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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8월 26일 연중 제21주간 금요일
제1독서 : 1코린 1,17-25
복 음 : 마태 25,1-13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런 비유를 들어 말씀하셨다.
1 “하늘 나라는 저마다 등을 들고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처녀에 비길 수 있을 것이다.
2 그 가운데 다섯은 어리석고 다섯은 슬기로웠다.
3 어리석은 처녀들은 등은 가지고 있었지만 기름은 가지고 있지 않았다.
4 그러나 슬기로운 처녀들은 등과 함께 기름도 그릇에 담아 가지고 있었다.
5 신랑이 늦어지자 처녀들은 모두 졸다가 잠이 들었다.
6 그런데 한밤중에 외치는 소리가 났다.
‘신랑이 온다. 신랑을 맞으러 나가라.’
7 그러자 처녀들이 모두 일어나 저마다 등을 챙기는데,
8 어리석은 처녀들이 슬기로운 처녀들에게
‘우리 등이 꺼져 가니 너희 기름을 나누어 다오.’ 하고 청하였다.
9 그러나 슬기로운 처녀들은
‘안 된다. 우리도 너희도 모자랄 터이니 차라리 상인들에게 가서 사라.’ 하고 대답하였다.
10 그들이 기름을 사러 간 사이에 신랑이 왔다.
준비하고 있던 처녀들은 신랑과 함께 혼인 잔치에 들어가고, 문은 닫혔다.
11 나중에 나머지 처녀들이 와서 ‘주인님, 주인님, 문을 열어 주십시오.’ 하고 청하였지만,
12 그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는 너희를 알지 못한다.’ 하고 대답하였다.
13 그러니 깨어 있어라. 너희가 그 날과 그 시간을 모르기 때문이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도박하는 사람의 승률은 얼마나 될까요?
실력의 차이가 있다고 하지만, 아마 도박에서 이기는 사람보다 지는 사람이 훨씬 많습니다.
그런데도 이 도박을 끊지 못하는 이유는 본전 생각과 막연한 희망 때문입니다.
본전까지만 찾으면 그만하겠다고 하지만, 본전 찾기 전에 패가망신 당하고 말지요.
또 본전을 찾아도 더 딸 것이라는 잘못된 희망에 매달려서 쫄딱 망하고 맙니다.
이 사실을 잘 아는 분은 절대로 도박하지 않겠다고 말씀하시지요.
그런데 잘 생각해보면 우리 모두 이런 도박을 계속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돈이 아닌 시간을 가지고 하는 도박입니다.
“돈에 여유가 생기면 봉사할 거야.”,
“시간이 나면 성당에 열심히 다닐 거야.”
“은퇴하면 가족과 열심히 함께할 거야.” 등등
우리는 막연히 시간이 있을 것으로 생각하면서 지금 하지 않고 뒤로 미룹니다.
시간을 가지고 도박하는 것입니다. 이는 결코 되찾을 수 없는 돈을 거는 것과 같습니다.
그리고 거의 100% 후회하게 될 것입니다.
시간에 대해서 도박하지 말아야 합니다.
‘~ 나중에’라는 말로 지금을 소홀히 한다면,
큰 후회 속에서 힘든 시간을 보낼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지금 당장 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살펴보고,
미루지 말고 지금 할 수 있는 용기와 결단이 필요합니다.
이는 예수님께서도 자주 말씀하셨지요.
특히 깨어 기다리라는 교훈을 이미 여러 차례 말씀하셨습니다.
그만큼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확실한 이해를 위해, 오늘 복음에서와 같이 열 처녀의 비유 말씀을 전해주십니다.
이스라엘의 혼인 잔치는 야단스러울 만치 온 동네가 함께 기뻐합니다.
혼인 며칠 전부터 밤에 횃불을 밝히고 춤과 노래로 밤을 지새웁니다.
신랑이 자기 집에서 친구들과 잔치를 벌이고 혼인날 저녁에 신부집을 찾아가 결혼합니다.
그래서 언제 올지를 잘 모르는 것입니다. 신랑 집의 잔치가 끝나야만 신부집에 올 수 있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신랑이 제때 오지 못하고 꽤 늦어졌다는 것입니다.
신부 측 들러리들은 신랑 측 행렬을 맞이하기 위해 등을 들고 기다리는데,
이 등은 약 15분가량 있으면 꺼집니다.
그래서 신랑이 올 때를 잘 맞추든가 여유의 기름을 준비해야 했던 것입니다.
여기서 두 부류로 나눠집니다.
할 일에 늘 대비하는 성실한 사람과 그저 그때를 안일하게 넘기는 게으른 사람으로 나뉩니다.
성실한 사람은 잔치에 들어가고 게으른 사람은 문을 두드리며 울부짖을 수밖에 없게 됩니다.
성실히 주님의 나라를 준비하라는 당부의 말씀을 우리는 결코 잊어서는 안 됩니다.
그 나라가 아직 오려면 멀었다면 게으르고 불성실한 모습으로 살아간다면 큰 후회를 하게 될 것입니다.
깨어 있어라
-"나에게는 그리스도가 생의 전부입니다"-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
“사랑하는 프란치스코 전교 봉사 수도회 형제 여러분!”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열정적이고 순수한 여러분을 사랑합니다.
수녀회 피정 지도는 많이 했지만 이렇게 ‘프란치스코’ 수도사제가 남자수도회,
특히 ‘프란치스코’ 전교 봉사 수도회 피정은 난생 처음입니다.
이 또한 주님의 섭리임을 깨닫습니다.
오늘 강론은 참 각별한 성격을 띌 것입니다.
제 은총의 발자취, 수도 여정의 렉시오 디비나이자 고백이 될 것이며
또 새로운 시작의 다짐이 될 것입니다.
총원장 형제님과 나눈 카톡의 청담淸談의 대화가 이 강론을 쓰게 된 계기가 되었습니다.
-“열정적이고 순수한 수도공동체 형제님들의 젊고 힘차고 아름다운
시편공동전례기도에 힘과 감동을 받습니다.
피정 분위기도 진지하고 열심하여 좋습니다! 공동체 힘껏 섬기시노라 수고 많습니다.”
“벌써 내일모레 피정이 끝나네요.
내일, 혹은 토요일 강론때 신부님 수도여정 안에서 묻어나는
복음삼덕에 관련하여 살아오신 얘기도 듣고 싶습니다.
젊은 수도자들에게 소중한 시간이 될 듯 싶습니다.”
“아, 그것들은 이미 제1부, 체험적 고백의 강의에서 다 피력 됐다 생각합니다!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좌우명 고백기도시,
내 수도생활관, 명상기도, 희망의 여정, 행복기도에 제 삶 모두가 담겨 있지요!
이렇게 살았고, 이렇게 살고 있으며, 이렇게 살고 싶은 것이 유일한 소망이랍니다.
이에 보탤 것도 뺄 것도 없습니다. 감사합니다. 편히 쉬세요.”
“네 감사합니다. 편안한 밤 되세요.”-
이렇게 정다운 청담을 나눈 후 잠자리에 들었습니다만 끝난 것이 아니었습니다.
한밤중 잠을 깨는 순간, 형제님의 청에 순종順從하여
제 수도 여정을 나눠야 하겠다는 생각이 들었으니,
이것은 순전히 성령聖靈께서 제 마음을 움직인 것입니다.
도저히 나누지 않으면 마음이 불편해 못 견딜 것 같았습니다.
제 성소聖召는 참 각별한 느낌입니다.
천주교를 몰랐던 시골 어린 시절부터 결혼은 아닐 거라는 예감이 늘 자리했습니다.
이때는 집 근처의 감리교회에 다녔지만, 그리 열심하지는 않았습니다.
본격적인 성소의 계기는 교대시절 여름방학 뇌종양 수술로
RNTC 훈련을 못 받자 군에 1970년 징집되어 34개월 군복무를 시작하면서였습니다.
입대 시 소지품은 절박한 마음에 지녔던 성경 한 권뿐이었습니다.
군복무 중 개신교 신자로 주일 예배는 꼭 참석했습니다.
참으로 하느님 은총의 섭리 안에 순탄한 군복무 후 제대해 마지막 한 학기를 마치고,
1974년부터 20대 후반에서 30대 초반까지 만8년간 초등학교 교사로 1981년까지 재직하다
1982년 왜관 수도회에 만 33세로 입회했습니다.
자신이 생각해도 참 치열하고 간절했던 초등학교 8년의 교편시절이었고,
수도 성소에 결정적 계기가 되었습니다.
당시 저는 교직을 돈벌이 직업職業이 아닌 성직聖職으로 생각하여
오로지 교육에, 아이들 사랑에 헌신하고자 했고, 결혼에 대한 생각은 추호도 없었습니다.
유일한 바람은 아이들을 사랑하고 아이들의 존경과 사랑을 받는 것이었기에
8년간 학부모가 건네주는 일체의 촌지寸志도 겸손히 사양했고,
온전히 날마다 하루 전부를 아이들에게 정성과 사랑을 쏟았습니다.
지금은 하느님 사랑이 전부이지만 당시는 교육과 아이들이 제 사랑 전부였습니다.
그런데 진리를 향해 몸 바치는 마음으로 최선을 다해도
마음의 허기는, 공허는, 갈증은 해소되지 않았습니다.
이때는 개신교에 다녔고 처음으로 프란치스코 성인을 알았고 성인의 삶에 매료되었습니다.
때로 목사님이 되라는 조언도 있었지만, 직업으로의 목사님 하기보다는
교사 직업을 가지고 주님을 섬기는 것이 떳떳할 것이라 생각하고 거절했습니다.
정말 내 가정을 가지고 성직을 수행한다는 생각은 염두에도 없었습니다.
그런 와중에 서서히 가톨릭에 끌리기 시작했고,
때로 미사에 슬며시 참석하기도 했는데 마음이 고향집에 온 듯 편안했습니다.
마음의 갈증도 허기도 해소되는 느낌이었고,
동료 가톨릭 교사들도 적극적으로 수도사제의 길을 권했습니다.
당시 만 33세에 안정된 교직을 그만두고 수도회에 들어간다는 것은 정말 모험이었습니다.
참으로 무모無謀하기에 일부는 권했지만 대부분 말렸습니다.
하느님의 성소에 감사합니다.
지금 생각해도 다시 산다 해도 이 길뿐이 없겠다는 생각입니다.
1980년 성탄절에 세례를 받고, 1981년 성탄절에 견진을 받고,
1982년 초 사직辭職 후 일사천리 수도회의 각별한 배려의 은총으로 입회가 가능했습니다.
이때 역시 본당 신부님의 적극적인 도움으로 사무장님이 잘 아시는
수도회 성소 담당 신부님을 연결해 줬기에 막차를 탄 기분으로
고령의 나이로 입회가 가능했으니 참 아슬아슬했습니다.
오늘 강론 주제도 어제와 동일하게 “깨어 있어라”인데
이때부터 하루하루, 참으로 치열히, 절실히 깨어 살도록 노력했습니다.
보통 자연스런 입회자들보다 14년은 늦었기에 배로 열심히 산다는 각오로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가톨릭 신학대 입학은 어려워 마침 수도자 신학교를 계획한 서강대 종교학과에 편입하게 되었습니다.
이 또한 기막힌 섭리였습니다. 제가 입학한 후 더 이상 수도 신학생의 입학은 없었습니다.
마치 저를 위해 개설한 학과였던 듯 싶습니다.
서강대 종교학과에서 신학, 철학, 종교학을 마치고 졸업하자 즉시 수련을 받게 되었습니다.
수련기 때는 토마스 머튼에 심취되어 수도원 도서관에 소장된 영문판 서적은 거의 읽었고,
나중 대학원 논문도 토마스 머튼의 관상에 대해 쓰게 된 계기가 되었습니다.
수련을 마치자 특별한 배려로 대구가대 신학대학원 제1회에 맞춰
제일 많은 나이에 자연스럽게 편입이 이루어졌습니다.
당시 서강대 종교학과 학장이던 김승혜 교수 수녀님께,
대구가대 정하권 몬시뇰 학장님께 들었던 찬사도 큰 힘이 되었음을 지금도 생생히 고맙게 기억합니다.
"대단한 노력가다!"
대학원 2년간 교구 학생들과 함께 학교 기숙사에 거주하면서,
신학교에서 배우지 못한 학부 과목도 무려 12과목을 수강하라 하여 시험을 봤습니다.
참으로 치열히, 열심히 공부하여 만학晩學의 오르도ordo 첫 번째인 저를
의아해하던 주위의 시선이 첫 학기 1등 하자 깨끗이 사라졌고 보는 시선이 달라졌습니다.
대구가톨릭신학대학원에 자연스런 편입도 은총의 기적이었지만
종신서원을 앞두기 한해 전 1987년 성 요셉수도원의 설립도 저에게 기막힌 은총의 선물이었습니다.
서강대를 마련해 주신 주님은, 자연스럽게 대구가대로 이끄셨고,
신학교 공부가 끝나자마자 때에 맞춰 평소 갈망해왔던
관상적 성격의 요셉수도원을 마련하여 이끄셨던 것입니다.
제 일정표엔 없었지만, 하느님 일정표엔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어찌 하느님을, 그리스도 예수님을 일편단심一片丹心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는지요!
우리가 사랑하는 그리스도는 누구입니까?
바오로 사도가 고백하는 그대로입니다.
“우리는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선포합니다.
그리스도는 유다인들에게는 걸림돌이고 다른 민족에게는 어리석음입니다.
그렇지만 유다인이든 그리스인이든 부르심을 받은 이들에게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힘이시며 하느님의 지혜이십니다.”
신학교 공부를 끝내고 유기서원 3년 차 만39세,
1988년 7월 11일 성 베네딕도 대축일에 요셉수도원에 부임했으니
올해로 요셉수도원에 정주하기 34년째요, 수도회 입회 후 만 40년이 되는 해입니다.
요셉 수도원 초창기 역시 참으로 생존生存을 위한 참 치열했던 삶이었습니다.
1992년부터 2014년 자치수도원으로 승격하기까지 무려 22년 동안 원장으로 재임하면서
우여곡절에 파란만장한 삶이었지만 하느님의 각별한 사랑의 은총으로 무사히, 성공적으로 통과했습니다.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 선명한 기억이 있습니다.
1988년 7월11일 요셉수도원 부임 전날 밤, 참 절박한 마음으로
왜관 수도원 대성전에서 밤 9시부터 다음 날 새벽 4시까지 3천 배 기도를 바쳤던 기억입니다.
성철 큰 스님의 좌우명 종신불퇴終身不退의 정신으로
배수진背水陣을 치고 살아 온 그동안의 삶이었습니다. 값싼 은총은 없습니다.
하느님의 은총과 더불어 분투의 노력을 다하는
치열하고 항구한 깨어있는 삶이 함께했기 때문입니다.
이때의 유명한 제 모토가 생각납니다.
“불암산이 떠나면 떠났지, 난 안 떠난다!”
참으로 하느님께 찬미와 감사를 드리는 것은, 주님께 대한 사랑이,
수도공동체 형제들에 대한 사랑이, 형제자매들에 대한 사랑이 날로 깊어진다는 것입니다.
2014년 자치수도원으로 승격되면서 저는 산티아고 순례 여정을 가지면서,
제 수도 여정을 렉시오 디비나 하였고, 이어 훌륭한 원장 후임자를 마련해 주신
‘신神의 한 수手’ 같은 하느님의 섭리에 정말 감격, 감탄하였습니다.
저절로 모두가 은총이란 고백과 더불어 그리스도께 대한 사랑도 날로 깊어지게 됩니다.
2014년 원장직에서 내려온 후 오늘까지 평범한 수도승으로서 수도형제들과 34년째 정주 중입니다.
우리 나이로 40세 부임하여 34년이 지나니 현재 74세입니다.
일일일생一日一生 하루로 압축하면 오후 4시, 일년사계一年四季로 압축하면 초겨울쯤 될 것입니다.
이런 자각이 환상이나 거품을 거둬내고 깨어 본질적 깊이의 종말론적 삶을 살게 합니다.
사랑과 앎은 함께 갑니다.
날로 그리스도 예수님을 사랑해가면서 저절로 깨어 살게 되며 주님을 알게 되고 나를 알게 됩니다.
결코 오늘 복음의 어리석은 처녀처럼 문을 두드렸을 때
주님의 다음 말씀은 듣지 않으리라는 자신이 있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는 너희를 알지 못한다.”
정말 주님을 사랑하여 주님의 사랑을 받고 사랑과 신뢰를 받았더라면,
오늘 복음의 슬기로운 처녀처럼 섬김과 사랑, 겸손을 위한 분투의 노력을 다해
평상시 영혼의 등잔에 주님 향한 신망애信望愛와 진선미眞善美의 영적 기름을 충분히 예비하여
늘 환한 등불 환히 켜들고 깨어 주님을 기다렸다면, 하늘 나라 잔치에 너끈히 입장했을 것입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시간 우리 모두 깨어 영혼의 등불을 환히 켜 들고
주님을 기다리다가 주님을 맞이하여 주님과 함께 하늘 나라 잔치를 앞당겨 체험하는 복된 시간입니다.
끝으로 제 좌우명 고백기도시 마지막 연으로 강론을 마칩니다.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날마다,
깨어,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일일일생,
깨어, 하루를 처음처럼, 마지막처럼, 평생처럼 살았습니다.
저에겐 하루하루가 영원이었습니다.
어제도 오늘도 이렇게 살았고, 내일도 이렇게 살 것입니다.
하느님은 영원토록 영광과 찬미받으소서.”-아멘.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하루사이에 부고를 두 번 들었습니다.
여행사를 하시는 형제님의 아들이 밤사이 심장마비로 하느님 품으로 갔습니다.
아직 해야 할 일이 많은 젊은이가 꿈을 다 펴지 못하고 하느님의 품으로 갔습니다.
부모님의 상실은 어찌 말로 표현할 수 있겠습니까?
다만 하느님의 자비하심에 의탁하며 젊은 청년이
주님의 품에서 영원한 안식을 누리기를 기도할 뿐입니다.
세상을 떠난 아들을 가슴에 묻어야 하는 부모가 슬픔을 딛고 힘을 내시기를 기도할 뿐입니다.
내년에 부제품을 받는 형제님의 장모님이 가슴이 답답하여 병원엘 갔지만
안타깝게도 하느님의 품으로 갔습니다. 일주일에 3번씩 투석을 하였던 어르신입니다.
자식들에게는 큰 슬픔이지만 어르신께서는 이제 투석이 없는 하느님 나라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리시리라 믿습니다. 라틴어 격언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오늘은 내가 내일은 네가(Hodie mihi, Cras tibi)”
태어난 사람은 누구나 죽음의 문을 넘어야 합니다.
그러기에 오늘 주어진 시간을 충실하게 살아야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10 처녀의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10 처녀는 이 세상에 태어난 우리 모두를 뜻한다고 생각합니다.
등잔은 하느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주시는 시간과 공간이라고 생각합니다.
기름은 그 시간과 공간에 채워야 하는 우리의 말과 행동 그리고 삶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그것을 남에게 빌려올 수도 없고, 나의 것을 타인에게 양도할 수도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기름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누군가 오리를 가자고 하면 십리를 가 주어라.
누가 왼뺨을 때리면 오른 뺨까지 내주어라.
잘못한 사람이 있다면 일곱 번씩 일흔일곱 번이라도 용서해 주어라.”
이런 삶은 이웃에게 나누어 줄 수 없습니다.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런 삶은 타인에게 빌려 올 수 없습니다.
공기가 있어 우리가 숨을 쉴 수 있는 것처럼 그냥 우리가 하면 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기름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중에 첫째가 되고자 하는 사람은 꼴찌가 되어야 한다.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
내가 너희의 발을 씻어 주는 것은 너희도 그렇게 하라고 모범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런 삶 또한 남에게 줄 수 없습니다. 그것을 원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남에게 빌릴 수 없습니다. 물이 있어서 마시는 것처럼 우리가 행하면 되기 때문입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사실 세상은 하느님의 지혜를 보면서도 자기의 지혜로는 하느님을 알아보지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분께서는 복음 선포의 어리석음을 통하여 믿는 이들을 구원하기로 작정하셨습니다.
유다인들은 표징을 요구하고 그리스인들은 지혜를 찾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를 선포합니다.
그리스도는 유다인들에게는 걸림돌이고 다른 민족에게는 어리석음입니다.
유다인이든 그리스인이든 부르심을 받은 이들에게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힘이시며 하느님의 지혜이십니다.
하느님의 어리석음이 사람보다 더 지혜롭고 하느님의 약함이 사람보다 더 강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기름은 세상 사람들에게는 걸림돌이 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기름은 세상 사람들에게는 어리석음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믿은 참된 신앙인에게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기름은
우리를 영원한 생명에로 인도하는 불빛이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기름은 하느님의 지혜입니다.
“깨어 있어라. 너희가 그날과 그 시간을 모르기 때문이다.”
“신랑이 온다. 신랑을 맞으러 나가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앞 장면에서, 예수님께서 예루살렘과 성전의 파괴를 예고하시고 올리브 산으로 가시자,
제자들이 “그런 일이 언제 일어나겠습니까?”(마태 24,3) 하고 물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너희는 누구에게도 속는 일이 없도록 조심하여라.”(마태 24,4) 하시면서,
‘가장 큰 재난’(마태 24,15-26)과 ‘사람의 아들이 오시는 날’(마태 24,29-31)에 대해 말씀하시고,
‘도적의 비유’(마태 24,42-44)를 통해 ‘깨어있음’과 ‘준비함’을 명령하시면서,
‘어떻게 하는 것이 깨어있는 것이요 준비하고 있는 것인가’를 밝혀주시기 위해
‘충실한 종과 불충실한 종의 비유’, ‘열 처녀의 비유’, ‘탈렌트의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오늘 복음인 '열 처녀의 비유'는 혼인잔치를 전제로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열 처녀는 신랑을 기다리는 신부입니다.
신부는 당연히 신랑께 깨어 있어야 하고, 신랑을 고대하고 기다림으로 준비합니다.
왜냐하면 신랑이 오면 마중 나가 맞이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냥 마중 나갈 뿐 아니라 신랑이 자신을 잘 찾아오도록 ‘등’을 밝혀 들어야 합니다.
그리고 ‘등’을 밝혀 들기 위해서는 ‘기름’을 미리 준비해야 합니다.
그런 이가 바로 ‘슬기로운 처녀’입니다.
그렇다면 내가 준비해야 할 ‘등’은 무엇이고 ‘기름’은 무엇일까?
오늘 우리가 기념하는 아우구스티누스 성인은 ‘등’을 ‘선행’으로,
등에 불을 타오르게 하는 ‘기름’을 ‘사랑’으로 설명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산상설교의 ‘세상의 빛과 소금’의 가르침에서 말씀하십니다.
“등불은 켜서 함지 속이 아니라 등경 위에 놓는다.
~ 너희의 빛이 사람들 앞을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마태 5,15-16)
그러니 ‘등’은 ‘착한 행실’로 알아들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등을 밝히는 데 꼭 필요한 ‘기름’은 ‘신랑에 대한 사랑’,
곧 ‘예수님의 가르침에 순종하는 자세’이며, 성령의 기름 부음에 도유 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마침내 '한밤중에 외치는 소리'가 났습니다.(마태 25,6)
여기서 '한밤중'은 가장 예기치 않은 때를 뜻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신랑이 온다. 신랑을 맞으러 나가라.’
그러자 처녀들이 모두 일어나 등불을 챙겼습니다. (마태 25,6-7)
여기서 ‘챙기다’(코스메오, κοσμεω)는 ‘심지를 자르다’라는 뜻으로,
다 타버린 심지 끝을 잘라서 그을음이 나지 않고 환하게 타오르도록
정돈하는 행동을 가리킨다고 합니다.
곧 불꽃이 잘 타오르도록, 그래서 환하게 비추도록 하기 위해서,
심지가 기름에 닿아 있는지 기름은 충분한지
그리고 심지가 타버리지는 않았는지 보고 잘라내는 일입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우리는 성령의 기름에 몸을 담그고 있는지, 성령에 젖어 있는지,
그 사랑의 기름에 도유되어 있는지 보아야 할 일입니다.
또한 ‘신랑이신 주님’께 깨어 있고, 주님을 맞이하기 위한 준비인
사랑의 착한 행실을 실천하고 있는지를 보아야 할 일입니다.
곧 나는 ‘슬기로운 처녀’인지를 보아야 할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산상설교 마지막 부분에서 말씀하셨습니다.
“나의 이 말을 듣고 실행하지 않는 자는
모두 자기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과 같다.”(마태 7,26)
아멘.
<오늘의 말 · 샘 기도>
“깨어 있어라.”(마태 25,13)
주님!
눈을 부릅뜨고 깨어 있되 신랑인 당신을 향해 깨어 있게 하소서.
당신을 희망하고 기다리며 더더욱 갈망하게 하소서.
빛 속에서 은총을 볼 줄 알게 하시고,
그 은총이 얼마나 큰지 경이로워하고 놀라워할 줄 알게 하소서.
사랑의 등불을 켜 들고 임을 보게 하소서.
임의 사랑을 보게 하소서.
당신의 놀라운 자비와 사랑에 깨어 있게 하시고, 당신 사랑에 기름칠 되게 하소서.
아멘.
열 처녀가 등불을 가지고
조욱현 토마스 신부
예수께서는 하늘나라를 혼인 잔치에 비유하시며,
슬기로운 처녀들과 어리석은 처녀들의 비유를 말씀하신다.
여기서 “다섯은 어리석고 다섯은 슬기로웠다.”(2절)
슬기로운 처녀들은 시간이 얼마 남았는지 헤아리고서
신랑의 오심에 준비하고 있는 사람들이다.
신랑이 언제 오더라도 맞이할 준비가 되어있는 이들이다.
어리석은 처녀들은 방종하고 부주의한 사람들이다.
그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잊어버리고,
현재의 것들에만 마음을 쏟으며 노력하지 않았다.
신랑이 언제 올지는 별 관심이 없다.
모두가 등을 가지고 있었는데,
어떤 처녀들은 슬기롭고 어떤 처녀들은 어리석었다.
그것은 기름을 가지고 있느냐 없느냐였다.
이 기름의 의미는 아주 큰 것이다. 그것은 사랑이다.
왜냐? 사도 바오로께서 이렇게 말했다.
“내가 이제 여러분에게 더욱 뛰어난 길을 보여주겠습니다.”(1코린 12,31)
“내가 인간의 여러 언어와 천사의 언어로 말 한다 하여도
나에게 사랑이 없으면 나는 요란한 징이나 소란한 꽹과리에 지나지 않습니다.”(1코린13,1)
이것이 사랑이다.
사랑은 모든 것 위에 있는 뛰어난 길이며 기름이다.
이 기름은 더욱 뛰어난 길이다.
이 사랑이 없으면서 신랑이신 주님을 맞이할 수 없다.
어리석은 처녀들은 순간에 대해 준비만 하고
앞날은 준비하지 못했기 때문에 어리석었고,
슬기로운 처녀들은 앞날에 대비하여
사랑의 행실을 쌓아 기름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슬기로웠다.
그런데 신랑이 늦어진다.
“신랑이 늦어지자 처녀들은 모두 졸다가 잠이 들었다.”(5절)
그 신랑은 한밤중에 온다. 예기하지 못한 시간을 말한다.
“신랑이 온다!”(6절) 처녀들은 저마다 등불을 챙긴다.
어리석은 처녀들은 슬기로운 처녀들에게
“우리 등이 꺼져 가니 너희 기름을 나누어다오.”(8절)
슬기로운 처녀들은
“안 된다. 우리도 너희도 모자랄 터이니 차라리 상인들에게 가서 사라.”(9절) 하였다.
하느님 앞에서 선은, 사랑은 얻을 수도 빌릴 수도 없는 것이다.
“준비하고 있던 처녀들은 신랑과 함께 혼인 잔치에 들어가고, 문은 닫혔다.”(10절)
그 뒤에 어리석은 처녀들이 왔다.
그들은 기름을 사서 왔을까? 기름을 파는 사람들을 만났을까?
아니다. 단지 문이 닫혀있는 것만을 본다. 문을 두드리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나는 너희를 알지 못한다.”(12절)
그러니 항상 깨어 있어야 한다.
우리의 삶 속에서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주님을 놓쳐 지나치지 않도록
깨어 있는 삶을 항상 노력하며 주님을 맞이할 수 있도록 하여야 한다.
정용진 요셉 신부
오늘 복음은 신랑을 기다리는 열 처녀들에 대하여 말합니다.
신랑은 그리스도이시고, 열 처녀는 그리스도교 공동체입니다.
이들은 저마다 그리스도의 신부고 교회입니다(에페 5,22-32 참조).
슬기로운 처녀들은 모범적인 신앙인들을 대표합니다.
그들은 언뜻 보기에 착하기는커녕,
약고 야박한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아마도 슬기로운 처녀들의 지인이고 친구였을
어리석은 처녀들은 등에 기름이 떨어지자
슬기로운 처녀들에게 그것을 좀 나누어 달라고 부탁합니다.
그러나 슬기로운 처녀들은 그 요청을 단호히 거절합니다.
왜 그랬을까요?
사실 이 기름은 다른 이에게 나누어 줄 수 없는 어떤 것을 뜻합니다.
누구도 다른 사람을 대신하여 자신의 깨어 있음을 대신해 줄 수 없고,
누구도 다른 사람을 대신하여 그리스도를 사랑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슬기로운 처녀들은 삶을 살아가는 동안
주님을 향한 믿음과 사랑이 한결같이 지속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꺼지지 않는 등잔의 불은 어두운 밤과도 같은 이 세상에서
자신의 본분을 지키며 충실히 사는 삶을 상징합니다.
등불의 기름은 행실이 동반되는 지속적인 믿음의 삶입니다.
이 기름은 뒤늦게 급히 마련될 수 없습니다.
날마다 더 주님을 사랑하고
가난한 형제들을 사랑하기를 멈추지 말아야 합니다.
아뿔싸, 준비한 기름이 없네
박상대 마르코 신부
마태오복음의 종말과 심판에 관한 설교(24-25장)에는
그리스도의 재림과 그에 따른 준비와 최종적인 심판이 적나라하게 묘사되어 있다.
그런데 이 광경이 많은 은유를 통한 비유로 묘사되고 있다는 점에 주의하여야 한다.
그리스도의 재림과 세상의 종말과 심판에 관한 일들이
비유 속에 묘사되는 것처럼 꼭 그렇게 된다는 보장은 없다.
은유를 이용한 비유의 맛은 그 속에서 영적인 교훈과 도덕적 지침을 얻어내는 데 있다.
마태오가 수의 비유를 연이어 수록한 이유도 바로 그런데 있는 것이다.
네 편의 비유를 다시 한번 언급하면, 충성스런 종과 불충한 종의 비유(24,45-51),
처녀의 비유(25,1-13), 달란트의 비유(25,14-30), 그리고 최후심판의 비유(25,31-46)이다.
우리는 오늘 복음에서 두 번째를, 내일 복음에서 세 번째 비유를 듣게 된다.
참고로 네 번째 비유는 <가해>의 그리스도왕 대축일과 부활시기를 제외한
다른 시기의 장례미사 복음으로 자주 듣게 될 것이다.
오늘 복음의 열 처녀 비유는 마태오 복음만이 전하는 독자적인 고유 전승이다.
비유에서 신랑은 재림하실 그리스도를 뜻하며,
열 처녀는 신랑을 맞을 그리스도인들을 뜻한다.
열 처녀의 손에 쥐어진 등잔은 세례를 통해
하느님 아버지로부터 선사 받은 신앙을 의미한다.
그 신앙의 강도와 열매는 준비된 기름에 비유된다.
따라서 열명의 처녀 중에 슬기로운 다섯은
복음의 말씀을 충실히 따르고 지키며 사는 신자들이요,
어리석은 다섯은 말씀을 듣고도 실천하지 않는 신자들이다.
무릇 ‘선인과 악인’이 함께 하는 교회공동체의 모습을 잘 묘사하고 있다.
문제는 신랑인 그리스도의 오심이 늦추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모든 처녀들이 등불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신랑이 이내 왔다면 별 문제가 안 된다.
그러나 신랑의 오심이 늦어지면서 등불을 위한 기름이 얼마나 준비되어 있느냐가 관건이 된 것이다.
신랑이 당도하는 시간이 지체되긴 하지만 분명한 것은 틀림없이 신랑이 온다는 사실이다.
기름을 나누어 달라고 청하는 어리석은 처녀들의 애절함과 나누고 나면
양쪽 다 모자라니 가게에 가서 사다 쓰라는 슬기로운 처녀들의 야속함이 상충 된다.
어리석은 처녀들이 기름을 사러 간 사이에 신랑이 와 버렸다.
이것 또한 야속하기 이를 데 없다.
하필이면 그 순간에 오실 것은 무엇인가?
허나 인생은 그런 것이다. 인생의 중요한 때와 기회를 놓치고 나면 다시 얻기란 힘든 것이다.
살아가는 동안에야 같이 도와가며 사는 듯하지만,
마지막에 가면 철저히 홀로 서야 함을 보여주는 비유가 아닌가.
예수께서 곧 다시 오실 것이라고 말씀하시고 세상을 떠나신 지 수많은 시간이 흘렀다.
마태오복음 공동체에도 그렇고 우리들에게도 마찬가지다.
초기 교회의 신자들은 모두 그리스도의 재림은 지척에 있는 사건으로 믿었고,
개중에는 될 수 있는 한 빨리 재림이 있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재림이 지체되면서 기다림의 열망은 식어가기 시작하였다.
기다리다 지치면 기다림에 대한 열망은 식어가기 마련이다.
오래 기다리다 보면 지치고 짜증 나고 화가 나기도 할 것이며,
때로는 포기해 버릴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런 과정을 통해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각자가 한 생을 살다가 죽는 순간이 바로 신랑이 오신 시간임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오늘 복음은 열매를 맺지도 못하고
미지근한 열정으로 신앙생활을 하는 우리에게 새로운 기다림의 의미를 주고자 하는 것이다.
재미있는 일은 오늘 복음에서 언제 올지 모르는 신랑을 기다리다가
슬기로운 다섯이나 미련한 다섯이나 모두가 지쳐서 졸다가 잠이 들어 버렸다는 사실이다.(5절)
얼마나 솔직한 표현인가?
그러나 기름 준비의 여부에 따라 그 잠이 평화의 잠이 될 수도 있고
공포와 두려움의 잠이 될 수도 있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
깨어 있으라는 말씀(13절)이 쉼도 지침도 없이 뜬 눈으로 밤낮 긴장하여 살라는 말은 아니다.
주어진 하루에 예수님의 복음을 따라 최선을 다하여 살고,
하루의 마지막 시간에 평온한 휴식의 잠을 청할 수 있다면 무엇을 더 바라겠는가.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