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종교를 가지고 있지 않다는 얘기를 전회(前回)에서 밝혔다. 그러나 불교(佛敎)의 불경(佛經)은 종교가 아닌 일종의 학(學) 혹은 과학이라는 차원(次元)에서 지금도 보고 있다.
1970년도쯤 집사람도 부산으로 전근, 정착한 후 그의 권유로 서도(書道)를 배우기 시작했다. 그의 학교에 후에 대통령상을 받은 서예가(書藝家)가 있었는데 아마도 그 영향이 아닌가 싶다. 그것이 계속되어 틈만 나면 서실(書室)에 나가고 승선 중에도 독학으로 계속했다. 올바른 필법(筆法)도 제대로 익히기 전에 욕심만 늘어 유명한 일본 동경의 청아당(淸雅堂)에서 법첩(法帖)과 필묵(筆墨)에 적잖은 투자를 하기도 했다.
차츰 서력(書歷)이 쌓여감에 따라 서체(書體)도 그렇지만 문장(文章)에 대한 호기심도 만만치 않았기에 도대체 이들 한문글이 무슨 뜻일까 하고 겁도 없이 해석해본다고 대들었다. 그 버릇은 지금도 계속하고 있다.
그래서 만학(晩學)으로 들어간 대학도 중어중문학과(中語中文學科)를 택했다. 새삼 깊이 생각하지 않았다. 이제와서 뭣을 전공할 것인가는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다. 승선 중에도 열심히 했고 하선 중에도 부지런히 다녔던 서예학원에서 느꼈던 것. 경서(經書)나 한시(漢詩) 등에 대한 의문을 풀어보고자 해서였다. 사실 경서나 한시 등은 어려운 것이다. 그나마 사범학교 시절 한문(漢文)을 배웠기 때문에 겨우 가능했다. 한국의 번역서(飜譯書)를 봐도 어떻게 이 한자(漢字)가 그런 뜻을 갖는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스스로 가방끈이 짧다는 것은 깨닫지도 못하고…. 같은 내용의 일본번역본을 사보니 조금 나았다. 즉, 중국은 글자 한 자[一字]가 역사의 큰 사건 하나를 지칭하는 것이 많이 있었다.
오리엔테이션이 있던 날, 서울에서 온 젊은 교수들을 만났다. 들어보니 난감했다. 내가 생각했던 中文(중문) 즉 한문(漢文)과는 전혀 다른 내용이었다. 소위 백화문(白話文: 중국의 당, 송, 원, 명, 청시대를 거치면서 확립된 구어체)이었다. 손을 들고 질문을 했다. 사실은 ‘이러이러해서 왔는데…’ 했더니 그것은 3학년이 되면 배운다고 했다. 이미 등록금은 냈으니 시작을 했다.
이렇게 해서 만난 것이 불경(佛經)의 하나인 ‘반야심경(般若心經)’이었다. 서실(書室)에서는 유명한 경(經)이라 하여 너도나도 병풍 한 폭 쓰기를 원했고, 나도 쥐뿔도 모르면서 만들어 지금도 고향에서 막내 아우가 명절이나 기제사 때 사용하고 있지만, 도대체가 해석이 안 되었다. ‘반야바라밀다(般若波羅蜜多)’라는 말 자체가 산스크리트 원어(原語)의 한자발음이라는 것을 알기까지 숱한 세월을 시행착오와 오기(傲氣)로 버틴 셈이다. 불교를 조금도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 한문글만 보고 덤볐으니 마치 돌아가는 풍차를 보고 칼을 빼던 동키호테 격이었다.
겨우 뜻을 알고 난 다음에 부딪친 것이 ‘공(空)’이라는 말이었다. 소위 불교의 핵심인 공사상(空思想)이다. 「색불이공(色不異空) 공불이색(空不異色) 색즉시공(色卽是空) 공즉시색(空卽是色)」, (색은 공과 다르지 아니하고 공은 색과 다르지 않아 색이 즉 공이요 공이 즉 색이다) 색(色)은 분명히 보이고 잡히는 물체라고 하면서 어째서 아무것도 없는 공(空)이라 하는가? 공(空)을 아무것도 없는 것 즉 텅 빈 것이라고 했다. 도(道)가 높다는 큰 스님들의 해설을 들어봐도 종교적이지 과학적이지는 못했다. 마치 무슨 말장난 같다는 느낌도 들었다. 과학과 종교를 같은 차원에서 본다는 것은 맞지 않을지 모르겠으나 종교를 갖지 않은 입장임을 감안한다면 이해가 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 가운데서 스님이 아닌, 대학 철학과 최O석 교수의 해설이 가장 마음에 들었다. “모든 물체(色)를 분해하면 본무자성(本無自性: 스스로 존재하는 본성이 없다)이 된다. 이것을 한 글자로 압축한 것이 공(空)이라 한다.”는 애길 듣고, 아아! 그렇구나 하는 겨우 깨우침을 얻었지만 그 이상의 해석은 알지 못했다. 모든 물질은 명색(名色)으로 존재한다 했다. 예를 들면 늘 곁에 두고 사용하는 계산기는 ‘계산기’라는 이름[명]과 계산할 수 있는 기능을 가진 모양[계산기]으로 존재한다. 그런데 이것을 분해하면 수천 개의 부품들이 되어 버리나 그 부품속에는 계산기라는 이름도 없어지고 본래의 계산하는 기능도 없어진다는 것이다. 계산기를 이루는 수천가지의 부속품이 설계도에 따라 합해졌을 때 비로소 “계산기”인 것이다.
그래도 시원한 느낌은 아니었지만 거기까지였다. 공(空: empty, vanity)이란 말은 불경(佛經)에만 있는 것이 아니고 기독교 성경(聖經)의 구약[傳導書]에도 나온다. 그렇다면 이 공(空)사상은 다른 종교에서도 사용해왔다는 의미도 되리라.
한데 국제로타리 회원으로 있을 때 많은 가르침을 얻었던 일본인 총재 田中(다나카: 의학박사)씨와의 교류 중 눈에 번쩍 뜨이는 자료를 보았다. 중간자(中間子) 이론으로 노벨 물리학상을 받은 일본 교토대학의 유카와 히데키(湯川秀樹) 박사의 에세이 속에 『노벨상을 받은 중간자 이론의 힌트는 「반야심경(般若心經)」에 있는 ‘색즉시공(色卽是空)’에서 얻었으며 이것으로 현대 물리학이 훌륭하게 설명될 수 있다.』라는 말이 그것이었다.
현대 물리학은 중간자 이론이 전환점이 되어, 오늘날의 소립자론으로 발전해 온 것이라고 하는데, 그것이 반야심경의 ‘공(空)’과 멋지게 일치한다는 것이다.
원자핵 내부에서 양성자나 중성자를 서로 결합시키는 강한 상호작용의 매체가 되는 중간자의 존재를 유카와 박사가 1935년에 이론적으로 예언했는데, 1947년에 영국 물리학자 세실 파월이 파이 중간자를 발견함으로써 유카와 이론의 옮음이 증명되었고, 이로써 1949년 일본인 최초로 노벨물리학상을 수상했다. 유카와 박사가 노벨상을 수상한 것은 2차대전 직후의 일이었다. 패전(敗戰)으로 일본 전체가, 민족으로서의 역사나 문화 모두에 좌절감을 가지고, 그것을 포기한 상태일 때, 노벨상, 그것도 물리학 수상이라는 빛나는 업적은 많은 일본인에게 다시 큰 희망을 주었음은 틀림없다.
‘일본 우주개발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항공공학과 우주공학자인 이토카와 히데오(糸川英夫)씨의 『반야심경과 최신 우주론』이라는 저서가 있는데, 이 책 중에도 「일본 최초의 노벨상 수상자인 유카와 박사가 '노벨상'을 받은 중간자 이론의 힌트는 '반야심경'에 적혀있다네요. 색즉시공에 의해 현대 물리학을 훌륭하게 설명할 수 있습니다. 게다가 오늘날은 실험적으로 증명되고 있지요.」라고 말하는 구절이 있다고 한다. 이 책을 구하고자 했으나 이미 절판이라 구할 수가 없었던 것이 안타까웠다.
600권이나 된다는 대반야경을 제목까지 합쳐 불과 270자로 압축한 ‘반야심경’은 기발하면서도 어려운 일임에도 이러한 착상을 한 무명의 대천재(大天才: 석가모니)가 수천 년 후에 우주물리학이 이렇게 밝혀낼 것임을 알고 쓴 것일까? 아님은 확실하다. 위대한 발견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그것이 일치한다는 것은 도대체 어떻게 해석하면 좋을 것인가? 그것은 반야심경도 인간이 쓴 것이고, 현대 물리학도 결국은 인간이 찾은 것이기 때문에, 인간의 지적활동 범위를 벗어나지 않는다. 다만 물리학이라든지 종교라든지 철학이라고 하는 것들이 따로따로 있는 것이 아니고, 철저하게 규명해 들어가면 결국 뿌리가 같아진다는 이치가 아닌가 싶다.
「물질은 진공과 다르지 않고, 진공은 물질과 다르지 않다」라고 하는 것은, 정말로 기이하게도 이 경전이 쓰여져 수 세기를 지나고 나서, 양자론이라는 인간의 방법으로 생각한 원리와 완전히 일치했다는 것이다. 이 「색즉시공 공즉시색」이란 현대의 물리학에서 확실히 증명되고 있는 원리라는 것이다.
양자역학(量子力學)에 의하면, 모든 물질은 눈에 보이지 않은 아주 작은 입자(粒子)로 되어 있으며, 그 입자들이 어떤 법칙에 따라 결합하면, 그 입자가 진공 속에서 눈에 보이고 손에 잡히는 물질로 변하고, 그 법칙이 끊어지면 물질의 속성도 없어지게 된다는 것이다. 입자 상태로 공중에 떠다니는 상태를 공(空)이라 본 것이라 생각된다.
즉 모든 물질은 작은 입자들이 결합하여 형성된 것이다. 이럴테면 물은 ‘H2O(에이치투오)’ 즉 수소 2개와 산소 1개로 어떤 법칙에 따라 결합되어 있다. 이 결합이 끊어지지 않게 유지시켜 주는 것이 중간자이며, 불교에서는 이를 ‘연기(緣起)’와 ‘인연(因緣)’이라는 표현으로 나타난 것이 아닌가 하는 것이다. “이것이 있기 때문에 저것이 있고, 이것이 생겨나기 때문에 저것이 일어나며, 이것이 없으면 저것도 없고 이것이 없어지기에 저것도 없어진다.”는 연기법은 진리이고 과학이라는 데 전적으로 공감한다. ‘H2O’의 관계도 끊어지면 물은 없어지지만 ‘H’와 ‘O’는 입자로 되어 우주 속으로 되돌아간다.
그러고 보면 우리 인간도 우주의 진공에서 태어나는 것이다. 결국 내 자신이라는 존재도 원래는 비어 있는 것처럼 보이는 우주의 진공 속의 입자였었고 거기로부터 어떤 인연으로 생겨나온 일시적인 모습에 불과하다. 언젠가 그 인연(중간자)이 끊어지면 원래 생겨나온 진공으로 한줌의 티끌이 되어 우주의 저편으로 날아갈 뿐이라는 것이 된다. 죽음이라는 것은 ‘공’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원래의 공이라는 곳에 들어가 진공 상태가 되는 것은 완전한 소멸이 아닌가 싶다. 이것이 물질로서의 죽음의 상태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진공 속에 숨어 있다가 어느 때 또 다른 인연 덕분에 다시 다른 물질로 나타날 수도 있다는 생각이다.
그렇다면 「죽음이란 무엇인가?」 「죽은 후 어떻게 되는 것인가?」라는 문제를 명확하게 이해할 수 있어 마음이 편안해지는 것 같기도 하다. 나에게 반야심경이 얘기하는 '색즉시공 공즉시색'은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었지만, 이것이 단순한 설(說)이 아니고, 물리학적으로 증명된 극히 정교한 과학이라는 것이라는 것을 알고 나도 모르게 눈을 뜬 셈이다.
지금도 아내 송하는 늘 옆에 법화경(法華經)이라는 경(經)을 두고 한 자 한 자 정성스레 적어나가기도 하고 읽기도 하는데, 가끔 핀잔을 주곤 한다. “그 뜻도 모르는 거, 읽고 적어 뭐하는데?”하면서…. 그러나 그 속에는 단순한 가르침이 아닌 위대한 과학적 원리가 들어있다는 생각으로 ‘나도 종교로서 한 번 믿어볼까’ 하는 마음이 생기기도 하지만 작금의 종교들이 너무 ‘기복(祈福)’ 신앙쪽으로 흘러 가는 것 같기도 해서 머뭇거리고만 있다. 그러나 대승불교의 진수를 담고 있다는 ‘반야심경(般若心經)’은 잠들기 전 꼭 한 번씩 외우다 잠드는 습관은 공(空)의 의미를 확실히 알고 난 다음부터였다. 또 석암(石庵)도사의 넋두리가 아닌가 싶어 죄송스럽다. |
첫댓글 공수특전단 낙하산 투하 시범 조교로 99회 시범을 무사고로 마치고 월남전에 백마부대 소대장으로 참전한 둘째 동생을 위하여 부처님께 생환을 빌러 어머님이 불교를 믿으셨는데 부처님의 가호로 무사히 귀국하였습니다. 스님의 권유로 고기를 먹지 않은 어머님은 일흔 여섯에 돌아가셨습니다. 제 생각에 단백질 부족이 원인인 것 같습니다. 둘째 동생은 몇 년 전에 고엽제 후유증으로 고생했습니다. 불교를 믿으신 어머님을 따라 목동 법안정사에 다니고 불교에 대한 설법도 듣고 불교에 관한 책을 읽고 반야심경(마하반야바라밀다심경, 摩訶般若波羅蜜多心經, 260자)을 외우고, 묘범연화경(법화경)도 큰아들 장인이 주셔서 매일 잠자기전에 읽어 11번을 읽었으나 아직도 불교의 믿음이 부족한지 깨닫지 못 하고 있습니다. 반야심경을 그냥 외워서는 안 되고 한 자 한 자 그 의미를 알아야 한다고 불교 포교사 자격증을 가진 서울대를 졸업한 동기가 조언을 해 주었습니다. 오늘 석암(石庵)서완수 선배님의 해설이 가슴에 와 닿습니다. 위 글을 공유합니다.
석암 자네가 편집한 글 한자도 빠틀이지 않고 읽어면서 어쩌면 나와 똑같은 생각으로 살았을까 신기하게 생각했다네
나 또한 종교 관심이 없어면서도 반야심경에 매혹되어 불교신자도 아니면서 불교는 과학이요, 철학이며, 문학적인 종교라고
아는척 하다가보니 한 때 전공군 불교신도회 회장을 했다니까요. 각 전투비행단 법당은 교회,성당처럼 주일예배 의무도 없으니
언제던지 불안한 마음이 생기면 법당을 찾아와 부처님께 향을 올리고 3배올리면서 차분하게 안정을 찾고난 후에 비행에 임하도록
독려하기도 했습니다. 석암 정말 자네는 대단한 사람일세 자네의 글을 접할 때마다 큰 감명을 받는다네. 감사합니다.
선배님, 감사합니다. 선배님과 생각이 같다니 제가 더 영광스럽슴다. 법문도 가끔하셨겠네요? 삼배 올리면서 안정된 마음으로 비행에 임하도록 하신 것, 참 좋은 일 하셨습니다. 모든 인간은 원래부터 종교적이란 생각을 합니다. 고맙습니다. 건강하십시요. 부산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