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석 시인과 자야
이루지 못한 사랑이 길상사가 되기까지
서울 성북동 북악산 자락에 들어서면 도심 한복판이라고 믿기 어려울 만큼 고요한 절이 하나 있습니다.
길상사입니다.
나무 사이로 오래된 기와지붕이 보이고, 작은 개울물 소리와 풍경 소리가 들리는 이곳에는 한 시인과 한 여인의 이루지 못한 사랑이 남아 있습니다.
그 시인은 백석이고, 여인은 김영한입니다.
백석이 지어준 이름으로는 자야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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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흥에서 만난 두 사람
1937년 무렵, 백석은 함흥에서 영어 교사로 일하고 있었습니다.
백석은 평안북도 정주 출신으로, 토속적인 우리말과 북방의 정서를 시에 담아낸 젊은 시인이었습니다. 훤칠한 키와 단정한 옷차림, 당시로서는 세련된 감각을 지닌 그는 조선의 모던보이로 불리기도 했습니다. 1936년에는 시집 《사슴》을 펴내며 문단의 주목을 받고 있었습니다.
김영한은 어려운 가정 형편 때문에 어린 나이에 기생이 되었습니다.
진향이라는 이름으로 전통 가무와 문학을 배웠고, 함흥의 한 연회 자리에서 백석을 만났다고 전해집니다.
백석은 김영한에게 자야라는 이름을 지어주었습니다.
자야라는 이름은 중국 당나라 시인 이백의 시에서 가져온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전쟁터에 나간 남편을 기다리는 여인의 마음이 담긴 이름이었습니다. 훗날 두 사람의 운명을 미리 보여주는 듯한 이름이기도 했습니다.
두 사람은 빠르게 가까워졌습니다.
백석은 자야에게 함께 살자고 했고, 자야 역시 백석을 깊이 사랑했습니다. 그러나 당시 사회에서 기생 출신 여성과 양반 집안 남성의 결혼은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특히 백석의 집안에서 두 사람의 관계를 강하게 반대했다고 전해집니다.
백석은 부모의 뜻에 따라 다른 여성과 결혼했지만, 그 결혼생활은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그는 다시 자야를 찾아왔고, 두 사람은 헤어졌다가 다시 만나는 일을 반복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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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주로 함께 가자는 백석
집안의 반대가 계속되자 백석은 자야에게 만주로 떠나자고 했습니다.
아무도 자신들을 모르는 곳으로 가서 함께 살자는 것이었습니다.
백석의 시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를 떠올리게 하는 장면입니다.
가난하지만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눈 내리는 깊은 산골로 떠나 조용히 살고 싶다는 마음이 담긴 작품입니다.
자야는 훗날 자신이 시 속의 나타샤라고 믿었다고 회고했습니다. 다만 나타샤가 실제로 누구였는지는 문학적으로 확정된 사실이라기보다 김영한의 회고를 중심으로 전해지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자야는 백석과 함께 만주로 가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존재 때문에 백석이 가족과 고향을 버리고 가난하게 살아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사랑하지 않아서 떠나지 않은 것이 아니라, 너무 사랑했기에 따라가지 못한 것이었습니다.
결국 백석은 홀로 만주로 떠났습니다.
그때의 이별이 두 사람의 마지막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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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만나지 못한 두 사람
해방과 분단, 한국전쟁이 이어지면서 백석은 북한에 남게 되었습니다.
서울에 있던 자야는 백석의 소식을 제대로 알 수 없었습니다. 편지도 보낼 수 없었고, 생사조차 확인하기 어려웠습니다.
백석은 북에서 번역과 문학 활동을 이어갔지만, 이후 정치적 압박을 받으며 문단에서 멀어졌습니다. 그는 1996년 북한에서 세상을 떠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자야는 평생 결혼하지 않았습니다.
두 사람이 실제로 함께한 시간은 몇 년에 불과했지만, 자야의 마음속에서 백석은 평생 떠나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매년 백석의 생일이 되면 음식을 먹지 않고 하루를 보냈다고 전해집니다. 백석에 관한 책을 쓰고, 그의 작품을 세상에 알리는 일에도 힘을 보탰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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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북동 대원각의 주인이 되다
백석과 헤어진 뒤 김영한은 사업가로 성공했습니다.
그녀가 운영한 곳이 성북동의 대원각이었습니다.
대원각은 삼청각, 청운각과 함께 서울의 대표적인 고급 요정으로 알려졌습니다. 정·재계 인사와 유명 인사들이 드나들던 곳으로, 수천 평의 숲과 수십 채의 한옥을 갖춘 거대한 공간이었습니다.
그러나 김영한은 화려한 대원각의 주인이 된 뒤에도 마음 한편의 외로움을 내려놓지 못했습니다.
재산은 커졌지만, 젊은 날 눈 내리는 함흥에서 만났던 시인은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그녀에게 부와 성공은 사랑을 대신하지 못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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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정 스님과의 만남
김영한은 법정 스님의 책 《무소유》를 읽고 깊은 감명을 받았습니다.
그녀는 자신이 소유한 대원각을 절로 만들어달라며 법정 스님에게 기증하겠다는 뜻을 밝혔습니다.
하지만 법정 스님은 처음에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김영한은 오랜 시간 뜻을 굽히지 않았고, 결국 대원각의 넓은 땅과 건물들을 불교계에 시주했습니다.
대원각은 1995년 사찰로 등록되었고, 1997년 길상사라는 이름으로 문을 열었습니다. 김영한은 법정 스님으로부터 길상화라는 법명을 받았습니다.
길상은 좋은 인연, 복되고 아름다운 징조라는 뜻을 품고 있습니다.
사람들의 술잔과 웃음소리가 가득했던 요정이 목탁 소리와 기도 소리가 흐르는 절로 바뀐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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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억 원도 백석의 시 한 줄만 못하다
김영한이 기증한 대원각의 가치는 당시에도 엄청난 규모였습니다.
사람들이 그 많은 재산이 아깝지 않으냐고 물었을 때, 그녀는 이런 뜻의 말을 남긴 것으로 널리 전해집니다.
천억 원의 재산도
백석의 시 한 줄만 못합니다.
이 말은 자야가 백석을 어떻게 사랑했는지를 가장 잘 보여줍니다.
그녀가 사랑한 것은 유명한 시인의 명성이나 외모만이 아니었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의 밥상과 고향의 냄새, 눈 내리는 북방의 마을을 우리말로 따뜻하게 품어낸 백석의 영혼을 사랑한 것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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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상사에 남은 자야의 마지막 소원
김영한은 1999년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녀는 죽은 뒤 자신의 유골을 길상사에 뿌려 달라고 했습니다.
길상사 경내에는 길상화를 기리는 공덕비가 있습니다. 화려한 대원각의 주인이었던 여인은 마지막에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은 채, 자신이 내놓은 숲과 바람 속으로 돌아갔습니다.
백석과 함께 살고 싶었던 산골집은 끝내 만들지 못했지만, 그녀는 수많은 사람이 쉬어갈 수 있는 마음의 집을 남겼습니다.
그 집이 길상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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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이 절이 된 자리
백석과 자야의 사랑은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두 사람은 결혼하지 못했고, 분단 이후에는 다시 만나지도 못했습니다.
그러나 모든 사랑이 함께 사는 것으로만 완성되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어떤 사랑은 한 편의 시가 되고,
어떤 사랑은 평생의 기다림이 되며,
어떤 사랑은 숲과 절과 종소리가 되어
오래도록 사람들의 마음을 위로합니다.
백석은 자야에게 눈 내리는 산골로 함께 가자고 했습니다.
자야는 그 길을 따라가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긴 세월이 흐른 뒤, 그녀는 성북동 산자락에 누구나 들어와 쉬어갈 수 있는 고요한 공간을 남겼습니다.
길상사를 걷다 보면 문득 이런 생각이 듭니다.
백석이 꿈꾸었던 눈 깊은 산골의 작은 집이
어쩌면 이곳에 조금 늦게 세워진 것은 아닐까.
두 사람이 함께 살지는 못했지만,
백석의 시와 자야의 사랑은
길상사라는 이름 아래 지금도 함께 머물고 있습니다.
첫댓글 백석의 대표작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는 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현대시 가운데 하나입니다.
시의 첫머리는 다음과 같습니다.
>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
이 시는 단순한 연애시가 아닙니다.
가난하고 외로운 화자가 현실에서는 이루기 어려운 사랑을 품고, 사랑하는 사람과 세상의 시선을 피해 눈 내리는 산골로 떠나 조용히 살고 싶다는 꿈을 그린 작품입니다.
작품 해설
가난한 내가
경제적인 가난뿐 아니라 시대적 현실과 외로움까지 담고 있습니다.
아름다운 나타샤
현실의 특정 인물이라기보다 이상적인 사랑의 상징으로 읽히기도 합니다.
자야(김영한)가 자신이 시 속의 나타샤라고 회고했지만, 이를 확정할 수 있는 문학적 증거는 없습니다.
오늘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
눈은 세상의 번잡함을 덮고 새로운 세상을 만드는 상징입니다.
두 사람이 함께할 수 있는 순수한 공간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흰 당나귀
소박하고 순수한 삶,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과 떠나는 희망의 동반자를 상징합니다.
이 시가 지금도 사랑받는 이유
백석은 화려한 사랑을 노래하지 않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