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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혼 털리고도 자존 지키며 당당한 조민과 이재명
강미숙/시민소셜칼럼니스트
얼마 전 가까운 지인이, 예전엔 부모로부터 네가 안 나서면 나라가 안 돌아가냐, 적당히 하라는 타박을 들었는데 이젠 자식에게 적당히 하시라는 걱정을 듣는다며 혀를 찼다. 생각해보니 그렇다. 후쿠시마 핵폐수 무단 투기에 가장 분노하는 세대도, 이재명 민주당 대표의 구속 여부에 대한 질문에 부당하다는 응답이 가장 많은 연령대도 4050이었으니, 사회의 중추적 역할을 하는 이 세대의 현실인식은 다른 세대에 비해 진보적이거나 관심이 많은 세대라 할 수 있겠다. 에코 챔버 효과이기도 하겠지만 기성세대가 주로 이용하는 SNS인 페이스북에서도 나라 걱정, 숨가쁜 정치현실에 한숨 짓는 목소리가 꽤 높은 비중을 차지한다.
그러나 어떤 시절도 격양가를 부르며 편안한 날은 없었다. 또 그래서도 안 되는 것이니 이는 민주공화국에 사는 시민의 숙명 같은 것일 게다. 최근 굵직한 사건들이 많았다. 최강욱 의원의 의원직 상실. 윤미향 의원 2심 징역형, 박원순 다큐영화 상영금지 가처분신청 인용, 이재명 민주당 대표 체포동의안에 대한 대통령 재가 및 국회 가결과 이에 따른 구속영장실질심사. 그리고 자질에 앞서 극우발언을 서슴지 않는 국무위원 후보자들의 배설물 같은 말들, 이외에도 수면 아래서 조용히 진행되고 있을 많은 국가적 결정들.
차가운 이성으로 연대를 모색하는 시민들
총선을 6개월 앞두고 있는 최근 여의도발 뉴스는 각각의 사안마다 며칠씩 포털을 도배했을 중량급이지만 시민들에게 가 닿지 않는다. 예민하게 찾아보지 않으면 세상은 놀라우리만치 평온하다. 이것이 권위적인 정부가 바라는, 주권은 있으되 행사하지는 않는 세상이다. 주권 행사를 불온시하고 표현의 자유를 직간접적으로 억압하며 표본을 정해 공포와 증오를 조장하는 것, 이로써 그들이 얻는 것은 조용한 세상이다. 하지만 늘 그래왔듯 세상은 바다를 포기하지 않는 강물처럼 자각한 시민들의 목소리로 바뀌어왔고 그 힘으로 균형점을 잡는다.
비통한 마음으로 탄식하던 시민들은 이재명 대표 체포동의안 가결을 지켜보며 뜨거운 분노에서 차가운 이성으로 자세를 고쳐 앉기 시작했다. 긴 호흡으로 멀리 가기 위해서라도 차이를 확인하는 것은 중요하다. 전술적 제휴가 어렵다면 손절하는 것이 최선이다. 일찍이 현실적 역량을 확인한 시민들은 절망을 연료삼아 할 수 있는 일을 함으로써 자신을 지킨다. 화가들은 그림을 그리고 시민들은 응원이 필요한 곳들을 찾아다니며 힘을 보태는 동시에 견딜힘을 얻는다. 그것이 연대가 주는 선물이다.
또 시민들은 이동순 시인의 ‘홍범도 장군의 절규’라는 문학작품을 혐오딱지를 붙여 무단 삭제한 페이스북 코리아의 도를 넘는 검열과 표현의 자유 탄압에 개천절 하루 ‘접속거부’라는 자발적 시민불복종운동을 전개한다. 권리와 자존을 지키기 위한 투쟁이다. 시민들의 자유로운 표현에 납득할 수 있는 설명도 없이 마구잡이로 삭제하고 계정 접근을 차단하는 것은 권위주의와 이윤을 신성시하는 자본의 만남을 의심할 수밖에 없다. 그렇지 않다면 낯선 이들과 자유로운 소통을 통해 사회적 정치적 유대를 쌓고 시민적 덕성을 배우는 공론의 장에서 삭제와 계정차단과 같은 비상식적인 일들이 일어날 수는 없는 것이다.
‘공공’이라는 뜻의 public은 poblicus라는 라틴어에서 유래했고 라틴어 pubes(어른)은 ‘타인을 돌보다, 나의 행동이 타인에게 어떤 영향을 주는지 이해할 수 있는 성숙함’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그러니 공적인 삶이란 자신을 돌보고 타인을 돌볼 준비가 된 사람들의 활동무대이자 방식이라는 것이다. 자신의 삶을 결정짓는 정치나 사회적 의제에 관심을 갖고 안 갖고는 취향의 문제가 아니라 어른이 되는 전제조건이니, 고대에 완전히 사적인 것만 아는 사람을 바보를 뜻하는 idiot의 어원인 idiotes라 불렀다는 것도 매우 의미심장하다. 정치에 무관심하고 공적인 삶을 도외시하는 개인을 바보, 멍청이로 보았다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공동체의 운명이 곧 자신의 운명과 직결되어 있음을 모르는 것만큼 어리석은 것은 없다는 의미일 것이다.
김장하에게서 본 어른다움, 조민에게서도 보다
그러니 사적 이익보다 공공의 가치를 중시하는 것, 이해관계를 앞세우기보다 한 번이라도 더 자신을 들여다보는 이른바 ‘검토하는 삶’이야말로 공화국의 시민으로서 요구받는 태도라 하겠다. ‘어른은 어른다워야 한다’는 말도 이와 같은 함의를 지닌 것이다. 지난해 <어른 김장하>라는 다큐멘터리가 많은 이들에게 큰 울림을 준 것은 ‘어떻게 살 것인가’, ‘어떤 사람으로 살 것인가’라는 질문을 개개인에게 던져주었기 때문이다. 누구도 그 질문으로부터 지유롭지 않다는 것, 그 누구도 지금 가진 것이 온전히 자신의 힘만으로 얻어진 것이 아님을 행동으로 보여주는 이가 어른 김장하다.
최근 한 청년이 펴낸 책을 읽은 많은 분들이 그녀가 바로 어른이었다며 오히려 위로받았다고 말했다. 바로 조국 전 장관의 딸 조민 씨다. 그녀의 책도, 그 책을 접한 시민들의 한결같은 반응도 매우 흥미롭다. 이 시대, 공적 삶을 살 자격을 갖춘 어른이란 물리적 시간이 만드는 게 아님을 보여주는 청년 조민은 이렇게 독백한다.
“어떤 때는 파도를 거슬러 헤쳐 나갈 테고 또 어떤 때는 파도에 몸을 싣고 부유하기를 즐길 것입니다. 그러다 보면 언젠가는 파도든 폭풍이든 그 무엇에도 휩쓸리지 않은 채 나의 속도에 맞춰 나의 흐름을 찾아 오롯이 나로서 빛날 날이 오겠지요. 그래서 저는 저 자신을 찾으려 오늘, 지금, 이 순간에도 한 걸음씩 나아갑니다.”
더 이상 사회가 정하고 요구하는 학력이나 자격증이 아닌 자신 스스로 기준이 될 것임을 선언하는 청년이야말로 우리 교육이 나아갈 방향이 아닐까. 성실한 땀과 노력, 그 시간들이 납득할 수 없는 이유로 삭제당하는 아픔은 일찍이 없었던 종류의 고통일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산산히 부서진 마음을 공적인 삶을 통해 담담하게 받아들인다. 자신을 추스리고 운명을 받아들임으로써 오히려 자유로워지는, 아모르 파티(Amor Fati)가 무엇인지 보여준다. 위로하려는 이들이 오히려 위로받는 것은 지옥에서 헤매던 이가 스스로 빛을 내기 시작했음이며 위로나 연민보다는 격려와 연대가 힘이 된다는 것을 알아차렸기 때문이다. 그래서 부끄럽고 미안하지만 응원하고 격려함으로써 서로가 위로받는 것이다.
오늘 이재명 민주당 대표에 대한 구속영장 실질심사가 초미의 관심사다. 이재명은 소년공으로 노동자의 정체성을 가진 경험이 있고, 가난을 이기기 위해 악착같이 공부해 변호사가 되었음에도 재능을 자신의 안온한 삶이 아니라 사회적 약자들이 좀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는 세상을 위해 쓰겠다고 정치에 입문했다. 행정가로서의 능력은 검증받았지만 1% 차이로 대통령선거에서 고배를 마셨다. 바로 이 점 때문에 집요한 보복수사를 받고 있는 것이다.
조민, 이재명.
영혼 털리고도 자존 지키며 당당한 조민과 이재명
이 싸움에서 버티고 있는 것만으로도 이재명은 자신의 가치를 증명하고 있다. 대장동으로 안 되니 백현동으로, 누가 봐도 범죄자로 만들어 조리돌림하려는 의도가 뻔한데 도주 우려가 없는 제1야당 대표의 구속영장을 내준다면 사법부의 권위는 회복하기 어려울 것이다. 국민 절반의 지지를 얻고도 1% 차로 낙선한 야당대표, 나아가 가장 유력한 차기 대선 주자를 정치적으로 탄압하는 것에 부역하는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잡초처럼 살아온 이재명은 죽이려 할수록 살아날 것이고 그 과정에서 소년공, 행정가의 이미지에서 비로소 정치가로 우뚝 서게 될 것이다.
조민과 이재명. 이들의 공통점은 권력을 사유화한 이들에게 영혼이 털리고도 거리낄 것이 없기에 여전히 자존을 지키며 당당하다는 점이다. 청년이 그린 책표지 그림을 보면 자신이 서 있는 위치를 전지적 관점에서 보고 있고 이제는 파도를 두려워하지 않고 그 파도에 유연하게 올라타겠다고 말한다. 그 속에서 자기 속도를 찾아 중단없이 나아가겠다고 한다. 그리고 이재명 대표도 “강물은 굽이쳐도 결국 바다로 흘러갔다”며 “어떤 고통도 역경도 마다하지 않겠다, 사즉생의 각오로 국민항쟁의 맨 앞에 서겠다” 의지를 다졌다. 구속 여부와 관계없이 자신의 길을 가겠다는 선언이며 이제부터 그의 시간이 시작된 것이다.
자신의 삶을 대상화하여 볼 줄 아는 이에게 위기는 또다른 기회다. 조민은 ‘의사’라는 정해진 길에서 벗어나 어쩌면 ‘자유’롭게 더 큰 날개를 펼 수 있는 기회를 얻었고 정부와 언론에 철저하게 외면당해온 이재명 대표 입장에서 자신의 체포동의안 표결은 모든 국민 앞에 자신의 정치적 입장을 명확하게 밝힘으로써 새로운 길을 연 기회였다. 위기에 무너지지 않고 오히려 기회로 삼는 이들이 가진 공통점은 ‘생에 대한 사랑’이다.
권력자들의 ‘추석상’ 앞에서 분노 키우며 혜안 찾아나갈 어른들
파시즘에 저항하는 지하운동에 참여했다 아우슈비츠로 강제 이송되었던 프리모 레비는 수용소 생활을 기록한 <이것이 인간인가>에서 “우리는 처음으로 우리의 언어로는 이런 모욕, 이와 같은 인간의 몰락을 표현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며 저들이 우리를 동물로 격하시키고자 하는 의도에 맞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노예처럼 하라는 대로 할지라도 그들에게 동의하지 않는 것이라고 했다. 그것은 규율을 따르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에 대한 존중과 쓰러지지 않고 살아남기 위함이라고 말이다.
그렇다. 조민도 이재명도 쓰러지지 않기 위해 자신을 곧추세우고 주어진 길을 묵묵히 가고 있다. 곧 명절이다. 검찰권력으로 국가를 영구히 장악하려는 이들은 추석상에 오를 안주를 만드느라 바쁘지만 국민들은 조용히, 냉정한 분노를 키우며 혜안을 찾아나갈 것이다. 그것이 공적인 삶을 사는 사람이라는 뜻의 ‘어른’이니까 말이다. 후쿠시마 핵폐수 방류로 차례상에 수산물을 올리는 것도 망설여야 하고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아라 하는 추석에 시금치 한 단 마음 편히 집을 수 없는 게 현실이다. 하지만 가족 모두 한 상에 둘러앉을 수 있다는 것에 감사하고 상식과 공적인 삶이 무엇인지 곱씹어볼 수 있는, 마음만은 넉넉하고 풍요한 추석을 맞을 것이다. 그리고 명절이어서 가족의 빈자리에 더욱 가슴이 미어질 가정에 위로와 연대의 마음을 전한다.
출처 : ‘어른’으로 산다는 것 < 강미숙의 궁리 < 민들레 광장 < 기사본문 - 세상을 바꾸는 시민언론 민들레 (mindle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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