지 불분명한데 황제에 오른후 족보가 주(周)나라 시대까지
이어진 한족 명문가 홍농 양씨를 자처했으며... 후한의 태위 양진의 직계 후손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고려태조 왕건이 백제말 대신인 성충과 흥수에 계백 또 후삼국시대 궁예나 견훤처럼 성이 없이 이름뿐인
평민이니, 고려 왕실 족보인 성원록에는 증조부와 조부의 이름 조차 모르니 기술하지 못하다가.... 훗날
1140년 18대왕 의종때 김관의가 기록한 고려편년통록(高麗編年通載)에 증조모 정화왕후 강씨(康氏)는
강충(康忠)의 증손녀고 조부는 작제건으로 당나라 선종이 왕자일때 신라에 유람해 강씨의 딸과 동침해
낳았으니 왕건은 중국 황실의 외손이라고 미화한 것처럼 양견의 한족 조상설도 꾸며낸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수나라 황실은 혈통과 관계없이 언어나 관습, 문화를 한족(한족) 의 것을 따랐기
때문에 수나라를 선비족 정복 왕조로 보기 보다는 중국 한족의 왕조로 보는게 타당
하니 황실에서 한족(漢族)과 다른 기마민족의 언어, 관습, 문화를 가지고 이를 한족
에게 강요하기도 한 몽고족 원나라와 만주족(여진족) 청나라 와는 성격이 전혀 다릅니다.
수문제는 581년 수나라를 개국한후 서방진출을 위해 낙양 대신 장안을 도읍으로 정했으며
장성을 복구해 돌궐에 대한 방어력을 강화하고 운하를 파서 회수와 장강을 이었으며
후량을 병합하여 전초기지로 삼고는 장강 상류의 촉(쓰촨성)에서 대규모 함대를 장강을
따라 내려보낼 수 있었으니.... 남조의 진(陳) 은 오나라 처럼 양면 전선을 맞이했으니
형주 방어선과 사천(백제성) 방어선에 회남과 양자강 합비마저 뺏긴지라 쉽게 무느집니다.
기나긴 400년간의 분열시대가 종결되고 통일이 되어 사회가 안정되자 수나라 인구는 증가했으니
문제는 명군으로 귀족들의 강력한 반발에도 불구하고 각자의 토지를 지닌 소규모 자작농을
대규모로 늘리고 '삼장제' 와 '균전제' 를 확립시키는 업적을 세웠으니, 수문제가 확립한 이런
토지 정책은 중국 마지막 왕조 청나라 시기까지 이어진 통일왕조들의 토지 정책의 뼈대가 됩니다.
조세를 낮추고 하사물을 성대히 내렸음에도 국고가 모두 차 넣어둘 곳이 없어 곁채에 쌓았을 정도
였다고 하며, 수문제가 선양을 받던때 민호는 400만호에 미달했지만 재위 말년에는 900만호
(4,600만명) 로 늘어나는 업적을 이루었으며..... 이후 수나라의 붕괴 과정에서 누락된 수많은
인구들은 측천무후-당현종 시절의 전성기가 되어서야 906만호(5,288만명) 로 겨우 복구가 됩니다.
인구뿐만 아니라 경제력 또한 막강해져서 훗날 당나라는 수 문제 시기의 경제력을 '비단과 금을 분토 처럼
여긴' 당 현종 천보 초엽이 되어야 겨우 따라잡는데, 이때 쌓인 국부가 상상을 초월해 그 이전 왕조들은
꿈도 꾸지 못했던 황하-장강을 연결시키는 대운하 건설을 처음으로 시도했던 것이 수 문제 양견이었는
데 다만 대운하 건설로 백성들이 고통받는다고 하자 중단했으니 대운하는 아들 수 양제 양광이 완공합니다.
수문제는 사치를 줄이고 검소한 생활을 하면서 세금을 줄여주었고 가뭄이 심한 해에는 아예
세금을 징수하지 않았으며..... 지방에까지 관리를 파견하고 500가를 향(鄕) 으로,
100가를 리(里)로 조직하여 통치 체계를 끌어올렸으며 관료들에게도 따로 경비를
마련해 주어 관료와 귀족이 함부로 백성들에게 폐를 끼치지 못하도록 한 훌륭한 군주입니다.
황권 강화를 위해 임용제도를 개혁하여 당시 무력화된 구품중정제를 폐지하고 연고지 복무
를 금지했으며.... 과거제도의 전신인 선거제를 도입했는데 강력한 귀족 세력을 완전히
없애지는 못했으나 이후 당대까지 관롱 귀족의 견제 세력인 과거 출신자들을 기용할
수 있는 기틀을 마련했으며 사유화 되어가던 관직의 공공성을 고취했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수문제는 스스로 조악한 옷을 입고 검소한 식단을 유지하며 모든 일을 하층민의 삶에 따라 시도
하려한 유사이래 보기드문 명군이라 할수 있었고, 이에 '한이 고조가 통일하고 문경지치를 거쳐
한무제 시절에야 이룩한 번영을 양견은 그가 통일하고 그가 이루어냈다.' 라는 찬사를 받았으니
그가 이룩한 정치 제도들은 당나라 율령제의 기초가 되어 중국 통일 왕조 체제의 뼈대가 됩니다.
2. 수나라와 고구려 전쟁
수문제가 남조 진(陳)을 멸망시키고 천하를 통일한 당시 돌궐은 머리를 조아리고 복종하였는데 양제가
북방을 순시하다가 돌궐의 장막에 이르러 우연히 고구려 사신이 계민의 처소에 있는 것을 보았는데,
배구는 천하의 대세가 이미 정해졌으니 고구려에서도 조공을 바치게 하여 천하를 얻었다는 것을
드러내 보이고 싶어 하였으니 결국에는 전쟁으로 치닫게 됩니다. 명나라때 백과사전인 (도서편 圖書篇)
고구려 제26대 영양왕 때 수(隋)나라 문제 및 양제와의 2대에 걸친 긴 전쟁은 598년, 612년, 613년,
614년 등 4차례에 걸쳐 일어났는데 특히 수양제의 제2차 원정은 양국 모두 국가의 모든 물자와
인력을 총동원한 총력전의 양상을 띤 전쟁이었으며 을지문덕의 살수대첩이 일어났던 전쟁 입니다.
'전(前) 근대 역사상 가장 큰 단일 전쟁' 이니... 세계사를 통틀어도 이 만큼 대규모 병력이 동원된
전쟁은 극히 드물며 이때 세운 세계 최대 동원병력 기록인 113만명의 기록이 사실이라고 가정
한다면 그 다음 기록은 1,300년이나 지난 1914년의 제1차 세계 대전에서야 깨지게 되는 것입니다.
중국 왕조의 기록에는 대대손손 반면교사로 등장하는 큰 교훈을 준 전쟁이며... 외부의
시선에서 보더라도 중국 통일 왕조가 얼마나 엄청난 힘을 행사할 수 있는지와
함께 그 엄청난 힘이 얼마나 허무하게 무너질 수 있는지 등 많은 시사점이 존재합니다.
3. 수나라와 고구려의 전쟁 전야
수문제(隋文帝) 양견(楊堅)은 589년, 남조시대 마지막 왕조인 진(陳)나라를 멸망시켜 남북조시대의
혼란을 제압하고 중국을 통일하는 대업을 완수하였으니 검소하고도 어진 내치를 통하여 나라를
안정시킨(개황성세) 문제는 장성 이북에 있던 돌궐과 고구려를 장차 중국을 위협할 위험한
세력으로 간주하여 이들을 주시하고 경계를 늦추지 않았는데 604년에 죽고 양제가 뒤를 잇습니다.
605년 수양제는 신하들에게서 임읍에 진귀한 보물 이 매우 많다는 이야기를 듣는데....
당시 수나라는 베트남 북부인 교주를 평정하고 군사를 주둔시키고 있었는지라
수양제는 베트남 북부 교주에 주둔하고 있던 유방에게 명해 베트남 중부 지방인
임읍을 치게 했는데 임읍의 군주 판지가 요새를 지켰으나 이내 유방에게 격파당합니다.
수나라 군사들이 대거 사리강을 건너자 임읍(林邑) 병사들이 커다란 코끼리를 타고
사상에서 포위공격을 가해왔는데... 옛날 에페이로스 피로스왕의 군대가 동원한
코끼리에 혼겁한 로마군 처럼, 수나라 군사들은 물론이고 중원에서 끌고 온 말들
역시 커다란 상아를 가진 코끼리 를 처음 본 까닭에 혼비백산해 황급히 물러납니다.
유방이 꾀를 내어 땅 위에 함정을 판 뒤 풀로 덮게 한후 군사들이 재차 도전한 뒤
짐짓도주하자 임읍의 병사들이 코끼리를 타고 뒤를 급히 쫓다가 함정에 빠져
난전이 벌어졌으니, 이때 유방이 명을 내려 코끼리를 향해 화살을 난사하자
아픔을 참지 못한 코끼리들이...... 괴성을 지르며 임읍의 군진을 향해 내달립니다.
이 틈을 이용해 수나라 정예병들이 임읍 병사 1만명의 목을 벤뒤 추격전을 전개해 후한의 마원이 교지의
반란을 평정한후 기념물로 세운 동주(銅柱)를 손에 넣은뒤 임읍의 수도를 점령했으나... 수나라 군사는
풍토병에 걸려 철군 도중 절반 이상이 목숨을 잃었고 유방도 병사했는데, 임읍왕 판지는 수나라 군사가
철군하자 사자를 보내 칭신하며 투항을 선언했지만 이제 고구려 침공은 그 보다 더한 실패가 기다립니다.
607년 8월 북방 초원에 가을이 왔을 때, 양제는 많은 선물을 가지고 돌궐 계민 칸(可汗) 의
천막 궁정으로 찾아갔으니 답방이었는데.... 그해 초 유림(楡林) 에서 변경 전략가
배구(背矩)가 포섭한 동돌궐의 계민 칸으로 부터 양제가 충성의 서약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첫 만남에서 계민칸을 애타게 기다리던 이야기는 양제의 시 <음마장성굴행>(飮馬長城窟行)에도 나오니
"장성 병사에게 물으니 계민칸이 들어왔다 한다. 탁한 기운은 천산에 가라앉고 새벽의 빛은 오르도스
를 비춘다." 계민 칸을 곧 만날 수 있다는 소식은 양제에게는 탁한 공기가 금방 맑아진 것만 같고, 새벽
빛이 땅을 비추는 것처럼 기쁜 일이었으니 양제로서는 북변이 안정되니 이제야 안심할수 있게된 것입니다.
그런데 저 비단등 엄청난 선물 때문에 유능한 장수가 죽게되니 수나라 재상 고경(高熲)으로 민폐를
염려해 과하다고 말했다가 수양제에게 죽임을 당하는데.... 588년 진왕 양광이 진(陳)나라를 치러
출병하자 고경은 원수장사로 출병해 진을 무너뜨리고 천하통일을 달성했는데, 이때 양광은 진
후주 진숙보의 비 장려화를 탐내자 고경은 바로 목을 베었으니 이 일로 앙심을 품고 있었던 것입니다.
599년에 수 문제 양견이 후궁 문제로 황후 독고씨와 크게 다투다가 궁을 나가버리자 고경은 같이 출궁
하여 양견을 설득해 그 다음날 다시 궁으로 돌아오게 하였으며, 600년에 황태자 양용이 폐위당하자
고경은 반대를 했는데 이유가 장자를 폐하고 차자를 세우면 나라에 큰 혼란이 올거라 했기 때문입니다.
이 일로 고경은 양광을 편애하던 독고황후에게 미움을 받았으며 또한 양견이 출궁했을 때,
독고황후를 '속 좁은 아녀자' 라고 운운했던 일 때문에 모든 관직을 박탈당하고 쫓겨
났었는데... 607년 양광이 황제에 오른후, 미운털이 박힌 고경(高熲) 이 돌궐에 선물이
과하다 충언까지 했으니 공신 하약필과 함께 조정을 능멸했다는 이유로 처형당한 것입니다.
589년에 양광의 욕심을 제어하고 장려화의 목을 벤 고경은 진(陳)나라를 멸한 1등
공신으로 상주국이란 칭호를 더해 제국공이란 작위를 받았는데 장려화(張麗華)
는 진후주 (陳後主) 숙보(叔寶) 의 비(妃) 로 머리카락이 아름다워 길이가 7척에
달했으며 화사한 자태에 총명하고 행동까지 조용하며 투기를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중국 호남성 텔레비전에서 2011년에 만든 수나라와 당나라를 다룬 시청율 1위 드라마 "수당영웅"
(隋唐英雄) 에 장려화 역은 "장서희" 가 맡았는데.... 그런데 한가지 부끄러운건 난 저 장서희가
중국 드라마 여주인공이니 당연히 중국인인줄 알았는데 뽀미 언니 역도 맡은 "한국 여배우" 라니???
그러니까 현재도 주인공 張瑞希 (장서희) 라고만 적어 놓으면 이름만 보고는 저 인물이
중국인인지 아님 한국인인지 알수가 없는 것이라.... 주몽, 온조, 비류, 계백, 성충,
흥수, 윤충, 이사부, 거칠부, 우륵, 견훤, 궁예, 왕건등 우리 한국인은 고대에 이름만
써왔는데 훗날 한자와 함께 중국의 성씨제도 를 도입했으니 똑 같을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양제가 계민칸 궁정에 도착했을때 분위기는 험악했으니 고구려 사신이 먼저 도착해 있었기
때문인데, 예전부터 북방 초원에까지 촉수를 뻗치고 있는 고구려는 양제에게 치욕감을 주는
존재였으니 수 제국을 능멸하고도 무사한 나라는 고구려밖에 없었는데 이 고구려 사신은
평양성에서 1,500km나 떨어진 곳에 자신보다 먼저 와서 계민 칸과 사사로이 통하려고 한 것입니다.
또한 과거 돌궐은 수 왕조의 목을 쥐고 있던 무서운 존재였으니 수나라의 모체였던 북주(北周)가
북제(北齊)를 통합하기 이전부터 그러했는데.... 초원을 통일한 돌궐은 북주의 북제 공격을
지원하기도 했으니 돌궐 목간 칸 치세에 북주는 매년 10만필의 비단을 상납했고 북제
역시 그러했으니 양국은 돌궐이 상대 국가를 지원할까 항상 두려워했고 돌궐의 칸은 두
나라로 부터 갈취한 비단을 사산조 페르시아와 동로마 제국에 판매해 막대한 이익을 얻었습니다.
양제가 초원에 행차한 시기는 계민칸이 수나라의 원조를 받아 그의 동족들을 제압하고 초원을 장악한
때였는데.... 수나라가 힘들게 복속시킨 칸에게 고구려 사신이 찾아와 이간질하는 현장을 목격한 것
이니 수나라의 배구는 양제의 말을 고구려측에 전합니다. "돌아가거든 너희 고구려 왕에게 직접 수
조정에 와서 신하의 예의를 표하라 전하라. 그렇지 않으면, 돌궐 기병을 동원해 고구려를 정벌하겠다."
2년후 609년 계민칸이 죽고 아들 시필칸이 즉위했는데 수나라의 침공이 확실해진 시기에 고구려에 기회가
왔으니 아들은 아버지 보다 수나라 황제에 대한 충성심이 약했기에 고구려는 시필 칸에게 사절을 보냈고
, 과거 수나라가 자행한 돌궐 분열정책에 대해 상기시켰으며 고구려 사신은 수나라가 시필 칸의 동생을
다른 칸으로 세워 경쟁시키려 한다는 것이었으니 적의를 갖게 된 시필칸은 수나라와의 관계를 중지합니다.
수 양제는 빠르고 기동성이 뛰어나며 보급을 자급자족하는 동돌궐의 유목민 기병을 고구려
침공에 동원하려고 했으나, 이는 고구려의 공작으로 무산되었으니 고구려에 대한
징벌은 오직 수나라 혼자만이 걸머지는 운명이 되어갔으며, 이는 심각한 결과를 낳게 됩니다.
수나라가 중국대륙 통일로 모은 내부의 엄청한 힘을 외부로 돌리기 시작한다면 당장 피해를 보는 것은
고구려였으니 고구려는 25대 평원왕(平原王) 시절인 581년 부터 수나라에 계속해서 조공을 바치고
있었으니... 584년까지 3~4년 동안 7차에 걸친 조공을 바치는 데, 589년에 마침내 남조의 진이
수나라에 멸망하여 기어코 수문제가 중국 통일의 대업을 완수했다는 소식이 고구려에 전해 집니다.
“三十二年王聞 陳 亡大懼理兵積穀爲拒守之䇿 32년(590년)에 왕(평원)이 진(陳)
이 망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크게 두려워하여 병기를 수선하고 곡식을 축적
하는 것으로 막고 지켜낼 방책을 삼았다. 《삼국사기》권제19 <고구려본기> 제7”
평원왕은 수나라에 지속적으로 사람을 보내 수나라 무기 장인들을 빼내오기도 하며 전쟁 준비에 박차를
가하는데 수서 隋書) 기록을 보면, 수문제 초기에 고구려 사신들이 자주 왔는데 수나라가 진(陳)나라
를 평정한 후에는 고구려가 크게 두려워하며 곡식을 저축하고 방어할 계획을 하고 있었다는 기사
가 보이니 이 점이 당시 수 문제에게 꽤나 거슬리게 보였는지 새서(璽書)를 보내 평원왕을 질책합니다.
수 고조(高祖)가 질책하기를“비록 번부(藩附)라고는 하나 정성과 예절을 다하지 않는다, 그대의 지방이
땅이 좁고 사람이 적다 할지라도 지금 왕을 쫓아낸다면 비워둘 수 없으므로 마침내 관청의 아전과
하인을 다시 선발하여 그곳에 가서 다스리게 해야 할 것이다. 왕이 만약 마음을 새롭게 하고 행실
을 고쳐 법을 따른다면 곧 짐의 좋은 신하이니, 어찌 수고롭게 별도로 재주있는 사람을 보내겠는가?"
"왕이 요수(遼水) 넓이를 말하나 장강(長江)만 하겠으며 고구려 인구의 많고 적음이 진(陳)만 하겠는가?
짐이 만일 포용하고 기르려함이 없고, 이전 잘못을 질책하려고만 한다면 장군에게 명할 것이지 어찌
많은 힘을 필요로 하겠는가? 은근히 타이르고 왕이 스스로 새로워지도록 할 뿐이다. 왕이 글을 받고
황공해서 표(表)를 올려 사과하려고 하였으나 이루지 못하였다. 《삼국사기》권제19 <고구려본기> 제7“
또《수서》에 기록된 수문제가 고구려에 보낸 글을 보면 평원왕이 사람을 은밀히 보내 수나라 무기 장인
들을 빼돌렸다는 사실이 등장하니 이를 통해 평원왕이 단순히 두려워한 것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수
와의 일전을 대비하고 있음이 드러나는데, 제16대 고국원왕 이후 삼국사기의 기록은 우리측 사료가
거의 없으니 중국측 기록을 그대로 베껴 온 모양새라 평원왕의 약해 보이는 모습도 그대로 옮겨졌습니다.
“태부(太府)의 공인(工人)은 그 수가 적지 않으니 왕이 반드시 그를 필요로 한다면 스스로 (나에게)
주문(奏聞) 하면 될 것인데, 몇해 전에는 몰래 와서 재화로써 이익으로 소인(小人)을 움직여
사사로이 궁수(弩手)를 데리고 그대의 나라로 달아났소. 병기를 수리하는 의도가 착하지
못하므로 바깥 소문을 두려워해 도둑질한 것이 아니겠소?”《수서》 권81, 열전46 <동이열전> -고려-
당시 고구려는 제23대 안원왕(安原王) 이래로 점점 쇠퇴하던 중이었으니 일본서기 기록에 내전과 반란도
여러번 있었고, 제24대 양원왕은 급부상한 신라에게 한반도 중부 영토를 거의 다 빼앗겼고 심지어
북제 쪽 기록에서는 양원왕이 북제 사신에게 얻어맞았다고 언급하고 있는데... 사실인지는 알수 없으나
그런 말이 나돈다는 자체가 어느 정도 고구려의 위상이나 파워가 예전만 못하다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과거 5세기에 광개토대왕이나 장수왕이면 그런 이야기는 절대로 나오지도 못했을 테니.... 이러한
때 평원왕은 고구려 국왕으로 즉위해 스스로 검소한 모습을 보였고 농사와 누에치기를 권장
하며 굶주린 백성을 구제하고, 무리한 궁궐 수리를 중단하기도 했는데..... 이렇게 대립의
불씨가 보이는 와중에 평원왕은 사망하였고 뒤를 이어 제26대 영양왕(嬰陽王) 이 즉위하게 됩니다.
590년에 즉위한 영양왕은 평원왕의 장자로 풍채와 정신이 뛰어나고 호쾌하여 세상을 다스리고 백성
을 편안하게 하는 것을 자신의 임무로 여겼다고 하는데, 수나라가 강대해지고 포섭이 이어지자
일부 속말말갈의 무리가 고구려를 뒤로 하고 수나라에 합류했으니 이때 추장인 돌지계(突地稽)
의 아들이 고구려-당 전쟁과 나당전쟁 때 나타나는 당군 지휘관으로 유명한 이근행(李謹行) 입니다.
또한 거란의 한 부족인 출복부도 고구려를 배반하고 강자인 수나라에 내부(內附)해 버렸으며 또 첩보
를 통해 수나라가 고구려와 다른 나라들을 정벌할 군대를 기르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고구려
는 계속 수나라의 팽창과 영향력을 좌시할 수 없었으니 앞의 위협적인 국서도 영향이 있었을 것입니다.
중국 통일로 기세등등해진 수 문제는 돌궐과 토욕혼에 베트남, 백제, 신라등 주변국들로 부터 왕과 신하의
관계로써 조공을 받는등 주변국들은 스스로 수나라의 제후국으로 인정하지만 북방의 맹주 고구려는
그러지 않았으니, 주변국들은 수나라를 황제국으로 인정함과 동시에 그 뜻으로 조공도 바쳐 일찌감치
수나라 제후국으로 인정받았지만 오직 고구려만 이를 인정하지 않았을뿐더러 조공도 거부하고 있었습니다.
한가지 이상한 점은 《삼국사기》 에 따르면 북위에게는 장수왕이 33차례나 조공하면서 심지어 한해에도
3차례나 지극정성으로 열심히 조공을 하던 고구려가 왜 더 강대한 통일제국인 수나라에게는 조공을
거부했을까 하는 점인데..... 이것은 당시 북위와 고구려의 관계가 《삼국사기》나 《위서》의 내용과 달리
형식적 조공관계인데 비해 수나라는 국왕이 친조하는등 실제적인 복속을 요구했기 때문이 아닌가합니다.
4. 598년 수 문제의 제1차 전쟁
문제는 고구려 정벌을 위해 수군과 육군 30만명을 준비하는 한편 고구려에 사신과 함께
친필을 보냈는데 그 내용에는 수나라의 신하국으로써 조공을 하라는 것과 수나라의
제후국으로 인정함은 물론 만약 조공을 거역할 시에 자신이 군사를 동원하여 양씨
황족 중 1명을 고구려 왕으로 앉히겠다는 내용이 있었으니 완전히 무릎을 꿇으라는.....
그런데 전쟁이 임박해지자 정작 영양왕의 고구려군이 선제 공격을 했으니 수나라의 반응을 한번 보려는
등 여러가지 이유로 요서(遼西) 지역의 임유관을 선제 공격한 것인데, 이때 영양왕은 말갈 기병 1만
여명을 동원했으니 정황상 대규모 본격 침공이 아니라 치고 빠지는 형태의 싸움이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당시 임유관에는 위충이란 장수가 지키고 있었는데 고구려의 침략을 막아냈다고 기록되어 있으나
오늘날 한국에서는 고구려가 임유관 초토화라는 전략적 목표를 달성했다고 보기도 하는데....
수나라의 고구려 침공시 그 시작점은 임유관인데 임유관이 초토화된 때문에 수(隋)군은 임유관
후방에서 출병했으니 고구려의 도발에 진노한 문제는 598년에 30만 대군을 동원 고구려를 칩니다.
수문제는 다섯째 아들 한왕(漢王) 양량(楊諒)을 원수로 삼고, 장군 왕세적(王世積)에게 30만 대군을
통솔하게 한후, 그들로 하여금 육지와 바다 양면으로 진격하여 요동을 공격하도록 했으며,
동시에 수문제는 오래전 부터 이어져왔던 조공관계로 인해 주었던 영양왕의 관작을 삭탈하였습니다.
제1차 전쟁 당시 고구려와 수나라 양국 간에 어떤 전투가 발생했고, 전투 양상이 어떠했는지는 기록의
부재로 자세히는 알 수 없지만... 장마와 태풍 등으로 30만 중에 8~9할이 전멸하여 별다는 교전도
없이 그냥 퇴각했다는 수나라 측 기록이 전해지며, 혹자는 고구려와의 교전에서 대패했다는 정황
을 암시하는 듯한 기록들을 근거로 수나라 측에서 고의적으로 패전을 축소, 은폐했다고 보기도 합니다.
“진주 강씨 족보”에는 중국 주나라 강태공의 후손으로 진주 강씨의 시조 강이식이라는 장수의 전승이
있는데, 신채호는 그의 저서“조선상고사”에 현재는 남아 있지 않는 (서곽잡록 西郭雜錄) 과 (대동
운해 大東韻海) 등의 기록을 인용하여 강이식이 임유관 전투 에서 승전을 이뤄내어 전쟁을 이끈
주역이라 주장했는데 하지만 강이식이란 이름은 중국과 한국 역사서에는 전혀 나오지 않는 인물입니다.
“영양왕은 평원왕의 맏아들로 풍채가 준수하고 쾌활하였으며, 세상을 구제하고 백성을 안정시키는 것
을 자신의 임무로 생각했으니 평원왕 32년에 왕이 별세하자, 왕위에 올랐으니 수나라 문제가 사신
을 보내 왕을 상개부의동삼사로 임명하고, 전왕의 요동군공의 관직을 계승케 하고 옷 한 벌을 주었다.”
“2년(서기 591) 봄 정월에 사신을 수나라에 보내 표문(表文)를 올려 사은하고 왕을 봉해 주기
를 청하니, 황제가 이것을 허락하였다. 3월에 수나라 황제가 고구려왕으로 책봉하고 수레
와 의복을 주었다. 여름 5월에 사신을 수나라에 보내 사은하였다. 3년 (592) 봄 정월에
사신을 수나라에 보내 조공하였다. 8년(597) 여름 5월에 사신을 수나라에 보내 조공하였다.”
“9년(598) 2월 왕은 말갈 무리 만여명을 거느리고 요서를 침략하였는데, 영주(營州) 총관(摠管) 위충
이 이를 격퇴시켰다. 수나라 문제가 노하여 한왕(漢王) 양(諒)과 왕세적(王世積) 을 원수(元帥) 로
삼아 수군과 육군 30만을 거느리고 고구려를 쳤다. 여름 6월 황제가 조서를 내려 왕의 관작을 빼앗았다. ”
“한왕 양의 군사가 임유관(臨渝關)으로 나와서 홍수를 만나 군량의 운반이 이어지지 못하자,
군사들은 식량이 떨어지고 또 전염병에 걸렸다. 주나후(周羅睺) 가 동래(東萊) 로
부터 배를 타고 평양성으로 쳐들어오다가 역시 바람을 만나 배가 많이 표류하고
가라앉았다. 가을 9월에 수나라의 군대가 돌아갔으나 죽은 자가 열명 중 여덟, 아홉이었다.”
王亦恐懼 遣使謝罪 上表稱 遼東糞土臣某 “왕도 역시 두려워하여 사신을 보내 사죄하고 표를 올려 ‘요동
더러운 땅(糞土 분토)의 신하 모(某)’ 라고 스스로 칭하였다. 황제가 이리하여 군진을 풀고 고구려를
처음과 같이 대하였다. 백제왕 창(昌=위덕왕)이 수나라에 사신을 보내 표를 올려서 군대의 길잡이가
되겠다고 청하였다. 황제는 조서를 내려 “고구려가 죄를 자복하여 짐이 이미 용서하였으므로 벌할
수 없다.” 라 하고, 그 사신을 후하게 대접하여 보냈다. 왕은 그 사실을 알고 백제의 변경을 침략하였다.“
삼국사기에 영양왕이 스스로 수치스럽게도 “요동 분토(糞土 똥이 널린땅?)의 신하” 로 칭하는 표문을
올리자 표문을 받은 수문제도 원정을 제대로 망쳤지만 체면만은 그럭저럭 차리고는 퇴각한 것인데,
저런 사죄 성격의 표문은 사례가 더러 있으니 397년 백제 아신왕은 광개토대왕에게 남녀 1,000
명과 세포 1,000필을 바치면서 '지금부터 태왕 폐하의 영원한 노객(奴客 노비) 이 되겠다고 했습니다.
신라 내물왕은 599년에 광개토대왕에게“왜인이 국경에 가득차 성지를 부수고 ‘노객을 민(民)으로 삼으려
하니’ 왕께 귀부해 청명합니다” 라 했고, 문무왕은 672년 석문전투 대패후 당고종에게 “신은 죽을 죄를
지어 삼가 말씀드립니다, 은혜를 입어 찢어 죽는 것을 면했사온데 몸을 가루로 만들고 뼈를 바순다
해도 그 크나큰 은혜를 어찌 보답하겠습니까? 흉악한 역적의 이름을 쓰게 되어 용서받기 어려운 죄인이....”
이후 영양왕은“11년(600) 봄 정월에 사신을 수나라에 보내 조공하였다. 태학박사(太學博士) 이문진(李文眞)
에게 명하여 옛 역사책을 요약하여 신집(新集) 5권을 만들었다. 국초에 처음으로 문자를 사용할 때
어떤 사람이 사실을 100권으로 기록하여 이름을 유기(留記)라고 하였는데, 이때에 와서 깎고 고친 것이다.”
“영양왕 14년(603) 가을 8월에 왕은 장군 고승(高勝)을 보내 신라의 북한산성(北漢山城)을 쳤다.
신라왕이 군사를 거느리고 한수(漢水)를 건너오니, 성안에서는 북치고 소리지르며 서로 호응
하였다. 고승(高勝)은 저들이 수가 많고 우리는 적으므로 이기지 못할 것을 두려워하여 물러났다.”
5. 제2차 고구려 - 수 전쟁의 113만이라는 숫자!
수문제는 대운하 공사도 백성들이 힘들다고 하자 필요한 것을 알면서도 중단했고 백성들의 삶을 위해 세율을
낮추며 흉년에는 조세를 면제하고 검소하고 근검하며 백성들에게는 어진 왕이었던 보기드문 성군이었는데,
전쟁은 엄청난 비용을 소모하는데 실패해 피해를 본지라 또 공격할 생각이었을지 몰라도 한동안은 지출로
소모된 나라를 안정시키고 국력을 기르는데 애썼으며... 602년에 베트남 원정을 단행해 전 리 왕조 제2대
국왕인 리펏뜨를 붙잡아 참수형에 처하고 베트남을 다시금 중국의 통치영역에 포함시키면서 수습을 합니다.
그러나 604년에 수나라에서 크나큰 변고가 일어나게 되니 명군인 수 문제가 사망하고,
모략으로 형을 몰아내고 태자가 된 양광(楊廣)이 뒤를 이어 황제로 등극하니 바로
수 양제(隋煬帝) 로 아버지와는 달리 오만하고 잔인하면서도 허영심이 남달랐던
수 양제는 즉위하자마자 만리장성(萬里長城)을 보수하고 대운하를 다시 건설합니다.
그리고 주변국들에 대한 대대적인 군사활동이 시작되니 서방의 토욕혼과 북방의 돌궐을
토벌하고, 남쪽으로는 베트남까지 진출하는등 그 위세를 떨쳤으니 이렇게 정복
사업에 성공한 양제가 선황 시절 부터 눈엣가시처럼 여겼던 고구려를 그냥 놔둘 리
만무하였으니 수나라의 국력은 아버지 문제의 노력으로 중국 역사상 아주 막강했습니다.
훗날 당태종 시기나 심지어 당고종(唐高宗) 시대에 이르기 까지도 당나라는 수나라 최전성기 시절의 호구
수를 뛰어넘지 못했으니 역으로 말하면 수 양제는 그렇게 수 문제가 고생하면서 부강한 나라로 만든
수나라를 나락에 떨어뜨렸다는 것인데 결국 수문제 시절을 따라잡은 건 몇세대 뒤인 당현종 초기였습니다.
한편 고구려는 양광의 과시욕과 통일된 초강대국이 출현하자 극도로 긴장했으니 양광의 정복 사업
이 한창 성과를 보일때 고창국(高昌國)의 왕과 동돌궐의 계민가한(啓民可汗)이 모두 친히 수나라
도성에 입조해 공물을 바쳤으니 사치와 허세를 좋아하는 수 양제는 영양왕에게도 입조(入朝)
하라고 말했지만..... 영양왕은 두려움을 느껴 “수서” 의 표현대로라면 번국의 의무를 소홀히 합니다.
쉽게 말해 "오라고 했는데 영양왕이 안왔다. 그리고 제대로 이유를 설명하지도 않았다."
정도로 해석이 가능하니 이는 수 양제 입장에서는 불경하게 입조를 거절한 것도
모자라 전쟁 대비에 착수하기까지 했다는 의미로 해석될 수 있었는데 고구려가
수나라의 힘을 약화시키고 대항하기 위해서는 동돌궐의 힘을 빌릴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607년에 사신을 보내 동돌궐의 계민가한을 만나고 있었는데, 하필 그때 수 양제가 계민
가한을 직접 만나러 왔으니, 계민가한은 고창국과 함께 수나라 조정에 입조를 했던 적이
있었고, 수나라의 국력을 몹시 두려워했기에 차마 숨길수가 없어 고구려 사신과 함께 수 양제
를 만날 수밖에 없었으니 마침 황문시랑(黃門侍郞) 배구(裵矩) 가 수 양제에게 이렇게 간언합니다.
“고구려는 기자(箕子)가 책봉을 받은 땅으로 한(漢)·진(晉)때 군현으로 삼았습니다. 신하가되어 섬기지 않고
따로 외국땅이 되었으므로 선황께서 정벌하고자 한지 오래되었습니다. 양량이 못나고 어리석어 군대를
출동시켰으나 공을 세우지 못했습니다. 폐하의 시대가 되어 어찌 멸망시키지 않음으로써 예의바른 지역을
오랑캐 고을로 만들겠습니까? 고구려의 사신은 계민이 온 나라를 들어 모시고 따르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가 두려워하는 것을 이용해 사신을 위협해 입조하게 하십시오.” 《삼국사기》 권제20 <고구려본기> 제8
이에 양제는 우홍(牛弘)을 통해 고구려 사신에게 자신의 뜻을 선포하게 하였으니“짐은 계민이 성심으로
나라를 받든 까닭에 친히 그 장막에 왔소. 내년에는 마땅히 탁군(涿郡)으로 갈 것이오. 그대는 돌아
가서 그대의 왕에게 마땅히 빠른 시일 내에 들어와 조회하고 스스로 의심하거나 두려워하지
말라고 아뢰시오. 보존과 양육하는 예절은 마땅히 계민(啓民)과 같이 할 것이오. 만약 조회하지
않으면 장차 계민을 거느리고 그대들의 땅을 돌아볼 것이오.” 《삼국사기》권제20 <고구려본기> 제8
대업(大業) 7년(611년) 2월. 양제는 양주 땅에서 백관을 초대해 큰 연회를 베푼 다음, 원정을
위해 북상했으니 용주(龍舟)를 타고 장강에서 운하를 거슬러 북쪽으로 올라가 황하로
나간 다음, 영제거(永濟渠)라는 새로운 운하로 들어가 하북의 탁군에 도착하였으니
이때 선발된 사람 3,000여명이 걸어서 배를 따랐는데, 추위와 굶주림과 피로로 열에 한둘
은 죽었다고 하니.... 수 양제는 입조를 하지 않으면 탁군에 가겠다는 자신의 말을 지켰습니다.
전근대 중국의 1차 사료에서 기술하는 병력 기록은 매우 모호한 부분이 많은데. 중국 사서의
병력 기록은 보통 "A장군이 n만의 병력을 거느렸다." 정도로 매우 간략하니 구체적인 병력
의 편제와 구성까지 파악할 수 있는 전투는 매우 드물고, 심지어 보병과 기병의 숫자를
따로 표기하는 경우도 많지 않으니 병력 숫자가 일종의 뻥튀기인 '호왈' 인 경우도 많습니다.
總一百一十三萬三千八百,號二百萬,其餽運者倍之 총 병력은 113만 3800명이고, 200만이라
(과장해) 불렀으며, 식량 운반자는 배 였다.《수서》 권4, 제기, 제4, <양제 하 편>
그러나 고구려-수 전쟁의 수나라군 113만명 병력의 기록만큼은 숫자가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으니
중국의 정사 《수서》에는 '113만 3,800명' 이라고 무려 100의 자리까지 기록되어 있으며, 이는
수나라의 호적 제도와 용(庸)제 등의 징용 및 징병 기록을 참조하지 않고서는 서술이 불가능합니다.
제1차 고구려-수 전쟁이 발발하기 약 8년 전인 590년에 수 문제는 병농일치(兵農一致) 를 기초로 하는
부병제를 정립한 바 있기 때문인데 이는 《수서》를 서술한 사관의 입장에서 수사학적으로도 접근할수
있으니 '113만 대군을 200만 명이라 일컬었다' 는 구절이 바로 그것인데, 'X 가 진실이지만, 과장해서
Y 라고 했다.' 는 수사는 자연스러우나, '과장한 X 를 다시 과장해서 Y 라고 했다.'는 수사는 어색합니다.
"모두 1백 13만 3천 8백 명인데 2백만명이라 하였으며, 군량을 수송하는 자는 그 배였다. (중략) 매일
1군씩을 보내어 서로 거리가 40리가 되게 하고 진영이 연이어 점차 나아가니, 40일 만에야 출발이
완료되었다. 머리와 꼬리가 서로 이어지고 북과 나팔 소리가 서로 들리고 깃발이 960리에 걸쳤다.
어영(御營) 안에는 12위(衛)·3대(臺)·5성(省)·9시(寺)를 합하고, 내외 전후 좌우(內外前後左右) 6군을
나누어 예속시키고 출발하게 하니 또한 80리를 뻗쳤다." 《삼국사기》<고구려본기> 영양왕 23년 1월.
한술 더 떠서 《삼국사기》에는 당시 수나라군의 편제와 진군에 대한 자세한 묘사까지 기록되어
있으니 이는 당시 이 전쟁을 기록한 중국의 사초(史草)가 존재했으며, 편찬 과정에서 이를
참조했을 가능성을 드러내니 수나라 군대의 규모는 제1차 세계 대전이 일어나기 이전까지
세계 최대 규모였으며 수나라의 고구려 침공 작전은 베르됭 전투가 발발하기 전까지 세계
최대 규모의 인력을 동원한 작전이라고 하니 얼마나 큰 원정군이었는지 알수 있는 대목입니다.
수나라군 병력 113만은 그렇다 치고, '그 두 배의 보급 병력' 기록은 사실일까? 아무도 정확한 답을
할수 없는데 편제 기록이 자세한 듯 하면서도 불완전한 부분이 많아 113만명의 면모를 파악하긴
힘드니, 다만 역사학자들 중에서도 113만이라는 숫자를 완전히 부정하는 사람은 없으며 조작
이라고 편하게 넘어가기엔 113만 명이라는 숫자와 편제 기록이 너무도 자세하고 고구려 원정의
타격으로 수나라가 멸망에 이르렀다는 점을 감안하면 113만이라는 숫자를 무시할 근거는 없습니다.
다만 이견도 존재하니 서양의 중국사학자 데이비드 그라프의 견해를 요약하자면 1개 군의 병력은
대략 2만명 언저리가 되며, 총 30군 병력의 합은 113만 명이 아닌 60여만명이 된다. 만약
함대에 속한 수군이 저 숫자에 포함된다 해도, 수나라 총군의 숫자는 67만 명 정도로 “수서”
에 언급된 수치는 수나라 총 인구수를 볼 때 너무 많은 인구가 군대에 소속된 것이니 농업사회
에서 많은 농민을 군대에 끌고가면 농작물 수확에 치명적 타격을 입혀 군량을 보급할수 없다 합니다.
《수서》에 언급된 1,133,800명이란 전투병 수치는 611년 당시 수나라 정부가 징모한 사람들의 총수치에
가까울 것이며 실제 탁군이나 룽커우에 모여들어 다음해(612) 고구려 원정에 참여한 실병력의 숫자
는 이보다 적을 것이니 113만이란 수치의 뒤에 추가된 절반가량의 수치가 진짜 원정군의 숫자에 더
아귀가 맞으며 이는 588년 진을 멸망시킬 당시 동원된 수나라 군대 52만명의 숫자와도 잘 들어맞습니다.
또한 수나라의 역사서는 수나라를 이어 들어선 당나라 학자들의 손을 거쳐 편찬되었으니 당나라의
학자들은 수 양제를 '악독한 마지막 폭군' 으로 그리고자 했고, 또한 군대의 숫자를 부풀림
으로써 당 제국은 수양제의 궁극적 몰락에 더 명백한 당위성을 부여할수 있었을 것이라 여겨집니다.
결론적으로 사서의 기록과 이견을 절충하면 병농일치에 따라 최대 113만명 가량의 백성을
차출해 놓고, 실제 원정에는 그 절반인 60여만명 정도만 고구려에 파견된 것이 아닌가?
정도의 의견을 제시하는데 113만 명이 실제 중국 전역에서 모집되었을 가능성은
인정하고 있으며 다만 113만명 전체가 고구려에 파견되었는지 여부를 논하는 것입니다.
반론을 보면 1군 = 20,000명이라는 가정을 전제하고 있지만 살수대첩 당시 수나라 9군이 30만명
이라는 의견도 존재하니《수서》 권61 열전 제26 <우문술전>에서는 압록강을 건너 깊숙하게
진격해 고구려 을지문덕과 대결했던 우문술이 인솔하던 병력이 9군, 30만 5,000명이라는 것입니다.
우문술의 직책은 부여도군장이었으니 부여도군은 좌제 9군이었고 1개 군인 좌제9군
부여도군만으로 30만명이었다면 24개군 + 천자 6군 해서 수나라군 총 병력이
90만이 되어 버리며 당시 압록강을 건넜던 수나라군의 이른바 별동대에는 우문술의
좌제9군인 부여도군뿐만 아니라 우중문의 좌제12군 낙랑도군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결국 우문술이 인솔했다는 '9군, 30만 5,000명' 에서 9군은 9개 군을 의미할 가능성이 높으니 여기서 9개
군이 30만 5,000명이었다면 1개 군의 평균 병력은 33,800명이되고 출전한 수나라의 병력은 30개군
(24군 + 천자6군) 이므로 환산된 총 병력은 33,800 x 30= 101만 4,000명이 되니 이 숫자는 113만
3,800명에 근접하는 수치이므로 당시 수나라군 총 병력이 100만명이 넘었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더구나 군사학적으로도 중국 국경 내에서 식량을 운반하는 자와 달리 각 군에 치중단 형식
으로 편제된 병력이라면 전투병 유무에 관계없이 실제 병력에 포함시켜야 할 것이며
또한 치중뿐만 아니라 융거, 산병까지 존재했으므로 기마대와 보졸대 외의 병력이
모조리 비전투 병력이라고 단정할 근거도 없으니 113만 8,000명이 틀린 것은 아니라는?
이러한 해석도 옳다고 장담할수는 없으니 별동대의 '군' 이 24개 군과 병력이 다르게 편제되었을가능성
이 있으며 또한 애초에 별동대의 병력이 실제로 30만 5,000명씩이나 되었을까 하는 의문도 품어볼 수
있으니 결정적으로, 고구려도 당태종과의 주필산 대전에서 전투병만 15만명을 차출한 전례가 있습니다.
고구려 보다 최소 10배에서 30배의 인구를 웃도는 수나라를 멸망시킬 지경의 보급난
을 불러 일으키려면 60만명이라는 숫자는 지나치게 적은 숫자니 이것은 임용한의
견해에도 반론으로서 작용한느데 수나라는 제2차 여수전쟁 이후 원래의 영광을
되찾지 못하고 쇠락의 길을 걸었으니.... 그보다는 훨씬 많은 수가 동원되어야 합니다.
“한국고대전쟁사”시리즈의 저자이자 토크멘터리 전쟁사에 출현하는 사학자 임용한은 수나라군
의 편제 기록을 토대로 실제 전투병력이 28만 8천 명이었으며, 113만 명 중 나머지 병력
은 원정에 참가한 비전투 병력(수비병, 보급 인원 등)이라고 주장했는데 '두 배의 식량
운반자' 는 아마 중국 내부에서 국경지대 까지 식량을 나르는 인부들이었을 거라 추정했습니다.
기록을 보면 수나라군은 총 24개 군으로 이루어져 있었고, 1개 군에는 기병 4개 단과 보병 4개 단이
있었으니 기병 1개 단은 10개 대로 이루어져 있었고, 각 대의 정원은 100명르호 기병 1개 단의
인원은 1,000명 가량이었고, 1개 군의 기병 병력은 4,000명 정도였던 셈인데 보병의 병력은
몇명인지 나와있지 않지만 기록에 의하면 1개 군에는 기병 40개 대와 보병 80개 대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보병의 대와 기병의 대의 병력이 같은지는 알 수 없는데 임용한 교수를 비롯한 '전투 병력 30만
설' 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보병 역시 기병과 마찬가지로 1개 대가 100명으로 이루어져 있었으며,
따라서 1개 군이 4,000명의 기병과 8,000명의 보병으로 이루어져 있었다고 주장하는데
각 군의 병력이 12,000명이고 24개 군이 있었으니 총 병력은 28만 8,000명 정도가 되는 셈입니다.
당시 부병제 병력이 60만명 정도였는데, 양제는 그 두 배에 달하는 병력을 동원했기에 질 낮은
징집병들이 다수 포함되었을 거라고 짐직되며 수나라군의 보급상태는 그리 좋지 않았으니
굳이 전투를 치루지 않더라도 영양실조와 질병으로 사망하는 인원이 엄청났을 것으로 짐작됩니다.
명나라의 경우를 봐도 16세기 후반 장부상에는 병력이 300만 대군에 달했으나 실제로 운용가능한
병력은 훨씬 부족했고, 16세기 말에는 그 수가 50만명을 상회하기 어려운 수준이었으니 전근대
의 열악한 통신, 행정능력으로는 수만 병력을 징병, 통제하는 것은 힘들었고 편제상 병력은
113만명이 맞더라도 인원 부족, 도주하는 사람으로 인원이 제대로 채워지지 않았을 것으로 봅니다.
어쨌든 수나라 군대가 북방의 탁군에 집결하기 시작했고 산동성 동래에 병선 300여척을 건조하라는 명령
이 내려가니 원정에 늦지 않도록 밤낮을 가리지 않고 공사를 강행하자 일꾼들은 허리까지 물에 잠긴
채 일하느라 전체의 3·4할이 죽었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심지어는 오랫동안 물속에 있어서 하반신이
썩고 구더기가 슬었다고 하는데 고구려는 저력을 발휘하니 수나라는 대패하고 멸망으로 치닫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