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youtu.be/lDBxf0AgoLE?si=i3o7pgET6LZzPC1q
Münchner Philharmoniker / Sergiu Celibidache 브루크너 - 교향곡 4번 '로맨틱'
지휘자 세르주 첼리비다케는 1912년 루마니아 네암츠 주의 로만에서 태어났다. 여섯 살 때부터 피아노를 배운 그는 부카레스트에서 음악과 철학, 수학을 공부했다. 그 뒤 파리에 유학해 21세까지 학업에 정진했다. 첼리비다케는 1936년 우리나라의 손기정 선수가 월계관을 썼던 독일 베를린으로 가 베를린 대학과 베를린 예술대학에서 철학, 수학, 작곡, 지휘를 공부했다. 베를린 예술대학의 교수였던 작곡가 하인츠 티센은 이 시절 첼리비다케의 은사로 그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그는 ‘20세기의 위대한 지휘자 시리즈’ 음반 첼리비다케 편에서 하인츠 티센의 작품 [햄릿 모음곡]을 연주하고 있다.
베를린에 머무는 동안 첼리비다케에게 강한 영향을 끼친 지휘자는 빌헬름 푸르트뱅글러였다 이 시절 푸르트뱅글러가 지휘하는 베를린 필의 공연은 거의 하나도 놓치지 않고 들으며 거장의 음악을 온몸으로 빨아들였다. 첼리비다케는 제2차세계대전 중에도 베를린에 머물렀고 전쟁이 끝날 때까지 베를린을 지켰다
베를린 필의 지휘대에 서다
제2차세계대전이 끝나고 1945년, 푸르트뱅글러를 비롯한 유명 지휘자들은 친 나치 혐의로 활동을 중단하고 근신 생활에 들어가야 했다. 이에 따라 푸르트뱅글러를 대신하여 러시아 출신의 지휘자 레오 보르하르트가 베를린 필을 지휘하게 되었다. 그런데 보르하르트가 어떻게 대지휘자 푸르트뱅글러를 대신할 수 있었을까? 사회주의 혁명으로 1920년 독일로 이주한 보르하르트는 베를린 크롤 오페라에서 오토 클렘페러의 부지휘자로 활동한 경력을 시작으로 베를린 국립오페라와 베를린 필을 객원 지휘했었다
루마니아 출신의 세계적인 대지휘자 세르주 첼리비다케
전쟁 중 베를린에 칩거하며 반 나치 지하조직에 참가해 유대인 음악가들을 도운 보르하르트는 전쟁이 끝나고 혼란 속에서 흩어졌던 베를린 필 단원들을 불러 모았다. 베를린을 점령하고 있었던 소련군 사령관은 러시아어가 유창하고, 반 나치 활동을 했으며, 음악적으로도 뛰어났던 보르하르트를 눈여겨보았다. 그리고 그를 베를린 필 임시 지휘자로 임명했다. 1945년 5월 26일 보르하르트가 지휘한 베를린 필은 전쟁 후 첫 연주회를 가졌다. 그러나 첫 연주회 이후 불과 3개월 뒤인 8월 23일, 보르하르트가 탄 자동차는 미군의 정지 신호를 듣지 못했다. 미군 경비병은 위협사격으로 타이어를 쏜다는 것이 뒷자석에 앉아있던 보르하르트의 머리를 명중시키고 말았다. 안타까운 일이었다.
베를린 필은 후임 임시지휘자 물색 작업에 들어갔고, 지휘자 오디션을 개최했다. 스승 하인츠 티센의 권유로 참가한 첼리비다케는 당일 오디션 시간에 늦고 말았다. 그러나 그가 과제곡인 브람스 [교향곡 4번] 1악장(브람스 [교향곡 1번]이었다는 설도 있다)을 지휘하자 심사위원들은 만장일치로 첼리비다케의 손을 들어주었다. 이렇게 해서 보르하르트가 불의의 사고로 세상을 뜬지 불과 엿새 만에 첼리비다케가 베를린 필 야외 콘서트 지휘대에 서게 됐다. 공연 프로그램은 로시니 [세비야의 이발사] 서곡, 베버 [바순 협주곡], 그리고 드보르자크 [교향곡 9번 ‘신세계로부터’] 였다.
연합군 측에서 볼 때 첼리비다케를 베를린 필 지휘자로 발탁한 데에는 독일 문화에서 나치의 색채를 씻어내려는 뜻도 담겨 있었다. 그런데 첼리비다케가 베를린 필을 두 번째 지휘했을 때의 프로그램을 보면 멘델스존 [교향곡 4번 ‘이탈리아’]와 바그너 [탄호이저 서곡]이 한데 들어있다. 첼리비다케는 왜 나치 치하에서 유대인의 작곡이라 경원시됐던 작품과 히틀러가 좋아했던 작곡가의 작품이 나란히 연주했을까? 아마도 정치적 프로파간다에서 해방된 순수한 음악 그 자체의 전달을 의도했던 첼리비다케의 뜻이었을 것이다.
베를린 필 단원들과의 충돌, 카라얀의 상임지휘자 발탁
베를린 필 지휘자 시절 젊은 단원과도 격의 없이 이름을 불렀고 음식을 함께 나눠 먹기도 하면서 패전 이후 베를린의 혼란기를 극복해 나갔다. 유명한 독주자를 해외에서 초청할 여건이 안 되었던 당시 베를린 필의 내실을 기하는 데 힘썼다. 특히 프랑스와 러시아 음악들로 새로운 레퍼토리를 개척했다. 활동 초기, 평론가들의 반응도 좋았고 베를린 필을 많이 지휘한 경험도 많았기 때문에 첼리비다케는 이변이 없는 한 푸르트뱅글러 이후 차기 수석 지휘자로 손꼽혔다. 푸르트뱅글러를 깊이 존경하고 있던 첼리비다케는 재판에서 푸르트뱅글러가 나치 협력 혐의를 벗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동분서주했다. 그 2년 뒤인 1947년 푸르트벵글러는 베를린 필에 복귀했다.
당시 베를린 필 단원들은 하루라도 빨리 푸르트뱅글러의 복귀를 바라고 있는 분위기였다. 첼리비다케가 지긋지긋할 정도로 요구하는 높은 연주수준에 맞춰야 했기 때문이다. 첼리비다케는 베를린 필 단원들에게 엄청난 수준의 연습과 정교한 연주 기술을 요구했다. 게다가 만년에 난청으로 고통받고 있던 푸르트뱅글러가 그냥 넘어갔던 부분을 귀가 훨씬 밝은 첼리비다케는 결코 좌시하지 않았다. 그는 오케스트라 구석구석 요소요소에 존재하는 문제점을 짚어냈다. 또 첼리비다케는 자신의 요구대로 움직이지 않는 단원은 오디션을 통해 교체하고 싶어했으며, 이같은 움직임에 불안해하는 단원들도 많았다. 화려한 동작, 제자리 걸음, 기합소리, 신음소리들까지 동원되었던 첼리비다케의 전대미문의 지휘 스타일은 베를린 청중들에게 비판을 받기도 했다.
첼리비다케는 베를린 필 단원들과 자주 충돌했다. 사진은 1946년 베를린 필과 연습 중인 첼리비다케 <출처: Abraham Pisarek at de.wikipedia>
이런 일련의 분위기가 탐탁치 않았던 첼리비다케는 베를린 필의 지휘 횟수를 줄이고 런던에서 객원 지휘활동을 시작했다. 이후 유럽 전역에서 중남미에 이르기까지 객원 지휘 오케스트라의 범위를 확대하고, 점차 베를린 필과 거리를 두기 시작했다. 그리고 푸르트뱅글러가 사경을 헤매며 병상에 누워있는 바로 그 때, 첼리비다케는 베를린 필과 [독일 레퀴엠] 리허설에서 큰 충돌을 일으켰다. 단원들과 갈등은 최고조에 이르게 된다. 그날 이후 38년 뒤 1992년 3월 31일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복귀 콘서트를 가질 때까지 첼리비다케가 베를린 필을 지휘하는 일은 없었다.
그리고 그 이후는 너무나도 유명한 베를린 필의 역사 그대로였다. 1954년 푸르트뱅글러가 서거하자 베를린 필의 상임지휘자는 카라얀으로 결정났다. 첼리비다케는 이탈리아 공영 방송국 RAI(Radiotelevisione Italiana)에 소속된 여러 오케스트라(토리노, 로마, 밀라노 등)과 스웨덴 방송교향악단, 덴마크 국립교향악단 등 유럽의 여러 오케스트라를 전전하며 객원지휘 활동을 하고 있었다. 1971년 그가 남서독일방송교향악단(현 슈투트가르트 방송교향악단) 창립 25주년 기념 콘서트를 지휘한 브루크너 [교향곡 7번] 연주는 화제를 불러 일으켰다 슈투트가르트 방송교향악단 단원들과 관계자들은 첼리비다케의 지휘에 매혹됐다. 첼리비다케는 잘 알려진 것처럼 녹음을 무척 싫어했다. 그러나 이후 약 10년 동안 그가 원하는 만큼 연습하고, 그 대신에 그 연주를 녹음하고 방송하는 것을 첼리비다케가 묵인하는 형태로 지휘자와 악단의 긴밀한 관계는 계속됐다. 1979년부터 첼리비다케는 뮌헨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상임 지휘자로 취임했다. 그 3년 뒤 1982년 그는 슈투트가르트 방송 교향악단을 떠났다. 방송 녹화된 연주가 본인의 뜻과 달리 편집됐다는 이유였다. 이후 만년의 첼리비다케는 뮌헨 시의 예술 감독이 되었다
괴팍한 독설가 지휘자
독설가로 유명한 첼리비다케는 다른 지휘자들을 거침없이 비판했다. 카라얀에 대해서는 “그는 천재가 아니며, 젊은 음악가에게 심각한 독이 될 수 있다는 본보기”라고 했고, 카를로스 클라이버에 대해서는 “그는 음악이란 무엇인지 한 번도 체험한 적이 없었을 것”이라 했다 그런가하면 로린 마젤에 대해서는 “칸트를 읽는 두 살 짜리 어린애”라고 했고 리카르도 무티는 “가장 뛰어난 재능을 가졌지만 교양이 결여된 지휘자”라고 일침을 놓았다 카를 뵘이 뮌헨 필을 객원지휘하려했을 때 첼리비다케는 “고구마 포대, 쌍봉낙타 같이 둔한 지휘자가 모차르트, 베토벤 스페셜리스트라 불리는 것은 어불성설”이라고 독설을 퍼부었다 마침 당시 이 말을 듣고 마음이 상했던 뵘은 연주 계약해지 통보로 간주하고 출연을 취소했다고 한다. 그런데 그런 첼리비다케가 나중에 뵘이 몸이 아파서 지휘할 수 없게 된 런던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대타 지휘를 기꺼이 맡았을 때 ‘알 수 없는 사람’이라는 반응이 나왔다
첼리비다케의 리허설은 모든 소리가 원하는 대로 나올 때까지 철저하게 진행되었다. 협주곡을 제외하고는 모두 암보로 지휘했다. 오페라는 지휘하지 않았다. 1947~1948년 경 푸르트뱅글러와 함께 떠난 베를린 필의 영국 연주 여행을 전후해 첼리비다케는 처음으로 공식적인 레코딩을 제작했다. 베를린 필을 지휘하여 멘델스존의 [바이올린 협주곡], 프로코피예프 [교향곡 1번 ‘고전’] 등을 녹음했으며, 런던 필을 지휘하여 모차르트 [교향곡 25번], 차이코프스키 [교향곡 5번]과 [호두까기인형 모음곡] 등을 영국에서 레코딩했다. 첼리비다케는 이때 자신의 녹음 재생을 듣고 “아무래도 엔지니어가 템포를 만진 것 같다”며 불만을 토로했다.
마이크에 의한 녹음이 한계가 있다고 깨달은 이후 음반 발매를 기피했으며, 소수의 예외를 제외하고는 좀처럼 녹음을 하지 않았다. 첼리비다케가 인정한 유일한 공식 녹음은 유니세프 자선 레코드인 스스로 작곡한 [비밀의 상자](도이치 그라모폰)였다. 만년에는 영상물을 적극적으로 출시해 첼리비다케 기록물에 목마른 애호가들의 갈증을 적셔 주었다. 1996년 첼리비다케의 사후 유족들은 비정규 해적음반이 범람하는 것이 두렵다는 이유로, 미발표 리사이틀 기록을 EMI와 도이치 그라모폰에서 공식 CD로 발매하도록 했다. 정규반으로 발매된 그의 모든 레코딩은 수집 대상이다. 그 중에서도 특히 EMI에서 나온 뮌헨 필과의 브루크너 교향곡집과 DG에서 발매된 슈투트가르트 방송교향악단의 [브루크너 교향곡집], 알투스(Altus)에서 발매된 브루크너 [교향곡 5번]과 [8번] 등은 반드시 들어볼 만하다.
“음악이란 단지 체험일 뿐이다”
첼리비다케는 선불교도였다. 존 케이지와 마찬가지로 그 연주와 해석에도 선불교 사상이 반영되어 있다 첼리비다케는 “음악이란 말로 이야기되는 것이 아니고 단지 체험일 뿐이다”라고 설파했다. 실제 첼리비다케의 연주를 들어보면 곡에 대한 철저한 구조 분석에 의한 구성의 통일이 엿보이며, 그것을 구현하기 위해 때로는 극단적인 템포와 음정의 변화를 느낄 수 있다. 극과 극은 통한다는 말이 있는데, 음반을 기피한 첼리비다케와 음반만을 추구한 글렌 굴드, 이 둘이 추구한 완벽한 음악의 세계는 뫼비우스의 띠처럼 맞닿아 있다
첼리비다케는 자신의 모든 음악적 통찰력은 푸르트뱅글러로부터 배웠다고 했다. 푸르트뱅글러가 인터뷰에서 템포 설정에 대해 질문을 받자 “그것은 소리가 어떻게 영향을 주는가에 달렸다”고 대답한 것을 첼리비다케는 잊지 못한다고 말했다. 그때 첼리비다케는 홀의 음향 등 여러 요소를 무시하고 메트로놈 숫자처럼 원래 정해진 것과 같은 템포 설정은 무의미하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한다. 또한 그는 높은 순도의 하모니와 악기간의 균형 또한 철저하게 추구했다. 그가 연습시키는 오케스트라는 실내악적으로 서로의 음을 듣는 훈련을 반복했다. 만년의 첼리비다케 연주를 보면 템포가 매우 느려졌음을 알 수 있다. 마지막 해인 1996년, 유명한 브루크너 [교향곡 8번] 리스본 실황을 들어보면 러닝타임은 약 105분 정도로, 보통 80분 내외의 해석보다 훨씬 길다. 첼리비다케는 자신이 이해할 수 없는 현대음악은 연주하지 않았다. 이탈리아의 실바노 부조티가 자신의 스코어를 보여주고 “혼돈의 음악”이라 설명했을 때 “그런 애들 같은 생각이 담긴 음악은 연주하고 싶지 않다”고 거부했다. 그는 신 빈악파 이후의 무조음악 은 결코 연주하지 않았다
첼리비다케의 건강이 조금만 더 좋았다면 우리는 1996년에 뮌헨 필을 지휘하는 그를 볼 수 있었을 것이다. 1997년 4월, 그를 대신한 주빈 메타와 내한했던 뮌헨 필의 연주는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다. 그들이 연주한 베토벤 [교향곡 5번]과 차이코프스키 [교향곡 5번]은 지금도 뇌리 한 구석에 충격으로 고스란히 남아있다. 먼지를 털면 반짝반짝 광이 나는 추억이다. 굵직한 관악군을 중심으로 소용돌이친 이들의 연주는 정녕 헤비급이었다. 나는 지금도 굳게 믿고 있다. 그날 예술의 전당에서 첼리비다케의 영혼이 함께 했으리라고.
약력
1945~1952 베를린 필 상임지휘자 대우
1945~1946 베를린 방송교향악단 상임지휘자
1960~1963 덴마크 국립관현악단 수석객원지휘자
1965~1971 스웨덴 방송교향악단 음악감독
1971~1979 슈투트가르트 방송교향악단 음악감독
1974~1975 프랑스 국립관현악단 수석객원지휘자
1979~1996 뮌헨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예술감독
글 류태형 | 전 <객석> 편집장, 음악 칼럼니스트월간 <객석> 편집장 역임, 현재 (재)대원문화재단 사무국장. 주말 저녁 6시~9시 30분 KBS 1FM [FM 음반 가이드]를 진행하고 있다. 거장들의 옛 음반과 생생한 공연의 현장이 반복되는 삶이 마치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 같다고 생각한다.
이미지TOPIC / corbis
글쓴이 : 모은
https://youtu.be/P1y_RqWKfGQ?si=vO2Bd5a_L2eyAmjc
Dvořák: Symphony no. 7 in D minor op.70 (Celibidache, MPO, 198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