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내리는 호남선,남행열차에 흔들리는 차창 너머로~’
가수 김수희의 80년대 히트곡 ‘남행열차’는 요즘도 노래방에서 흔하게 불리는 애창곡이다.
그라운드에서도 ‘남행열차’가 거의 매일 울려퍼진 시절이 있었다. 호랑이 군단 해태가 프로야구를 주름잡던 90년대 초반까지 팬들은 해태의 경기가 벌어지는 전국 구장에서 한 사람이 불어대는 호루라기에 맞춰 이 노래를 불렀다. 기자는 ‘그에게 묻고 싶다’ 10번째 손님으로 프로야구 원년인 82년부터 95년까지 무려 14년 동안 호루라기 하나로 관중들 속의 열정을 밖으로 끄집어낸 최초의 프로야구 응원단장을 찾았다.
임갑교(58)씨를 만난 것은 충무로에 있는 대한극장이었다.
95년이 끝나고 그라운드에서 모습을 감춘 그는 기술공의 전공을 살려 지난해 가을부터 이곳에서 기술 주임으로 일하고 있다. 응원단장에서 영화관 기술 주임으로 변신하다니,‘그에게 묻고 싶다’의 열번째 주인공의 인생도 참 독특했다. 7월의 첫 날 대형 영화 포스터가 잔뜩 걸린 대한극장 정문으로 그는 호루라기 대신 큼직한 무전기를 들고 나타났다. 전라도 사투리 억양으로 반갑게 기자의 이름을 부르며.
●호루라기 아저씨!
82년 4월 구덕구장에서 해태와 롯데와의 경기에 땅달막한 체격의 30대 중반 아저씨가 단상에 올랐다.
응원도구는 목에 걸린 작은 호루라기 하나. 수많은 관중들의 시선이 집중된 단상에서 그는 호루라기 장단에 맞춰 다양한 박수 형태를 만들고 당시 유행하던 트위스트춤과 허슬 춤 로버트 춤 등을 선보이며 엉덩이를 힘껏 흔들어댔다. 이것이 응원단장으로서 임씨의 첫 데뷔전이었다.
“원래는 해태제과에서 근무했는데 야구단을 창단하면서 당시 이상국 홍보 팀장이 저를 응원단장으로 발탁했어요. 해태제과 응원 경연 대회에서 일등을 차지하면서 이름이 알려졌나봅니다. 그 날 버스 10대에 나눠타고 구덕구장으로 갔는데,프로야구가 처음이다 보니 관중들도 제 모습에 얼떨떨해하더군요. 그래도 제게 힘이 된 것은 이 호루라기 하나였습니다. 점점 얼굴이 알려지면서 호루라기 아저씨란 별명을 얻었지요.”
●기술공에서 응원단장으로
어떻게 호루라기 하나로 관중을 사로잡았을까.
80년대 열성적인 야구 팬들은 그의 호루라기 소리를 다시 듣고 싶어할 정도로 호루라기를 잘 불었다고 한다. 임씨는 어릴 적부터 ‘부는 끼’가 있었다. 중·고등학교때 6년간 밴드부에서 나팔을 불었고 공군에 입대해 항공정비일을 배우면서 우연히 기회가 닿아 본격적으로 응원을 배웠다. 해태제과 공무과에 입사할 시절 보일러기사 가스기사 방화관리 냉동관리 등 5개 기술 자격증을 딸 정도로 이 분야에도 소질이 있었다.
그러나 정작 36살부터 50살까지 그가 3·40대 청춘과 열정을 바친 곳은 파견 형식으로 근무하던 그라운드 단상이었다. 김수희의 남행열차가 해태 응원가가 된 것도 임씨의 아이디어다.
“응원용으로 부를 수 있는 노래가 별로 없었어요. 어느날 광주구장에 가니까 몇몇 학생들이 ‘남행열차’를 부르는거예요. 응원가가 필요하겠다 싶어 가사를 적어놓았다가 단상에서 불렀지요.”
기차 박수와 337박수 등도 그가 경기가 끝난 뒤 밤새 개발한 독특한 박수법이었다.
●호루라기에 배인 슬픈 역사
임씨의 호루라기가 마냥 신이 났던 것은 아니었다. 그가 활동했던 82년부터 14년의 세월은 한국 역사에서도 격동기였다. 80년 5·18 광주 민주화 항쟁 직후인데다 87년 6월 민주화 항쟁이 일어났다.
임씨도 최루탄과 지역 감정을 피해갈 순 없었다.
“80년대 대구와 부산구장에 원정을 많이 다녔는데 그 때마다 캔과 병이 날라왔어요. 단상에 떨어진 것들만 주워담았더니 응원 가방이 가득 찰 때도 있었죠. 한 번은 상대팀을 응원하는 팬들에게 맞아서 코피가 터진 적도 있었어요.” 서러운 광주 역사의 한 켠에서 눈물을 흘린 적도 있다.
“당시 광주구장은 최루탄 냄새가 사라지지 않았어요. 야구장에 가는 사람들은 ‘빨갱이’라고 하면서 학생들이 데모도 많이 했지요. 그 땐 호루라기를 불면서 ‘내가 여기서 왜 이런 짓을 하고 있나’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단상위의 감독
덕아웃에 김응룡 감독이 앉아있었다면 응원용 단상 위에는 임씨가 서 있었다.
“처음에는 야구를 몰랐는데,몇 년이 지나고나니 점수가 날 것 같은 분위기기 느껴져요. 그 땐 거기에 맞는 박수 응원을 유도하지요. 하도 오래하니깐 투수들의 볼배합까지도 알겠더라고요.”
선동열 김성한 장채근 등 해태 스타들의 이름은 모두 임씨의 입을 거쳐갔고 해태의 9번 우승과 하락의 역사를 모두 목격한 산 증인이기도 하다. “몇년인가 기억이 가물가물한데 우승이 확정되는 순간 선수들이 김응룡 감독뿐만 아니라 저한테도 헹가래를 쳐주었어요. 보너스도 받고 일본 돔구장 견학도 갔는데,보람있었죠.”
단상 위에서 응원만 한 것은 아니었다.
“단상에 불우이웃돕기,수재민돕기,혈우병어린이 돕기 모금함을 놓고 응원을 했어요.”
●82년 응원복을 기억하십니까.
쉰살의 치어리더는 96년 다시 해태제과로 돌아왔다. 연봉과 퇴직금 문제가 걸려있었고 50살의 나이도 적지 않았다. “경기장에서 멋있게 세상을 마치고 싶었는데,그만둘땐 많이 울었습니다. 관중석에 앉아 구경을 하는 것이 오히려 섭섭했어요.”
걸쭉한 입담으로 지난 두 시대를 쏟아낸 임씨는 기자에게 혹시 82년 응원복을 본 적이 있냐고 물었다.
자신의 이름이 새겨진 촌스러운 치어리더복이 아직도 벽장을 차지하고 있단다.
그의 14년 단상 위의 땀과 열정의 인생을 고스란히 품고서.
“옛것이 좋지요. 영화도 과거의 것을 다시 만드는 것처럼요. 지금 응원은 화려하지만 혼자서 리드하면서 관중 전체와 호흡을 하는 응원문화가 사라진 것이 아쉬워요.”
옛것이 좋다며 그가 손가락으로 가리킨 영화 포스터는 ‘헐크’.
기자가 80년대 초등학교시절 텔레비전을 통해 즐겨보던 ‘두 얼굴의 사나이’의 리메이크작이다.
첫댓글 정말 이분 응원은 신났었는데....그뒤 창규아저씨도 그랬지만요..
기아구단에서~~ 팬서비스차원에서~` 한번 갑교형님~~모시구 응원하면 어떨까? 라는 생각을 아주 가끔씩 했었는데`~ 아~~ 옛날이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