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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독서
▥ 열왕기 상권의 말씀 17,10-16
그 무렵 엘리야 예언자는
10 일어나 사렙타로 갔다.
그가 성읍에 들어서는데 마침 한 과부가 땔감을 줍고 있었다.
엘리야가 그 여자를 부르고는, “마실 물 한 그릇 좀 떠다 주시오.” 하고 청하였다.
11 그 여자가 물을 뜨러 가는데 엘리야가 다시 불러서 말하였다.
“빵도 한 조각 들고 오면 좋겠소.”
12 여자가 대답하였다.
“주 어르신의 하느님께서 살아 계시는 한, 구운 빵이라고는 한 조각도 없습니다.
다만 단지에 밀가루 한 줌과 병에 기름이 조금 있을 뿐입니다.
저는 지금 땔감을 두어 개 주워다가 음식을 만들어, 제 아들과 함께 그것이나 먹고 죽을 작정입니다.”
13 엘리야가 과부에게 말하였다.
“두려워하지 말고 가서 당신 말대로 음식을 만드시오.
그러나 먼저 나를 위해 작은 빵 과자 하나를 만들어 내오고, 그런 다음 당신과 당신 아들을 위하여 음식을 만드시오.
14 주 이스라엘의 하느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소.
‘이 주님이 땅에 비를 다시 내리는 날까지, 밀가루 단지는 비지 않고 기름병은 마르지 않을 것이다.’”
15 그러자 그 여인은 가서 엘리야의 말대로 하였다.
과연 그 여자와 엘리야와 그 여자의 집안은 오랫동안 먹을 것이 있었다.
16 주님께서 엘리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대로, 단지에는 밀가루가 떨어지지 않고 병에는 기름이 마르지 않았다.
제2독서
▥ 히브리서의 말씀 9,24-28
24 그리스도께서는, 참성소의 모조품에 지나지 않는 곳에, 곧 사람 손으로 만든 성소에 들어가지 않으셨습니다.
이제 우리를 위하여 하느님 앞에 나타나시려고 바로 하늘에 들어가신 것입니다.
25 대사제가 해마다 다른 생물의 피를 가지고 성소에 들어가듯이, 당신 자신을 여러 번 바치시려고 들어가신 것이 아닙니다.
26 만일 그렇다면 세상 창조 때부터 여러 번 고난을 받으셔야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그분께서는 마지막 시대에 당신 자신을 제물로 바쳐 죄를 없애시려고 단 한 번 나타나셨습니다.
27 사람은 단 한 번 죽게 마련이고 그 뒤에 심판이 이어지듯이,
28 그리스도께서도 많은 사람의 죄를 짊어지시려고 단 한 번 당신 자신을 바치셨습니다.
그리고 당신을 고대하는 이들을 구원하시려고 죄와는 상관없이 두 번째로 나타나실 것입니다.
복음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 12,38-44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군중을
38 가르치시면서 이렇게 이르셨다.
“율법 학자들을 조심하여라.
그들은 긴 겉옷을 입고 나다니며 장터에서 인사받기를 즐기고,
39 회당에서는 높은 자리를, 잔치 때에는 윗자리를 즐긴다.
40 그들은 과부들의 가산을 등쳐 먹으면서 남에게 보이려고 기도는 길게 한다.
이러한 자들은 더 엄중히 단죄를 받을 것이다.”
41 예수님께서 헌금함 맞은쪽에 앉으시어, 사람들이 헌금함에 돈을 넣는 모습을 보고 계셨다.
많은 부자들이 큰돈을 넣었다.
42 그런데 가난한 과부 한 사람이 와서 렙톤 두 닢을 넣었다.
그것은 콰드란스 한 닢인 셈이다.
43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가까이 불러 이르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저 가난한 과부가 헌금함에 돈을 넣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이 넣었다.
44 저들은 모두 풍족한 데에서 얼마씩 넣었지만, 저 과부는 궁핍한 가운데에서 가진 것을, 곧 생활비를 모두 다 넣었기 때문이다.”
♠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의 묵상글
<'산 제물'>
가을의 끝자락입니다.
이해인 수녀님의 <이 가을엔 따뜻한 눈물을 배우게 하소서>라는 시가 떠오릅니다
이 가을에는
따뜻한 눈물을 배우게 하소서.
내 욕심으로 흘리는 눈물이 아니라
진정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해
소리 없이 함께 울어줄 수 있는
맑고 따뜻한 눈물을 배우게 하소서.
이 가을에는
빈 가슴을 소유하게 하소서.
집착과 구속이라는 돌덩이로
우리들 여린 가슴을 짓눌러
별처럼 많은 시간들을 힘들어 하며
고통과 번민속에 지내지 않도록
빈 가슴을 소유하게 하소서.
이 가을에는
풋풋한 그리움 하나 품게 하소서.
우리들 매 순간 살아감이
때로는 지치고 힘들어
누군가의 어깨가 절실히 필요할 때
보이지 않는 따스함으로 다가와
어깨를 감싸 안아 줄수 있는
풋풋한 그리움하나 품게하소서.
이 가을에는
말 없는 사랑을 하게 하소서.
'사랑'이라는 말이 범람하지 않아도
서로의 눈빛 만으로도
간절한 사랑을 알아주고 보듬어주며
부족함조차도 메꾸어 줄 수 있는
겸손하고도 말없는 사랑을 하게 하소서.
이 가을에는 정녕 넉넉하게 비워지고
따뜻해지는 작은 가슴 하나 가득
환한 미소로 이름없는 사랑이 되어서라도
그대를 사랑하게 하소서.
평신도 주일인 오늘 말씀전례는 ‘참된 봉헌’의 의미를 일깨워줍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예언자 엘리야는 이방인 시돈 여인 이세벨을 부인으로 맞이하여 우상숭배를 전념시켰던 북이스라엘의 아합 왕에게 예고한 3년간의 가뭄이 진행될 때, 시돈 지방의 사렙다의 한 과부 집에 들어가 물 한모금과 먹을 것을 청합니다.
과부는 자신과 아들이 마지막으로 먹을 수 있는 한 끼니 분량의 밀가루와 기름 밖에 없었는데도, 음식을 청한 엘리야의 요청을 따랐으며, 엘리야의 말대로 밀가루와 기름이 떨어지지 않는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오늘 복음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렙톤 두 닢을 봉헌한 가난한 과부의 헌금’을 높이 칭송하십니다.
“저들은 모두 풍족한 데에서 얼마씩 넣었지만, 저 과부는 궁핍한 가운데에서 가진 것을, 곧 생활비를 모두 다 넣었기 때문이다.”
(마르 12,44)
그러니 '렙톤 두 닢'은 비록 액수로는 작지만, ‘자신의 전부를 담은 사랑의 크기’인 ‘내면적 헌신의 외적인 표시’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이 가난한 과부는 제1독서의 사렙다의 과부가 마지막 음식마저 내어주었던 것처럼, 자신이 가진 ‘생활비 모두’를 내어놓았습니다.
단지 다른 점은, 제1독서의 사렙다의 과부는 엘리야의 요청에 따르는 믿음을 보여주었고, 복음의 가난한 과부는 자발적으로 자신의 전부를 내놓았습니다.
어쩌면, 제1독서의 사렙다 과부는 타인을 위하여 내놓았다면, 복음의 과부는 자신을 위한 감사헌금이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쩌면, ‘사렙다 과부’에게는 나눔의 의미가, ‘가난한 과부’는 속죄의 의미가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결국 이 둘 다 모두, 마치 나중에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당신 자신을 통째로 내어놓으셨듯이, 자신의 전부를 봉헌했습니다.
오늘 말씀전례는 ‘교회를 위하여 헌금을 많이 하여야 한다’는 돈 모금을 위해 제시하고 있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그렇다면 ‘참된 봉헌’이란 무엇일까?
오늘 예수님께서는 ‘봉헌의 참뜻’을 일깨워 주십니다.
곧 '참된 봉헌'은 타인을 위해 자신을 내어놓는 ‘사랑’에 있음을 말해줍니다.
그것은 봉헌예물의 ‘액수’에 있는 것이 아니라 ‘지향의 순수함’에 걸려 있음을 말해줍니다.
곧 이 가난한 과부들의 마음은 헌금의 액수에 있는 것이 아니라 ‘타인을 위하는 마음’과 ‘그 진실성(순수성)’에 있습니다.
‘자신의 전부를 내어놓는 마음의 진실성’ 말입니다.
사도 바오로는 그리스도인들이 자신의 몸을 하느님께 제물로 바칠 것을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자신을 하느님께서 기쁘게 받아주실 거룩한 산 제물로 바치십시오.
그것이 여러분이 드릴 진정한 예배입니다.”
(로마 12,1)
사실 우리는 먼저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은 우리의 몸도, 재물도, 마음도, 모두 하느님께로부터 받은 것일 뿐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할 일입니다.
그러니 우리 자신 전부를 봉헌 제물로 드리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오늘 하루도 '산 제물로 드리는 진정한 예배'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런데 오늘 제2독서는 더 나아가서, '산 제물'의 신학적 깊은 의미를 일깨워줍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당신 자신을 제물로 내어놓으신 예수님의 대사제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곧 예수님께서는 대사제의 직무로서 당신 자신을 다른 이들을 위한 사랑의 속죄 제물, 곧 다른 이들의 죄를 짊어지시고 제물로 봉헌하십니다.
그리고 그 사랑은 ‘단 한 번’으로 온전하고 완성된 속죄 예식이 됩니다.
오늘 우리의 삶이 바로 이러한 '산 제물'로 바치는 진정한 예배, ‘살아있는 진정한 사랑의 예배’가 될 수 있기를 바래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과부는 궁핍한 가운데에서 가진 것을 다 넣었기 때문이다.”
(마르 12,44)
주님!
제 마음의 지향을 깨끗하게 하소서.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사랑의 마음으로 하게 하소서.
전부를 내어놓은 가난한 과부처럼, 목숨을 내어놓은 당신처럼, 산 제물이 되게 하소서.
오직 당신이 저의 전부이오니, 전부를 내어주게 하소서.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의 묵상글
<중시, 경시, 무시 가운데서 나는?>
"저 가난한 과부가 헌금함에 돈을 넣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이 넣었다.
저들은 모두 풍족한 데에서 얼마씩 넣었지만, 저 과부는 궁핍한 가운데에서 가진 것을, 곧 생활비를 모두 다 넣었기 때문이다."
(마르 12,43ㄷ-44)
오늘 연중 제32주일의 첫째 독서와 복음의 공통점은 가난한 과부의 봉헌입니다.
그러니까 오늘 복음에서 가난한 과부와 비교되는 부자는 주인공이 아닙니다.
부자가 주인공이 아니라면 오늘 연중 제32주일의 주인공은 과부란 말인가요?
부자보다는 과부가 주인공인 것은 맞습니다.
세상에서는 부자나 한다하는 사람이 주인공이지만, 오늘 복음에서는 그리고 주님에게는 부자보다 과부가 주인공입니다.
그렇습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부자보다 과부가 주인공인 것이 복음입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을 보면 주님의 모습을 이렇게 소개합니다.
'예수님께서 헌금 함 맞은쪽에 앉으시어, 사람들이 헌금함에 돈을 넣는 모습을 보고 계셨다.'
(마르 12,41ㄱ)
헌금하는 것을 보고 계시는 주님은 누가 더 많이 내나 보고 계시는 것이 아닙니다.
많이 내는 사람을 반기고 사랑하고 중시하는 눈으로 보고 계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 반대로, 누가 더 겸손하게 그리고 사랑과 정성으로 봉헌하는지 보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오늘의 최고 주인공은 보고 계시는 주님이시고, 과부를 중시하시고, 과부의 얼마 안 되지만 전부를 봉헌하는 그 봉헌을 높이 치하하시는 주님이십니다.
그리고 이런 치하를 통하여 주님께서는 우리가 지녀야 할 시각을 가르쳐 주시는데, 그런데 그것은 우리가 개인적으로나 공동체적으로 여전히 비복음적인 시각, 곧 세속적 시각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겠지요.
사실 그래서는 안 되지만 주님의 공동체라고 하는 데에서도 주류와 비주류가 있고, 주류에 속한 사람과 비주류에 속한 사람이 있으며, 주류에 의해 비주류는 경시나 무시를 당하는 일이 빈번합니다.
그렇습니다.
세속적인 시각은 주류가 비주류를 경시하거나 무시합니다.
경시와 무시는 하지 않더라도 연민의 눈으로 보곤 합니다.
제가 저를 봐도 일생 관구장이나 원장을 많이 하였으니 주류적인 삶을 살아왔다고 할 수 있는데, 의도하지 않았어도 주류적인 시각으로 비주류를 보고 판단하였으며, 경시와 무시는 하지 않았더라도 연민의 눈으로 보곤 했지요.
그런데 연민의 눈은 경시와 무시보다는 낫지만, 미천하고 비천한 이를 중시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복음에서는 미천한 이들이 늘 가운데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어린이 하나를 가운데에 세우시고, 손이 오그라든 사람을 가운데에 세우셨으며, 그들 가운데 계셨고 늘 그들과 함께 계셨습니다.
그리고 미천한 이를 가운데 세우시고, 그들 가운데 계셨을 뿐 아니라 더 나아가 미천한 이들을 늘 중시하고 높이 올리셨습니다.
이런 주님을 찬미하는 대표적인 분이 마리아십니다.
마리아 찬가는 이렇게 노래하지요.
“내 영혼이 주님을 찬송하니,
그분께서 당신 종의 비천함을 굽어보셨고
내게 큰일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분께선 비천한 이들을 들어 높이셨고
주린 이들을 좋은 것으로 배 불리셨습니다.”
(루카 1,46-50 참고)
미천한 이를 연민의 눈으로 굽어보실 뿐 아니라 들어 높이시는 주님임을 찬미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과부에게서도 배우고 주님께도 배워야 합니다.
과부에게서는 미소할지라도 온 사랑과 정성으로 봉헌하는 것을 배우고, 주님께는 미천한 이를 경시나 무시하지 않고 중시하는 것을 오늘 배워야겠습니다.
- 작은형제회
♠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의 묵상글
<계산법을 달리하라>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우리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은 언제나 변함이 없습니다.
어제도 오늘도 그리고 내일도 우리를 사랑하시고 또 지켜주십니다.
그러나 하느님에 대한 우리의 사랑은 늘 불안하고 또 부족합니다.
이 시간 하느님께서 사랑의 마음을 키워주시고 더 많이 헌신할 수 있는 은총을 내려주시길 간구합니다.
그리고 그에 대한 응답을 기쁨으로 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프란치스코 교황께서는 "교회는 하느님을 섬기는 곳이지 돈을 벌기 위한 장소는 아니다.", "지금 교회에 하느님을 섬기기보다 돈의 노예가 된 사람이 있다. 성직자들이 돈에 얽매인 것을 보면 매우 슬프다."고 하셨습니다.
이 시간 물질에 대해서 좀 더 초연할 수 있기를 기도했으면 좋겠습니다.
오늘 복음은 과부의 헌금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예수님께서 헌금함에 돈을 넣는 것을 보고 계셨는데, 마침 부자와 가난한 과부의 대조적인 모습을 보았습니다.
부자들은 여럿이 와서 큰돈을 넣었는데 가난한 과부 한 사람은 렙톤 두 닢을 넣었습니다.
렙톤 두 닢은 오늘날 200원 정도 되는 아주 적은 돈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큰돈을 넣은 부자들을 제쳐두고 가난한 과부를 칭찬하셨습니다.
“나는 분명히 말한다.
저 가난한 과부가 헌금함에 돈을 넣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이 넣었다.
저들은 풍족한 데에서 얼마씩 넣었지만, 저 과부는 궁핍한 가운데에서 가진 것을, 곧 생활비를 모두 넣었기 때문이다.”
(마르 12,44)
부자들은 가진 것의 ‘일부’를 내었고, 가난한 과부는 있는 것 ‘전부’를 바쳤습니다.
‘일부’는 그 액수가 얼마든 ‘전부’보다 결코 많을 수 없습니다.
사람이 아무리 가졌다 해도 소유물이 그것을 소유한 사람보다 크지는 못합니다.
그런데 가난한 과부는 렙톤 두 닢과 함께 자기 자신을 바친 것입니다.
그러니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은 돈을 바친 것입니다.
우리는 헌금을 할 때 ‘각자 자기 분수대로 하면 되지’ 하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제 분수나 여분의 문제가 아닙니다.
모든 것은 하느님의 것입니다.
그러므로 마땅히 하느님께 바쳐져야 하고 하느님의 뜻에 따라 써야 합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것을 잠시 관리할 뿐입니다.
관리자이지 소유자가 아닙니다.
계산법을 달리하면 값이 달라집니다.
어떤 기업인이, 대통령이, 자기 재산을 사회에 환원한다고 대대적으로 홍보하고 재단을 설립했는데, 그 재단의 돈을 자기의 미래를 준비하는 데 사용하며 자기 마음대로 좌지우지할 수 있도록 해놨습니다.
겉모양은 환원이지만 속을 보면 재산 축적입니다.
세계 부자 워렌 버핏은 재산(440억 달러)의 99%를 기부하기로 약속하였는데, 자기 부인이 운영하는 자선재단에 기금을 기부하지 않고 세계 부자 2위인 빌게이츠재단에 거금을 기부했습니다.
자기가 운영하는 재단, 부인의 재단보다 가슴이 따뜻하고 더 잘 운영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진정한 부자가 누구인지를 알게 합니다.
과부의 헌금에 대한 말씀은 가족의 생계가 어떻게 되든 상관없이 재산을 다 팔아 성당이나 교회에 바치는 것이 최고라는 뜻으로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을 전적으로 신뢰하고 그분께 모든 것을 바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재산이나 시간, 근심 걱정, 내면의 상처, 궁극적으로 자기 자신까지도 봉헌할 각오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하느님의 영광을 위한 헌신을 뜻합니다.
하느님은 언제나 우리 삶의 첫 자리를 차지하셔야 합니다.
성경을 보면 사렙다 마을의 과부는 극심한 가뭄으로 고생하다가 마지막 남은 음식으로 아들과 함께 그 음식을 먹고 죽을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어렵고 고통스러운 처지에서 하느님의 사람 엘리야를 만났습니다.
그러고는 생명과도 같은 마지막 음식을 자기들이 먹지 않고 그에게 바칩니다.
그는 그가 누구인지도 모르고 대접했는데, 그로 인해 그 집 단지에는 밀가루가 떨어지지 않고 병에는 기름이 마르지 않았습니다(1열왕 7,16).
그는 그야말로 나그네를 대접하다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하느님의 천사를 대접하게 되었고, 그로부터 넘치는 축복을 얻게 되었습니다.
만약 이 과부가 자기가 살아남기 위해 하느님을 믿지 않고 음식만을 의지했다면 아마도 한 끼의 음식을 먹고 굶어 죽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렙다 마을의 과부는 배고픔과 굶주림 속에서도 하느님의 사람 엘리야 예언자에게 사랑을 베풀어 죽음의 위기에서 살아날 수 있었습니다.
결국 사렙다의 과부는 자기 자신을 다 바침으로써 생명을 얻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우리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느님께 바치는 것은 반드시 하느님께서 넘치도록 채워주십니다.
“너희는 십일조를 모두 창고에 들여놓아, 조금도 덜지 말고 성전 곳간에 가져다 넣어 내 집에 양식이 넉넉하게 하여라.
그렇게 바치고 나서 내가 하늘 창고의 문을 열어 너희에게 복을 넘치도록 쏟아붓지 않나 보아라.
만군의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말라기 3장10)
반드시 갚아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이 있는 사람은 그대로 행해야 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 행함을 통해서 약속을 지키시는 하느님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어떤 경우에도 감사함을 잊지 않고 살아가는 은혜가 함께 하길 기도합니다.
사도행전에는 '믿는 사람들은 모두 함께 지내며 그들의 모든 것을 공동 소유로 내어놓고 재산과 물건을 팔아서 모든 사람에게 필요한 만큼 나누어 주었다. 그리고 한마음이 되어 열심히 성전에 모였으며 집집마다 돌아가며 같이 빵을 나누고 순수한 마음으로 기쁘게 음식을 함께 먹으며 하느님을 찬양하였다. 이것을 보고 모든 사람이 그들을 우러러보게 되었다. 주님께서는 구원받을 사람을 날마다 늘려 주셔서 신도의 모임이 커갔다.'(사도 2,44- 47)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내 것을 내놓음으로써 하느님을 찬양하고 구원받을 사람이 늘어갔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은 하느님의 것입니다.
우리는 하느님께서 맡겨주신 것을 이 세상에서 잠시 관리할 뿐입니다.
생각해 보면, 하느님께서는 알몸으로 태어난 우리에게 먹을 것도 입을 것도 다 주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가진 가장 좋은 몫을 하느님께 바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사실 십일조라는 것은 물질에 국한된 것이 아닙니다.
하루 24시간 중에 하느님과 함께 하는 시간이 얼마나 되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묵상하며 기도하는 시간, 말씀을 실천하는 시간을 말입니다.
또한 공간도 살펴보십시오.
우리 집이 넓은데 주님과의 만남을 위한 공간을 특별히 배려하고 있는지요?
그저 십자고상을 걸어두고 성모님을 모셔놓는 것으로 만족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하느님의 영광을 위한 시간과 공간, 물질, 하느님께서 주신 탈랜트를 봉헌하는 데 결코 인색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이번 한 주간도 하느님께서 흔들어 넘치도록 주신다는 약속을 믿는 가운데 행복하시길 빕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내덕동 주교좌 성당
♠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의 묵상글
<세상 안에서도 충분히 거룩하게 살 수 있습니다>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크게 착각하고 있는 것이 한 가지 있습니다.
교계 제도 안에 성직자·수도자들은 평신도들보다 훨씬 더 하느님 가까이 있고, 평신도들보다 훨씬 거룩한 삶을 살아가고 있다는 착각입니다.
교회나 수도회, 수녀회는 거룩한 곳이고, 결혼생활이 이루어지는 가정이나 세상은 속된 것으로 여기는 착각입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이런 그릇된 생각을 완전히 새롭게 혁신한 은총의 사건이었습니다.
교회 안에서 교황님이나 주교님들은 1중대, 사제나 수도자들은 2중대, 평신도들은 3중대가 아님을 공의회는 명확하게 강조했습니다.
“평신도들은 교회의 주체이자 교회의 주인공입니다.
교회의 위계 제도, 다시 말해서 주교직, 사제직이 하느님의 백성인 평신도 위에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존경하는 성 요한 23세 교황님께서는 평신도들 역시 성화의 길로 불림받았음을 명백히 강조하셨습니다.
“평신도들은 세상 안에서 빛과 소금이 되어야 합니다.
평신도들은 세상 안에서 거룩함을 지향하는 신앙생활을 해나가야 합니다.
성화(聖化)된 삶을 교회 밖 세상 안에서 실천하는 것이 평신도에게 주어진 소명입니다.”
훌륭한 평신도들을 만나면서 저는 늘 확신합니다.
신분이 절대로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진흙탕 같은 세상 한가운데서 살아가면서도, 한 송이 청초한 연꽃처럼 살아가시는 분들도 많이 존재한다는 것을.
끝도 없는 고통의 세월 속에서도, 언제나 거룩함을 갈망하며,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는 평신도들은 이미 성화의 길로 접어들었다는 것을.
오늘 평신도 주일을 맞아 꼭 기억하면 좋겠습니다.
세상 안에서도 충분히 거룩하게 살 수 있다는 것을.
평신도들께서도 간절히 열망한다면, 거룩한 갈망을 마음에 품고 살아가신다면, 세상 안에서 충분히 봉헌생활을 해나가실 수 있다는 것을.
특별히 평신도들께서는 매일 수행하고 계시는 작은 사랑의 실천을 통해, 저희 사제나 수도자들이 수행하는 직무 못지 않은 성직을 수행하실 수 있습니다.
평신도들께서 매일 행하고 계시는 가까운 사람들 가족들을 향한 봉사의 현장에서, 짜증내면서 억지로 하시는 것이 아니라, 최대한 기쁜 얼굴로 봉사하실 때, 여러분들은 이미 성화의 길을 걷고 계시는 것입니다.
‘나를 찾아오는 이웃들 한 명 한 명이 다 변장하고 찾아오시는 예수님이다.’ 생각하고 그들을 대한다면, 여러분들은 그 어떤 위대한 주교님이나 수도자들이 수행하는 직무보다도 훨씬 고귀한 성직을 수행하게 되는 것입니다.
알쏭달쏭하면서도 참 진리의 말씀이 하나 있습니다.
“스님이 술집에 들어가면 술집이 절간이 되고, 술꾼이 절간에 들어오면 절간이 술집이 됩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평신도들께서도 술집에 들어가시면 그 술집을 주님의 성전으로 변화시키고자 하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여러분들 발길 닿은 곳마다 주님의 성전으로 변화시켜나가시길 바랍니다.
- 살레시오회
♠ 송영진 모세 신부님의 묵상글
<중요한 것은 ‘사랑’과 ‘정성’입니다.>
1)
율법학자들에 관한 예수님 말씀을 가난한 과부에 관한 말씀에 연결해서 생각하면, ‘과부들의 가산을 등쳐먹은’ 그 율법학자들이 곧 ‘풍족한 데에서 얼마씩만 바친’ 부자들일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들은 남의 것을 빼앗아서 그 가운데 일부를 하느님께 바친 자들이 되는 셈인데, 남의 것을 빼앗는 것도 죄이고, 그것을 하느님께 바치는 것은 ‘더 큰 죄’입니다.
‘선한 것’을 바쳐야만 봉헌입니다.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는 ‘악한 것’을 바치는 것은 봉헌이 아니고, 하느님을 모독하는 죄를 짓는 일이 될 뿐입니다.
2)
과부들의 가산을 등쳐먹는다는 말씀에서, 야고보서에 있는 다음 말씀이 연상됩니다.
"자 이제, 부자들이여!
그대들에게 닥쳐오는 재난을 생각하며 소리 높여 우십시오.
그대들의 재물은 썩었고 그대들의 옷은 좀먹었습니다.
그대들의 금과 은은 녹슬었으며, 그 녹이 그대들을 고발하는 증거가 되고 불처럼 그대들의 살을 삼켜버릴 것입니다.
그대들은 이 마지막 때에도 재물을 쌓기만 하였습니다.
보십시오, 그대들의 밭에서 곡식을 벤 일꾼들에게 주지 않고 가로챈 품삯이 소리를 지르고 있습니다.
곡식을 거두어들인 일꾼들의 아우성이 만군의 주님 귀에 들어갔습니다.
그대들은 이 세상에서 사치와 쾌락을 누렸고, 살육의 날에도 마음을 기름지게 하였습니다."
(야고 5,1-5)
과부들의 가산을 등쳐먹고, 일꾼들에게 품삯을 주지 않고가로채고, 그렇게 해서 부자가 되었다면, 부유함 자체가 죄입니다.
사람들 가운데에는 ‘부자로 사는 것 자체가 죄는 아니다.’라고 말하는 이들이 더러 있는데, 그런 말을 하기 전에, 어떤 방법으로 재물을 모아서 부자가 되었는지를 먼저 생각해야 합니다.
3)
이야기에 나오는 과부는 특정 개인만은 아닐 것이고, 율법학자들이 등쳐먹은 ‘과부들’ 가운데 한 사람일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 과부를 칭찬하신 것은, 가진 것을 다 바친 그 ‘비율’ 때문이 아니라, ‘온 마음’을 바쳤기 때문입니다.
만일에 ‘비율’만 중요하게 생각한다면, 누구든지 가진 것을 다 바치라는 단순한 가르침으로 오해하게 됩니다.
만일에, 나쁜 방법으로 부자가 된 자들이 회개하지는 않고, 이웃 사랑을 실천하지도 않고, 가지고 있는 것을 다 바치기만 하면, 그것만으로 ‘좋은 사람’이라고 칭찬할 수 있을까?
이야기에 나오는 가난한 과부는 하느님을 참으로 사랑하고, 하느님 뜻에 합당하게 살아가는 신앙인이었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칭찬하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옳습니다.
"너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마르 12,30)
가난한 과부가 바친 동전 두 닢은 마음과 목숨과 정신과 힘을 다하여 하느님을 사랑하는 그의 마음을 나타냅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그 마음과 사랑을 칭찬하신 것입니다.
4)
바오로 사도는 "내가 모든 재산을 나누어 주고 내 몸까지 자랑스레 넘겨준다 하여도 나에게 사랑이 없으면 나에게는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1코린 13,3) 라고 말합니다.
사랑이 없으면 모든 것이 다 ‘아무것도 아닌 것’입니다.
따라서 ‘사랑’에 초점을 맞추면, 부유하든지 가난하든지, 가진 것 가운데 일부만 바치든지 전부 다 바치든지 간에, 그런 것들은 중요한 것이 아닌 것이 됩니다.
중요한 것은 ‘온 마음’을 다하는 ‘사랑’과 ‘정성’입니다.
사실 부유하든지 가난하든지 간에 가지고 있는 생활비를 모두 바치는 것은 누구에게나 현실적으로 몹시 어려운 일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열의만 있으면 형편에 맞게 바치는 것은 모두 기꺼이 받아들여지고, 형편에 맞지 않는 것은 요구되지 않습니다."(2코린 8,12) 라고 말합니다.
이 말은 각자 형편대로 바치라는 뜻입니다.
또 가지고 있는 생활비를 모두 바치는 것은 모든 사람이 반드시 지켜야 할 계명은 아니라는 것을 나타내기도 합니다.
5)
사도행전 5장의 ‘하나니아스와 사피라’ 부부는 전 재산을 봉헌했다는 칭찬을 듣고 싶어 하면서도 재산을 다 바치고 싶은 마음은 없어서 일부만 바쳤고, 그러면서 전부 다 바치는 것이라고 거짓말을 했습니다(사도 5,1-2).
그때 베드로 사도는 그들이 전부 다 바치지 않은 것을 꾸짖은 것이 아니라, 하느님을 속이려고 한 것을 꾸짖었습니다(사도 5,3-4).
- 전주교구 상지원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의 묵상글
<봉헌의 여정 - 회개와 주 그리스도 예수님 중심의 삶>
“내 영혼아,
주님을 찬양하여라.”
(시편 146,1ㄴ)
가슴 섬찟한 충격을 받았습니다.
어제 나눈 강론은 '성전 정화'였고 오늘 복음의 주제는 '가난한 과부의 헌금'입니다.
이어지는 복음 주제는 '예수님, 성전의 파괴를 예고하시다'.
뭔가 서로 관련되어 있는 불길한 느낌을 받습니다.
성전 정화의 필요성이 더욱 크게 부각되는 작금의 현실입니다.
어제 저녁 식사 중 수도원에 잠시 머물고 있는 교구 신부님의 '2027 서울 세계청년대회(WYD)'를 앞둔 애로사항과 더불어 수사님들에게 기도를 청하는 이야기를 잠시 들었습니다.
이야기를 듣는 순간 “아, 교회는 물론이고 나라에 청년이, 젊은이들이 없구나! 이를 어쩌나!” 탄식과 더불어 고달픈 삶의 현장에서 희망을 잃고, 길을 잃고 헤매는 수많은 청년들이 생각났습니다.
전적으로 기성 세대의 책임입니다.
세계 청년대회 주제 성구가 우리의 용기를 붇돋웁니다.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
(요한16,33)
신부님의 “전 교회가 회개하는 자세로 청년대회에 임해야 한다, 교회가 영적으로 거듭나야 한다.”는 요지의 말에 전폭적으로 공감했습니다.
새삼 건물 잘 짓는 것보다 사람을 잘 키우는 것이 얼마나 중요하고 본질적인지 깨닫습니다.
정말 성전 정화와 반드시 함께 가야 할 '주님 중심의 회개와 봉헌의 삶'임을 깨닫습니다.
오늘 복음에 이어지는 성전파괴에 대한 제자와 예수님의 주고 받는 대화가 예사롭게 들리지 않습니다.
“스승님, 보십시오. 얼마나 대단한 돌들이고 장엄한 건물들입니까!”
감탄하는 제자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즉각적인 주님의 답변이 우리의 교회 현실을 들여다 보게 합니다.
“너는 이 웅장한 건물들을 보고 있느냐?
여기 돌 하나도 다른 돌 위에 남아 있지 않고 다 허물어지고 말 것이다.”
내적으로 타락하고 부패해 있는 모래위 교회 공동체라면 그 위용을 자랑하는 성전 건물도 텅 비워지고 날도 쇠락해 질 것입니다.
요즘 교회는 물론이고 곳곳에 빈 건물들은 얼마나 많은지요!
도대체 사람들이, 특히 청소년들이 없다는 것입니다.
새삼 중요한 것은 건물이 아니라 사람임을, 돈이 아니라 하느님임을 깨닫게 됩니다.
성전 건물이 아니라 공동체 건물의 끊임없는 정화와 쇄신이, 기도와 공부가 참으로 절박한 시절입니다.
바로 오늘 복음은 내적으로 부패한 교회 현실을 보여주는 듯합니다.
예나 이제나 여전히 반복되는 악순환의 사회 현실입니다.
앞서 복음은 율법학자들을 조심하라는 내용입니다.
“율법학자들을 조심하여라.
그들은 장터에서 긴 겉옷을 입고 나다니며 장터에서 인사받기를 즐기고, 회당에서는 높은 자리를, 잔치 때에는 윗자리를 즐긴다.
그들은 과부들의 가산을 등쳐 먹으면서 남에게 보이려고 기도는 길게 한다.
이러한 자들은 더 엄중한 단죄를 받을 것이다.”
이런 유형의 성직자들은 없는지 우리 자신을 들여다 보게 됩니다.
진실과 겸손이 결핍된 무지와 허영의 율법학자들입니다.
무지와 탐욕과 더불어 내적으로 열정과 순수도 사라진, 길을 잃은 병든 종교지도자들의 모습을 상징하는 듯 합니다.
이어 등장하는 부자들의 헌금 장면과 가난한 과부의 헌금이 극명한 대조를 이룹니다.
부자들과 가난한 이들이 공존하는, 여전히 교회 내의 빈부의 격차를 실감하게 되는 작금의 현실입니다.
빈부의 격차보다 더 심각한 것이 이념에 의한 좌우, 진보와 보수의 분열입니다.
흡사 심리적 내전 상태를 방불케 합니다.
여전히 기상하자마자 바치는 만세칠창에 이어 내 신원의 고백입니다.
만세칠창 중 더욱 정성을 쏟는 “대한민국, 한반도 만세!” 기도입니다.
무엇보다 최악의 전쟁은 무조건 피해야 할 것이고 평화가 최상의 가치임을 절감하는 현실입니다.
“나는 좌파도 우파도 아닌 예수님파 주님의 전사, 평화의 전사다!”
만세칠창 후 고백하는 제 신원입니다.
주님은 졸지도 잠들지도 않습니다.
늘 깨어 우리를 살펴 보시며 돌보시고 계신 주님을 상징하는 바로 오늘 복음의 예수님입니다.
늘 주님의 현존을 의식하며 살려는 노력으로 단풍 장엄하게 물든 불암산을 볼 때 마다 되뇌는 세 고백입니다.
9~-11월 기도의 계절, 공부의 계절, 가을에 저를 행복하게 하는 고백입니다.
“늘 앞에 있는 산, 늘 앞에 있는 당신, 이 행복에 삽니다!”
“산앞에 서면, 당신앞에 서듯 행복하다!”
"꽃같은 하루 꽃같이 살자!"
성전 안에 헌금하던 부자들도 가난한 과부도 주님께서 주시하고 계심을 까맣게 몰랐을 것입니다.
주님께서 주목하는 장면은 많은 부자들이 큰 돈을 넣는 것이 아니라 가난한 과부의 헌금입니다.
바리사이와 세리의 기도가 연상되는 장면입니다.
당당하게 많은 돈을 헌금하는 부자들과 렙톤 두 닢을 부끄러이 바치는 가난한 과부입니다.
그러나 세리의 팔을 들어주었던 주님은 가난한 과부의 팔을 들어줍니다.
또 인용하고 싶은 내용입니다.
언젠가 지금은 세상을 떠난 가난한 자매가 꽃 한송이를 들고 왔을 때 드린, 하루 종일 저를 행복하게 했던 답시도 생각납니다.
“꽃이 꽃을 가져오다니요.
그냥 오세요.
당신은 꽃보다 더 예뻐요!“
아마도 가난한 과부의 헌금에 이보다 더 기뻐했을 주님이십니다.
가난한 과부의 하느님 향한 순수한 믿음의 봉헌에, 순수한 사랑의 봉헌에 감동하신 주님의 고백입니다.
제1독서에서 엘리야를 대접하던 사렙타의 과부 그 이상입니다.
참으로 우리를 부끄럽게 하는 빛나는 회개의 표지, 봉헌의 표지인 가난한 과부입니다.
제자들을 불러 말씀하시니 이를 교육의 기회로 삼는 주님의 처사가 참 기민합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저 가난한 과부가 헌금함에 돈을 넣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이 넣었다.
저들은 모두 풍족한 데에서 얼마씩 넣었지만, 저 과부는 궁핍한 가운데에서 가진 것을, 곧 생활비를 모두 다 넣었기 때문이다.”
참으로 누가 내적으로 넉넉하고 자유롭고 행복한 참 부자인지 성찰하게 하는 내용입니다.
가진 것이 많아서 부자가 아니라 필요한 것이 적어 참 부자라는 말도 생각납니다.
가진 것들 중 극히 작은 일부를 바친 인색한 부자들보다 가진 것을 다 바친 신망애(信望愛)의 과부가 참 넉넉하고 자유롭고 행복한 부자임을 깨닫습니다.
우리 죄인들의 구원을 위해 외아들 예수님 전부를 봉헌한 하느님 아버지를 연상케 하는 가난한 과부입니다.
히브리서 말씀도 연상됩니다.
“이제 그분께서는 마지막 시대에 당신 자신을 제물로 바쳐 죄를 없애시려고 단 한 번 나티나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많은 사람의 죄를 짊어지시려고, 당신을 고대하던 이들을 구원하시려고 단 한 번 자신을 바치셨습니다.”
봉헌의 여정 중심에 영원한 봉헌의 모범이신 하느님의 아드님 예수님이 자리잡고 계십니다.
이 거룩한 미사 중 이런 주님의 봉헌에, 하느님의 아드님을 바치신 봉헌에 참여하는 참 거룩하고 아름다운 가난한 과부요 우리들입니다.
누구보다 하느님의 마음에, 예수님의 마음에 정통해 있는 가난한 과부는 교회의 빛나는 회개의 표지, 봉헌의 표지가 됩니다.
정말 절박한 것은 장엄하고 화려한 건물 성전의 봉헌이 아니라 회개의 봉헌입니다.
깨어 있는 성전 사제라면 생활비 전부를 바친 가난한 과부의 삶을 걱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본의 아니게 가난한 과부를 착취한 것같은 봉헌이 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이럴 경우라면 성전 사제의 죄가 참으로 엄중합니다.
정말 건물 성전 관리보다도 가난한 이들을 섬기고 배려하는 공동체 성전 관리가 우선적임을 봅니다.
가난한 과부들의 헌금이 모인 성전사제의 생활비라면 정말 써야 할 때면 아낌없이 써야 하겠지만, 절제는 몸에 배여 있어야 할 것입니다.
이어지는 주님의 성전 파괴의 예언도 작금의 교회가 내적 타락과 부패의 늪에서 벗어나라는, 우리를 회개에로 부르시는 경고처럼 들립니다.
정말 교회나 수도원, 성지들의 거대하고 화려한 건물들을 보면 가난한 신자들이 연상되고 우려하는 마음 큽니다.
정말 우선적인 것이 건물 성전보다 공동체 성전이기 때문입니다.
유럽 성지들을 순례할 때도 옛 신자들의 크고 순수한 믿음에 감격하지만, 그 이면에 얼마나 가난한 민초 신자들의 땀과 피를 흘렸을까 생각하면 마음 편치 않을 때도 참 많습니다.
병들고 시들어 죽어가는 공동체 성전인데 장엄하고 화려한 건물 성전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지요!
참으로 믿는 이들의 순례 공동체에 속한 우리들이요 봉헌의 여정중의 우리 삶임을 깨닫습니다.
회개와 더불어 주님 중심의 교회공동체로 끊임없이 정화되고 숙성(熟成)되고 새로워질 수 있도록 이 거룩한 미사 중 주님의 도움을 청합시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마태 5,3)
아멘.
- 성 베네딕도회 요셉 수도원
♠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의 묵상글
<과부의 용기와 사랑의 실천>
수학 시간에 ‘공약수와 교집합’을 배웠습니다.
공약수는 두 수 사이에 공통으로 들어있는 수를 의미합니다.
교집합은 두 개 이상의 집합에서 공통으로 포함된 원소들로 이루어진 집합을 의미합니다.
즉, 두 집합에 모두 속한 원소들의 모임이 교집합입니다.
사람들은 문화나 역사가 다르더라도 인간으로서 공통된 가치를 지닙니다.
예를 들어, 사랑, 정의, 평등과 같은 가치들은 인류의 공약수와 같습니다.
여러 사회와 문화가 다르게 작동하지만, 그 안에서 발견되는 보편적 가치가 바로 공약수입니다.
현대 사회는 다양한 문화가 공존하는 다문화 사회입니다.
각기 다른 문화가 교차하는 지점에서 생기는 ‘교집합’은 새로운 통찰과 발전을 가능하게 합니다.
이 과정에서 우리는 서로 다른 문화에서 배울 수 있고, 공통의 목적을 향해 나아갈 수 있습니다.
서로 다른 사람들이 만나서 공유할 수 있는 가치를 발견하는 것이 공동체 형성의 핵심입니다.
이러한 교집합을 통해 사회가 더욱 풍요롭게 발전합니다.
우크라이나와 러시아가 공약수와 교집합을 찾을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하마스와 이스라엘도 공약수와 교집합을 찾을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그렇게만 될 수 있다면 서로의 가슴에 총을 겨누는 것이 아니라, 서로의 가슴에 장미를 달아 줄 수 있을 겁니다.
오늘은 ‘평신도 주일’입니다.
교회에는 성직자, 수도자, 평신도가 공동체를 이루고 있습니다.
삼위일체인 하느님께서 조화와 균형을 이루면서 사랑을 주십니다.
성부인 하느님은 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하느님을 닮은 모습으로 인간을 창조하셨습니다.
성자인 하느님은 몸소 사람이 되었습니다.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서 십자가를 지고 가셨습니다.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돌아가셨지만 부활하셨습니다.
성령인 하느님은 교회와 함께 하십니다.
효경, 굳셈, 의견, 지혜, 지식, 통달, 두려움의 은사를 주십니다.
삼위일체 하느님의 최대공약수는 ‘사랑’입니다.
그 사랑이 모든 걸 가능하게 합니다.
성직자는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은 사람입니다.
복음을 전하고, 성사를 집전합니다.
병자를 위해 기도하고, 마귀를 쫓아냅니다.
예언의 직무, 성사의 직무, 봉사의 직무가 있습니다.
수도자는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은 사람입니다.
이 세상에서 천국의 삶을 보여주는 사람입니다.
그리스도의 향기가 되는 사람입니다.
수도자는 복음 삼덕을 실천하는 사람입니다.
정결, 순종, 청빈의 삶을 드러내는 사람입니다.
평신도는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은 사람입니다.
세례를 통해서 하느님의 자녀가 됩니다.
예수님은 그런 평신도를 무척 사랑하셨습니다.
강도당한 사람을 도와준 착한 사마리아 사람을 칭찬하셨습니다.
겸손한 세리의 기도를 칭찬하셨습니다.
믿음이 강했던 백인대장을 칭찬하셨습니다.
회개하고, 가진 걸 나누었던 자캐오를 칭찬하셨습니다.
성직자, 수도자, 평신도는 모두 같은 하느님을 믿는 사람입니다.
성직자, 수도자, 평신도의 최대공약수는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은 사람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동반자입니다.
오늘 독서와 복음에서 우리는 두 명의 과부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과부는 남편이 먼저 세상을 떠난 미망인입니다.
남편이 없기에 가정도 돌봐야 하고, 돈도 벌어야 합니다.
특별한 직업이 없다면 과부들의 생활은 궁핍하고 힘들기 마련입니다.
누군가로부터 도움을 받아야 생활을 할 수 있는 것이 과부들의 삶이었습니다.
오늘 독서와 복음에서 보여준 과부의 용기와 사랑의 실천은 그 뒤에 과부의 남다른 노력이 있었습니다.
어떤 것일까요?
첫째는 올바른 가치 기준을 확립하는 것입니다.
나의 개인적인 욕망을 따를 것인가 또는 나의 욕망을 희생하고 타인을 사랑하라는 그리스도의 요구를 따를 것인가 하는 문제는 매 순간 우리에게 다가오는 문제이며, 이러한 문제에 직면할 때 우리 안에 어떤 가치 기준을 갖고 있느냐에 따라서 선택하기 쉬울 수도, 어려울 수도 있는 것입니다.
둘째 자기 수양이 필요합니다.
비록 올바른 가치 기준을 내 안에 갖게 되었다 하더라도 우리는 충동적인 자신을 발견하게 되며 평소 나의 기준에 따라서 해서는 안되는 것을 이 충동에 의지하게 되는 경우를 만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보고, 듣고 말하고 만지고 싶은 욕구를 자제하는 훈련을 쌓아야 합니다.
셋째로 기도가 필요합니다.
자신을 이기려고 노력하고 남을 위해서 우리의 재능을 제공하려는 삶을 살고 있다 하더라도 우리 안에는 많은 내면적인 어려움을 만나게 되고 결국 실패하고 말리라는 두려움을 안고 있습니다.
때문에, 우리는 기도로서 하느님께 모든 것을 의탁하고 맡기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올바른 가치 기준을 확립하고 끊임없이 자기 수양을 하는 사람이 하느님께 꾸준히 기도한다면 오늘 독서와 복음의 가르침을 생활 속에서 쉽게 실천할 수 있고 하느님으로부터 많은 축복을 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세상은 어쩌면 아름다운 사람들이 있기에 더욱 아름다운 겁니다.
“전능하시고 자비로우신 하느님,
저희에게 해로운 모든 것을 물리쳐 주시어 저희가 평안한 몸과 마음으로 자유로이 하느님의 뜻을 따르게 하소서.”
- 미국 댈러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성당
♠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의 묵상글
<나눌 수 없는 이유보다 나눌 수 있는 이유를 봐야 합니다>
벤저민 프랭클린을 아십니까?
미국 건국의 아버지로 알려져 있고, 미국 화폐 100달러에 새겨진 인물이기도 합니다.
여기에 많은 발명품을 만들었습니다.
피뢰침, 다초점 렌즈, 민간형 비행기, 뇌파 측정기, 홀리 그램 기술 등입니다.
그런데 그는 자기 발명품에 전혀 특허를 내지 않았습니다.
엄청난 부자가 될 수 있는 길을 스스로 포기한 것입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의 발명품을 통해 큰 혜택을 누리고 있듯이 자신의 발명품으로 타인을 도울 기회가 있음에 감사해야 하며 이러한 봉사를 거리낌 없고 아낌없이 행해야 한다.”
이런 말도 남겼습니다.
“쓸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재산은 실제로 소유하고 있다고 해도 정당한 자신의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의 인생철학은 ‘선(善)은 나누어야 한다’라는 것입니다.
시대의 큰 어른임이 틀림없습니다.
그래서 미국 100달러에 새겨진 것이며, 지금도 많은 이의 존경과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성직자로 사는 저도 금전적 문제에 자유롭지 못했음을 솔직히 고백합니다.
사실 본당 부채가 많아서 신자들에게 직접 이야기하지는 않지만, 늘 ‘돈’을 생각하고 있거든요.
그러면서 주님께서 칭찬한 사람은 여유 있는 가운데 봉헌한 사람이 아니라, 자기 생활비 전부를 봉헌했던 과부였음을 떠올리게 됩니다.
예루살렘 성전에는 성전세와 십일조세를 받아들이기 위한 성전 금고가 마련되어 있고, 이 금고에는 열세 개의 헌금함이 배치되어 있는데, 그중 하나가 자진해서 내는 헌금함으로 누구나 볼 수 있도록 공개적이었습니다.
당연히 부자는 많이 넣고 가난한 이는 조금밖에 넣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부자는 돈을 많이 넣고 그 대가를 얻습니다.
즉 많이 헌금했다는 것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하느님께 바치기보다 자기에게 바치는 것이나 다를 바 없습니다.
가난한 과부는 두 렙톤을 넣었습니다.
렙톤은 그리스 화폐 중 가장 작은 단위로, 성인 노동자 하루 일당의 64분의 1에 해당하는 액수입니다.
올해 최저임금이 9,860원이고, 하루 8시간 일한다고 하면 78,880원입니다.
이의 64분의 1이면 1,233원이 나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남들은 자기를 드러내기 위해 풍족한 데에서 얼마씩 넣었지만, 이 과부는 궁핍한 가운데에서도 생활비 모두를 다 넣은 것입니다.
하느님은 헌금을 받을 때 돈의 액수를 따지지 않고 그 바치는 마음을 헤아리신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하느님께 먼저 드리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먼저 쓰고 남은 것을 드리는 우리의 모습은 아니었을까요?
선(善)을 나누어야 합니다.
나눌 수 없는 이유보다 나눌 수 있는 이유를 봐야 합니다.
내가 할 수 있는 나눔을 적극적으로 실천해야 주님께서 나머지를 채워주십니다.
- 인천가톨릭대학교 성김대건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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