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은 지와 내 글 / 이용미
이 통 것은 좀 나을까? 조심스레 꺼내서 반으로 잘라 줄기와 잎을 반대로 놓은 뒤 같은 길이로 잘라 가지런히 담은 뒤 한 쪽 집어 맛을 보지만, 아니다. 이것도 아니다. 싱거운 것도 같고 짠 것도 같고, 젓갈이나 배추, 고춧가루 냄새도 없이 씁쓰레한 담배냄새가 날 뿐이다. 원인도 모른 채 고민을 한다.
손톱 길이로 자른 김치조각은 가루와 버물려 적당량 기름 두른 프라이팬에 노릇노릇 부쳐낸다. 그 반죽에 돼지고기를 갈아 넣거나 오징어를 다져 넣으면 색다른 맛의 김치전이 된다. 비싸지 않은 부위 돼지고기 듬성듬성 썰어 고추장양념에 조물대서 볶다가 고기와 어울릴 손가락 길이정도 김치를 썰어 넣으면 또 그만한 찌개가 없다.
맛있던 김치에서 군내가 난다싶으면 한번 씻어서 슴슴하게 푼 된장에 멸치 한줌 넣어 포기 채 푹 지져 쭉쭉 찢어 밥에 얹으면 바로 밥도둑이 된다. 그 뿐인가. 쫑쫑 썬 김치와 한소끔 끓인 김치콩나물국은 술국으로도 그만이다.
그런 주연과 조연의 김치를 위해 늦가을 부지런을 떨어 김장이란 것을 한다. 나이 들어감에 따라 이젠 힘에 부치기도 하고 먹을 입이 줄어드니 담그는 양도 줄어들지만 그 연례행사를 거를 수는 없다. 포기 채 사다가 자르고 소금 간해서 엎고 뒤집고 밤을 새우며 간을 맞출 필요는 없어졌지만, 배달된 절임배추에 준비된 양념을 발라 통을 채우기 전 상전인 아들딸에게 보낼 진상품 고르는 게 먼저다. 적당한 크기와 알맞게 절여진 상태의 배추를 골라 우리 것 보다 조금 싱겁게 정성을 다해 한 장 한 장에 붉은 옷을 입힌다. 그런 과정을 똑같이 겪은 것들인데 이 쓴맛의 원인은 대체 뭘까.
일상에서 수시로 부딪는 사람과 사물과의 관계에서 확 당겨오는 격한 감정, 때로는 가랑비 스며들 듯 다가오는 감동이 있다. 그럴 때면 상황 따라 휴대폰이나 메모지에 끼적였다가 컴퓨터에 옮길 때 털어내기도 하고 덧붙이기도 하면서 엮어내는 것이 내 글이다. 의지가지 엮은 글은 내놓기 부끄럽고 이 정도 밖에 안 되면서 글을 쓰겠다고 용을 쓰는 이유를 생각하며 맥 빠져 네 손발을 죽 펼쳐 누워버린다. 그게 일상이 되어버렸다. 머리로는 써야한다는 의무와 욕망이 가득하건만, 머리에서 생각하는 단어도 문장도 어디론가 깡그리 도망을 갔거나 어딘가에 숨어서 머리카락 한 올 보이지 않게 싸매져 있는 것 같다. 마음 따라 몸도 따라가는지 그 반대인지 몸과 마음이 척척 죽이 맞는다.
하루 종일, 아니 이틀 사흘도 자판 한 번 두드리지 않고 지날 때가 태반이다. 누군가 쫒아오듯, 당장 옆에서 내 하는 일을 지켜보며 채근하고 나무라는 것 같지만, 그까짓 것 깔아뭉개거나 무시하는 것은 일도 아니다. 어제 그랬고 오늘도 마찬가지 내일이라고 다를 게 없으리라.
쓰디쓴 묵은 지와 다를 게 뭐 있으랴. 원인 모르는 쓴 김치와 게으른 내 글쓰기의 다름일 뿐이지.
아프다는 것은 엄살이고 핑계다. 두 손이 없는 사람이 발가락으로 쓰기도 하고 병상일기를 보면 금방 숨이 넘어가는 고통 속에서도 쉬지 않고 작업을 하는 사람들도 많지 않은가. 코로나가 사람을 참 나태하고 무심하게 만드는 것이라는 좋은 핑계를 대며 조금 편안한 곳으로 피해보려는 마음 안쪽에는 그것을 나무라며 달래는 또 다른 내가 있기도 하다.
안쪽에서 꺼내본 김치도 보기만 그럴듯할 뿐, 가뜩이나 달아나 있는 입맛에 먹고 싶은 마음은 조금도 일지 않아 결단을 내렸다. 두 통 꽉꽉 채워진 김치를 꺼낸 뒤 큰 비닐봉투 두 개에 꾹꾹 눌러 담았다. 그냥 버리려는 마음속으로 김장할 때의 수고와 먹는 음식 함부로 하는 죄책감과 함께 솜씨 좋은 누군가를 만나면 색다른 찬으로 거듭날 수도 있지 않을까? 간단한 이유를 써서 음식물통 옆에 내놓았다. 얼마 안 있어 혹시나 싶어 베란다에서 바라보니 금방 사라져버렸다.
혹여 어설픈 내 글도 고개 끄덕이며 읽어주는 누군가가 있지 않을까. 혹 모를 누군가를 생각하며 힘들어도 귀찮아도 쓰는 것을 아예 멈추지는 말자고, 갑자기 두근거림으로 달아오르는 얼굴을 두 손으로 감쌌다.
[이용미] 수필가. 《수필과 비평》 등단.
전북문협, 진안문협, 전북수필, 행촌수필.
행촌수필, 수필과비평 회장 역임
* 《그 사람》 《창밖의 여자》외
* 행촌수필문학상, 진안문학상, 전북수필문학상 외
김치의 변신은 무죄죠. 묵은지만큼이나 다양하게 활용할 식재료가 흔치 않죠? 갖가지 부재료를 섞어도 다 받아들여 하나로 어울리게 하는 속 깊은 김치.
작가는 글줄이 시원스레 진행되지 않고 머뭇거리는 이유를 자신의 게으름의 소치로 진단합니다. 머리로는 써야겠는데, 갖은 핑계 대며 편히 지내온 탓에 글줄이 탁탁 막히잖아요. 공감합니다. 이 글을 읽고 저도 반성합니다. 게으름과 핑계를 멀리해야 되겠네요. 활용도 높은 묵은지의 좋은 점을 닮은 묵직하고 감동적인 글을 쓰도록 함께 파이팅 합시다.~~