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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녀온 / 명산 photo 스크랩 황진이가 사랑했던 벽계수의 묘역을 품은 명봉산(`14.6.22)
가을하늘 추천 0 조회 84 14.07.10 05:46 댓글 1
게시글 본문내용

명봉산(鳴鳳山, 618.4m)

 

산행일 : ‘14. 6. 22()

소재지 : 강원도 원주시 문막면

산행코스 : 건등저수지메나골남매소나무절골598.7m명봉산이종숙묘역동화2(산행시간 : 3시간10)

함께한 산악회 : 안전산악회

 

특징 : 명봉산은 원주시 문막읍의 동쪽에 솟은 나지막한 산으로 일반인에게는 아직 덜 알려져 있다. 인근 치악산의 그늘에 가려진 탓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특별한 볼거리가 없는 산세(山勢) 때문이 아닐까 싶다. 정상석이 있는 598봉에서 명봉산 사이에 잠깐 나타나는 암릉을 제외하고는 별다른 볼거리가 일절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산은 괜찮은 편이다. 사람이 잘 다니지 않은 탓인지 숲은 원시림(原始林)처럼 우거져 침침하기까지 하고, 비록 깊지는 않지만 계곡은 나름대로의 멋을 풍기고 있다. 거기다 흙으로 이루어진 산길은 완만(緩慢)해서 걷는데 조금도 부담이 없다. 따라서 가족산행지로 추천할 만하다.

산행들머리는 건등저수지(원주시 문막면 건등리)

영동고속도로 문막 I.C에서 내려오자마자 원주방향으로 우회전하여 500m정도 가면 관천교()가 나온다. 이 다리를 건너기 바로 직전에 오른쪽에 보이는 마을길(명봉산길)1km 남짓 들어가면 산행들머리인 건등저수지가 나온다. 메나골까지 도로가 나있지만 대형차량의 진입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저수지가 산행들머리가 되는 것이다.

 

 

 

 

저수지 위 삼거리에서 목화마을 이정표를 따라 들어가면서 산행이 시작된다. ‘목화 체험장을 지나 마을까지 가면 나이가 수백 년은 족히 넘었을 것 같은 거대한 느티나무 한 그루가 길손을 맞는다. 그리고 곧 이어 명봉산 건강원이 나오고, 메나골로 들어가는 길은 건강원의 오른쪽 옆으로 나있다. 건강원의 입구와 건물 옆에 메나골로 들어가는 길을 알려주는 이정표가 세워져 있으니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건강원을 지나면 곧이어 산행안내도가 세워진 공터가 나오고, 이 공터를 지나면서 본격전인 산행이 시작된다. 메나골로 들어서게 되는 것이다. 메나골이나 조금 전에 지나왔던 메나마을은 목화(木花, cotton plant)와 깊은 관계를 맺고 있다. 수백 년 전부터 이 마을에서 목화를 재배해왔는데, 목화의 다른 이름인 면화(綿花)가 소리 나는 대로 부르다보니 메나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아쉽게도 현재는 목화를 재배하지 않는다고 한다. 일손이 딸리는 것이 그 원인이란다. 그러나 마을 입구에 목화체험장을 지어놓고 사람들을 불러 모으는 것을 보면 목화와의 인연(因緣)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음이 분명하다.

 

 

 

 

산행을 하다보면 가끔 체육시설을 갖춘 쉼터를 만날 수 있다. 어디선가 나왔을법한 지원금(支援金)으로 설치한 모양인데, 과연 누구를 위해 만들었는지 모르겠다. 만일 등산객들을 위한 것이라면 생각 자체부터가 어설픈 발상이었을 것이다. 설마 등산객들이 산을 오르다가 걸음을 멈추고 몸을 풀 일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주민들을 위한 시설일까? 그러나 이도 아닐 것 같다. 만일 주민들을 위한 시설이라면 동네 근처에 만드는 게 옳겠기에 말이다.

 

 

산길은 메나골을 따라 이어진다. 계곡을 따라가다가 어떤 때는 계곡을 가로지르면서 서서히 고도(高度)를 높여간다. 계곡은 메나골이라는 이름만큼이나 귀엽고 작은 골짜기이다. 크지는 않지만 규모 있는 바위들이 곳곳에 널려있어 물이 많이 흐를 경우에는 수많은 폭포(瀑布)들을 만들어낼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아쉽게도 지금은 물의 양이 많지 않다. 그나마 그 물은 계곡을 올라가면서 서서히 줄어들더니 이내 물기 한 점 없는 건천(乾川)으로 변해버린다. 일기예보 때 들었던 마른 장마철이 맞긴 맞는 모양이다.

 

 

 

 

산행을 시작한지 25, 메나골로 들어서서 15분쯤 지나면 길이 두 갈래(이정표 : 명봉산 정상/ 신배나무골/ 메나골)로 나뉜다. 왼편으로 갈 경우 신배나무골이 나온다는데 대체 어디를 지칭(指稱)하는지도 모르겠고 길까지 희미하기에 별 의미를 두지 않고 지나쳐 버린다.

 

 

계곡은 비록 깊지 않지만 사람들이 잘 찾지 않은 덕분인지 원시(原始)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아기자기한 계곡은 사람들의 손을 덜 탄 탓에 아직까지 깨끗하고, 주변은 울창한 숲과 넝쿨식물들로 덮여 온통 짙은 초록으로 물들어 있다. 자연미(自然美) 넘치는 계곡 길을 즐기며 걷다보면 이내 남매소나무 쉼터에 이르게 된다. 소나무 두 그루가 'V'자 모양으로 자란 것이 마치 사이좋은 남매처럼 보인다고 해서 남매소나무란 이름이 붙여졌나 보다. 잠깐의 눈요깃감으로 충분하다 싶었는지 소나무 근처에다 체육시설을 갖춘 쉼터를 만들어 놓았다.

 

 

소나무쉼터를 지나면서 길이 다시 두 갈래(이정표 : 명봉산 정상/ 달밝골/ 메나골)로 나뉜다. 첫 번째 갈림길에서 10분 쯤 지난 지점이다. 이곳에서도 역시 오른쪽 명봉산 정상 방향으로 진행한다. 어디로 갈지도 모르는 왼편 길을 따를 수는 없기 때문이다.

 

 

산행을 하다보면 길의 양편에 처져있는 금()줄이 눈에 들어온다. 그리고 서슬 시퍼런 경고판(警告板)도 볼 수 있다. 글자는 비록 희미하지만 약초(藥草) 재배지이니 출입을 하지 말라는 얘기일 것이다.

 

 

달밝골 갈림길을 지나면서 계곡의 경사(傾斜)가 가팔라진데다, 바닥의 바위들까지 불규칙하게 깔려있어 오르는 것이 쉽지 않다. 계곡은 이제까지보다 훨씬 더 원시(原始)의 모습을 보여준다. 바닥에 깔린 바위들이 온통 초록빛 이끼들을 뒤집어 쓰고 있는 것이다. 어두컴컴할 정도로 울창한 숲속에서 보는 초록빛 향연은 신비로운 분위기를 자아내기에 충분하다.

 

 

계곡이 가파르게 변한다 싶더니 산길이 왼편으로 방향을 튼다. 그리고 오늘 산행에서 가장 힘든 코스가 나타난다. 심하다 싶을 정도로 가파른 오르막길이 시작된 것이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바닥이 부드러운 흙길이라는 정도, 짙은 참나무 숲 아래로 난 눈요깃거리 하나 없는 산길을 따라 그저 묵묵히 앞사람의 뒤꽁무니를 따를 수밖에 없다.

 

 

 

숨이 턱에 찰 정도로 힘들게 오르다가 기괴(奇怪)한 장면이 눈에 들어와 잠시 발걸음을 멈춘다. 소나무와 참나무가 마치 성교(性交)라도 하고 있는 듯이 포개져 있는 것이다. 이게 바로 진정한 사랑나무가 아닐까 싶다. 완전히 서로 다른 종류의 나무들이 하나로 합쳐져 공생(共生)을 하고 있으니 말이다.

 

 

독하게 몰아세우는 오르막길과 20분 정도 싸우고 나면 주능선(이정표 : 명봉산 정상/ 매봉산/ 메나골) 위에 올라서게 된다. 산행을 시작한지 1시간이 조금 못 걸렸다. 일단 주능선 위에 올라서면 언제 그렇게 가팔랐냐는 듯이 산길은 순해진다. 주능삼거리에서 왼편으로 방향을 틀면 헬기장이 나오면서 모처럼 하늘이 열린다. 그리고 오늘 산행에서 처음으로 조망(眺望)이 트인다. 골프장이 있는 궁촌리 방향으로 시야(視野)가 열리는데, 질펀하게 널려있는 이름 모를 작은 산들이 눈에 들어온다.

 

 

헬기장에서 약간 가파른 오르막길을 짧게 치고 오르면 바위봉우리가 나타난다. 정상표지석이 세워져 있는 598.7m봉이다. 바위봉우리라고 해서 온통 바위로 이루어졌다는 얘기는 아니다. 흙으로 된 봉우리인데 정상의 꼭짓점에 커다란 바위들이 몇 개 겹치듯이 널려있는 정도일 따름이다. 정상표지석 때문에 등산객들은 대부분 이 봉우리를 정상으로 착각하기도 한다. 그러나 실제 정상은 이곳에서 조금 더 진행해야 만날 수 있다. 598.7m봉에는 정상표지석 외에도 삼각점(三角點, triangulation point)과 아무런 내용도 없는 낡은 안내판(案內板)이 세워져 있다. 거기다 조망(眺望)까지 좋으니 사람들이 정상으로 오인하는 것이 하나도 이상할 것도 없을 것이다.

 

 

598.7m봉에서의 조망(眺望)은 일품이다. 문막 들판을 가로지르는 영동고속도로가 실낱처럼 내려다보이고, 고속도로 너머로는 섬강(蟾江) 줄기가 아름답게 펼쳐진다. 멀리 치악산이 눈에 들어오는 것은 물론이다.

 

 

 

598.7m봉에서 실제 정상(618.4m)으로 향한다. 이 구간이 오늘 산행의 하이라이트 (highlight)이다. 명봉산에서 유일한 암릉인데다, 암릉 곳곳에 자리 잡고 있는 노송(老松)들과 바위들이 어우러지면서 제법 뛰어난 눈요깃거리를 만들어내고 있기 때문이다. 거기다 바윗길에는 로프까지 걸려있어 약간의 스릴(thrill)까지 느낄 수 있다.

 

 

 

 

 

598.7m봉에서 아래로 떨어졌다가 안부에서 다시 맞은편 능선으로 치고 오르면 10분 후에는 삼거리(이정표 : 명봉산 정상/ 흥업/ 메나골)가 나온다. 삼거리에서 5분도 채 안 되는 거리에 명봉산 정상이 있다.

 

 

 

펑퍼짐한 분지(盆地)로 이루어진 명봉산 정상은 도무지 정상이라는 느낌이 들지 않는다. 나뭇가지에 매달려있는 명봉산 정상 620m'라고 적혀있는 리본만 아니라면 그냥 지나치기 십상일 것이다. 거기다 조망(眺望)까지도 터지지 않으니 어느 누가 여기를 봉황이 울었다는명봉산의 정상이라고 여기겠는가. 598.7m봉에다 정상표지석을 세운 사람들의 마음이 헤아려지면서 고개가 끄떡거려진다. 등산객들을 끌어들이기 위해서는 나라도 그리 했었을 것이라고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정상까지는 1시간20분이 조금 못 걸렸다.

 

 

 

날머리를 동화2리 방향으로 잡고 하산을 시작한다. 이제부터는 느긋하게 걷기만 하면 된다. 계속해서 작은 오르내림이 반복되기는 하지만 짧고 완만(緩慢)하게 올랐다가 길게 내려서면서 서서히 고도(高度)를 낮추어 가는 탓에 조금도 힘이 들지 않기 때문이다. 거기다 바닥이 부드러운 흙길이다 보니 발바닥에 전해오는 촉감까지도 좋다. 다만 하나 조심해야할 것은 길 찾기이다. 하도 많은 갈림길이 좌우로 열리기 때문이다. 물론 이정표도 찾아볼 수 없다.

 

 

울창하게 우거진 나무들로 인해 조망(眺望)이 열리지 않지만 심심하지는 않다. 간간히 커다란 바위들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어떤 바위들은 눈요기 외에도 붙잡고 올라가는 재미까지도 선사할 정도이다.

 

 

 

하산을 시작한지 50분쯤 되면 임도(林道)에 내려서게 된다. 능선을 좌우로 가로지르고 있는 임도는 깔끔하게 정비가 잘되어 있는 걸로 보아 현재도 활용되고 있는 모양이지만 어디서 어디로 가는지는 알 길이 없다. 혹시 동화사로 내려가는 길이 아닐까 싶어 왼편으로 3~4분 정도 내려가 봤지만 아닐 것 같아 되돌아 나오고 말았다. 그러나 임도의 이름을 알게 되는 것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임도를 가로질러 맞은편 능선으로 들어서자마자 오석(烏石)으로 만든 시비(詩碑)를 만났기 때문이다. 김충렬이라는 사람이 2004년에 세웠다는 시비(詩碑)의 이름은 연모시비(戀母詩碑) 그 내용이 하도 구구절절해서 옮겨본다. ’뜬구름은 떠도는 아이의 슬픔을 머금어 비가 되고, 성황나무는 비는 어머니의 모습을 담아 구부러졌네. 떠돌던 자식은 돌아왔건만, 어머니는 돌아가셨으니, 멍하니 저녁노을을 바라보며 한없이 눈물만 진다.‘ 비석의 뒷면에 이 비석을 세운 내력을 적었는데, 80년 전에 이곳은 대안령(大安嶺)이라는 이름을 가진 고갯마루였고, 당시 이곳에는 성황나무가 있었다고 한다.

 

 

 

임도를 지나서도 산길은 큰 변화가 없이 계속된다. 완만한 내리막길이 작은 오르내림을 반복하면서 이어지는 것이다. 참나무와 소나무가 섞인 산길의 풍경도 크게 변하지 않는다. 숲이 짙기 때문에 시야(視野)가 트이는 곳도 당연히 없다. 그저 능선을 따라 진행할 따름이다.

 

 

임도를 출발한지 10분 가까이 지나면 이제까지 와는 달리 제법 가파르고 긴 오르막길이 나타난다. 어쩌면 326m봉이 아닐까 싶다. 선두의 방향표시지는 이곳에서 오른쪽으로 방향을 튼다. 326m봉에서 내려서는 길은 가파른 내리막길이 계속된다. 그러나 다행히 길은 흔적이 또렷하다. 그러다가 능선을 벗어나 이름 모를 묘역으로 들어서면 산길의 흔적은 사라져버린다. 그러나 다행이도 나머지 구간이 길지 않기 때문에 잡목(雜木)사이를 조금만 헤쳐 나가다보면 얼마 지나지 않아 임도에 내려서게 된다. 326m봉에서 10분 정도가 걸렸다.

 

 

 

 

임도에 내려서면 저만큼 아래에 마을이 나타난다. 규모가 제법 반듯한 것이 아마 동화2리가 아닐까 싶다. 아뿔싸! 그렇다면 길을 잘 못 들었던 모양이다. 오늘 예정되었던 코스는 분명 벽계수 묘역을 들른 후에 동화2리로 내려오도록 되어있었기 때문이다. 일단 마을로 내려온 다음에 하천정비사업을 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물어보니 왼편 도로를 따라 동화사 방향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이종숙 묘역(墓域)’이 나온단다. 그 거리는 1Km, 산행 막바지에 그만한 거리를 다시 걷는다는 것은 사실 고역(苦役)이다. 특히 오늘 같은 무더운 날에는 말이다. 그렇다고 이종숙의 묘역 구경을 하지 않고 산행을 끝낼 수는 없다. 황진이가 애간장을 태웠다는 벽계수(이종숙)는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나이들의 로망(roman)일 것이기 때문이다.

 

 

 

동화사 방향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이 길은 벽계수 길이라는 어엿한 이름을 갖고 있다. 원주시에서 관내(管內)의 걷기 좋은 길 25개 코스를 선정해 '원주굽이길' 책자를 발간했는데 그 안에 제16코스로 소개되면서 세상에 알려졌다. 이 길은 동화골삼거리(문막읍 동화리)에서 시작해서 벽계수묘역 앞을 지나 명봉산의 산허리를 넘은 후에 해삼터(흥업면 대안리)에서 끝을 맺는다. 그 거리는 8.4, 그중 일부구간을 지금 걷고 있는 것이다. 벽계수 길을 따라 7~8분 정도 걸으면 벽계수 길은 왼편으로 방향을 튼다. 길가에 이정표가 큼지막하게 세워져 있으니 헷갈릴 일은 없을 것이다. 이곳 삼거리에서 직진하면 동화사(桐華寺)로 가는 길이다.

 

 

삼거리에 왼편으로 방향을 틀자마자 이곳이 벽계수 묘역임을 알려주는 커다란 비석(碑石) 하나가 길손을 맞는다. 그리고 50m쯤 더 걸으면 또 하나의 이정표(벽계수 이종숙 묘역 400m)가 나타나면서 이제 그만 벽계수 길과 헤어져 산자락으로 오르라고 한다. 그 거리는 400m, 그러나 실제거리는 100m쯤 되지 않을까 싶다. 오른편 산자락으로 들어서면 선무랑 이원경의 묘()가 나오고, 벽계수의 묘는 그 뒤 50m쯤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다. 서민(庶民)들 묘()의 봉분(封墳)보다 약간 큰 벽계수의 묘는 묘비(墓碑)와 상석(床石) 등 일반적인 석물(石物) 외에도 망주석(望柱石)과 문관석(文官石) 그리고 석등(石燈) 등 반듯한 규모를 갖추고 있다. 그의 신분이 왕족(세종대왕의 종손)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아쉽게도 석물들은 모두 만든 지 얼마 안 되는 새것 일색이다. 그렇다면 그동안 그의 묘는 방치되어 오다가 남에게 보일 정도로 묘역을 꾸민 것은 얼마 되지 않았다는 얘기일 것이다. 참고로 벽계수 이종숙은 송도삼절(松都三絶)의 한명인 황진이(黃眞伊)가 연모했지만 끝내 이루지 못한 사랑으로 그렸던 인물이다. 당시 조선 최고의 기생이었던 황진이가 중종과 인척관계이자 명사였던 벽계수 이종숙을 유혹했으나 뿌리치고 자리를 뜨자 이를 빗대서 지은 시로 인해 세상에 알려졌다. 그녀는 청산리(靑山裏) 벽계수(碧溪水)야 수이 감을 자랑마라/ 일도창해하면 다시 오기가 어려우니/ 명월이 만공산하니 쉬어간들 엇더리라며 애달파 했다고 한다. 벽계수라는 대명사는 세종대왕의 17번째 아들 영해군의 손자인 이종숙의 벼슬이었던 벽계도정(碧溪都正 : 종친, 외척에 관한 사무를 맡아보던 정삼품 벼슬)에서 유래되지 않았나 싶다.

 

 

 

 

산행날머리는 동화2(영동고속도로 조금 못미처)

벽계수의 묘역을 둘러본 후 다시 삼거리로 되돌아와 고민에 빠진다. **)동화사(桐華寺)를 들러보고 싶은 생각이 간절하기 때문이다. 이곳 삼거리에서 동화사까지는 1.2Km. 왕복하자면 최소 30분 이상이 걸릴 것이다. 고민은 오래가지 못했다. 주어진 하산시간이 어느새 빠듯해진 탓이다. 다시 벽계수 길을 따라 동화2리로 향한다. 하천정비사업이 한창인 동화천 하류를 따라 10분 정도 걸어 내려가면 영동고속도로가 보이고, 도로 조금 못미처에 있는 공장건물 근처에서 산행이 종료된다. 산행시간은 총 3시간50, 정상에서 준비해 온 막걸리를 마시느라 쉰 40분을 뺄 경우 3시간 10분이 걸렸다.

(**) 동화사(桐華寺)는 조선 초기 이전에 되었다가 19세기 중반 이후에 폐사된 것으로 알려진다. 비록 단편이지만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사찰에 대한 기록이 실려있고, 매월당시집(梅月堂詩集)에도 동화사에 묵으며(宿桐花寺 原州)라는 시가 실려 있는 것을 보면 제법 큰 사찰(寺刹)이 아니었나 싶다. 하나 당시의 이름은 동화사(桐花寺), 조선 중기 무렵부터 동화사(桐華寺)라는 이름으로 바뀐 것으로 추정된다. 인조의 장인이었던 한준겸(韓浚謙)의 저작 유촌유고(柳川遺稿)桐華寺次牧伯見贈韻 寺在原州등의 단편적인 기록들이 처음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동화사에는 천년 묵은 빈대에 얽힌 전설(傳說) 하나가 전해져 내려온다. 동화사가 자리 잡은 터는 원래 빈대의 소굴이었는데 그 자리에 큰스님이 절을 지었단다. 부처의 가르침이 있었음은 물론이다. 아마 빈대 때가 중생들을 해치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그런데 이 소굴에는 천 년 묵은 빈대가 살고 있었고, 큰스님의 법력(法力)에 눌려 지내던 빈대는 큰스님이 쇠약해지자 드디어 싸움을 걸어온 모양이다. 이를 안 스님이 싸우는 광경을 작은 스님에게 안 보여주려고 시주를 보내면서, 돌아오는 길에 절대 뒤를 돌아보지 마라는 주의를 주었지만, 작은 스님이 이를 지키지 않은 탓에 큰스님과 작은 스님 모두 죽게 되었다는 것이다. 물론 빈대도 함께 죽었음은 물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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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14.07.10 13:02

    첫댓글 명봉산 즐감 합니다. 자세한 설명까지 감사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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