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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8월 28일 연중 제22주일
제1독서 : 집회 3,17-18.20.28-29
제2독서 : 히브 12,18-19.22-24ㄱ
복 음 : 루카 14,1.7-14
1 예수님께서 어느 안식일에
바리사이들의 지도자 가운데 한 사람의 집에 가시어 음식을 잡수실 때 일이다.
그들이 예수님을 지켜보고 있었다.
7 예수님께서는 초대받은 이들이 윗자리를 고르는 모습을 바라보시며
그들에게 비유를 말씀하셨다.
8 “누가 너를 혼인 잔치에 초대하거든 윗자리에 앉지 마라.
너보다 귀한 이가 초대를 받았을 경우,
9 너와 그 사람을 초대한 이가 너에게 와서, ‘이분에게 자리를 내 드리게.’ 할지도 모른다.
그러면 너는 부끄러워하며 끝자리로 물러앉게 될 것이다.
10 초대를 받거든 끝자리에 가서 앉아라.
그러면 너를 초대한 이가 너에게 와서, ‘여보게, 더 앞 자리로 올라앉게.’ 할 것이다.
그때에 너는 함께 앉아 있는 모든 사람 앞에서 영광스럽게 될 것이다.
11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
12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초대한 이에게도 말씀하셨다.
“네가 점심이나 저녁 식사를 베풀 때, 네 친구나 형제나 친척이나 부유한 이웃을 부르지 마라.
그러면 그들도 다시 너를 초대하여 네가 보답을 받게 된다.
13 네가 잔치를 베풀 때에는 오히려 가난한 이들, 장애인들, 다리저는 이들, 눈먼 이들을 초대하여라.
14 그들이 너에게 보답할 수 없기 때문에 너는 행복할 것이다.
의인들이 부활 할 때에 네가 보답을 받을 것이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지금보다 더 행복해지려면 무엇이 필요한가요?”
이 질문을 받으면 대부분 돈과 사치품, 외모, 권력 등
달성하기 어려운 욕망을 생각합니다.
그러면서 이것들을 이룬 사람과 자신을 비교하면서
질투심도 생기고 또 좌절감에 빠져들기도 합니다.
행복해지려는 생각이었지만 전혀 행복해지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이런 질문에 답해보십시오.
“하루 중 언제 가장 행복하다고 느끼나요?”
하나같이 소소한 일상을 언급합니다.
성당에서 편안한 마음으로 기도하는 시간, 자녀와 함께 있는 시간,
산책, 음악감상, 맛있는 음식 먹기, 독서 등등….
이때의 놀라운 점은 남과 전혀 비교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어떤 질문을 자신에게 던져야 행복할까요?
하루 중 가장 행복한 시간을 묻는 말이 자신에게 필요했습니다.
그리고 이 행복은 우리가 쉽게 얻을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커다랗고 대단한 곳에 행복이 있지 않습니다.
욕심과 이기심에서 벗어나는 우리의 겸손함에서 행복 찾기는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이 땅에 가장 겸손한 모습으로 오셨고,
겸손한 삶을 강조하셨으며, 마지막 순간에서도 가장 겸손한 죽음을 맞이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도 이렇게 자신을 낮추시는데,
우리는 과연 하느님을 따라 얼마나 겸손한 삶을 살고 있었을까요?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의 생활에서 식사 예절은 상당 엄격했습니다.
잔치가 크면 클수록 예절은 더 엄격해져서 식탁에 앉는 순서는
손님들의 지위나 신분에 따라 상하가 정해졌습니다.
그래서 초대받은 사람이 누구인지를 살펴보고서
자신의 위치를 스스로 정해 앉았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자기 과시에 몹시 신경을 썼습니다.
그래서 잔치에 초대되면 최대한 윗자리에 앉고자 했습니다.
윗자리에 앉으면 많은 사람이 와서 인사했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인간의 품위는 궁극적으로 하느님께서 높여주시는 것이지,
자기 자신이 발버둥 치며 탐욕을 부린다고
높아지는 것이 아님을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오히려 자신을 낮출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세상의 지위를 통해 순간의 만족을 얻을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 나라에서도 그 지위를 인정받을 수 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래서 앞서 하루 중 가장 행복한 순간을 떠올릴 수 있도록,
일상 안에서의 작은 행복에 감사하는 겸손한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겸손함에서 나오는 사랑의 실천을 통해서만 하느님으로부터 보답받을 수 있습니다.
오늘 지금 여기가
-"천국입니다"-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
“주님, 당신을 경외하는 자들 위하여 감춰 두신
그 인자하심이 얼마나 크오니까
당신께 의탁하는 자에게 그 인자하심을,
사람들 보는 앞에서 베푸시나이다.”(시편31,20)
이제 처서處暑(8.23)도 지나니 서늘하기가 완연한 가을입니다.
하늘은 높고 푸르며 희미하게 보이던 별들도 초롱초롱해졌습니다.
어제 8월27일은 참 행복한 날이었습니다.
“오늘 지금 여기가 천국입니다”,
고백이 나올 정도로 행복한 날이었고 그대로 강론 제목으로 택했습니다.
어제 “프란치스코” 수도사제인 저는 참 주님의 섭리 은총으로
같은 수도명으로 시작된 “프란치스코” 전교 봉사 수도회 피정 지도를 마쳤습니다.
피정 참가자들 18명 중 14명이 선교 수도사제이며 4명도 언젠가는 사제가 될 분들입니다.
한국 13명, 잠비아 5명, 인도 2명으로 구성된 모두가
순수와 열정이 넘친 다국적 수도회라 할 정도로 참 다채로웠습니다.
호칭은 모두가 “형제”였습니다.
8월22일 “복되신 동정 마리아 모후 기념일”로 시작하여
어제 8월27일 “성녀 모니카 기념일”로 끝난 일정이 우연이 아님을 깨닫습니다.
오늘 8월28일은 아쉽게도 연중 제22주일이라
성 아우구스티노 주교 학자(354-430) 기념 미사를 못 드리지만,
두 모자母子 성인을 생각할 때 늘 애틋한 마음이 들며 동시에 저와 제 어머니를 생각하게 됩니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을 생각할 때는 늘 다음 고백이 떠오릅니다.
“늦게서야 님을 사랑했습니다.
이렇듯 오랜, 이렇듯 새로운 아름다움이시여, 늦게야 당신을 사랑했습니다.”
여기 근거한 저녁 성무일도 “마리아의 노래” 후렴도
비록 오늘 부르지는 못하지만 참 아름답고 깊어 마음에 긴 여운을 남깁니다.
“옛것이나 항상 새로운 주님의 아름다움이여, 늦게야 당신을 사랑했나이다.
주님은 부르시고 지르시는 소리로 절벽이던 내 귀를 트이셨나이다.”
피정 지도를 마친 후 귀원 하자 총원장 형제의 단아端雅한 감사 답신도 저를 행복하게 했습니다.
주고받은 메시지입니다.
“신부님,
안으로 성베네딕도,
밖으로 성프란치스코 라는 말씀이
기도와 활동 안에서 수도 여정을 살아가는
수도자들에게 큰 울림을 줍니다.
이 길에서 만나는 모든 이에게
주님의 기쁜 소식을 전하는 삶이 될 수 있도록 탁마琢磨하며
그 길을 형제들과 함께 걸어가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멋진 겸심, 거룩한 결심에 진심으로 찬사와 격려와 더불어 주님의 축복을 빕니다.
그대로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레오 형제님!”
참고로 피정 지도 주제는
“선교에 앞서, 선교와 더불어, 수도공동체에서의 기본적 수행들”이었습니다.
내 그리던 사랑, 수도원에 귀원 했을 때 “난 수도승이다” 라는
자각과 더불어 흡사 야전사령부의 제자리에 온 듯
“주님의 전사戰士로 살다가 전사戰死하여 내 뼈를 묻을 곳”이란 순간의 결심도 새로웠습니다.
놀라운 기적은 제 침방에서 목격했습니다.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일이었는데 이 또한 깊이 보면 하느님 사랑의 은총의 선물입니다.
사전에 사랑하는 수도 형제와 주고받은 메시지들 전 과정을 공개합니다.
“수사님, 침방 여기저기 바닥에 세워져 있는 앨범, 액자 등을 벽의 적당한 곳에 붙여 드릴까요”
“적당한 때 부탁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무질서의 질서’, 자연스러움을 좋아하는 제 취향인가 봅니다.”
“지금 마르코 수사님이 수사님 침방을 아름답게 꾸미고 계십니다. 와보시면 놀라실 겁니다.”
정말 피정 끝낸 후 침방에 들어서는 순간 놀랐고, 오늘 한밤중에 일어났을 때 또 두 번 놀랐습니다.
아, “오늘 지금 여기가 천국입니다”, 즉시 강론 제목을 택하게 한 계기가 됐습니다.
어제 마지막으로 발송했던 메시지입니다.
“침방의 조화와 균형의 배치가 기막히게 절묘하고 아름답기가 가히 혁명적입니다.
형제애兄弟愛에 감동합니다. 놀라운 아이디어의 기적입니다! 감사합니다!!!”
요즘 일기쓰듯 강론도 자유로워졌습니다.
수도원의 환경은, 수도자의 방은 참 깊고 중요합니다.
수도자의 방에 대한 결론과도 같은 아름다운 대목을 강의록에서 인용합니다.
“수도자의 방은 숱한 투쟁, 패배, 승리, 기쁨, 눈물로 점철된 장이 될 수 있다.
방은 어머니의 자궁과 같아 수도자는 더 성숙되고 세련洗練된 자아로 태어나
그날의 도전에 다시 잘 직면할 수 있게 된다.
아마 아플 때도 방은 병실이 될 수 있고 죽을 때는 부활의 생명이 나오는 무덤이 될 수 있다.
방안에서 항구함은 죽을 때까지 수도원에서 잘 살 수 있는 비결이다.”
수도자의 방뿐 아니라, 이상적인 수도원 역시 어머니의 자궁과 같습니다.
영적 전투 치열한 최전방 수도원이면서 동시에
어머니의 자궁 같은 편안한 쉼터이자 지상에서의 천국인 수도원이라
어머님이 계신 고향을 찾듯이 끊임없이 형제자매들이 찾는
영혼의 고향, 하느님 집인 수도원입니다.
오늘 수도원 미사에 참석한 여러분은 오늘 지금 여기서 천국을 체험하고 계십니다.
어떻게 오늘 지금 여기서 천국을 살 수 있겠는지요?
바로 오늘 두 개의 독서와 하나의 복음이 답을 줍니다.
첫째, 겸손입니다.
겸손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겸손은 덕행으로 정의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누가 겸손하기로 작정을 하면 등신等神이 되기 십상입니다.
본인은 절대 모르고 남만이 아는 겸손입니다.
겸손할 때 아름답고 교만할 때 추합니다.
누가 인품이 아름답다 느껴지면 그는 분명 겸손한 사람입니다.
겸손을 연습하다 보면 속없는 사람이 되기 일쑤입니다.
겸손한 사람은 욕심이 없는, 집착이 없는 초연한 사람입니다.
답은 단 하나입니다.
하느님을 진정 사랑할수록 나도 모르는 사이 점점 주님을 닮아 겸손해집니다.
우리 수사님들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겸손의 어원은 흙이고 흙에 어원을 둔 인간입니다.
흙humus같이 겸손humilitas해서 사람homo임을 깨닫습니다.
흙을 닮은 우리 수도자들입니다.
오늘 집회서의 겸손에 대한 설명이 참 아름답습니다.
온유와 겸손은 함께 갑니다.
“얘야, 네 일을 온유하게 처리하여라.
네가 높아질수록 자신을 더욱 낮추어라.
그러면 주님 앞에서 총애를 받으리라.
정녕 주님은 크시고, 겸손한 이들을 통하여 영광을 받으신다.”
하느님을 사랑하여 날로 가까워질수록 겸손이지만
하느님을 떠나 날로 멀리할수록 거만倨慢입니다.
겸손은 아름답지만, 거만은 참 추합니다.
집회서의 말씀이 참 좋은 가르침이자 깨우침입니다.
“거만한 자의 재난에는 약이 없으니, 악의 잡초가 그 안에 뿌리내렸기 때문이다.
겸손하고 현명한 마음은 격언을 되새긴다.
주의 깊은 겸손한 귀는 지혜로운 이가 바라는 것이다.”
둘째, 환대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가장 많이 반복되는 단어는 “초대”로 무려 아홉 번 나옵니다.
성경 원어는 ‘칼레오’ 곧 ‘부르다’라는 뜻입니다.
겸손으로 불린 우리들이라는 것입니다.
초대의 마음, 초대의 사랑은 그대로 환대의 마음, 환대의 사랑과 통합니다.
초대와 환대의 사람 역시 겸손한 사람입니다.
초대의 자리, 환대의 자리에 갔을 때는 겸손히 끝자리에 가서 앉으라 하십니다.
사실 겸손한 이들은 드러내기를 부끄러워하며 감춰지기를 바라고 끝자리를 좋아합니다.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높이는 이는 높아질 것입니다.
거만으로 높아지면 낮아지고 겸손으로 낮아지면 올라가는 것이 역설적 영적 진리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초대의 진수, 환대의 진수를 보여주십니다.
참으로 겸손한 환대의 사람은 가난한 이들을 우선합니다.
“네가 잔치를 베풀 때에 네 친구나 형제나 친척이나 부유한 이웃을 부르지 마라.
오히려 가난한 이들, 장애인들, 다리 저는 이들, 눈먼 이들을 초대하여라.
그들이 너에게 보답할 수 없기 때문에 너는 행복할 것이다.
의인들이 부활 할 때에 네가 보답을 받을 것이다.”
바로 이게 진짜, 초대의 축복, 환대의 축복입니다.
참으로 가난한 이들, 장애인들, 불우한 이들을 형제애로 초대하고 환대할 때
마지막 날, 주님 친히 갚아주실 것입니다.
사실 깊이 들여다보면 정도의 차이일 뿐 모두가 장애인들입니다.
아니 이런 환대의 사랑 자체가 보답이 되어 오늘 지금 여기서 천국의 행복을 살게 합니다.
셋째, 천국입니다.
참으로 겸손의 사랑, 환대의 사랑을 살 때
오늘 지금 여기서 펼쳐지는 하늘나라, 천국의 실현입니다.
하느님 사랑에 날로 가까워질수록 겸손에 환대의 사람이 됩니다.
오늘 히브리서의 시나이산으로 대변되는
옛 계약과 시온산으로 대변되는 새 계약의 대조가 참 흥미롭습니다.
참으로 겸손한 사람, 환대의 사람은 새 계약의 사람이 되어
오늘 지금 여기서 하늘나라 천국을 삽니다.
그대로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미리 맛보는 다음 새 계약의 현실입니다.
바로 오늘 우리를 두고 하시는 주님의 말씀이 참 고맙습니다.
“여러분이 나아간 곳은 시온산이고, 살아 계신 하느님의 도성이며
천상 예루살렘으로 무수한 천사들의 축제 집회와
하늘에 등록된 맏아들들의 모임이 이루어지는 곳입니다.
또 모든 사람의 심판자 하느님께서 계시고, 완전하게 된 의인들의 영이 있고,
새 계약의 중개자 예수님께서 계십니다.”
이 거룩한 미사전례에 감사하십시오.
이 거룩하고 은혜로운 미사가 아니곤 어디서 이런 새 계약의 천상 세계의 아름다운 현실을,
하늘나라 천국의 행복을 미리 맛볼 수 있겠는지요!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 은총이 우리 모두 오늘 지금 여기서 천국을 살게 합니다.
겸손한 사람, 환대의 사람, 의인義人이 되어 천국의 삶을 살게 합니다.
“의인들아 기뻐하며 춤을 추라.
하느님 앞에서 기뻐하며 즐거워하라.
너희는 하느님께 노래하여라. 그 이름을 찬송하여라.
그 이름 주님이시다. 그분 앞에서 기뻐 춤추라.”(시편68.4-5). 아멘.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계란이 보통 계란보다 조금 커서 열어보니 쌍란이었습니다.
신기하게도 10개의 계란이 모두 쌍란이었습니다.
아침마다 쌍란을 먹는 호사를 누렸습니다.
가톨릭평화신문 8월 14일 지면에 좋은 글이 있어서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희망과 열망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희망에는 닮은 듯 다른 이란성 쌍둥이가 있습니다. 바로 열망입니다.
희망과 열망은 다르지만 늘 함께 다닙니다.
열망한다는 것은 자신의 힘으로 무엇인가 성취되기를 기대하는 것입니다.
희망한다는 것은 하느님의 도움에 의탁하는 마음입니다.
열망은 새로운 일을 기획할 때 기대감이 솟구쳐 오릅니다.
떠오르는 해를 바라보고 아침기도를 하면서 살짝 설레기도 합니다.
모든 것이 잘 이루어지리라고 기대합니다.
그러나 하룻밤을 자고 난 후, 이러한 수많은 열망은 하나둘 무너집니다.
이것도 저것도 원하는 대로 잘되지 않습니다.
바라고 또 바라지만 결국 현실은 이를 허용해 주지 않았다는 원망과 분노가 올라오기도 합니다.
열망은 반나절도 지나지 않아서 시들어 사라질 수 있습니다.
사라진 열망으로 인해 마음속 작은 틈 사이에서 실망과 좌절, 분노의 기운이 올라옵니다.
열망은 온전히 나의 것입니다.
내 능력과 힘으로 뭔가를 이루려는 갈망에서 온 것입니다.
그래서 고요함이 무너지고 불안해집니다.
내 힘으로 아무것도 할 수 없다며 자신을 질책하기도 합니다.
열망은 온전히 내가 주인이기에 잘 안되면 내 탓이라는 자책과
네 탓이라는 원망 사이를 오가면서 우울감에 빠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희망은 다릅니다.
최양업 토마스 신부님은 박해의 칼날이 서슬 퍼런 가운데서도
용감하게 수천, 수만 리를 걷고 또 걸어서 목적한 바를 이루었습니다.
치밀한 계획을 세운 것도 아닌데 수많은 문제를 하나하나 해결하며 헤쳐 나갔습니다.
희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희망은 누군가의 도움을 신뢰하는 것이며, 이는 하느님의 은총을 믿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둠의 터널에서도 희망은 유효합니다.
넘어지고 또 넘어져도 희망의 너머에는 늘 누군가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마음은 고요하고 평화로울 수 있습니다.
비록 당장 원하는 대로 이루어지지 않을지라도 마음의 평정을 찾을 수 있습니다.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은 감옥에 갇혀 있으면서도 평온할 수 있었습니다.
교우들을 위해서 편지를 썼습니다.
목이 잘리는 참수형을 당하면서도 당당할 수 있었습니다.
희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열망이 없는 희망만으로 충분한 것은 아닙니다.
열망 없이 희망만 하려는 사람은 겁쟁이고 무책임할 수 있습니다.
또한 희망 없이 열망하는 사람은 성급하고 무례하며 교만할 수 있습니다.
자신의 힘에 기대는 열망은 행동의 에너지이며 활력입니다.
그러므로 열망이 없는 희망은 가다가 지치면 현실을 잊고 책임을 회피하게 됩니다.
반면에 희망이 없는 열망은 뜻대로 안 될 때 쉽게 분노와 울분의 나락에 빠지기도 합니다.
열망이 있어야 자신을 믿고 행동하며, 희망을 할 때
이웃과 세상을 만나면서 하느님의 은총에 기대게 됩니다.
희망은 열망 때문에 용감하게 바라고,
열망은 희망에 의하여 겸손한 바람으로 변화됩니다.
자동차의 내비게이션은 희망과 같습니다.
잘못된 길을 갈지라도 포기하지 않고 새로운 길을 알려줍니다.
자동차의 기름은 열망과 같습니다.
아무리 내비게이션이 좋아도 기름이 없으면 자동차는 앞으로 나갈 수 없습니다.
마치, 새는 좌와 우의 날개를 펴서 목적지를 향해 날아가는 것과 같습니다.
희망과 열망이 손을 잡는다면 우리 삶은 많은 결실이 드러날 것입니다.”
오늘 성서 말씀은 겸손을 이야기합니다.
높아질수록 더욱 낮추라고 합니다. 그러면 주님께 사랑을 받으리라고 이야기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겸손과 더불어 나눔을 이야기하십니다.
가난한 이들에게, 아픈 이들에게 나누라고 하십니다.
비록 그들은 되갚지 못하지만, 하느님께서는 알고 계시다고 이야기하십니다.
겸손, 희망, 열망이 하나가 될 수 있다면 우리는 모두 하느님께로 나갈 수 있습니다.
희망은 자동차의 내비게이션과 같습니다. 열망은 자동차의 기름과 같습니다.
겸손은 자동차를 움직이게 하는 바퀴와 같습니다.
어느덧 8월의 마지막 주일입니다.
가을이 시작되는 9월을 기다리며 겸손, 희망, 열망으로 하느님께 가까이 가면 좋겠습니다.
가야 할 길- 끝자리
류해욱 요셉 신부
제가 뉴질랜드에 갔을 때, 모 반 모임에 참석하여 반 모임 하는 것을 지켜보았습니다.
아주 깊은 인상을 받았습니다. 그 전주가 오늘 복음의 내용이었습니다.
그들이 아주 진지하게 성경, 이번 주 복음을 읽고
그 읽은 것에 대해 나누는 모습이 저에게 감동적으로 느껴졌습니다.
여러 번 반복해서 성경을 다시 읽고 잠깐 묵상도 하면서
집에서 이미 읽고 묵상한 것에 대해 정리할 시간도 가졌습니다.
저는 그 자리에 성령께서 함께하시면서 이끌어 주신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복음서를 읽고 묵상하면서 마음에 와닿았던 단어나 문장을 짧게 이야기하고,
나중에 다시 그 단어나 문장이 마음에 와닿은 것에 대해
자기 체험을 바탕으로 나누는 형식이나 틀은 소공동체의 여느 반 모임이나 다를 것이 없었지만
나눔의 분위기가 마치 초대 공동체의 나눔처럼 느껴졌기 때문에 저에게 감동으로 와 닿았습니다.
마음에 와닿았던 단어나 문장이 각 사람마다 다 달랐습니다.
그것이 바로 성령께서 각 사람에게 함께 하시면서 영감을 주시는 것으로 느껴졌습니다.
한 사람은 ‘초대’라고 했고, 한 사람은 ‘윗자리’, 또 한 사람은 ‘끝자리’라고 했고,
또 한 사람은 ‘보답’이라고 했고, 또 한 사람은 ‘행복’이라고 했고,
한 사람은 “보답할 수 없기 때문에 너는 행복할 것이다.”라고 했고,
마지막 한 사람은 “주님의 말씀입니다.”라고 했습니다.
‘초대’라고 한 사람은 주님의 잔치에 초대받는다는 것이
얼마나 가슴 벅차고 감사한 일인지에 대해 나누었습니다.
‘윗자리’라고 하신 분은 우리가 모두 윗자리를 앉기를 원하는 마음 안에
바람에 대해 나누면서 특히 공동체 안에서도 원로라고 스스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윗자리에 앉는 대접을 받으려고 하는 모습에서 자신을 반성하게 되며,
자기는 나이가 들어도 그렇게 하지 않으려고 다짐하게 된다고 했습니다.
‘끝자리’라고 한 사람은 아무도 끝자리를 원하지 않지만,
그냥 끝자리에 가게 되면 마음이 얼마나 편안하게 느껴지는 지에 대해 나누었고
실제 저녁 식사를 하기 위해 우리가 자리에 앉을 때,
어디가 끝자리인지, 거기에 앉고 싶다고 유머처럼 이야기를 했습니다.
‘보답’이라고 나눈 분은 정말 우리가 아무런 대가 없이, 보답을 바라지 않고,
어떤 것을 해 주는지에 대한 성찰을 나누었습니다.
예를 들어, 직장에서 높은 자리, 윗자리, 영향력을 발휘하는 사람의 경조사가 있으면,
얼마를 넣을 것인지에 대해 고민하게 되는데, 과연 얼마를 넣어야
그 사람에게 임팩트를 주어 나에게 보답을 할 정도인지를 헤아린다는 것이지요.
‘행복’이라고 나눈 분은 정말 삶이 행복하다고 하면서
산행을 하다 보면 오르막 길이 있는가 하면, 반드시 편편한 길이 나타나듯이
우리 삶에서 시련과 고통이 있고, 힘이 들지만, 다시 편편한 길을 만나듯이
그 역경을 이겨내면 거기 행복이 기다리고 있다는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보답할 수 없기 때문에 너는 행복할 것이다.”라고 하신 분은
정말 내가 무엇인가를 해 주어도 보답할 수 없는 사람에게
조금 더 잘해 주고자 하는 마음의 결심을 하게 된다고 나누었습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라고 나눈 분은 그동안 우리가 듣는 복음 말씀이
정말 주님이 나에게 해 주시는 말씀이라는 생각을 별로 못했는데,
이제 생각하니, 이것이 정말 주님이 우리에게 들려주시는 말씀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면서,
정말 주님의 말씀을 삶에서 실천해야 하겠다는 결심을 새롭게 하게 되었다고 나누어 주었습니다.
성경, 바로 주님의 말씀은 우리 삶에 정말 중요합니다.
성경은 깊이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더 많은 의미를 깨닫게 됩니다.
우리는 성경 안으로 깊이 들어가야 합니다.
그렇게 깊이 들어가는 방법의 하나가 반복해서 여러 번 읽는 것입니다.
반모임을 하는 것이 중요한 이유는 성경을 읽을 뿐만 아니라 들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그냥 읽는 것과 남이 읽는 것을 듣는 것은 또 다릅니다.
성경은 우리의 보화입니다.
영원한 천국에서의 삶을 위한 보화이기도 하지만 지금 현세에서도 우리의 보화입니다.
바로 우리 삶에서의 길잡이가 되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인류에 의해 가장 많이 읽힌 책입니다.
성경에 관해 씌여 진 책도 수백만 권이 넘습니다.
그래도 여전히 우리는 성경의 깊은 의미를 다 이해하지 못합니다.
성경은 살아있는 하느님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반 모임에서 성경 말씀이 반원들 안에 살아 있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무엇이 성경을 살아있게 합니까? 그 안에서 활동하시는 성령의 힘입니다.
성경저자 안에서 활동하시던 같은 성령께서 우리에게도 같은 영감을 주십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고 들을 때 하느님의 영, 성령으로 가득 차게 됩니다.
우리는 지난주에는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라는 복음 말씀을 들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자기들이 예수님과 같이 먹고 마시고, 그리고 가르침도 들었다고 주장하지만,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듣기만 하고, 실제 삶에서 살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배척을 받은 사람들은 예수님을 만난 후에도 삶에 아무런 변화를 보이지 않은 사람입니다.
오늘 우리는 이것을 깊이 묵상합시다.
하느님 앞에 겸손하라.
조욱현 토마스 신부
오늘 복음의 짤막한 두 개의 비유는 잔치라는 소재를 통해
더 깊고 보편적인 가치를 제시하고 있다.
잔치는 우정, 인간관계, 다른 사람들과의 만남의 표현이다.
오늘 복음의 메시지는 매일 매일 이루어지고 있는 신앙과
그리스도인 생활의 잔치에 참여해야 할 우리의 태도에 대해 가르치고 있다.
신앙인의 삶은 언제나 하느님과 함께하는 삶이기에 그 삶 자체가 항상 잔치이다.
그 잔치에 참여하는 우리의 자세에 대해 오늘 독서는 말하고 있다.
예수께서는 바리사이파의 한 지도자의 집에 식사 초대를 받아 가셨을 때,
모두가 윗자리에 앉으려고 하는 것을 보시고, 비유를 말씀하시면서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11절) 하신다.
이 비유는 바로 하늘나라에 대한 진리를 말해주고 있다.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고자 하는 사람은
거짓이나 위선으로 자신을 자랑하여 내세우지 말고 자신을 낮추어야 한다.
하느님께서는 자기 자신을 올바른 사람으로 자처하고
자기의 특권을 뽐내는 사람을 하늘나라에서 제외하신다.
반대로 하느님의 선물을 받기에 합당치 못하다고 생각하는 겸손한 사람을 받아들이신다.
바리사이와 세리의 기도 비유에서도,
바리사이파 사람은 마치 식사에 초대받은 이들이 그랬듯이
하느님 앞에서 첫 자리를 차지하려고 하였지만,
세리는 그러한 영광스러운 자리를 차지하기에 부당하다고 하며 자비를 구한다.
그래서 세리는 하느님께로부터 올바른 사람으로 인정을 받는다.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의 규범은 겸손이다.
겸손을 통해서 낮은 자리를 찾는 것이 하나의 은총이며,
하느님께서 베풀어주시는 사랑의 행위이다.
앞자리로(10절) 불러올리시는 분은 하느님이시다.
하느님의 구원계획 안에서 우리가 차지하는 자리는 절대적으로 하느님 사랑의 선물이다.
내가 아무것도 내세우지 않고, 그분의 손에 우리를 모두 맡길 수 있다면
그분이 우리를 크게 만들어 주신다. 예수께서 그렇게 하신 모델이시다.
그분은 첫째이시지만 모든 사람의 종이 되셨기 때문에
“하느님께서도 그분을 드높이 올리시고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그분께 주셨습니다.”(필립 2,9).
하느님 나라에서의 위대성이란 겸손과 봉사 바로 그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가장 낮은 사람이 되거나, 그들 가운데 있도록 할 때,
우리는 가장 첫 자리를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인간적인 우둔함이 첫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싸운다.
그리고 예수께서는 이기주의적인 행위에 지나지 않는 그러한 사심과 계산을 버릴 것을 요구하신다.
잔치를 베풀 때 똑같이 되받을 수 있는 사람들을 부를 것이 아니라,
되받지 못할 사람들을 불러서 의인들이 부활할 때
하느님께서 갚아주심을 기다리라(12-14절 참조)고 하신다.
여기서는 첫째로 무상성을 가르치신다.
오직 진실하고 단순하며, 티 없이 맑은 뜻으로 행해지는 행위만이
가치를 지니게 된다는 점이다.
부차적인 계산 때문에 그 행위 자체가 파괴된다면 안 되기 때문이다.
유일한 보상은 의인들이 부활할 때(14절) 주님께서 주실 것이다.
이때 인간은 자기 자신의 양심과 행동의 무상성을 되찾게 된다.
그때의 행위가 겸손을 통해 위대하게 된다.
둘째로는 이 무상성 외에도 가난한 이들, 버림받은 이들을 소외시키고 있는 사회 속에서
바로 그들에게 특별한 관심이 있기 때문이다.
이것을 우리가 너무 간과해오고 있지 않았나 한다.
가난한 사람, 불구자, 절름발이, 소경, 이들은 바로 소외당하고 있는 사람들을 말하며,
오늘날에는 노인, 기형아, 지체장애인, 마약중독자, 감옥에 갇힌 이, 난민들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들에게 특별한 관심을 쏟는 것도 겸손의 행위이며 마지막 자리를 택하는 행위이다.
그러한 행위를 통해서 우리는 윗자리에 오르라는 초대를 받을 것이다.
집회서의 지혜의 가르침도 복음과 같은 내용을 가르치고 있다.
“네가 높아질수록 자신을 더욱 낮추어라.
그러면 주님 앞에서 총애를 받으리라.
정녕 주님의 권능은 크시고, 겸손한 이들을 통하여 영광을 받으신다.”(집회 3,18.20).
이제 하느님 앞에 자신을 스스로 낮출 수 있고 겸손한 자세로
주님 앞에 사는 우리의 모습이 진정 그리스도를 닮는 것이 될 것이며,
겸손한 자세로 더욱 사회에서 소외된 사람들에게 특별한 관심으로 대하며,
사랑을 나눌 수 있을 때, 그에 대한 풍성한 갚음을 주님께서 주신다는 것을 믿고 바라며
사랑하며 살아갈 수 있도록 노력하여야 할 것이다.
서공석 요한 세례자 신부
복음서들은 예수님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며 하느님의 가치관을 따라 사셨습니다.
우리도 그분으로부터 배워서 하느님의 자녀 되어 살라고 복음서들은 가르칩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복음에는 예수님이 바리사이파 어느 지도자의 집 식탁에 앉아 계십니다.
그날 초대받은 다른 사람들이 윗자리에 앉으려고 신경 쓰는 것을 보고,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누가 너를 혼인 잔치에 초대하거든 윗자리에 앉지 마라.’
그리고 예수님은 교훈 하나를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
예수님은 식탁에 앉은 이들을 둘러보십니다.
그들은 모두 사회적, 경제적 수준이 집주인과 비슷한 사람들입니다.
오늘은 그들이 초대를 받았지만, 그들은 후일 언젠가 집주인을 초대할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관행입니다.
결혼식에 축의금이나 장례식에 조의금을 낼 때, 우리는 婚主나 喪主로부터 과거에 받았던 것,
혹은 후에 우리가 받을 것을 고려하여 액수를 정합니다.
사람을 초대하는 사람은 언젠가 어떤 방식으로 되돌려 받을 것을 염두에 둡니다.
우리는 그렇게 모든 일에 인과응보의 질서를 존중합니다.
잔치에서는 윗자리가 좋고 남에게 베풀 때는 그만큼 되돌려 받을 것을 기대하는 것은
우리가 당연시하는 우리 세상의 질서입니다.
예수님은 그런 질서에 이의를 제기하십니다.
높은 자리를 탐내지 말고, 낮은 자리를 차지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사람을 잔치에 초대할 때는 되받을 생각을 하지 말고,
그냥 베푸는 잔치가 되도록 하라고도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가난한 이들과 소외된 이들을 초대하고,
그들에게 베풀어서 그들이 행복한 우리 이웃이 되게 하라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당연시하는 우리의 관행과 예수님이 권하는 실천 사이에는 어떤 차이가 있습니다.
우리는 자신을 중심으로 생각하고, 우리 자신이 소중합니다.
이웃은 우리에게 도움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 자신이 대우를 받고, 우리 자신이 손해를 보지 않아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 자신을 과대 포장하여 우리 자신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드러냅니다.
우리는 또한 우리 자신이 베푼 만큼 되돌려 받아야 한다고도 생각합니다.
그것이 손해 보지 않고 현명하게 사는 우리의 생활방식입니다.
우리는 이웃의 사정을 고려하는 데에는 인색합니다.
우리는 우물 안의 개구리와 같이 우리 자신만을 확대해서 보려 합니다.
예수님의 삶과 가르침에 나타나는 하느님 자녀의 행동 방식은 다릅니다.
우리 자신을 중심에 두고 생각하는 우리의 관행과는 대조적으로,
예수님은 아버지이신 하느님을 중심으로 생각하십니다.
하느님은 당신 스스로를 드러내거나 높이지 않으십니다.
예수님은 그런 하느님의 아들로 사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이 자비롭고 사랑하는 분이라고 믿었고,
그분의 자비와 사랑을 우리가 배워 실천하여, 그분의 자녀가 되어 살라고 가르쳤습니다.
자비와 사랑은 우리 자신을 우선적으로 생각하게 하지 않습니다.
자비롭고 사랑하는 사람은 이웃의 입장에서 이웃을 보고 그를 이해하며 보살핍니다.
하느님이 당신 스스로를 드러내고 높이시면, 인간은 소신껏 살 수가 없을 것입니다.
하느님이 원하시는 일을 위해 우리는 전전긍긍하고 노심초사하며,
그분의 노예, 혹은 그분을 위한 기쁨조가 되어 살 것입니다.
굶주린 배를 움켜쥐고도 오로지 ’지도자 동지‘를 위해
모든 것을 하는 북한 동포들과 같이 될 것입니다.
사람 하나가 자기 스스로를 과대포장 하여도
주변 사람들이 모두 그렇게 비참하게 되는데,
하느님이 당신 스스로의 영광을 찾으시면,
우리에게는 자유도, 소신도 있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사람이 아닐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대들은 나의 벗”(요한 15,14)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벗은 벗을 자유롭게 해주고 그에게 무엇을 강요하지 않습니다.
하느님이 스스로를 낮추셔서 세상에는 자연 질서라는 것이 있습니다.
계절 따라 자연은 변하고, 계절의 아름다움은 우리를 감동시킵니다.
자유로룬 인간이 실천하는 사랑이 있어서 우리에게는 감동이 있습니다.
감동과 행복은 자유로운 인간에게만 가능합니다.
순종을 요구하면서 인간의 자유를 짓밟는 일은 오늘 어떤 명분으로도 정당화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이 가르친 삶에는 스스로를 낮추고 베푸는 하느님이 그 중심에 살아계십니다.
스스로를 낮추고 베푸는 마음이 참으로 자유로운 마음입니다.
높은 자리를 탐하고, 이웃을 지배하고 순종시키겠다는 마음은
자유로운 인간이 하는 일이 아닙니다.
그것은 이웃은 굴복시켜야 하는 대상으로만 생각하는 맹수가 하는 일입니다.
우리가 더 높은 지위와 더 많은 재산을 갖기 위해 무자비하게 달렸을 때,
우리에게 남는 것은 씁쓸함과 살벌함입니다.
하느님을 외면하고, 생명들을 짓밟고 죽여버린, 씁쓸함입니다.
우리는 가진 이에게는 관대하고, 못 가진 이에게는 인색합니다.
생색이 나는 일에는 관대하고, 생색이 나지 않는 일에는 인색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신앙도 나 한 사람 잘되는 데에 도움을 주는 길이라고 흔히 생각합니다.
우리는 돈을 바치는 이를 좋아하고, 바친만큼 은혜를 베푸신다고 착각합니다.
성령의 힘으로 병을 고친다는 사람들도 돈을 바쳐야 하느님이 더 잘 고쳐주신다고 흔히 말합니다.
많이 바치면, 많이 치유된다고도 말합니다.
어느 특정의 곳에 가서 헌금하고 기도하면, 많은 은혜를 받을 수 있다고 말하는 어리석음도 있습니다.
모두가 利害打算 하는 우리를 중심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에수님이 가르친 질서는 그런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자기 자신만을 소중히 생각하는 근성에서 해방된 자유를 가르쳤습니다.
자유는 우리가 한 번 깨달아서, 쉽게 실천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실패를 무릅쓰며 우리가 배워야 하는 자유입니다.
자기 스스로를 낮추는 일도, 되돌려 받지 않고 베푸는 일도,
많은 실패를 겪고 우리가 실천할 수 있는 질서입니다.
나 자신을 높이고 과시하고 싶은 마음, 준 만큼 받아내고 싶은 마음은
우리의 살과 피 안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새로운 삶과 새로운 피가 예수님으로부터 우리 안으로 흘러들어야 합니다.
그분의 말씀과 실천이 우리를 비추어야 하고,
예수님의 몸과 피에 참여하게 하는 성체성사가 우리를 움직여야 합니다.
그리스도 신앙의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배워서
하느님의 자유로운 자녀가 되는 데에 있습니다.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